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종용록 제15칙 본칙

태화당 2022. 5. 1. 07:41

*潙山*仰山 甚處來不是不知來處 仰云 田中來儞爲甚落草 山云 田中多少人只父子兩箇 *插下*鍬子 叉手而立放去較危 山云 南山*大有人**打草驚蛇 仰拈鍬子便行收來太速

 

潙山; 潙山靈祐(771-853) 唐代僧 爲潙仰宗始祖 福州長溪(今福建省霞浦縣南)人 俗姓趙 法名靈祐 十五歲隨建善寺法常(又稱法恆)律師出家 於杭州龍興寺受具足戒 曾先後遇寒山拾得 二十三歲至江西參謁百丈懷海 爲上首弟子 於此頓悟諸佛本懷 遂承百丈之法 憲宗元和末年 棲止潭州大潙山 山民感德 群集共營梵宇 由李景讓之奏請 敕號同慶寺 其後(一說大中初年)相國裴休亦來諮問玄旨 聲譽更隆 禪侶輻輳 海衆雲集 會昌(841-846)法難之際 師隱於市井之間 至大中元年(847)復敎之命下 衆迎返故寺 巾服說法 不復剃染 裴休聞之 親臨勸請 始歸緇流 師住山凡四十年 大揚宗風 世稱潙山靈祐 大中七年正月示寂 壽八十三 臘六十四 諡號大圓禪師 有語錄警策各一卷傳世 嗣法弟子有仰山慧寂 承其後而集大成 世稱潙仰宗 [福建高僧傳一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九 聯燈會要七]

仰山; 仰山慧寂(807-883) 唐代僧 爲潙仰宗開山祖師之一 韶州(廣東韶關)葉氏 初生頗有異蹟 爲童穉 依番禺安和寺不語通出家 年十四 父母欲奪其志 遂斷二指以爲誓 因從剃落 通累加接引 而師無所啓發 年十八 通卒 因往謁乳源 洎筠州處微 吉州性空 鵶山躭源 皆不契 至大和三年(829) 參大潙靈祐 擧性空如人在井之緣 因而有省 山指令請戒於襄陽之大悲 師曰 慧寂平生不妄語 山云 你但依沙門法 師從之 時年三十三矣 復還潙山作直歲 尋領衆居郴州之王莽山 旣而移錫居袁州仰山 衆盈數百 一日 有梵僧負貝葉造師 師問 近離甚處 曰 早別西天 師曰 太遲生 曰 游山翫水 師曰 神通不無你 佛法未夢見 曰 來此禮文殊 却遇小釋迦 語訖隱去 大中十三年(859) 韋宙中丞 爲師創洪州觀音院居之 咸通(860-8 73)中 歸韶州之東平山 至中和三年二月十三日 集衆說偈 以兩手抱屈膝 儼然而終 歸葬於仰山 師行道於世 蒙寵賜者三 懿宗賜號知宗 僖宗賜澄虛 昭宗諡智通 [祖庭事苑七 宋高僧傳十二]

插下; 表示動作的完成或結果

鍬子; 卽鍬 一種掘土器 子 助詞

大有人; 大 再也 如大前天 大後日 有 表示不定指

; 同茅

打草驚蛇 又作打草蛇驚 謂打草本意只在驚蛇也 有三尺杖子攪滄波 令彼魚龍知性命之句 其意相通

 

()하다.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이 내처(來處)를 알지 못하진 않으리라 앙산이 이르되 전중(田中)에서 왔습니다. 네가 무엇 때문에 낙초(落草)하는가 위산이 이르되 전중에 사람이 얼마이던가(多少人). 다만 부자(父子) 양개(兩箇) 앙산이 초자(*鍬子; . 가래)를 꽃고는(*插下) 차수(叉手)하고 섰다. 방거(放去)하니 조금(; . ) 위험하다 위산이 이르되 남산에 다시 어떤 사람(*大有人)이 띠(*)를 베었다. 풀을 때려 뱀을 놀라게 했다(*打草驚蛇) 앙산이 초자(鍬子)를 집어 곧 떠났다. 수래(收來)는 매우 신속하다

