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분등록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소식(蘇軾)

태화당 2026. 6. 22. 08:19

蘇軾(東林常總禪師法嗣)

蘇子瞻 眉山人 名軾 號東坡 初母程氏方娠 夢一僧至門 瘠而眇 後弟轍官高安時 眞淨文聖壽聰時時相過從 一夕三人同夢迎五祖戒 俄而軾至 理夢事 軾曰 某年七八歲 嘗夢身是僧 往來陝右 眞淨曰 戒禪師陝右人也 暮年棄五祖 來遊高安 終於大愚 逆數蓋五十年 而軾時年四十九 又戒眇一目 乃悟軾前身卽戒和尙云 嘉祐初 登進士直史館 元豐三年 謫黃州時 佛印了元住歸宗 軾與酬酢妙句 烟雲爭麗 自黃徙汝 因遊廬山宿東林 與照覺常總論無情話有省 黎明獻偈曰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又曰 橫看成嶺側成峰 遠近看山了不同 不識廬山眞面目 祇緣身在此山中 抵荊南 聞玉泉承皓機鋒不可觸 擬抑之 卽微服求見 皓問 尊官高姓 軾曰 姓秤 乃秤天下長老底秤 皓喝曰 且道這一喝重多少 軾無對 自此益重禪宗 未幾歸陽羨舟次 瓜步以書抵金山了元曰 不必出山 當學趙州上等接人 元得書徑來 軾迎笑問之 卽說偈曰 趙州當日少謙光 不出山門見趙王 爭似金山無量相 大千都是一禪床 軾拊掌稱善 知登州石塔戒來迎軾 軾曰 吾欲一見石塔 以行速不及也 戒起曰 看這箇是磚浮圖耶 軾曰 有縫柰何 戒曰 若無縫 爭解容得世間螻蟻 軾爲首肯 元祐丙寅 除翰林學士 己巳出知杭州 復過金山 謁了元留數月 元所居方丈名妙高臺 軾有詩曰 我欲乘飛車 東訪赤松子 蓬萊不可到 弱水三萬里 不如金山去 淸風半帆耳 中有妙高臺 雲峯自孤起 仰觀初無路 誰信平如砥 臺中老比丘 碧眼照窓几 巉巉玉爲骨 凜凜霜入齒 機鋒不可觸 千偈如翻水 何須尋德雲 只此比丘是 長生未暇學 請學長不死 壬申知揚州 一日石塔遣侍者求解院事 軾問 長老何往 對 欲歸西湖 遂率僚佐 同至石塔 令擊鼓 袖中出疏 使晁無咎讀之曰 大士何曾說法 誰作金毛之聲 衆生各自開堂 何關石塔之事 去無作相 住亦隨緣 惟戒公長老 開不二門 施無盡藏 念西湖之久別 亦是偶然 爲東坡而少留 無不可者 一時稽首 重聽白槌 渡口船迴 依舊雲山之色 秋來雨過 一新鐘鼓之音 九月召爲禮部尙書 兼端明侍讀學士 甲戌 安置惠州 舟次金陵 阻風江滸 迎蔣山泉萬卷 至問曰 如何是智海之燈 泉以偈對曰 指出明明是甚麽 擧頭鷂子穿雲過 從來這盌最希奇 解問燈人能幾箇 軾欣然亦作偈曰 今日江頭天色惡 砲車雲起風欲作 獨望鐘山喚寶公 林間白塔如孤鶴 寶公骨冷喚不應 却有老泉來喚人 電眸虎齒霹靂舌 爲余吹散千峰雲 南來萬里亦何事 一酌曹溪知水味 他年若畵蔣山圖 仍作泉公喚居士 泉說偈曰 脚下曹溪去路通 登堂無復問旛風 好將鍾阜臨岐句 說似當年踏碓翁 軾在惠州 了元致書云 子瞻中大科 登金門 上玉堂 遠放寂寞之濵 權臣忌子瞻爲宰相耳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 三十年功名富貴 轉盻成空 何不一筆勾斷 尋取自家本來面目 萬劫常住永無墮落 昔有問師佛法在甚處 師曰 在行住坐臥處 著衣喫飯處 屙屎撒尿處 沒理沒會處 死活不得處 子瞻胸中有萬卷書 下筆無一點塵 到這地位 不知性命所在 一生聦明 要做甚麽三世佛 則是一箇有血性的漢子 子瞻若能脚下承當 把三二十年富貴功名賤如泥土 努力向前 珍重 珍重 庚辰復朝奉郞 辛巳度嶺北 歸中止常州 請老以本官致仕 南遷日 携阿彌陀佛像一軸 曰 此軾生西方公據也 至是疾革 徑山惟琳來候 曰 端明勿忘西方 軾曰 西方不無 但箇裡著力不得 語畢而逝 甞題自己照容曰 心似已灰之木 身如不繫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瓊州

五祖戒; 師戒 宋代雲門宗僧 蜀(四川)人 嗣雙泉師寬(嗣雲門) 住蘄州(湖北)五祖山 故稱五祖師戒 暮年住高安(江西)大愚山 倚杖談笑而化 年壽不詳 [廣燈錄二十一 聯燈會要二十七]

逆數; 一猶預測 二猶言倒數 謂由後向前 由下至上推算

史館; 舊時指編纂國史的機構

了元; (1032-1098) 宋代雲門宗僧 嗣開先善暹 雲門下四世 江西浮梁(今江西景德鎭)人 俗姓林 號佛印 故又稱佛印了元 字覺老 二歲學論語 長從寶積寺日用出家 受具足戒 遍參諸師 十九歲 入廬山開先寺 列善暹之法席 又參圓通之居訥 長於書法 能詩文 尤善言辯 二十八歲住江州(今江西九江)承天寺 移住廬山之開先歸宗 元豐(1078-1085)年間 住持鎭江(今屬江蘇)金山寺 後居南康軍(今江西永修)雲居山 凡歷坐道場九所 道化不止 當時名士蘇東坡黃山谷等 與之交善 以章句相酬酢 神宗欽其道風 特賜高麗磨衲金鉢 贈號佛印禪師 元符元年正月示寂 壽六十七 臘五十二 [續傳燈錄五 佛祖歷代通載十九 釋氏稽古略四]

廣長舌; 指佛的舌頭 後用以喩能言善辯

八萬四千; 乃數量極多之形容詞 略作八萬 煩惱種類極多 喩稱八萬四千煩惱 八萬四千塵勞 佛所說之敎法及其意義至爲繁複 故亦總稱八萬四千法門(八萬法門) 八萬四千法藏(八萬法藏) 八萬四千法蘊(八萬法蘊) [往生要集上]

承皓; (1011-1091) 北宋雲門宗僧 眉州(四川)丹稜人 俗姓王 天聖年間(1023-1031) 依大力院出家 後遊學諸方 至復州參北塔思廣禪師(雲門下三世) 體達玄旨 得大自在三昧 乃嗣其法 曾製犢鼻裩 書歷代祖師之名而言 唯有文殊普賢較些子 且將此語書於帶上 故叢林稱師爲皓布裩 元豐年間(1078-1084) 住襄陽谷隱山 後移住荊門郡玉泉寺 元祐六年示寂前 門人圍繞之 師笑曰 吾年八十一 老死舁屍出 兒郞齊著力 一年三百六十日 言畢而寂 壽八十一 [聯燈會要二十八 續燈錄六 續傳燈錄五 佛祖通載十九]

