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론소기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30

태화당 2020. 9. 19. 11:40

[別記]言覺義者 卽有二種 謂本覺始覺 言本覺者 謂此心性離不覺相 是覺照性 名爲本覺 如下文云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言始覺者 卽此心體隨無明緣 動作妄念 而以本覺熏習力故 稍有覺用 乃至究竟 還同本覺 是名始覺 言不覺義 亦有二種 一者根本不覺 二者枝末不覺 根本不覺者 謂棃耶識內根本無明 名爲不覺 如下文云依阿棃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故 言枝末不覺者 謂無明所起一切染法 皆名不覺 如下文云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若依識相差別簡本異末義門 則棃耶識中唯有本覺及本不覺 若就識體無二攝末歸本義門 則彼始覺及末不覺亦是棃耶識內之義 故上云此識有二義者 通含如是二種之意 故下釋中通擧本始二覺及二不覺義也 問 爲當心體只無不覺 故名本覺 爲當心體有覺照用 名爲本覺 若言只無不覺名本覺者 可亦無覺照故是不覺 若言有覺照故名本覺者 未知此覺爲斷惑不 若不斷惑 則無照用 如其有斷 則無凡夫 答 非但無闇 亦有明照 以有照故 亦有斷惑 此義云何 若就先眠後覺名爲覺者 始覺有覺 本覺中無 若論本來不眠名爲覺者 本覺是覺 始覺則非覺 斷義亦爾 先有後無名爲斷者 始覺有斷 本覺無斷 本來離惑名爲斷者 本覺是斷 始覺非斷 若依是義 本來斷故 本來無凡 如下文云一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槃菩提之法 然雖曰有本覺故本來無凡 而未有始覺故本來有凡 是故無過 若汝言由有本覺本來無凡 則終無始覺望何有凡者 他亦終無始覺則無本覺 依何本覺以說無凡 當知由有本覺故本無不覺 無不覺故終無始覺 無始覺故本無本覺 至於無本覺者源由有本覺 有本覺者由有始覺 有始覺者由有不覺 有不覺者由依本覺 如下文云 本覺義者對始覺義說 以始覺者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當知如是展轉相依 卽顯諸法非無而非有 非有而非無也 問 此本覺性 爲當通爲染淨因性 爲當但是諸淨法性 若言但是淨法因者 何故經云如來之藏是善不善因 乃至廣說 若通作染淨者 何故唯說具足性功德 不說具足性染患耶 答 此理通與染淨作性 是故唯說具性功德 是義云何 以理離淨性 故能隨緣作諸染法 又離染性 故能隨緣作諸淨法 以能作染淨法 故通爲染淨性 由離染淨性 故唯是性功德 何以得離染淨性乃成諸功德 取著染淨性皆是妄想故

 