 

潙山;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771-853)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시조(始祖)가 됨. 복주 장계(長溪. 지금의 복건성 하포현의 남쪽)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조()며 법명은 영우(靈祐). 15세에 건선사 법상(法常; 또 칭호가 法恆)율사를 따라 출가했으며 항주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선후(先後)로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을 만났으며 23세에 강서에 이르러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참알(參謁)해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음. 여기에서 제불의 본회(本懷)를 돈오(頓悟)했으며 드디어 백장의 법을 승계했음. 헌종 원화 말년에 담주(潭州)의 대위산(大潙山)에 서지(棲止)했는데 산민(山民)이 감덕(感德)하여 무리가 모여 범우(梵宇; . 사원)를 함께 지었음. 이경양(李景讓)의 주청(奏請)으로 말미암아 동경사(同慶寺)라 칙호(敕號)했음. 그 후(一說大中初年) 상국(相國) 배휴(裴休)가 또한 와서 현지(玄旨)를 자문(諮問)하자 성예(聲譽)가 더욱 융성했으며 선려(禪侶)가 복주(輻輳)하여 해중(海衆)이 운집했음. 회창(會昌; 841-846)의 법난(法難)의 즈음에 스님이 시정(市井)의 사이에 은거하다가 대중 원년(847)에 복교(復敎)의 명이 떨어짐에 이르러 대중이 영접하여 옛 절로 돌아갔으나 건복(巾服; 옷갓)으로 설법하고 다시 체염(剃染)하지 않았음. 배휴가 이를 듣고 친림(親臨)하여 권청(勸請)하자 비로소 치류(緇流; 僧徒)로 돌아왔음. 스님이 산에 머문 무릇 40년에 종풍을 크게 날려 세칭이 위산영우(潙山靈祐). 대중 7년 정월에 시적(示寂)했음. 나이는 83이며 납(. 僧臘)64. 시호는 대원선사(大圓禪師)며 어록과 경책(警策) 1권이 있어 세상에 전해짐. 법을 이은 제자에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있어 그 뒤를 이어 집대성(集大成)했으니 세칭이 위앙종(潙仰宗)[복건고승전1. 송고승전11. 전등록9. 연등회요7].