舟次; 一指船只停泊的場所 卽碼頭 二指行船途中或船上 此指二

趙州上等接人; 五燈會元四趙州從諗 眞定帥王公攜諸子入院 師坐而問曰 大王會麽 王曰 不會 師曰 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牀 王尤加禮重 翌日令客將傳語 師下禪牀受之 侍者曰 和尙見大王來 不下禪牀 今日軍將來 爲甚麽却下禪牀 師曰 非汝所知 第一等人來 禪牀上接 中等人來 下禪牀接 末等人來 三門外接

石塔戒; 宋代雲門宗僧 名無擇 得法於東京慧林寺若沖 初住杭州西湖 遷揚州石塔 退席渡江 時東坡知揚州 疏請再臨主持 聲名由是大振 後東坡並爲作戒衣銘 傳誦一時 [補續高僧傳二十三 五燈全書三十五 續傳燈錄十六]

赤松子; 祖庭事苑三 赤松子 神仙傳云 黃初平 年十五時 在山中牧羊 有道士目而異之 輒將至金華山 四十餘年 其兄初起 尋久之不已 遇一道士 將見與弟語 兄問 羊何在 平曰 近在山之東 兄卽往視之 一無所覩 平遂與偕至山所 平環視而叱之 於是白石皆變爲羊而起 兄方嘆曰 弟得仙道 如此可學否 曰 唯好道卽得 起乃弃妻孥 服松苓五萬 曰遂得仙 平自號赤松子

蓬萊; 漢書二十五 蓬萊 方丈 瀛州 此三神山者 其傳在勃海中

弱水; 中國古代神話中的特殊水體 具有鴻毛不浮 飛鳥難過的特性

半帆; 指江海中未張滿的船帆

德雲; 祖庭事苑三 德雲 華嚴(62) 善財童子漸次南行 向勝樂國 登妙峰山 於其山上 東西南北 四維上下 觀察求覔 渴仰欲見德雲比丘 經于七日 見彼比丘在別山上徐步而行 見已 往詣 頂禮其足 淸凉疏主云 忘所住位 方爲得旨

僚佐; 舊時官署中的助理人員

端明; 端明殿 位於福建省莆田市秀嶼區笏石 據傳北宋慶曆(1041-1048)年間 大學士蔡襄曾親臨此地並創建

侍讀學士; 官名 唐開元十三年(725)置集賢殿侍讀學士 五品以上官充任 日一人侍讀 以質史籍疑義 北宋咸平二年(999)沿置 其後或不帶學士 或僅爲侍讀 元豐改制後以侍讀侍講爲侍從以上兼職 正七品 遼代置 所掌不詳 金代翰林學士院置 員一人 從三品 元代翰林兼國史院 蒙古翰林院集賢院各置二員 從二品 明代翰林院亦置 [百度漢語]

砲車; 同炮車 炮車一般指炮車街道 炮車街道 江蘇省邳州市下轄街道 [百度百科]

寶公; 寶誌(418-514) 南朝僧 又作寶志 保誌 世稱寶公 志公 誌公和尙 金城(陝西南鄭 或江蘇句容)人 俗姓朱 年少出家 師事道林寺僧儉 修習禪業 劉宋泰始年間(466-471) 往來於都邑 居無定所 時或賦詩 其言每似讖記 四民遂爭就問福禍 齊武帝以其惑衆 投之於獄 然日日見師遊行於市里 乃往獄中檢視 卻見師猶在獄中 帝聞之 乃迎入華林園供養 禁其出入 而師不爲所拘 仍常遊訪龍光 罽賓 興皇 淨名等諸寺 至梁武帝建國 始解其禁 師每與帝長談 所言皆經論義 師於天監十三年十二月示寂 壽九十六 敕葬鍾山獨龍阜 於墓側立開善寺 諡號廣濟大師 後代續有追贈 如妙覺大師 道林眞覺菩薩 道林眞覺大師 慈應惠感大師 普濟聖師菩薩 一際眞密禪師等號 師嘗爲學者述文字釋訓三十卷 十四科頌十四首 十二時頌十二首 大乘讚十首等 [梁高僧傳十 佛祖統紀三十六 同三十七 佛祖歷代通載十 寶華山志七誌公法師墓誌銘 神僧傳四]

; 谿 位於韶州(今廣東曲江縣東南)之河 發源於狗耳嶺 西流與溱水合 以經曹侯塚故 又稱曹侯溪 梁天監元年(502) 天竺婆羅門三藏智藥 到曹溪口 飮其水而知此源爲勝地 乃勸村人建寺 復因其地似西國之寶林山 故稱寶林寺 智藥預言 一七年後 有肉身菩薩 於此開演無上法門 得道者如林 至唐儀鳳二年(677)春 六祖慧能從弘忍得法後 從印宗剃髮 受具足戒而歸寶林寺 大弘法化 人稱曹溪法門 指六祖慧能 慧能以曹溪寶林寺爲中心 開展敎化活動 世人尊稱爲曹溪古佛 曹溪高祖

旛風; 祖庭事苑四 風幡競辨 老盧自傳衣之後 至儀鳳(676- 678)初 屆南海 遇印宗法師於法性寺講涅槃 盧寓止廊廡間 暮夜 風颺刹幡 聞二僧對論 一云風動 一云幡動 往復醻對 曾未契理 盧曰 可容俗士預高論否 曰 願聞子說 曰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印宗竊聆此語 悚然異之

鍾阜; 誌公示寂後 敕葬鍾山獨龍阜

踏碓翁; 六祖慧能在湖北黃梅山五祖弘忍法會中 踏碓舂穀 故稱

大科; 古代科擧制度中 在常科之外 由皇帝臨時決定擧行的特別考試

白駒過隙; 禪林疏語考證三 迅駒過隙 史記魏豹傳曰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耳 小顔云 白駒謂日影也 隙壁隙也

一筆勾; 謂破除一切也 勾 句的俗字 表示刪除或截取塗去 正字通 俗謂除去曰勾

朝奉郞; 官名 宋初爲文散官 秩正六品上 太平興國元年(976) 由朝議郞改名 元豐三年(1080)廢 遂爲新寄祿官 相當於舊寄祿官後行員外郞 左右司諫 [百度百科]

南遷; 被貶謫 流放到南方

公據; 官府的憑據

 

소식(蘇軾; 1036-1101)(東林 常總禪師法嗣)

