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五 懷禪師前錄 2 협연(篋衍)

태화당 2019. 9. 6. 11:10

篋衍은 상자 협. 원음이 겹. 竹箱之類(상자 사).

上苦協切 箱篋也 下以淺切 笥也

 

苦協切이니 箱篋. 以淺切이니 .

 

燕金

燕國産金 故以名焉

 

연국산 이므로 고로 이름함.

 

趙璧

見祖英連城璧

 

조영의 連城璧(卷第三)을 보라.

 

捻出은 손가락으로 찍을 념. 원음이 녑.

當作拈 奴兼切 持也 捻 諾協切 揑也 非義也

 

마땅히 으로 지어야 하나니 奴兼切이며 . 諾協切이며 (과 같음. 꼭 찍을 날. 주워 모을 날. 원음이 녈)이니 뜻이 아님.

 

一瓣은 외씨 판. 조각 판.

見雜志

 

잡지(아래 卷第八)를 보라.

 

萬乘

孟子云 方千里而井 井九百畝是也 古之大國不過萬里 以百里賦千乘 今言萬乘 率千里之賦也 又孟子云 天子之制 地方千里 公侯之制 地方百里 伯七十里 男子五十里是也

 

맹자에 이르되 사방 千里이며 九百畝(는 이랑 묘. 원음이 무)라 한 게 이것이다. 옛적의 대국은 萬里를 넘지 않았고 百里마다 千乘賦課했으므로 이제 말한 萬乘이란 비율이 千里의 구실()이다. 또 맹자(萬章下)에 이르되 천자의 制度는 땅이 사방 千里公侯(公爵侯爵)의 제도는 땅이 사방 百里(伯爵)七十里(男爵)(子爵)五十里라 한 게 이것이다.

 

萬歲

呼萬歲 自古至周 未有此禮 桉春秋後語 趙惠王得楚和氏璧 秦昭王聞之 遺五書 願以十五城易之 趙遣藺相如奉璧入秦 秦王見相如奉璧 大喜 左右呼萬歲 又田單守卽墨 使老弱女子乘城上 僞約降 燕軍皆呼萬歲 馮之薛 召諸民債者合券 券旣合 瑗乃矯孟嘗君之命 所債賜諸民 因燒其券 民皆呼萬歲 至秦始皇 殿上上壽 群臣皆呼萬歲 見優孟傳 蓋七國之時 衆所喜慶於君 皆呼萬歲 自漢已後 臣下對見於君及拜恩慶賀 以爲常制 又謂山呼者 漢武帝至中嶽 翌日親登崇高 御史乘屬在廟旁 吏卒盛聞呼萬歲者三 山呼萬歲者 自漢武始也 瑗 音院


萬歲를 부른 것은 고대로부터 에 이르기까지 이 가 있지 않았다. 春秋後語를 안험하니 趙惠王和氏璧을 얻자 秦昭王이 이를 듣고 五書를 보내어() 十五城으로써 그것과 바꾸기를 원했다. 藺相如()를 보내어 을 받들고 에 들어가게 했다. 秦王相如을 받든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고 左右萬歲를 불렀다(史記卷八十一에도 이와 같은 글이 있음). 田單(전국시대 將帥. 燕將 樂毅全域을 쳤을 때 만이 籠城하고 있다가 燕軍火牛로 물리치고 七十餘城을 도로 뺏었음)卽墨을 수비하면서 老弱女子로 하여금 위로 오르게 하고 거짓으로 항복을 약속하자 燕軍이 다 萬歲를 불렀다(史記卷八十二에 이와 같은 글이 있음). (孟嘗君食客)에 가서 諸民債務者를 불러 證書()를 합치게 하고 증서가 이미 합치자 이 이에 맹상군의 명령이라고 속이고는 빚진 바를 諸民에게 하사하고 인하여 그 증서를 태우자 제민이 다 萬歲를 불렀다(史記卷七十五에도 이런 말이 있으나 萬歲가 아니라 앉은 자가 다 일어나 再拜했다 라고 했음. 馮瑗馮驩으로 지어졌음). 진시황에 이르러 殿上에서 上壽(百歲. 백세토록 살기를 祝壽)하면서 群臣이 다 萬歲를 불렀다. 優孟傳(優孟樂人. 稽家)을 보라(史記卷一百二十六에도 이와 같은 말이 있음. 優旃으로 지어졌음. 優孟優旃은 둘 다 골계가임). 대개 七國의 시대엔 뭇 사람이 군주에게 喜慶(기뻐서 慶賀)하는 바에 다 만세를 불렀다. 나라 已後부터는 신하가 군왕을 對見하거나 및 拜恩(恩澤拜謝)慶賀常制로 삼았다. 또 이르되 山呼란 것은 漢武帝中嶽에 이르러 다음날 친히 崇高(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御史乘屬곁에 있었는데 吏卒이 만세를 부름을 盛大하게 들은 것이 세 번이었다(漢書卷六에 이와 같은 말이 있음). 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漢武(漢武帝)로부터 비롯했다. 은 음이 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