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분등록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조변(趙抃)

태화당 2026. 6. 19. 07:57

趙抃(佛慧法泉禪師法嗣)

趙抃 字悅道 自號知非子 晝之所爲 夜必焚香告天 宋至和中爲侍御 彈劾不避貴戚 居甞以一琴一鶴自隨 有僧上詩曰 須向維摩頂上行 嗣後擯去聲色 繫心宗敎 從天鉢寺重元禪師問道 會佛慧法泉居衢之南禪 抃日參扣 泉未嘗容措一詞 後牧靑州政事之餘 多宴坐 忽大雷震 卽契悟 作偈曰 默坐公堂虗隱几 心源不動湛如水 一聲霹靂頂門開 喚起從前自家底 擧頭蒼蒼喜復喜 刹刹塵塵無不是 中下之人不得聞 妙用神通而已矣 泉聞笑曰 趙悅道撞彩耳 富鄭公弼 初於宗門 未有所趣 抃勉之 書曰 抃思西方聖人敎外別傳之法 不爲中下根機之所設也 上智則頓悟而入 一得永得 愚者則迷 而不復千差萬別 惟佛與祖以心傳心 其利生接物 而不得已者 遂有棒喝拳指 揚眉瞬目 拈椎竪拂 語言文字種種方便 去聖逾遠 諸方學徒 忘本逐末 棄源隨波 滔滔皆是 斯所謂可憐憫者矣 抃不侫 去年秋 初在靑州 因有所感 旣已稍知本性無欠無餘 古人謂安樂法門 信不誣也 比蒙太傅侍中 俾求禪錄 抃素出恩紀 聞之喜快 不覺手舞而足蹈 伏惟執事 富貴如是之極 道德如是之盛 福壽康寧如是之備 退休閒逸如是之高 其所未甚留意者 如來一大事因緣而已 今茲又復於眞性有所悟入 抃敢爲賀於門下也 年七十二致仕歸三衢 與山僧野老往來無間 名所居爲高齋 題偈曰 腰佩黃金已退藏 箇中消息也尋常 時人要識高齋老 只是柯村趙四郞 復曰 切忌錯認 臨終遺泉書 曰非老師平日警誨 至此必不得力矣 遂徧辭親友 其子㞦問後事 抃厲聲叱之 少頃語如平時 趺坐而化 壽七十七 諡淸獻 泉悼以偈曰 仕也邦爲瑞 歸歟世作程 人間金粟去 天上玉樓成 慧劍無纖缺 氷壺徹底淸 春風瀫水路 孤月照雲明

法泉; 宋代雲門宗僧 隨州(湖北隨縣南)人 俗姓時 自幼才敏 依龍居山智門院之信玘出家 受具足戒後 參雲居曉舜(雲門下四世) 竝嗣其法 初住大明寺 次住千頃 雲居 南明 蔣山 又奉詔住於大相國寺智海禪院 諡號佛慧禪師 又以師一生遍覽群籍 所讀之書無以計量 故世人多美稱爲泉萬卷 [證道歌事實一 續燈錄十一 釋氏稽古略四 續傳燈錄十一]

侍御; 侍御之官名 尙書冏命曰 今予命汝作大正 正于羣僕侍御之臣

宗敎; 一宗門之敎意 二禪宗與敎宗 此指一

重元; (?-10781085) 宋代雲門宗僧 號文慧 靑州千乘(山東廣饒)孫氏 年十七出家 冠歲圓具 初遊講肆 頗達敎乘 後慕禪寂 參天衣義懷得法 懷曰 此吾家千里駒也 凡四主名藍 寂於北京天鉢寺 太師文彦博爲收舍利建塔 [五燈會元十六 釋氏稽古略四 普燈錄三]

刹刹塵塵; 無數國土之謂 或比喩數量極多

撞彩; 與喝彩同義

利生接物; 又作接物利生 卽接引化導世間衆生 相應其種種機根 而給與利益

揚眉瞬目; 禪家示機應機時的特殊動作 亦泛指禪機作略 亦作瞬目揚眉

拈椎; 拈椎拂 拈起椎棒 竪起拂子 是禪家示機應機的常用動作 泛指禪機作略 椎 亦作槌

侍中; 原爲正規官職外的加官之一 因侍從皇帝左右 地位漸高 等級超過侍郞 魏晉以後 往往成爲事實上的宰相 唐宋該職得以沿置以至元 元以後廢止 [百度百科]

