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五 懷禪師前錄 14 구류(九流)

태화당 2019. 9. 6. 11:26

九流

一曰儒流 謂順陰陽 陳敎化 述唐虞之政 宗仲尼之道也 二曰道流 謂守弱自卑 陳堯舜揖讓之德 明南面爲政之術 奉易之謙也 三曰陰陽流 謂順天歷象 敬授民時也 四曰法流 謂明賞敕法 以助禮制也 五曰名流 謂正名別位 言順事成也 六曰墨流 謂淸廟宗祀 養老施惠也 七曰縱橫流 謂受命使平 專對權事也 八曰雜流 謂兼儒墨之詮 含名法之訓 知國大體 事無不貫也 九曰農流 謂勸厲耕桑 備陳食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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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가로되 儒流니 이르자면 음양을 따라 교화를 베풀고 唐虞(陶唐氏有虞氏니 곧 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의 정치를 진술하고 중니의 도를 근본()으로 함임. 는 가로되 道流니 이르자면 을 지켜 스스로 낮추고 요순의 揖讓(읍하는 동작을 갖추면서 사양함)의 덕을 진술하고 南面(남쪽을 향함이니 임금이 앉던 방향)하여 정치를 하는 술법을 밝히고 의 겸양을 받드는 것임. 은 가로되 陰陽流니 이르자면 하늘의 經歷하는 形象에 순응해 공경하며 民時(백성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시기. 곧 봄에 밭 갈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거두는 때. 人時)授與하는 것임. 는 가로되 法流니 이르자면 敕法을 밝혀 을 주고 禮制를 도우는 것임. 는 가로되 名流니 이르자면 이름을 바르게 하고 자리를 분별하며 말이 順順하고 일을 이루는 것임. 은 가로되 墨流니 이르자면 淸廟(맑고 깨끗한 宗廟)宗祀(받들어 제사함)하고 養老하며 施惠(혜택을 베풂)함임. 은 가로되 縱橫流니 이르자면 명령을 받아 평화롭게 하며 오로지 權事에 대응함임. 은 가로되 雜流니 이르자면 儒墨(儒家墨家)詮衡(인물 등을 시험해 뽑음)을 겸하고 名法(名流法流)의 교훈을 포함하여 나라의 大體를 알아 일이 관통하지 않음이 없음임. 는 가로되 農流니 이르자면 耕桑(경작과 養蠶)勸厲(는 힘쓸 려. 곧 힘쓰기를 권함)하여 食貨(음식과 재물)備陳(갖추어 陳列)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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虹虹은 무지개 홍. 어지러울 항. 골 이름 강.

上音洪 下音降 螮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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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음이 홍이며 는 음이 강이니 螮蝀(는 무지개 체. 은 무지개 동. 곧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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謫仙拏月은 귀양갈 적. 는 붙잡을 나.

李白 字太白 十歲通詩書 旣長 隱泯山 州擧有道 不應 天寶初 南入會稽 與吳筠善 筠被詔 故白亦至長安 往見賀知章 知章見其父 歎曰 子 謫仙人也 言於玄宗 召見金鸞殿 論當世事 奏頌一篇 帝賜食 親爲調羮 有詔供奉翰林 猶與酒徒醉于市 帝坐沈香子亭 意有所感 欲得白爲樂章 召入 而自已醉 左右以水頮面 稍解 授筆成文 婉麗精切 無留思 帝愛其才 數宴見 白嘗侍帝 醉 使高力士脫靴 力士素貴 恥之 摘其詩以激楊貴妃 帝欲官白 妃輒沮止 白自知不爲親近所容 益傲放不自修 懇求還山 帝賜金放還 白浮游四方 嘗乘月與崔宗之 自采石至金陵 著宮錦袍坐舟中 旁若無人 代宗立 以左拾遺召 白已卒 年六十餘 或言拏月沈江 未見所出 頮 音誨 洗面也 沮 在呂切 止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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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701-762)太白이다. 十歲詩書를 통달했다. 이미 자라서는 泯山에 은거했다. 에서 有道를 거론했으나 불응했다. 天寶初742 남쪽으로 會稽에 들어가서 吳筠과 잘 지냈다. 균이 詔勅을 입어 고로 도 또한 장안에 이르렀으며 가서 賀知章(詩人)을 뵈었다. 지장이 그의 아버지를 보고 감탄해 가로되 아들은 謫仙人(은 귀양 갈 적. 곧 귀양 온 仙人)이다. 玄宗에게 말했고 불러 金鸞殿에서 상견해 當世의 일을 논했다. 頌 一篇上奏했는데 가 밥을 하사하고 친히 국을 調理했다. 供奉翰林詔書가 있었으나 오히려 술꾼들과 시장에서 취했다. 沈香子亭에 앉았다가 뜻에 느끼는 바가 있어 李白을 얻어 樂章을 만들고자 하여 불러 들어오게 했으나 스스로 이미 취했다. 左右가 물로써 얼굴을 씻기어(는 낯 씻을 회) 조금 깨었다. 붓을 주자 문장을 이루었는데 婉麗(은 아름다울 완. 곧 아름답고 화려함)하고 精切(精密하고 適切)했으며 생각을 머묾이 없었다. 가 그 재주를 사랑해 자주 饗宴하여 상견했다. 이 일찍이 侍立했는데 취했다. 高力士(684-762. 玄宗 때의 宦官으로서 韋皇后太平公主의 세력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현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권세를 부려 唐後期宦官勢道政治의 길을 열었음)를 시켜 신을 벗기게 했는데 力士는 본디 귀족이라 이를 치욕으로 여겼으며 그 摘出楊貴妃激昂(은 들 앙. 높을 앙)시켰다. 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가 번번이 했다. 이 친근하면 용납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았고 더욱 傲放(傲慢放恣)하며 스스로 修飾하지 않았다. 산으로 돌아감을 懇求하자 가 금을 하사하고 放還했다. 四方으로 浮游했는데 일찍이 乘月하고 崔宗之와 더불어 스스로 돌을 캐면서 金陵에 이르렀다. 宮錦袍를 입고 배 가운데 앉았으되 旁若無人했다. 代宗이 옹립되자 左拾遺로써 불렀으나 이 이미 했고 나이는 六十餘. 혹은 말하기를 달을 붙잡다가 강에 빠졌다 하나 나온 곳을 보지 못했다. 이 회며 세면임. 在呂切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