소자첨(蘇子瞻; 子瞻)은 미산(眉山) 사람이며 이름이 식()이며 호()가 동파(東坡). 처음 모() 정씨(程氏)가 바야흐로 임신(妊娠)했을 적에 꿈에 일승(一僧)이 문에 이르렀는데 파리하고(; 음이 척) 애꾸눈()이었다. 후에 동생 철()이 고안(高安)에서 벼슬할 때 진정문(眞淨文; 克文)ㆍ성수총(聖壽聰)과 시시로 서로 과종(過從; 서로 왕래함)했는데 어느 날 밤(一夕) 3인이 한가지로 꿈에 오조계(五祖戒)를 영접(迎接; )했다. 갑자기() ()이 이르자 몽사(夢事)를 정리(整理; )했다. 식왈(軾曰) ()가 나이 7, 8세에 일찍이 꿈에 몸이 이 승()이었고 섬우(陝右)로 왕래했습니다. 진정(眞淨)이 가로되 계선사(戒禪師)는 섬우(陝右) 사람이며 모년(暮年)에 오조(五祖; 오조산)를 버리고 고안(高安)으로 내유(來遊)했고 대우(大愚)에서 마쳤으니 역수(逆數)하면 대개 50년입니다. 소식(蘇軾)이 당시에 나이가 49였으며 또 사계(師戒)는 한쪽 눈(一目)이 애꾸()였다. 이에 소식의 전신(前身)이 곧 계화상(戒和尙)임을 깨달았다. 가우(嘉祐; 1056-1063) 초 진사(進士)로 등과(登科)했고 사관(史館)에 당직(當直; )했다. 원풍(元豐) 3(1080) 황주(黃州)로 폄적(貶謫; ; 降職되어 外地로 보냄)되었을 때 불인요원(佛印了元)이 귀종(歸宗)에 주()했다. 소식이 더불어 묘구(妙句)를 수작(酬酢)하면서 연운(烟雲)이 쟁려(爭麗)했다. (; 黃州)으로부터 여(; 汝州)로 옮겼고() 인하여 여산(廬山)을 유람하다가 동림(東林)에 묵으면서(宿) 조각상총(照覺常總)과 더불어 무정화(無情話)를 논하다가 유성(有省)했다. 여명(黎明)에 헌게(獻偈)하여 가로되 계성(溪聲)이 곧 이 광장설(廣長舌)이거늘/ 산색인들 어찌 청정신(淸淨身)이 아니랴/ 야래(夜來; 는 조사)의 팔만사천(八萬四千) 게를/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거사(擧似)할까. 우왈(又曰) 횡간(橫看)하니 고개()를 이루고 측면(側面; )에선 봉우리를 이루나니/ 원근(遠近)에서 간산(看山)하매 마침내() 부동(不同)하다/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다만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형남(荊南)에 다다라 옥천승호(玉泉承皓)의 기봉(機鋒)을 가히 저촉(抵觸; )하지 못한다 함을 들었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했다(擬抑之). 곧 미복(微服)으로 구견(求見)하자 승호가 묻되 존관(尊官)의 고성(高姓), 식왈(軾曰) 성이 칭(; 저울)이니 곧 천하 장로(長老)를 저울질하는() ()입니다. 승호가 할()하고 가로되 그래 말하시오(且道), 1()은 무게가 얼마입니까(多少). 소식이 대답이 없었다. 이로부터 더욱() 선종을 존중했다. 미기(未幾)에 양선(陽羨)으로 돌아가는 주차(舟次)에 과보(瓜步; 과보산)에서 서신을 금산(金山) 요원(了元)에게 이르게() 하여 가로되 출산(出山)함이 필요하지 않나니 마땅히 조주의 상등접인(趙州上等接人)을 배우십시오. 요원이 득서(得書)하자 곧장() 왔다. 소식이 영접하고 웃으며 그것()을 묻자 곧 게를 설해 가로되 조주는 당일(當日)에 겸광(謙光)이 적어/ 산문(山門)을 나서지 않고 조왕(趙王)을 뵈었다/ 어찌, 금산(金山)은 무량상(無量相)이라/ 대천(大千)이 모두() 이 일선상(一禪床)임과 같겠는가. 소식이 부장(拊掌; 拍掌)하며 칭선(稱善)했다. 등주(登州)를 지(; 主宰)하자 석탑계(石塔戒)가 와서 소식을 영접했다. 식왈(軾曰) 내가 석탑을 일견(一見)하고 싶었는데 행()이 신속했기 때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가 일어나 가로되 보십시오, 저개(這箇)는 이 전부도(磚浮圖; 벽돌탑)입니까. 식왈 꿰맴()이 있음을 어찌하겠습니까(柰何). 계왈(戒曰) 만약 꿰맴이 없다면 어찌 세간의 누의(螻蟻; 땅강아지와 개미)를 용납함을 얻을 줄 알겠습니까. 소식이 수긍했다. 원우(元祐) 병인(丙寅; 1086)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배(除拜; )되었고 기사(己巳; 1089)에 나가서 항주(杭州)를 지()했다. 다시 금산(金山)에 이르러() 요원(了元)을 참알하고 몇 달 머물렀다. 요원의 소거(所居) 방장(方丈)은 이름이 묘고대(妙高臺)였다. 소식이 시가 있어 가로되 내가 비거(飛車)를 타고/ 동쪽으로 적송자(赤松子)를 탐방(探訪; )하려 했다/ 봉래(蓬萊)엔 가히 이르지 못하나니/ 약수(弱水)가 삼만 리다/ 금산(金山)으로 감만 같지 못하나니/ 청풍(淸風)으로 반범(半帆)일 따름이다/ 가운데 묘고대(妙高臺)가 있나니/ 운봉(雲峯)이 스스로 고기(孤起)했다/ 앙관(仰觀)하매 애초에 길이 없었거늘/ 누가, 평평하기가 숫돌() 같다 함을 믿겠는가/ 대중(臺中)의 늙은 비구는/ 벽안(碧眼)이 창궤(窓几)를 비춘다/ 참참(巉巉; 산이 가파르고 높은 모양)하여 옥()으로 골()이 되었고/ 늠름(凜凜)하여 서리가 치아(齒牙; )에 들어온다/ 기봉(機鋒)을 가히 저촉하지 못하나니/ 천게(千偈)가 번수(翻水)와 같다/ 어찌 덕운(德雲)을 찾음()을 쓰겠는가()/ 다만 이 비구가 이것이다/ 장생(長生)하되 배움을 빌리지(; 와 통함) 않았나니/ 장생(長生; )하여 불사(不死)함을 배우기를 청합니다. 임신(壬申; 1092) 양주(揚州)를 지(; 主宰)했다. 어느 날 석탑(石塔)이 시자를 보내 원사(院事)를 해결(解決; )하기를 구했다. 식왈(軾問) 장로는 어디로 가십니까. ()하되 서호(西湖)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드디어 요좌(僚佐)를 인솔(引率; )하고 함께 석탑에 이르렀다. 격고(擊鼓)하게 하고 수중(袖中)에서 출소(出疏)하여 조무구(晁無咎)를 시켜 그것을 읽게 했으니 가로되 대사(大士)가 어찌 일찍이 설법하셨으리오, 누가 금모지성(金毛之聲)을 짓는가. 중생이 각자 개당(開堂)하거늘 어찌 석탑지사(石塔之事)에 상관(相關; )되겠는가. 가더라도() 작상(作相)이 없고 머물더라도() 또한 수연(隨緣)이다. 오직 계공(戒公) 장로는 불이문(不二門)을 열고 무진장(無盡藏)을 베푸셨다. 서호(西湖)의 구별(久別; 오랫동안 헤어짐)을 사념(思念; )함도 역시 우연(偶然)이니 동파(東坡)를 위해 잠시 머묾(少留)도 불가(不可)한 게 없습니다. 일시(一時)에 계수(稽首)하나니 백추(白槌)를 중청(重聽)케 하십시오. 도구(渡口)에서 배를 돌리니(船迴) 운산(雲山)의 색이 의구하고 추래(秋來)에 비가 지나니 종고(鐘鼓)의 음()을 일신(一新)했다. 9월에 불러 예부상서(禮部尙書) 겸 단명시독학사(端明侍讀學士)가 되었다. 갑술(甲戌; 1094) 혜주(惠州)를 안치했다. 금릉(金陵)으로 주차(舟次)에 강호(江滸; 강변)의 바람에 막혔는데() 장산(蔣山)의 천만권(泉萬卷; 法泉)을 맞이했다. 이르자 문왈(問曰) 무엇이 이 지해(智海)의 등()입니까. ()이 게()로써 대답해 가로되 명명(明明)을 지출(指出)하니 이 무엇인가(是甚麽)/ 거두(擧頭)하니 요자(鷂子; 새매)가 구름을 뚫고 지나간다/ 종래로 저완(這盌; 이 사발)이 가장 희기(希奇)하나니/ ()을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개이던가. 소식이 흔연(欣然)했고 또한 작게(作偈)하여 가로되 금일 강두(江頭; 강변)에 천색(天色)이 사나운데()/ 포차(砲車)에 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행하려고(欲作) 한다/ 홀로 종산(鐘山; 蔣山)을 바라보며 보공(寶公)을 부르니/ 임간(林間)의 백탑(白塔)이 고학(孤鶴)과 같다. 보공은 뼈가 차가워 불러도 응(; 하다. 대답하다)하지 않고/ 도리어 노천(老泉; 法泉)이 있어, 와서 사람을 부른다/ 전모(電眸; 번개의 눈), 호치(虎齒), 벽력설(霹靂舌)/ ()를 위해 천봉(千峰)의 구름을 취산(吹散)했다. 만 리 남쪽에서 왔음은 또한 무슨 일인가/ 조계(曹溪)를 일작(一酌)하니 물맛을 알겠다/ 타년(他年)에 만약 장산도(蔣山圖)를 그린다면/ 그대로() 천공(泉公)이 거사(居士)를 부름을 지으리라(). ()이 설게(說偈)하여 가로되 각하(脚下)가 조계(曹溪)라 거로(去路)가 통하나니/ 등당(登堂)하여 다시 번풍(旛風; 깃발과 바람)을 물음이 없다/ 좋이() 종부(鍾阜)의 임기구(臨岐句)를 가지고/ 당년(當年)의 답대옹(踏碓翁)에게 설해 준다(說似). 소식이 혜주(惠州)에 있었다. 요원(了元)이 치서(致書; 寄信)하여 이르되 자첨(子瞻)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금문(金門)에 오르고 옥당(玉堂)에 올랐다가 멀리 적막(寂寞)한 물가()에 내쳐졌음()은 권신(權臣)이 자첨(子瞻)이 재상(宰相)이 되는 것을 시기(猜忌; )했을 뿐입니다. 인생 일세간(一世間)은 백구가 틈을 지남(白駒過隙)과 같나니 삼십 년 공명(功名)과 부귀가 전혜(轉盻; 轉眼. 저본에 轉𦕎로 지었음)하매 공()을 이루거늘 왜 일필구단(一筆勾)하여 자가(自家)의 본래면목을 심취(尋取)하지 않습니까. 만겁(萬劫)에 상주(常住)하며 영원히 타락(墮落)이 없습니다. 옛적에 어떤 이가 스승에게 묻되 불법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스승이 가로되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곳, 착의끽반(著衣喫飯)하는 곳, 아시살뇨(屙屎撒尿)하는 곳, 몰리몰회(沒理沒會)하는 곳, 사활(死活)을 얻지 못하는 곳에 있다. 자첨(子瞻)은 흉중에 만권서(萬卷書)가 있으며 하필(下筆)하면 일점(一點)의 티끌도 없습니다. () 지위(地位)에 이르러 성명(性命)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고서 일생의 총명(聦明)으로 무슨(甚麽) 삼세불(三世佛)을 지음()을 요하겠습니까. 곧 이 일개(一箇)의 혈성(血性)이 있는 한자(漢子; 는 조사)입니다. 자첨이 만약 능히 각하(脚下; 當念)에서 승당(承當)한다면 3, 2십 년 부귀공명을 잡아() 니토(泥土)와 같이 천()하게 여기고 노력(努力)하여 향전(向前)하십시오. 진중(珍重), 진중. 경진(庚辰; 1100)에 조봉랑(朝奉郞)을 회복(回復; )했다. 신사(辛巳; 1101) 영북(嶺北)을 건너() 돌아오던 중 상주(常州)에 머물렀다(). 늙어 본관(本官)으로서 치사(致仕; 退休)하기를 청했다. 남천(南遷)하던 날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일축(一軸)을 휴대(携帶; )했다. 가로되 이것은 소식이 서방에 왕생할 공거(公據). 이에 이르러 질혁(疾革; 질병이 危急)했다. 경산유림(徑山惟琳)이 내후(來候)하여 가로되 단명(端明; 端明殿 侍讀學士)은 서방(西方)을 잊지 마십시오. 식왈(軾曰) 서방은 없지 않으나 단지 개리(箇裡; 이 속)에 착력(著力)함을 얻지 못합니다. 말을 마치자 서거했다. 일찍이 자기의 조용(照容; 照射容貌)에 제()해 가로되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며/ 몸은 묶이지 아니한 배와 같다/ 너의 평생의 공업(功業)을 묻나니/ 황주(黃州), 혜주(惠州), 경주(瓊州).

