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분등록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황정견(黃庭堅)

태화당 2026. 6. 23. 08:21

黃庭堅(黃龍祖心禪師法嗣)

太史黃庭堅 字魯直 號山谷 以般若夙習 雖膴仕 澹如也 出入宗門 未有所向 好作艶詞 人爭傳之 嘗謁圓通秀 秀呵曰 大丈夫翰墨之妙 甘施於此乎 秀方戒李伯時畵馬事 堅笑曰 又當置我於馬腹中耶 秀曰 汝以艶語動天下人婬心 不止馬腹中 正恐生泥犂耳 堅悚然悔謝 繇是絕筆 惟孳孳於道 著發願文 痛戒酒色 日止朝粥午飯而已 元祐間 丁家艱館黃龍山 參晦堂祖心 乞指徑捷處 堂曰 祇如仲尼道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太史居常如何理論 堅開口 便道 不是 不是 正窘迫次 適有一人至 堂問 誰遣汝來 其人曰 大林葉秀才 又問 有書否 曰 有 又問 書何在 其人卽引手背 抽衣領 擧書呈堂 堂曰 學道到此人田地方可 堅有愧色 一日侍堂山行次 時巖桂盛開 堂曰 聞木樨花香麽 曰 聞 堂曰 吾無隱乎爾 堅欣然領解 卽拜曰 和尙得恁麽老婆心切 堂笑曰 祇要公到家耳 時與堂高弟死心悟新 靈源惟淸 尤篤方外契久之 謁心於雲巖 隨衆入室 心見張目問曰 新長老死 學士死 燒作兩堆灰 向甚麽處相見 堅無語 心約出曰 晦堂處參得底 使未著在 後左官黔南 道力愈勝 於無思念中 頓明死心所問 報以書曰 往日嘗蒙苦口提撕 長如醉夢 依稀在光影中 蓋疑情不盡 命根不斷故 望崖而退耳 謫官在黔南道中 晝臥覺來 忽然廓爾 尋思平生被天下老和尙謾了多少 惟有死心道人不肯 乃是第一相爲也 靈源寄以偈曰 昔日對面隔千里 如今萬里彌相親 寂寥滋味齋粥 快活談諧契主賓 室內許誰參化女 眼中休去覔瞳人 東西南北難藏處 金色頭陀笑轉新 堅和曰 石工來斵鼻端塵 無手人來斧始親 白牯狸奴心卽佛 龍睛虎眼主中賓 自携瓶去沽村酒 却著衫來作主人 萬里相看常對面 死心寮裏有淸新 堂入寂 堅作塔銘 復弔以偈曰 海風吹落楞伽山 四海禪徒著眼看 一把柳絲收不得 和烟搭在玉欄干 甞以書勉胡少汲曰 公道學頗得力耶 治病之方當深求 禪悅照破生死之根 則憂畏淫怒無處安脚 病旣無根 枝葉安能爲害 投子聰老 海會演老 道行不媿古人 皆可親近 殊勝從文章之士學妄言綺語 增長無明種子也 聰老猶喜接高明士大夫 開卷論說 便穿諸儒鼻孔 若於義理得宗趣 却觀舊所讀書 境界廓然 六通四闢 極省心力 然有道之士 須以志誠懇惻歸向 古人所謂下人不精不得其眞 此非虗語

祖心; (1025-1100) 宋代黃龍派僧 廣東始興人 俗姓鄔 號晦堂 年十九依龍山寺惠全 翌年試經得度 住受業院奉持戒律 後參雲峰文悅 隨侍三年 未久參黃檗山慧南 留侍四年 後還文悅 時文悅示寂 乃依止石霜楚圓 一日 閱傳燈錄 讀多福禪師之語大悟 後隨慧南移黃龍山 慧南示寂 遂繼黃龍之席 居十二年 後入京師 駙馬都尉王詵盡禮迎之 然師僅菴居國門之外 晩年移菴深入 棧絶學者二十餘年 宋元符三年十一月示寂 壽七十六 諡號寶覺禪師 遺有寶覺祖心禪師語錄一卷 冥樞會要三卷等 [禪林僧寶傳二十三 續傳燈錄十五 五燈會元十七 釋氏稽古略四]

