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76칙 수시 본칙 평창

태화당 2021. 8. 27. 09:52

垂示云 細如米末 冷似氷霜 畐塞乾坤 離明絕暗 低低處觀之有餘 高高處平之不足 把住放行 總在這裏許 還有出身處也無 試擧看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작기()로는 미말(米末; 쌀가루)과 같으며 차기()로는 빙상(氷霜)과 같아 건곤에 복색(畐塞; 가득 참)하되 밝음도 여의고 어둠도 끊어졌다. 낮고 낮은 곳에는 이를 보매 나머지가 있고 높고 높은 곳에는 그것을 평평히 하매 부족한지라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이 모두 저리허(這裏許; 이 속. 는 처소를 가리킴)에 있나니 도리어 출신할 곳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시험삼아 들어보아라(擧看).

 

七六*丹霞問僧 甚處來正是不可總沒來處也 要知來處也不難 僧云 山下來著草鞋入爾肚裏過也 只是不會 言中有響 *諳含來 知他是黃是綠 霞云 喫飯了也未第一杓惡水澆 何必定盤星要知端的 僧云 喫飯了果然撞著箇露柱 却被旁人穿却鼻孔 元來是箇無孔鐵鎚 霞云 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麽雖然是倚勢欺人 也是據款結案 當時好掀倒禪床 無端作什麽 僧無語果然走不得 這僧若是作家 向他道 與和尙眼一般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麽不具眼也只道得一半 通身是遍身是 一刀兩段 一手擡一手搦 福云 施者受者二俱瞎漢據令而行 一句道盡 罕遇其人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瞎否識甚好惡 猶自未肯 討什麽碗 福云 道我瞎得麽兩箇俱是草裏漢 龍頭蛇尾 當時待他道盡其機來 還成瞎否 只向他道瞎 也只道得一半 一等是作家 爲什麽前不搆村後不迭店

 

丹霞; 丹霞天然 天然(739-824) 唐代僧 鄧州(今屬河南)人 石頭希遷法嗣 初習儒業 後遇禪僧而悟 投南嶽石頭希遷門下 服役三年 剃髮受戒 尋謁江西馬大師 受天然之法號 居天台華頂峰三年 更往徑山參拜國一禪師 其後 大振禪風於南陽丹霞山 長慶四年示寂 壽八十六 敕諡智通禪師 [宋高僧傳十一 傳燈錄十四 五燈會元五]

諳含; 三支比量義鈔云 言諳含者 諳 知也 卽意許義 謂意中自許 不發於言 謂之諳含

 