恩紀; 指恩澤惠及他人的情誼關系

手舞而足蹈; 手舞足蹈 形容人極度高興時的動作狀態 孟子離婁上 不知足之蹈之 手之舞之

執事; 此指古代官員或管事者

三衢; 浙江衢州府 州有三衢山 故名 [大慧書栲栳珠]

題偈; 題 寫上 簽署 如題詩 題字

 

조변(趙抃)(佛慧 法泉禪師法嗣)

조변(趙抃; 1008-1084)은 자가 열도(悅道)며 자호(自號)가 지비자(知非子). 낮에 한 바를 밤이면 반드시 분향하고 고천(告天)했다. () 지화(至和; 1054-1055) 중 시어(侍御)가 되었고 탄핵(彈劾)에 귀척(貴戚; 帝王의 친족)을 피하지 않았다. 거상(居甞; 평상시)에 일금일학(一琴一鶴)을 스스로 따랐다. 어떤 승인이 상시(上詩)하여 가로되 모름지기 유마(維摩)의 정상(頂上)을 향해 행하십시오. 사후(嗣後; 隨後) 성색(聲色)을 빈거(擯去)하고 종교(宗敎; 宗門敎意)에 계심(繫心)했다. 천발사(天鉢寺) 중원선사(重元禪師)를 좇아 문도(問道)했다. 마침() 불혜법천(佛慧法泉)이 구(; 衢州)의 남선(南禪)에 거주하는지라 조변이 일상(日常; ) 참구(參扣)했으나 법천이 일찍이 일사(一詞)도 둠을 용납하지 않았다. 후에 청주(靑州)를 다스리면서() 정사(政事)의 여가(餘暇; )에 연좌(宴坐)함이 많았다. 홀연히 대뢰(大雷)가 진동(震動)하매 곧 계오(契悟)했다. 작게(作偈)하여 가로되 공당(公堂)에 묵좌(默坐)하여 공허(空虗; )히 궤안(几案; )에 기댔는데()/ 심원(心源)이 부동(不動)하여 맑기()가 물과 같다/ 일성벽력(一聲霹靂)에 정문(頂門; 정수리)이 열려/ 종전(從前)의 자가(自家)의 것을 환기(喚起)했다/ 거두(擧頭)하매 창창(蒼蒼)하여 기쁘고 다시 기쁘나니/ 찰찰진진(刹刹塵塵)이 이것 아님이 없다/ 중하지인(中下之人)은 들음을 얻지 못하나니/ 묘용(妙用)과 신통(神通)일 따름이다. 법천(法泉; )이 듣고 웃으며 가로되 조열도(趙悅道)가 당채(撞彩; 喝彩)했을 뿐이다. 부정공필(富鄭公弼; 富弼)이 처음엔 종문에 소취(所趣)가 있지 않았다. 조변(趙抃)이 권면(勸勉; )했는데 서신(書信; )에 가로되 조변이 서방(西方) 성인(聖人)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법을 사유하건대 중하근기(中下根機)를 위해 베푼 바가 아닙니다. 상지(上智)는 곧 돈오(頓悟)하여 들어가 한 번 얻으매 영원히 얻거니와 우자(愚者)는 곧 미()하여 다시 천차만별 만이 아닙니다. 오직 부처와 조사가 이심전심(以心傳心)했거니와 그 이생접물(利生接物)하면서 부득이(不得已)한 것은 드디어 방할권지(棒喝拳指)ㆍ양미순목(揚眉瞬目)ㆍ염추수불(拈椎竪拂)과 어언문자(語言文字)의 갖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성인과의 떨어짐이 더욱 멀어져(去聖逾遠) 제방의 학도(學徒)가 망본축말(忘本逐末)하고 기원수파(棄源隨波)하여 도도(滔滔)함이 모두 이것이니 이것()은 이른 바 가히 연민(憐憫)할 자입니다. 