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96칙 본칙 평창 송(泥佛) 평창

태화당 2021. 8. 28. 08:52

九六擧 趙州示衆三轉語道什麽 *三段不同

 

三段不同; 三段之文各異故也

 

九六()하다. 조주가 3전어(轉語)를 시중했다.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3단이 부동하다(*三段不同).

 

三段不同; 3단의 글이 각기 다른 연고임.

 

趙州示此三轉語了 末後却云 眞佛屋裏坐 這一句忒殺郞當 他古人出一隻眼 垂手接人 略借此語 通箇消息 要爲人 爾若一向正令全提 *法堂前草深一丈 雪竇嫌他末後一句漏逗 所以削去 只頌三句 泥佛若渡水 則爛却了也 金佛若渡鑪中 則鎔却了也 木佛若渡火 便燒却了也 有什麽難會 雪竇一百則頌古 計較葛藤 唯此三頌直下有衲僧氣息 只是這頌也不妨難會 爾若透得此三頌 便許爾罷參

 

法堂前草深一丈; 傳燈錄十長沙景岑 我若一向擧揚宗敎 法堂裏須草深一丈

 

조주가 이 3전어(轉語)를 보이고선 말후에 도리어 이르되 진불(眞佛)이 옥리(屋裏)에 앉았다 했는데 이 1구가 낭당(郞當)이 너무 심하다(忒殺). 저 고인(조주)1척의 눈을 내어 수수(垂手)하여 접인(接人)하매 차어(此語; 3전어)를 조금 빌려 저() 소식을 통함은 사람을 위하고자 함이니 그(; 古今宗師)가 만약 한결같이 정령(正令)을 전제(全提)한다면 법당 앞에 풀의 깊이가 1장이리라(*法堂前草深一丈). 설두가 저 말후의 1(眞佛屋裏坐)의 누두(漏逗)를 싫어한지라 소이로 삭거(削去; 삭제)하고 다만 3구를 송했다. 이불(泥佛)이 만약 물을 건넌다면 곧 문드러져버릴(爛却) 것이며 금불(金佛)이 만약 화로 가운데를 건넌다면 곧 녹아버릴 것이며 목불이 만약 불을 건넌다면 곧 타버릴 것이거늘 무슨 알기 어려움이 있으리오만 설두의 1백 칙 송고(頌古)가 계교갈등(計較葛藤)이로되 오직 이 3송은 직하(直下; 즉시)에 납승의 기식(氣息)이 있다. 다만 이 저송(這頌; 이 송)도 알기 어려움에 방애되지 않나니 너희가 만약 이 3송을 투득한다면 곧 너희에게 파참(罷參; 參學事를 마침)을 허락하리라.

 

法堂前草深一丈; 전등록10 장사경잠(長沙景岑). 내가 만약 한결같이 종교(宗敎)를 거양(擧揚)한다면 법당 속에 반드시 풀의 깊이가 1()이리라.

 

泥佛不渡水浸爛鼻孔 無風起浪 神光照天地干他什麽事 見兔放鷹 立雪如未休一人傳虛萬人傳實 將錯就錯 阿誰曾見爾來 何人不雕僞入寺看額 二六時中走上走下是什麽 闍黎便是

 

이불(泥佛)은 물을 건너지 못함이여 콧구멍을 침란(浸爛)한다. 무풍기랑(無風起浪)이다. 신광(神光)이 천지를 비춘다 저 어떤 일에 상간되리오. 토끼를 보고 매를 놓는다. 눈에 서서 쉬지 않음과 같은 것은1인이 허()를 전하매 만 인이 실()을 전한다. 착오를 가지고 착오로 나아간다. 누가 일찍이 그(2)를 상견하고 왔는가. 어떤 사람인들 조위(雕僞)치 못하랴 입사(入寺)하면서 편액(扁額)을 본다. 이륙시 중에 주상주하(走上走下)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사리가 곧 이것이다.