太史; 官職名 夏商周三代爲史官與曆官之宅 朝廷大臣 後職位漸低 秦稱太史令 漢屬太常 掌天文曆法 魏晉以後太史僅掌管推算曆法 至明淸兩朝 修史之事由翰林院負責 又稱翰林爲太史 [百度漢語]

圓通秀; 法秀(1027-1090) 宋代雲門宗僧 俗姓辛 秦州隴城(今甘肅秦安)人 十九歲時試經得度 受具足戒後勵志講肆 習圓覺華嚴 妙入精義 因聞無爲軍(今安徽無爲)鐵佛寺天衣義懷禪師法席之盛 徑往參謁 有所證悟 得到印可 奉侍十年 出住淮西四面山 遷住眞州長蘆 後因東京法雲寺落成 應請爲開山第一祖 世稱法雲法秀 賜號圓通禪師 性剛直 面目嚴冷 平生以詈罵爲佛事 人稱秀鐵面 法嗣有法雲惟白 保寧子英等五十九人 [禪林僧寶傳二十六 五燈會元十六 續傳燈錄八]

李伯時; 宋代居士李公麟 字伯時 安徽舒州人 號龍眠居士 元祐(1086 -1094) 進士 元符年間(1098-1100) 拜御史大夫 博學好古 長於詩 多識奇字 自夏商以來之鐘鼎尊彝 皆能考定 辨別款式 尤善畫馬 山水 佛像 人物 得吳道子心法 山水似李思訓 晩年歸佛受戒 能通禪法 而雅好淨土 隱居龍眠山莊 時與高僧談論 竝結社念佛 紹興四年預知時至 施財 書偈 念佛而化 享年八十六 遺墨傳世頗多 畫家奉爲典則 [名公法喜志四 東林十八高賢傳] 李伯時畫馬事; 禪林僧寶傳二十六圓通秀 李公麟伯時工畫馬 不減韓幹 秀呵之曰 汝士大夫以畫名 矧又畫馬期人誇 以爲得妙 妙入馬腹中亦足懼 伯時繇是絶筆 秀勸畫觀音像 以贖其過

泥犂; 梵語泥囉耶捺洛迦之略譯 意卽地獄 又作泥黎 泥梨 卽無有 無福處之義 彼處喜樂之類一切全無 爲十界中最劣之境界

木樨華; 桂花 爲木樨科植物木樨的花

老婆心; 老婆者 稱慈悲之語 取親切叮嚀之義

惟淸; (?-1117) 宋代黃龍派僧 字覺天 自號靈源叟 南州武寧人 族陳氏 年十七爲大僧 印心於晦堂祖心(嗣黃龍) 初住舒之太平 次遷黃龍靈源寺 黃魯直 程伊川皆與爲友 師旣託疾告閑 居昭默堂十有五年 宋徽宗政和七年九月 安坐趨寂 [普燈錄六 續傳燈錄二十二]

提撕; 一指示 提示 二探究 參究

光影; 喩指虛幻不實之物 亦常指禪家接人之方便法門 方便法門非眞實大法 故稱

廓爾; 開悟貌 空闊貌

滋味; 滋 美味

齋粥; 齋 午食 粥 朝餐 齋粥 泛指僧堂飮食之事 一般爲早餐食粥 午餐食飯 卽曉光漸現至得見掌中紋時 爲粥時 又若於早粥與午飯之間 約十時至十一時頃進食 則稱爲半齋 [釋門正統三]

