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師
西域之法 推重其人 外內攸유同 邪正俱有 擧國歸依 乃彰斯號 聲敎東漸 唯北齊高僧法常 齊主崇爲國師 國師之號 自常公始 陳隋之代 天台智顗爲陳宣隋煬菩薩戒師 故時號國師 唐則天朝 神秀召入京師 及中睿玄凡四朝 皆號爲國師 後有慧忠 肅代二朝 入禁中說法 亦號國師 元和中 敕署知玄號悟達國師 若偏覇之國 則蜀後主 賜右街僧錄光業爲祐聖國師 吳越稱德韶爲國師 見贊寧僧史 漸 音尖 流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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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域의 법은 그 사람을 推重(推戴하여 존중함)하되 外內가 같은 바며 邪正을 다 가졌으면 擧國(擧는 온통 거. 모두 거. 곧 全國)이 귀의하므로 이에 이 號가 顯彰(환히 나타남)했다. 聲敎(사바세계는 음성으로 敎의 진실로 삼으므로 성교라 함. 이 文에선 부처의 聲敎임)가 東漸(東進)하여 오직 北齊의 高僧 法常을 齊主(文宣帝니 在位 550-559)가 높여 國師로 삼았으니 국사의 호는 常公으로부터 비롯했다(佛祖統紀卷第三十九 天保元年550 高僧 法常을 불러 內殿에 들어서 열반경을 강설하게 하고 除拜하여 國師로 삼았다). 陳隋의 시대엔 天台智顗가 陳宣帝(재위 568-582)와 隋煬帝(재위 605-616)의 菩薩戒師가 되므로 고로 때에 국사로 호했고 당나라 則天朝(주 684-705)에 神秀를 京師에 불러들였으며(宗統編年卷之十 乙未天冊萬歲元年695 선사 慧安과 神秀가 應詔하여 왕궁에 들었다) 및 中宗(재위 684-709) 睿宗(재위 710-712) 玄宗(재위 712-756) 무릇 四朝에 다 국사로 호했으며 뒤에 慧忠(?-775)이 있어 肅宗(재위 757-762) 代宗(재위 763-779) 二朝에 禁中에 들어가 설법했으며 또한 국사로 호했다. 元和中806-820에 칙령해 知玄을 任命(署)해 悟達國師(佛祖統紀卷第四十一 元和元年806 사문 知玄을 불러 궁전에 들게 해 道를 묻고 號를 주어 悟達國師라 했다. 玄은 五歲에 능히 詩를 읊었고 출가해 사미가 되었으며 十四歲에 열반경을 강설했다)로 호했다. 만약 偏覇(偏國의 覇者)의 國이라면 곧 蜀 後主가 右街僧錄 光業에게 주어 祐聖國師(宋高僧傳卷第六에 의하면 悟達國師의 法孫은 右街僧錄 覺輝며 輝의 제자가 僞蜀의 祐聖國師라 했음)로 삼았으며 吳越에선 德韶를 일컬어 국사라 했다. 贊寧의 僧史(大宋僧史略卷中)를 보라. 漸은 음이 尖이니 流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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揣度▶揣는 잴 췌. 시험할 췌. 度은 헤아릴 탁.
上初委切 試也 下徒落切 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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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은 初委切이니 시험함임. 下는 徒落切이니 헤아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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纂▶모을 찬.
作管切 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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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管切이니 모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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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樞▶樞는 근본 추. 지도리 추.
昌朱切 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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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朱切이니 근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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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岐▶岐(갈림길 기)는 마땅히 歧(육발이 기. 갈림길 기)로 지어야 함.
當从山作岐 道也 歧 足多指也 非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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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山을 좇아 岐로 지어야 하나니 길임. 歧는 발에 발가락이 많음이니 뜻이 아님(岐와 歧는 서로 통하므로 可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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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鑑
龜所以決猶豫 鑑所以辨妍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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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은 猶豫를 결단함에 쓰이는 것이며 거울은 妍蚩(妍은 예쁠 연. 蚩는 추할 치. 어리석을 치)를 分辨함에 쓰이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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