 

泥佛不渡水 神光照天地 這一句頌分明了 且道爲什麽却引神光 二祖初生時 神光燭室亘於霄漢 又一夕*神人現 謂二祖曰 何久于此 汝當得道時至 宜卽南之 二祖以神遇遂名神光 久居*伊洛 博極群書 每嘆曰 孔老之敎*祖述風規 近聞達磨大師住少林 乃往彼晨夕*參扣 達磨端坐面壁 莫聞*誨勵 光自忖曰 昔人求道 *敲骨出髓 *刺血濟飢 *布髮掩泥 *投崖飼虎 古尙若此 我又何如 其年十二月九日夜大雪 二祖立於砌下 遲明積雪過膝 達磨憫之曰 汝立雪於此 當求何事 二祖悲淚曰 惟願慈悲開*甘露門 廣度*群品 達磨曰 諸佛妙道曠劫精勤 難行能行 非忍而忍 豈以小德小智輕心慢心 欲冀*眞乘 無有是處 二祖聞誨勵 向道益切 潛取利刀 自斷左臂 致于達磨前 磨知是法器 遂問曰 汝立雪斷臂 當爲何事 二祖曰 某甲心未安 乞師安心 磨曰 將心來 與汝安 祖曰 覓心了不可得 達磨云 與汝安心竟 後達磨爲易其名曰慧可 後接得三祖燦大師 旣傳法隱於*舒州皖公山 屬*後周武帝破滅佛法沙汰僧 師往來太湖縣司空山 居無常處 積十餘載無人知者 *宣律師*高僧傳 載二祖事不詳 三祖傳云 二祖妙法不傳於世 賴値末後依前悟他當時立雪 所以雪竇道 立雪如未休 何人不雕僞 立雪若未休 *足恭謟詐之人皆效之 一時只成雕僞 則是謟詐之徒也 雪竇頌泥佛不渡水 爲什麽 却引這因緣來用 他參得意根下無一星事 淨裸裸地方頌得如此 五祖尋常敎人看此三頌 豈不見洞山初和尙有頌示衆云 五臺山上雲蒸飯 古佛堂前狗尿天 刹竿頭上煎*䭔子 三箇胡孫夜簸錢 又*杜順和尙道 *懷州牛喫禾 *益州馬腹脹 天下覓醫人 灸猪左膊上 又傅大士頌云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又云 石人機似汝 也解唱*巴歌 汝若似石人 *雪曲應須和 若會得此語 便會他雪竇頌

 

神人; 新華嚴經四十二與菩薩本業經所擧的佛十名之一 又俗稱之神人則多指具有神通力之仙人

伊洛; 亦作伊雒 伊水與洛水 兩水匯流 多連稱 亦指伊洛流域 [百度百科]

祖述風規; 祖 作也 爲也 傳燈錄三 五燈會元一等皆作禮術風規

參扣; 謁見禪師 扣問禪法

誨勵; 訓誨激勵

敲骨出髓; 常啼菩薩求法之故事 大般若經三百九十八 爾時常啼 作是語已 卽申右手 執取利刀 刺己左臂 令出其血 復割右髀 皮肉置地 破骨出髓 與婆羅門 復趣牆邊 欲剖心出

刺血濟飢; 賢愚經二慈力王血施品 王聞是語 甚懷哀傷 卽自放脈 刺身五處 時五夜叉 各自持器 來承血飮

布髮掩泥; 釋迦牟尼于前世曾獻花供養燃燈佛 又見路泥 遂將頭髮鋪于地上 願此然燈如來及聲聞衆 足蹈我身及頭髮上 渡於此泥 燃燈佛于是授記 使釋迦牟尼終而成佛 [佛本行集經三]

投崖飼虎; 金光明經四捨身品 轉復前行見有一虎 適産七日而有七子 圍繞周匝飢餓窮悴 …… 爾時第三王子作是念言 我今捨身時已到矣 …… 卽以乾竹刺頸出血 於高山上投身虎前

甘露; 梵語阿密哩多 譯言甘露 異名天酒 美露 味甘如蜜 天人所食

群品; 卽群生 衆生

眞乘; 眞實之敎法

舒州; 安徽省安慶府懷寧縣的古稱 唐武德四年(621)稱舒州 天寶(742 -7 55)初 稱同安郡 至德(756-757)初 稱盛唐郡 後再稱舒州 舒州有金陵寶誌隱棲處 三祖僧璨所住晥公山山谷寺 白雲守端的白雲山海會寺 投子大同與投子義靑所住投子山等 [大明一統志十四 大淸一通志七十六]