仰山;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이니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의 하나가 됨. 소주(韶州; 광동 소관) 섭씨(葉氏)며 처음 출생하자 자못 이적(異蹟)이 있었음. 어린이(童穉)가 되자 번옹(番禺) 안화사(安和寺)의 불어통(不語通)에 의지(依止)해 출가하였음. 나이 14에 부모가 그 뜻을 뺏으려 하자 드디어 두 손가락을 잘라 맹서(盟誓)를 삼았으며 인하여 체락(剃落)을 좇았음. ()이 누차(屢次) 접인(接引)을 가했으나 스님은 계발(啓發)한 바가 없었음. 나이 18에 통이 죽자 인해 유원(乳源)에게 가서 참알(參謁)했으며 균주(筠州)의 처미(處微)ㆍ길주(吉州)의 성공(性空)ㆍ아산(鵶山)의 탐원(躭源)에 이르렀으나 다 계합(契合)치 못했음. 대화(大和) 3(829)에 이르러 대위영우(大潙靈祐)를 참알해 성공(性空), 마치 어떤 사람이 우물에 있음과 같다는 인연을 들어 인해 살핌이 있었음. 위산(潙山)이 양양(襄陽)의 대비원(大悲院)에 청계(請戒; 곧 수계)를 지령(指令)하자 스님이 가로되 혜적(慧寂)은 평생에 망어(妄語)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너는 단지 사문법(沙門法)에 의지(依止)하라. 스님이 이를 좇았는데 때의 나이는 33이었음.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직세(直歲)가 되었으며 이윽고 대중을 거느리고 침주(郴州)의 왕망산(王莽山)에 거주하였음. 그러고는 이석(移錫)하여 원주(袁州)의 앙산(仰山)에 거주했는데 대중이 수백(數百)을 채웠음. 어느 날 어떤 범승(梵僧)이 패엽(貝葉; 佛經을 가리킴)을 지고 스님에게 나아가자 스님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아침에 서천(西天)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너무 느리다. 가로되 유산완수(游山翫水)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신통은 너에게 없지 않으나 불법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가로되 여기에 와서 문수(文殊)에게 예배하려 했더니 도리어 소석가(小釋迦)를 만났습니다. 말을 마치자 은몰(隱沒)했음. 대중 13(859) 위주중승(韋宙中丞)이 스님을 위해 홍주(洪州)에 관음원(觀音院)을 창건하고 거쳐하게 했음. 함통(咸通. 860-873) 중에 소주(韶州)의 동평산(東平山)으로 돌아갔다가 중화(中和) 3213일에 이르자 대중을 모아 게()를 설하고 두 손으로 무릎을 안아 구부러지게 하고는 엄연(儼然; 의젓이)히 마쳤음. 앙산으로 귀장(歸葬)했음. 스님이 세상에 도를 행해 총사(寵賜)를 입은 게 세 번이니 의종(懿宗)이 호()를 주어 지종(知宗)이라 했고 희종(僖宗)이 징허(澄虛)를 주었고 소종(昭宗)이 지통(智通)이라 시호(諡號)했음 [조정사원7. 송고승전12].

插下; ()는 동작의 완성 혹 결과를 표시함.

鍬子; 곧 초(; 가래. )니 일종의 굴토기(掘土器). 자는 조사.

大有人; ()는 재(). 예컨대() 대전천(大前天; 그그저께). 대후일(大後日; 오늘 후의 제3). ()는 부정지(不定指)를 가리킴.

; (; )와 같음.

打草驚蛇 또 타초사경(打草蛇驚)으로 지음. 이르자면 풀을 때리는 본의는 다만 뱀을 놀라게 함에 있음. 3척의 지팡이로 창파를 휘저음은 저 어룡으로 하여금 성명(性命)을 알게 함이다 라는 구가 있는데 그 뜻이 서로 통함.

 

師云 師資合道 父子*投機 潙仰家風千古*龜鑑 潙山問仰山 甚處來 潙山豈不知仰山田中來 垂此一問 要與仰山相見 仰山不負來問 只道箇田中來 且道 還有佛法道理也無 潙山深入虎穴 更問田中多少人 仰山插鍬子叉手而立 便衲僧相見 *玄沙云 我當時若見 便與踏倒鍬子 萬松道 *忍俊不禁 *投子靑禪師頌云 潙山問處少知音 插地酬他佛祖沈 踏倒玄沙傍不肯 免敎蒼翠帶春深 萬松道 草枯鷹眼疾 *南嶽法輪平禪師頌云 狹路相逢避不及 插下鍬時叉手立 過得橋來岸上行 始覺渾身泥水濕 萬松道 不堪迴首月明中 二*老宿頌處 只有千尺寒松 更看天童放出抽條石笋 頌云

 

