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因滅下 次顯滅義 於中有二 一者直明 問曰以下 往復除疑 始中言若因滅則緣滅者 隨於何位得對治時 無明因滅境界隨滅也 因滅故不相應心滅者 三種不相應心親依無明因生 故無明滅時亦隨滅也 緣滅故相應心滅者 三種相應染心親依境界緣起 故境界滅時亦隨滅也 依是始終起盡道理 以明二種生滅之義 非約刹那生滅義也 此下第二往復除疑 先問 後答 問中言若心滅者云何相續者 對外道說而作是問 如十卷經云 若阿棃耶識滅者 不異外道斷見戲論 諸外道說 離諸境界 相續識滅 相續識滅已 卽滅諸識 大慧 若相續識滅者 無始世來諸識應滅 此意正明諸外道說 如生無想天 入無想定時 離諸境界 相續識滅 根本滅故 末亦隨滅也 如來破云 若彼衆生入無想時 衆生之本相續識滅者 六七識等種子隨滅 不應從彼還起諸識 而從彼出還起諸識 當知入無想時 其相續識不滅 如是破也 今此論中依此而問 若入無想定滅盡定時 心體滅者 云何還續 故言若心滅者云何相續也 若入彼時心體不滅還相續者 此相續相何由永滅 故言云何說究竟滅也 答中有三 謂法喩合 初法中所言滅者 如入無想等時 說諸識滅者 但滅麤識之相 非滅阿棃耶心體 故言唯心相滅 又復上說因滅故不相應心滅者 但說心中業相等滅 非謂自相心體滅也 喩中別顯此二滅義 如風依水而有動相者 喩無明風依心而動也 若水滅者則風斷絶無所依止 以水不滅風相相續者 喩於入無想等之時 心體不滅 故諸識相續也 是答初問也 唯風滅故動相隨滅者 到佛地時無明永滅 故業相等動亦隨滅盡 而其自相心體不滅 故言非是水滅也 是答後問明究竟滅 合中次第合前二義 非心智滅者 神解之性名爲心智 如上文云智性不壞 是明自相不滅義也 餘文可知 問 此識自相 爲當一向染緣所起 爲當亦有不從緣義 若是一向染緣所起 染法盡時自相應滅 如其自相不從染緣故不滅者 則自然有 又若使自相亦滅同斷見者 是則自相不滅還同常見 答 或有說者 棃耶心體是異熟法 但爲業惑之所辨生 是故業惑盡時 本識都盡 然於佛果 亦有福慧二行所感大圓鏡智相應淨識 而於二處心義是同 以是義說心至佛果耳 或有說者 自相心體 擧體爲彼無明所起 而是動靜令起 非謂辨無令有 是故此心之動 因無明起 名爲業相 此動之心 本自爲心 亦爲自相 自相義門不由無明 然卽此無明所動之心 亦有自類相生之義 故無自然之過 而有不滅之義 無明盡時動相隨滅 心隨始覺還歸本源 或有說者 二師所說皆有道理 皆依聖典之所說故 初師所說得瑜伽意(別記云 依顯了門) 後師義者得起信意(別記云 依隱密門) 而亦不可如言取義 所以然者 若如初說而取義者 卽是法我執 若如後說而取義者 是謂人我見 又若執初義 墮於斷見 執後義者 卽墮常見 當知二義皆不可說 雖不可說而亦可說 以雖非然而非不然故
만약 인(因)이 멸하면(若因滅) 아래는 차(次) 멸(滅)의 뜻을 밝힘이댜(顯). 이 중에 둘이 있나니 1자는 직명(直明)이며 물어 가로되(問曰) 이하는 왕복하며 제의(除疑)함이다. 시중(始中; 처음 중)에 말한 만약 인(因)이 멸하면 곧 연(緣)도 멸한다는 것은 어떤 위(何位)를 따르거나 대치(對治)를 얻을 때엔 무명의 인(因)이 멸하매 경계도 따라 멸함이다. 인이 멸하는 고로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한다는 것은 3종의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무명의 인(因)을 친히 의지하여 생하는지라 고로 무명이 멸할 때 또한 따라서 멸한다. 연(緣)이 멸하는 고로 상응심이 멸한다는 것은 3종의 상응염심(相應染心)이 경계인 연(緣)을 친히 의지하여 일어나는지라 고로 경계가 멸할 때 또한 따라서 멸한다. 이 시(始)와 종(終)의 일어나고(起) 다하는(盡) 도리에 의해 2종 생멸의 뜻을 밝히는 데 썼고(以) 찰나생멸의 뜻을 괄약함이 아니다. 이 아래는 제2 왕복하며 제의(除疑)함이니 선(先)은 문(問)이며 후(後)는 답(答)이다. 