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照光 初在仰山璇野菴會中 受台州鴻福之命 道游三衢 抵烏巨 密菴以偈送之 以謂必承應菴也 偈曰 瞎驢生得瞎驢兒 齷齪聲名徹四維 更把少林無孔笛 逢人應是逆風吹 及抵婺之寶林 時月菴弟子遠和尙住 復擧雲門話墮語令判之 意謂其承嗣月菴也 及來丹丘開堂 恰嗣玅喜 叢林皆短之 以謂玅喜門戶高大而然 初不知冤有頭債有主也(石亭祖璇 嗣月菴果 歷住潙仰二山 佛照光甞爲其首座 璇與超萬卷爲昆仲 超 曜菴也 博通經史 與竹菴珪雲臥瑩爲友 天童宏智目爲超萬卷 了堂十世祖也 堂 陵虛谷弟子也 慧朗之孫也 淡居集)
●佛照光; 德光(1121-1203) 南宋楊岐派僧 臨江(江西)新喩人 俗姓彭 自號東庵 又號拙庵 二十一歲依同郡東山光化寺之足庵吉落髮 受具足戒 後師徒相攜入閩 住福州西禪寺 未久參大慧宗杲於阿育王寺 稟敎契悟 爲函丈之侍者數年 出主台之鴻福 旋徙光孝 孝宗欽仰其高風 淳熙三年(1176) 敕住杭州靈隱寺 屢召入宮中稱對揚旨 留宿中觀堂 帝特賜號佛照禪師 後奏進宗門直指一篇 晩歸育王 嘉泰三年示寂 壽八十三 臘七十 敕諡普慧宗覺大禪師 著有佛照禪師奏對錄一卷 佛照光和尙語要一卷 門人有浙翁如琰 北磵居簡等 [古尊宿語錄四十八 宗門統要續集二十二 五燈會元二十 佛祖歷代通載二十一]
●四維; 東西南北四方之中間曰四維 乾坤艮巽 卽西北西南東北東南之四方
●竹菴珪; 士珪(1083-1146) 宋代楊岐派僧 四川成都人 俗姓史 字竹菴 號老禪 年少出家 勤學經敎 專治楞嚴 受具足戒後 往參佛眼淸遠 得嗣其法 後歷住龍翔 天寧 褒禪 東林諸刹 紹興年間 與宗杲共居雲門 撰頌古百餘則 世人珍之 其後入閩 住於鼓山 更遷雁蕩能仁 溫州龍翔等寺 師兼通外學 工書法 善尺牘 有竹菴珪和尙語要一卷 東林和尙雲門菴主頌古一卷行世 [禪林僧寶傳六 五燈會元二十]
●冤有頭債有主; 寃 通怨 頭 事情的始末 謂寃屈或怨恨有其事情 負債有其債主
●祖璇; 宋代楊岐派僧 一作祖璿 字野庵 洪州(江西南昌)人 大潙月庵善果法嗣 住隆興府石亭 [續傳燈錄三十三 五燈全書四十六]
●雲臥瑩; 曉瑩 南宋楊岐派僧 字仲溫 少壯行脚 遍參諸方叢林 得了大事 嗣法大慧宗杲 晩年歸隱江西羅湖 杜門不與世接 紹興二十五年(1155) 以生平見聞 與諸方尊宿提撕語 及友朋談論之言 編輟著書 成羅湖野錄四卷 雲臥紀談二卷 爲世所寶 [明高僧傳八 佛祖通載二十 佛祖綱目三十八]
○불조광(佛照光; 德光)이 처음 앙산(仰山) 선야암(璇野菴; 祖璇의 자가 野菴)의 회중(會中)에 있었다. 태주(台州) 홍복(鴻福; 홍복사)의 명(命)을 받아 삼구(三衢)의 길에서 노닐다가(道游) 오거(烏巨)에 다다랐다. 밀암(密菴; 咸傑)이 게로써 그(之)를 전송(餞送)했는데 이르기를 반드시 응암(應菴; 曇華)을 승사(承嗣; 承)하리라. 게왈(偈曰) 할려(瞎驢; 눈 먼 나귀)가 할려아(瞎驢兒)를 생득(生得)했고/ 악착(齷齪)의 성명(聲名)이 사유(四維)를 통했다(徹)/ 다시 소림(少林)의 무공적(無孔笛)을 잡아(把)/ 사람을 만나면 응당 이 역풍(逆風)하여 분다. 및 무(婺; 婺州)의 보림(寶林)에 다다랐는데 당시에 월암(月菴; 善果)의 제자 원화상(遠和尙)이 주(住)했다. 다시 운문화타어(雲門話墮語)를 들어 그(之)에게 비판(批判; 判)하게 했다. 뜻에 이르되 그(其)가 월암(月菴)을 승사(承嗣)하리라. 및 단구(丹丘)로 와서 개당(開堂)했는데 마침(恰) 묘희(玅喜)를 이었다(嗣). 총림에서 모두 그것(之)을 헐뜯었으니(短) 이르되 묘희의 문호(門戶)가 고대(高大)하여서 그러했다. 애초에 원유두채유주(冤有頭債有主)를 알지 못했다 함이다. (石亭(저본에 石知로 지었음) 祖璇은 月菴果를 이었고 潙ㆍ仰 二山을 歷住했다. 佛照光이 일찍이 그의 首座가 되었다. 璇과 超萬卷은 昆仲이 된다. 超는 曜菴이니 經史에 博通했고 竹菴珪ㆍ雲臥瑩과 벗이 되었다. 天童宏智가 名目해 超萬卷이라 했으니 了堂의 十世祖다. 堂은 陵虛谷의 제자며 慧朗의 孫이다 淡居集)
