顯謨朱世英
問眞淨克文佛法大意 文以書答曰 辱書以佛法爲問 佛法至妙無二 但未至於妙 則互有長短 苟至於妙 則悟心之人 如實知自心 究竟本來成佛 如實自在 如實安樂 如實解脫 如實淸淨 而日用惟用自心 自心變化 把得便用 莫問是非 擬心思量已不是 也不擬心 一一天眞 一一明妙 一一如蓮花不著水 所以迷自心故作衆生 悟自心故成佛 而衆生卽佛 佛卽衆生 繇迷悟故有彼此也 如今學者 多不信自心 不悟自心 不得自心明妙受用 不得自心安樂解脫 心外妄有禪道 妄立奇特 妄生取捨 縱修行 落外道二乘禪寂斷見境界 英得書有省後 覺範至臨川 與英遊相好 俄上藍長老至謂英曰 覺範聞工詩耳 禪則其師猶錯 矧弟子耶 英笑曰 師能勘驗之乎 上藍曰 諾 居一日 同遊疎山 飯於逆旅 上藍以手畫案 謂洪曰 經軸之上必題[米-木+八]字是何義 洪卽畫圓相 橫一畫曰 是此義也 上藍愕然 洪爲作偈曰 以字不成八不是 法身睡著無遮蔽 衲僧對面不知名 百衆人前呼不起 上藍歸擧似英 英拊手曰 孰謂詩僧 亦能識字義乎
●顯謨; 顯謨閣 宋代所建 又指顯謨閣學士
●擬心; 猶豫 遲疑 思慮
●外道; 又作外敎 外法 外學 指佛敎以外之一切宗敎 與儒家所謂異端一語相當 ▲三論玄義 至妙虛通 目之爲道 心遊道外 故名外道 ▲宗鏡錄二十六 心外見法 盡名外道
●禪寂; 靜心思慮修習
●斷見; 有情之身心 見爲限一期而斷絶 謂之斷見 反之而見身心皆常住不滅 謂之常見 ▲涅槃經二十七 衆生起見凡有二種 一者常見 二者斷見 如是二見 不名中道 無常無斷乃名中道
●以字不成; 祖庭事苑一 以字 以字不成 其說有三 一謂是嘔啊二字 二謂是音字不譯 三謂是梵書心字 竝指經籤題上以字也 嘔啊者 淸凉疏主云 經首立如是 謂異外道故 外道經首皆立嘔啊 或云阿優 以爲吉 阿之言無 優之言有 萬法雖衆 不出有無 此則斷常之計 今如卽眞如是 卽妙有對破邪宗 以彰中道 一代時敎 不出如是二字 高僧傳有譯經新意六例 一譯字譯音例 內分四 一譯字不譯音 謂陀羅尼 二譯音不譯字 謂佛胸前卍字 三音字俱譯 謂經律論 四音字俱不譯 謂經題以字 所謂嘔啊 經首如是我聞 卽不在經外籤題之上 所謂音字俱不譯 未詳起自於誰 考其二說 似乎無稽 或者妄指爲梵書心字 梵本且無此說 尤謬 愚嘗過興國之傳法院 竊取西竺貝葉眞書 考之其未譯之書 經題尙且未立 何有以字之文 蓋自古習謬 妄爲其說 先聖法門不在斯焉 或問經首以形自何而得 蓋當時傭書者 運筆以覆經題 固無疑矣 然宗匠假此以接來學 豈知識擬議哉
현모(顯謨) 주세영(朱世英)
진정극문(眞淨克文)에게 불법의 대의(大意)를 물었다. 극문이 글로써 답왈(答曰) 욕서(辱書; 상대편을 높이어 그가 자기에게 쓴 편지를 이르는 말)에서 불법을 질문하셨습니다. 불법은 지묘(至妙)하여 무이(無二)지만 단지 묘(妙)에 이르지 못하면 곧 서로(互) 장단(長短)이 있습니다. 참으로(苟) 묘(妙)에 이른다면 곧 오심(悟心)한 사람이니 자심(自心)이 구경(究竟) 본래 성불한 줄 여실(如實)히 알고 여실히 자재(自在)하고 여실히 안락하고 여실히 해탈하고 여실히 청정합니다. 일용(日用)에 오직(惟) 자심(自心)을 쓰며 자심의 변화인지라 파득(把得)하면 바로 쓰고 시비(是非)를 묻지 않습니다. 의심(擬心)하고 사량(思量)하면 이미 옳지(是) 않습니다. 또한(也) 의심(擬心)하지 않아도 하나하나 천진(天眞)이며 하나하나 명묘(明妙)하며 하나하나 연화(蓮花)와 같아서 물이 붙지 않습니다. 