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六 法眼 5 아인사상(我人四相)

태화당 2019. 9. 7. 11:04

我人四相

執取自體 爲我 計我展轉趣於餘趣 爲人 計我盛衰苦樂 種種變異相續 爲衆生 計我一報命根不斷而住 爲壽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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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를 執取함이 가 되고 展轉하여 餘趣로 나아감을 計度함이 이 되고 盛衰苦樂하여 갖가지로 變異하여 상속함을 計度함이 衆生이 되고 一報(一生果報)命根不斷하여 머문다고 計度함이 壽者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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羈籠는 굴레 기.

上居宜切 馬絡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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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宜切이니 絡頭(은 얽을 락. 助字. 곧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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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丈

今以禪林正寢爲方丈 蓋取則毗耶離城維摩之室 以一丈之室 能容三萬二千師子之座 有不可思議之妙事故也 唐王玄策爲使西域 過其居 以手版縱橫量之 得十笏 因以爲名


여금에 禪林(禪寺. 禪院)正寢(주지의 거실을 가리킴)方丈으로 삼음은 대개 비야리성의 유마의 방()에서 軌則을 취했음. 一丈(四方一丈)의 실내에 능히 三萬二千의 사자의 容受했음은 불가사의의 妙事가 있는 연고임. 王玄策(나라 초기에 인도로 파견된 사신. 세 차례 인도에 다녀온 후 中天竺行記를 저술했음)이 서역에 사신이 되어 그 거처(유마힐의 거실)를 지나다가 手版(을 일컬음. 手板과 같음)으로 縱橫을 재었는데 十笏(官員이 임금을 만날 때 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 길이 한 자쯤 너비 두 치쯤이며 얄팍하고 길쭉히 생겼음)을 얻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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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 명. 기록할 명.

音冥 述其功美 使可稱名也 又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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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명임. 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여 가히 이름을 일컫게 함임. (기록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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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厚公久

方丈之居 非私居也 故其圖可久 居其地者 非一人 故其處可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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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의 거처는 私居가 아니므로 고로 그 圖謀가 가히 장구해야 하고 그 땅에 거처하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므로 고로 그곳은 가히 重厚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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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隱

晉王康琚反招隱詩曰 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 伯夷竄首陽 老聃伏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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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康琚反招隱詩에 가로되 小隱陵藪(丘陵과 숲. 는 숲 수. 늪 수)에 숨고/ 大隱朝市(朝廷과 시장)에 숨는다/ 伯夷(殷 孤竹君의 아들이며 叔齊와 형제지간. 武王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으므로 형제는 祿을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음)首陽山에 숨고(은 숨을 찬. 도망갈 찬)/ 老聃(老子)柱下史로 숨었다(釋氏稽古略卷一에 이르되 老子李氏며 이름이 이며 伯陽이다. 은 시호다. 定王三年丁巳서기전 604 九月 十四日楚國陳郡 苦縣 賴鄉 曲仁里에서 출생했다. 의 탄생은 釋迦文佛이 입멸한 지 이미 三百四十六年이다. 簡王四年己卯서기전 582 伯陽의 나이 二十三에 벼슬해 守藏吏가 되었으며 十三年서기선 573柱下史로 옮겼다. 이로부터 五十四年 동안 옮기지 않았으므로 時人이 지목해 吏隱이라 했다. 敬王元年壬午서기전 519 老子의 나이 八十六歲를 떠나 散關今陝西興元路鳳州尹喜流沙西遊하다가 扶風郡에서 죽었으며 槐里今陝西安西路興平縣也葬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