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론소기

기신론소기회본(起信論疏記會本) 32

태화당 2020. 9. 19. 11:59

此義云何 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 故能止後念令其不起 雖復名覺 卽是不覺故 如二乘觀智 初發意菩薩等 覺於念異 念無異相 以捨麤分別執著相故 名相似覺 如法身菩薩等 覺於念住 念無住相 以離分別麤念相故 名隨分覺 如菩薩地盡 滿足方便 一念相應 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是故脩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이 뜻이 무엇인가, 예컨대() 범부의 사람이 전념(前念)에 기악(起惡)한 줄 각지(覺知)하는지라 고로 능히 후념(後念)을 그쳐서 그로 하여금 일어나지 않게 하나니 비록 다시 이름이 각()이지만 곧 이 불각(不覺)인 연고다. 예컨대() 이승관지(二乘觀智)인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상념의 달라짐(念異)을 깨달음이니 상념은 이상(異相; 달라지는 상)이 없어서 추()한 분별의 집착상(執著相)을 여읜 연고로써 이름이 상사각(相似覺)이다. 예컨대 법신보살(法身菩薩) 등은 상념의 머묾(念住)을 깨달음이니 상념엔 주상(住相)이 없어서 분별하는 추()한 염상(念相)을 여읜 연고로써 이름이 수분각(隨分覺)이다. 예컨대() 보살지(菩薩地)가 다하면() 만족한 방편으로 일념에 상응하여 심()의 처음 일어남을 깨달으니 심()은 초상(初相)이 없어서 미세한 상념을 원리(遠離)한 연고로써 심성(心性)을 득견(得見)하여 심()만 곧 상주(常住)함을 이름해 구경각(究竟覺)이다. 이런 고로 수다라(脩多羅)에 설하되 만약 어떤 중생이 능히 무념(無念)을 관하는 자면 곧 불지(佛智)로 향함이 되는 연고라 했다.

 

