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5권)

선문염송집 권4 제110칙(본문 한글)

태화당 2021. 9. 28. 07:51

一一○】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가 인종법사(*印宗法師)의 회하(會下)에 있으면서 두 중이 풍번(風幡)을 다투는 것을 보았다. 한 중은 가로되 바람이 움직임이라 했고 한 중은 가로되 깃발이 움직임이라 했다. 6조가 가로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고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 상대의 경칭)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두 중이 송연(悚然; 오싹함)했다.

 

설두현(雪竇顯)이 송하되 이 깃발이 아니며 이 바람도 아니니/ 납승이 이에서 유통(流通)을 짓는다/ 강을 건너면서 배를 씀은 심상한 일이니/ 남산에서 숯을 태우매 북산이 붉더라.

 

또 송하되 이 풍번(風幡)이 아님을 어느 곳에 붙일까/ 신개(新開; 顥鑒) 작자가 일찍이 염각했다(*新開作者曾拈却)/ 여금에 몽동(懵懂)한 어리석은 선화(*禪和)/ 도연(徒然; )히 말하기를 현현이 독각이라 한다(*玄玄爲獨脚).

 

대홍은(大洪恩)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행인이 일찍이 양중관(兩重關)에 막혔다/ 장안의 길이 있으니 응당 꼭 이르고/ 곤륜(*崑崙)을 왕환(往還)했다고 진술(*)함을 듣지 말아라.

 

또 송하되 이 깃발이 아니며 이 바람도 아니니/ 석성산(石城山) 꼭대기에서 바라보매 어찌 다함이 있으랴/ 천상에 있는 별은 다 북두성에 공수하고/ 인간에서 물은 동해로 향하지 않는 게 없다.

 

또 송하되 이 바람과 깃발이 아니니 어느 곳에 붙이며/ 이 바람과 깃발임도 또한 염각(*拈却)하라/ 그를 따라감은 또한 매우 무단(無端)하나니/ 1구로 당기(當機)하면 도리어 매우 틀린다/ 틀리고 틀렸으니/ 콧구멍이 요전(*鼻孔撩天)할지라도 또한 뚫어버려라.

 

낭야각(瑯瑘覺)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다구사리(多口闍梨; 말 많은 사리)일지라도 가히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교어(巧語)를 가져 현회(玄會; 현묘한 理會)를 구한다면/ 특지(特地; 특별히) 천산(千山)이 만산(萬山)에 막힌다.

 

천의회(天衣懷)가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이 말이 나타난() 다음 인간에 전파되었다/ 노로(老盧; 혜능)의 단적(端的; 진실, 확실)한 곳을 알고자 한다면/ 천태(*天台)와 남악(南岳)의 만 겹의 산이다.

 

또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호인(胡人)이 지주(持呪)하며 입으로 재잘거린다(喃喃)/ 알려 말하나니 맹춘(孟春)의 정월절(正月節)/ 천봉(千峯)이 은은(隱隱)하여 색이 쪽과 같다.

 

안탕천(*鴈蕩泉)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벼를 베는 낫(鎌子; 는 조사)이 양쪽(兩頭)이 굽었다/ 조사의 적지(的旨; 端的한 뜻)를 어떤 사람이 아느냐/ 남악과 천태의 천만 산이다.

 

또 송하되 이 깃발이 아니며 이 바람이 아니니/ 조주(趙州)의 남반()과 석교(石橋)의 동쪽이다/ 찰간(刹竿)의 두상(頭上)에서 머리 돌리지 않으면/ 황매에서 답대하던 옹(*黃梅踏碓*)을 저버리리라.

 

서록선(*瑞鹿先)이 송하되 바람과 깃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움직임이라 하니/ 자고로 상전(相傳)하여 바로 여금에 이르렀다/ 금후(今後)로 수운인(水雲人; 雲水衲子)이 깨닫고자 한다면/ 조사가 참으로 이 좋은 지음(知音)이다.

 

승천종(*承天宗)이 송하되 바람과 깃발이 요동(*)하며 청휘(*晴暉)를 떨치니/ 전사(展事; 行事)의 상량(商量)을 마침내 알지 못한다/ 다소의 조사의 문하객(門下客)일진대/ 두각(頭角)이 반드시 이 기린아(麒麟兒; 는 조사)라야 한다.

 

자수건(資壽*)이 송하되 바람이 동요하고 깃발이 요동하다가 고요한 즉 드리우니/ 검은 나귀가 흰 노새(*騾兒; 는 조사)를 낳았다(生得)/ 중양일(重陽日; 99)이 가까우니 서풍이 긴급한데/ 매미는 정괴(庭槐)에 가득하고 국화는 울타리에 가득하다.