●佛照光; 덕광(德光; 1121-1203)이니 남송 양기파승. 임강(강서) 신유(新喩) 사람이며 속성은 팽이며 자호(自號)는 동암(東庵). 21세에 동군(同郡. 新喩를 가리킴) 동산(東山) 광화사의 족암길에게 의지해 낙발하고 구족계를 받았음. 뒤에 사도(師徒;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끌고 민(閩)에 들어가 복주 서선사에 주(住)했으며 오래지 않아 아육왕사에서 대혜종고(大慧宗杲)를 참알하고 가르침을 받고 계오(契悟)했으며 함장(函丈. 방장)의 시자가 된 게 몇 년이었음. 출세하여 태(台)의 홍복을 주지(主持)했고 이어서 광효로 옮겼음. 효종이 그 고풍(高風)을 흠앙하였으며 순희 3년(1176) 칙명으로 항주 영은사에 주(住)했음. 자주 불러 궁중에 들어가 대응이 알맞고 지취를 드날렸으며 중관당에 유숙했음. 제(帝)가 특별히 불조선사(佛照禪師)란 호를 주었으며 후에 종문직지 1편(篇)을 상주(上奏)하여 진상했으며 만년에 육왕으로 돌아갔음. 가태 3년에 시적했음. 나이는 83이며 납은 70. 칙시가 보혜종각대선사며 저서로는 불조선사주대록 1권과 불조광화상어요 1권이 있음. 문인에 절옹여염ㆍ북간거간 등이 있음 [고존숙어록48. 종문통요속집22. 오등회원20. 불조역대통재21].
●四維; 동서남북 사방의 중간을 가로되 사유니 건ㆍ곤ㆍ간ㆍ손임. 곧 서북ㆍ서남ㆍ동북ㆍ동남의 사방.
●竹菴珪; 사규(士珪; 1083-1146)니 송대 양기파승. 사천 성도 사람이며 속성은 사(史)며 자는 죽암(竹菴)이며 호는 노선(老禪). 나이 어릴 적에 출가하여 경교(經敎)를 부지런히 배웠으되 오로지 릉엄을 익혔음(治). 구족계를 받은 후 불안청원(佛眼淸遠)을 왕참(往參)하여 그의 법 이음을 얻었음. 후에 용상ㆍ천녕ㆍ포선ㆍ동림의 여러 사찰에 역주(歷住)했음. 소흥년간(紹興年間) 종고(宗杲)와 함께 운문에 거주하며 송고(頌古) 백여칙(百餘則)을 지었는데 세인이 그것을 진기하게 여김. 그 후에 민(閩)에 들어가 고산(鼓山)에 거주했다가 다시 안탕 능인ㆍ온주 용상(龍翔) 등의 사원으로 옮겼음. 스님은 외학(外學)을 겸통(兼通)했고 서법(書法)에 공교(工巧)했으며 척독(尺牘; 書簡)을 잘했음. 죽암규화상어요 1권과 동림화상운문암주송고(東林和尙雲門菴主頌古) 1권이 있어 세상에 유행함 [선림승보전6. 오등회원20].
●冤有頭債有主; 원(寃)은 원(怨)과 통함. 두(頭)는 사정의 시말이니 이르자면 원굴(寃屈) 혹은 원한에는 그 사정이 있고 부채에는 그 채주(債主)가 있음.
●祖璇; 송대 양기파승. 한편으론 조선(祖璿)으로 지음. 자는 야암(野庵)이며 홍주(강서 남창) 사람이니 대위 월암선과(月庵善果)의 법사며 융흥부 석정(石亭)에 거주했음 [속전등록33. 오등전서46].
●雲臥瑩; 효영(曉瑩)이니 남송 양기파승. 자는 중온이며 소장(少壯)에 행각하면서 제방의 총림을 편참(遍參)했음. 대사(大事)를 득료(得了)했고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법을 이었음. 만년에 강서 나호(羅湖)에 귀은(歸隱)하면서 문을 닫고 세상과 접하지 않았음. 소흥 25년(1155) 생평의 견문과 제방 존숙의 제시어(提撕語) 및 우붕(友朋)의 담론의 언어를 편철(編輟)했고 저서(著書)해 나호야록(羅湖野錄) 4권과 운와기담(雲臥紀談) 2권을 이루었으니 세상에서 보배로 여기는 바가 되었음 [명고승전8. 불조통재20. 불조강목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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