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商英(兜率從悅禪師法嗣)
張商英 字天覺 號無盡居士 童兒日記萬言 年十九應擧入京 道經向氏 先一夕向夢神告 明日接相公 英至 向異之 遂妻以女 一日遊僧舍 見藏經裝潢嚴麗 怫然曰 我孔聖之書 乃不及胡人 歸坐書室 吟哦至三鼓 向氏曰 夜深何不睡去 英遂以前意對曰 正此著無佛論 向氏應聲曰 旣是無佛何論之有 須著有佛論始得 英疑其言 乃止 後訪一同列 見佛龕前維摩經 信手探閱 到此病非地大 亦不離地大處 輒嘆曰 胡人之言亦能爾耶 遂借歸閱次 向氏問 讀何書 曰 維摩經 曰 可熟讀此經 然後著無佛論也 英悚然異其言 於是深信佛乘 留心祖道 元祐七年 漕江西 首謁東林總 總詰英所得 見與己符合 因印可之 且曰 吾有得法弟子住玉溪 可與語 暨英按部過分寧 諸禪迓之 先致敬玉溪 最後問兜率從悅 悅爲人短小 英曾見龔德莊 說其聰明可人 乃曰 聞師聰敏 善文章 悅笑曰 運使失却一隻眼也 從悅臨濟九世孫 若以聰敏對運使論文章 政如運使對從悅論禪也 英默識之 乃遊兜率 悅謂首座曰 張運使過此 吾當深錐痛劄 若肯回頭 則吾門幸甚 座曰 今之士大夫受人取奉慣 恐其惡發 別生事也 悅曰 正使煩惱 祇退得我院也 別無事 英與語至更深 論及宗門事 悅曰 東林旣印可運使 運使於佛祖言敎 有少疑否 曰 比看傳燈錄尊宿機緣 惟疑香嚴獨脚頌德山托鉢話 悅曰 旣於此有疑 其餘則是心思意解 何嘗至大安樂境界 且如巖頭言末後句 是有耶 是無耶 曰 有 悅大笑 歸方丈閉却門 英一夜睡不穩 至五更下床 趯翻溺器 忽大省 發喜甚 卽扣方丈門曰 已捉得賊了也 悅曰 贓在甚麽處 英無語 悅曰 都運且去 來日相見 翼日 遂獻頌曰 鼓寂鐘沉托鉢回 巖頭一拶語如雷 果然只得三年活 莫是遭他授記來 悅曰 參禪祇爲命根不斷 依語生解 如是之說 公已深悟 然至極微細處 使人不覺不知 墮在區宇 乃作頌證之曰 等閑行處 步步皆如 雖居聲色 寧滯有無 一心靡異 萬法非殊 休分體用 莫擇精麤 臨機不礙 應物無拘 是非情盡 凡聖皆除 誰得誰失 何親何疎 拈頭作尾 指實爲虗 翻身魔界 轉脚邪塗 了無逆順 不犯工夫 悅室中 嘗設三語以驗學者 一曰 撥草瞻風 祇圖見性 卽今上人性在甚麽處 二曰 識得自性 方脫生死 眼光落地時作麽生脫 三曰 脫得生死 便知去處 四大分離向甚麽處去 英各答之頌 一曰 陰森夏木杜鵑鳴 日破浮雲宇宙淸 莫對曾參問曾晳 從來孝子諱爺名 二曰 人間鬼使符來取 天上花冠色正萎 好箇轉身時節子 莫敎閻老等閑知 三曰 鼓合東村李大妻 西風曠野淚沾衣 碧蘆紅蓼江南岸 却作張三坐釣磯 未幾悅入滅 英拜相奏 諡眞寂 出知河南府 圓悟克勤謁之 於荊南劇談華嚴旨要 曰 華嚴現量境界 理事全眞 所以卽一而萬 了萬爲一 一復一 萬復萬 浩然莫窮 心佛衆生三無差別 卷舒自在 無礙圓融 此雖極則 終是無風匝匝之波 英於是不覺促榻 悟遂問曰 到此與祖師西來意爲同爲別 曰 同矣 悟曰 且得沒交涉 英有慍色 悟曰 不見雲門道 山河大地無絲毫過患 猶是轉句 直得不見一色 始是半提 更須知有向上全提時節 彼德山臨濟 豈非全提乎 英乃首肯 翼日 復擧事法界理法界至理事無礙法界 悟又問 此可說禪乎 曰 正好說禪也 悟笑曰 不然 正是法界量裏在 蓋法界量未滅 若到事事無礙法界 法界量滅 始好說禪 如何是佛乾屎橛 如何是佛麻三斤 是故眞淨偈曰 事事無礙 如意自在 手把猪頭 口誦淨戒 趂出淫坊 未還酒債 十字街頭 解開布袋 英嘆曰 美哉之論 豈易得聞乎 覺範慧洪會英於峽之善溪 英自謂得龍安悅禪師末後句 叢林畏與語 因夜話及之曰 可惜 雲菴不知此事 洪問所以 英曰 商英頃自金陵酒官 移知豫章 過歸宗見之 欲爲點破 方敘悅末後句 未卒 此老大怒 罵曰 此吐血禿丁 脫空妄語 不得信 旣見其盛怒 更不欲敘之 洪笑曰 相公但識龍安口傳末後句 而眞藥現前不能辨也 英大驚 起執洪手曰 老師眞有此意耶 洪曰 疑則別參 乃取家藏雲菴頂相展拜贊之 書以授洪 其詞曰 雲菴綱宗 能用能照 天鼓希聲 不落凡調 冷面嚴眸 神光獨耀 孰傳其眞 覿面爲肖 前悅後洪 如融如肇 宣和二年春 館大慧宗杲於府第西齋 爲法喜遊 一日語杲曰 余頃在江寧戒壇院寓居 再閱雪竇拈古 至百丈再參馬祖因緣 雪竇云 大冶精金 應無變色 投卷曰 審如是 豈得有臨濟今日耶 遂作一頌曰 馬師一喝大雄峯 深入髑髏三日聾 黃檗聞之驚吐舌 江西從此立宗風 因擧似平禪師 平後致書云 去夏閱臨濟宗派 知居士得大機大用 愍諸方學語之流來求頌本 乃成頌寄之曰 吐舌耳聾師已曉 搥胸祇得哭蒼天 盤山會裏翻筋斗 到此方知普化顚 今又數年 諸方往往以余爲聰明博記 少知余者 公自江西法窟來 必辨優劣 試爲老夫言之 杲曰 居士見處 與眞淨死心合 近世得此機用 獨二老矣 曰 何謂也 杲乃擧眞淨頌曰 客情步步隨人轉 有大威光不能現 突然一喝雙耳聾 那吒眼開黃檗面 死心拈曰 雲巖要問雪竇 旣是大冶精金應無變色 爲甚却三日耳聾 諸人要知麽 從前汗馬無人識 祇要重論蓋代功 英躍然撫几曰 不因公語 爭見眞淨死心用處 若非二老 難顯雪竇馬師 乃述偈曰 馬師喝下立宗風 嗟我三人見處同 海上六鰲呑餌去 棲蘆誰更問漁翁 杲別去 英囑必見圓悟 遂津致行李到京 一見便授大法 宣和四年十一月黎明 口占遺表 命子弟書之 作偈曰 幻質朝章八十一 漚生漚滅無人識 撞破虗空歸去來 鐵牛入海無消息 言訖取枕擲門窓上 聲如雷震 衆視之 已逝矣 有頌古行於世
●從悅; (1044-1091) 宋代黃龍派僧 虔州(江西贛縣)人 俗姓熊 十五歲出家 十六歲受具足戒 寶峰克文法嗣 因住於隆興(江西南昌)兜率院 故世稱兜率從悅 元祐六年示寂 享年四十八 宋徽宗宣和三年(1121) 丞相張商英(無盡居士)奏請諡號眞寂禪師 有兜率悅禪師語要一卷行世 [佛祖歷代通載十九 五燈會元十七 建中靖國續燈錄二十三]
●裝潢; 裝飾與美化 裝 爲包裹 修飾 潢 指染紙 黃蘖汁染的紙 卽潢紙
●維摩經; 維摩經有三譯 一吳支謙譯 題爲維摩詰經 二卷 二秦羅什譯 題爲維摩詰所說經 三卷 三唐玄奘譯 題爲說無垢稱經 六卷 三譯中流行盛者羅什譯維摩經 皆收於大正藏第十四冊
●信手; 信 隨意 任凭
●地大; 四大之一 以堅固爲性 以能持爲用 周遍一切之物質 故云大
●按部; 按照部類
●香嚴獨脚頌; 祖庭事苑二曰 香嚴(智閑)和上獨脚頌云 子啐母啄 子覺無殼 母子俱亡 應緣不錯 同道唱和 妙玄獨脚
●德山托鉢; 德山卽宣鑑 禪林類聚十五 雪峰存禪師在德山作飯頭 一日飯遲 師曬飯巾次 見德山托鉢至法堂前 師云 這老漢 鐘未鳴鼓未響 托鉢向甚麽處去 山便歸方丈 師擧似巖頭 頭云 大小德山不會末後句 山聞令侍者喚巖頭來 山問 汝不肯老僧那 頭密啓其意 山休去 明日陞堂 果與尋常不同 頭至僧堂前拊掌大笑云 且喜堂頭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不柰伊何 雖然如是 也只得三年 後三年果遷化
●末後句; 謂到達徹底大悟之極處所言之至極語 更無其他語句能超越者
●撥草瞻風; 又曰撥草參玄 撥無明之荒草 瞻望佛祖之玄風也 又涉險路 瞻仰知識之德風也
●曾參; (前505-?前436) 春秋時代魯國武城(今屬山東省平邑縣)人 名參 字子輿 孔子弟子 一日三省以修心 至孝於父母 孔子因之作孝經 祖述孔子思想 傳授仲尼孫子子思 後人敬稱曰曾子
●曾晳; 曾參之父曾點 字子晳
●鬼使; 佛敎神話影響下的民間傳說 謂人將死時 地獄閻王卽派遣使者來勾取性命 此使者稱爲鬼使
●鼓合; 鼓動糾合