五祖戒; 사계(師戒)니 송대 운문종승. (사천) 사람. 쌍천사관(雙泉師寬; 운문을 이었음)을 이었고 기주(호북) 오조산에 거주했으므로 고로 호칭이 오조사계임. 모년(暮年)에 고안(강서) 대우산에 거주했으며 주장자에 기대어 담소하다가 화()했음. 나이는 불상 [광등록21. 연등회요27].

逆數; 1. 예측(預測)과 같음. 2. 도수(倒數)라고 말함과 같음. 이르자면 후로부터 앞을 향하고 아래로부터 위에 이르는 추산(推算).

史館; 구시(舊時) 국사(國史)를 편찬(編纂)하던 기구(機構)를 가리킴.

了元; (1032-1098) 송대 운문종승. 개선선섬(開先善暹)을 이었으니 운문하 4. 강서 부량(지금의 강서 경덕진)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임()이며 호가 불인(佛印)이니 고로 또 명칭이 불인요원(佛印了元)이며 자는 각로(覺老). 2세에 논어(論語)를 배웠으며 자라자 보적사(寶積寺) 일용(日用)을 좇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고 두루 여러 스님을 참방(參訪)했음. 19세에 여산(廬山) 개선사(開先寺)에 들어가 선섬(善暹)의 법석에 줄섰으며 또 원통의 거눌(居訥)을 참알(參謁)했음. 서법(書法)에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특히 언변이 좋았음. 28세에 강주(江州. 지금의 江西 九江) 승천사(承天寺)에 주()했고 여산의 개선ㆍ귀종으로 이주했음. 원풍(1078- 1085)년 간 진강(鎭江; 지금 강소에 속함) 금산사에 주지했고 후에 남강군(지금의 강서 영수) 운거산(雲居山)에 거주했음. 무릇 경력(經歷)하며 9곳의 도량(道場)에 앉았으며 도화(道化)를 그치지 않았음. 당시의 명사(名士) 소동파(蘇東坡)ㆍ황산곡(黃山谷) 등도 그와 교선(交善; 좋게 交遊)하면서 장구(章句)로써 서로 수작(酬酢)했음. 신종(神宗)이 그의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특별히 고려마납(高麗磨衲)과 금발(金鉢)을 주었으며 불인선사(佛印禪師)란 호를 주었음. 원부 원년 정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67이며 승랍은 52 [속전등록5. 불조역대통재19. 석씨계고략4].

