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92칙 수시 본칙 평창 송 평창

태화당 2021. 8. 28. 08:36

垂示云 動絃別曲 千載難逢 見兔放鷹 一時取俊 總一切語言爲一句 攝大千沙界爲一塵 同死同生 七穿八穴 還有證據者麽 試擧看

 

수시하여 이르되 동현(動絃; 현악기를 켜는 것)의 별곡(別曲)은 천재(千載; 천 년)에 만나기 어렵고 토끼를 보고 매를 놓음은 일시의 준쾌(俊快; )를 취함이다. 일체의 어언(語言)을 묶어() 1구로 삼고 대천사계(大千沙界; 大千世界)를 거두어 1()으로 삼아 동사동생(同死同生)하며 칠천팔혈(七穿八穴)하나니 도리어 증거(證據)할 자가 있느냐, 시험삼아 들어보아라(擧看).

 

九二擧 世尊一日陞座賓主俱失 不是一回漏逗 文殊*白槌云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一子親得 世尊便下座愁人莫向愁人說 說向愁人愁殺人 打鼓弄琵琶 相逢兩會家

 

白槌; 同白椎 祖庭事苑八 白槌 世尊律儀 欲辨佛事 必先秉白 爲穆衆之法也 今宗門白椎 必命知法尊宿以當其任 長老才據座已 而秉白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長老觀機法會 酬唱旣終 復秉白曰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此蓋先德之眞規 皆不失佛意 且見叢林多擧世尊升座文殊白椎 或謂徧閱藏乘 不見其緣 然秉白儀範旣出聖製 復何區區求文殊之說 以恣無益之論耶

 

九二()하다. 세존이 어느 날 승좌(陞座)하시자 빈주(賓主)를 다 잃음이다. 1()만 누두(漏逗; 泄漏)한 게 아니다. 문수가 백추(*白槌)하고 이르되 법왕(法王)의 법을 체관(諦觀; 자세히 봄)하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 1자가 친득했다(一子親得). 세존이 곧 하좌하셨다. 수인(愁人)이 수인을 향해 설하지 말아라, 수인을 향해 설하면 사람을 너무 수심(愁心)케 한다. 북을 치고 비파(琵琶)를 희롱하면서 상봉하니 두 대가(大家; )가 모였다.

 

白槌; 백추(白椎)와 같음. 조정사원8. 백추() 세존의 율의(律儀)는 불사를 분변코자 하면 반드시 먼저 병백(秉白; 羯摩1)함이 대중을 화목하게 하는 법이다. 여금에 종문의 백추(白椎)는 반드시 법을 아는 존숙에게 임명해 그 소임을 충당한다. 장로가 겨우 거좌(據座)한 다음 병백(秉白)하여 이르되 법연(法筵)의 용상중(龍象衆)이여 마땅히 제1()를 보아라. 장로가 법회의 기()를 본다. 수창(酬唱)을 이미 마치면 다시 병백하여 가로되 법왕의 법을 체관(諦觀)하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 이것은 대개 선덕(先德)의 진규(眞規)며 다 불의(佛意)를 잃지 않았다. 또 보니 총림에서 많이들 세존이 승좌하자 문수가 백추(白椎)한 것을 들거니와 혹은 이르기를 장승(藏乘)을 두루 열람했지만 그 인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병백(秉白)의 의범(儀範)이 이미 성제(聖製)에서 나왔거늘 다시 어찌하여 구구(區區)히 문수의 설을 구하여 무익한 논에 맡기리오.

 

世尊未拈花已前 早有這箇消息 始從*鹿野苑 終至*拔提河 幾曾用著金剛王寶劍 當時衆中 若有衲僧氣息底漢 *綽得去 免得他末後拈花 一場*狼藉 世尊良久間 被文殊一拶 便下座 那時也有這箇消息 *釋迦掩室 *淨名杜口 皆似此這箇 則已說了也 如肅宗問忠國師 造無縫塔話 又如外道問佛 不問有言 不問無言之語 看他向上人行履 幾曾入鬼窟裏作活計 有者道 意在默然處 有者道 在良久處 有言明無言底事 無言明有言底事 永嘉道 默時說說時默 總恁麽會 三生六十劫 也未夢見在 爾若便直下承當得去 更不見有凡有聖 是法平等無有高下 日日與三世諸佛 把手共行 後面看雪竇自然見得頌出

 