●現量; 因明用三量之一 又心識三量之一 現實量知也 向色等諸法 現實量知其自相 毫無分別推求之念者
●促榻; 移近座位 是交談投機時的動作
●事法界; 華嚴宗所立四法界之一 指宇宙間千差萬別之現象界
●理法界; 華嚴宗所立四法界之一 謂諸衆生雖有色身等之別 然皆爲同一體性也
●理事無礙法界; 華嚴宗所立四法界之一 謂理由事顯 事攬理成 理事互融 故名理事無礙法界
●事事無礙法界; 華嚴宗所立四法界之一 謂一切分齊事法 稱性融通 一多相卽 大小互容 重重無盡 故名事事無礙法界
●眞淨; 克文(1025-1102) 宋代黃龍派僧 俗姓鄭 號雲庵 關西子 陝府(今河南陝縣)人 二十五歲 隨北塔廣公出家 通內外學 初參黃龍慧南不契 又往香城(今陝西朝邑) 見順和尙 順和尙反問黃龍慧南之語 克文聞而大省 方知黃龍慧南用意 仍歸黃龍慧南處 幷嗣其法 初於洞山開堂 後遷隆興(今江西南昌)寶峰 繼住壽聖 歸宗 泐潭 晩居雲菴 崇寧元年十月十六日示寂 享年七十八 法嗣有三十八人 以從悅 文準 慧洪爲上首 賜號眞淨 有雲庵眞淨禪師語錄 [續傳燈錄十五 五燈會元十七]
●酒官; 執掌造酒及有關政令的官員
●禿丁; 對僧人的詈稱
●希聲; 無聲 聽而不聞的聲音 道德經道紀章第十四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如融如肇; 融 指道融(約357-430) 汲郡林慮(今河南林州)人 後秦時期高僧 鳩摩羅什門下 什門四聖之一 肇 指僧肇(384-414) 略稱肇法師 東晉僧 長安人 俗姓張 家貧 以傭書爲業 遂得博覽經史 初好老莊 及讀維摩經而感悟 遂出家 善方等大乘經典 兼通三藏 冠年名聲已震關中 才思幽玄 精於談論 聞鳩摩羅什羈留涼土 前往從之 羅什歎爲奇才 及至姚秦破涼 乃隨侍羅什入長安 稟姚興之命 與僧叡等於逍遙園詳定經論 解悟彌深 被稱爲解空第一 弘始六年(404) 羅什譯出大品般若經 師乃撰般若無知論呈之 後又撰述不眞空論 物不遷論 涅槃無名論 注維摩詰經十卷等 義熙十年示寂 年僅三十一 後人收集僧肇所著之宗本義 物不遷 不眞空 般若無知 涅槃無名諸論 題名爲肇論行世 [佛祖歷代通載八 梁高僧傳六 出三藏記集八 同九 肇論疏上 魏書釋老志二十]
●宗杲; (1089-1163) 宋代僧 字曇晦寧國(安徽宣州)奚氏 年十七出家 登寶峰謁湛堂文準 準指以入道要徑 準卒 趨謁無盡居士求塔銘 無盡一見奇之 名其庵曰妙喜 後往參圓悟克勤得法 右丞相呂舜奏賜紫衣 及佛日大師之號 後於雲居山創庵以居 久之 入閩結茅於長樂洋嶼 又徙小溪雲門庵 應丞相張浚之命 住徑山 道法之盛 冠於一時 侍郞張九成亦從之遊 因議朝政 被秦檜所忌 流於嶺南 檜死召還 翌年春復僧伽梨 奉命住育王 逾年有旨改徑山 道俗歆慕如初 孝宗卽位 召對稱旨 賜號大慧禪師 御書妙喜庵三字賜之 隆興元年八月微恙 十日親書遺奏 又書遺偈 擲筆委然而入寂 壽七十五 臘五十八 謚曰普覺禪師 有大慧語錄等 [統要續集二十二 聯燈會要十七 嘉泰普燈錄十五 五燈會元十九 佛祖通載二十]
●拈古; 擧出前人公案機語 加以評議 是禪家說法的一種形式 也是禪宗語錄的一種類型
●百丈再參; 五燈會元三百丈懷海 師侍馬祖行次 見一羣野鴨飛過 祖曰 是甚麽 師曰 野鴨子 祖曰 甚處去也 師曰 飛過去也 祖遂把師鼻扭 負痛失聲 祖曰 又道飛過去也 師於言下有省 (中略)師再參侍立次 祖目視繩牀角拂子 師曰 卽此用 離此用 祖曰 汝向後開兩片皮 將何爲人 師取拂子竪起 祖曰 卽此用 離此用 師挂拂子於舊處 祖振威一喝 師直得三日耳聾 自此雷音將震
●盤山; 位於幽州(河北) 指盤山寶積禪師 唐代僧 馬祖道一法嗣 居此盤山 宣揚宗風 故世稱盤山寶積 籍貫生卒年未詳 諡號凝寂大師 [祖堂集十五 傳燈錄七 聯燈會要四]
●筋斗; 又作斤斗 巾斗 唐之俗語 爲倒翻身也 斤是其本字 餘皆爲假用 ▲祖庭事苑七 斤斗 斤 斫木具也 頭重而柯輕 用之則斗轉 爲此技者似之
●盤山會裏翻筋斗; 禪苑蒙求上 普化描眞 (會元三)普化和尙 幽州盤山寶積和尙法嗣 山臨遷化謂衆云 還有人描得吾眞麽 衆皆寫眞呈山 山皆叱之 普化出云 某甲描得 山云 何不呈似老僧 普化便打筋斗而出 山云 這漢向後如風狂接人去在 山乃奄化
●普化; (?-860) 唐代僧 嗣盤山寶積 南嶽下三世 日本禪宗支派普化宗之祖 姓氏壽皆不詳 寶積示寂後 師卽遊化北地鎭州 佐贊於臨濟 臨濟住未久 師全身脫去 [宋高僧傳二十 傳燈錄十 釋氏稽古略三]
●死心; 悟新(1044-1115) 宋代黃龍派僧 王氏 韶州曲江人 稍長穎脫 壯依佛陀院德修祝髮 進具已 熙寧八年(1075) 至黃龍謁晦堂祖心 竝嗣其法 元祐七年(1092) 出住雲岩 紹聖四年 徙翠岩 政和初 居黃龍 政和五年 十二月十三日晩小參說偈 十五日泊然坐逝 悟新自是號死心叟 榜其居曰死心室 有語錄一卷 [續傳燈錄二十二 普燈錄六]
●那吒; 北方毘沙門天王第三子 毘沙門儀軌云 北方大毘沙門天王 (中略)天王第三子那吒太子 捧塔常隨天王
●汗馬; 祖庭事苑五 汗馬 李廣利爲貳師將軍 伐大宛國 得汗血馬 名蒲捎 漢武作天馬之歌 馬出汗卽有功勞 故云汗馬
●行李; 一行走 二行脚時所帶的複包 三參習 參禪 此指二
●口占; 謂口授其辭
●朝章; 一朝廷的典章 二朝服
장상영(張商英)(兜率 從悅禪師의 法嗣)
장상영(張商英; 1043-1121)은 자가 천각(天覺)이며 호가 무진거사(無盡居士)다. 동아(童兒)일 적에 하루 만언(萬言)을 기억했다. 나이 19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입경(入京)하는데 길이 향씨(向氏)를 경유(經由; 經)했다. 하룻밤 앞에(先一夕) 향씨의 꿈에 신(神)이 고(告)하되 명일(明日) 상공(相公)을 접견(接見; 接)하리라. 상영(商英)이 이르자 향씨가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고(異之) 드디어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妻). 어느 날 승사(僧舍)에 유행(遊行; 遊)했는데 장경(藏經)이 장황(裝潢; 저본에 裝演으로 지었음)하고 엄려(嚴麗)함을 보고 불연(怫然; 발끈하다)하며 가로되 우리 공성(孔聖)의 서(書)가 이에 호인(胡人)에 미치지 못하는가. 돌아와 서실(書室)에 앉아 음아(吟哦; 읊조리다)하며 삼고(三鼓; 三更)에 이르렀다. 향씨(向氏)가 가로되 야심(夜深)한데 왜 자러 가지 않습니까. 상영이 드디어 전의(前意)로써 대왈(對曰) 바로(正) 이에서(此) 무불론(無佛論)을 지을까 합니다. 향씨가 소리에 응해 가로되 이미 이 무불(無佛)이라면 무슨 논이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유불론(有佛論)을 지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상영이 그 말을 의심해 이에 그만두었다(止). 후에 한 동렬(同列; 同一한 班列)을 방문했는데 불감(佛龕) 앞의 유마경(維摩經)을 보고 손 닿는 대로(信手) 탐열(探閱)했다. 이 병(病)은 지대(地大)가 아니며 또한 지대를 여의지 않는다는 곳에 이르러 문득(輒) 탄식하며 가로되 호인(胡人)의 말이 또한 능히 이러한가(能爾耶). 