次別解中 約四相說 此中先四相 然後消文 問 此中四相 爲當同時 爲是前後 此何所疑 若同時那 論說四相覺時差別 若前後那 下言四相俱時而有 或有說者 此依薩婆多宗四相 四體同時 四用前後 用前後故 覺時差別 體同時故 名俱時而有 或有說者 是依成實前後四相 而言俱時而有者 以本覺望四相 則無四相前後差別 故言俱時而有 皆無自立 或有說者 此是大乘祕密四相 覺四相時 前後淺深 所覺四相 俱時而有 是義云何 夫心性本來離生滅相 而有無明迷自心性 由違心性離於寂靜 故能生起動念四相 四相無明和合力故 能令心體生住異滅 如似小乘論議之中 心在未來未逕生滅 而由業力引於四相 能令心法生住異滅 大乘四相當知亦爾 如經言 卽此法身 爲諸煩惱之所漂動 往來生死 名爲衆生 此論下文云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 正謂此也 總說雖然 於中分別者 四相之內各有差別 謂生三 住四 異六 滅七 生相三者 一名業相 謂由無明不覺念動 雖有起滅 見相未分 猶如未來生相將至正用之時 二者轉相 謂依動念轉成能見 如未來生至正用時 三者現相 謂依能見現於境相 如未來生至現在時 無明與此三相和合 動一心體隨轉至現 猶如小乘未來藏心 隨其生相轉至現在 今大乘中如來藏心隨生至現 義亦如是 此三皆是阿棃耶識位所有差別 於中委悉 下文當說 是名甚深三種生相 住相四者 由此無明與生和合 迷所生心無我我所 故能生起四種住相 所謂我癡我見我愛我慢 如是四種依生相起能相心體 令至住位內緣而住 故名住相 此四皆在第七識位 異相六者 無明與彼住相和合 不覺所計我我所空 由是能起六種異相 所謂貪瞋癡慢疑見 如新論云 煩惱自性唯有六種 此之謂也 無明與此六種和合 能相住心令至異位外向攀緣 故名異相 此六在於生起識位 滅相七者 無明與此異相和合 不覺外塵違順性離 由此發起七種滅相 所謂身口七支惡業 如是惡業 能滅異心令墮惡趣 故名滅相 猶如小乘滅相 滅現在心 令入過去 大乘滅相當知亦爾 由是義故 四相生起 一心流轉 一切皆因根本無明 如經言無明住地其力最大 此論云當知無明力能生一切染法也 又所相之心 一心而來 能相之相 無明所起 所起之相 隨其所至 其用有差別 取塵別相 名爲數法 良由其根本無明違平等性故也 其所相心 隨所至處 每作總主 了塵通相 說名心王 由其本一心是諸法之總源故也 如中邊論云 唯塵智名心 差別名心法 長行釋云 若了塵通相名心 取塵別相名爲心法 瑜伽論中亦同是說 以是義故 諸外道等多於心王計爲宰主作者受者 由不能知其無自性隨緣流轉故也 總此四相名爲一念 約此一念四相 以明四位階降 欲明本依無明不覺之力 起生相等種種夢念 動其心源 轉至滅相 長眠三界 流轉六趣 今因本覺不思議熏 起厭樂心 漸向本源 始息滅相乃至生相 朗然大悟 覺了自心本無所動 今無所靜 本來平等 住一如牀 如經所說夢度河喩 此中應廣說大意如是 次消其文 約於四相以別四位 四位之中各有四義 一能覺人 二所覺相 三覺利益 四覺分齊 初位中言如凡夫人者 是能覺人 位在十信也 覺知前念起惡者 顯所覺相 未入十信之前 具起七支惡業 今入信位 能知七支實爲不善 故言覺知前念起惡 此明覺於滅相義也 能止後念令不起者 是覺利益 前由不覺 起七支惡念 今旣覺故 能止滅相也 言雖復名覺卽是不覺者 明覺分齊 雖知滅相實是不善 而猶未覺滅相是夢也 第二位中言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者 十解以上三賢菩薩 十解初心 名發心住 擧此初人 兼取後位 故言初發意菩薩等 是明能覺人也 覺於念異者 明所覺相 如前所說六種異相 分別內外計我我所 此三乘人了知無我 以之故言覺於念異 欲明所相心體無明所眠 夢於異相 起諸煩惱 而今漸與智慧相應 從異相夢而得微覺也 念無異相者 是覺利益 旣能覺於異相之夢 故彼六種異相永滅 以之故言念無異相也 捨麤分別執著相故名相似覺者 是覺分齊 分別違順起貪瞋等 是名麤分別執著相 雖捨如是麤執著想 而猶未得無分別覺 故名相似覺也 第三位中法身菩薩等者 初地以上十地菩薩 是能覺人也 覺於念住者 住相之中 雖不能計心外有塵 而執人法內緣而住 法身菩薩通達二空 欲明所相心體前覺異相 而猶眠於住相之夢 今與無分別智相應 從住相夢而得覺悟 故言覺於念住 是所覺相也 念無住相者 四種住相滅而不起 是覺利益也 以離分別麤念相者 人我執 名分別 簡前異相之麤分別 故不名麤 法我執 名爲麤念 異後生相之微細念 故名麤念 雖復已得無分別覺 而猶眠於生相之夢 故名隨分覺 是覺分齊也 第四位中如菩薩盡地者 謂無垢地 此是總擧 下之二句 別明二道 滿足方便者 是方便道 一念相應者 是無間道 如對法論云 究竟道者 謂金剛喩定 此有二種 謂方便道攝 無間道攝 是明能覺人也 覺心初起者 是明所覺相 心初起者 依無明有生相 迷心體令動念 今乃證知離本覺無不覺 卽動念是靜心 故言覺心初起 如迷方時謂東爲西 悟時乃知西卽是東 當知此中覺義亦爾也 心無初相者 是明覺利益 本由不覺 有心元起 今旣覺故 心無所起 故言心無初相 前三位中雖有所離 而其動念猶起未盡 故言念無住相等 今究竟位 動念都盡 唯一心在 故言心無初相也 遠離以下 明覺分齊 於中二句 初正明覺分齊 是故以下 引經證成 業相動念 念中最細 名微細念 此相都盡 永無所餘 故言遠離 遠離之時 正在佛地 前來三位 未至心源 生相未盡 心猶無常 今至此位 無明永盡 歸一心源 更無起動 故言得見心性 心卽常住 更無所進 名究竟覺 又復未至心源 夢念未盡 欲滅此動 望到彼岸 而今旣見心性 夢想都盡 覺知自心本無流轉 今無靜息 常自一心 住一如牀 故言得見心性 心卽常住 如是始覺不異本覺 由是道理名究竟覺 此是正明覺分齊

 

