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龍四家語錄】 宋代惠泉編集 收錄臨濟宗黃龍派四位禪師的語錄 依次爲黃龍慧南禪師語錄 慧南法嗣寶覺祖心禪師語錄 祖心法嗣死心悟新禪師語錄 悟新法嗣超宗慧方禪師語錄 編者惠泉與超宗慧方屬同門 卷首有宋紹興十一年(1141)錢密撰寫的序 收入續藏經
황룡사가어록(黃龍四家語錄) 송대 혜천(惠泉)이 편집했음. 임제종 황룡파 4위 선사의 어록을 수록했음. 차례에 의하면 황룡혜남선사어록ㆍ혜남의 법사 보각조심선사어록ㆍ조심의 법사 사심오신선사어록ㆍ오신의 법사 초종혜방선사어록이 됨. 편자 혜천과 초종혜방은 동문에 속함. 권수에 송 소흥 11년(1141) 전밀이 찬사(撰寫)한 서가 있음. 속장경에 수입(收入)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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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龍山】 又稱輔山 位於江西修水縣西 相傳山頂有一黃龍 能呼風喚雨 故稱黃龍山 唐代誨機開山 宋代慧南嘗住此廣弘禪法 成立黃龍派 其後祖心 悟新 惟淸 智明 德逢 道震 法忠等相繼住此 宗風頗盛 歷時一百五十餘年 法統始告衰絶 山中有黃龍院 一名永安寺 今存有慧南祖心二師之塔 [禪林僧寶傳二十二 同二十九 古今圖書集成職方典第八四八]
황룡산(黃龍山) 또 명칭이 보산(輔山)이니 강서 수수현 서쪽에 위치함. 상전(相傳)하기를 산정에 한 마리의 황룡이 있어 능히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른지라(呼風喚雨) 고로 명칭이 황룡산임. 당대(唐代) 회기(誨機)가 개산했음. 송대 혜남(慧南)이 일찍이 여기에 거주하면서 선법을 광홍(廣弘)했고 황룡파를 성립했음. 그 후 조심(祖心)ㆍ오신(悟新)ㆍ유청(惟淸)ㆍ지명(智明)ㆍ덕봉(德逢)ㆍ도진(道震)ㆍ법충(法忠) 등이 상계(相繼)하여 여기에 거주했고 종풍이 자못 흥성했으며 150여 년의 시절을 경력하자 법통이 비로소 쇠절(衰絶)을 고했음. 산중에 황룡원이 있으며 일명이 영안사며 지금 혜남과 조심 두 스님의 탑이 존재함 [선림승보전22, 동29. 고금도서집성직방전제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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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龍三關】 黃龍 黃龍慧南 禪苑蒙求中 黃龍三關 (會元十七)黃龍室中常問僧曰 人人盡有生緣 上座生緣在何處 正當問答交鋒 却復伸手曰 我手何似佛手 又問諸方參請宗師所得 却復垂脚曰 我脚何似驢脚 三十餘年示此三問 學者莫有契其旨 脫有酧者 師未甞可否 斂目危坐 人莫測其意 延之又問其故 師云 已過關者掉臂徑往 安知有關吏 問可否此未透關者也 叢林目之爲黃龍三關 ▲虛堂語錄四 如汾陽十智同眞 浮山九帶 黃龍三關 如國家兵器 不得已也 初無實義
황룡삼관(黃龍三關) 황룡은 황룡혜남. 선원몽구중. 황룡삼관(黃龍三關) (회원17) 황룡이 실중(室中)에서 늘 중에게 물어 가로되 사람마다 모두 생연(生緣)이 있나니 상좌의 생연은 어느 곳에 있느냐. 바로 문답하며 교봉(交鋒)함을 당해 도리어 다시 손을 내밀고(伸手) 가로되 내 손이 어찌하여 불수(佛手)와 같으냐(我手何似佛手). 또 제방에 종사를 참청(參請)하여 얻은 바를 묻고는 도리어 다시 다리를 내리고(垂脚) 가로되 내 다리가 어찌하여 나귀 다리와 같으냐(我脚何似驢脚). 30여 년을 이 세 질문을 보였는데 학자가 그 지취에 계합하는 이가 있지 않았다. 혹시(脫) 응수(應酧)하는 자가 있어도 스님이 일찍이 가(可)타 부(否)타 하지 않았고 눈을 감고(斂目) 위좌(危坐; 正坐)했다. 사람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이어서 또 그 연고를 묻자 스님이 이르되 이미 관문(關門)을 통과한 자는 팔을 흔들며 바로 가리니 어찌 관리(關吏)가 있음을 알리오. 가부(可否)를 묻는다면 이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자다. 총림에서 이를 명목해 황룡삼관이라 했다. ▲허당어록4. 예컨대(如) 분양의 십지동진(十智同眞)ㆍ부산구대(浮山九帶)ㆍ황룡삼관(黃龍三關)은 국가의 병기(兵器)와 같아서 부득이(不得已)함이며 애초에 실의(實義)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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