望龍牀
叢林引唐太宗還魂事 以傳諸學者 然意或似之 而唐帝紀不載 此蓋風穴信之於廛전談 作此句語 殊不稽也 如華嶽三峯 坐朝不問等語亦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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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림에서 당태종의 還魂事를 인용해 여러 학자에게 전하지만 그러나 뜻이 혹은 이와 흡사하나 唐帝紀에 실리지 않았음. 이는 대개 풍혈이 廛房의 얘기를 믿고서 이 句語를 지었음이니 너무 稽考(옛일을 자세히 살피어 공부하고 익힘)하지 않았음. 예컨대(如) 華嶽三峯과 坐朝不問 등의 말도 또한 그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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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來事
一本作前來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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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本(어떤 책)엔 前來使로 지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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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影▶景은 量으로 의심됨.
律云 量影 集衆知時之法 凡有七種集法 一量影 二破竹作聲 三作煙 四吹視 五打鼓 六打楗椎 七喝時到 量影者 以一尺木 至日中竪之 記其影以量之 計天寸 定時景영之短長也▶視는 貝로 의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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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에 이르되 量影은 대중을 모으거나 시각을 아는 법이다. 무릇 七種의 集法이 있으니 一은 그림자를 잼이며 二는 대를 깨뜨려 소리를 지음이며 三은 煙氣를 만듦이며 四는 吹貝(貝는 古代의 樂器 이름. 큰 소라로 만듦. 곧 貝를 붊)며 五는 북을 침이며 六은 楗椎를 침이며 七은 時到라고 喝(고함칠 갈. 외칠 갈. 원음이 할)함이다. 量影이란 것은 一尺의 나무를 至日(冬至와 夏至) 중에 그것을 세우고 그 그림자를 기록해 이를 재어 하늘의 寸을 계산하고 時景(景은 그림자 영. 곧 시각의 그림자)의 短長을 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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尼乾▶玄應撰 一切經音義卷第十에 이르되 尼乾子는 응당 말하되 泥揵連他니 여기에선 이르되 不繫다. 그 외도는 머리카락을 뽑고 형체를 드러내며 저축하는 바가 없으며 손으로써 걸식해 얻는 대로 곧 먹는 자이다.
梵語 此言不繫 謂無所繫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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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니 여기 말로는 不繫임. 이르자면 繫著하는 바가 없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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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獄應收
應收當作難收 見它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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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收는 마땅히 難收로 지어야 하나니 它本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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鬬勝
東漢永平十四年正月一日 五嶽諸山道士褚저善信等 朝正之次 自相命曰 天子棄我道法 遠求胡敎 因朝集 可以表抗之 遂上表 乞比較優劣 如其有勝 乞除虛妄 敕遣尙書令宋庠상 引入長樂宮 以今月十五日 可集白馬寺 道士等便置三壇 各賷재靈寶眞文等五百九卷於東壇 茅成子 老子等二百三十五卷置中壇 帝御行殿在寺南門 佛舍利經像置於道西 十五日齋訖 道士以柴시荻적和沈檀爲炬 泣曰 今胡神亂夏 人主信邪 以火取驗 得辨眞僞 便縱火焚經 經從火化 悉成灰燼신 時佛舍利光明五色直上 映蔽日光 摩騰法師涌身高飛 坐臥空中 廣現神變 又說出家功德 其福最高 司空劉峻與諸官士庶千餘人出家 道士呂惠通等六百二十人出家 見漢法本內傳 潑墨望淸皆處也 經傳無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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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후한) 永平十四年71 正月 一日 五嶽諸山과 道士 褚善信 등이 朝正(賀正 元會라고도 함. 大臣이 新年에 황제를 향해 拜賀하는 일)하던 次에 스스로 서로 告示(命은 告示할 명)하여 가로되 천자가 우리의 道法을 버리고 멀리 胡敎를 求하셨으니 朝集(朝會니 모든 관리가 朝見현에 모임)으로 인하여 가히 表로써 그것을 抗議하자. 드디어 上表해 우열을 비교하기를 乞求했다. 그 이김이 있을 것 같으면 허망을 제거함을 걸구하기로 했다. 칙령으로 尙書令 宋庠상을 보내 引導해 長樂宮에 들게 하여 今月 十五日을 써서 가히 白馬寺로 모이게 했다. 道士 등이 곧 三壇을 안치하고 각기 靈寶眞文 등 五百九卷을 東壇에 가져왔으며(齎) 茅成子 老子 등 二百三十五卷은 中壇에 안치했다. 帝(明帝니 諱는 莊이며 光武帝의 子임. 재위 58-75)가 行殿(臨時宮殿)에 거둥해(御) 寺의 南門에 있었고 佛舍利와 經像(경전과 불상)은 道敎의 서쪽에 안치했다. 十五日에 齋를 마치자 도사가 柴荻적(섶과 갈대)을 沈檀(沈香과 栴檀香)에 섞어 횃불로 삼았다. 泣하며 가로되 지금 胡神이 夏(중국)를 어지럽혀 人主가 邪法을 믿으시니 불로써 靈驗을 취해 眞僞를 분변함을 얻겠습니다. 곧 불을 놓아 경을 태우자 경이 불을 좇아 변화하여 모두 灰燼(灰는 재 회. 燼은 깜부기불 신. 곧 타고 남은 재)을 이루었다. 때에 불사리의 광명이 오색이었는데 바로 올라가 日光을 비추어 가렸다. 摩騰法師(大宋僧史略에 이르되 後漢 第二主 明帝 永平七年64에 이르러 金人을 꿈꿈으로 인해 이에 秦景 蔡愔음 王遵으로 하여금 천축에 가서 불교를 영입케 했다. 月氏지에서 迦葉摩騰과 竺法蘭 二沙門을 만나 東夏로 들어 왔다)가 몸을 솟구쳐 높이 날면서 공중에 坐臥하며 넓게 神變을 나타냈으며 또 출가공덕을 설하면서 그 복이 최고라 하였다. 司空 劉峻이 諸官과 士庶 千餘人과 더불어 출가했고 도사 呂惠通 등 六百二十人이 출가했다. 漢法本內傳(현재 남아있지 않음. 僞書란 說도 있음)을 보라. 潑墨望淸皆處也는 經傳에 글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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