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총림성사권하(叢林盛事卷下) 장로조조(長蘆祖照)

태화당 2026. 4. 17. 07:40

長蘆祖照禪師道和 莆陽人 初負篋至京 有中貴 見之姿質不凡 以度牒與之 和不受 自謂同學曰 吾大丈夫 豈可出他黃門之下 苟一旦受其恩 則終身被其攔絆 吾佛幸有廣大法門 又國家開發人之路 吾當自勉勵 因銳志誦法華經 當年於試經得度 大僧 徧見諸方 後住長蘆 座下常滿千衆 眞歇了自丹霞會下來 時年尙幼 和見其敏利 令首衆 後退院與之 意其承嗣 及拈衣 乃云 得法丹霞室 傳衣祖照庭 恩深轉無語 懷抱自分明 和不樂 下座抵奪其衣 了自此終身不搭法衣 竟嗣丹霞淳 江湖有識者皆雅其不忘本也

道和; (1057-1124) 宋代雲門宗僧 福建興化仙遊人 俗姓潘 賜號祖照禪師 禮天淸德璋爲師而出家受戒 又參淨因道臻 圓通法秀 法秀入寂後 參隨善本 受印可 住持江蘇眞州長蘆寺 廣揚宗風 宣和六年(劫外錄作5)示寂 壽六十八 [普燈錄八 五燈會元十六]

中貴; 一中貴人 二朝中貴人 指朝廷中的高官 三中官 宦官

度牒; 許出家之公驗也 又云祠部牒 以從尙書省之祠部司出之故也 隆興編年通論十六云 天寶五年(746)五月制 天下度僧尼 並令祠部給牒 今謂之祠部者 自是而始 唐書食貨志云 安祿山反 楊國忠遣御史崔衆至太原納錢 度僧尼道士 旬日 得百萬緡 明年御史鄭叔淸與宰相裴冕 又議度僧道收貲 按此是鬻度牒之始

試經得度; 唐代爲控制僧尼人數 禁止私自出家而設立之制度 度僧時 令其讀誦經論 且陳述其義 以試驗學力 佛祖統紀五十一試經度僧 唐中宗景龍(707-709)初 詔天下試經度僧 山陰靈隱僧童大義 誦法華 試中第一 由此可知 試經之制 始於唐中宗在位(705710)之時 其後於肅宗至德二年(757) 以白衣能誦經五百紙者 聽度爲僧 代宗時 對童行策試經律論三科 宣宗時 敕每歲度僧 依戒定慧三學 有道性且通法門者 擇給度牒 其後宋元明各朝亦相繼行之 [慈恩寺三藏法師傳一 佛法金湯編七唐中宗條 象器箋叢軌類]

大僧; 對於沙彌 而稱比丘曰大僧

眞歇了; 淸了(1089-1151) 宋代曹洞宗僧 丹霞子淳法嗣 左綿安昌(四川)人 俗姓雍 諱淸了 道號眞歇 又稱寂庵 十一歲 依聖果寺淸俊出家 初學法華 十八歲受具足戒 入成都大慈寺 學圓覺經金剛經等 至鄧州(河南)丹霞山 參子淳 開悟得證 竝嗣其法 宣和四年主眞州長蘆 建炎四年(1130) 入主雪峰寺 紹興十五年(1145) 住能仁興聖萬壽禪寺 二十一年 住崇先顯孝禪院 同年十月寂 壽六十三 臘四十五 諡號悟空禪師 著信心銘拈古一卷 一掌錄等 門人編集長蘆了和尙劫外錄一卷 [眞歇淸了禪師語錄 普燈錄九 五燈會元十四 續傳燈錄十七]

拈衣; 拈取袈裟著用之意 住持新入院時 從師家手中接受法衣 著於自己身上 此爲嗣法時之作法

懷抱; 藏於懷中 心意 胸懷

 

장로(長蘆; 장로사) 조조선사(祖照禪師) 도화(道和)는 보양(莆陽) 사람이다. 처음 부급(負篋)하고 경사(京師; )에 이르자 중귀(中貴)가 있어 자질(姿質; 形貌)이 불범(不凡)함을 보고 도첩(度牒)을 그()에게 주었다. ()가 받지 않고 스스로 동학(同學)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대장부다. 어찌 가히 저() 황문지하(黃門之下)에서 나오겠는가. 구차(苟且; )하게 일단(一旦)에 그 은혜를 받으면 곧 종신(終身)토록 그 난반(攔絆; 얽매임)을 입는다. 오불(吾佛)이 다행히 광대한 법문(法門)이 있으며 또 국가에서 사람의 길을 개발(開發)하니 내가 마땅히 스스로 면려(勉勵)하겠다. 인하여 예지(銳志)로 법화경을 외웠고 당년(當年)에 시경득도(試經得度)해 대승(大僧)이 되었다. 제방을 편견(徧見)했고 후에 장로(長蘆)에 주()했는데 좌하(座下)에 늘 천중(千衆)을 채웠다(滿). 진헐료(眞歇了; 淸了)가 단하회하(丹霞會下)로부터 왔는데 당시에 나이가 아직() 어렸었다. ()가 그 민리(敏利)를 보고 수중(首衆; 首座)을 시켰다(). 후에 퇴원(退院)하면서 그()에게 주었는데 뜻에 그가 승사(承嗣)하리라 했다. 및 염의(拈衣)하자 이에 이르되 단하실(丹霞室)에서 득법(得法)했고/ 조조정(祖照庭)에서 전의(傳衣)했다/ 은심(恩深)은 더욱() 할 말이 없고(無語)/ 회포(懷抱)는 스스로 분명하다. ()가 즐겁지 않았다. 하좌(下座)하자 막으며() 그 옷을 빼앗았다(). ()가 이로부터 종신(終身)토록 법의(法衣)를 걸치지() 않았고 마침내() 단하순(丹霞淳; 子淳)을 이었다. 강호(江湖)에서 유식자(有識者)가 모두 그의, ()을 잊지 않음을 고아(高雅; )하게 여겼다.