문중(問中)에 말한 만약 심(心)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는가 한 것은 외도의 설에 대해 이 물음을 지었다. 예컨대 십권경(十卷經; 권2)에 이르되 만약 아리야식이 멸한다면 외도의 단견희론(斷見戲論)과 다르지 않다. 여러 외도가 설하기를 모든 경계를 여의면 상속식도 멸하며 상속식이 멸한 다음 곧 모든 식도 멸한다. 대혜(大慧)여 만약 상속식이 멸한다면 무시세래(無始世來)의 모든 식도 응당 멸하리라 하였다. 이 뜻은 바로(正) 여러 외도가 설하기를 예컨대(如)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서 무상정(無想定)에 들 때 모든 경계를 여의므로 상속식도 멸하나니 근본이 멸하는 고로 말(末)도 또한 따라서 멸한다 함을 밝힘이다. 여래가 깨뜨려(破) 이르되 만약 저 중생이 무상(無想)에 들 때에 중생의 근본(本)인 상속식도 멸한다면 육칠식(六七識) 등의 종자(種子)도 따라서 멸하리니 응당 저(彼; 無想)로 좇아 모든 식을 환기(還起)하지 못해야 하거늘 저로 좇아 나와서 모든 식을 환기하나니 마땅히 알라 무상에 들 때에도 그 상속식은 멸하지 않는다 하여 이와 같이 깨뜨렸다. 여금에 이 논중에서 이에 의해 묻되 만약 무상정(無想定)이나 멸진정(滅盡定)에 들 때 심체(心體)가 멸한다면 어떻게 도리어 상속하는가(還續) 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심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는가 했다. 만약 저에 들 때 심체(心體)가 멸하지 않고 도리어 상속한다면 이 상속상(相續相)이 무슨 까닭(由)으로 영멸(永滅)하는가 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어떻게 구경의 멸을 설하겠는가 하였다. 답중에 셋이 있으니 이르자면 법(法)ㆍ유(喩)ㆍ합(合)이다. 초(初) 법중(法中)에 말한 바 멸이란 것은 예컨대(如) 무상(無想) 등에 들 때 모든 식이 멸한다고 설한 것은 단지 추식지상(麤識之相)을 멸함이며 아리야의 심체(心體)를 멸함이 아닌지라 고로 말하되 오직 심상(心相)이 멸함이라 했다. 또(又) 다시 위에서 설한 인(因)이 멸하는 고로 불상응심이 멸한다는 것은 단지 심중의 업상(業相) 등이 멸함을 설함이며 자상(自相)인 심체(心體)마저 멸한다고 일컬음이 아니다. 유중(喩中)에 이 2멸(滅)의 뜻을 따로 밝혔다(顯). 예컨대(如) 바람이 물에 의해 동상(動相)이 있다는 것은 무명풍이 심(心)에 의해 동(動)함을 비유함이다(喩). 만약 물이 멸한다면 곧 풍상(風相)이 단절되어 의지(依止)할 바가 없겠지만 물은 멸하지 않기 때문에 풍상(風相)도 상속한다는 것은 무상(無想) 등에 들 때 심체는 멸하지 않는지라 고로 모든 식이 상속함에 비유함이니 이는 초문(初問)에 답함이다. 오직 바람만 멸하는 고로 동상(動相)이 따라서 멸한다는 것은 불지(佛地)에 이를 때 무명이 영멸(永滅)하는지라 고로 업상(業相) 등의 동(動)도 또한 따라서 멸진(滅盡)하지만 그 자상(自相)인 심체(心體)는 불멸하는지라 고로 말하되 이 물이 멸함이 아니다 했으니 이는 후문(後問)에 답하여 구경의 멸을 밝혔다. 합중(合中)에 차제(次第)로 앞의 2의(義)를 합함이니 심지(心智)가 멸함이 아니라는 것은 신해지성(神解之性)을 이름하여 심지(心智)다. 예컨대(如) 상문(上文)에 이르되 지성(智性)은 파괴되지 않는다 했는데 이는 자상(自相)이 불멸하는 뜻을 밝힘이다. 여문(餘文)은 가히 알 것이다. 