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분등록

거사분등록권상(居士分燈錄卷上) 유경신(劉經臣)

태화당 2026. 6. 18. 06:52

劉經臣(智海本逸禪師法嗣)

劉經臣 字興朝 少以逸才登仕版 於佛法未之信 年三十二 會東林總 與語啓廸之 乃敬服 因醉心祖道 旣而抵京師 謁慧林沖 於僧問雪竇如何是諸佛本源 竇曰 千峯寒色 語下有省 歲餘官雒幕 參韶山杲 將去任辭韶 韶曰 公如此用心 何愁不悟 爾後或有非常境界 無量歡喜 宜急收拾 若收拾得去 便成法器 若收拾不得 則有不寧之疾 成失心之患矣 未幾 謁智海逸 請問因緣 逸曰 古人道 平常心是道 你十二時中 放光動地 不自覺知 向外馳求 轉踈轉遠 臣益疑不解 一夕入室 逸擧波羅提尊者對香至王見性是佛之語問臣 不能對 疑甚歸𥨊 至五更覺來 方追念間 見種種異相 表裏洞徹 六根震動 天地回旋 如雲開月現 喜不自勝 忽憶韶山所囑 遂抑之 及明悉以所得告逸 逸曰 更須用得始得 曰 莫要踐履否 逸厲聲曰 這箇是甚麽事 却說履踐 臣默契 遂著明道諭儒篇以警世 曰 明道在乎見性 余之所悟者 見性而已 孟子曰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臭也 四肢之於安逸也 性也 楊子曰 視聽言貌思 性所有也 有見於此 則能明乎道矣 當知道不遠人 人之於道 猶魚之於水 未嘗須臾離也 惟其迷己逐物 故終身繇之而不知 佛曰大覺 儒曰先覺 蓋覺此耳 昔人有言曰 今古應無墜 分明在目前 又曰 大道只在目前 要且目前難覩 欲識大道眞體 不離聲色言語 又曰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起倒鎭相隨 語默同居止 欲識佛去處 只這語聲是 此佛者之語道 爲最親者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瞻之在前也 忽焉在後也 取之左右逢其原也 此儒者之語道最邇者 奈何此道惟可心傳 不立文字 故世尊拈花 而妙心傳於迦葉 達磨面壁 而宗旨付於神光 六葉旣敷 千花競秀 分宗列派 各有門庭 故或瞬目揚眉 擎拳擧指 或行棒行喝 竪拂拈槌 或持叉張弓 輥毬舞笏 或拽石搬土 打皷吹毛 或一默一言 一噓一笑 乃至種種方便 皆是親切爲人 然只爲太親故 人多罔措 瞥然見者 不隔絲毫 其或沈吟 迢迢萬里 欲明道者 宜無忽焉 祖祖相傳 至今不絕 眞得吾儒所謂憤而不發 開而不違者矣 余之有得實在此門 反思吾儒 自有此道 良哉孔子之言 默而識之 一以貫之 故目擊而道存 指掌而意喻 凡若此者 皆合宗門之妙旨 得敎外之眞機 然而孔子之道 傳之子思 子思傳之孟子 孟子旣沒 不得其傳 而所以傳於世者 特文字耳 故余之學 必求自得而後已 幸余一夕開悟 凡目之所見 耳之所聞 心之所思 口之所談 手足之所運動 無非妙者 得之旣久 日益見前 每以與人 人不能受 然後知其妙道果不可以文字傳也 嗚呼 是道也 有其人則傳 無其人則絕 余旣得之矣 誰其似之乎 終余之身 而有其人耶 無其人耶 所不可得而知也 故爲記頌歌語以流播其事 而又著此篇 以諭吾徒云

本逸; 宋代雲門宗僧 福州彭氏 嗣開先善暹 雲門文偃下四世 初住饒之薦福 神宗詔住大相國寺智海禪院 賜號正覺 [歷朝釋氏資鑑十 普燈錄二 續燈錄六]

仕版; 舊指記載官吏名籍的簿冊 亦借指仕途或官場

東林總; 常總(1025-1091) 宋代黃龍派僧 劍州尤谿(四川劍閣)人 俗姓施 字照覺 又稱常聰 十一歲依寶雲寺文兆出家 從契思受具足戒 後隨黃龍慧南 參究二十年 竝嗣其法 慧南歿 住泐潭寶峰寺 後移江州(江西九江)東林寺 元豐三年(1080) 敕改廬山東林律寺爲禪林 師奉命駐錫說法 其徒以爲應慧遠之讖 吾滅七百年後 有肉身大士革吾道場 遂大揚法化 曾與蘇軾交遊 五年 神宗敕主相國寺智海禪院 固辭不受 乃賜紫衣及廣惠禪師之號 元祐三年(1088) 賜號照覺禪師 六年示寂 壽六十七 [禪林僧寶傳二十四 釋氏稽古略四 續傳燈錄十六]