後周武帝破滅佛法沙汰僧; 北周武帝 信納道士張賓與衛元嵩之論 有意廢佛 其時甄鸞道安僧勔靜靄等 曾爲佛敎辯護 建德二年(573) 帝卽下令廢佛道二敎 毁壞經像 竝令沙門道士還俗 僅選名德者一百二十人安置於通道觀 六年 北周滅北齊 其時雖有慧遠排衆抗辯 然武宗仍對北齊之地 行排佛政策 翌年帝崩 佛道二敎始告復興 [佛祖統紀三十八 佛祖歷代通載卷十]

宣律師; 指道宣(596-667) 唐代律僧 又稱南山律師 南山大師 爲南山律宗之祖 浙江吳興人 一說江蘇潤州丹徒人 俗姓錢 字法遍 十六歲出家 從智首法師受具戒 後住於終南山倣掌谷(長安之南) 營建白泉寺 硏究弘宣四分律 其宗派稱南山律宗 曾至各地講說律學 亦參與玄奘之譯場 歷住崇義寺 豐德寺 淨業寺 顯慶三年(658) 奉敕任長安西明寺上座 未久 撰釋門章服儀 釋門歸敬儀等 乾封二年二月 於淨業寺創立戒壇 爲後世建築戒壇之法式 於是年十月入寂 世壽七十二 法臘五十二 諡號澄照 [宋高僧傳十四 大唐內典錄五]

高僧傳; 指續高僧傳; 三十卷 唐代道宣著 又稱唐高僧傳 爲銜接梁之高僧傳 至唐貞觀十九年(645)止 凡一四四年間之僧傳 收於大正藏第五十冊 全書立十科 計本傳四一四人 附傳二一人 然其自序謂正傳三四人 附傳一六人 蓋本書於脫稿後 屢加增補 所載實止於麟德二年(665) 故諸本所錄人數有異同 高麗本中本傳爲四一四人 附傳二一人 舊宋本及宋元明三本則本傳四八九人 附傳二一三人 歷來以本書及宋代贊寧所撰之宋高僧傳三十卷 明代如惺撰大明高僧傳八卷 梁代慧皎撰梁高僧傳十四卷等 合稱四朝高僧傳 [貞元新定釋敎目錄十二 唐書藝文志四十九]

足恭; 亦作足共 過度謙敬 以取媚於人 碧巖錄第九十六則種電鈔 論語公冶長 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孔安國曰 足恭 便僻之貌也 毛氏曰 足 子遇切 私云過也

䭔子; 餠類食品 蜀人號烝餠爲䭔 子 助詞

杜順; (557-640) 華嚴宗初祖 唐代雍州萬年(陝西臨潼縣北)人 俗姓杜 十八歲出家 法號法順 師事因聖寺之僧珍(道珍) 受習定業 後住於終南山 宣揚華嚴敎綱 其言敎多貶抑浮詞 彰顯正理 路見神樹鬼廟必焚除之 唐太宗聞其德風 引入宮內禮遇之 師復遊歷郡國 勸念阿彌陀佛 竝撰五悔文 讚詠淨土 貞觀十四年於南郊義善寺示寂 壽八十四 後人尊爲華嚴宗第一祖 世稱文殊化身 帝心尊者 燉煌菩薩 弟子中以智儼名聲最著 著有華嚴五敎止觀 華嚴法界觀門 十門實相觀 會諸宗別見頌等各一卷 [續高僧傳二十五 華嚴經傳記三 同四 終南山杜順禪師緣起 佛祖統紀二十九 同三十九]

懷州; 今河南省武陟縣西南

益州; 四川省首都 位於成都平野南東 有圜悟克勤道場昭覺寺 釋氏稽古略三云 益州 西川成都府也

又云; 五燈會元六 洛浦元安上堂語云 石人機似汝 也解唱巴歌 汝若似石人 雪曲也應和

巴歌; 祖庭事苑四 巴歌 西漢 注云 巴 巴人也 當高祖初爲漢王 得巴兪人 竝趫揵(疑健)善鬬 與之定三秦滅楚 因存其武樂也 卽今之巴州兪州 宋玉所謂下俚巴歌 國中屬而和者數千人矣