鹿野苑; 爲釋尊成道後初轉法輪之地 卽今之沙爾那斯 位於今北印度瓦拉那西市以北約六公里處 又譯作仙人鹿野苑 鹿野園 鹿野 鹿苑 仙苑 仙人園 關於地名之由來 諸說紛異 避煩不載

拔提河; 河名 全稱阿利羅拔提河 此云金砂河 佛於此河邊入滅 因而著名

綽得; 脫盡情量直下悟入

狼藉; 狼臥之藉也 散亂之貌

釋迦掩室; 謂如來成道後 三七日間 坐思而不說法也 肇論云 釋迦掩室於摩竭 淨名杜口於毘那 肇論新疏下云 法華說 如來成佛 三七日中 而不說法 智度論七云 佛得道五十七日 不語等 義言掩室也

淨名杜口; 淨名 梵語毘摩羅詰利帝 又作毘摩羅詰 維摩詰 華言無垢稱 淨名 滅垢鳴 爲佛陀之在家弟子 乃中印度毘舍離城之長者 [維摩經義疏一 維摩義記一本 玄應音義八] 祖庭事苑一 毘耶杜口 梵云毘耶離 此言廣嚴 維摩所居之城 杜 閉也 維摩入不二法門品曰 文殊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時維摩詰默然無言 文殊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세존이 염화(拈花)하시지 아니한 이전에 벌써 이(這箇) 소식이 있었나니 처음 녹야원(*鹿野苑)으로 좇아 마침인 발제하(*拔提河)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일찍이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을 용착(用著; 은 조사)하셨던가. 당시에 중중(衆中)에 만약 납승의 기식(氣息)이 있는 자가 있어 작득(*綽得)하여 갔더라면 그(; 세존), 말후에 염화(拈花)하여 한바탕 낭자(*狼藉)함을 면득(免得; 은 조사)했으리라. 세존이 양구(良久)하시는 사이에 문수의 1()을 입어 문득 하좌하셨으니 그때(那時)에 또한 이(這箇) 소식이 있었으며 석가의 엄실(*釋迦掩室)과 정명의 두구(*淨名杜口)가 모두 이 저개(這箇; 良久)와 흡사하니 곧 이미 설해 마친 것이다. 숙종(肅宗)이 충국사에게 물은 무봉탑 조성의 화(造無縫塔話)와 같으며 또 외도가 불타에게 물은 유언(有言)을 묻지 않으며 무언(無言)을 묻지 않는다 한 말과 같나니 저 향상인(向上人)의 행리(行履)를 보건대 어찌() 일찍이 귀굴(鬼窟) 속에 들어가 활계(活計)를 지으리오. 어떤 자는 말하되 뜻이 묵연(默然)한 곳에 있다 하며 어떤 자는 말하되 양구(良久)한 곳에 있다 하여 유언(有言)은 무언(無言)의 일을 밝힘이며 무언은 유언의 일을 밝힘이니 영가(永嘉)도 말하기를(證道歌文) 묵시(默時)가 설()이며 설시(說時)가 묵()이라 했다 하나니 다 이렇게 이회한다면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일지라도 꿈에도 보지 못하여 있으리라. 너희가 만약 곧 직하(直下; 즉각)에 승당(承當)하여 얻어 간다면 다시는 유범유성(有凡有聖; 凡聖이 있음)을 보지 않고 이 법이 평등하므로 고하가 없어 날마다 삼세제불과 더불어 손잡고 함께 다닐지니 후면에서 설두를 보면 자연히 보아 얻으리라. 송해 내되

 

鹿野苑; 석존이 성도한 후에 처음 법륜을 굴린 땅이 됨. 즉금의 사이나사(沙爾那斯; Sārnāth)니 지금의 북인도 와랍나서시(瓦拉那西市; Benares) 이북(以北) 6의 곳에 위치함. 또 번역해 선인녹야원(仙人鹿野苑)ㆍ녹야원(鹿野園)ㆍ녹야(鹿野)ㆍ녹원(鹿苑)ㆍ선원(仙苑)ㆍ선인원(仙人園)으로 지음.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선 여러 설이 분이(紛異)하며 번거로움을 피해 기재하지 않음.

拔提河; 강의 이름. 전칭이 아리라발제하(阿利羅拔提河)니 여기에선 이르되 금사하(金砂河)며 불타가 이 강가에서 입멸한지라 인하여 저명함.

綽得; 정량(情量)을 벗어 없애고 직하에 오입함.

狼藉; 이리가 누운 깔개니 산란한 모양.