 

원통수(*圓通秀)가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이에서 명득(明得)하면 마음을 깨치기 어렵다/ 호언(胡言)과 한어(漢語)에서 심멱(尋覔; 찾다)함을 그치고/ 찰간의 두상을 등한(等閑)히 보아라. 다만 착인(錯認)하지 말아라.

 

설봉원(*雪峯圓)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백운이 의구히 청산을 덮었다/ 연래(年來)에 노대(老大)하여 온통 힘이 없나니/ 망중(忙中)에 조금(些子)의 한가함을 투득(偸得)했다.

 

해인신(海印信)이 송하되 바람과 깃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움직임이라 하니/ 한 언어에 어찌하여 화()가 두 가지인가/ 노로(老盧)의 매우 방약(*傍若)함을 참지 못하겠나니/ 사리(闍梨)와 좌주(座主)가 기만을 입었다.

 

법창우(*法昌遇)가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검은 무늬(*黑花) 고양이의 얼굴이 아롱거리네/ 야행인이 단지 명월을 탐하다가/ 불각에 옷까지 물을 건너느라 차구나.

 

보녕용(保寧勇)이 송하되 탕탕(蕩蕩; 평탄한 모양)한 한 가닥 관역(官驛)의 길에/ 신혼(晨昏; 이른 아침과 황혼)에 일찍이 사람의 다님을 금하지 않았다/ 혼가(*渾家; 全家)가 이 진보(進步)하지 않음은 아니지만/ 당문(當門)에 형극(荊棘)이 난 것은 어찌하지 못한다.

 

법진일(法眞一)이 송하되 파릉(*巴陵)의 노작가(*老作)가 지난날 염래(拈來; 아래 巴陵鑒을 보라)하여/ 이 풍번(風幡)이 아니라면 어디에 두겠는가 하였다/ 떠들썩한 속에서 왕삼(*王三)이 필률(*觱篥)을 불고/ 파사(*波斯)가 연상(筵上; 잔치 자리 위)에서 삼대(三臺)를 춘다.

 

장로색(長蘆賾)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찰간의 두상(頭上)을 등한히 보아라/ 원통(圓通)의 불법이 무다자(無多子; 많지 않음)/ 콧구멍이 의전(依前; 의구)히 눈 앞에 있다. 원통수(圓通秀)의 송을 겸거(兼擧)했음.

 

승천회(承天懷)가 송하되 바람이 동요하고 깃발이 요동하는 지취가 가장 친절하거늘/ 노로(老盧; 혜능)의 마음이 동함을 어떻게 진술할까/ 당시에 과연 가라안(*迦羅眼)이 있었다면/ 반드시 의우(衣盂)를 사람에게 부촉하지 아니치 못했으리라.

 

불인청(*佛印淸)이 송하되 풍번(風幡)이 이 마음이거늘 다시 무엇을 말할까/ 육문(*六門)이 휴헐(休歇)해야 고금에 전한다/ 만약 실터럭만큼이라도 세울진대 잉구(仍舊; 仍然)히 막히리니/ 대천사계(大千沙界)가 한 터럭 끝이다.

 

취암종(翠嵓宗)이 송하되 이 바람과 깃발이 아니며 이 마음도 아니니/ 조사의 정안(正眼)이 다만 여금이다/ 여금에 산하에 막힘을 알지 못하다가/ 여금을 식득(識得)하니 해악(海嶽)이 침몰한다.

 

불감근(佛鑑勤)이 송하되 이 바람과 깃발이 아니며 이 마음도 아니니/ 몇 사람이나 검을 잃고 배에 새겨 찾던가/ 분명히 모든 선객에게 기어(寄語)하나니/ 자고로 진짜 놋쇠일지라도 금과 바꾸지() 못한다.

 

불안원(佛眼遠)이 송하되 바람과 깃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움직임이니/ 대해에 파란(波瀾)이 늘 흉용(汹湧; 세차게 솟구침)한다/ 어룡(魚龍)이 출몰하며 마음대로 승침(升沉)하고/ 생사는 성범(聖凡)이 다름 없이 공유(共有)한다/ 다름 없이 공유함이 어떤 모양인가/ 조불도 방관(傍觀; 옆에서 보다)하며 공연히 합장한다.