雪曲; 指陽春白雪 祖庭事苑三 陽春白雪 古樂府曲名也 唐顯慶二年(657) 太常上言 禮記家語云 舜彈五絃之琴 歌南風之詩 是知琴操曲弄 皆合於歌 又張華博物志云 白雪 是大帝(黃帝的尊稱)使素女鼓五十絃瑟曲名 又楚大夫宋玉 嘗對楚襄王云 客有歌於郢中者 其始曰下俚巴人 國中屬而和者數千人 其爲陽歌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數十人而已 引商刻羽 雜以流徵 國中屬而和者不過數人 是以唱彌高 其和彌寡也 是知白雪琴曲 本宜合歌 以其調高 人和遂寡 自宋玉之後 未有能和者 五年 呂才造琴歌白雪等曲 製歌辭 編入樂府

 

이불(泥佛)은 물을 건너지 못함이여, 신광(神光)이 천지를 비춘다 하여 이 1구의 송으로 분명히 마쳤거니와 그래 말하라 무엇 때문에 도리어 신광을 인용했는가. 2조가 처음 탄생했을 때 신광이 방을 밝혀() 소한(霄漢; 하늘)에 뻗쳤으며 또 어느 날 밤() 신인(*神人)이 나타나 2조에게 일러 가로되 어찌하여 여기에 오래 머무는가. 네가 마땅히 득도(得道)할 때가 이르렀으니 의당(宜當) 곧 남쪽으로 가라 하였으니 2조가 신우(神遇; 神靈을 만남)하였으므로 드디어 신광(神光)이라고 이름했다. 오랫동안 이락(*伊洛)에 거주하면서 뭇 서적을 박극(博極; 窮究의 뜻)하다가 매번 탄식하여 가로되 공로(孔老)의 교()는 풍규를 조술(*祖述風規)한 것이로다. 요즘 들으니 달마대사가 소림에 머무신다 하더라 하고 곧 거기에 가서 아침 저녁으로 참구(*參扣)하였으되 달마가 단좌면벽(端坐面壁)하는지라 회려(*誨勵)를 듣지 못하자 신광이 스스로 헤아려 가로되 옛 사람은 도를 구하매 고골출수(*敲骨出髓; 뼈를 두드려 골수를 뽑아냄)하고 자혈제기(*刺血濟飢; 는 찌를 자. 곧 피를 내어 주린 이를 구제함)하고 포발엄니(*布髮掩泥; 머리카락을 펴 진흙을 가림)하고 투애사호(*投崖飼虎; 언덕에서 몸을 던져 주린 범의 먹이가 됨)하였으니 옛날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늘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했다. 그 해(梁 中大通甲寅六年534. 宗統編年) 129일 밤에 대설이거늘 2조가 섬돌 아래 섰는데 새벽 무렵(遲明; , 의 뜻)엔 눈이 쌓여 무릎을 지났다. 달마가 그를 가엾이 여겨 가로되 네가 여기에서 눈 속에 선 것은 마땅히 어떤 일을 구함이냐. 2조가 슬프게 눈물 흘리며 가로되 오직 원컨대 자비로 감로문(*甘露)을 여시어 널리 군품(群品; 중생)을 제도하소서. 달마가 가로되 제불의 묘도(妙道)는 광겁(曠劫; 久遠)에 정근(精勤)하여 난행(難行)을 능히 행하며 참지 못할 것을 참아야 하거늘 어찌 소덕소지(小德小智)와 경심만심(輕心慢心)으로 진승(*眞乘)을 바라고자 하는가. 옳은 곳이 있지 않느니라. 2조가 회려(誨勵)를 듣고 도를 향함이 더욱 간절해져 몰래 예리한 칼을 취해 스스로 왼쪽 팔을 절단하여 달마의 앞에 두니() 달마가 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드디어 물어 가로되 네가 눈 속에 서서 팔을 절단함은 마땅히 무슨 일을 위함이냐. 2조가 가로되 모갑이 마음이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시길 비옵니다(). 달마가 가로되 마음을 가지고 오면 너를 편안케 해 주리라(將心來與汝安). 2조가 가로되 마음을 찾았으나 가히 얻지 못하겠습니다(覓心了不可得). 