瞳人; 瞳孔 也作瞳仁 瞳孔中有看它的人的像 故稱瞳孔爲瞳人

金色頭陀; 金色迦葉也 卽摩訶迦葉 彼身有金色之光 爲頭陀行第一 故名也 又稱大飮光 金色尊者 乃禪宗之第一祖

禪悅; 入於禪定者 其心愉悅自適之謂

海會演; 法演(?-1104) 北宋楊岐派僧 綿州巴西(四川綿陽)人 俗姓鄧 年三十五始出家受具足戒 遊學成都 習百法 唯識諸論 究其奧義 後投白雲守端禪師 參究精勤 遂廓然徹悟 受印可 尋依命分座 開示來衆 初住四面山 後還遷白雲山 次住太平 次住海會 更遷蘄州五祖山(東山)東禪寺 徽宗崇寧三年六月二十五日上堂辭衆 淨髮澡身而示寂 壽八十餘 世稱五祖法演 法嗣頗多 以佛眼淸遠 太平慧懃 圜悟克勤最著 有法演下三佛之稱 [法演禪師語錄序 五燈會元十九 聯燈會要十六 釋氏稽古略四]

六通四闢; 比喻四面八方沒有不通達的

下人; 居於人之後 對人謙讓

 

황정견(黃庭堅)(黃龍 祖心禪師法嗣)