드디어 빌려서 돌아와 읽던(閱) 차에 향씨가 묻되 무슨 서책을 읽습니까. 가로되 유마경입니다. 가로되 가히 차경(此經)을 숙독(熟讀)한 연후에 무불론(無佛論)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상영이 송연(悚然)하며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불승(佛乘)을 심신(深信)했고 조도(祖道)에 유심(留心)했다. 원우(元祐) 7년(1092) 강서(江西)에서 조운(漕運; 漕)했다. 처음(首) 동림총(東林總; 常總)을 참알(參謁)하자 총(總)이 상영의 소득을 힐문(詰問)했고 견해가 자기와 더불어 부합(符合)하는지라 인하여 그(之)를 인가(印可)했다. 또(且) 가로되 나에게 득법제자(得法弟子)가 있는데 옥계(玉溪)에 거주합니다.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합니다. 상영이 안부(按部)하다가 분녕(分寧)에 이름(過)에 이르러(暨) 제선(諸禪; 여러 선사)이 그를 맞이했다(迓之). 먼저 옥계(玉溪)에게 치경(致敬; 敬意를 표시)하고 최후에 도솔종열(兜率從悅)에게 문안(問安; 問)했다. 종열은 위인(爲人)이 단소(短小)했다. 상영이 일찍이 공덕장(龔德莊)을 상견했는데 설(說)하기를 그가 총명(聰明)하여 가인(可人)이라 했다. 이에 가로되 듣건대 스님은 총민(聰敏)하고 문장을 잘한다 합디다. 종열이 웃고 가로되 운사(運使)는 일척안(一隻眼)을 잃어버렸습니다. 종열(從悅)은 임제(臨濟) 9세손입니다. 만약 총민(聰敏)으로써 운사(運使)를 상대로 문장을 논한다면 바로(政) 운사가 종열을 상대로 선(禪)을 논함과 같습니다. 상영이 묵연히 이(之)를 인식(認識; 識)했다. 이에 도솔(兜率)에 유행(遊行; 遊)했는데 종열이 수좌에게 일러 가로되 장운사(張運使)가 여기에 이르면(過) 내가 마땅히 심추통자(深錐痛劄; 깊이 찌르고 아프게 찌르다)하겠다. 만약 수긍하여 회두(回頭)한다면 곧 오문(吾門)에 다행(多幸; 幸)이 심할 것이다. 좌왈(座曰) 지금의 사대부는 사람에게 취봉(取奉)을 받는 게 관행(慣行; 慣)인데 그가 악발(惡發)하여 달리 일이 발생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열왈(悅曰) 바로(正) 번뇌케 하면 다만 아원(我院)에서 물리침을 얻는다면 또한 달리 일이 없으리라. 상영이 더불어 말하다가 경(更)이 깊음에 이르렀다. 논이 종문사(宗門事)에 미치자 열왈(悅曰) 동림(東林; 常總)이 이미 운사(運使)를 인가(印可)했다 하거니와 운사가 불조(佛祖)의 언교(言敎)에 소의(少疑)가 있습니까. 가로되 요사이(比) 전등록의 존숙(尊宿)의 기연(機緣)을 보았는데 오직 향엄의 독각송(香嚴獨脚頌)과 덕산의 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의심합니다. 열왈(悅曰) 이미 여기에 의심이 있다 하니 그 나머지도 곧 이 심사의해(心思意解)이거늘 어찌 일찍이 대안락경계(大安樂境界)에 이르겠습니까. 차여(且如; 例를 듦) 암두(巖頭)가 말한 말후구(末後句)는 이 있습니까, 이 없습니까. 가로되 있습니다. 종열이 대소(大笑)하고 방장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버렸다. 상영이 일야(一夜)에 잠이 안온(安穩; 穩)하지 못했다. 5경(更)에 이르러 침상에서 내려오다가 요기(溺器; 요강)를 적번(趯翻; 차서 엎다)하면서 홀연히 대성(大省)했다. 기쁨을 냄이 심(甚)했고 곧 방장문(方丈門)을 두드리며 가로되 이미 도적을 착득(捉得)했습니다. 열왈(悅曰) 장물(贓物; 贓)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상영이 말이 없었다. 열왈 도운(都運)은 다만 가고 내일 상견합시다. 익일(翼日) 드디어 헌송(獻頌)해 가로되 북도 고요하고 종도 잠잠한데(沉) 탁발하고 돌아가니/ 암두의 한 번 부닥치는(拶) 말이 우레와 같다/ 과연 다만 3년만 삶을 얻았으니/ 이는 그의 수기(受記)를 만나 온 게 아닐까. 열왈 참선은 다만(祇) 명근(命根)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말에 의해 이해를 냅니다. 이와 같은 설을 공(公)이 이미 심오(深悟)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미세한 곳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각부지(不覺不知)에 구우(區宇; 區域)에 떨어져 있게 합니다. 이에 작송(作頌)하여 그것(之)을 증명해 가로되 등한히 행하는 곳에/ 걸음마다 다 여(如)니/ 비록 성색(聲色)에 거처하지만/ 어찌(寧) 유무에 막히겠는가(滯)/ 일심(一心)이 다르지(異) 않으면(靡)/ 만법이 다르지(殊) 않나니/ 체용(體用)을 나누지 말고(休)/ 정추(精麤)를 가리지(擇) 말아라/ 임기(臨機)하여 막히지(礙) 않고/ 응물(應物)하며 구애(拘礙)되지 않으면/ 시비의 정(情)이 없어지고/ 범성(凡聖)이 다 제거된다/ 무엇(誰)을 얻고 무엇을 잃으며/ 무엇(何)을 친하고 무엇을 소(疎)하겠는가/ 머리를 가지고(拈) 꼬리를 만들고/ 진실을 가리키며 허위로 삼는다/ 마계(魔界)에서 번신(翻身)하고/ 사도(邪塗)에서 전각(轉脚)하나니/ 역순(逆順)이 없음을 깨달으면/ 공부(工夫)를 범하지 않는다. 종열이 실중(室中)에서 일찍이 삼어(三語)를 시설해 학자를 시험했다. 일왈(一曰) 발초첨풍(撥草瞻風)함은 다만 견성을 도모함이니 즉금 상인(上人)의 성(性)이 어느 곳에 있는가. 이왈(二曰) 자성(自性)을 식득(識得)했다면 바야흐로 생사에서 벗어나나니 안광이 낙지할 때(眼光落地時; 임종시) 어떻게 벗어나느냐. 삼왈(三曰) 생사를 탈득(脫得)했다면 바로(便) 거처(去處)를 알 것이니 4대(大)가 분리(分離)할 때 어느 곳을 향해 가느냐. 상영이 그에 각답(各答)하여 송(頌)했다. 일왈(一曰) 음삼(陰森; 우거져 어두움)한 하목(夏木)에 두견(杜鵑)이 우나니/ 해가 부운(浮雲)을 깨뜨려 우주(宇宙)가 맑다/ 증삼(曾參)을 상대로 증석(曾晳)을 묻지 말지니/ 종래로 효자는 아비의 이름을 꺼린다. 이왈(二曰) 인간에 귀사(鬼使)가 부록(符籙; 符)을 가지고 와 취하니/ 천상의 화관(花冠)의 색이 바로 시들었다(萎)/ 호개(好箇)의 전신(轉身)할 시절자(時節子; 子는 조사)니/ 염로(閻老); 閻羅老子)로 하여금 등한히 알게 하지 말아라. 