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사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61

태화당 2020. 10. 12. 07:33

阿僧祇; <> asaṃkhya. 인도 수목(數目)의 하나. 무량수(無量數) 혹 극대수(極大數)의 뜻. 또 아승가(阿僧伽)ㆍ아승기야(阿僧企耶)ㆍ아승(阿僧)ㆍ승기(僧祗)로 지음. 화언(華言)으론 불가산계(不可算計) 혹 무량수(無量數)ㆍ무앙수(無央數). 인도 60종 수목단위(數目單位) 중 아승기는 제52수가 됨 [新華嚴經四十五阿僧祇品 俱舍論十二分別世間品 大智度論四]. 지도론51. 승기(僧祇) ()나라 말로 수()며 아()는 진나라 말로 무().

相好; 불타의 신체로 나아가 말하면 미묘한 상상(相狀). 가히 요별(了別)하는 것은 이를 일러 상()이라 하고 세상(細相)의 가히 애요(愛樂)할 만한 것은 일컬어 호()라 함. ()이란 것은 대상(大相)이며 호()란 것은 다시 대상을 장엄하는 소상(小相)이 됨. 장륙의 화신으로 나아가 말하면 곧 상()32가 있고 호()80이 있음. 보신으로 나아가 말하면 곧 팔만사천 내지 무량의 상과 호가 있음 [觀無量壽經 法界次第下 智度論二十九 大乘義章二十末].