釋迦掩室; 이르자면 여래가 성도한 후 삼칠일(三七日; 21) 간 좌사(坐思)하며 설법하지 않았음임. 조론에 이르되 석가가 마갈에서 엄실하고(釋迦掩室於摩竭) 정명이 비야에서 두구했다(淨名杜口於毘那). 조론신소하(肇論新疏下)에 이르되 법화경에서 설하기를 여래가 성불한 지 삼칠일 중에 설법하지 않았다. 지도론7에 이르되 불타가 득도한 지 57일 동안 말하지 않았다는 등이 뜻으로 말하자면 엄실(掩室)이다.

淨名杜口; 정명(淨名)은 범어로 비마라힐리제(毘摩羅詰利帝; vimalakīrti)며 또 비마라힐(毘摩羅詰)ㆍ유마힐(維摩詰)로 지음. 화언(華言)으로 무구칭(無垢稱)ㆍ정명(淨名)ㆍ멸구명(滅垢鳴). 불타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니 곧 중인도 비사리성의 장자임 [유마경의소1. 주유마힐경1. 현응음의8]. 조정사원1. 비야두구(毘耶杜口) 범어로 이르되 비야리(毗耶離; vaiśālī)는 여기에선 말하되 광엄(廣嚴)이니 유마가 거처하는 바의 성(). ()는 닫음(). 유마경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가로되 문수가 유마힐에게 묻되 아등(我等)은 각자 설해 마쳤으니 인자(仁者; 상대의 경칭)가 마땅히 설하십시오. 무엇 등이 이 보살의 입불이법문입니까. 때에 유마힐이 묵연하며 말이 없었다. 문수가 감탄하며 가로되 선재 선재로다 내지 문자와 어언이 있지 않음이 이 참다운 입불이법문이다.

 

列聖叢中作者知莫謗釋迦老子好 還他臨濟德山 千箇萬箇中難得一箇半箇 法王法令不如斯隨他走底 如麻似粟 三頭兩面 灼然能有幾人到這裏 會中若有*仙陀客就中難得伶俐人 文殊不是作家 闍黎定不是 何必文殊下一槌更下一槌又何妨 第二第三槌總不要 當機一句作麽生道 嶮

 

仙陀客; 機靈 機靈者 仙陀 仙陀婆 又作先陀婆 先陀 梵語也 語出涅槃經九 經云 先陀婆者一名四實 一者鹽 二者器 三者水 四者馬 如是四法皆同此名 有智之臣善知此名 若王洗時索先陀婆卽便奉水 若王食時索先陀婆卽便奉鹽 若王食已將欲飮漿索先陀婆卽便奉器 若王欲遊索先陀婆卽便奉馬 如是智臣善解大王四種密語

 

열성(列聖)의 총중(叢中)에 작자가 아나니 석가노자를 비방하지 말아야 좋으리라.. 저 임제와 덕산에게 돌려주어라. 천 개 만 개 중에 한 개 반 개를 얻기 어렵다. 법왕의 법령이 이와 같지 않다 (문수)를 따라 달리는 자가 삼과 같고 좁쌀과 같다. 세 머리에 두 얼굴이다. 작연(灼然)하나니 능히 몇 사람이 이 속에 이름이 있는가. 회중(會中)에 만약 선타객(*仙陀客)이 있었더라면 이 중(就中; , )에 영리한 사람을 얻기 어렵다. 문수도 이 작가가 아니며 사리(闍黎; 설두)도 결정코 이것(작가)이 아니다. 하필이면 문수가 1()를 내리겠는가 다시 1()를 내린들 또 어찌 방애되리오. 제이제삼추(第二第三槌)는 다 필요치 않나니 당기(當機)1구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위험하다.

 

仙陀客; 기령(機靈)ㆍ기령자. 선타는 선타바(仙陀婆)니 또 선타바(先陀婆)ㆍ선타(先陀)로 지음. 범어니 말이 열반경9에 나옴. 경에 이르되 선타바(先陀婆)란 것은 1()4()이니 1자는 소금()이며 2자는 그릇()이며 3자는 물()이며 4자는 말()이다. 이와 같은 4법이 모두 한가지로 이 이름이다. 지혜가 있는 신하는 이 이름을 잘 아나니 만역 왕이 씻으려고 할 때 선타바를 찾으면 바로 곧 물을 바치고 왕이 만약 먹으려고 할 때 선타바를 찾으면 바로 곧 소금을 바치고 만약 왕이 식사를 마치고 장차 음장(飮漿; 漿은 물)하려고 선타바를 찾으면 바로 곧 그릇을 바치고 만약 왕이 유람하려고 선타바를 찾으면 바로 곧 말을 바친다. 이와 같이 지신(智臣)은 대왕의 4종 밀어(密語)를 잘 안다.

