范鎭
字景仁 累官翰林學士 或問鎭 何以不信佛 鎭曰 爾必待我合掌膜拜 然後爲信耶 黃庭堅一日過 鎭終日相對正身端坐 未嘗回顧 亦無倦色 鎭曰 吾二十年來 胸中未嘗起一思慮 二三年來 不甚觀書 若無賓客 終日獨坐 夜分方睡 雖兒曹歡呼 咫尺皆不聞 堅曰 公却是學佛作家
●黃庭堅; (1045-1105) 宋代黃龍派居士 洪州分寧人 字魯直 號山谷 擅長詩 文 詞 草書 擧進士曾入仕途 政績卓著 然以黨見遭謫貶 嗣黃龍祖心(1025-1100)之法 嘗遊學安徽山谷寺 自號山谷道人 晩年築精舍於涪濱 修行淨土之法 又號涪翁 門人於其逝世後 私諡文節先生 又其所作之詩文 廣爲流行於日本足利時代之五山僧人之間 日本漢文學史之影響頗鉅 著有山谷內外集 別集等 [宋史四四四 宋史新編一七一 元祐黨人傳四 五燈會元十七]
●咫尺; 指很近的距離 八寸爲咫
범진(范鎭; 1008-1089)
자(字)가 경인(景仁)이며 누관(累官; 공을 쌓아 벼슬이 올라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범진에게 혹 묻되 무엇 때문에(何以) 부처를 믿지 않는가. 진왈(鎭曰) 너(爾)는 반드시 내가 합장(合掌)하고 막배(膜拜; 오래 꿇어앉아 예배함)함을 기다린 연후에 믿는다고 하겠는가. 황정견(黃庭堅)이 어느 날 이르렀다(過). 범진이 종일 상대하면서 정신(正身)으로 단좌(端坐)했고 일찍이 회고(回顧; 돌아보다)하지 않았고 또한 권색(倦色)이 없었다. 진왈(鎭曰) 나는 20년 래에 흉중(胸中)에 일찍이 일사려(一思慮)를 일으키지 않았고 2, 3년 래에 심히(甚) 관서(觀書)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빈객이 없으면 종일 독좌(獨坐)했고 야분(夜分; 夜半)에 비로소 잤습니다. 비록 아조(兒曹; 兒輩)가 환호(歡呼)하더라도 지척(咫尺)에서 모두 듣지 못했습니다. 견왈(堅曰) 공(公)은 도리어 이 학불(學佛)하는 작가(作家)입니다.
●黃庭堅; (1045-1105) 송대 황룡파거사. 홍주 분녕 사람이며 자(字)가 노직(魯直)이며 호가 산곡(山谷). 시(詩)ㆍ문(文)ㆍ사(詞)ㆍ초서(草書)에 천장(擅長; 뛰어나다. 정통하다)했음. 진사(進士)에 선발(擧)되어 일찍이 사도(仕途)에 들었으며 정적(政績)이 탁저(卓著)했음. 그러나 당견(黨見) 때문에 적폄(謫貶)을 만나기도 했음. 황룡조심(黃龍祖心; 1025-1100)의 법을 이었으며 일찍이 안휘(安徽) 산곡사(山谷寺)에 유학(遊學)하면서 자호(自號)를 산곡도인(山谷道人)이라 했음. 만년에 부빈(涪濱)에 정사(精舍)를 건축하고 정토의 법을 수행하면서 또 호를 부옹(涪翁)이라 했음. 문인(門人)들이 그가 서세(逝世)한 후에 사시(私諡)하여 문절선생(文節先生)이라 했음. 또 그가 지은 바의 시문(詩文)은 일본 족리시대(足利時代)의 오산승인(五山僧人)의 사이에 널리 유행(流行)했으며 일본 한문학사(漢文學史)의 영향이 자못 컴. 저서에 산곡내외집(山谷內外集)과 별집(別集) 등이 있음 [송사444. 송사신편171. 원우당인전4. 오등회원17].
●咫尺; 매우 가까운 거리를 가리킴. 8촌(寸)이 지(咫)가 됨.
거사분등록 주역(居士分燈錄 註譯) 주문제본
상하 2권. 합 780쪽. 2026년 仲春 번역필 本註補註 合計 1,26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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