소이로 자심(自心)을 미(迷)한 연고로 중생이 되고 자심을 깨친 연고로 성불(成佛)하나니 중생이 곧 부처며 부처가 곧 중생이거늘 미오(迷悟)를 말미암는(繇) 연고로 피차(彼此)가 있습니다. 여금의 학자가 다분히 자심을 믿지 못하고 자심을 깨치지 못하고 자심의 명묘(明妙)한 수용(受用)을 얻지 못하고 자심의 안락과 해탈을 얻지 못하고 마음 밖에 허망하게 선도(禪道)가 있고 허망하게 기특(奇特)을 세우고 허망하게 취사(取捨)를 내나니 아무리(縱) 수행하더라도 외도(外道)와 이승(二乘)의 선적(禪寂)과 단견(斷見)의 경계에 떨어집니다. 세영(世英)이 득서(得書)하고 성찰이 있은 후에 각범(覺範)이 임천(臨川)에 이르러 세영과 더불어 교유(交遊; 遊)하면서 서로 잘 지냈다(相好). 갑자기(俄) 상람(上藍)의 장로(長老)가 이르러 세영에게 일러 가로되 각범은 공시(工詩; 시에 工巧)하다고 들었을 뿐입니다. 선(禪)은 곧 그 스승(師; 克文을 가리킴)도 오히려 틀렸거늘(錯) 하물며(矧) 그 제자이겠습니까. 세영이 웃고 가로되 스님이 능히 그(之)를 감험(勘驗)하겠습니까. 상람이 가로되 낙(諾; 예). 하루 거처하고 함께 소산(疎山)을 유행(遊行; 遊)했다. 역여(逆旅)에서 식사(食事; 飯)하고는 상람이 손으로써 책상(案)에 그리고(畫) 홍(洪; 覺範)에게 일러 가로되 경축지상(經軸之上)에 반드시 [米-木+八]자(字)를 제(題)하는데 이 무슨 뜻입니까. 홍(洪)이 곧 원상(圓相)을 그리고(畫) 일획(一畫)을 가로놓고 가로되 이는 이 뜻입니다. 상람이 악연(上藍)했다. 홍(洪)이 작게(作偈)하여 가로되 이자를 이루지 못하고(以字不成) 팔(八)도 이것이 아니니/ 법신(法身)이 수착(睡著; 자다)하매 차폐(遮蔽)가 없다/ 납승(衲僧)이 대면하여 이름을 알지 못하고/ 모든(百) 중인(衆人) 앞에 불러도 일어나지 않는다. 상람이 돌아와 세영에게 거사(擧似)하자 세영이 부수(拊手; 拍手)하고 가로되 누가(孰) 시승(詩僧)이라고 일렀는가 또한 능히 자의(字義)를 안다네.
●顯謨; 현모각(顯謨閣)이니 송대에 건립한 것이며 또 현모각 학사를 가리킴.
●擬心; 유예(猶豫). 지의(遲疑; 의심하고 주저함). 사려.
●外道; 또 외교(外敎)ㆍ외법(外法)ㆍ외학(外學)으로 지음. 불교 이외의 일체 종교(宗敎)를 가리킴. 유가(儒家)에서 이른 바 이단(異端)의 일어(一語)와 상당(相當)함. ▲삼론현의. 지묘(至妙)하여 허통(虛通)함을 제목하여 도(道)라 하고 마음이 도 밖에 노니는지라 고로 이름이 외도(外道)다. ▲종경록26 마음 밖에 법을 보면 모두 이름이 외도다.
●禪寂; 고요한 마음으로 사려하면서 수습(修習)함.
●斷見; 유정의 몸과 마음은 일기(一期)에 한정하며 단절된다고 보면 이를 일러 단견이라 하고 이와 반대로 몸과 마음이 모두 상주하여 불멸한다고 보면 이를 일러 상견(常見)이라 함. ▲열반경27. 중생이 지견을 일으킴에 무릇 2종이 있다. 1자는 상견(常見)이며 2자는 단견(斷見)이다. 이와 같은 2견은 중도(中道)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상(常)도 없고 단(斷)도 없어야 곧 이름이 중도다.