慧林; 若沖 宋代雲門宗僧 又作若冲 江寧府句容(今屬江蘇)人 俗姓鍾 號覺海 自幼出家 後參天衣義懷之法席 經數年開悟 乃嗣義懷之法 歷住宜興善權寺 常州薦福寺 北京福勝寺 西京(河南)法王寺 相國韓絳 太師文彦等 均歸依之 晩年 奉詔住於河南大相國寺慧林禪院 [續傳燈錄八 五燈會元十六]

韶山杲; 宋代雲門宗僧 居西京韶山 得法於東京慧林寺圓照宗本 [續燈錄十五 續傳燈錄十四]

波羅提; 按傳燈錄三第二十八祖菩提達磨章 二十七祖般若多羅順世後 遂演化本國 時有二師 一名佛大先 一名佛大勝多 本與師同學佛陀跋陀小乘禪觀 佛大先旣遇般若多羅尊者 捨小趣大與師並化 時號二甘露門矣 而佛大勝多更分途而爲六宗 第一有相宗 第二無相宗 第三定慧宗 第四戒行宗 第五無得宗 第六寂靜宗 各封己解別展化源 波羅提卽第二無相宗二首領之一 聞師辯析卽悟本心 禮謝於師懺悔往謬 師記曰 汝當得果不久證之 師一一訪之 說破六宗之邪解 六衆咸誓歸依 由是化被南天聲馳五印 後値異見王輕毁三寶 至於國內耆舊爲前王所奉者 悉從廢黜 師令波羅提去彼王所救難

楊子; 楊朱(約前450-約前370)之尊稱 楊姓 字子居 又稱楊生 楊子 楊子居 魏國(一說秦國)人 戰國初期思想家 哲學家 主張貴己重生 人人不損一毫的思想 是道家楊朱學派的創始人 他的見解散見於列子 莊子 孟子 韓非子 呂氏春秋等 [百度百科]

子思; 孔伋 字子思 孔子的嫡孫 孔子之子孔鯉的兒子 大約生於周敬王三十七年(483) 卒於周威烈王二十四年(402) 享年八十二歲 春秋時期著名的思想家 受敎於孔子的高足曾參 孔子的思想學說由曾參傳子思 子思的門人再傳孟子 後人把子思孟子並稱爲思孟學派 [百度百科]

 

유경신(劉經臣)(智海 本逸禪師法嗣)