태사(太史)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자가 노직(魯直)이며 호가 산곡(山谷)이다. 반야(般若)를 숙습(夙習)하여 비록 무사(膴仕; 高官厚祿)했으나 담여(澹如; 恬淡貌)했다. 종문(宗門)에 출입하면서 소향(所向)이 있지 않았고 염사(艷詞)를 짓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전()했다. 일찍이 원통수(圓通秀; 法秀) 선사를 예알했는데 수()가 꾸짖으며 가로되 대장부가 한묵지묘(翰墨之妙; 文翰筆墨의 묘)를 여기에 달게 베푸는가. ()가 바야흐로 이백시의 화마사(李伯時畵馬事)로 경계(警戒; )하자 정견(庭堅)이 웃고 가로되 또 마땅히 나를 마복(馬腹) 가운데에 안치합니까. 수왈(秀曰) 네가 염어(艶語)로써 천하인의 음심(婬心)을 동()하게 하니 마복 가운데에 그침 만이 아니라 바로 니리(泥犂)에 태어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정견이 송연(悚然)하여 회사(悔謝; 회개하며 감사)했다. 이로 말미암아() 절필(絕筆)하고 오직 도에 자자(孳孳; 勤勉)했고 발원문을 지어 주색(酒色)을 통계(痛戒)했고 매일(每日; ) 조죽오반(朝粥午飯)일 따름이었다. 원우(元祐; 1086-1094) 간 가간(家艱; 부모의 喪事)을 당해() 황룡산에 묵으면서() 회당조심(晦堂祖心)에게 참문(參問; )하며 경첩처(徑捷處)를 지시하기를 구걸했다. 당왈(堂曰) 지여(祇如) 중니(仲尼; 孔子)가 말하되 이삼자(二三子; 는 남자의 通稱), 내가 숨긴다고 하느냐(以我爲隱乎), 나는 너희()에게 숨기는 게 없다(吾無隱乎爾). 태사(太史)는 거상(居常; 平時)에 어떻게 이론(理論)하는가. 정견이 입을 열자 바로 말하되 옳지 않다(不是), 옳지 않다. 바로() 군박(窘迫; 困窮. 難處)하던 차에 마침 어떤() 한 사람이 이르렀다. 당문(堂問) 누가 너를 보내어 왔느냐. 그 사람이 가로되 대림(大林)의 섭수재(葉秀才)입니다. 우문(又問) 서신(書信; )이 있는가. 가로되 있습니다. 우문(又問) 서신이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이 곧 수배(手背)를 당겨 옷깃(衣領)에서 뽑아() 서신을 들어 회당에게 드렸다(). 당왈(堂曰) 학도(學道)가 이 사람의 전지(田地; 境地)에 이르러야 비로소() 옳다(). 정견이 괴색(愧色;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어느 날 회당을 모시고(山行) 산행하던 차, 때에 암계(巖桂)가 성개(盛開)했다. 당왈 목서화(木樨花)의 향기를 맡는가(). 가로되 맡습니다. 당왈 내가 너희에게 숨긴 게 없다. 정견이 흔연(欣然)하며 영해(領解)했다. 곧 예배하고 가로되 화상은 이렇게(恁麽) 노파심(老婆心)이 간절함을 얻습니까. 회당이 웃고 가로되 다만() ()이 도가(到家)함을 요했을 뿐이다. 때에 회당의 고제(高弟) 사심오신(死心悟新)ㆍ영원유청(靈源惟淸)과 더불어 더욱() 방외계(方外契)가 돈독(敦篤; )함이 오래되었다. 사심(死心; )을 운암(雲巖)에서 참알하여 수중(隨衆)하여 입실(入室)했다. 사심이 보고서 장목(張目; 눈을 크게 부릅뜸)하고 문왈(問曰) 신장로(新長老; 悟新)가 죽었고 학사(學士)도 죽어, 태워서 두 무더기(兩堆)의 재가 되었습니다. 어느 곳을 향해 상견하겠습니까. 정견이 말이 없자 사심이 약출(約出; 가로 막으며 쫓아냄)하며 가로되 회당처(晦堂處)에서 참득한 것(參得底)은 쓰지 못하게 합니다(使未著在). 후에 검남(黔南)으로 좌관(左官; 降官貶職)되고 도력(道力)은 더욱() 수승했다. 사념이 없는 가운데에서 사심(死心)이 물은 바를 돈명(頓明)했다. 글로써 알려() 가로되 왕일(往日)에 일찍이 고구(苦口)로 제시(提撕; 指示)함을 입었으나() () 취몽(醉夢; 취한 듯 꿈꾸는 듯)이라 어슴푸레(依俙) 광영(光影) 중에 있음과 같음은 대개(大蓋) 의정(疑情)이 다하지 않고 명근(命根)이 단절되지 않아 고로 망애(望崖)하고 물러날 뿐입니다. 적관(謫官; 左遷)되어 검남() 도중(道中)에 있으면서 낮에 누웠다가 깨어나며 홀연히 확이(廓爾)했고 심사(尋思; 깊이 생각함)하니 평생 천하 노화상들에게 속임을 입은 게 다소(多少)이던가. 오직 사심도인(死心道人)이 있어 불긍(不肯)했으니 이에 이 첫째의 상위(相爲)입니다. 영원(靈源)이 게를 기탁해 가로되 지난날엔 대면해도 천 리를 격()했더니/ 여금엔 만 리라도 더욱() 서로 친하다/ 적료(寂寥)한 자미(滋味)가 재죽(齋粥)과 같나니/ 쾌활하게 담해(談諧; 說笑)하며 주빈(主賓)이 계합한다/ 실내(室內)에 누구에게 허락하여 화녀(化女)에게 참()하는가/ 안중(眼中)에 동인(瞳人)을 찾음을 쉬어라/ 동서남북에 숨기기 어려운 곳에/ 금색두타(金色頭陀)의 웃음이 더욱() 새롭다. 정견이 화왈(和曰) 석공(石工)이 와서 코끝의 티끌을 깎으매()/ 무수인(無手人)이 와서 도끼질해야() 비로소 친하다/ 백고(白牯)와 이노(狸奴)의 마음이 곧 부처()/ 용정(龍睛)과 호안(虎眼)은 주중빈(主中賓)이다/ 스스로 병()을 가지고 가서 촌주(村酒)를 사는데()/ 도리어 적삼을 입고 와서 주인 노릇을 하누나/ 만 리에서 상간(相看)하지만 늘 대면했나니/ 사심(死心)의 요리(寮裏)에 청신(淸新; 惟淸悟新)이 있다. 회당이 입적(入寂)하자 정견이 탑명(塔銘)을 지었다. 다시 게()로서 조문(弔問; )해 가로되 해풍(海風)이 릉가산(楞伽山)을 불어 떨어뜨렸나니/ 사해(四海)의 선도(禪徒)는 착안(著眼)해 보아라/ 한 웅큼(一把)의 유사(柳絲; 버들가지)는 거둠을 얻지 못하여/ 안개와 함께(和烟) 옥난간(玉欄干)에 실려 있다(搭在). 일찍이 글로써 호소급(胡少汲)에게 권면(勸勉; )해 가로되 공()은 도학(道學)에 자못() 득력(得力)했습니까. 치병지방(治病之方)을 마땅히 심구(深求)해야 할 것입니다. 선열(禪悅)로 생사지근(生死之根)을 조파(照破)하면 곧 우외(憂畏)와 음노(淫怒)가 발을 둘 곳이 없습니다. ()이 이미 뿌리가 없거늘 지엽(枝葉)이 어찌() 능히 해()가 되겠습니까. 투자총로(投子聰老)와 해회연로(海會演; 法演)는 도행(道行)이 고인(古人)에게 부끄럽지(媿) 않으니 모두 가히 친근할 만합니다. 문장을 좇는 인사(人士; )가 망언기어(妄言綺語)를 배워 무명(無明)의 종자(種子)를 증장(增長)함 보다 수승(殊勝)합니다. 총로(聰老)는 아직() 고명(高明)한 사대부를 접인(接引)하기를 기뻐합니다. 개권(開卷)하여 논설하면 바로(便) 제유(諸儒)의 비공(鼻孔)을 관천(貫穿; 穿)하나니 만약 의리(義理)에서 종취(宗趣)를 얻고 도리어 옛적()에 독서한 바를 관()한다면 경계가 확연(廓然)하고 육통사벽(六通四闢)하리니 극히 심력(心力)을 덜 것입니다. 그러나 유도지사(有道之士)는 모름지기 지성(志誠)과 간측(懇惻; 誠懇痛切)으로써 귀향(歸向)해야 하나니 고인이 이른 바 하인(下人)이 정성스럽지 못하면(不精) 그 진실을 얻지 못한다 했으니 이것은 허어(虗語)가 아닙니다.