七六()하다. 단하(*丹霞)가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바로 이, 가히 다 온 곳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지니 온 곳을 알고자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다. 중이 이르되 산 아래에서 옵니다. 짚신을 신고() 너의 뱃속(肚裏)에 들어가 지나가되 다만 이 알지 못한다. 언중(言中)에 음향이 있다. 암함래(*諳含)로다. 그가 이 누런지 푸른지 알겠다. 단하가 묻되 밥을 먹었느냐, 아니냐. 첫 번째 구기()의 더러운 물로 뿌렸다. 하필이면 정반성(定盤星)으로 단적(端的)을 알려고 하는가. 중이 이르되 밥을 먹었습니다. 과연 저() 노주(露柱)를 당착(撞著)한지라 도리어 옆 사람(단하)에게 콧구멍을 뚫려버림을 입었다. 원래 이것(是箇)은 무공철추(無孔鐵鎚). 단하가 묻되 밥을 가져와서 너에게 주어 먹게 한 사람은 도리어 눈을 갖췄느냐. 비록 그러히 이는 권세에 기대어 사람을 속임이지만 또한 이는 거관결안(據款結案)이다. 당시에 좋게 선상을 번쩍 들어 엎었어야 하지만 무단(無端)이니 무엇하리오. 중이 말이 없었따. 과연 도주함을 얻지 못하는구나. 이 중이 만약 이 작가였다면 그를 향해 말하되 화상의 눈과 더불어 한 가지입니다 했으리라. 장경(長慶; 慧稜)이 보복(保福; 從展)에게 묻되 밥을 가져다 사람에게 주어 먹게 했다면 보은할 분한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눈을 갖추지 못했는가. 또한 다만 하나에 반을 도득(道得)했으니 통신(通身)도 옳고 편신(遍身)도 옳다. 일도양단(一刀兩段; 일도로 근원을 끊음)이다. 한 손은 들어 올리고 한 손은 눌렀다. 보복이 이르되 시자(施者)와 수자(受者)가 둘 다 할한(瞎漢)이다. 거령(據令)하여 행한지라 1구로 말해 다하니 그런 사람을 드물게 만난다. 장경이 이르되 그 기()를 다해 오더라도 도리어 할한(瞎漢)을 이루는가. 무슨 호오(好惡)를 알리오. 오히려 스스로도 긍정치 않으면서 무슨 사발을 찾는가. 보복이 이르되 나를 눈 멀었다고 말함을 얻겠는가. 두 개가 모두 이 초리한(草裏漢)이다. 용두사미다. 당시에 그가 말하되 그 기()를 다해 오더라도 도리어 눈 멂을 이루는가 함을 기다렸다가 다만 그를 향해 말하되 눈 멀었다 하리라. 또한 다만 하나에 반을 도득(道得)했다. 일등(一等; 一樣 평등) 이 작가거늘 무엇 때문에 앞으로는 촌을 만나지 못하고 뒤로는 가게를 바꾸지 못하는가.

 

丹霞; 단하천연임. 천연(天然) (739-824) 당대승. 등주(鄧州; 지금 하남에 속함) 사람이며 석두희천(石頭希遷)의 법사(法嗣). 처음은 유업(儒業)을 익혔으며 뒤에 선승을 만나 깨닫고 남악(南嶽) 석두희천의 문하(門下)에 투신하여 3년을 복역(服役)하고서 머리 깎고 수계했음. 이윽고 강서(江西) 마대사(馬大師)를 알현(謁見)해 천연(天然)이란 법호(法號)를 받았음. 천태(天台) 화정봉(華頂峰)3년을 거주하고 다시 경산(徑山)에 가서 국일선사(國一禪師)를 참배했음. 그 후 남양(南陽) 단하산(丹霞山)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고 장경(長慶) 4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86이며 칙시(敕諡)가 지통선사(智通禪師) [송고승전11. 전등록14. 오등회원5].

諳含; 삼지비량의초에 이르되 말한 암함(諳含)이란 것은 암()은 지()니 곧 뜻에 허락함의 뜻이다. 이르자면 뜻 중에 스스로 허락하지만 말을 발하지 않음을 일러 암함이라 한다.

 

*鄧州丹霞天然禪師 不知何許人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 偶一禪客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霞云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才見馬大師 以兩手托*幞頭脚 馬師顧視云 吾非汝師 南嶽石頭處去 遽抵南嶽 還以前意投之 石頭云 著*槽廠去 師禮謝 入行者堂 隨衆作務 凡三年 石頭一日告衆云 來日剗佛殿前草 至來日 大衆各備鍬鋤剗草 丹霞獨以盆盛水淨頭 於師前跪膝 石頭見而笑之 便與剃髮 又爲說戒 丹霞掩耳而出 便往江西 再謁馬祖 未參禮 便去僧堂內 騎*聖僧頸而坐 時大衆驚愕 急報馬祖 祖躬入堂 視之曰 我子天然 霞便下禮拜曰 謝師賜法號 因名天然 他古人天然 如此穎脫 所謂選官不如選佛也 傳燈錄中載其語句 直是壁立千仞 句句有與人抽釘拔楔底手脚 似問這僧道 什麽處來 僧云 山下來 這僧却不通來處 一如具眼倒去勘主家相似 當時若不是丹霞 也難爲收拾 丹霞却云 喫飯了也未 頭邊總未見得 此是第二回勘他 僧云 喫飯了也 懵懂漢元來不會 霞云 將飯與汝喫底人 還具眼麽 僧無語 丹霞意道 與爾這般漢飯喫 堪作什麽 這僧若是箇漢 試與他一劄 看他如何 雖然如是 丹霞也未放爾在 這僧便*眼眨眨地無語 保福長慶 同在雪峰會下 常擧古人公案商量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麽不具眼 不必盡問公案中事 大綱借此語作話頭 要驗他諦當處 保福云 施者受者二俱瞎漢 快哉 到這裏 只論當機事 家裏有出身之路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瞎否 保福云 道我瞎得麽 保福意謂 我恁麽具眼 與爾道了也 還道我瞎得麽 雖然如是 半合半開 當時若是山僧 等他道盡其機來 還成瞎否 只向他道瞎 可惜許 保福當時 若下得這箇瞎字 免得雪竇許多葛藤 雪竇亦只用此意頌