() 별해(別解) 4()을 괄약하여 설한다. 이 중에 먼저 4상을 밝히고 연후에 소문(消文)하리라. 묻되 이 중의 4상은 마땅히 동시가 되는가 이 전후가 되는가. 이것을 어찌 의심하는 바인가 하면 만약 동시라고 한다면 논에 4상의 깨닫는 때가 차별임을 설했고 만약 전후라면 아래(2)에 말하되 4상이 구시(俱時; 同時. 一時)에 있다 했다. 혹 어떤 설자(說者)는 이것은 살바다(薩婆多宗)4상에 의함이라서 4()는 동시(同時)4()은 전후(前後)니 용()이 전후인 연고로 깨닫는 때가 차별이며 체()가 동시인 연고로 이름이 구시(俱時)에 있음이다. 혹 어떤 설자(說者)는 이는 성실(成實; 成實宗)의 전후(前後) 4상에 의하여 구시에 있음이라고 말한 것이니 본각으로써 4상을 바라보면 곧 4상의 전후의 차별이 없는지라 고로 말하되 구시에 있음이라서 모두 자립(自立)함이 없다 했다. 혹 어떤 설자(說者)는 이것이 이 대승의 비밀 4상이니 4상을 깨달을 때의 전후는 천심(淺深)이나 소각(所覺)4상은 구시에 있음이라 하니 이 뜻이 무엇인가, 무릇 심성(心性)이 본래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었건마는 무명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미()함이 있나니 심성을 위배()함으로 말미암아 적정(寂靜)을 여의는지라 고로 동념(動念)4상을 능히 생기(生起)하고 4상과 무명이 힘을 화합하는 연고로 능히 심체로 하여금 생주이멸(生住異滅)하게 함이 흡사() 소승(小乘)의 논의 가운데 심()이 미래에 있더라도 생멸을 지남()이 아니건마는 업력이 4상을 당기어() 능히 심법(心法)으로 하여금 생주이멸케 한다 함과 같다. 대승의 4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러하다. 예컨대() 경에 말하되 곧 이 법신이 모든 번뇌의 표동(漂動)하는 바가 되어 생사에 왕래함을 이름하여 중생이라 한다 하며 이 논의 하문(下文)에 이르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풍(無明風)으로 인해 움직인다 했으니 바로 이를 일컬음()이다. 총설(總說)은 비록 그러하나 이 중에 분별하자면 4상의 안에 각기 차별이 있으니 이르자면 생()이 셋이며 주()가 넷이며 이()가 여섯이며 멸()이 일곱이다. 생상(生相)의 셋이란 것은 1은 이름이 업상(業相)이니 이르자면 무명으로 말미암아 불각에 상념이 움직이거니와 비록 기멸(起滅)이 있더라도 견()과 상()이 나뉘어지지 않음이니 마치 미래의 생상(生相)이 장차 정용(正用)의 시()에 이름과 같음이다. 2자는 전상(轉相)이니 이르자면 동념(動念)에 의해 굴러서() 능견(能見)을 이룸이니 마치 미래의 생()이 정용(正用)의 시()에 이름()과 같음이다. 3자는 현상(現相)이니 이르자면 능견(能見)에 의해 경상(境相)을 나타냄이니 미래의 생이 현재의 시()에 이름()과 같음이다. 무명이 이 3상과 더불어 화합하여 1심의 체를 움직여 구름()을 따라 현재에 이름()이 마치 소승(小乘)의 미래장심(未來藏心)이 그 생상(生相)을 따라 굴러 현재에 이름과 같이 여금의 대승 중의 여래장심이 생()을 따라 현재()에 이름도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이 셋은 모두 이 아리야식위(阿棃耶識位)에 있는 바의 차별이거니와 이 중에 위실(委悉; 細說. 詳盡)은 하문(下文)에서 마땅히 설하리라. 이 이름이 매우 깊은 3종의 생상(生相)이다. 주상(住相)의 넷이란 것은 이 무명이 생과 더불어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소생(所生)한 심의 아()와 아소(我所)가 없음을 미혹하는지라 고로 능히 4종 주상(住相)을 생기(生起)한다. 