유경신(劉經臣)은 자가 흥조(興朝)며 젊어서 뛰어난 재능으로 사판(仕版)에 올랐다. 불법을 믿지 않았는데 나이 32에 동림총(東林總; 常總)을 만나 더불어 말하면서 그를 계적(啓廸; 開導. 啓發)하였고 이에 경복(敬服)했고 인하여 조도(祖道)에 취심(醉心)했다. 기이(旣而; 隨後, 不久) 경사(京師)에 다다라 혜림충(慧林沖; 若沖)을 참알했다. (하되) 중이 설두(雪竇; 重顯)에게 묻되 무엇이 이 제불의 본원(本源)입니까. 두왈(竇曰) 천봉(千峯)이 한색(寒色)이다에서 어하(語下)에 성찰이 있었다. 세여(歲餘; 1년 남짓한 동안)에 낙막(雒幕)에 임관(任官; )했는데 소산고(韶山杲; 宗本法嗣)를 참()했다. 장차 가서 임직(任職; )하려고 소산에게 고별하자 소왈(韶曰) ()이 이와 같이 용심(用心)하거늘 어찌 불오(不悟)를 수심하겠습니까. 이후(爾後)에 혹 비상(非常)한 경계가 있으면 무량하게 환희하리니 의당 급히 수습(收拾)하십시오. 만약 수습함을 얻어 간다면 바로 법기(法器)를 이루려니와 만약 수습함을 얻지 못한다면 곧 안녕치 못한 질환이 있어 실심(失心)의 우환을 이룰 것입니다. 미기(未幾; 오래지 않음)에 지해일(智海逸; 本逸)을 참알하여 인연을 청문(請問)하자 일왈(逸曰) 고인이 말하기를 평상심이 이 도()라 했다. 네가 12시 중에 방광(放光)하여 동지(動地)하면서 스스로 각지(覺知)하지 못하고 밖을 향해 치구(馳求)하니 더욱 소()하고 더욱 원()하다. 경신(經臣)이 더욱() 의심하며 풀리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一夕) 입실하자 본일(本逸)이 거()했다. 바라제(波羅提) 존자(尊者)가 향지왕(香至王)을 대해 견성(見性)이 이 부처입니다라고 한 말로 경신에게 묻자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의심이 심했고 돌아가 취침(就寢; 𥨊)했는데 5()에 이르러 깨어나서(覺來) 바야흐로 추념(追念)하는 사이에 갖가지 이상(異相)을 보았는데 표리(表裏)가 통철(通徹)했고 6()이 진동(震動)했고 천지가 회선(回旋)했으니 구름이 열려 달이 나타남과 같았고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했다. 홀연히 소산(韶山)이 부촉한 바를 기억했다. 드디어 억제(抑制; )하고 천명(天明; )에 이르러() 모두() 얻은 바를 본일에게 고하자 일왈(逸曰) 다시 꼭 씀을 얻어야 비로소 옳다. 가로되 천리(踐履; 履踐)를 요하지 않습니까. 본일이 엄한() 소리로 가로되 저개(這箇)가 이 무슨 일인데 도리어 이천(履踐)을 말하느냐. 경신이 묵계(默契)했다. 드디어 명도유유편(明道諭儒篇)을 지어 경세(警世)했으니 가로되 명도(明道)는 견성에 있나니 내가 깨친 바는 견성일 따름이다. 맹자(孟子)가 가로되 입의 미()와 눈의 색()과 귀의 소리와 코의 냄새()와 사지(四肢)의 안일(安佚; 安逸)은 성()이다. 양자(楊子)가 가로되 시()ㆍ청()ㆍ언()ㆍ모()ㆍ사()는 성()의 소유(所有)니 여기에서 봄이 있다면 곧 능히 도를 밝힌다 했다. 마땅히 알지라,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에게 도(人之於道)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아서() 일찍이 수유(須臾)라도 여의지 않거늘 오직 그 미기축물(迷己逐物)하는지라 고로 종신(終身)토록 이를 말미암으면서() 알지 못한다. (; 불교)은 가로되 대각(大覺)이며 유(; 유교)는 가로되 선각(先覺)이라 하나니 대개 이것을 깨침()일 뿐이다. 석인(昔人)이 말이 있어 가로되 금고(今古)에 응당 추락함이 없이 분명히 목전에 있다. 우왈(又曰) 대도(大道)가 다만 목전에 있지만/ 오차(要且; 도리어) 목전에서 보기 어렵다/ 대도의 진체(眞體)를 알고자 한다면/ 성색과 언어를 여의지 않는다(寶誌語). 우왈(又曰)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도리어 함께 일어나나니/ 기도(起倒)에 늘() 서로 따르고/ 어묵(語默)에 함께 거지(居止)한다/ 부처의 거처(去處)를 알고자 하느냐/ 다만 이 어성(語聲)이 이것이다(傅翕). 이것이 불자(佛者)가 도를 말함이니 가장 친절한 것이다. 선 즉 그것이 앞에 섞였음()을 보고 수레(輿)에 있은 즉 그것이 가로장(; 가로로 건너지른 나무 막대기)에 기대었음을 보고 쳐다보매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나니 이를 취하매 좌우에서 그 근원(根源; )을 만난다. 이것은 유자(儒者)가 도를 말하는 가장 가까운() 것이다. 이 도는 오직 가히 마음으로 전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음을 어찌하겠는가(奈何). 고로 세존이 염화(拈花)하여 묘심(妙心)을 가섭에게 전하고 달마가 면벽하며 종지(宗旨)를 신광(神光; 慧可)에게 부촉했다. 6()이 이미 퍼지매() 천화(千花)가 경수(競秀)하여 분종열파(分宗列派)하여 각기 문정(門庭)이 있다. 고로 혹 눈을 깜작이고 눈썹을 치키고(瞬目揚眉) 주먹을 받들고 손가락을 들고(擎拳擧指) 혹 방을 행하고 할을 행하고(行棒行喝) 불자를 세우고 망치를 잡고(竪拂拈槌) 혹 작살을 가지고 활을 당기고(持叉張弓; 저본에 로 지었음) 공을 굴리고 홀을 춤추고(輥毬舞笏) 혹 돌을 끌어당기고 흙을 나르고(拽石搬土) 북을 치고 털을 불고(打鼓吹毛) 혹 일묵일언(一默一言)하고 일허일소(一噓一笑)하고 내지 갖가지 방편이 모두 이 친절히 위인(爲人)함이다. 그러나 다만 너무 친절한 연고로 사람들이 많이 망조(罔措)했다. 별연(瞥然)히 본 자는 사호(絲毫)도 막히지 않겠지만 그 혹 침음(沉吟)하여 초초(迢迢; 아주 멂)하기가 만 리니 도를 밝히고자 하는 자는 의당 소홀(疏忽; )함이 없어야 한다. 조조(祖祖)가 상전(相傳)하여 지금토록 끊기지 않으니 오유(吾儒)가 이르는 바 분()하면서 불발(不發)하고 개(; 開發)하매 불위(弗違)하는 것을 참으로 얻었음이다. 내가 얻음이 있음은 실로 차문(此門)에 있나니 오유(吾儒)를 돌이켜 사유하매(反思) 저절로 그 도가 있다. 양재(良哉), 공자(孔子)의 말씀이여, 묵이지지(默而識之; 묵묵히 그것을 기록함)하고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니 고로 목격(目擊)하매 도가 존재하고 지장(指掌)하매 뜻으로 깨닫는다(). 무릇() 이와 같은() 자는 모두 종문의 묘지(妙旨)에 합하고 교외(敎外)의 진기(眞機)를 얻는다. 그러하여 공자의 도는 자사(子思)에게 전했고 자사는 맹자에게 전했다. 맹자가 이미 몰(; 죽다)하매 그 전()을 얻지 못했으며 세상에 전()한 소이(所以)란 것은 특별한 문자일 뿐이다. 고로 나의 학()은 반드시 구하여 자득(自得)한 후일 따름이다. 다행히 내가 일석(一夕)에 개오(開悟)하매 무릇 눈으로 보는 바와 귀로 듣는 바와 마음으로 사유하는 바와 입으로 말하는 바와 수족(手足)으로 운동하는 바가 묘()가 아님이 없다. 이를 얻음이 이미 오래되었고 날로 현전(見前)을 더하여() 매양 사람에게 시여(施與; )했지만 사람이 능히 받지를 못했으니 연후에 그 묘도(妙道)는 과연 가히 문자로써 전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오호(嗚呼), 이 도는 그 사람(其人)이 있으면 곧 전하지만 그 사람이 없으면 곧 단절된다. 내가 이미 이를 얻었거니와 누가 그것과 비슷하겠는가. 나의 몸이 마치도록 그 사람이 있겠는가 그 사람이 없겠는가. 앎을 가히 얻지 못할 바이다. 고로 송가어(頌歌語)를 기록하여 그 일을 유파(流播)하고 또 차편(此篇)을 지어() 오도(吾徒)에게 고지(告知; )한다.