 

鄧州; 今河南省鄧縣

仁者; 尊稱對方 亦作人者 又單稱仁 孟子盡心章 孟子曰 仁也者人也 合而言之道也

幞頭; 古代一種頭巾 古人以皂絹三尺裹髮 有四帶 二帶系腦後垂之 二帶反系頭上 令曲折附項 故稱四脚 或折上巾 至北周武帝時 裁出脚後幞髮始名幞頭 初用軟帛垂脚 隋始以桐木爲骨子 唐方以羅代繒 帝服則脚上曲 人臣下垂 [百度詞典]

槽廠; 禪門拈頌集第三二則 拈頌說話云 槽廠 劈薪養馬之處 碧巖錄第七十六則種電鈔 槽廠 行者所居 卽碓房也

聖僧; 又作上僧 原指德高望重之僧 後轉指於齋堂上座所安置之聖僧像而言 於禪宗 僧堂中央或安置文殊菩薩 或安置觀音菩薩 賓頭盧 憍陳如 空生 大迦葉 或布袋和尙之像 較普遍者 於僧堂安置僧形之文殊菩薩 稱爲聖僧文殊 又於衆寮堂安置觀音菩薩 後世之聖僧多安置於僧堂 故僧堂又稱聖僧堂 又僧堂中 安置聖僧之佛龕 稱爲聖僧龕 供養聖僧之飯 稱爲聖僧飯 服侍聖僧者 稱爲聖僧侍者(又稱聖侍 侍聖) 聖僧前方之下間 卽進入僧堂後 位於左方之板頭 爲聖僧侍者之板 稱爲聖僧板頭 又稱西堂板頭 [南海寄歸內法傳一 百丈淸規下 象器箋殿堂類靈像類]

眼眨眨地; 形容無可奈何的樣子

 