廣長舌; 부처의 혀를 가리킴. 후에 사용하여 능히 말함과 잘 변론함에 비유.

八萬四千; 곧 수량의 극다(極多)의 형용사(形容詞). 간략히 팔만(八萬)으로 지음. 번뇌의 종류가 극다하여 비유로 일컬어 팔만사천번뇌ㆍ팔만사천진로(八萬四千塵勞)라 하고 부처가 설한 바의 교법(敎法) 및 그 의의(意義)가 지극히 번복(繁複)한지라 고로 또한 총칭(總稱)하여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 八萬法門)ㆍ팔반사천법장(八萬四千法藏; 八萬法藏)ㆍ팔만사천법온(八萬四千法蘊; 八萬法蘊)이라 함 [왕생요집상].

承皓; (1011-1091) 북송 운문종승. 미주(사천) 단릉 사람이며 속성은 왕. 천성년 간(1023-1031) 대력원에 의지해 출가했음. 후에 제방에 유학(遊學)하다가 복주에 이르러 북탑사광선사(北塔思廣禪師; 운문하 3)를 참해 현지(玄旨)를 체달(體達)하고 대자재삼매를 얻고 이에 그의 법을 이었음. 일찍이 독비곤(犢鼻裩)을 제작해 역대 조사의 이름을 쓰고 말하되 오직 문수와 보현이 조금 상당하다(較些子). 또 이 말을 가져다 띠() 위에 쓴지라 고로 총림에서 스님을 호칭하기를 호포곤(皓布裩)이라 했음. 원풍년 간(1078-1084) 양양 곡은산에 거주했고 후에 형문 옥천사(玉泉寺)로 이주했음. 원우 6년 시적하기 전 문인(門人)이 그를 위요하자 스님이 웃으며 가로되 나의 나이 81에 늙어 죽으니 시체를 마주 들고 나가라. 아랑(兒郞; 남자. 남아)이 가지런히 힘을 붙일지니 136십 일이다. 말을 마치자 적()했으니 나이는 81 [연등회요28. 속등록6. 속전등록5. 불조통재19].

舟次; 1. 배가 다만 정박(停泊)하는 장소를 가리킴. 곧 마두(碼頭; 부두. 선창). 2. 행선도중(行船途中) 혹 선상(船上)을 가리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趙州上等接人; 오등회원4 조주종심. 진정수(眞定帥)인 왕공(王公; 王公鎔이니 五代 때의 偏覇. 釋氏稽古略三에 이르되 王鎔鎭州眞定府를 통솔하며 趙王이라고 일컬었다)이 여러 아들을 데리고 입원(入院)했다. 스님이 앉은 채 물어 가로되 대왕이여 아시겠습니까. 왕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가로되 어릴 적부터 재()를 가져 몸이 이미 늙은지라 사람을 보고도 선상에서 내려올 힘이 없습니다(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牀). 왕이 더욱 예중(禮重)을 더했다. 다음날 객장(客將)을 시켜 전어(傳語)하자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그것을 접수했다. 시자가 가로되 화상께선 대왕이 오심을 보고도 선상에서 내려오지 않으시더니 오늘은 군장(軍將)이 왔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선상에서 내려오십니까. 스님이 가로되 네가 알 바가 아니니 제일등인(第一等人)이 오면 선상 위에서 접인(接引)하고 중등인(中等人)이 오면 선상에서 내려와 접인하고 말등인(末等人)이 오면 3() 밖에서 접인한다.

石塔戒; 송대 운문종승. 이름은 무택(無擇)이며 동경 혜림사 약충(若沖)에게서 득법했음. 처음엔 항주 서호에 거주했고 양주 석탑으로 옮겼다가 퇴석(退席)하고 도강했음. 때에 동파(東坡)가 양주를 지(; 主管)했는데 소()로 청하여 재림(再臨)하여 주지(主持)했음. 성명(聲名)이 이로 말미암아 크게 떨쳤음. 후에 동파가 아울러 계의명(戒衣銘)을 지었고 한 때 전송(傳誦)했음 [보속고승전23. 오등전서35. 속전등록16].

赤松子; 조정사원3. 적송자(赤松子). 신선전(神仙傳; 나라 葛洪 지음)에 이르되 황초평(黃初平)은 나이 15 때에 산중에 있으면서 양을 길렀다. 어떤 도사가 보고는 그를 기이하게 여겨 문득 데리고 금화산(金華山)에 이르렀다. 40여 년 동안 그 형인 초기(初起)가 그를 찾고 기다리며(는 오래 기다릴 구) 말지 않았다. 한 도사를 만났는데 또 보니 동생과 얘기했다. 형이 묻되 양이 어디에 있느냐. 초평이 가로되 가까이 산의 동쪽에 있다. 형이 곧 가서 그것을 보니 하나도 보이는 게 없었다. 초평이 드디어 함께 산소(山所)에 이르렀으며 초평이 빙 둘러보고 그것을 꾸짖자 이에 백석(白石)이 다 변해 양이 되어 일어났다. 형이 비로소 감탄하며 가로되 동생이 선도(仙道)를 얻었구나. 이와 같음을 가히 배우겠는가. 가로되 오직 도를 좋아해야 곧 얻는다. 초기가 이에 처자식을 버리고 소나무의 복령(茯苓) 5만을 복용하고 가로되 비로소 선도(仙道)를 얻었다. 초평이 스스로 적송자(赤松子)라 호했다.

蓬萊; 한서25. 봉래ㆍ방장ㆍ영주 이 3신산(神山)이란 것은 그것이 발해(勃海) 중에 있다고 전한다.

弱水; 중국 고대 신화(神話) 중의 특수한 수체(水體). 홍모(鴻毛)도 뜨지 못하고 비조(飛鳥)도 지나가기 어려운 특성을 갖추고 있음.

半帆; 강해(江海) 중 장만(張滿)하지 않은 선범(船帆; 배의 돛)을 가리킴.

德雲; 조정사원3. 덕운(德雲) 화엄경(62) 선재동자가 점차 남행하여 승락국에 가서() 묘봉산에 올라 그 산상에서 동서남북과 사유상하를 관찰하며 구멱(求覔)했다. 갈앙하며 덕운비구(德雲比丘)를 보고 싶어하며 7일이 지났는데 그 비구가 다른 산 위에 있으면서 느린 걸음으로 다님을 보았다. 본 다음 왕예(往詣)하여 그 발에 정례했다. 청량소주(淸凉疏主)가 이르되 머무는 바의 위()를 잊어야 비로소 득지(得旨)한다.

僚佐; 구시(舊時) 관서(官署) 중의 조리(助理)하는 인원(人員).

端明; 단명전(端明殿)이니 복건성 보전시 수서구 홀석에 위치함. ()에 의거하자면 북송 경력(1041-1048)년 간에 대학사 채양이 일찍이 이 땅에 친림하고 아울러 창건했음.