이른 바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이니 이와 같은 4종이 생상(生相)에 의해 능상(能相)의 심체를 일으켜 주위(住位)에 이르게 하며 내연(內緣)하여 주()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주상(住相)이다. 이 넷은 모두 제7식위(第七識位)에 있다. 이상(異相) 여섯이란 것은 무명이 저 주상(住相)과 더불어 화합하여 계탁(計度; )하는 바인 아()와 아소(我所)가 공했음을 깨닫지 못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능히 6종의 이상(異相)을 일으키나니 이른 바 탐()ㆍ진()ㆍ치()ㆍ만()ㆍ의()ㆍ견()이다. 예컨대() 신론(新論; 瑜伽論)에 이르되 번뇌의 자성이 오직 6종이 있다 하니 이것을 일컬음()이다. 무명이 이 6종과 더불어 화합하여 능상(能相)의 주심(住心)이 이위(異位)에 이르게 하여 밖으로 향해(外向) 반연(攀緣)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이상(異相)이다. 이 여섯은 생기식(生起識)의 위()에 있다. 멸상(滅相) 일곱이란 것은 무명이 이 이상(異相)과 더불어 화합하여 외진(外塵)성리(性離)를 위순(違順)함을 깨닫지 못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7종의 멸상(滅相)을 발기(發起)하나니 이른 바 신구(身口)의 칠지악업(七支惡業)이다. 이와 같은 악업이 능히 이심(異心)을 멸하고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멸상(滅相)이니 마치 소승의 멸상(滅相)이 현재심을 멸하여 과거에 들게 함과 같아서 대승의 멸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러하다. 이 뜻을 말미암는 연고로 4상의 생기(生起)1심의 유전(流轉)이 일체 다 근본무명을 인함이니 예컨대 경(보적경119)에 말하되 무명의 주지(住地)하는 그 힘이 최대라 하며 이 논에 이르되 마땅히 알라 무명의 힘이 능히 일체의 염법(染法)을 낸다 했다. 또 소상(所相)의 심은 1심에서 오지만 능상(能相)의 상은 무명이 일으키는 바라서 소기(所起)의 상은 그 이르는 바를 따라 그 용()에 차별이 있다. ()의 별상(別相)을 취함을 이름하여 수법(數法)이니 진실로() 그 근본무명이 평등성을 위배하기 때문()의 연고다. 그 소상(所相)의 심은 소지처(所至處)를 따라 매양 총주(總主)를 이루는지라 진()의 통상(通相)을 요득(了得)함을 설명(說名)하여 심왕(心王)이라 한다. 그 근본인 1심이 이 제법(諸法)의 총원(總源)이기 때문()의 연고다. 예컨대() 중변론(中邊論; 卷上)에 이르되 진지(塵智) 뿐임을 이름이 심이며 차별을 이름해 심법이다(唯塵智名心 差別名心法). 장행의 해석에 이르되 이에() ()의 통상(通相)을 요득(了得; )함을 이름해 심이며 진()의 별상(別相)을 취함을 이름하여 심법이다. 유가론 중에도 또한 이 설과 같다(). 이 뜻을 쓰는() 고로 여러 외도 등이 다분히 심왕을 재주(宰主)며 작자(作者)며 수자(受者)가 된다고 계탁(計度; )함은 그것이 자성이 없어서 수연(隨緣)하며 유전(流轉)하는 줄 능히 알지 못하기 때문()의 연고다. 4상을 총합(總合; )하여 1()이라 이름하거니와 이 14(一念四相)을 괄약하여 4()의 계강(階降)을 밝히는 까닭은 본디 무명불각(無明不覺)의 힘에 의해 생상(生相) 등의 갖가지 몽념(夢念)을 일으켜 그 심원(心源)을 움직여 굴러 멸상(滅相)에 이르기까지 3()에 장면(長眠)하며 6()로 유전(流轉)하다가 여금에 본각부사의(本覺不思議)의 훈()으로 인해 염요심(厭樂心)을 일으켜 점차 본원(本源)을 향하므로 비로소 멸상(滅相) 내지 생상(生相)을 쉬고() 낭연(朗然)히 대오하고서야 자심이 본디 움직이는 바가 없으며 이제에도 고요하는 바가 없어서 본래 평등임을 각료(覺了)하여 일여(一如)의 상()에 머묾을 밝히고자 함이니 경에 설한 바 꿈에 강을 건너는 비유와 같아서 이 중에 응당 광설한 대의(大意)도 이와 같다. ()는 그 글을 소석(消釋; )함이다. 4상을 별사위(別四位)로써 묶는다면() 4()의 중간에 각기 4()가 있다. 1은 능각인(能覺人)이며 2는 소각상(所覺相)이며 3은 각의 이익(覺利益)이며 4는 각()분제(分齊). 