●以字不成; 조정사원1. 이자(以字) 이자(以字)를 이루지 못함이란 그 설에 셋이 있다. 1은 이르자면 이 우아(嘔啊) 2자며 2는 이르자면 이 음자(音字)를 번역하지 않음이며 3은 이르자면 이 범서(梵書)의 심자(心字)니 모두 경첨제상(經籤題上; 籤은 찌 붙일 첨)의 이자(以字)를 가리킴이다. 우아(嘔啊)란 것은 청량소주(淸凉疏主; 澄觀)가 이르되 경수(經首)에 여시(如是)를 세움은 이르자면 외도와 다른 연고다. 외도의 경수엔 다 우아(嘔啊)를 세우거나 혹은 이르되 아우(阿優)라 하여 길(吉)로 삼는다. 아(阿)는 무(無)를 말함이며 우(優)는 유(有)를 말함이니 만법이 비록 많으나 유무를 벗어나지 않는다 함이니 이는 곧 단상(斷常)의 계교(計巧)다. 지금의 여(如)는 곧 진여(眞如)가 이것이니 곧 묘유(妙有)로 사종(邪宗)을 대파(對破)하고 중도를 밝힘이니 일대시교(一代時敎)가 여시(如是) 2자를 벗어나지 않는다(阿는 無를 말함이며 以下는 화엄경소4에 나옴). 고승전(高僧傳; 宋高僧傳) 역경(譯經)의 신의(新意)가 6례(例)가 있다. 1은 역자역음례(譯字譯音例)며 안에 넷으로 나눈다. 1은 자(字)를 번역하나 음(音)을 번역하지 않음이니 이르자면 다라니(陀羅尼)다. 2는 음을 번역하나 자를 번역하지 않음이니 이르자면 부처의 가슴 앞 만자(卍字)다. 3은 음과 자를 다 번역함이니 이르자면 경률론(經律論)이다. 4는 음과 자를 다 번역하지 않음이니 이르자면 경제(經題)의 이자(以字)다(譯經의 新意 以下의 文은 송고승전3에 나옴). 이른 바 우아(嘔啊)나 경수(經首)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곧 경 밖의 첨제(籤題)의 위에 있지 않거늘 이른 바 음과 자를 다 번역치 않는다 함은 누구로부터 일어났는지 상고(詳考)치 못했다. 그 2설을 고찰(考察)하건대 계고(稽考)가 없는 듯하다. 어떤 자는 망령되이 범서(梵書)의 심자(心字)를 가리킴이라 하거니와 범본(梵本)에 또 이 설이 없으니 더 오류다. 우(愚; 謙辭)가 일찍이 흥국(興國)의 전법원(傳法院)을 지나다가 가만히 서축(西竺)의 패엽(貝葉) 진서(眞書)를 취해 그 번역하지 않은 책을 고찰하니 경제(經題)도 오히려 세우지 않았거늘 어찌 이자(以字)의 글이 있으랴. 대개 자고로 오류를 익혀 망령되이 그 설을 지었으리니 선성(先聖)의 법문이 이에 있지 않다. 혹 묻되 경수(經首)의 이형(以形)을 어디로부터 얻었는가 한다면 대개 당시의 용서자(傭書者; 글을 쓰는 고용인)가 운필(運筆)하면서 경제(經題)에 덮어씌웠음이 진실로 의심 없다 하리라. 그러나 종장(宗匠)이 이를 가차(假借)하여 내학(來學)을 접인(接引)하매 어찌 지식(知識)으로 의의(擬議; 추측하여 의논함)하리오.
평심사 : 네이버 블로그
평심사주(平心寺主) 태화당( 泰華堂) 정원(淨圓)스님의 저서 공개방입니다.
blog.naver.com
'거사분등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오순(吳恂) (0) | 2026.06.25 |
|---|---|
|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왕대부(王大夫) (0) | 2026.06.24 |
|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왕정언(王正言) (0) | 2026.06.24 |
|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팽기자(彭器資) (0) | 2026.06.23 |
|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시랑(侍郞) 한종고(韓宗古) (0) | 2026.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