삼왈(三曰) 동촌(東村)의 이대처(李大妻)를 고합(鼓合)하니/ 서풍의 광야(曠野)에 눈물이 옷을 적신다(沾)/ 벽로(碧蘆)와 홍료(紅蓼)의 강남(江南) 언덕에/ 도리어 장삼(張三)을 지어 조기(釣磯; 낚시터)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未幾) 종열이 입멸(入滅)했다. 상영이 배상(拜相; 宰相에 除拜됨)하였고 주청(奏請)하여 시(諡)를 진적(眞寂)이라 했다. 나가서 하남부(河南府; 지금의 하남 洛陽)를 지(知; 主宰)했다. 원오극근(圓悟克勤)이 그(之)를 예알(禮謁)하여 형남(荊南)에서 화엄(華嚴)의 지요(旨要)를 극담(劇談; 暢談)했다. 가로되 화엄은 현량경계(現量境界)며 이사(理事)가 전진(全眞)인지라 소이로 즉일(卽一)하여 만(萬)이며 만을 마치면(了萬) 일(一)이 되며 일이 다시 일이며 만이 다시 만입니다. 호연(浩然)하여 궁구하지 못하며(莫窮) 심ㆍ불ㆍ중생 셋이 차별이 없으며 권서(卷舒)가 자재하며 무애(無礙)하고 원융(圓融)합니다. 이것이 비록 극칙(極則)이지만 마침내 이는 바람 없이 돌고 도는 파도입니다(無風匝匝之波). 상영이 이에 불각에 촉탑(促榻)했다. 원오가 드디어 물어 가로되 여기에 이르러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와 같음이 됩니까 다름이 됩니까. 가로되(公曰) 같습니다. 오왈(悟曰) 또 교섭이 없음을 얻습니다(且得沒交涉). 상영이 온색(慍色; 성난 顔色)이 있었다. 오왈(悟曰) 보지 못합니까, 운문(雲門)이 말하되 산하대지가 사호(絲毫)의 과환(過患)이 없더라도 오히려 이는 전구(轉句)며 바로 일색(一色)도 보지 않음을 얻어야 비로소 이 반제(半提)며 다시 모름지기 향상(向上)의 전제(全提)의 시절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彼) 덕산과 임제가 어찌 전제(全提)가 아니겠습니까. 상영이 이에 수긍했다. 다음날(翌日) 다시 사법계(事法界)ㆍ이법계(理法界)를 들고(擧)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에 이르렀다. 원오가 또 묻되 이것을 가히 설선(說禪)한다고 하겠습니까. 가로되 바로 좋이 설선합니다. 원오가 웃고 가로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법계량(法界量) 속에 있으며 대개(大蓋) 법계량이 멸(滅)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에 이른다면 법계량이 멸하니 비로소 좋이 설선(說禪)합니다. 무엇이 이 부처인가, 건시궐(乾屎橛)이다. 무엇이 이 부처인가, 마삼근(麻三斤)이다. 이런 고로 진정(眞淨; 克文)의 게에 가로되 사사가 무애(事事無礙)하여/ 뜻대로(如意) 자재하나니/ 손에 돼지 머리를 잡고/ 입으로 정계(淨戒)를 외운다/ 음방(淫坊)에서 쫓겨나며/ 술값 빚을 갚지 못하고/ 십자의 가두에서/ 포대를 풀어 연다. 상영이 감탄하며 가로되 미재지론(美哉之論)입니다. 어찌 쉽게 득문(得聞)하겠습니까. 각범혜홍(覺範慧洪)이 협(峽)의 선계(善溪)에서 상영을 만났다. 상영이 스스로 이르기를 용안열(龍安悅; 龍安山 從悅) 선사의 말후구를 얻었다. 총림에서 더불어 말함을 두려워했다. 야화(夜話)로 인해 이에 미치자 가로되 가석(可惜)하게도 운암(雲庵; 克文)이 차사(此事)를 알지 못했습니다. 혜홍이 소이(所以)를 묻자 영왈(英曰) 상영(商英; 無盡)이 요사이(頃) 금릉(金陵)의 주관(酒官)으로부터 옮겨 예장(豫章)을 지(知; 主宰. 主管)했는데 귀종(歸宗)에 이르러(過) 그를 뵙고(見之) 점파(點破; 點檢)하고자 했습니다. 바야흐로 열(悅; 從悅)의 말후구를 서술하여 마치지도 않았는데 이 노인이 대로(大怒)하며 욕해(罵) 가로되 이것은 토혈(吐血)하는 독정(禿丁)의 탈공망어(脫空妄語; 허탈하고 공허한 망어)니 믿음을 얻지 못한다. 이미 그의 성로(盛怒)를 보았으니 다시 서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혜홍이 웃으며 가로되 상공(相公)은 단지 용안(龍安)이 구전(口傳)하는 말후구만 알고 진약(眞藥)이 현전(現前)했으나 능히 분변하지 못합니다. 상영이 대경(大驚)했다. 일어나 혜홍의 손을 잡고 가로되 노사(老師; 克文을 가리킴)가 참으로 이 뜻이 있었습니까. 홍왈(洪曰) 의심된다면 곧 별참(別參)하시오. 이에 가장(家藏)의 운암(雲菴; 克文)의 정상(頂相)을 취해 전배(展拜)하고 그를 찬(贊)했으며 써서(書) 혜홍에게 주었다. 기사(其詞)에 가로되 운암(雲菴)의 강종(綱宗)은/ 능용(能用)하고 능조(能照)한다/ 천고(天皷)의 희성(希聲)은/ 범조(凡調)에 떨어지지 않는다/ 냉면(冷面)과 엄모(嚴眸)며/ 신광(神光)이 독요(獨耀)한다/ 누가(孰) 그 진(眞)을 전하는가/ 적면(覿面)하여 초(肖; 肖像)로 삼는다/ 전(前)은 열(悅; 從悅)이며 후는 홍(洪; 慧洪)이니/ 융과 같고 조와 같다(如融如肇). 선화(宣和) 2년(1120) 봄 대혜종고(大慧宗杲)를 부제(府第; 貴族官僚 혹 大地主의 住宅)의 서재(西齋)에 거처케 하고(館) 법희(法喜)의 유희(遊戲; 遊)를 했다. 어느 날 종고에게 말해 가로되 내가 요사이(頃) 강녕(江寧) 계단원(戒壇院)에 있으면서 우거(寓居)했는데 설두염고(雪竇拈古)를 재열(再閱)하다가 백장이 마조를 재참한 인연(百丈再參馬祖因緣)에 이르자 설두가 이르되 대야(大冶)한 정금(精金)이라야 응당 변색(變色)이 없다. 투권(投卷)하고 가로되 참으로(審) 이와 같다면 어찌 임제의 금일이 있음을 얻겠는가. 드디어 1송을 지어 가로되 마사(馬師)가 대웅봉(大雄峯; 百丈懷海)에게 1할(喝)하니/ 깊이 촉루에 들어가 3일 동안 귀먹었다/ 황벽이 이를 듣고 놀라서 혀를 토하니/ 강서에서 이로부터 종풍(宗風)을 세웠더라. 인하여 평선사(平禪師)에게 거사(擧似)하자 평(平)이 후에 치서(致書; 寄信)하여 이르되 지난 여름 임제종파(臨濟宗派)를 읽고는 거사가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얻었음을 알았습니다. 제방의 학어지류(學語之流)가 송본(頌本)을 내구(來求)함을 가엾게 여기십시오(愍). 이에 성송(成頌)하여 기탁해(寄之) 가로되 토설(吐舌)과 이롱(耳聾)을 스님(師; 平禪師)이 이미 깨달았으니(曉)/ 가슴을 치면서(搥) 다만 창천(蒼天)을 곡(哭)함을 얻었다/ 반산회리(盤山會裏)에서 근두(筋斗)를 뒤집으니(盤山會裏翻筋斗)/ 여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보화(普化)의 풍전(風顚; 顚)을 안다. 