道和; (1057-1124) 송대 운문종승. 복건 흥화 선유 사람. 속성은 반이며 사호(賜號)가 조조선사(祖照禪師). 천청덕장을 예알하여 스승으로 삼고 출가하여 수계했음. 또 정인도진과 원통법수를 참했음. 법수가 입적한 후 선본(善本)을 참수(參隨)하며 인가를 받았음. 강소 진주 장로사(長蘆寺)를 주지(主持)하며 종풍을 널리 드날렸음. 선화 6(겁외록에 5년으로 지어졌음)에 시적했음. 나이 68 [보등록8. 오등회원16].

中貴; 1 중귀인(中貴人). 2. 조중(朝中)의 귀인이니 조정 중의 고관을 가리킴. 3. 중관(中官). 환관(宦官).

度牒; 출가를 허락하는 공험(公驗; 관청에서 발행하는 증명서). 또 이르되 사부첩(祠部牒)이니 상서성의 사부사(祠部司)로부터 나오는 연고임. 융흥편년통론16에 이르되 천보 5(746) 5월에 제(; 制誥니 제왕의 명령)하되 천하에서 승니를 득도하면 모두 사부(祠部)에서 급첩(給牒)하게 했다. 여금에 이를 일러 사부라 하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했다. 당서 식화지에 이르되 안녹산이 반란하자 양국충이 어사 최중을 보내 태원에 이르러 돈을 받아들이고 승니와 도사를 득도시켰는데 열흘 만에 백만 민(; 돈꿰미)을 얻었다. 명년에 어사 정숙청이 재상 배면과 더불어 또 의논하여 승도(僧道)를 득도시키면서 재물을 걷었다. 이것을 안험컨대 이는 도첩을 판 시초다.

試經得度; 당대(唐代)에 승니(僧尼)의 인수(人數)를 공제(控制)하기 위해 사사로이 스스로 출가함을 금지하면서 설립한 제도(制度). 도승(度僧)할 때 그로 하여금 경론을 독송하게 하고 또 그 뜻을 진술하게 해 학력을 시험했음. 불조통기51 시경도승(試經度僧) () 중종(中宗) 경룡(景龍; 707-709) () 천하에 조칙(詔勅)하여 시경도승(試經度僧)하게 했다. 산음(山陰) 영은(靈隱)의 승동(僧童) 대의(大義)가 법화경을 외워 시중(試中)에 제일이었다 했음. 이로 말미암아 가히 알지니 시경의 제도는 당 중종의 재위(705-710) ()에 비롯했음. 그 후 숙종(肅宗) 지덕 2(757) 백의(白衣)로서 능히 5백지(五百紙)를 송경(誦經)하는 자를 득도(得度)하여 승려가 됨을 청허(聽許)하였음. 대종(代宗) 때 동행(童行)에 대해 경률론(經律論) 3()를 책시(策試)하였고 선종(宣宗) 때 매세(每歲)에 도승(度僧)을 칙허(勅許)하되 계정혜(戒定慧) 3()에 의해 도성(道性)이 있고 또 법문(法門)을 통달한 자에게 도첩(度牒)을 가려서 주었음. 그 후 송원명(宋元明) 각조(各朝)에서 또한 상계(相繼)하여 이를 행했음 [자은사삼장법사전1. 불법금탕편7당중종조. 상기전총궤류].

大僧; 사미에 대해 비구를 일컬어 가로되 대승이라 함.

眞歇了; 청료(淸了; 1089-1151)니 송대 조동종승. 단하자순(丹霞子淳)의 법사(法嗣). 좌면 안창(사천) 사람이며 속성은 옹()이며 휘()는 청료(淸了)며 도호(道號)는 진헐(眞歇)이며 또 명칭이 적암(寂庵). 11세에 성과사 청준에게 의지해 출가했으며 처음엔 법화(法華)를 배웠고 18세에 구족계를 받았고 성도(成都) 대자사에 들어가 원각경과 금강경 등을 배웠음. 등주(鄧州; 河南) 단하산(丹霞山)에 이르러 자순(子淳)을 참알(參謁)해 개오(開悟)하고 득증(得證)했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선화 4년 진주(眞州) 장로(長蘆)에 주지(主持)했고 건염 4(1130) 설봉사에 입주(入主; 들어가 主持)했고 소흥(紹興) 15(1145) 능인흥성만수선사에 주()했으며 21년 숭선현효선원에 주()했으며 같은 해 10월에 입적(入寂)했으니 나이는 63이며 승랍(僧臘)45며 시호는 오공선사(悟空禪師). 저서는 신심명염고(信心銘拈古) 1권ㆍ일장록(一掌錄) 등과 문인(門人)이 편집(編集)한 장로료화상겁외록(長蘆了和尙劫外錄) 1권임 [진헐청료선사어록. 보등록9. 오등회원14. 속전등록17].

拈衣; 가사를 집어 착용함의 뜻. 주지가 새로 입원할 때 사가(師家)의 수중으로부터 법의를 접수하고 자기의 신상에 착용함이니 이것은 사법(嗣法) 시의 작법이 됨.

懷抱; 회중(懷中)에 감춤. 심의(心意). 흉회(胸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