 

列聖叢中作者知 靈山八萬大衆 皆是列聖 文殊普賢 乃至彌勒 主伴同會 須是巧中之巧 奇中之奇 方知他落處 雪竇意謂 列聖叢中 無一箇人知有 若有箇作家者 方知不恁麽 何故文殊白槌云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雪竇道 法王法令不如斯 何故如此 當時會中 若有箇漢 頂門具眼 肘後有符 向世尊未陞座已前 覻得破 更何必文殊白槌 涅槃經云 仙陀婆一名四實 一者鹽 二者水 三者器 四者馬 有一智臣 善會四義 王若欲灑洗 要仙陀婆 臣卽奉水 食索奉鹽 食訖奉器飲漿 欲出奉馬 隨意應用無差 灼然須是箇伶俐漢始得 只如僧問香嚴 如何是王索仙陀婆 嚴云 過這邊來 僧過 嚴云 鈍置殺人 又問趙州 如何是王索仙陀婆 州下禪床 曲躬叉手 當時若有箇仙陀婆 向世尊未陞座已前透去 猶較些子 世尊更陞座 便下去 已是不著便了也 那堪文殊更白槌 不妨鈍置 他世尊*一上提唱 且作麽生是鈍置處

 

一上; 一場 一番 上 助詞

 

열성(列聖)의 총중(叢中)에 작자가 아나니 라고 하니 영산(靈山)의 팔만대중(八萬大衆)이 다 이 열성(列聖)이다. 문수보현과 이에 미륵에 이르기까지 주반(主伴)이 함께 모였거니와 반드시 이 교묘 중에 교묘며 기특 중에 기특하여야 비로소 저 낙처를 알리라. 설두의 뜻에 이르되 열성의 총중에 1개도 지유(知有; 향상사가 있음을 알다)하는 이가 없나니 만약 이() 작가가 있다면 바야흐로 이러하지(世尊陞座 文殊白槌) 않음인 줄 알리라 함이니 무슨 연고냐, 문수가 백추하고 이르되 법왕(法王)의 법을 체관(諦觀; 자세히 봄)하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 하매 설두가 말하되 법왕의 법령이 이와 같지 않다 하였다.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은가 하면 당시에 회중에 만약 개한(箇漢; 진정한 대장부)이 있어 정문(頂門; 정수리)에 눈을 갖추고 주후(肘後; 팔꿈치 뒤)에 영부(靈符)가 있었다면 세존이 승좌하지 아니한 이전을 향해 엿보아 깨뜨림을 얻을 것이거늘 다시 하필이면 문수가 백추하리오 함이다. 열반경에 이르되 선타바(仙陀婆)1()4()이니 1()는 소금이며 2자는 물이며 3자는 그릇이며 4자는 말이다. 1지신(智臣)이 있어 4()를 잘 아나니 왕이 만약 쇄세(灑洗)코자 하여 선타바를 요구()하면 신()이 곧 물을 받들며 밥을 찾으면 소금을 바치고 밥 먹기를 마치면 그릇을 바쳐 물(漿)을 마시고 외출하려고 하면 말을 바쳐 뜻에 따라 응용하매 어긋남이 없다 하니 작연(灼然)히 꼭 이는 저() 영리한(伶俐漢)이라야 비로소 옳다. 지여(只如) 중이 향엄(香嚴)에게 묻되 어떤 것이 이 왕이 선타바를 찾음입니까. 향엄이 이르되 이쪽에 이르러() 오너라. 중이 이르자() 향엄이 이르되 사람을 너무 둔치(鈍置; 괴롭히다. 희롱하다)하게 하는구나. 또 조주에게 묻되 어떤 것이 이 왕이 선타바를 찾음입니까. 조주가 선상에서 내려와 몸을 굽혀 차수(叉手)하였다. 당시에 만약 저() 선타바가 있어 세존이 승좌하지 아니한 이전을 향해 투거(透去)했더라면 오히려 조금은 상당했으리라. 세존이 다시 승좌했다가 곧 내려가심도 이미 이는 편의를 얻지 못했거늘(不著便) 어찌 문수의 다시 백추함을 감내하리오, 둔치(鈍置)함에 방애되지 않는다. 저 세존이 일상(*一上) 제창(提唱)하셨거늘 그래 어떤 것이 이 둔치처(鈍置處)인가.

 

一上; 한바탕(一場), 한 번(一番). ()은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