侍讀學士; 벼슬 이름. 당 개원 13(725) 집현전 시독학사를 설치했고 5품 이상의 관리로 충임(充任)했음. 하루에 한 사람이 시독(侍讀)했고 사적(史籍)의 의의(疑義)를 질문했음. 북송 함평 2(999) 따라 설치했음. 그 후에 혹 학사를 띠지 않고 혹 겨우 시독이라 했음. 원풍 개제(改制) 후에 시독과 시강(侍講)을 시종(侍從) 이상이 겸직하게 했으니 정7. 요대(遼代)에도 설치했으나 관장한 바가 불상(不詳). 금대(金代) 한림학사원에 설치했고 정원(定員)1인이며 종3. 원대(元代) 한림 겸 국사원(國史院)이었고 몽고는 한림원과 집현원에 각 2()을 두었고 종2. 명대(明代) 한림원에 또한 설치했음 [백도한어].

砲車; 포차(炮車)와 같음. 포차는 일반으로 포차가도(炮車街道)를 가리킴. 포차가도는 강소성 비주시(邳州市) 하할가도(下轄街道) [백도백과].

寶公; 보지(寶誌; 418-514)니 남조승(南朝僧). 또 보지(寶志)ㆍ보지(保誌)로 지음. 세칭이 보공(寶公)ㆍ지공(志公)ㆍ지공화상(誌公和尙). 금성(섬서 남정 혹 강소 구용) 사람이며 속성은 주(). 연소할 적에 출가하여 도림사 승검(僧儉)을 사사(師事)했고 선업(禪業)을 수습(修習)했음. 유송(劉宋) 태시년 간(466-471) 도읍에 왕래하며 거처에 정한 곳이 없었음. 때로 혹 시를 읊었는데 그 말이 매번 참기(讖記)와 같았으며 사민(四民; )이 드디어 다투며 문으로 나아가 복화(福禍)를 물었음. 제무제(齊武帝)가 그것을 혹중(惑衆; 무리를 惑亂)이라 하여 뇌옥(牢獄) 에 투옥(投獄)시켰음. 그러나 날마다 시리(市里)에 유행하는 스님을 본지라 이에 뇌옥 속에 가서 검시(檢視)하였는데 도리어 스님이 아직 옥 속에 있음을 보았음. ()가 이를 듣고 드디어 화림원으로 영입해 공양하고 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나 스님은 구애되는 바가 되지 않고 그대로 늘 용광ㆍ계빈ㆍ흥황ㆍ정명 등 여러 사원을 유방(遊訪)했음. 양무제가 건국함에 이르러 비로소 그 금지가 풀렸음. 스님이 매번 무제와 길게 얘기했는데 말하는 바가 모두 경론의 뜻이었음. 스님이 천감 1312월에 시적했는데 나이는 96이며 칙령으로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장사 지내고 묘 곁에 개선사를 세웠음. 시호는 광제대사. 후대에 이어서 추증(追贈)이 있었으니 묘각대사ㆍ도림진각보살ㆍ도림진각대사ㆍ자응혜감대사ㆍ보제성사보살ㆍ일제진밀선사 등과 같은 호임. 스님이 일찍이 학자를 위해 문자석훈(文字釋訓) 30권ㆍ14과송 14수ㆍ십이시송 12수ㆍ대승찬 10수 등을 서술했음 [양고승전10. 불조통기36, 37. 불조역대통재10. 보화산지7지공법사묘지명. 신승전4].

曹溪; 조계(曹谿)와 같음. 소주(韶州; 지금의 광동 曲江縣 동남)의 강하(江河)에 위치함. 구이령(狗耳嶺)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진수(溱水)와 합함. 조후총(曹侯塚)을 경유하는 연고로써 또 호칭이 조후계(曹侯溪). () 천감원년(天監元年; 502) 천축 바라문삼장(婆羅門三藏)인 지약(智藥)이 조계의 입구에 이르러 그 물을 마시고는 이 근원이 승지(勝地)가 됨을 알았음. 이에 촌인(村人)에게 권해 사원을 세우게 하고 다시 그 땅이 서국(西國)의 보림산(寶林山)과 흡사하다 하여 고로 보림사(寶林寺)로 호칭했음. 지약이 예언해 말하되 170년 후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있어 여기에서 무상법문(無上法門)을 개연(開演)할 것이며 득도(得道)하는 자가 숲과 같으리라. () 의봉2(儀鳳二年; 677) 봄에 이르자 6조 혜능(慧能)이 홍인(弘忍)을 좇아 법을 얻은 후 인종(印宗)을 좇아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고는 보림사(寶林寺)로 돌아가 법화(法化)를 크게 홍포(弘布)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계법문(曹溪法門)이라 일컬음. 6조 혜능(慧能)을 가리킴. 혜능이 조계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삼아 교화활동을 개전(開展)하였으므로 세인이 존칭하여 조계고불(曹溪古佛)ㆍ조계고조(曹溪高祖)라 함.

旛風; 조정사원4. 풍번경변(風幡競辨) 노로(老盧; 慧能盧氏)가 옷을 전수한 후로부터 의봉(儀鳳; 676-678) 초에 이르러 남해(南海)에 이르렀는데 인종법사(印宗法師)가 법성사(法性寺)에서 열반경을 강설함을 만났다. ()가 낭무(廊廡; 은 곁채 랑. 행랑 랑. 는 문간방 무. 正殿에 부속된 건물) 사이에 우지(寓止; . 곧 거처)했는데 늦은 밤에 바람이 찰간(刹竿)의 깃발을 날렸다. 2()의 대론(對論)을 들었는데 하나는 이르되 바람의 움직임이라 했고 하나는 이르되 깃발의 움직임이라 했다. 왕복하며 수대(醻對; 와 같음. 應對할 수. 곧 응대)하면서 일찍이 이치에 계합(契合)치 못했다. ()가 가로되 가히 속사(俗士)가 고론(高論)에 끼어듦을 용서하겠습니까. 가로되 자네()의 설함을 듣기를 원하네. 가로되 이 바람의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 상대방의 경칭)의 마음이 움직임입니다. 인종(印宗)이 가만히 이 말을 듣고 송연(悚然; 은 두려워할 송. 悚懼할 송)하며 그를 이상히 여겼다.

鍾阜; 지공(誌公)이 시적한 후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칙장(敕葬)했음.

踏碓翁; 6조 혜능이 호북 황매산 5조 홍인의 법회 가운데 있으면서 디딜방아를 밟아 곡식을 찧었던지라 고로 일컬음.

大科; 고대 과거제도(科擧制度) 중 상과(常科) 밖에 황제가 임시로 결정함으로 말미암아 거행하는 특별고시(特別考試).

白駒過隙; 선림소어고증3. 신구과극(迅駒過隙) 사기 위표전(魏豹傳)에 가로되 인생 1()의 사이가 백구(白駒; 흰 망아지)가 벽 틈을 지나감과 같다. 소안(小顔)이 이르되 백구는 이르자면 해그림자다. ()은 벽 틈이다.

一筆勾; 이르자면 일체를 파제(破除)함임. ()는 구()의 속자(俗字)니 산제(刪除) 혹 절취(截取)ㆍ도거(塗去)를 표시함. 정자통 세속에서 제거(除去)를 가로되 구()라 한다.

朝奉郞; 벼슬 이름. 송초(宋初)에 문산관(文散官)이 되었고 질()은 정6품상. 태평흥국 원년(976) 조의랑으로 말미암아 개명했음. 원풍 3(1080) 폐했고 드디어 신기록관(新寄祿官)으로 삼았음. 구기록관 후의 행원외랑ㆍ좌우사간(左右司諫)에 상당했음 [백도백과].

南遷; 폄적(貶謫; 降職되어 外地로 보냄)을 입고 유방(流放; 流配)되어 남방에 이름.