投機; 又作逗機 卽機機投合之意 指禪師與學人之機 彼此相契 又謂學人徹底大悟而契合佛祖之要機

龜鑑; 指爲世之模範 龜 龜甲 古代用作占卜 遂爲占卜之稱 鑑 鏡也 照也

玄沙; 玄沙師備(835-908) 唐末五代僧 福州(今屬福建)閩縣人 俗姓謝 幼好垂釣 汎小艇於南臺江 狎諸漁者 唐咸通(86 0-873)初 年屆三十 始脫塵志 投芙蓉山靈訓禪師落髮 受具足戒後 行頭陀法 終日宴坐 人稱備頭陀 與法兄雪峰義存 親近若師徒(嗣法雪峰) 同力締構 參學者衆 偶閱楞嚴經 發明心地 諸方請益者如水歸海 初住梅谿普應院 遷福州玄沙山 應機接物凡三十餘載 學侶八百餘人 時有閩帥王審知 事以師禮 曲盡殷勤 竝奏賜紫衣 號宗一大師 梁開平二年示寂 壽七十四(一說七十或七十五) 有語錄三卷傳世 [宋高僧傳十三 傳燈錄十八]

忍俊不禁; 俊 英俊 俊傑 謂欲忍英俊而不禁也 禪林寶訓順硃三 才勝萬人曰英 智過千人曰俊 慧琳音義十六 毛詩傳曰 特立謂之傑 淮南子云 智過千人曰傑

投子靑; 投子義靑(1032-1083) 宋代曹洞宗僧 靑社(山東)人 俗姓李 七歲於妙相寺出家 習百法論 入京聽華嚴有省 人稱靑華嚴 去叩禪林 參聖巖寺之浮山法遠(圓鑑) 隨侍六年 了悟洞下宗旨 法遠乃以大陽警玄之頂相衣履直裰付囑之(五家正宗贊三大陽玄 師年八十 嘆無繼其法者 作偈幷皮履布裰 寄遠錄公使求法器傳續之) 未久 見圓通法秀 意氣相投 自是道聲遠播 初住建州白雲山 未久卽遷舒州投子山 擧大陽之宗風 故有投子之號 宋神宗元豐六年示寂 敕諡慈濟 壽五十二 坐三十有七夏 法嗣九人 以芙蓉道楷最著 著有投子靑禪師錄 [續傳燈錄六 五燈會元十四 佛祖歷代通載十九 禪林僧寶傳十七]

南嶽; 卽衡山 又作衡嶽 五嶽之一 位於湖南衡山縣西北十五公里處 湘江環繞於其南東北三面 按唐代開元十八年(730) 李邕所撰麓山寺碑記 法崇至此開山 於西晉泰始四年(268)草創麓山寺 陳代太建二年(570) 慧思入南嶽講般若經典中論等 稱爲般若道場 故慧思又稱南嶽大師 唐代先天二年(713) 懷讓入南嶽 住於般若寺觀音臺三十年 唐代天寶元年(742) 希遷入衡山 於石上結庵 人稱石頭和尙 山中建有諸多寺廟 如法崇之麓山寺(後改名萬壽寺) 承遠之勝業寺(祝聖寺) 慧思之故地(福嚴寺) 馬祖道一從懷讓得法之故地(傳法院 卽磨鏡臺) 石頭希遷之故地(南臺寺) 慧思之三生塔院等 [續高僧傳十七 柳河東集六]

老宿; 老成宿德之禪師 翻譯名義集一 體毘履 此云老宿 他毘利 此云宿德

 