祖心; (1025-1100) 송대 황룡파승. 광동 시흥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오()며 호는 회당(晦堂). 나이 19에 용산사 혜전에게 의지했고 다음해에 시경득도(試經得度)했음. 수업원(受業院)에 머물며 계율을 봉지(奉持)하다가 뒤에 운봉문열(雲峰文悅)을 참알(參謁)해 수시(隨侍)하기 3년이었으며 오래지 않아 황벽산(黃檗山)의 혜남(慧南)을 참알해 머물며 시봉하기 4년이었음. 뒤에 문열에게 돌아갔는데 때에 문열은 시적(示寂)한지라 이에 석상초원(石霜楚圓)에게 의지했음. 어느 날 전등록을 열람했는데 다복선사(多福禪師)의 말을 읽다가 대오했음. 후에 혜남을 따라 황룡산(黃龍山)으로 이주했고 혜남이 시적하자 드디어 황룡의 법석을 승계했으며 거주하기 12년이었음. 후에 경사(京師)에 들어갔더니 부마도위(駙馬都尉) 왕선(王詵)이 예()를 다해 환영했지만 그러나 스님은 근근(僅僅)히 국문(國門)의 밖에 암거(菴居)하였음. 만년에 암자를 옮겨 깊이 들어가 잔도(棧道)로 학자를 사절(辭絶)하기 20여년이었음. () 원부(元符) 311월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76이며 시호는 보각선사(寶覺禪師). 유작(遺作)에 보각조심선사어록(寶覺祖心禪師語錄) 1권과 명추회요(冥樞會要) 3권 등이 있음 [선림승보전23. 속전등록15. 오등회원17. 석씨계고략4].

太史; 관직의 이름이니 하상주(夏商周) 3()에 사관(史官)과 역관(曆官) ()의 조정 대신이 되었는데 후에 직위가 점차 낮아졌음. ()에선 태사령이라 일컬었고 한()에선 태상(太常)에 속했으며 천문과 역법(曆法)을 관장했음. 위진(魏晉) 이후의 태사는 다만 역법의 추산(推算)을 관장했음. 명ㆍ청 양조(兩朝)에 이르러선 수사지사(修史之事)는 한림원으로 말미암아 부책(負責)했고 또 한림을 일컬어 태사라 했음 [백도한어].