本逸; 송대 운문종승. 복주 팽씨. 개선선섬(開先善暹)을 이었으니 운문문언하 4. 처음에 요()의 천복(薦福)에 거주했음. 신종이 불러 대상국사 지해선원(智海禪院)에 주()하게 하고 정각이란 호를 주었음 [역조석씨자감10. 보등록2. 속등록6].

仕版; 옛적에 관리의 명적(名籍)을 기재한 부책(簿冊)을 가리킴. 또 사도(仕途; 벼슬길)나 혹 관장(官場; 政界)을 가차(假借)하여 가리킴.

東林總; 상총(常總; 1025-1091)이니 송대 황룡파승. 검주 우계(사천 검각) 사람이며 속성은 시()며 자는 조각(照覺)이니 또 명칭이 상총(常聰). 11세에 보운사 문조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계사를 좇아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황룡혜남(黃龍慧南)을 따르며 참구하기 20년이었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혜남이 죽자 늑담 보봉사에 주()했고 후에 강주(강서 구강) 동림사(東林寺)로 옮겼음. 원풍 3(1080) 칙명으로 여산 동림율사(東林律寺)를 고쳐 선림으로 삼았는데 스님이 명을 받들어 주석하며 설법했음. 그 도중이 혜원(慧遠)의 참()에 응함으로 삼았으니 내가 멸한 후 7백 년 후 육신대사(肉身大士)가 있어 나의 도량을 혁신하리라 했다 함. 드디어 법화를 크게 날렸음. 일찍이 소식(蘇軾)과 교유했음. 5년 신종이 칙령해 상국사 지해선원을 주지하라 했으나 고사하고 받지 않았음. 이에 자의(紫衣) 및 광혜선사(廣惠禪師)의 호를 주었음. 원우 3(1088) 조각선사(照覺禪師)란 호를 주었고 6년에 시적했음. 나이 67 [선림승보전24. 석씨계고략4. 속전등록16].