여금에 또 몇 년입니다. 제방에서 왕왕(往往) 나를 총명박기(聰明博記)라 하지만 나를 아는 자가 적습니다. 공(公; 대혜)이 강서(江西)의 법굴(法窟)로부터 왔으니 반드시 우열(優劣)을 분변할 것입니다. 시험 삼아 노부(老夫)를 위해 말하십시오. 고왈(杲曰) 거사의 견처는 진정(眞淨; 克文)ㆍ사심(死心; 悟新)과 합치합니다. 근세(近世)에 이 기용(機用)을 얻은 이는 오직(獨) 이로(二老; 眞淨과 死心)입니다. 가로되 무엇을 말함입니까(何謂也). 종고가 이에 진정(眞淨)의 송을 들어 가로되 객정(客情)으로 걸음마다 사람 따라 도나니/ 대위광(大威光)이 있으나 능히 나타내지 못한다/ 돌연(突然)한 1할(喝)에 쌍이(雙耳)가 먹었나니(聾)/ 나타안(那吒眼; 저본에 那叱眼으로 지었음)이 황벽의 얼굴에 열렸다. 사심(死心)이 염왈(拈曰) 운암(雲巖; 死心)이 요컨대 설두에게 묻나니 이미 이 대야(大冶)한 정금(精金)이라 응당 변색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3일 동안 귀가 먹었는가. 제인이 알고자 하느냐. 종전(從前)의 한마(汗馬)를 아는 사람이 없나니 다만 개대(蓋代)의 공(功)을 중론(重論)하기를 요한다. 상영이 약연(躍然)하여 무궤(撫几)하며 가로되 공(公; 대혜를 가리킴)의 말을 인하지 않았다면 어찌 진정과 사심의 용처(用處)를 보겠습니까. 만약 이로(二老)가 아니었다면 설두와 마사(馬師)를 나타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에 술게(述偈)하여 가로되 마사(馬師)의 할하(喝下)에 종풍을 세우니/ 나와 3인의 견처가 같음(同)을 탄식한다(嗟)/ 해상(海上)의 육오(六鰲)는 먹이(餌)를 삼키고 떠났거늘/ 서로(棲蘆)하면서 누가 다시 어옹(漁翁)에게 묻느냐. 종고가 고별하고 떠나자 상영이, 반드시 원오를 참견(參見; 見)하라고 부촉(付囑)했다. 드디어 나루에서 행리(行李)가 도경(到京)함에 이르렀고(致) 일견(一見)하자 바로 대법(大法)을 전수(傳授; 傳受와 같음)했다. 선화(宣和) 4년(1122) 11월 여명(黎明)에 유표(遺表)를 구점(口占)하여 자제(子弟)에게 명해 서사(書寫)하게 했다. 작게(作偈)하여 가로되 환질(幻質)의 조장(朝章; 朝服)이 81이니/ 구생구멸(漚生漚滅)을 아는 사람이 없다/ 허공을 당파(撞破)하고 돌아가나니(歸去來; 來는 조사)/ 철우(鐵牛)가 입해(入海)하더니 소식이 없다. 말을 마치자 베개를 취해 문창(門窓) 위로 던졌는데 소리가 뇌진(雷震)과 같았다. 대중이 보니 이미 서거했다. 송고(頌古)가 있어 세상에 행한다.
●從悅; (1044-1091) 송대 황룡파승. 건주(강서 공현) 사람이며 속성은 웅(熊). 15세에 출가했고 16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보봉극문(寶峰克文)의 법사(法嗣). 융흥(隆興; 강서 南昌) 도솔원(兜率院)에 주(住)했기 때문에 고로 세칭이 도솔종열(兜率從悅)임. 원우(元祐) 6년에 시적(示寂)했으니 향년(享年)은 48. 송 휘종 선화(宣和) 3년(1121) 승상(丞相) 장상영(張商英; 無盡居士)의 주청(奏請)으로 시호가 진적선사. 도솔열선사어요(兜率悅禪師語要) 1권이 있어 행세(行世)함 [불조역대통재19. 오등회원17. 건중정국속등록23].
●裝潢; 장식(裝飾)과 미화(美化). 장(裝)은 포과(包裹), 수식(修飾)이 되고 황(潢)은 염지(染紙)를 가리킴이니 황벽즙(黃蘖汁)으로 물들인 종이, 즉 황지(潢紙).
●維摩經; 유마경은 3역(譯)이 있음. 1. 오(吳) 지겸(支謙)이 번역했으니 경제(經題)가 유마힐경(維摩詰經)이 되며 2권. 2. 진(秦) 라집(羅什)이 번역했으니 경제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 되며 3권. 3. 당(唐) 현장(玄奘)이 번역했으니 경제가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 되며 6권. 3역 중 유행이 왕성한 것은 라집이 번역한 유마경이며 모두 대정장 제14책에 수록되었음.
●信手; 신(信)은 수의(隨意). 임빙(任凭; 마음대로 하게 하다).
●地大; 4대의 하나. 견고로써 자성을 삼고 능지(能持)로써 작용을 삼아 일체의 물질에 주편(周遍)하는지라 고로 이르되 대(大)임.
●按部; 부류(部類)를 안조(按照)함.
●香嚴獨脚頌; 조정사원2에 가로되 향엄(香嚴; 智閑) 화상의 독각송(獨脚頌)에 이르기를 새끼는 줄(啐; 줄줄 빨 줄)하고 어미는 탁(啄)하여/ 새끼가 껍질이 없음을 깨닫는다/ 어미와 새끼가 다 죽어야/ 응연(應緣)하매 그르치지 않으리니/ 동도(同道)로 창화(唱和)하매/ 묘현(妙玄)이 독각(獨脚)이다.
●德山托鉢; 덕산은 곧 선감. 선림류취15. 설봉존선사가 덕산에 있으면서 반두(飯頭)가 되었다. 어느 날 밥이 늦었고 스님이 반건(飯巾)을 말리던 차에 덕산이 탁발(托鉢; 발우를 받들다)하고 법당 앞에 이름을 보았다. 스님이 이르되 이 노한이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탁발하고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덕산이 곧 방장으로 돌아갔다. 스님이 암두에게 들어 보이자 암두가 이르되 대소(大小) 덕산이 말후구를 알지 못하셨다. 덕산이 듣고서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오게 했다. 덕산이 묻되 네가 노승을 긍정하지 않느냐. 암두가 몰래 그 뜻을 알렸다. 덕산이 쉬었다. 명일 승당하였는데 과연 심상과 같지 않았다. 암두가 승당(僧堂) 앞에 이르러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이르되 다만 당두노한(堂頭老漢)이 말후구를 아셨음을 기뻐하노라. 타후(他後)에 천하 사람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또한 단지 3년을 얻으리라. 3년 후에 과연 천화했다.
●末後句; 이르자면 철저히 대오한 극처(極處)에 이르러 말하는 바의 지극한 말이니 다시 기타의 어구가 능히 초월함이 없는 것.
●撥草瞻風; 또 가로되 발초참현(撥草參玄)이니 무명의 거친 잡초를 헤치고 불조의 현풍(玄風)을 첨망(瞻望)함. 또 험로를 건너면서 지식의 덕풍을 첨앙함.