[별기] 말한 각의(覺義)란 것은 곧 2종이 있으니 이르자면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다. 말한 본각이란 것은 이르자면 이 심성(心性)이 불각상(不覺相)을 여읜 이 각조성(覺照性)이니 이름하여 본각이다. 예컨대() 하문(下文)에 이르되 이른 바 자체에 대지혜광명의 뜻이 있는 연고다 했다. 말한 시각이란 것은 곧 이() 심체가 무명연(無明緣)을 따라 망념을 동작하되 본각의 훈습력(熏習力)을 쓰는 고로 조금() 각용(覺用)이 있다가 내지 구경(究竟)엔 도리어 본각과 같나니 이 이름이 시각이다. 말한 불각의(不覺義)도 또한 2종이 있나니 1자는 근본불각(根本不覺)이며 2자는 지말불각(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이란 것은 이르자면 리야식(棃耶識) 내의 근본무명이니 이름하여 불각이다. 예컨대() 하문(下文)에 이르되 아리야식에 의해 무명이 불각에 일어남이 있음을 설하는 연고라 했다. 말한 지말불각이란 것은 이르자면 무명이 일으키는 바 일체의 염법(染法)을 다 이름해 불각이다. 예컨대 하문(下文)에 이르되 일체의 염법은 다 이 불각상(不覺相)인 연고라 했다. 만약 식상(識相)의 차별인 간본이말(簡本異末; 본이 말과 다름을 가림)의 의문(義門)에 의한다면 곧 리야식(棃耶識) 중에 오직 본각 및 본불각(本不覺)이 있을 뿐이지만 만약 식체(識體)에 둘이 없는 섭말귀본(攝末歸本; 말을 거두어 본으로 돌아감)의 의문(義門)으로 나아간다면 곧 저 시각 및 말불각(末不覺) 또한 이 리야식 내의 뜻이다. 고로 위에서 이르되 이 식에 두 뜻이 있다 한 것은 이와 같은 2종의 뜻을 통함(通含; 모두 함유함)했음이니 고로 하석(下釋) 중에 본()과 시() 2각 및 2불각의(不覺義)를 통거(通擧)했다. 묻되 마땅히 심체에 다만 불각이 없기 때문에() 고로 이름이 본각인가, 마땅히 심체에 각조(覺照)의 용()이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본각인가. 만약 말하되 다만 불각이 없어 이름이 본각이라 한다면 가히 또한 각조(覺照)가 없는 고로 이 불각이리라. 만약 말하되 각조가 있는 연고로 이름이 본각이라 한다면 알지 못하나니 이 각이 단혹(斷惑)하는가, 만약 단혹하지 못한다면 곧 조용(照用)이 없으며 그것이 단(; 斷惑)이 있다면 곧 범부가 없으리라. 답하되 단지 어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명조(明照)가 있나니 조(; 明照)가 있는 연고로써 또한 단혹이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云何), 만약 선면후교(先眠後覺; 먼저 자고 뒤에 깸)로 나아가 이름하여 각()이라 한다면 시각에 각이 있으나 본각 중에는 없다. 만약 본래 불면(不眠)을 논해 이름하여 각이라 한다면 본각은 이 각이며 시각은 곧 각이 아니다. 단의(斷義)도 또한 그러하여 선유후무(先有後無)를 이름하여 단()이란 한다면 시각엔 단()이 있고 본각엔 단이 없다. 본래 이혹(離惑)을 이름하여 단()이라 한다면 본각은 이 단이며 시각은 단이 아니니 만약 이 뜻에 의한다면 본래 단인 연고로 본래 범부()가 없다. 예컨대 하문(下文; 3)에 이르되 일체중생이 본래 상주(常住)하며 열반보리(涅槃菩提)의 법에 들어간다 했다. 그러나 비록 가로되 본각이 있는 연고로 본래 범부()가 없다 했지만 시각이 있지 아니한지라 고로 범부가 있나니 이런 고로 허물이 없다. 만약 네가 말하되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다면 곧 마침내 시각도 없으리니 무엇을 망()하여 범부가 있으리오 한다면 저()도 또한 마침내 시각이 없어 곧 본각도 없으리니 무슨 본각에 의해 범부()가 없음을 설하겠는가 하리라. 마땅히 알라 본각이 있음을 말미암는 연고로 본디 불각도 없으며 불각이 없는 연고로 마침내 시각도 없고 시각이 없는 연고로 본디 본각도 없지만 본각이 없음에 이르러선 근원(根源)에 본각이 있기 때문()이며 본각이 있다는 것은 시각이 있기 때문이며 시각이 있다는 것은 불각이 있기 때문이며 불각이 있다는 것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문(下文)에 이르되 본각의(本覺義)란 것은 시각의(始覺義)에 대해 설함이니 시각이란 것은 곧 본각과 한가지이기 때문()이며 시각의(始覺義)란 것은 본각에 의하는 연고로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하는 연고로 설해 시각이 있다 했다.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전전(展轉)히 상의(相依)하여 곧 제법이 비무(非無)이면서 비유(非有)며 비유면서 비무임을 나타낸다(). 묻되 이 본각성(本覺性)이 마땅히 염정(染淨)의 인성(因性)에 통함이 되는가, 마땅히 단지 이 모든 정법성(淨法性)이 되는가. 만약 말하되 단지 이 정법인(淨法因)이라면 무슨 연고로 경에 이르되 여래지장(如來之藏)은 이 선()과 불선(不善)의 인()이라 했는가 내지 광설(廣說)했다, 만약 염정(染淨)을 다() 짓는다면 무슨 연고로 오직 설하되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했다 하고 성염환(性染患)을 구족했다고 설하지 않는가. 답하되 이 도리가 모두() ()과 정()에 성품()을 지어 주는지라 이런 고로 오직 설하되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했다 했음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하면 이치가 정()을 여읜 성품이기 때문에 고로 능히 수연(隨緣)하며 모든 염법(染法)을 짓고 또 염()을 여읜 성품인지라 고로 능히 수연하며 모든 정법(淨法)을 짓는다. 능히 염정법(染淨法)을 짓기 때문에 고로 염정에 통하는 성품이며 염정을 여읜 성품이기 때문에() 고로 오직 이 성공덕(性功德) 뿐이다. 어찌(何以) 염정성(染淨性)을 여의고서 이에 모든 공덕 이룸을 얻으리오만 염정성에 취착(取著)함은 모두 이 망상인 연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