조변은 아첨(阿諂; )하지 않나니 지난해 가을, 처음 청주(靑州)에 있으면서 소감(所感)이 있음으로 인해 기이(旣已; 隨後; 不久) 본성이 무흠무여(無欠無餘)한 줄 조금() 알았습니다. 고인이 이르되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하니 참으로() 속이지() 않음입니다. 요사이() 태부시중(太傅侍中; 富鄭公을 가리킴)이 선록(禪錄)을 비구(俾求; 사람을 시켜 구함)함을 입으매() 조변이 본디() 은기(恩紀)를 낸지라 이를 듣고 희쾌(喜快)하여 불각에 손이 춤추고 발이 굴렀습니다(手舞而足蹈). 복유(伏惟)컨대 집사(執事)께서 부귀는 이와 같이 극(; 至極)하고 도덕은 이와 같이 성(; 盛大)하고 복수(福壽)와 강녕(康寧)은 이와 같이 갖추고() 퇴휴(退休)하여 한일(閑逸; 한가하고 편안함)함은 이와 같이 높으시거니와 그 심히 유의(留意)하지 못하는 바의 것은 여래(如來)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일 따름입니다. 금자(今茲; 今此. 현재)에 또 다시 진성(眞性)에 오입한 바가 있다 하시니 조변이 감()히 문하(門下; 타인에 대한 敬稱)를 경하(慶賀; )합니다. 나이 72에 치사(致仕; 退休)하고 삼구(三衢)로 돌아갔고 산승(山僧)ㆍ야로(野老)와 더불어 왕래하며 간격이 없었고 소거(所居)를 이름해 고재(高齋)라 하였다. 제게(題偈)하여 가로되 허리에 황금을 차고() 이미 퇴장(退藏)하였나니/ 개중(箇中; 此中)의 소식(消息)이 또한 심상(尋常)하다/ 시인(時人)이 고재로(高齋老; 고재 노인)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 가촌(柯村)의 조사랑(趙四郞; 趙家四男)이다. 부왈(復曰) 착인(錯認)함을 절기(切忌)한다. 임종(臨終)에 법천(法泉)에게 글을 남겼으니 가로되 노사(老師)의 평일의 경회(警誨)가 아니었다면 여기에 이르러 반드시 득력(得力)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두루 친우(親友)에게 고별했다(). 그의 아들 기()가 후사(後事)를 묻자 조변이 여성(厲聲; 엄한 소리)으로 그()를 꾸짖었다. 소경(少頃; 잠시 동안)에 말이 평시와 같더니 부좌(趺坐)하여 화()했다. 나이는 77이며 시()는 청헌(淸獻)이다. 법천이 게로써 애도(哀悼; )해 가로되 벼슬하매() 방국(邦國; )에 상서(祥瑞; )가 되었고/ 돌아가매 세상의 정도(程途; )를 지었다/ 인간엔 금속(金粟)이 떠났고/ 천상엔 옥루(玉樓)가 이루어졌다/ 혜검(慧劍)은 섬호(纖毫; )의 결점(缺點; )이 없고/ 빙호(氷壺)는 철저히 맑다/ 춘풍이 수로(水路)를 울리고(; 물소리 곡)/ 고월(孤月)이 구름을 비추어 밝다.