초위(初位) 중에 말한 예컨대() 범부의 사람이란 것은 이 능각인(能覺人)이니 위()10()에 있다. 전념(前念)에 기악(起惡)한 줄 각지(覺知)한다는 것은 소각상(所覺相)을 밝힘이니() 10신에 들지 못한 전에 칠지악업(七支惡業)을 갖추어 일으켰다가 이에 신위(信位)에 들어 7()가 실로 불선(不善)이 됨을 능히 안지라 고로 말하되 전념에 기악한 줄 각지(覺知)한다 했음이니 이것은 멸상(滅相)을 깨닫는 뜻을 밝힘이다. 능히 후념(後念)을 그쳐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이는 각의 이익이니 전에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칠지악념(七支惡念)을 일으켰다가 이제 이미 깨달은 연고로 능히 멸상(滅相)을 그침()이다. 말한 비록 다시 이름이 각()이지만 곧 이 불각(不覺)이란 것은 각의 분제(分齊)를 밝힘이다. 비록 멸상이 이 실로 이 불선(不善)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멸상이 이 꿈인 줄은 깨치지 못했음이다. 2위 중에 말한 예컨대() 이승관지(二乘觀智)인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이란 것은 10(十解; 十住) 이상 삼현보살(三賢菩薩)이니 10해의 초심을 이름해 발심주(發心住)이거니와 이 초인(初人)을 들고 겸하여 후위(後位)를 취한지라 고로 말하되 초발의보살 등이라 했음이니 이는 능각인(能覺人)을 밝혔음이다. 상념의 달라짐(念異)을 깨달음이란 것은 소각상(所覺相)을 밝혔음이니 앞에서 설한 바 6종 이상(異相)으로 안팎을 분별하여 아()와 아소(我所)를 계탁(計度)하거니와 이 3()의 사람은 무아임을 요지(了知)한지라 이런 연고로써(以之故) 말하되 염이(念異; 상념의 달라짐)를 깨닫는다 했음이니 소상(所相)의 심체가 무명으로 잠든 바라 이상(異相)을 꿈꾸어 모든 번뇌를 일으켰다가 이금(而今)에 점차 지혜로 더불어 상응하여 이상(異相)의 꿈으로 좇아 미각(微覺)을 얻음임을 밝히고자 함이다. 상념은 이상(異相)이 없다는 것은 이는 각의 이익이다. 이미 능히 이상(異相)의 꿈을 능각(能覺)했으므로 고로 그 6종의 이상이 영멸(永滅)한지라 이런 연고로써(以之故) 말하되 상념은 이상이 없다 했다. ()한 분별의 집착상(執著相)을 버린 연고로 이름이 상사각(相似覺)이란 것은 이는 각의 분제(覺分齊)니 위순(違順)을 분별해 탐진(貪瞋) 등을 일으키면 이 이름이 추()한 분별의 집착상(執著相)이거니와 비록 이와 같은 추한 집착상(執著想)을 버렸더라도 오히려 분별 없는 각을 얻지 못한지라 고로 이름이 상사각(相似覺)이다. 3위 중 법신보살 등이란 것은 초지(初地) 이상 10() 보살이니 이는 능각인(能覺人)이다. 상념의 머묾()을 깨닫는다는 것은 주상(住相)의 가운데 비록 능히 마음 밖에 진()이 있음은 계탁(計度)하지 않으나 인()과 법()을 집착해 내연(內緣)하여 머물거니와() 법신보살은 2(二空; 人空法空)을 통달했음이니 소상(所相)의 심체(心體)가 앞에선 이상(異相)을 깨달았으나 오히려 주상(住相)의 꿈에 잠자므로 여금에 무분별지(無分別智)와 더불어 상응하여 주상몽(住相夢)으로 좇아 각오(覺悟)를 얻음을 밝히고자 한지라 고로 말하되 상념의 머묾을 깨닫는다(覺於念住) 했음이니 이는 소각상(所覺相)이다. 