묻되 이 식의 자상(自相)은 마땅히 일향(一向) 염연(染緣)이 일으키는 바가 되는가, 마땅히 또한 연(緣; 染緣)을 좇지 않음의 뜻도 되는가. 만약 이 일향 염연이 일으키는 바라면 염법(染法)이 다할 때 자상(自相)도 응당 멸하며 예컨대(如) 그 자상이 염연(染緣)을 좇지 않는 고로 불멸한다 하면 곧 자연히 있으리라. 또 만약 자상으로 하여금(使) 또한 멸하여 단견(斷見)과 같게 한다면 이는 곧 자상이 불멸하여 도리어 상견(常見)과 같으리라. 답하되 혹 어떤 설자(說者)는 리야(棃耶)의 심체(心體)는 이 이숙법(異熟法)이라서 단지 업혹(業惑)의 분변하는 바로 생함이 되나니 이런 고로 업혹이 다할 때 본식(本識)도 모두 다한다. 그러나 불과(佛果)에 또한 복혜(福慧) 2행(行)으로 감응하는 바(所感)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상응정식(相應淨識)이 있어 두 곳에서 심의(心義)가 이 같나니(同) 이 뜻을 써서(以) 설하되 심(心)이 불과(佛果)에 이른다 했을 뿐이다. 혹 어떤 설자(說者)는 자상(自相)의 심체는 거체(擧體; 전체)가 저 무명이 일으키는 바가 되나니 이는 정(靜)을 동(動)하여 일어나게 함이며 무(無)를 분변해 유(有)가 되게 함을 이름(謂)이 아니니 이런 고로 이 심(心)의 동(動)은 무명으로 인해 일어남을 이름하여 업상(業相)이며 이 동(動)의 심(心)은 본래 스스로 심(心)이 되며 또한 자상(自相)이 되므로 자상의 의문(義門)은 무명을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나 곧 이 무명이 동(動)한 바의 심(心)도 또한 자류상생(自類相生)의 뜻이 있는지라 고로 자연(自然)의 허물이 없고 불멸의 뜻이 있다. 무명이 다할 때 동상(動相)도 따라 멸하지만 심(心)은 시각(始覺)을 따라 본원(本源)에 환귀(還歸)한다. 혹 어떤 설자(說者)는 2사(師)의 설한 바가 모두 도리가 있음은 모두 성전(聖典)의 소설(所說)에 의한 연고다. 초사(初師)의 소설(所說)은 유가(瑜伽)의 뜻을 얻었고(별기에 이르되 顯了門에 의했다) 후사(後師)의 뜻은 기신(起信)의 뜻을 얻었으되(별기에 이르되 隱密門에 의했다) 또한 언설(言)과 같이 뜻을 취함은 옳지 못하다(不可). 소이가 그러한 것은 만약 초설(初說)과 같이 뜻을 취한다면 곧 이는 법아집(法我執)이며 만약 후설(後說)과 같이 뜻을 취한다면 이를 인아견(人我見)이라 이른다(謂). 또 만약 초의(初義)에 집착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지고 후의(後義)에 집착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진다. 마땅히 알라 두 뜻은 모두 가히 옳지 못한 설(不可說)이다. 비록 옳지 못한 설이지만 또한 옳은 설이니 비록 그러하지는 않지만 그러하지 않음도 아니기 때문의 연고다.
廣釋生滅門內有二分中 初正廣釋竟在於前
생멸문(生滅門)을 광석(廣釋)한 내에 2분(分)이 있는 중 초(初) 바로 광석(廣釋)함은 마침이 앞에 있다(竟在於前).
● 感; 저본에 惑으로 지어졌음. 타본을 참고하여 고쳤음.
●무상천(無想天); 무상유정(無想有情)의 천처(天處)임. 유부(有部)와 경부(經部)는 제4선(禪)의 광과천(廣果天)에 거두고 다른 곳을 세우지 않았으며 상좌부(上座部)는 광과천 위에 무상천의 1처를 세웠음. △구사론5(俱舍論五). 무상유정(無想有情)은 어느 곳에 거주해 있는가 하면 광과(廣果)에 거주해 있다. 광과천 중에 높고 수승한 곳이 있으며 중간의 정려(靜慮) 같은 것을 이름해 무상천이다.