釋迦; <> śākya. <> sakya. 여기에선 이르되 능인(能仁)이니 석가모니가 소속된 종족의 명칭임. 불타 5()의 하나가 됨. 또 석가모니의 간칭임. 석가족은 고인도 민족의 하나며 무사 계급에 속함. 아리안(雅利安) 민족 중의 일종계(日種系)가 되며 감자왕(甘蔗王)의 후예니 불타의 출신이 이 종족이므로 인하여 명칭이 석가모니(釋迦牟尼; 곧 석가족의 聖者)가 됨. 석가모니(釋迦牟尼) <> śākya-muni. 인도 가비라성주(迦毘羅城主) 정반왕(淨飯王)의 아들이며 모친을 가로되 마야(摩耶). 명호(名呼)는 실다태자(悉多太子)며 성동(城東) 람비니원(嵐毘尼園)에서 탄생했고 생후 7일 만에 모친이 죽었음. 이모(姨母) 파사파제(波闍波提)가 그를 양육했고 발타라니(跋陀羅尼)가 그를 교양(敎養)했음. 어릴 적에 인생의 여러 현상에 대해 이미 사유하는 곳이 있었음. 혹은 염부수(閻浮樹) 아래서 경농(耕農)의 괴로움을 사유하고 혹은 여러 짐승이 상식(相食)함을 보고 인생의 투쟁을 싫어했음. 4()의 출유(出遊)하는 길 위에서 생로병사의 형상(形相)을 보고 둔세(遁世)의 뜻이 있었음. 드디어 달밤을 타고 시자 차닉(車匿)을 시켜 반려가 되게 하여 백마 건척(犍陟)을 타고 출가했음. 발가바(跋伽婆)를 찾아 고행하며 출리(出離)하는 도를 들었고 다시 아람가람(阿藍迦藍)을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 미루산(彌樓山)에서 참방해 승가파(僧佉派)의 법을 들었고 전()하여 울타라선(鬱陀羅仙)을 역문(歷問)했으나 모두 구하는 바의 대법을 얻지 못했음. 떠나서 우루빈라촌(優婁頻羅村) 고행림(苦行林)에 들어가 6년 동안 엄고(嚴苦)했으니 형용(形容)이 삭수(削瘦; 비쩍 마르다)하는 극히 혹렬한 고행이었음. 이어서 고행은 해탈열반의 도가 아니라 하고는 단연(斷然)히 전일의 행위를 고쳐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며 몸의 때를 제거하고 촌녀(村女)가 바친 바의 유미(乳糜)를 받고 정각산 보리수 아래에 앉아 사유해 가로되 등정각(等正覺)을 얻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했음. 칠칠일(七七日) 동안 사유하며 4() 12인연의 법을 관했으며 이에 각자(覺者)인 세존을 성취했고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었으니 때의 나이는 35이었음. 이로부터 이후에 40여 년 동안 사방을 유력(遊歷)하며 군류(群類)를 화도(化導)했으며 서력(西歷) 기원전(紀元前) 487년에 구시성(拘尸城) 밖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백화(白花)의 향을 안고 드디어 대반열반(大般涅槃)했음. 선등세보1(禪燈世譜一). 시조(始祖)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곧 현겁(賢劫)의 제4()이다. 중천축국(中天竺國)에서 탄생을 보였으며 찰리종(刹利種)이다. 석가는 그 성()이다. 아버지는 정반성왕(淨飯聖王)이며 어머니는 마야성후(摩耶聖后). 주소왕(周昭王) 26년 갑인(1027) 48일에 강탄(降誕)했다. 전륜성왕의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무상도(無上道)를 이뤘으며 대법륜을 굴렸다. 그 후 79세에 반열반(般涅槃)을 드리우며 이에 대법인(大法印)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屬)했다. () 목왕(穆王) 53년 임신(949) 215일 중야(中夜)에 입멸(入滅)했으며 1017년 후에 불교(佛敎)가 화하(華夏)에 미쳤으니 곧 한명제(漢明帝) 영평 10년 정묘세(67)이다. 종통편년1(宗統編年一). 선현(先賢)들이 불타의 출생한 해를 기록함이 호상 같지 않음이 있다. 법현전(法顯傳)에 의거하여 부처의 생시(生時)를 추리하자면 곧 은세(殷世) 무을(武乙) 26년 갑오에 해당하며 사문 법상(法上)의 답문(答問)에 의거하면 곧 주소왕(周昭王) 24년 갑인(1027)에 해당하며 상정기(像正紀)에 의거하면 주평왕(周平王) 48년 무오(723)에 해당하며 후주(後周)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라집(羅什)의 연기(年紀)와 및 석주명(石柱銘)을 인용함에 의거하면 곧 주환왕(周桓王) 5년 을축(716)에 해당하며 양() 조백휴(趙伯休)가 여산(廬山)에서 홍도율사(弘度律師)를 만나 부처가 멸도한 후의 중성(衆聖)의 점기(點記)를 얻었음에 의거하여 추리하자면 곧 주정정왕(周貞定王) 2년 갑술(467)에 해당하며 수() 번경학사(翻經學士) 비장방(費長房)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에 의해 교율(敎律) 및 경사(經史)에 준거(準據)하여 추리하자면 곧 주장왕(周莊王) 9년 계사(688)에 해당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ㆍ불조통재(佛祖通載)ㆍ불조강목(佛祖綱目)에 의거하면 모두 26년 갑인(1027)으로 지어졌으며 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엔 주소왕(周昭王) 9년 갑인으로 지어졌다. 전법정종기3(傳法正宗記三). ()해 가로되 보림전(寶林傳)ㆍ전등록 2()에 다 천축의 모든 조사의 입멸한 시기를 썼는데 화하(華夏)의 주()ㆍ진()의 세갑(歲甲)과 합치한다. 그러나 주나라의 선왕(宣王; 재위 827-782) 이전엔 연() 있음을 시작하지 않았다. 또 지나와 천축은 서로의 멀기가 수만여 리이며 그 사람의 화멸(化滅)이 혹은 천여 세를 고치는 자도 있다(千歲寶掌和尙을 가리킴이니 禪苑蒙求卷中을 보라). 그 일이 묘망(渺茫; 아득 망망)하여 격월(隔越)했다. 내가(契嵩) 염려하며 중역(重譯)하면서 비교했는데 그 진실을 쉽게 얻지 못해 번번이 그 연수(年數)의 갑자를 생략하고 다만 좇아서 그 제대(帝代)만 존치하였을 뿐이다. 오직 석가문불ㆍ보리달마 내지 중국의 6()의 조사만 그 입멸한 해의 갑자가 조금 가이(可以) 추정해 비교할 만했으므로 이에 책에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