달마가 이르되 너에게 마음을 편안케 해 주길 마쳤노라(與汝安心竟). 뒤에 달마가 그(神光)의 이름을 바꾸어 가로되 혜가(慧可)라 했다. 후에 3조 찬대사(燦大師; 僧璨)를 접득(接得)하여 이미 전법하고는 서주(*舒州) 환공산(皖公山)에 은거하였는데 후주(後周; 北周) 무제가 불법을 파멸하려고 승인(僧人; )을 사태함(*後周武帝破滅佛法沙汰僧)을 당하여(; 當也) 스님이 태호현(太湖縣) 사공산(司空山)으로 왕래하면서 거주에 상처(常處; 常住하는 곳)가 없기를 10여 재()를 쌓으매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선율사(*宣律師)의 고승전(*高僧傳)2조의 일이 실렸으되 상세하지 않고 삼조전(三祖傳)에 이르되 2조의 묘법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다가 다행히 말후에 의전(依前)히 그(혜가), 당시에 입설(立雪)한 것을 깨침을 만났다(말후에 4조가 2조의 立雪玄旨를 깨쳤다는 말) 하였다. 소이로 설두가 말하되 눈에 서서 쉬지 않음과 같은 것은 어떤 사람인들 조위(雕僞)치 못하랴 하니 눈에 서서 이에() 쉬지 않음은 주공첨사(*足恭謟詐)하는 사람이 모두 그것을 본받아 일시에 다만 조위(雕僞)를 이루거니와 곧 이는 첨사(謟詐)의 무리라 함이다. 설두가 이불부도수(泥佛不渡水)를 송하면서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인연을 당겨 와서 쓰는가 하면 그는 참득(參得)하여 의근(意根) 아래에 일성사(一星事; 一點事)도 없는 정나라지(淨裸裸地)이므로 바야흐로 이와 같이 송득(頌得)하였음이니 오조(五祖; 法演)가 심상(尋常)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3송을 간()하게 하였다. 어찌 보지 못하는가, 동산초(洞山初; 守初) 화상이 송이 있어 시중해 이르되 오대산 위에서 구름으로 밥을 찌는데/ 고불당 앞에서 개가 하늘에 오줌 눈다/ 찰간(刹竿)의 꼭대기 위에서 떡(*䭔子)을 지지는데/ 세 개의 호손(胡孫; 원숭이)이 밤에 동전을 까부른다. 또 두순화상(*杜順和尙)이 말하되 회주(*懷州)의 소가 벼를 먹었는데/ 익주(*益州)의 말이 배탈(腹脹)이 났다/ 천하에 의인(醫人)을 찾았더니/ 돼지의 왼쪽 어깨 위에 뜸질하더라. 또 부대사(傅大士)가 송해 이르되 빈손인데 호미를 잡았고/ 보행인데 수우(水牛; 물소)를 탔다/ 사람이 다리 위를 좇아 지나가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더라. 또 이르되(*又云) 석인(石人)의 기()가 너와 같다면/ 또한 파가(*巴歌)도 부를 줄 알리라/ 네가 만약 석인과 같다면/ 설곡(*雪曲)도 또한 응당 화응하리라. 만약 이런 말들을 회득(會得)한다면 곧 저 설두의 송을 이회하리라.

 

神人; 신화엄경42와 보살본업경에 든 바 불타 10()의 하나. 또 속칭의 신인은 곧 다분히 신통을 갖춘 선인(仙人)을 가리킴.

伊洛; 또한 이락(伊雒)으로 지음.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니 두 물이 회류(匯流; 모여 흐름)하는지라 다분히 연칭(連稱). 또한 이락유역(伊洛流域)을 가리킴 [백도백과].

祖述風規; ()는 작()이며 위(). 전등록3ㆍ오등회원1 등에 모두 예술풍규(禮術風規)로 지어졌음.

參扣; 선사를 알현하여 선법을 구문(扣問).

誨勵; 훈회(訓誨)하고 격려(激勵).

