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총림성사권하(叢林盛事卷下) 자은법사(慈恩法師)

태화당 2026. 4. 20. 07:42

慈恩法師 唐尉遲將軍之子也 始年十歲 能造戰䇿 父賢之 玄弉以計欲其出家以大敎乘 密竊其所造戰䇿 敎小行者諷之 𢹂訪遲 遲極口稱賞其子善能作文 弉請一看而乃曰 此文者 小行童亦能誦之 遲驚呼來 誦之 果不差一字 遲大怒此子以古文謔戲 卽欲誅之 弉師告云 佛有救護衆生之說 若君不救 吾非佛弟子矣 可捨出家 何如 遲從 用是弉師得之 卽爲大僧 衆莫能及 常對御講論 賜以玉環 見天子更不致禮 但入出有經論酒食婦女之三車隨行 宣公服而疑之 法師亦薄其小乘而疑其神供之說 一日訪宣 特求天供 語論終日而不見其供 法師歸後初至 宣公責之 非時而到 何也 神告曰 非懈怠也 今日師與大乘菩薩議論 毫光罩定徧界 竟無路得入 從此更傾心敬之 故知大乘所非小根之能測底也

慈恩法師; 窺基(632-682) 唐代京兆長安人 俗姓尉遲 字洪道 又稱靈基 乘基 大乘基 基師 或單稱基 俗稱慈恩大師 慈恩法師 其宗派則稱唯識宗或慈恩宗 貌魁偉 稟性聰慧 十七歲出家 奉敕爲玄奘弟子 入廣福寺 後移住大慈恩寺 從玄奘習梵文及佛敎經論 或謂窺基初拒玄奘之命而不斷世欲 行駕三車相隨 前車載經論 中車自乘 後車載家妓 女僕 食饌 遂有三車法師之稱 [百度百科]

行童; 同童行 禪宗寺院對稱於尙未得度之年少行者

宣公; 道宣(596-667) 唐代律僧 又稱南山律師 南山大師 爲南山律宗之祖 浙江吳興人 一說江蘇潤州丹徒人 俗姓錢 字法遍 十六歲出家 從智首法師受具戒 後住於終南山倣掌谷(長安之南) 營建白泉寺 硏究弘宣四分律 其宗派稱南山律宗 曾至各地講說律學 亦參與玄奘之譯場 歷住崇義寺 豐德寺 淨業寺 顯慶三年(658) 奉敕任長安西明寺上座 未久 撰釋門章服儀 釋門歸敬儀等 乾封二年二月 於淨業寺創立戒壇 爲後世建築戒壇之法式 於是年十月入寂 世壽七十二 法臘五十二 諡號澄照 [宋高僧傳十四 大唐內典錄五]

毫光; 白毫光 白毫 世尊兩眉之間 有柔軟細澤之白毫 引之則長一尋(或謂初生時長五尺 成道時長一丈五尺) 放之則右旋宛轉 猶如旋螺 鮮白光淨 一似眞珠 如日之正中 能放光明 稱爲白毫光 眉間白毫相 三十二相之一 法華經一序品 爾時 佛放眉間白毫相光 照東方萬八千世界 靡不周遍

 

자은법사(慈恩法師; 窺基)는 당() 울지장군(尉遲將軍)의 아들이다. 비로소() 나이 10세에 능히 전책(戰䇿)을 지었다(). 부친이 이()를 현명(賢明; )히 여겼다. 현장(玄弉)이 계책(計策; )을 써() 그를 출가시켜 교승(敎乘)을 크게 하려고 했다. 비밀히 그가 지은 바 전책(戰䇿)을 훔쳐() 어린() 행자로 하여금 그것()을 외우게() 했다. 데리고(𢹂) 울지(尉遲; )를 방문(訪問; )하자 울지가 그의 아들이 잘 능히 작문(作文)함을 극구(極口) 칭상(稱賞; 칭찬)했다. 현장이 일간(一看)하기를 청하고는 이에 가로되 차문(此文)이란 것은 어린 행동(行童)도 또한 능히 이()를 외웁니다(). 울지가 놀라서 불러와 그것을 외우게 했다(誦之). 과연 한 자도 어긋나지 않았다. 울지가 대노(大怒)하여 차자(此子; 窺基)가 고문(古文)으로써 학희(謔戲; 調笑戲弄)했다 하며 곧 그()를 죽이려고() 했다. 장사(弉師)가 고운(告云) 불법에 중생지설(衆生之說)을 구호(救護)함이 있습니다. 만약 그대()를 구제하지 못한다면 나는 불제자가 아닙니다. 가히 버려 출가케 함이 어떻겠습니까(何如). 울지가 좇았다. 이를 써(用是) 장사(弉師)가 그()를 얻었고 곧 대승(大僧)이 되자 대중이 능히 미치지 못했다. 늘 대어(對御)하여 강론하면 옥환(玉環)을 하사했다. 천자(天子)를 뵈어도 다시 치례(致禮)하지 않았다. 단지 입출(入出)하면서 경론(經論)ㆍ주식(酒食)ㆍ부녀(婦女)의 삼거(三車)가 수행(隨行)함이 있었다. 선공(宣公; 道宣)이 복종하면서도 그()를 의심했다. 법사(法師)도 또한 그가 소승(小乘)임을 천박(淺薄; )히 여겼지만 그 신공지설(神供之說)을 의심했다. 어느 날 방선(訪宣; 도선을 예방)하여 특별히 천공(天供)을 구했다. 종일 어론(語論)했지만 그 공(; 天供)을 보지 못했다. 법사가 돌아간 후 처음으로 이르자 선공(宣公)이 이()를 책망하되 비시(非時)에 이르니 왜냐. ()이 고왈(告曰) 해태(懈怠)함이 아닙니다. 금일 스님과 대승보살이 의논(議論)하시매 호광(毫光)이 편계(徧界)에 조정(罩定; 덮어 정함)해 마침내() 득입(得入)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로 좇아 다시 경심(傾心)하여 그()를 공경했다. 고로 알지니 대승(大乘)은 소근(小根)이 능히 측저(測底)할 바가 아니다.