公據; 관부(官府)의 빙거(憑據; 증거).

 

贊曰 坡公出世一番 與佛印法泉諸老宿互相提唱 闡揚佛法 紫栢云 東坡老賊 以文字爲綠林 出沒於峰前 路口荊棘 叢中窩弓藥箭 無處不藏 專候殺人不眨眼 索性漢一觸其機 刀箭齊發 尸橫血濺 碧流成赤 你且道他是賊 不是賊 試辨驗看 若辨得 管取從來攔路石 沸湯潑雪

紫栢; 紫柏 眞可(1543-1603) 明代僧 俗姓沈 字達觀 號紫柏 憨憨子 紫柏老人 世稱紫柏大師 吳江(今屬江蘇)人 十七歲出家 二十歲受具足戒 不久入武塘景德寺 閉關三年 期滿遊五臺 至北京 參訪遍融笑巖諸師 又赴少林 參大千潤公 萬歷十七年(1589) 于五臺山將梵夾大藏經改刻方冊 弟子道開如奇等主其事 二十一年(1593) 移至徑山寂照庵續刻 世稱徑山藏 又名嘉興藏 眞可誓志弘揚佛法 但不出世 不開堂 獨與德淸爲友 嘗對談四十晝夜 性剛猛精進 律身至嚴 每見古刹荒廢 必至恢復 重興佛寺十五所 每示弟子 必令自參 以發其悟 直至疑根盡拔 萬歷三十一年(1603)十一月 妖書事發 忌者乘機構陷入獄 不久憤死獄中 著有紫柏老人集三十卷 別集四卷 長松茹退二卷 [釋氏稽古略續集四 紫柏老人集附達觀大師塔銘]

綠林; 禪林疏語考證四 古今合錄曰 天鳳四年丁丑(17) 莽性躁擾法令煩苛 繇役煩劇旱蝗相仍 獄詔不決 吏旁緣侵刻 富者不能自保 貧者無以自存 於是並起爲盜賊 荊州新市人王匡王鳳 南陽馬武 穎川王常成丹 共聚藏於綠林山中 至八千人

窩弓; 獵人用以捕獸的伏弩

藥箭; 鏃上敷有毒藥的箭

索性; 表示直截了當

管取; 包管 肯定 取 後綴

 

찬왈(贊曰) 파공(坡公; 東坡)이 한 번 출세하자 불인(佛印; 了元)ㆍ법천(法泉) 여러 노숙(老宿)과 더불어 호상(互相) 제창(提唱)하면서 불법을 천양(闡揚)했다. 자백(紫栢)이 이르되 동파(東坡) 노적(老賊)이 문자로써 녹림(綠林)이 되어 봉전(峰前)에 출몰했다. 노구(路口)는 형극(荊棘)이며 총중(叢中)엔 와궁(窩弓)과 약전(藥箭)이니 감추지 아니한 곳이 없다. 오로지() 살피며() 살인하되 눈도 깜작이지 않았다. 색성한(索性)이 그 기()에 한 번 접촉하면 도전(刀箭)이 일제히 발사(發射; )되어 시체가 가로놓이고 피를 뿌리며(尸橫血濺) 푸른 유수가 붉음을 이룬다(碧流成赤). 네가 차도(且道)하라, 그는 이 도적인가, 이 도적이 아닌가. 시험 삼아 변험(辨驗)해 보아라. 만약 변득(辨得)한다면 종래(從來)의 난로석(攔路石; 길을 막는 돌)에 비탕(沸湯)이 발설(潑雪)함을 관취(管取)하리라(以上 紫栢語).

紫栢; 자백(紫柏)과 같음. 진가(眞可; (1543-1603)니 명대승. 속성은 심이며 자는 달관(達觀)이며 호는 자백(紫柏)ㆍ감감자(憨憨子)ㆍ자백노인이며 세칭이 자백대사(紫柏大師)니 오강(지금 강소에 속함) 사람. 17세에 출가했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오래지 않아 무당 경덕사에 들어가 3년 동안 폐관(閉關)했고 기만(期滿)하자 오대산에 놀러갔다가 북경에 이르러 편융ㆍ소암 여러 스님을 참방했음. 또 소림에 다다라 대천윤공(大千潤公)을 참했음. 만력 17(1589) 오대산에서 범협(梵夾) 대장경을 가지고 방책(方冊)에 개각(改刻)했는데 제자 도개(道開)ㆍ여기(如奇) 등이 그 일을 주관했음. 21(1 593) 경산(徑山) 적조암(寂照庵)으로 이지(移至)하여 속각(續刻)했으니 세칭이 경산장(徑山藏), 또 이름이 가흥장(嘉興藏). 진가는 서지(誓志)가 불법을 홍양(弘揚)함이었으나 다만 출세하지 않았고 개당하지 않았음. 유독 덕청(德淸)과 벗으로 잘 지냈는데 일찍이 40주야 동안 대담(對談)했음. 천성이 강맹(剛猛)하게 정진했고 율신(律身)이 지엄(至嚴)했음. 매번 황폐한 고찰을 보면 반드시 이르러 회복했으니 중흥한 불사(佛寺)15()였음. 매양 제자에게 개시(開示)하면서 반드시 자참(自參)하여 그 깨침을 계발(啓發)하게 했고 의근(疑根)이 모두 뽑힘에 직지(直至)했음. 만력 31(1603) 11월 요서(妖書) 사건이 발생하여 시기하는 자가 기회를 타고 모함을 얽어 입옥(入獄)했고 오래지 않아 옥중에서 분사(憤死)했음. 저서에 자백노인집(紫柏老人集) 30권과 별집(別集) 4, 장송여퇴 2권이 있음 [석씨계고략속집4. 자백노인집부달관대사탑명].

綠林; 선림소어고증4. 고금합록(古今合錄)에 가로되 천봉 4년 정축(丁丑; 17) 왕망(王莽)의 성격이 조요(躁擾; 조급하고 어지러움)하고 법령은 번가(煩苛; 번거롭고 가혹함)했으며 요역(繇役; 백성에게 구실 대신으로 시키던 노동)은 번극(煩劇; 몹시 번거롭고 바쁨)했고 한황(旱蝗; 가뭄과 메뚜기의 재난)이 서로 이었으며 옥조(獄詔)는 판결하지 못했고 관리는 방연(旁緣; 憑借)하여 침각(侵刻; 侵害)했다. 부자는 능히 스스로 보호하지 못했고 빈자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었다. 이에 모두 일어나 도적이 되었다. 형주 신시(新市) 사람 왕광ㆍ왕봉, 남양의 마무, 영천의 왕상ㆍ성단이 함께 녹림산(綠林山) 가운데 취장(聚藏)했는데 8천 인에 이르렀다.

窩弓; 엽인(獵人)이 써서 짐승을 포획(捕獲)하는 복노(伏弩).

藥箭; 살촉 위에 독약을 발라 있는 화살.

索性; 직절(直截)하여 요당(了當)함을 표시.

管取; 포관(包管; 보증하다. 보장하다). 긍정. 취는 후철.