●曾參; (前 505-?前 436) 춘추시대 노나라 무성(武城; 지금 산동성 평읍현에 속함) 사람이니 이름이 삼(參)이며 자는 자여(子輿). 공자의 제자며 1일3성(一日三省)으로써 수심(修心)했고 부모에게 지효(至孝)하여 공자가 이로 인해 효경을 지었음. 공자의 사상을 조술(祖述)하여 중니의 손자 자사(子思)에게 전수했음. 후인이 경칭하여 가로되 증자(曾子)라 했음.
●曾晳; 증삼의 부친 증점(曾點)이니 자는 자석(子晳).
●鬼使; 불교 신화 영향 아래의 민간 전설에 이르기를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지옥의 염왕이 곧 사자를 파견하여 성명(性命)을 잡아당기는데 이 사자를 일컬어 귀사라 함.
●鼓合; 고동(鼓動)하여 규합(糾合)함.
●現量; 인명용(因明用) 3량(量)의 하나며 또 심식(心識) 3량의 하나니 현실을 양지(量知)함임. 색 등 제법을 향해 현실로 그 자상(自相)을 양지하여 터럭만큼도 분별하며 추구하는 사념이 없는 것.
●促榻; 좌위(座位)에 가깝게 이동함이니 이는 교담(交談)하며 투기(投機)할 때의 동작.
●事法界; 화엄종에서 세운 바 4법계의 하나. 우주 사이의 천차만별의 현상계(現象界)를 가리킴.
●理法界; 화엄종에서 세운 바 4법계의 하나. 이르자면 모든 중생이 비록 색신 등의 다름이 있지만 그러나 모두 동일한 체성(體性)이 됨.
●理事無礙法界; 화엄종에서 세운 바 4법계의 하나. 이르자면 이(理)는 사(事)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사는 이를 잡아 이루어지며 이와 사가 호융(互融)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이사무애법계임.
●事事無礙法界; 화엄종에서 세운 바 4법계의 하나. 이르자면 일체의 분제(分齊; 分限)의 사법(事法)이 칭성(稱性; 자성에 稱合)하여 융통하면서 일다(一多)가 상즉(相卽)하고 대소가 호용(互容)하여 중중무진한지라 고로 이름이 사사무애법계임.
●眞淨; 극문(克文; 1025-1102)이니 송대 황룡파승. 속성은 정이며 호는 운암(雲庵)ㆍ관서자니 섬부(지금의 하남 섬현) 사람. 25세에 북탑광공을 따라 출가했으며 내외학(內外學)을 통달했음. 처음에 황룡혜남(黃龍慧南)을 참알해 계합치 못해 또 향성(지금의 섬서 조읍)으로 가서 순화상(順和尙)을 뵙자 순화상이 황룡혜남의 말로 반문함에서 극문이 듣다가 크게 성찰했으며 비로소 황룡혜남의 용의(用意)를 알고 그대로 황룡혜남의 처소로 돌아갔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처음에 동산(洞山)에서 개당하고 뒤에 융흥(지금의 강서 남창) 보봉(寶峰)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수성ㆍ귀종ㆍ늑담에 거주했고 만년에 운암에 거주했음. 숭녕 원년 10월 16일에 시적했으니 향년은 78. 법사는 38인이 있고 종열ㆍ문준ㆍ혜홍으로써 상수(上首)를 삼음. 사호(賜號)가 진정(眞淨)이며 운암진정선사어록이 있음 [속전등록15. 오등회원17].
●酒官; 조주(造酒) 및 유관(有關)한 정령(政令)을 집장(執掌)하는 관원.
●禿丁; 승인에 대해 욕하는 칭호.
●希聲; 소리가 없음이니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하는 성음(聲音). 도덕경 도기장 제14. 그것을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함을 이름해 가로되 이(夷)며 그것을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함을 이름해 가로되 희(希)다.
●如融如肇; 융(融)은 도융(道融; 約357-430)을 가리킴. 급군(汲郡) 임려(林慮; 지금의 하남 林州) 사람. 후진(後秦) 시기의 고승. 구마라집의 문하(門下)니 집문사성(什門四聖)의 하나. 조(肇)는 승조(僧肇; 384-414)를 가리킴. 약칭이 조법사(肇法師). 동진(東晉)의 승려며 장안 사람이며 속성(俗姓)이 장(張). 집안이 가난해 용서(傭書; 남에게 고용되어 글씨를 쓰는 일)로써 업(業)을 삼았으며 드디어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함을 얻었음. 처음엔 노장(老莊)을 좋아했는데 및 유마경을 읽고서 감오(感悟)하여 드디어 출가했음. 방등(方等)의 대승경전을 잘했으며 겸하여 3장(藏)을 통달했음. 관년(冠年)에 명성이 이미 관중(關中)을 진동(震動)했고 재사(才思)가 유현(幽玄)하고 담론에 정밀했음. 구마라집이 양토(涼土)에 기류(羈留)한다 함을 듣고 앞으로 가서 그를 좇았는데 라집이 기재(奇才)라고 탄복했으며 그리고 요진(姚秦)이 파량(破涼)함에 이르자 이에 라집을 수시(隨侍)하며 장안에 들어갔음. 요흥(姚興)의 명령을 받아 승예(僧叡) 등과 함께 소요원(逍遙園)에서 경론을 상정(詳定)하면서 해오(解悟)가 더욱 깊어졌으며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일컬어짐을 입었음. 홍시 6년(404) 라집이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역출(譯出)하자 스님이 이에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그에게 드렸으며 후에 또 부진공론(不眞空論)ㆍ물불천론(物不遷論)ㆍ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ㆍ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 10권 등을 찬술(撰述)했음. 의희 10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겨우 31. 후인이 승조가 지은 바인 종본의(宗本義)ㆍ물불천(物不遷)ㆍ부진공(不眞空)ㆍ반야무지(般若無知)ㆍ열반무명(涅槃無名)의 여러 논을 수집(收集)하여 조론(肇論)으로 제명(題名)했으며 세상에 유행함 [불조역대통재8. 양고승전6. 출삼장기집8, 동9. 조론소상. 위서석로지20].
●宗杲; (1089-1163) 송대승. 자(字)가 담회(曇晦)며 영국(寧國; 安徽 宣州) 해씨(奚氏). 나이 17에 출가했음. 보봉(寶峰)에 올라 담당문준(湛堂文準)을 알현(謁見)했는데 문준이 입도(入道)의 요경(要徑)을 지도하였음. 문준이 죽자 무진거사(無盡居士; 張商英이니 황룡하 3세)에게 달려가 참알(參謁)하고 탑명(塔銘)을 구했는데 무진이 한 번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며 그 암자를 이름해 묘희(妙喜)라 했음. 후에 원오극근(圓悟克勤; 양기하 3세)을 참알해 법을 얻었음. 우승상(右丞相) 여순(呂舜)이 주청(奏請)하여 자의(紫衣)와 및 불일대사(佛日大師)란 호를 주었음. 후에 운거산(雲居山)에 암자를 창건해 거처했으며 오래되자 민(閩)에 들어가 장락(長樂)의 양서(洋嶼)에 결모(結茅; 띠로 암자를 엮음)했고 또 소계(小溪)의 운문암(雲門庵)으로 이사했음. 승상(丞相) 장준(張浚)의 명에 응해 경산(徑山)에 머물렀는데 도법(道法)의 성함이 한 때에 으뜸(冠)이었음. 시랑(侍郞) 장구성(張九成; 宗杲의 法嗣)도 또한 좇아 교유(交遊)했음. 조정(朝政)을 논의함으로 인해 진회(秦檜)의 시기(猜忌)를 입어 영남(嶺南)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진회가 죽자 소환(召還)되었고 다음해 봄 승가리(僧伽梨)를 회복(回復)했으며 칙명을 받들어 육왕(育王)에 주지(住持)했는데 해를 넘겨 성지(聖旨)가 있어 경산(徑山)으로 개명했음. 도속(道俗; 僧俗)이 흠모(歆慕; 歆은 心服할 흠)하기가 처음과 같았음.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불러 대화하고는 뜻에 맞는지라 대혜선사(大慧禪師)란 호를 주었으며 묘희암(妙喜庵) 3자를 어서(御書)하여 주었음. 융흥원년(隆興元年) 8월에 조금 병들었는데 10일에 유주(遺奏)를 친히 쓰고 또 유게(遺偈)를 쓰고는 붓을 던지고 의젓하게(委然) 입적했으니 나이는 75, 승랍은 58. 시호(諡號)를 가로되 보각선사(普覺禪師)며 대혜어록(大慧語錄) 등이 있음 [통요속집22. 연등회요17. 가태보등록15. 오등회원19. 불조통재20].