敲骨出髓; 상제보살(常啼菩薩)의 구법의 고사(故事)니 대반야경398 이때 상제가 이 말을 짓고는 곧 오른손을 펴 예리한 칼을 가지고 자기의 왼팔을 찔러 그 피가 나오게 하고 다시 오른쪽 넓적다리를 베어 피육(皮肉)을 땅에 놓고 뼈를 깨뜨려 골수를 내어 바라문에게 주었다. 다시 담장 가에 달려가 심장을 쪼개어 내려고 했다.

刺血濟飢; 현우경2 자력왕혈시품(慈力王血施品). 왕이 이 말을 듣고 심히 애상(哀傷)을 품었다. 곧 스스로 방맥(放脈)하여 몸의 다섯 곳을 찔렀다. 때에 다섯 야차가 각기 그릇을 가지고 와서 피를 받아 마셨다.

布髮掩泥; 석가모니가 전세(前世)에 일찍이 연등불(燃燈佛)에게 헌화(獻花)하여 공양했으며 또 길이 진흙임을 보고 드디어 머리카락을 가지고 지상에 펴면서 원컨대 이 연등여래(然燈如來) 및 성문중(聲聞衆)이 나의 몸과 및 머리카락 위를 발로 밟고 이 진흙을 건너십시오 하자 연등불이 이에 수기(授記)하여 석가모니로 하여금 마침내 성불하게 하였음 [불본행집경3].

投崖飼虎; 금광명경4 사신품(捨身品). 더욱더 다시 앞으로 가자 한 범이 있음을 보았다. 마침 출산한 지 7일이며 7()가 있었고 위요주잡(圍繞周匝)하며 기아로 궁췌(窮悴)했다 …… 이때 셋째 왕자가 이 사념을 지어 말하되 내가 이제 몸을 버릴 때가 이미 이르렀다 …… 곧 마른 대로 목을 찔러 피를 내고 높은 산 위에서 범의 앞으로 투신했다.

甘露; 범어 아밀리다(阿密哩多; amṛta)를 번역해 말하면 감로임. 다른 이름은 천주(天酒)ㆍ미로(美露). 맛의 달기가 꿀과 같으며 천인(天人; 천상 사람)이 먹는 것임.

群品; 곧 군생(群生), 중생.

眞乘; 진실한 교법(敎法).

舒州; 안휘성 안경부 회녕현의 고칭. 당 무덕 4(621) 서주(舒州)로 호칭했고 천보(742-755) 초 동안군(同安郡)으로 호칭했고 지덕(756-7 57) 초 성당군으로 호칭했다가 후에 다시 서주(舒州)로 호칭했음. 서주에 금릉 보지의 은서처(隱棲處)3조 승찬이 거주한 바의 환공산 산곡사ㆍ백운수단의 백운산 해회사ㆍ투자대동과 투자의청이 거주한 바의 투자산 등이 있음 [대명일통지14. 대청일통지76].

後周武帝破滅佛法沙汰僧;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도사(道士) 장빈(張賓)과 위원숭(衛元嵩)의 논()을 신납(信納)하고 폐불(廢佛)에 뜻이 있었는데 그때 견란ㆍ도안ㆍ승면ㆍ정애 등이 일찍이 불교를 위해 변호(辯護)했음. 건덕(建德) 2(573) 무제가 곧 하령(下令)해 불도(佛道) 2교를 폐()하고 경상(經像)을 훼괴(毁壞)했으며 아울러 사문(沙門)과 도사(道士)들로 하여금 환속(還俗)케 했는데 겨우 명덕자(名德者) 123인을 선출해 통도관(通道觀)에 안치했음. 6(577)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했음. 그때 비록 혜원(慧遠)이 대중을 밀치고 항변(抗辯)함이 있었으나 그러나 무제가 그대로 북제의 땅에 대해서도 배불정책을 행했음. 다음해에 무제가 붕어(崩御)하자 불도(佛道) 2교가 비로소 부흥을 고()했음 [불조통기38. 불조역대통재권10].