法泉; 송대 운문종승. 수주(호북 수현 남쪽) 사람이며 속성은 시(). 어릴 적부터 재주가 민첩했음. 용거산 지문원의 신기(信玘)에게 의지해 출가했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 운거효순(雲居曉舜; 운문하 4)을 참알(參謁)하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처음엔 대명사(大明寺)에 주()했고 다음에 천경(千頃)ㆍ운거(雲居)ㆍ남명(南明)ㆍ장산(蔣山)에 주()했으며 또 조서(詔書)를 받들어 대상국사(大相國寺) 지해선원(智海禪院)에 주()했음. 시호는 불혜선사(佛慧禪師). 또 스님이 일생 동안 군적(群籍)을 편람(遍覽)하면서 읽은 바의 서적을 계량(計量)하지 못하는지라 고로 세인이 많이 미칭(美稱)하여 천만권(泉萬卷)이라 했음 [증도가사실1. 속등록11. 석씨계고략4. 속전등록11].

侍御; 시어(侍御)의 벼슬 이름은 상서 경명(冏命)에 가로되 이제 내가 너에게 명하여 대정(大正)을 삼나니 군복(羣僕)과 시어(侍御)의 신()을 바르게() 하라.

宗敎; 1. 종문의 교의(敎意). 2. 선종과 교종. 여기에선 1을 가리킴.

重元; (?-1078 1085) 송대 운문종승. 호는 문혜며 청주 천승(산동 광요) 손씨. 나이 17에 출가했고 관세(冠歲; 20)에 원구(圓具)했음. 처음 강사(講肆)에 노닐며 자못 교승(敎乘)을 통달했고 후에 선적(禪寂)을 흠모했음. 천의의회(天衣義懷)를 참해 득법했음. 의회가 가로되 이는 오가(吾家)의 천리구(千里駒). 무릇 명람(名藍)을 네 번 주지했고 북경 천발사(天鉢寺)에서 적()했음. 태사 문언박이 사리를 거두어 탑을 세웠음 [오등회원16. 석씨계고략4. 보등록3].

刹刹塵塵; 무수한 국토를 말함. 혹 수량의 극다(極多)에 비유함.

撞彩; 갈채(喝彩)와 같은 뜻.

利生接物; 또 접물애생(接物利生)으로 지음. 곧 세간의 중생을 접인하여 화도(化導)함이니 그 갖가지의 기근(機根)에 상응해 이익을 급여함임.

揚眉瞬目; 선가에서 시기응기(示機應機)할 때의 특수한 동작이니 또한 널리 선기(禪機)의 작략(作略)을 가리킴. 또한 순목양미로 지음.

拈椎; 염추수불(拈椎)과 같음. 추방(椎棒; 몽둥이)을 집어 일으키고 불자를 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선가에서 시기응기(示機應機)하는 상용의 동작임. 널리 선기의 작략을 가리킴. ()는 또 추()로 지음.

侍中; 원래는 정규 관직 밖의 가관(加官)의 하나가 됨. 황제의 좌우를 시종(侍從)함으로 인해 지위가 점차 높아져 등급이 시랑을 초과했음. 위진(魏晉) 이후 왕왕 사실상의 재상이 되었음. 당ㆍ송에서 그 직을 연치(沿置; 따라 설치)함을 얻었고 원()에 이르렀음. 원 이후에 폐지했음 [백도백과].

恩紀; 은택의 은혜가 타인에게 미치는 정의(情誼)의 관계.

手舞而足蹈; 수무족도(手舞足蹈)는 사람이 극도로 고흥(高興)일 때의 동작의 상태를 형용함. 맹자 이루상. 발이 밟는지 손이 춤추는지를 알지 못하다.

執事; 여기에선 고대의 관원이나 혹 관사자(管事者)를 가리킴.

三衢; 절강 구주부(衢州府) ()에 삼구산(三衢山)이 있는지라 고로 이름했음 [대혜서고로주].

題偈; ()는 사상(寫上; 위에 서사함). 첨서(簽署; 문건에 자기의 이름을 쓰고 수결을 둠). 예컨대() 제시(題詩). 제자(題字).

 

贊曰 霹靂頂門開 有麽有麽 喚起自家底 作麽作麽 趙悅道撞彩 却較些子 雖然如是 放過則不可 扇子𨁝跳上三十三天 築著帝釋鼻孔 東海鯉魚打一棒 雨似盆傾

 

찬왈(贊曰) 벽력에 정문(頂門)이 열렸다 하니 있느냐 있느냐. 자가의 것(自家底)을 환기(喚起)했다 하니 무엇이라고(作麽) 무엇이라고. 조열도(趙悅道)가 당채(撞彩)했다 하니 도리어 조금은 상당하다(較些子).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방과(放過; 放棄)하면 곧 불가(不可)하다. 부채(扇子)가 펄쩍 뛰어(𨁝跳)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올라 제석(帝釋)의 비공(鼻孔)을 축착(築著; 찌르다)하고 동해의 이어(鯉魚; 잉어)를 일방(一棒) 때리매 비가 동이()를 기운() 것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