등주(*鄧州)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姓里未詳). 처음 유학(儒學)을 익혀 장차 장안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응하려고 바야흐로 역려(逆旅; 여인숙)에 숙박하다가 홀연히 백광(白光)이 만실(滿室)함을 꿈꾸었는데 점자(占者)가 가로되 해공지상(解空之祥)이라 하였다. 우연히 한 선객을 만났는데 물어 가로되 인자(*仁者)는 어디로 가는가. 가로되 선관(選官; 官吏로 뽑힘)하러 갑니다. 선객이 가로되 선관(選官)됨이 어찌 선불(選佛; 부처로 뽑힘)됨만 같으리오. 단하가 이르되 선불(選佛)되려면 마땅히 어느 곳으로 가야 합니까. 선객이 가로되 지금 강서에 마대사(馬大師)가 출세했으며 이것이 선불지장(選佛之場)이니 인자(仁者)가 가히 갈지어다. 드디어 바로 강서로 나아가서 겨우 마대사를 보자 두 손으로 복두(*幞頭)의 다리를 밀치니 마사(馬師)가 돌아보고 이르되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남악의 석두처(石頭處)로 가거라. 급히() 남악에 다다라 도리어 전의(前意; 마조가 가리킨 뜻)로써 투지(投之; 사룀)하니 석두가 이르되 조창(*槽廠)에 머물거라(; 니 체류). 스님이 예사(禮謝)하고 행자당(行者堂)에 들어가 대중 따라 작무(作務)하기가 무릇 3년이었다. 석두가 어느 날 고중(告衆)하여 이르되 내일 불전(佛殿) 앞의 풀을 깎아라. 다음 날이 되자() 대중이 각자 가래와 호미를 갖추어 풀을 깎는데 단하는 홀로 동이()에 물을 채워 머리를 세정(洗淨)하고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석두가 보고서 웃으며 곧 체발(剃髮)해 주고 또 설계(說戒)하자 단하가 귀를 막고 나가 곧 강서로 가서 마조를 재알(再謁)하되 참례하지 않고 곧 승당 안으로 가서 성승(*聖僧)의 목을 타고 앉으니 때에 대중이 경악하여 급히 마조에게 알렸다. 마조가 몸소 입당(入堂; 승당에 듦)하여 그것을 보고 가로되 나의 제자 천연(天然)이로구나. 단하가 곧 내려와 예배하고 가로되 스님이 법호(法號)를 내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했으니 인하여 이름이 천연이다. 저 고인인 천연이 이와 같이 영탈(穎脫)했으니 이른 바 선관(選官)됨이 선불(選佛)됨만 같지 못함이다. 전등록 중에 그의 어구(語句)가 실렸는데 바로 이 벽립천인(壁立千仞)이라 구구(句句)마다 사람에게 추정발설(抽釘拔楔)하여 주는 수각(手脚)이 있거니와 이 중에게 물은 것과 흡사하나니 말하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중이 이르되 산 아래에서 옵니다. 이 중이 도리어 온 곳을 통고하지 않고 일여(一如; 마치 흡사) 눈을 갖춘 듯이 하여 거꾸로 가서 주가(主家)를 감험함과 상사하다. 당시에 만약 이 단하가 아니었더라면 또한 수습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단하가 도리어 이르되 밥을 먹었느냐 아니냐 하니 두변(頭邊; 初問初答)에서 다() 보아 얻지 못했으므로 이것은 이 제2회의 그를 감험함이다. 중이 이르되 밥을 먹었습니다 하니 몽동한(懵懂漢)인지라 원래 알지 못했다. 단하가 이르되 밥을 가져다 너에게 주어 먹게 한 사람은 도리어 눈을 갖추었느냐 하니 중이 말이 없었다. 단하의 뜻에 말하되 너와 더불어 이런 종류의 놈들에게 밥을 먹인들 차마 무엇하겠는가 함이다. 이 중이 만약 이 개한(箇漢; 진정한 대장부)이었다면 시험삼아 그(단하)에게 일차(一劄)하여 주어서 그가 어떻게 하는지 보았으리라.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단하는 그를 놓치지() 않음이 있었거늘 이 중은 곧 안잡잡지(*眼眨眨地)에서 말이 없었다. 보복과 장경이 함께 설봉의 회하(會下)에 있으면서 늘 고인의 공안을 들어 상량(商量)했다. 장경이 보복에게 묻되 밥을 가져다가 사람에게 주어 먹게 했다면 보은할 분한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눈을 갖추지 못했는가 하니 공안 중의 일을 다 물음은 불필(不必)하며 대강(大綱) 차어(此語)를 빌려 화두로 삼아서 그(보복)의 체당처(諦當處)를 감험코자 함이다. 보복이 이르되 시자(施者)와 수자(受者)가 둘 다 할한(瞎漢)이다 하니 쾌재(快哉)로다. 이 속에 이르러 다만 당기사(當機事)를 논할진대 가리(家裏)에 출신지로(出身之路)가 있다. 장경이 이르되 그 기()를 다해 오더라도 도리어 눈 멂을 이루는가. 보복이 이르되 나를 눈 멀었다고 말함을 얻겠는가 하니 보복의 뜻에 이르되 내가 이러히 눈을 갖추어 너에게 말해 주었거늘 도리어 나를 눈멀었다고 말함을 얻겠는가 함이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기는 하지만 반합반개(半合半開). 당시에 만약 이 산승이었다면 그가 말하되 그 기()를 다해 오더라도 도리어 눈 멂을 이루는가 함을 기다렸다가 다만 그를 향해 말하되 눈 멀었다 하련마는 가석하다(可惜許). 보복이 당시에 만약 이(這箇) 할자(瞎字)를 하득(下得)했더라면 설두의 허다한 갈등을 면득(免得; 은 조사)했으리라. 설두도 또한 다만 이 뜻(원오의 判語)을 써서 송하되