스님이 이르되 사자(師資; 師徒)가 합도(合道)하고 부자(父子)가 투기(*投機)하니 위앙(潙仰)의 가풍이 천고(千古)에 귀감(*龜鑑)이다. 위산이 앙산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위산이 어찌 앙산이 전중(田中)에서 온 줄 알지 못했겠는가. 1문을 내림은 앙산과 더불어 상견하려고 했음이다. 앙산이 내문(來問)을 저버리지 않고 다만 저() 전중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래 말하라, 도리어 불법 도리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 위산이 호혈(虎穴)에 심입(深入)하여 다시 묻되 전중에 사람이 얼마이더냐. 앙산이 초자(鍬子)를 꽃고는 차수하고 섰으니 곧 납승의 상견이다. 현사(*玄沙)가 이르되 내가 당시에 만약 보았다면 곧 초자(鍬子)를 답도(踏倒; 밟아 넘어뜨림)하여 주었겠다. 만송이 말하노니 인준을 금하지 못했다(*忍俊不禁). 투자청(*投子靑) 선사가 송운(頌云)하되 위산이 물은 곳은 지음(知音)이 적나니/ 땅에 꽂아 그에게 수답(酬答)하매 불조가 침몰한다/ 밟아 넘어뜨린(踏倒) 현사가 곁에서 불긍하니/ 창취(蒼翠)로 하여금 춘심(春深)을 가짐을 면하게 했다. 만송이 말하노니 풀이 마르니 매의 눈이 빠르다. 남악(*南嶽) 법륜평(法輪平; 미상) 선사가 송운(頌云)하되 협로(狹路)에서 상봉하면 회피함이 미치지 못하나니/ (; )를 꽂을 때 차수하여 섰다/ 다리를 지나(過得) 와서 언덕 위를 가다가/ 비로소 온몸(渾身)이 진흙물에 젖었음을 깨달았다. 만송이 말하노니 월명(月明) 속에서 회수(迴首)함을 감내하지 못한다. 두 노숙(*老宿)의 송처(頌處)는 다만 천 척의 한송(寒松)만 있으니 다시 천동이 추조(抽條; 가지가 돋다)의 석순(石笋)을 방출함을 보아라. 송운(頌云)하되

 

投機; 또 두기(逗機)로 지음. 곧 기기(機機)가 투합함의 뜻. 선사와 학인의 기()가 피차 상계(相契)함을 가리킴. 또 이르자면 학인이 철저히 대오하여 불조의 요기(要機)에 계합함.

龜鑑; 세상의 모범이 됨을 가리킴. ()는 거북의 등 껍데기니 고대에 점복(占卜)을 하는 데 썼으며 드디어 점복의 명칭이 되었음. ()은 거울이니 비춤임.

玄沙;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당말 오대승. 복주(지금 복건에 속함) 민현(閩縣) 사람이며 속성은 사(). 어릴 적에 낚시질을 좋아해 작은 배를 남대강(南臺江)에 띄우고 여러 어자(漁者; 어부)를 친압(親狎)하던 자였음. 당 함통(860-873) () 나이가 30에 이르자 비로소 탈진(脫塵)의 뜻을 세우고 부용산(芙蓉山) 영훈선사(靈訓禪師)에게 투신해 낙발(落髮)했음. 구족계를 받은 후 두타법(頭陀法)을 행해 종일 연좌(宴坐)한지라 사람들이 비두타(備頭陀)로 일컬었음. 법형(法兄)인 설봉의존(雪峰義存)과 친근하기가 마치 사도(師徒; 스승과 제자) 같았으며(설봉의 법을 이었음) 힘을 합쳐 체구(締構)하여 참학자(參學者)가 많았음. 우연히 릉엄경을 열람하다가 심지(心地)를 발명(發明)했으며 제방에서 청익하는 자가 마치 물이 바다로 돌아감과 같았음. 처음엔 매계(梅谿) 보응원(普應院)에 거주하다가 복주(福州) 현사산(玄沙山)으로 옮겼음. 응기접물(應機接物)하기 무릇 30여 재(; )며 학려(學侶)8백여 인이었음. 때에 민수(閩帥) 왕심지(王審知)가 스승의 예()로 모시면서 은근(殷勤)을 곡진(曲盡)함이 있었으며 아울러 주청(奏請)하여 자의(紫衣)와 종일대사(宗一大師)란 호를 주었음. () 개평 2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4(일설엔 70 혹은 75). 어록 3권이 있어 세상에 전함 [송고승전13. 전등록18].

忍俊不禁; ()은 영준(英俊). 준걸. 이르자면 영준(英俊)을 참으려고 하나 금하지 못함임. 선림보훈순주3. 재능이 만 인을 이김을 가로되 영()이며 지혜가 천 인을 초과함을 가로되 준()이다. 혜림음의16. 모시(毛詩) ()에 가로되 특립(特立)을 일러 걸()이다. 회남자에 이르되 지혜가 천 인을 초과함을 가로되 걸()이다.