상념에 주상(住相)이 없다는 것은 4종 주상이 없어져() 일어나지 않음이니 이는 각의 이익(覺利益)이다. 분별하는 추()한 염상(念相)을 여읜 까닭()이란 것은 인아집(人我執)을 이름해 분별이니 앞 이상(異相)의 추()한 분별과는 간별(簡別; )함인지라 고로 추()라고 이름하지 않음이며 법아집(法我執)을 이름하여 추념(麤念)이니 뒤의 생상(生相)의 미세한 상념과는 다른지라 고로 이름이 추념(麤念)이다. 비록 이미 무분별각(無分別覺)을 얻었으나 오히려 생상(生相)의 꿈에 잠든지라 고로 이름이 수분각(隨分覺)이니 이는 각의 분제(分齊). 4위 중 예컨대() 보살지(菩薩地)가 다하면() 이란 것은 이르자면 무구지(無垢地)니 이것은 이 총거(總擧)며 아래의 2구는 2()를 따로 밝힘이다. 만족한 방편이란 것은 이 방편도(方便道)며 일념에 상응한다는 것은 이 무간도(無間道). 예컨대() 대법론(對法論; 10)에 이르되 구경도(究竟道)란 것은 이르자면 금강유정(金剛喩定)이니 여기에 2종이 있으니 이르자면 방편도섭(方便道攝)과 무간도섭(無間道攝)이다. 이는 능각인(能覺人)을 밝혔음이다. ()의 처음 일어남을 깨닫는다는(覺心初起) 것은 이는 소각상(所覺相)을 밝힘이다. 심의 처음 일어남이란 것은 무명에 의해 생상(生相)이 있어서 심체를 미()하여 상념을 움직이게 했다가 여금에 곧() 본각을 여의고서는 불각(不覺)도 없으므로 곧 동념(動念)이 이 정심(靜心)임을 증지(證知)한지라 고로 말하되 마음의 처음 일어남을 깨닫는다 하였다. 예컨대() 방위를 미()했을 때는 동()을 일러 서(西)라 하였다가 깨달았을 때엔 이에 서가 곧 이 동임을 아나니 마땅히 알라 이 중의 각의(覺義)도 또한 그러하다. ()은 초상(初相)이 없다는 것은 이는 각의 이익을 밝혔음이니 본래 불각(不覺)으로 말미암아 심()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가 여금에 깨달은 고로 심이 일어나는 바가 없는지라 고로 말하되 심은 초상(初相)이 없다 하였다. 앞의 3위 중엔 비로 여읜() 바가 있어도 그 동념(動念)이 오히려 일어나 다하지() 못한지라 고로 상념엔 주상(住相)이 없다는 등을 말했지만 여금의 구경위(究竟位)는 동념(動念)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1심만 있는지라 고로 말하되 심()엔 초상(初相)이 없다 하였다. 원리(遠離) 이하는 각의 분제를 밝혔다. 이 중에 2구니 초()는 바로 각의 분제를 밝힘이며 이런 고로(是故) 이하는 경을 인용해 증명을 이룸이다. 업상(業相)의 동념(動念)은 상념 중에 가장 미세()하나니 이름이 미세념(微細念)이거니와 이 상()도 모두 없어져 영원히 남는 바 없는지라 고로 말하되 원리(遠離)라 했고 원리할 때 바로 불지(佛地)에 있음이다. 전래(前來)3위는 심원(心源)에 이르지 못해 생상(生相)이 미진(未盡)하고 심이 오히려 무상(無常)이었다가 지금 이 위()에 이르러선 무명이 영원히 없어지고 1심의 근원으로 귀환()하여 다시는 기동(起動)이 없는지라 고로 말하되 심성(心性)을 득견(得見)하여 심만 곧 상주(常住)한다 했으며 다시는 나아갈 바가 없으므로 이름이 구경각이라 했다. 또 다시 심원에 이르지 아니하여선 몽념(夢念)이 미진(未盡)하므로 이 동()을 없애고 도피안(到彼岸)을 바라보고자 했다가 이금(而今)에 이미 심성을 보아 몽상(夢想)이 모두() 없어지고 자심(自心)이 본디 유전(流轉)함이 없었고 여금에도 정식(靜息)이 없으며 늘 스스로 1심만 일여(一如)의 상()에 거주함을 각지(覺知)한지라 고로 말하되 심성((心性))을 득견하여 심()만 곧 상주(常住)한다 했다. 이와 같이 시각(始覺)이 본각과 다르지 않나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이름이 구경각이다. 이것은 이, 바로 각의 분제를 밝혔음이다.