宣律師; 도선(道宣; 596-667)을 가리킴. 당대 율승. 또 호칭이 남산율사(南山律師)ㆍ남산대사(南山大師)니 남산율종의 시조가 됨. 절강 오흥 사람. 일설엔 강소 윤주 단도 사람. 속성은 전이며 자는 법편. 16세에 출가했고 지수법사를 좇아 구계(具戒)를 받았음. 후에 종남산 방장곡(倣掌谷; 장안의 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천사(白泉寺)를 영건(營建)하고 사분율을 연구하며 홍선(弘宣)했음. 그의 종파를 일컬어 남산율종이라 함. 일찍이 각지에 이르러 율학을 강설했으며 또한 현장의 역장(譯場)에 참여하기도 했음. 숭의사ㆍ풍덕사ㆍ정업사를 역주(歷住)했음. 현경 3(658) 칙명을 받들어 장안 서명사의 상좌를 맡았음. 오래지 않아 석문장복의ㆍ석문귀경의 등을 지었음. 건봉 22월 정업사에 계단(戒壇)을 창립했는데 후세에 계단을 건축하는 법식이 되었음. 이 해 10월에 입적했음. 세수 72, 법랍 52. 시호는 징조 [송고승전14. 대당내전록5].

高僧傳; 속고승전(續高僧傳)을 가리킴. 30. 당대 도선(道宣)이 지었음. 또 명칭이 당고승전(唐高僧傳). ()의 고승전을 함접(銜接; 連接)하여 당 정관 19(645)에 이르러 그침. 무릇 144년 간의 승전(僧傳)이니 대정장 제50책에 수록되었음. 전서에 10()를 세웠으며 합계가 본전(本傳)414인이며 부전(附傳)201인임. 그러나 그의 자서에 이르기를 정전(正傳)340인이며 부전이 160인이라 했음. 대개 본서는 탈고(脫稿)한 후에 여러 차례 증보를 가했음. 실린 바가 실로 인덕 2(665)에 그침. 고로 여러 본에 수록된 바의 인수(人數)에 이동(異同)이 있음. 고려본(高麗本) 중에 본전이 414인이 되고 부전이 201인이며 구송본(舊宋本) 및 송ㆍ원ㆍ명 3본은 곧 본전이 489인이며 부전이 213인임. 역래(歷來; 경력해 오다)로 본서 및 송대 찬녕(贊寧)이 지은 바 송고승전 30권ㆍ 명대 여성(如惺)이 지은 대명고승전 8권ㆍ양대(梁代) 혜교(慧皎)가 지은 양고승전 14권 등의 합칭이 사조고승전(四朝高僧傳)[정원신정석교목록12. 당서예문지49]..

足恭; 또한 주공(足共)으로 지음. 과도(過度)한 겸경(謙敬)으로 남에게서 아첨(; 예쁘다. 아첨하다)을 취함. 벽암록 제96칙 종전초. 논어 공야장. 공자가 가로되 교언(巧言)ㆍ영색(令色)ㆍ주공(足恭)은 좌구명(左丘明)이 그것을 수치로 여겼다. ()도 또한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 공안국이 가로되 주공(足恭)은 편벽(便僻)한 모양이다. 모씨(毛氏)가 가로되 주()는 자우절(子遇切; )이다. 사운(私云; 개인의 생각으로 말함)하되 과(; 지나침).

䭔子; 떡 종류의 식품이니 촉인(蜀人)은 찐떡을 호하여 퇴()라 함. ()는 조사.

杜順; (557-640) 화엄종 초조. 당대 옹주 만년(섬서 임동현 북) 사람. 속성이 두(). 18세에 출가했고 법호는 법순(法順). 인성사의 승 진(; 道珍)을 사사(師事)하여 정업(定業)을 수습(受習)했음. 후에 종남산에 거주하면서 화엄의 교강(敎綱)을 선양했음. 그의 언교(言敎)는 다분히 부사(浮詞)를 폄억(貶抑)하고 정리(正理)를 창현(彰顯)했음. 길에서 신수(神樹)나 귀묘(鬼廟)를 보면 반드시 태워 제거했음. 당태종이 그의 덕풍을 듣고 궁내에 인입(引入)하여 그를 예우했음. 스님이 다시 군국(郡國)을 유력(遊歷)하며 아미타불을 외울 것을 권했으며 아울러 오회문(五悔文)을 지어 정토를 찬영(讚詠)했음. 정관 14년 남교(南郊) 의선사에서 시적했음. 나이 84. 후인이 존중해 화엄종 제1조로 삼았음. 세칭이 문수화신ㆍ제심존자(帝心尊者)ㆍ돈황보살. 제자 중에 지엄(智儼)의 명성이 가장 드러났음. 저서에 화엄오교지관ㆍ화엄법계관문ㆍ십문실상관ㆍ회제종별견송 등 각 1권이 있음 [속고승전25. 화엄경전기3, 4. 종남산두순선사연기. 불조통기29, 39].