 

鄧州; 지금의 하남성 등현.

仁者; 상대방의 존칭이니 또한 인자(人者)로 지음. 또 단칭(單稱)이 인(). 맹자 진심장. 맹자가 가로되 인()이란 것은 인()이니 그것을 합해 말하면 도().

幞頭; 고대 1종의 두건. 고인이 3척의 검은 비단으로 머리카락을 쌌는데 4대(; )가 있었으니 2()는 두뇌 뒤에 매어서 드리우고 2대는 두상에 반대로 매었음. 굽게 꺾어지게 해 목에 붙인지라 고로 명칭이 사각(四脚) 혹 절상건(折上巾). 북주(北周) 무제 시에 이르러 각후(脚後)의 복발(幞髮)을 잘라 내었으며 비로소 복두(幞頭)로 이름했음. 처음은 부드러운 비단을 써서 각()을 내렸음. ()에서 비로소 오동나무로 골자(骨子)를 만들었으며 당()에서 비로소 나(; . 비단)로 증(; 비단)을 대체했음. 제복(帝服)은 곧 각상(脚上)이 굽었고 인신(人臣)은 아래로 처졌음 [백도사전].

槽廠; 선문염송집 제320. 염송설화에 이르되 조창(槽廠) 땔감을 쪼개고 말을 기르는 곳이다. 벽암록 제76칙 종전초. 조창(槽廠) 행자가 거주하는 곳이니 곧 대방(碓房)이다.

聖僧; 또 상승(上僧)으로 지음. 원래는 덕이 높고 신망이 두터운 승인을 가리킴이나 후에 전()하여 재당(齋堂) 상좌(上座)에 안치한 바 성승상(聖僧像)을 가리켜 말함임. 선종에선 승당의 중앙에 혹은 문수보살을 안치하거나 혹은 관음보살ㆍ빈두로ㆍ교진여ㆍ공생(空生; 수보리)ㆍ대가섭 혹 포대화상의 상을 안치함. 조금() 보편적인 것은 승당에 승려 형상의 문수보살을 안치하며 일컬어 성승문수(聖僧文殊)라 함. 또 중료당(衆寮堂)엔 관음보살을 안치함. 후세의 성승은 승당에 많이 안치하며 고로 승당을 또 일컬어 성승당(聖僧堂)이라 함. 또 승당 중에 성승을 안치하는 불감(佛龕)을 일컬어 성승감(聖僧龕)이라 하고 성승에게 공양하는 밥을 일컬어 성승반(聖僧飯)이라 하고 성승을 복시(服侍)하는 자를 일컬어 성승시자(또 명칭이 聖侍侍聖)라 함. 성승 전방의 하간(下間)에서 곧 승당에 진입한 후 좌방(左方)에 위치하는 판두(板頭)는 성승시자의 판이 되며 일컬어 성승판두라 하고 또 명칭이 서당판두(西堂板頭)[남해기귀내법전1. 백장청규하. 상기전전당류영상류].

眼眨眨地; 가히 어찌하지 못하는 양자(樣子)를 형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