 

법신보살(法身菩薩); 또 이르되 법신대사(法身大士)1분의 무명을 끊고 1분의 법성을 환하게 나타내는 보살임.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이 이것임. 만약 태가(台家)4교의 위차에 의하자면 곧 초주(初住) 이상이라야 비로소 이름이 법신보살임.

; 저본에 로 지어졌음. 기신론소상(起信論疏上)에 의해 교정했음.

살바다(薩婆多); <> Sarvāśti-vāda. 5부율의 하나니 곧 살바다부. 마하승기율40에 이르되 살바다란 것은 진()나라 말로 설일체유(說一切有)니 이름이 일체유인 소이는 위로부터의 제부(諸部)의 의종(義宗)이 각기 다르다. 살바다란 것은 말하자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중음(中陰)에 각자 성()이 있는지라 고로 이름이 일체유다.

성실(成實); 성실종(成實宗)이니 곧 성실론을 소의(所依)로 삼는 종파.

생기식(生起識); 기신론소필삭기회열6(起信論疏筆削記會閱六) 생기식이란 것은 이르자면 이것은 의()의 식이니 이는 전제오(前第五) 상속식의 소생인지라 고로 이름이 생기식이다(生起識者 謂此意之識 是前第五相續識之所生 故名生起識也).

성리(性離); 일체법의 차별의 상()을 여읨임(離一切法差別之相也) [彌陀經疏鈔演義定本三].

신구(身口)의 칠지악업(七支惡業); 신체로 짓는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과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ㆍ기어(綺語)ㆍ악구(惡口)ㆍ양설(兩舌)7.

중변론(中邊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을 가리킴. 2. 천친보살이 조()했고 진() 천축삼장 진제(眞諦)가 역()했음. 대정장 제31책에 수록되어 있음.

소석(消釋); 경문의 어려운 뜻을 소제(消除)하고 의리(義理)의 온결(蘊結)을 해석함.

분제(分齊); 한계. 차별. 또 차별되는 바가 있는 내용ㆍ범위ㆍ정도를(程度) 가리킴. 혹 정도를 갖추고 있는 차별의 계위(階位)나 신분 등을 가리킴. 후세에 다분히 분제(分際) 1()와 혼동함.

10(); 화엄경담현결택3(華嚴經談玄決擇三); 10() 1. 신심(信心) 부처가 상주하며 대승교법의 귀종(歸宗)이 둘이 아니라서 결정코 걸림이 없음을 믿음이다(信佛常住 大乘敎法 歸宗不二 決定無礙). 2. 염심(念心) 6념처를 억념함이다(於六念處憶念). 3. 정진심(精進心) 상념과 같이 행하고 지관을 부지런히 닦음이다(如念而行 勤修止觀). 4. 혜심(慧心) 인과 법 2종 무아를 쌍으로 관함이다(雙觀人法二種無我). 5. 정심(定心) 해공(解空)은 처()가 고요함이며 지심(止心)은 이()가 고요함이다(解空處寂 止心理靜). 6. 불퇴심(不退心) 지관을 쌍으로 융통하여 마음이 퇴몰(退沒)하지 않음이다(止觀雙融 心不退沒). 7. 회향심(迴向心) 평등을 잘 알아 사()에 회향함이다(善會平等 迴向於捨). 8. 호법심(護法心) 해리(解理)가 견고하고 수지하며 파괴하지 않음이다(解理堅固 受持不壞). 9. 계심(戒心) 몸과 마음을 잘 보호하여 3업이 가지런히 청정함이다(善護身心 三業齊淸). 10. 원심(願心) 3업의 선근(善根)으로써 보리를 바로 구함이다(以三業善 正求菩提).

十住; 또 십주지(十地住)로 지음. 보살의 수행의 과정을 52계위(階位)로 구분하는데 그 중 제11에서 제20 계위에 이르기까지는 주위(住位)에 속하며 일컬어 10주라 함. 초발심주ㆍ치지주(治地住)ㆍ수행주ㆍ생귀주(生貴住)ㆍ방편구족주ㆍ정심주(正心住)ㆍ불퇴주(不退住)ㆍ동진주(童眞住)ㆍ법왕자주ㆍ관정주(灌頂住)[舊華嚴經八 菩薩本業經十地品 大乘義章十四].