慈恩法師; (窺基; 632-682)니 당대 경조 장안 사람. 속성은 울지(尉遲)며 자는 홍도. 또 영기(靈基)ㆍ승기(乘基)ㆍ대승기(大乘基)ㆍ기사(基師)로 호칭하며 혹은 단칭이 기(). 속칭이 자은대사(慈恩大師)ㆍ자은법사며 그의 종파는 곧 호칭이 유식종 혹은 자은종임. 모습이 괴위(魁偉; 체격이 장대하고 훤칠함)하고 품성이 총혜했음. 17세에 출가했으며 칙령을 받들어 현장의 제자가 되어 광복사로 들어갔으며 후에 대자은사로 이주했음. 현장을 좇아 범문 및 불교경론을 학습했음. 혹 이르기를 규기가 애초에 현장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세욕을 단절하지 못한다 하여 3()를 행가(行駕; 부리며 감)하여 상수(相隨)했음. 앞의 수레엔 경론을 실었고 가운데 수레엔 스스로 탔고 뒤의 수레엔 가기(家妓)ㆍ여복(女僕)ㆍ식찬(食饌)을 실었다 하여 드디어 삼거법사(三車法師)란 명칭이 있음 [백도백과].

行童; 동행(童行)과 같음. 선종사원에서 아직 득도하지 못한 연소한 행자에 대한 칭호임.

宣公; 도선(道宣; 596-667)이니 당대 율승. 또 호칭이 남산율사(南山律師)ㆍ남산대사(南山大師)니 남산율종의 시조가 됨. 절강 오흥 사람. 일설엔 강소 윤주 단도 사람. 속성은 전이며 자는 법편. 16세에 출가했고 지수법사를 좇아 구계를 받았음. 후에 종남산 방장곡(장안의 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천사를 영건(營建)하고 사분율을 연구하며 홍선(弘宣)했음. 그의 종파를 일컬어 남산율종이라 함. 일찍이 각지에 이르러 율학을 강설했으며 또한 현장의 역장(譯場)에 참여하기도 했음. 숭의사ㆍ풍덕사ㆍ정업사를 역주(歷住)했음. 현경 3(658) 칙명을 받들어 장안 서명사의 상좌를 맡았음. 오래지 않아 석문장복의ㆍ석문귀경의 등을 지었음. 건봉 22월 정업사에 계단(戒壇)을 창립했는데 후세에 계단을 건축하는 법식이 되었음. 이 해 10월에 입적했음. 세수 72, 법랍 52. 시호는 징조 [송고승전14. 대당내전록5].

毫光; 백호광(白毫光)이니 백호(白毫)는 세존의 두 눈썹 사이에 유연하고 세택(細澤)한 백호(白毫)가 있음. 이것을 당기면 곧 길이가 1(一尋; 혹 이르기를 初生 시에 길이가 5척이며 성도 시에 길이가 15)이며 이것을 놓으면 곧 우선(右旋)하며 완전(宛轉)함이 마치 선라(旋螺)와 같으며 선백(鮮白; 선명하고 결백)하고 광정(光淨)함이 진주와 일사(一似; 똑 같음)하며 마치 해가 정중(正中)에서 능히 광명을 놓음과 같나니 일컬어 백호광이라 함.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32()의 하나. 법화경1 서품. 이때 불타가 미간백호상광(眉間白毫相光)을 놓아 동방 만팔천 세계를 비추어 주편(周遍)하지 않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