圓通秀; 법수(法秀)(1027-1090) 송대 운문종승. 속성은 신()이며 진주 농성(지금의 감숙 진안) 사람. 19세 때 시경득도(試經得度)하고 구족계를 받은 후 강사(講肆)에 뜻을 힘써 원각과 화엄을 학습하여 정의(精義)에 묘입(妙入)했음. 무위군(無爲軍; 지금의 안휘 무위) 철불사(鐵佛寺) 천의의회선사(天衣義懷禪師)의 법석(法席)이 성()하다 함을 들음으로 인해 질러가서 참알(參謁)했고 증오(證悟)한 바가 있었으며 인가(印可)에 이름을 얻었으며 봉시(奉侍)하기 10년이었음. 출세해 회서(淮西) 사면산에 거주하다가 진주(眞州)의 장로(長蘆)로 천주(遷住)했으며 후에 동경(東京) 법운사(法雲寺)의 낙성(落成)으로 인해 요청에 응해 개산제일조(開山第一祖)가 되었으니 세칭이 법운법수(法雲法秀)며 사호(賜號)가 원통선사(圓通禪師). 성품이 강직하고 면목(面目)이 엄랭(嚴冷)하고 평생 꾸짖고 욕함으로써 불사를 삼았으며 사람들이 수철면(秀鐵面)으로 일컬었음. 법사(法嗣)에 법운유백(法雲惟白)ㆍ보녕자영(保寧子英) 59인이 있음 [선림승보전26. 오등회원16. 속전등록8].

李伯時; 송대 거사 이공린(李公麟; 1049-1134)의 자가 백시(伯時). 안휘 서주 사람. 호는 용면거사(龍眠居士). 원우(1086-1094) 진사(進士). 원부년 간(1098-1100) 어사대부에 제배(除拜)되었음. 박학하고 호고(好古; 고풍을 좋아함)했으며 시에 뛰어났음. 기자(奇字)를 많이 알아 하상(夏商) 이래로부터의 종정(鐘鼎)과 준이(尊彝; 는 균일하게 고대의 酒器)를 모두 능히 고정(考定; 고찰하여 정함)했고 관식(款式; 樣式)을 변별했음. 더욱이 말ㆍ산수ㆍ불상ㆍ인물을 잘 그렸는데 오도자(吳道子)의 심법을 얻었고 산수는 이사훈과 흡사했음. 만년에 불타에게 귀의하고 수계했으며 선법에 능통했고 정토를 아호(雅好; 애호)했음. 용면산장(龍眠山莊)에 은거하며 때때로 고승과 담론했으며 아울러 염불을 결사(竝結)했음. 소흥 4년 때가 이르렀음을 미리 알고 시재(施財)하고 게를 쓰고 염불하면서 화(; 죽음)했음. 향년(享年)86. 유묵(遺墨)이 세상에 전한 게 파다하며 화가들이 받들어 전칙(典則; 법칙)을 삼았음 [명공법희지4. 동림십팔고현전]. 李伯時畫馬事; 선림승보전16 원통수(圓通秀). 이공린(李公麟) 백시(伯時)는 공교(工巧)하게 말을 그렸는데 한간(韓幹)보다 덜하지 않았다. ()가 그를 꾸짖으며 가로되 너 사대부가 그림으로 저명하고 하물며 또 말을 그려 사람의 자랑을 기대하며 묘를 얻었다 하니 묘하게 마복(馬腹) 속에 들더라도 또한 두려움이 족하리라. 백시가 이로 말미암아 절필했다. 수가 권하여 관음상을 그려서 그 과오를 속()하게 했다.

泥犂; 범어 니라야날락가(泥囉耶捺洛迦; nirayanaraka)의 약역(略譯). 뜻은 곧 지옥. 또 니리(泥黎)ㆍ니리(泥梨)로 지음. 곧 무유(無有)ㆍ무복처(無福處)의 뜻임. 그곳엔 희락(喜樂)의 종류가 일체 전무함. 10() 중에 가장 열악한 경계가 됨.

木樨華; 계수나무의 꽃. 목서과 식물 목서의 꽃이 됨.

老婆心; 노파란 것은 자비의 말을 일컬음이니 친절하고 정녕(叮嚀)함의 뜻을 취함.