●拈古; 전인(前人)의 공안의 기어(機語)를 거출하여 평의를 가함이니 이는 선가 설법의 1종 형식임. 또 이는 선종어록의 1종 유형임.
●百丈再參; 오등회원3 백장회해(百丈懷海) 스님이 마조를 모시고 가던 차에 한 무리의 들오리가 날아감을 보았다. 마조가 가로되 이 무엇인가. 스님이 가로되 들오리입니다. 마조가 가로되 어느 곳으로 가느냐. 스님이 가로되 날아 지나갔습니다. 마조가 드디어 스님의 코를 잡아 비틀자 아픔을 지고 실성(失聲)했다. 마조가 가로되 또 날아 지나갔다고 말하라. 스님이 언하에 깨침이 있었다 (중략) 스님이 재참(再參)하여 시립(侍立)하던 차에 마조가 눈으로 승상(繩牀) 모서리의 불자를 보았다. 스님이 가로되 이 용(用)에 붙음(卽)입니까, 이 용(用)을 여읨(離)입니까. 마조가 가로되 네가 향후에 양편피(兩片皮)를 연다면 무엇을 가져 사람을 위하겠는가. 스님이 불자를 취해 세워 일으켰다. 마조가 가로되 이 용에 붙음인가, 이 용을 여윔인가. 스님이 불자를 구처에 걸었다. 마조가 위엄을 떨치며 1할(喝)했다. 스님이 바로 3일 동안 귀가 먹음을 얻었다. 이로부터 뇌음(雷音)이 장차 진동했다.
●盤山; 유주(하북)에 위치함. 반산보적선사(盤山寶積禪師)를 가리킴. 당대승이며 마조도일의 법사니 이 반산에 거추하면서 종풍을 선양한지라 고로 세칭이 반산보적임. 적관(籍貫)과 생졸한 해는 미상이며 시호가 응적대사 [조당집15. 전등록7. 연등회요4].
●筋斗; 또 근두(斤斗)ㆍ건두(巾斗)로 지음. 당의 속어니 몸을 거꾸로 뒤집음이 됨. 근(斤)이 이 그의 본래 글자며 나머지는 가차(假借)하여 씀이 됨. ▲조정사원7. 근두(斤斗) 도끼는 나무를 쪼개는 도구임. 머리가 무겁고 자루가 가벼워 이를 쓰면 곧 두(斗; 말. 자루가 있음)가 회전하므로 이 기예를 하는 자가 이와 흡사함.
●盤山會裏翻筋斗; 선원몽구상. 보화묘진(普化描眞) (회원3) 보화화상은 유주 반산 보적화상(寶積和尙)의 법사(法嗣)다. 반산이 천화에 임해 대중에게 일러 이르되 도리어 나의 진영을 묘득(描得; 묘사하다)할 사람이 있느냐. 대중이 다 진영을 베껴 반산에게 보였는데 반산이 모두 그것을 꾸짖었다. 보화가 나와 이르되 모갑이 묘득하겠습니다. 반산이 이르되 왜 노승에게 보여주지 않느냐. 보화가 바로 근두(筋斗)를 짓고 나갔다. 반산이 이르되 이 자가 향후에 풍광(風狂; 瘋狂이니 미친 지랄)과 같이 접인(接人)하여 갈 것이다. 반산이 이에 문득 화(化; 遷化)했다.
●普化; (?-860) 당대승 반산보적(盤山寶積)을 이었으니 남악하 3세. 일본 선종의 지파(支派) 보화종(普化宗)의 개조(開祖). 성씨와 나이는 다 상세치 못함. 보적(寶積)이 시적한 후 스님이 곧 북지(北地)의 진주(鎭州)에서 유화(遊化)하며 임제를 좌찬(佐贊)했음. 임제가 머문 지 오래지 않아 스님이 전신(全身)으로 벗고 갔음(죽음) [송고승전20. 전등록10. 석씨계고략3].
●死心; 오신(悟新; 1044-1115)이니 송대 황룡파승. 왕씨며 소주 곡강 사람. 조금 자라자 영탈(穎脫)했으며 장성하자 불타원 덕수에게 의지해 머리를 깎았음. 진구(進具; 전진하여 구족계를 받음)하고는 희녕 8년(1075) 황룡에 이르러 회당조심(晦堂祖心; 황룡혜남의 법사)을 참알(參謁)하고 아울러 그 법을 이었음. 원우 7년(1092) 출세하여 운암(雲岩)에 주지했고 소성 4년(1097) 취암(翠岩)으로 옮겼고 정화 초 황룡에 거주했고 정화 5년 12월 13일 저녁 소참(小參)에 게를 설하더니 15일에 조용히(泊然) 좌서(坐逝)했음. 오신(悟新)은 스스로 이 호(號)가 사심수(死心叟; 叟는 늙은이)며 그 거실에 방(榜)을 붙여 사심실(死心室)이라 했음. 어록 1권이 있음 [속전등록22. 보등록6].
●那吒; 북방 비사문천왕의 제3자. 비사문의궤에 이르되 북방 대비사문천왕 (중략) 천왕의 제3자 나타태자(那吒太子; 梵 Nalakūvara)는 탑을 받들고 늘 천왕을 따른다.
●汗馬; 조정사원5. 한마(汗馬) 이광리(李廣利)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이 되어 대완국(大宛國)을 정벌해 한혈마(汗血馬)를 얻었는데 이름이 포소(蒲捎)였다. 한무제가 천마(天馬)의 노래를 지었다. 말이 땀을 내면 곧 공로가 있으므로 고로 이르되 한마임.
●行李; 1. 행주(行走; 다니다). 2. 행각할 때 휴대하는 바의 복포(複包; 보따리). 3. 참습(參習)ㆍ참선.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口占; 이르자면 입으로 그 언사를 전수함.
●朝章; 1. 조정의 전장(典章). 2.조복(朝服).
贊曰 張無盡欲造無佛論 自向氏激發 始知留意宗乘 然當其受印可於東林 猶未廓然也 迨參龍安 得末後句 復與勤巴子 理會華嚴四無礙 而鼻孔依然向下垂矣 此時若喚作無佛 一莖草忽現丈六金身 若喚作有佛 丈六金身又現一莖草 畢竟如何 龜毛拂子 兔角拄杖
●廓然; 一空寂貌 二省悟貌 此指二
●勤巴子; 圓悟克勤之別名 圓悟頭上有斑點 形似巴字 故稱 一說成都呼巴西 師成都人 故稱勤巴子
●龜毛兔角; 龜本無毛 兔本無角 龜毛兔角 指虛有名稱而幷無實物 常用來說明萬事萬物虛幻不實
찬왈(贊曰) 장무진(張無盡)이 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다 향씨(向氏)가 격발(激發)함으로부터 비로소 종승(宗乘)에 유의(留意)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동림(東林)에게서 인가(印可)를 받음에 당해 오히려 확연(廓然)하지 못했고 용안(龍安; 從悅)을 참(參)함에 이르러(迨) 말후구(末後句)를 얻었다. 다시 근파자(勤巴子; 克勤)와 더불어 화엄사무애(華嚴四無礙)를 이회(理會)했으나 비공(鼻孔)이 의연(依然; 依前)히 향하(向下)하여 드리워졌다. 차시(此時)에 만약 무불(無佛)이라고 불러 짓는다면 일경초(一莖草)가 홀연히 장륙금신(丈六金身)을 나타내고 만약 유불(有佛)이라고 불러 짓는다면 장륙금신이 또 일경초를 나타내리라. 필경 어떠한가. 귀모불자(龜毛拂子)며 토각주장(兔角拄杖)이다.
●廓然; 1. 공적()한 모양. 2. 성오()하는 모양.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勤巴子; 원오극근의 별명. 원오의 두상에 반점이 있었는데 형상이 파자(巴字)와 비슷한지라 고로 일컬음. 1설엔 성도를 파서(巴西)로 부르며 스님이 성도 사람인지라 고로 일컬어 근파자라 함.
●龜毛兔角; 거북은 본래 털이 없으며 토끼는 본래 뿔이 없음. 귀모토각은 헛되이 명칭만 있고 모두 실물이 없음을 가리킴. 상용하여 오면서 만사만물의 허환되고 실답지 못함을 설명함.