慧林冲; 약충(若沖)이니 송대 운문종승. 또 약충(若冲)으로 지음. 강녕부 구용(지금 강소에 속함) 사람이니 속성은 종()이며 호는 각해. 어릴 적부터 출가했고 후에 천의의회(天衣義懷)의 법석에 참하여 몇 년을 경과하자 개오했으며 이에 의회의 법을 이었음. 의흥 선권사ㆍ상주 천복사ㆍ북경 복승사ㆍ서경(하남) 법왕사를 역주(歷住)했음. 상국 한강(韓絳)과 태사 문언(文彦) 등이 균등히 그에게 귀의했음. 만년에 봉조(奉詔)하여 하남 대상국사 혜림선원에 주()했음 [속전등록8. 오등회원16].

韶山杲; 송대 운문종승. 서경 소산에 거주했고 동경 혜림사 원조종본(圓照宗本)에게서 득법했음 [속등록15. 속전등록14].

波羅提; 전등록3 28조 보리달마장을 안험컨대 27조 반야다라가 순세(順世)한 후 드디어 본국에서 연화(演化)했음. 당시에 2()가 있었으니 하나는 이름이 불대선(佛大先)이며 하나는 이름이 불대승다(佛大勝多)였는데 본래 스님과 더불어 불타발타(佛陀跋陀)의 소승선관(小乘禪觀)을 동학(同學)했음. 불대선은 이미 반야다라존자를 만나 소승을 버리고 대승으로 취향해 스님과 더불어 병화(並化)했으며 당시에 호하기를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 했음. 불대승다는 다시 분도(分途)하여 6()이 되었으니 제1은 유상종(有相宗)이며 제2는 무상종(無相宗) 3은 정혜종(定慧宗)이며 제4는 계행종(戒行宗)이며 제5는 무득종(無得宗)이며 제6은 적정종(寂靜宗)이었음. 각기 기해(己解)를 봉()하고 화원(化源)을 별전(別展)했는데 바라제(波羅提)는 곧 제2 무상종 두 수령의 하나였음. 스님의 변석(辯析)을 듣고 곧 본심을 깨달았고 스님에게 예사(禮謝)하고 왕류(往謬)를 참회했음. 스님이 수기하여 가로되 너는 마땅히 득과(得果)하며 오래지 않아 증득하리라. 스님이 하나하나 그들을 방문하여 6종의 사해(邪解)를 설파(說破)했고 6()이 모두 귀의를 맹서했음. 이로 말미암아 교화가 남천(南天)에 미치며 명성이 5()을 달렸음. 후에 이견왕(異見王)3()를 경훼(輕毁)함을 만나 국내의 기구(耆舊)에 전왕(前王)을 위해 받들던 자들이 모두 따라서 폐출(廢黜)됨에 이르자 스님이 바라제를 시켜 그 왕의 처소에 가게 해 난()을 구하게 했음.

楊子; 양주(楊朱; 450-370)의 존칭. 양성(楊姓)이며 자는 자거(子居)니 또 명칭이 양생(楊生)ㆍ양자(楊子)ㆍ양자거(楊子居). 위국(魏國; 一說秦國) 사람이며 전국 초기의 사상가며 철학가. 귀기중생(貴己重生; 자기를 존귀하게 여기고 생을 존중하다)하여 사람마다 한 터럭이라도 손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했음. 이는 도가(道家) 양주학파(楊朱學派)의 창시인임. 그의 견해는 열자ㆍ장자ㆍ맹자ㆍ한비자ㆍ여씨춘추 등에 흩어져 보임 [백도백과].

子思; 공급(孔伋)이니 자가 자사. 공자의 적손(嫡孫)이니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의 아들임. 대약(大約) 주경왕(周敬王) 37(483)에 출생하여 주 위열왕(威烈王) 24(402)에 죽었으니 향년은 82. 춘추시기 저명한 사상가며 공자의 고족(高足) 증삼(曾參)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음. 공자의 사상과 학설이 증삼으로 말미암아 자사에게 전해졌고 자사의 문인이 다시 맹자에게 전했음. 후인이 자사와 맹자를 가지고 병칭하여 사맹학파(思孟學派)라 함 [백도백과].