 

又贊曰 古德云 東坡門外漢耳 夫以坡公見地猶在門外 則佛法豈易言乎 雖然千載而下讀公之文 因而知有佛法 公殆以文章作佛事 也意其人 亦乘願而來 乘願而往者耶 是又惡容輕置喙矣

 

또 찬왈(贊曰) 고덕(古德)이 이르되 동파(東坡)는 문외한(門外漢)일 뿐이다. 무릇() 파공(坡公)의 견지(見地)를 오히려 문외(門外)에 있다고 하면 곧 불법을 어찌 쉽게 말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천재(千載) 아래에서 공()의 글을 읽는다면 인하여 불법이 있음을 알 것이다. ()은 거의() 문장으로써 불사(佛事)를 지었다. 또한 그 사람을 헤아리건대() 또한 승원(乘願)하여 왔다가 승원하여 간 자일까. 이는 또 어찌() 주둥이(; 음이 훼)를 쉽게 안치함을 용납하겠는가.

 

蓮池本師贊曰 老泉爲薦先亡 曾於極樂院造六菩薩像 而子由往來法門亦甚密邇 蓋蘇氏之皈心三寶素矣 世有刻西方公據者 增以俚語 謂出自坡公 此誣也 具眼者勿因僞而倂棄其眞 師又曰 愚聞之古德云 士大夫英敏過人者多自僧中來 然甞疑之 迷而不返者什九 不負宿因者什一 其故何也 五濁惡世多諸退緣 賢者所難免也 故戒禪師後身爲東坡 靑禪師後身爲曾魯公 喆禪師後身耽富貴多憂苦 夫東坡最爲親近法門 而曾公已不之 及彼喆老之後身 其迷抑又甚矣 古今知識所以勸人捨五濁而求淨土也 然則劉遺民而下諸君子所得不旣多乎

薦先亡; 薦度 引導死者的靈魂於極樂或天上界

子由; 蘇轍(1039-1112) 宋代居士 字子由 號潁濱(或作穎濵)遺老 眉山(今屬四川)人 歷官右司諫 中書舍人 戶部侍郞 翰林學士知制誥 御史中丞 元祐六年(1091) 拜尙書右丞 次年進門下侍郞 哲宗親政 落職知汝州 徽宗時 提擧宮觀 在筠州(今江西高安)監鹽酒稅時 與黃檗道全交遊 道全勸他參禪 後謁上藍順禪師省悟 從此喜與僧人交遊 常居寺中數月不返 爲蜀學派重要人物 主張三敎合一 著有栾城集 老子解 [宋史三三九 五燈會元十八]

曾魯公; 曾公亮(999-1078) 字明仲 號樂正 北宋政治家學者 累封魯國公 故稱曾魯公 [百度百科]

劉遺民; (352-410) 晉代居士 名程之 字仲思 彭城(江蘇徐州)人 公侯辟之皆不應 遂易名遺民 時慧遠止於廬山東林 修念佛三昧 程之往依 遠師乃造西方三聖像 建齋立社 至百二十三人 程之撰發願文 誓共往生淨土 後坐化 著有念佛三昧詩 [祖庭事苑四 往生集中 淨土聖賢錄六]

 

연지(蓮池; 袾宏) 본사(本師)가 찬왈(贊曰) 노천(老泉; 法泉)이 선망을 천도(薦先亡)하기 위해 일찍이 극락원(極樂院)에서 여섯 보살상(菩薩像)을 조성했는데 자유(子由)가 법문(法門)에 왕래하면서 또한 심히 밀이(密邇; 親密하고 가까움)했다. 대개 소씨(蘇氏)가 삼보(三寶)에 귀심(皈心)함은 소질(素質; )이다. 세간에서 서방공거(西方公據)를 새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어(俚語; 俗語)를 더한 것이며 이르기를 파공(坡公; 東坡)으로부터 나왔다 함은 이것은 속임()이다. 구안자(具眼者)는 거짓()으로 인해 그 진실을 병기(倂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님(; 蓮池)이 우왈(又曰) (; 謙辭)가 듣건대 고덕(古德)이 이르되 사대부(士大夫)가 영민(英敏)함이 타인을 초과하는 자는 다분히 승중(僧中)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일찍이 이를 의심했나니(疑之) ()하여 돌아오지 못한 자가 열 사람()에 아홉이며 숙인(宿因)을 저버리지 않은 자는 열 사람에 하나다. 그 연고는 무엇이냐. 오탁(五濁) 악세(惡世)에 여러 퇴연(退緣)이 많아서 현자(賢者)라도 면하기 어려운 바이다. 고로 계선사(戒禪師; 師戒)의 후신(後身)이 동파(東坡)가 되고 청선사(靑禪師)의 후신이 증로공(曾魯公)이 되고 철선사(喆禪師)의 후신은 부귀를 탐()하고 우고(憂苦)가 많았다. 무릇 동파(東坡)는 가장 법문에 친근했고 증공(曾公)은 이미 그렇지 않았고 및 그 철로(喆老)의 후신은 그 미억(迷抑; 혼미하고 憂鬱)이 또 심했다. 고금의 지식(知識)이 소이로 사람에게 권하되 오탁(五濁)를 버리고 정토(淨土)를 구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즉 유유민(劉遺民) 이하(而下)의 군자(君子)는 소득이 이미 많지 않겠는가.

薦先亡; ()천도(薦度)니 사자의 영혼을 극락 혹 천상계로 인도함.

子由; 소철(蘇轍; 1039-1112)이니 송대 거사. 자는 자유(子由)며 호는 영빈(潁濱; 穎濵으로 지음)ㆍ유로(遺老)니 미산(지금 사천에 속함) 사람. 우사간ㆍ중서사인ㆍ호부시랑ㆍ한림학사지제고ㆍ어사중승을 역관(歷官; 벼슬을 경력함)했음. 원우 6(1091) 상서우승에 제배(除拜)되었고 다음해 문하시랑으로 승진했음. 철종이 친정(親政)하자 낙직(落職; 벼슬자리에서 떨어짐)하여 여주를 지(; 主管)했음. 휘종 때 제거궁관(提擧宮觀)이 되었음. 균주(지금의 강서 고안)에 있으면서 염주세(鹽酒稅)를 감독할 때 황벽도전(黃檗道全)과 교유(交遊)했고 도전이 그에게 참선을 권했음. 후에 상람순선사(上藍順禪師)를 참알해 성오(省悟)했음. 이로부터 승인과 교유하기를 좋아했음. 일찍이() 사중(寺中)에 거주하며 몇 달 동안 돌아가지 않았음. 촉학파(蜀學派)의 중요한 인물이며 3() 합일(合一)을 주장했음. 저서에 난성집ㆍ노자해가 있음 [송사339. 오등회원18].

曾魯公; 증공량(曾公亮; 999-1078)이니 자가 명중(明仲)이며 호가 낙정(樂正). 북송의 정치가며 학자, 노국공(魯國公)에 누봉(累封)된지라 고로 증로공(曾魯公)으로 일컬음 [백도백과].

劉遺民; (352-410) 진대(晉代) 거사. 이름은 정지(程之)며 자는 중사며 팽성(강소 서주) 사람. 공후(公侯)가 그를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드디어 이름을 바꾸어 유민(遺民)이라 했음. 때에 혜원(慧遠)이 여산 동림에 머물면서 염불삼매를 닦았는데 정지가 가서 의지했음. 혜원 스님이 이에 서방 3성상(聖像)을 조성하고 재()를 세우고 사()를 세웠는데 123인에 이르렀음. 정지가 발원문을 지어 함께 정토에 왕생하기를 서원(誓願)했음. 후에 좌화(坐化)했음. 저서에 염불삼매시가 있음 [조정사원4. 왕생집중. 정토성현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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