往生集云 商英嘗著發願文云 思此世界 五濁亂心 無正觀力 無了因力 自性惟心 不能悟達 謹遵釋迦世尊金口之敎 專念阿彌陀佛 求彼世尊願力攝受 待報滿時往生極樂 如順水乘舟不勞自力而至矣 蓮池本師贊曰 無盡悟禪宗於兜率悅公而拳拳乎 安養是念 其爲計審矣 雖西方瑞應 史未詳錄 而據因以考果 不生西方將奚生哉
●往生集; 三卷 明代袾宏撰 收於大正藏第五十一冊 本書集錄中國與印度往生西方者
●五濁; 又作五滓 減劫(人類壽命次第減短之時代)中所起之五種滓濁 一衆生濁 二見濁 三煩惱濁 四命濁 五劫濁 [悲華經五 法苑珠林九十八 三藏法數] ▲楞嚴經集註四 熏聞云 准悲華經 人壽八萬至三萬歲 未有濁名 至二萬時爲五濁之始也
●了因; 了因佛性 三因佛性之一 了達正性之覺智也 ▲紫柏集一 實相般若 卽正因佛性也 觀照般若 卽了因佛性也 文字般若 卽緣因佛性也
●金口; 爲尊稱佛口之用語 卽强調佛陀親自說敎之亳無過誤 且饒益有情 故稱金口說 金口說法 金口所說等 又如來之身相 爲黃金色 故其口舌謂之金口 又如來之口舌如金剛堅固不壞 故謂之金口 ▲止觀輔行傳弘決一之一 金口者 此是如來黃金色身口業所記
●蓮池; 袾宏(1532-1612) 明代僧 杭州人 俗姓沈 字佛慧 號蓮池 幼習儒學 中年歸依佛敎 投西山無門性天剃髮 就昭慶無塵受具足戒 尋參四方 以遊方爲務 隆慶五年(1571) 入杭州雲棲山 居山中廢寺 師常精修念佛三昧 敎化遠近 衲子雲集 遂成叢林 萬曆十二年(1584) 著往生集三卷 三十年 撰楞嚴經摸象記一卷 又制定水陸儀文及瑜伽焰口法 以濟幽冥之苦 於城之內外開放生池 撰戒殺放生文 師主張淨土 痛斥狂禪 力闡禪淨兼修 道風益盛 萬曆四十年(一說四十三年)示寂 壽八十一 世稱雲棲和尙 蓮池大師 與紫柏憨山湡益 竝稱爲明代四大高僧 所著除上記之外 有禪關策進 梵網戒疏發隱 阿彌陀經疏鈔 華嚴經感應略記等三十餘種 後王宇春集其著作 稱雲棲法彙 三十四卷 [釋鑑稽古略續集三 淨土聖賢錄五 補續高僧傳五 續燈存槀十二 五燈嚴統十六]
●拳拳; 勤而奉持 [禪林寶訓音義]
왕생집(往生集)에 이르되 상영(商英)이 일찍이 발원문을 지어 이르되 이 세계를 사유컨대 오탁(五濁)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정관력(正觀力)이 없고 요인력(了因力)이 없다면 자성(自性)의 유심(惟心)을 능히 오달(悟達)하지 못한다. 삼가 석가세존의 금구지교(金口之敎)를 준수(遵守; 遵)하여 아미타불을 전념(專念)하면서 그 세존의 원력으로 섭수(攝受)함을 구하고 과보가 찰 때를 기다려 극락에 왕생하되 순수(順水)에 승주(乘舟)하면 자력(自力)을 노고롭게 하지 않아도 이름(至)과 같으리라. 연지본사(蓮池本師)가 찬왈(贊曰) 무진(無盡)이 도솔열공(兜率悅公)에게서 선종(禪宗)을 깨치고 권권(拳拳)했는가, 안양(安養)이 이 사념이며 그가 계탁(計度; 計)함이 자세(仔細; 審)했다. 비록 서방(西方)의 서응(瑞應)은 사(史; 史書)에 상록(詳錄)되지 않았지만 거인(據因)하여 고과(考果)할진대 서방에 왕생하지 않고 장차 어디에(奚) 왕생했겠는가.
●往生集; 3권. 명대 주굉(袾宏)이 찬(撰)했고 대정장 제51책에 수록되었음. 본서는 중국과 인도에서 왕생서방한 자를 집록했음.
●五濁; 또 5재(滓)로 지음. 감겁(減劫; 인류의 수명이 차제로 減短하는 시대) 중 일어나는 바의 5종의 재탁(滓濁)이니 1은 중생탁이며 2는 견탁(見濁)이며 3은 번뇌탁이며 4는 명탁(命濁)이며 5는 겁탁임 [비화경5. 법원주림98. 삼장법수]. ▲릉엄경집주4. 훈문(熏聞)에 이르되 비화경에 준거(准據; 準據)하면 이르기를 인수(人壽) 8만에서 3만 세에 이르기까지는 탁명(濁名)이 있지 않다. 2만에 이르렀을 때 5탁이 시작된다.
●了因; 요인불성(了因佛性)이니 삼인불성(三因佛性)의 하나. 정성(正性)을 요달하는 각지(覺智)임. ▲자백집1. 실상반야는 곧 정인불성(正因佛性)이며 관조반야는 곧 요인불성(了因佛性)이며 문자반야는 곧 연인불성(緣因佛性)이다.
●金口; 부처의 입을 존칭하는 용어가 됨. 불타가 친히 스스로 설교하면서 터럭만큼의 과오가 없음을 강조함이며 또 유정을 요익하는지라 고로 호칭이 금구설ㆍ금구설법ㆍ금구소설 등임. 또 여래의 신상이 황금색이 되는지라 고로 그 입과 혀를 얼러 금구라 함. 또 여래의 입과 혀는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으므로 고로 그것을 일러 금구라 함. ▲지관보행전홍결1지1. 금구란 것은 이것은 이 여래의 황금색신과 구업을 표기한 것이다.
●蓮池; 주굉(袾宏; 1532-1612)이니 명대승. 항주(杭州)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심(沈)이며 자(字)는 불혜(佛慧)며 호(號)는 연지(蓮池). 어려서 유학(儒學)을 익혔고 중년(中年)에 불교에 귀의해 서산(西山) 무문성천(無門性天)에게 투신해 머리를 깎았으며 소경무진(昭慶無塵)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음. 이윽고 사방으로 참방(參訪)하면서 유방(遊方)으로 업무를 삼다가 융경(隆慶) 5년(1571) 항주(杭州) 운서산(雲棲山)에 들어가 산중의 폐사(廢寺)에 거주했음. 스님은 늘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정수(精修)하면서 원근을 교화했으며 납자가 운집하여 드디어 총림을 이루었음. 만력(萬曆) 12년(1584) 왕생집(往生集) 3권을 지었고 30년 릉엄경모상기(楞嚴經摸象記) 1권을 지었으며 또 수륙의문(水陸儀文) 및 유가염구법(瑜伽焰口法)을 제정(制定)하여 유명(幽冥)의 고(苦)를 제도했음. 성(城)의 안팎에 방생지(放生池)를 열고 계살방생문(戒殺放生文)을 지었음. 스님은 정토를 주장하고 통렬히 광선(狂禪)을 배척했으며 선정겸수(禪淨兼修)를 역천(力闡)하여 도풍(道風)이 더욱 성했음. 만력 40년(一說엔 43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81. 세칭 운서화상(雲棲和尙)ㆍ연지대사(蓮池大師)며 자백(紫柏)ㆍ감산(憨山)ㆍ우익(湡益)과 함께 명대(明代)의 사대고승(四大高僧)으로 병칭(竝稱)함. 소저(所著)는 상기(上記)를 제한 밖에 선관책진(禪關策進)ㆍ범망계소발은(梵網戒疏發隱)ㆍ아미타경소초(阿彌陀經疏鈔)ㆍ화엄경감응약기(華嚴經感應略記) 등 30여 종이 있으며 후에 왕우춘(王宇春)이 그의 저작을 모아 운서법휘(雲棲法彙)라 일컬었으니 34권임 [석감계고략속집3. 정토성현록5. 보속고승전5. 속등존고12. 오등엄통16].
●拳拳; 부지런히 받들어 가짐 [선림보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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