 

贊曰 儒釋從來元一貫 祇爲時人眼不開 雖然如是 昔高峰和尙 嘗擧六祖不會佛法公案 頌曰 祖師不會禪 夫子不識字 棒打石人頭 嚗嚗論實事 恁麽看來 劉居士也須惜取眉毛好

高峰; 原妙(1238-1295) 南宋楊岐派僧 江蘇吳江人 俗姓徐 號高峰 十五歲剃髮 十七歲受業於嘉禾密印寺法住 初習天台 轉而參禪 首詣斷橋妙倫 其後參禮雪巖祖欽(楊岐下九世) 得其心法 咸淳二年(1266) 隱居於臨安龍鬚寺 五年 偶爲同參推枕墜地 聞響而徹悟 咸淳十年 住武康雙髻峰 至元十六年(1279) 入杭州天目山西峰 開創獅子大覺二刹 弟子數百人 受戒者及數萬 元貞元年 焚香說偈坐化 壽五十八 諡號普明廣濟禪師 有語錄二卷行世 弟子有明本等 [續燈錄五 南宋元明禪林僧寶傳八 續稽古略一]

六祖不會佛法; 六祖壇經 一僧問師云 黃梅意旨 甚麽人得 師云 會佛法人得 僧云 和尙還得否 師云 我不會佛法

夫子; 一古時對男子的尊稱 二舊時稱呼學者或老師 三舊時稱自己的丈夫 四特指孔子

嚗嚗; 嚗 放杖聲 莊子知北遊 神農隱几擁杖而起 嚗然放杖而笑 又怒聲 集韻 嚗 怒聲

 

찬왈(贊曰) 유석(儒釋)이 종래(從來)로 원래 일관(一貫; 한 꿰미)이나 다만() 시인(時人)이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옛적에 고봉화상(高峰和尙; 原妙)이 일찍이 6조의, 불법을 알지 못한다는 공안(六祖不會佛法公案)을 들고 송왈(頌曰) 조사는 선()을 알지() 못하고/ 부자(夫子; 孔子)는 글자를 알지() 못한다/ (; 拄杖子)으로 석인(石人)의 머리를 때리매/ 박박(嚗嚗)하며 실사(實事)를 논한다. 이렇게(恁麽) 보아오매 유거사(劉居士; 劉經臣)도 또한 꼭 눈썹을 아껴야(惜取眉毛) 좋으리라.

高峰; 원묘(原妙; 1238-1295)니 남송 양기파승. 강소 오강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서()며 호는 고봉(高峰). 15세에 머리를 깎았고 17세에 가화 밀인사의 법주(法住)에게 수업(受業)했음. 처음엔 천태(天台)를 학습했고 돌이켜 참선했음. 먼저 단교묘륜(斷橋妙倫)에게 나아갔고 그 후에 설암조흠(雪巖祖欽; 양기하 9)을 참례(參禮)하여 그의 심법(心法)을 얻었음. 함형 2(1266) 임안의 용수사(龍鬚寺)에 은거했음. 5년 우연히 동참(同參)이 베개를 밀어 땅에 떨어졌는데 울림()을 듣다가 철오(徹悟)했음. 함형 10년 무강(武康)의 쌍계봉(雙髻峰)에 머물다가 지원 16(1279) 항주의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峰)에 들어가 사자(獅子)ㆍ대각(大覺) 2()을 개창했음. 제자가 수백 사람이었으며 수계(受戒)한 자가 수만에 이르렀음. 원 정원년(貞元年) 분향하고 게를 설하고 좌화(坐化)했으니 나이는 58이며 시호는 보명광제선사. 어록 2권이 있어 행세(行世)하며 제자에 명본(明本) 등이 있음 [속등록5. 남송원명선림승보전8. 속계고략1].

六祖不會佛法; 육조단경 한 중이 스님에게 물어 이르되 황매(黃梅)의 의지(意旨)를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중이 이르되 화상은 도리어 얻었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不會佛法).

夫子; 1. 고시대 남자에 대한 존칭. 2. 구시 학자나 혹 노사의 칭호. 3. 구시 자기의 장부의 호칭. 4. 특별히 공자를 가리킴.

嚗嚗; ()은 지팡이를 놓는 소리. 장자 지북유 신농이 안석에 기대었다가 지팡이를 안고 일어나더니 박연(嚗然)하며 지팡이를 놓고 웃었다. 또 노한 소리니 집운 박() 노성(怒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