投子靑; 투자의청(投子義靑; 1032-1083)이니 송대 조동종승. 청사(靑社; 산동) 사람이며 속성은 이(). 7세에 묘상사에 출가해 백법론(百法論)을 익혔음. 입경(入京)하여 화엄을 듣다가 깨침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청화엄(靑華嚴)이라 일컬었음. 떠나 선림에 고문(叩問)하다가 성암사(聖巖寺)의 부산법원(浮山法遠; 圓鑑. 임제하 6)에게 참문(參問)하며 수시(隨侍)하기 6년이었으며 조동하(曹洞下)의 종지를 요오(了悟)했음. 법원이 이에 대양경현(大陽警玄; 동산하 5)의 정상(頂相; 초상화)ㆍ의리(衣履)ㆍ직철(直裰)을 그에게 부촉했음(오가정종찬3 대양현. 스님의 나이 80에 그의 법을 이을 자가 없음을 탄식했다. 게를 짓고 아울러 皮履布裰遠錄公에게 기탁하며 법기를 구해 그것을 傳續하게 했다). 오래지 않아 원통법수(圓通法秀; 운문하 5)를 뵈었는데 의기가 상투(相投)하였고 이로부터 도성(道聲)이 멀리 전파되었음. 처음엔 건주(建州) 백운산에 주지했고 오래지 않아 곧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으로 옮겨 대양(大陽)의 종풍을 거양(擧揚)한지라 고로 투자의 호가 있음. 송 신종 원풍 6년에 시적했으며 칙시(敕諡)는 자제(慈濟)며 나이는 52며 좌()37(). 법사가 9인인데 부용도해(芙蓉道楷)가 가장 저명하며 저서에 투자청선사록(投子靑禪師錄)이 있음 [속전등록6. 오등회원14. 불조역대통재19. 선림승보전17].

南嶽; 즉 형산(衡山)이니 또 형악으로 지음. 5()의 하나. 호남 형산현 서북 15곳에 위치함. 상강(湘江)이 그 남동북 3면을 빙 둘렀음. 당대 개원 18(730) 이옹이 지은 바 녹산사비기를 안험컨대 법숭이 여기에 이르러 개산했으며 서진 태시 4(268)에 녹산사를 초창(草創; 처음 창건)했음. 진대(陳代) 태건 2(570) 혜사(慧思)가 남악에 들어와 반야경전과 중론 등을 강설했으며 일컬어 반야도량이라 했음. 고로 혜사를 또 일컬어 남악대사라 함. 당대 선천 2(713) 회양(懷讓)이 남악에 들어와 반야사의 관음대에 거주하기가 30년이었음. 당대 천보 원년(742) 희천(希遷)이 형산에 들어와 암석 위에 암자를 엮었으며 사람들이 일컬어 석두화상이라 했음. 산중에 여러 많은 사묘(寺廟)가 건립되어 있으니 예컨대() 법숭의 녹산사(麓山寺; 후에 만수사로 개명했음)ㆍ승원의 승업사(勝業寺; 축성사)ㆍ혜사의 고지(故地; 복엄사)ㆍ마조도일이 회양을 좇아 득법한 고지(故地; 전법원이니 곧 마경대)ㆍ석두희천의 고지(故地; 남대사)ㆍ혜사의 삼생탑원 등임 [속고승전17. 류하동집6].

老宿; 노성(老成; 노련)하고 숙덕(宿德; 宿은 명망이 있는 사람을 가리킴)의 선사. 번역명의집1. 체비리(體毘履)는 여기에선 이르되 노숙(老宿)이며 타비리(他毘利)는 여기에선 이르되 숙덕(宿德)이다.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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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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