懷州; 지금의 하남성 무척현 서남.

益州; 사천성 수도(首都). 성도평야(成都平野) 남동에 위치하며 원오극근의 도량 소각사(昭覺寺)가 있음. 석씨계고략3에 이르되 익주는 서천(西川) 성도부(成都府).

又云; 오등회원6 낙포원안(洛浦元安)의 상당어(上堂語)에 이르되 석인(石人)의 기()가 너와 같다면/ 또한 파가(巴歌)도 부를 줄 알리라/ 네가 만약 석인과 같다면/ 설곡(雪曲)도 또한 응당 화응하리라.

巴歌; 조정사원4. 파가(巴歌) 서한(西漢; 전한) ()에 이르되 파()는 파인(巴人)이다. 고조(高祖)가 처음 한왕(漢王)이 됨에 당하여 파주(巴州)와 유주(兪州) 사람을 얻었는데 모두 재빠르고 굳세며(; 으로 의심됨) 잘 싸웠다. 그들과 더불어 삼진(三秦)을 정()하고 초()를 멸했으며 인하여 그 무악(武樂)을 존치(存置)했다. 즉금의 파주(巴州)와 유주(兪州)니 송옥(宋玉)이 이른 바 하리파가(下俚巴歌)를 국중에서 이어 화응하는 자가 수천인(數千人)이라 한 것임.

雪曲; 양춘백설(陽春白雪)을 가리킴. 조정사원3. 양춘백설(陽春白雪) 고악부(古樂府)의 곡명(曲名). 당 현경 2(657) 태상(太常)이 상주(上奏)해 말했다. 예기(禮記; 19 樂記)와 가어(家語; 孔子家語)에 이르기를 순()5()의 거문고를 탄주해 남풍(南風)의 시를 노래했다 했습니다. 이로 알지니 거문고 가락(琴操)과 곡()의 희롱이 다 가()에 합당함. 또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이르되 백설(白雪)은 이 대제(大帝; 黃帝의 존칭)가 소녀(素女)로 하여금 50()의 큰 거문고를 두드리게 한 곡명이다. 또 초()의 대부(大夫) 송옥(宋玉)이 일찍이 초양왕(楚襄王)을 대해 이르되 객이 영중(郢中; 의 수도)에서 노래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처음에 가로되 하리파인(下俚巴人)이라 했습니다. 국중(國中)에 따라서(은 이을 촉) 화응하는 자가 수천 인이었으며 그가 양가(陽歌)와 해로(薤露; 曲名. 는 부추 해. 염교 해)를 하자 국중에 따라서 화응하는 자가 수백 인이었으며 그가 양춘(陽春; 曲名)과 백설(白雪; 曲名)을 하자 국중에 따라서 화응하는 자가 수십 인이었을 뿐입니다. (; 五音 중의 하나)을 당겨 우(; 五音 중의 하나)에 새기고 섞어 치(; 五音 중의 하나)에 유입(流入)하자 국중에 따라서 화응하는 자가 몇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 까닭으로 창()이 더욱 높아지면 그 화응이 더욱 적습니다. 이로 알지니 백설(白雪)의 금곡(琴曲)은 본래 의당 가()에 알맞으며 그 곡조가 높기 때문에 사람이 화응함이 적음. 송옥(宋玉)의 후로부터 능히 화응하는 자가 있지 않았음. 5(660) 여재(呂才)가 금가(琴歌)인 백설(白雪) 등의 곡을 짓고 가사를 제작해 악부(樂府)에 편입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