惟淸; (?-1117) 송대 황룡파승. 자는 각천이며 자호(自號)가 영원수(靈源叟)니 남주 무녕 사람이며 족()은 진씨. 나이 17에 대승(大僧)이 되었고 회당조심(晦堂祖心; 황룡을 이었음)에게서 인심(印心)했음. 처음은 서()의 태평에 거주했고 다음은 황룡 영원사로 옮겼음. 황로직(黃魯直)과 정이천(程伊川)이 모두 더불어 벗이 되었음. 스님이 이미 탁질(託疾)하여 고한(告閑)하고는 소묵당에 거주하기 15년이었음. 송 휘종 정화 79월에 안좌하여 취적(趨寂)했음 [보등록6. 속전등록22].

提撕; 1. 지시. 제시(提示). 2. 탐구(探究). 참구(參究).

光影; 허환하여 실답지 못한 사물을 비유로 가리킴. 또한 늘 선가에서 접인(接人)하는 방편법문을 가리킴. 방편법문은 진실한 대법이 아니므로 고로 일컬음.

廓爾; 개오(開悟)하는 모양. 공활한 모양.

滋味; ()는 좋은 맛.

齋粥; 재는 오식(午食)이며 죽은 조찬이니 재죽은 널리 승당의 음식의 일을 가리킴. 일반으로 조찬은 죽을 먹고 오찬은 밥을 먹음이 됨. 곧 새벽 빛이 점차 나타나서 손바닥 속의 무늬를 득견(得見)할 때에 이르면 죽시(粥時)가 됨. 또 만약 조죽(早粥)과 오반(午飯) 사이 약 10시에서 11시 경에 이르러 진식(進食)함을 곧 일컬어 반재(半齋)라 함 [석문정통3].

瞳人; 동공(瞳孔). 또 동인(瞳仁)으로 지음. 동공 중에 타인을 보는 사람의 형상이 있는지라 고로 동공을 일컬어 동인(瞳人)이라 함.

金色頭陀; 금색의 가섭임. 즉 마하가섭이니 그의 몸에 금색의 빛이 있으며 두타행이 제1이므로 고로 이름함. 또 호칭이 대음광ㆍ금색존자니 곧 선종의 제1.

禪悅; 선정에 든 자가 그 마음이 유쾌하고 자적(自適;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김)함을 이름().

海會演; 법연(法演; ?-1104)이니 북송 양기파승. 면주 파서(巴西; 사천 면양) 사람이며 속성은 등(). 나이 35에 비로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음. 성도(成都)에 유학(遊學)하여 백법(百法)과 유식(唯識) 여러 논을 익히며 그 오의(奧義)를 연구했음. 후에 백운수단선사(白雲守端禪師)에게 투신해 참구하며 정근(精勤)했으며 드디어 휑하게 철오(徹悟)했고 인가(印可)를 받았음. 이윽고 명령에 의해 분좌(分座)하여 내중(來衆)에게 개시(開示)했음. 처음엔 사면산(四面山)에 주()했고 뒤에 백운산(白雲山)으로 돌아와 옮겼음. 다음에 태평(太平)에 주()했고 다음에 해회(海會)에 주()했고 다시 기주(蘄州) 오조산(五祖山; 東山) 동선사(東禪寺)로 옮겼음. 휘종(徽宗) 숭녕 3625일에 상당하여 대중에게 고별하고 머리를 세정(洗淨)하고 몸을 씻고 시적했으니 나이는 80 남짓. 세칭이 오조법연(五祖法演). 법사(法嗣)가 파다(頗多)하지만 불안청원(佛眼淸遠)ㆍ태평혜근(太平慧懃)ㆍ원오극근(圜悟克勤)이 가장 저명하여 법연하(法演下)3()이란 칭호가 있음 [법연선사어록서. 오등회원19. 연등회요16. 석씨계고략4].

六通四闢; 사면팔방에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음(沒有)에 비유함.

下人; 사람의 뒤에 거처함. 대인(對人)하여 겸양(謙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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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심사주(平心寺主) 태화당( 泰華堂) 정원(淨圓)스님의 저서 공개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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