【惠持】 (337-412) 又作慧持 東晉僧 雁門樓煩(山西房縣)人 俗姓賈 爲廬山慧遠之弟 年十八與兄同依止道安出家 遍學三藏 竝及外典 後與兄共入廬山 因故曾至京師建康(南京) 住東安寺 頗見重於晉衛軍瑯琊王司馬珣 時僧伽羅叉善誦四阿含 王乃請出中阿含 令師特爲校文詳定 後還山 講說法華經阿毘曇論 晉隆安三年(399) 聞巴蜀有峨嵋之勝 意欲觀瞻 遂西行至成都 止龍淵精舍 大弘佛法 慕其德者 皆望風推服 有升堂者 號登龍門 義熙八年示寂 壽七十六 [梁高僧傳六 釋氏稽古略一 釋氏通鑑三 佛祖統紀二十六 同二十七] ▲明覺語錄六 送中座主入廣 船主船中寄惠持 雲霞無跡共依依 海山見說多嘉賞 莫便因循忘却歸
혜지(惠持) (337-412) 또 혜지(慧持)로 지음. 동진승(東晉僧). 안문 누번(산서 방현) 사람이며 속성은 가(賈)며 여산 혜원(慧遠)의 동생. 나이 18에 형과 함께 도안(道安)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3장(藏)과 아울러 외전까지 두루 학습했음. 후에 형과 함께 여산에 들어가다가 연고로 인해 일찍이 경사 건강(建康; 남경)에 이르러 동안사에 주(住)했는데 자못 진위군(晉衛軍) 낭야왕 사마순에게 현중(見重; 중시됨을 받음)되었음. 때에 승가라차(僧伽羅叉)가 4아함을 잘 외웠는데 왕이 이에 중아함(中阿含)을 청출(請出)했고 스님으로 하여금 특별히 교문(校文)하여 상정(詳定)하게 했음. 후에 환산(還山)하여 법화경과 아비담론(阿毘曇論)을 강설했음. 진 융안 3년(399) 파촉(巴蜀)에 아미(峨嵋)의 승경(勝景)이 있다 함을 듣고 뜻에 관첨(觀瞻)하고 싶었고 드디어 서행(西行)하여 성도(成都)에 이르러 용연정사에 머물면서 불법을 대홍(大弘)했음. 그의 덕을 흠모하는 자가 모두 망풍(望風)하며 추복(推服)했고 승당(升堂)함이 있는 자는 호를 등용문(登龍門)이라 했음. 의희 8년 시적했고 나이는 76 [양고승전6. 석씨계고략1. 석씨통감3. 불조통기26, 동27]. ▲명각어록6. 송중좌주입광(送中座主入廣) 선주(船主)가 선중(船中)에서 혜지(惠持)에게 기탁하나니/ 운하(雲霞)는 자취가 없고 함께 의의(依依)한다/ 해산(海山)에 가상(嘉賞)이 많다고 설함을 보았으니/ 곧 인순(因循)하며 돌아옴을 망각하지 말아라.
【慧持】 見惠持
혜지(慧持) 혜지(惠持)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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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智】 吳越忠懿王賜宋代法眼宗僧希辯的號 詳見希辯
혜지(慧智) 오월(吳越) 충의왕이 송대 법안종승 희변에게 준 호. 상세한 것은 희변(希辯)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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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芝】 淸代臨濟宗僧 字三目 忠州(重慶忠縣)劉氏 落髮本郡東明 參聚雲吹萬廣眞 眞示以本色鉗錘 力究數年 徹明心要 初總院事 後充西堂 眞著源流唱和歌付之 出住聚雲 遷萬松 [續燈正統十七]
혜지(慧芝) 청대 임제종승. 자는 삼목이며 충주(중경 충현) 유씨. 본군(本郡) 동명에서 낙발(落髮)했고 취운 취만광진(吹萬廣眞)을 참했는데 광진이 본색겸추(本色鉗錘)를 보이자 역구(力究)하기 몇 해에 심요를 철명(徹明)했음. 처음은 원사(院事)를 거느렸고 후에 서당(西堂)에 충임(充任)되었음. 광진이 원류창화가(源流唱和歌)를 지어 그에게 부촉했음. 출세해 취운에 거주하다가 만송으로 옮겼음 [속등정통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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