●무상정(無想定); 외도가 무상천과(無想天果)를 얻고자 하여 닦는, 일체의 심상(心想)을 없애는 선정(禪定)임. 유부종(有部宗)에서 설하되 여러 외도 등이 이르기를 무상천의 과보가 진실한 열반이 되며 그 과보를 구하기 위해 무상정을 배우고 닦아 심상(心想)을 없앤다. 제4선정에 의해 모든 심법을 없애 이금(而今)에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곧 심상을 없앤 다음 곧 일종의 비색비심(非色非心)의 법을 얻어 심처(心處)를 보령(補領; 돕고 거느리다)한다. 이것을 가로되 무상정이다. 성실종 중에선 이 뜻을 두지 않음. 이르기를 범부는 능히 심법을 없애지 못하고 단지 입정(入定)의 마음이 적정하고 미세하여 깨닫기 어려우므로 고로 이르되 무상(無想)이며 전부 무상이 되지는 않는다. △구사론5(俱舍論五). 별법(別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心所)를 없게 하나니 이름이 무상정(無想定)이다. 무상이란 것은 정(定)의 이름이 무상정이며 혹 정(定)이 무상(無想)인지라 이름이 무상정이다.
●멸진정(滅盡定); 또 멸수상정(滅受想定)ㆍ멸진삼매(滅盡三昧)로 지음.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의 하나. 곧 심(心)ㆍ심소(心所; 心의 작용)를 멸진하여 무심위(無心位)에 거주하는 정(定). 무상정(無想定)과 병칭하여 2무심정(無心定)이라 함. 그러나 무상정은 이생범부(異生凡夫)가 얻는 바가 되며 이 정은 곧 불타 및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 정장(定障)을 멀리 여의고 얻는 것이 됨. 곧 현법열반(現法涅槃)의 승해력(勝解力)으로 닦아 들어가는 것임. 성자가 무소유처의 번뇌를 멀리 여의나니 그 정의 경지는 가히 무여열반의 적정(寂靜)에 비유하는지라 고로 무심적정(無心寂靜)의 낙에 들어가는 자가 되어야 이에 이 정에 의지하고 닦아서 곧 가히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태어남. 여러 종파에서 이 정에 대해 각종 이설이 있음. 예컨대(如)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이 정에 따로 실체가 있다 함. 다만 경량부(經量部)와 유식종 등에선 그 실법(實法)됨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심(心)ㆍ심소(心所)의 전(轉)하지 않는 바의 분위(分位)에서 이 정을 가립(假立)했다 함. 유식종은 또 이 정중(定中)에 있어선 아뢰야식을 단멸하지 못했음으로 삼음. 분별론자(分別論者)는 곧 이르기를 이 정에 든 성자는 그 상(想)과 수(受)가 이미 멸했지만 그러나 그대로 세심(細心)은 멸하지 않음이 있다 함 [中阿含經五十八 品類足論一 大毘婆沙論一五二].
●숙(異熟); 곧 과거의 선악에 의해 얻는 과보의 총칭. 대개 이르자면 과(果)가 인(因)과 다르게(異) 성숙함임.
●인아견(人我見); 2아견의 하나. 일체 범부가 인신(人身)이 곧 5온(蘊)의 가화합(假和合)임을 깨닫지 못하고 주재(主宰)를 강립(强立)하여 헤아리되 아(我)가 인(人)이 된다 하나니 곧 인(人)에 상일(常一)한 아체(我體)가 있다고 집착하는 악견(惡見)을 일컬어 인아견이라 함.
●단견(斷見); 유정(有情)의 몸과 마음은 일기(一期)에 한정하며 단절된다고 보면 이를 일러 단견이라 하고 이와 반대로 몸과 마음이 모두 상주하여 불멸한다고 보면 이를 일러 상견(常見)이라 함. △열반경27. 중생이 지견을 일으킴에 무릇 2종이 있다. 1자는 상견(常見)이며 2자는 단견(斷見)이다. 이와 같은 2견은 중도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상(常)도 없고 단(斷)도 없어야 곧 이름이 중도다.
●상견(常見); 단견(斷見)의 대칭. 사람의 몸과 마음이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모두 늘 상주하여 간단(間斷)함이 없다고 고집하는 망견(妄見)이니 곧 유견(有見)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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