삼현(三賢); 선근을 닦아 번뇌를 제복(制伏)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게 하는 3종의 수행계위(修行階位)를 가리킴. 가히 소승의 오정심(五停心)ㆍ별상념주(別相念住)ㆍ총상념주(總相念住)와 대승의 10()10()10회향(回向) 3위로 분류함 [四敎義五 菩薩瓔珞本業經疏下 華嚴經探玄記五 華嚴五敎章三].

발심주(發心住); 화엄경담현결택3(華嚴經談玄決擇三) 1. 발심주(發心住) 불타의 승연(勝緣)과 불타의 10력을 관하여 보리심을 발함이니 3종 발심에 곧 신성취발심이다(觀佛勝緣佛十力 發菩提心 三種發心 卽信成就發心; 三種發心1. 信成就發心 2. 解行發心 3. 證發心).

10(); 가로되 십주(十住)니 갖가지라 일치하지 않음. 1은 환희지며 2는 이구지며 3은 발광지며 4는 염혜지며 5는 난승지며 6은 현전지며 7은 원행지며 8은 부동지며 9는 선혜지며 10은 법운지임(或曰十住 種種不一 一歡喜地 二離垢地 三發光地 四焰慧地 五難勝地 六現前地 七遠行地 八不動地 九善慧地 十法雲地) [三藏法數].

법아집(法我執); 법집(法執)과 같음. 2집의 하나. 아집의 대칭. 마음 밖에 유위무위의 실법이 있다고 고집하는 망념임. 2()의 사람이 비록 아집을 끊더라도 능히 이 법집을 끊지 못함. 대승의 보살은 곧 점차 이를 끊음.

무구지(無垢地); 천태사교의과해하(天台四敎儀科解下) 등각위(等覺位)는 또한 이름이 무구지(無垢地). 십지의 지해(知解)를 초과하여 백천(百千) 삼매에 들어가 일상(一相)인 무상(無相)을 비춰 적멸하여 무위이다. 묘각을 바라보면 오히려 한 등급이 있지만 아래에 비하면 이름이 각인지라 고로 이름이 등각이다. 다시 1()의 무명의 진구(塵垢)가 있지만 비록 있어도 없음과 같은지라 고로 이름이 무구(無垢)이다. 닦는 바 관지(觀智)가 순일하고 견리(堅利)하여 비유컨대 금강과 같으므로 이름이 금강심(金剛心)이다. 1()이 있어서 그것을 전부 손감(損減)하지 못했으므로 이름하여 일생(一生)이다. 이를 지난 후에 곧 과불(果佛)인 묘각의 처소에 보()하므로 이름해 보처(補處). 다시 묘각의 상위(上位)가 있어 가히 오르므로 이름이 유상사(有上士).

대법론(對法論);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이니 16. 안혜보살(安慧菩薩)이 유(; 섞다)하고 당 현장(玄奘)이 번역했음. 대정장 제31책에 수록되었음. 또 명칭이 아비달마잡집론ㆍ잡집론ㆍ대법론임. 곧 문구를 따라 무착보살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을 주석하여 이루었음. 본서는 원래 이 무착(無著)의 제자 각사자(覺師子)가 지은 것인데 안혜가 합유(合糅; 합쳐 섞음)를 가하고 집론하여 이루었음. 법상종(法相宗)에서 의지하고 쓰는 바의 중요한 논전(論典)의 하나가 됨.

금강유정(金剛喩定); 금강과 같이 일반으로 견리(堅利; 견고하고 예리함)한 정()을 가리킴. 또 금강삼매ㆍ금강멸정(金剛滅定)으로 지음. 그 체가 견고하고 그 용이 예리하여 일체의 번뇌를 최훼(摧毁)하는지라 고로 능히 모든 물건을 파쇄하는 금강으로써 이에 비유함. 이것은 곧 3() 학인의 말후심이며 또한 곧 소승성문이나 혹 대승보살이, 수행에서 곧 거의 완성의 계단에 최후의 번뇌를 단제(斷除)하려 하면서 일으키는 바의 정임. 이 정을 생기(生起)하면 가히 극미세의 번뇌를 단제(斷除)하여 각기 그 극과(極果)를 얻음. 성문의 최고 오경(悟境)에선 아라한과에 가히 도달하고 보살에선 곧 불과를 얻음 [大毘婆沙論二十八 大智度論四十七 俱舍論二十四 成唯識論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