 

숭승공(崇勝珙)이 송하되 바람과 깃발이 움직여 자서자동(自西自東; 스스로 西東으로 움직이다)하지만/ 인자(仁者)의 마음은 비이비동(非異非同)이다/ 애한(獃漢; 어리석은 자)은 정기(呈機)해도 일찍이 발몽(發蒙; 蒙昧啓發)하지 못하고/ 조사가 지시해도 더욱 병공(病攻; 병이 공격함)을 보인다/ 비록(縱了; 는 조사) 수릉(*首楞)일지라도 명암과 통색(塞通)이거늘/ 현사의 음아맹롱(**盲聾; 아래 985칙을 보라)을 어찌 면할손가.

 

장령탁(長靈卓)이 송하되 꿈에 화정(*華頂)을 유람하다가 단구(丹丘)에 이르면서()/ 한운(寒雲)을 밟아 없애고 석루(石樓)에 기댔다/ 폭천(瀑泉; 瀑布)이 애벽(崖壁)에 쏟아짐을 탐간(貪看)하거늘/ 어찌 몸이 벽강두(碧江頭; 碧江邊)에 있음을 알겠는가.

 

심문분(心聞賁)이 송하되 물가엔 아지랑이가 비옥하고 수양(垂楊)은 간들거리고/ 대 속엔 구름이 깊고 고옥(古屋)은 나지막하다/ 산천에 녹음(綠陰)이 두루하던 춘사(春事)는 지나가고/ 오동꽃이 땅에 가득하고 자규(子規)가 운다.

 

자항박(慈航朴)이 송하되 이 바람과 깃발이 아니고 이 마음이 아니니/ 등한히 흙을 쥐매 이 황금이다/ 조계의 일로(一路)가 평탄하기 숫돌 같거늘/ 무한한 평인(平人)이 육침(陵沉)을 입는다.

 

송원(松源)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분명히 만 겹의 관문을 열파(裂破)했다/ 누가 아느냐 팔뚝(腕頭)의 힘을 써 없애/ 한명(閑名; 쓸데없는 이름)이 세간에 떨어짐을 야득(惹得; 惹起)한 줄을.

 

묘지곽(妙智廓)이 송하되 이 바람이 아니며 이 깃발이 아니니/ 영봉(靈鋒)이 독로하매 보광(寶光)이 차갑다/ 망망한 우주에 지기(知己)가 없어/ 공연히 위루(危樓; 高樓)에 기대어 찰간을 바라본다.

 

개암붕(介庵朋)이 송하되 바람과 깃발이 모두 옳지 않으며/ 인자(仁者)의 마음이라 함도 또한 그르지 않다/ 단비(斷碑)가 옛길에 가로 놓였고()/ 아래에 돌 오귀(烏龜)가 있다.

 

설봉존(*雪峯存)이 염하되 대소(大小) 조사가 용두사미니 좋게 20방 주어야 하리라. 부상좌()가 시립(侍立)하던 차에 부상좌(*孚上座)가 이빨을 깨물었다. 설봉이 이르되 내가 이렇게 말함도 또한 좋게 20방 주어야 한다. 운문고(雲門杲)가 가로되 부상좌를 알고자 하느냐, 무소가 달 구경함으로 인해 문채가 뿔에 생했다. 설봉을 알고자 하느냐, 코끼리가 우레의 경동(驚動)을 입어 화문(花文)이 어금니에 들어갔다.

 

보복(*保福)이 염하되 도적이 되면 사람의 마음이 공허하다(*作賊人心虗). 또한 이는 소하가 법률을 두었음이다(蕭何置律; 위 제44蕭何制律을 보라).

 

파릉감(*巴陵鑒)이 염()했다. 조사가 말하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하니 이미 이 바람과 깃발이 아닐진대 어느 곳을 향해 붙겠느냐, 어떤 사람이 조사에게 작주(作主; 주재를 짓다)하여 주려면 출래(出來)하여 파릉과 더불어 상견하라.

 

청량익(*淸涼益)이 상당하여 이르되 제상좌(諸上座), 또한() 장차 등한이 봉권(奉勸)하지 말고 다만() 고성(古聖)의 자비문(慈悲門)에 의해야 좋으리라. 저 고성이 보는 바의 제경(諸境)은 오직 자심(自心)임을 본다. 조사가 말하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움직임이라 하니 단지 또한 이렇게 이회함이 좋나니 달리 친처(親處) 보다 친한 게 없다.

 

오조계(五祖戒)가 염하되 무슨 내유를 이루겠는가(*着甚來由).

 

천태 소국사(韶國師)가 시중하여 가로되 고성(古聖)의 방편이 마치 하사(河沙)와 같다. 6조가 가로되 바람과 깃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움직임이다 하니 이는 위없는 심인(心印)이며 지묘(至妙)한 법문이 된다. 아배(我輩)가 조사의 문하사(門下士; 문하의 사내)라고 일컫거니와 어떻게 그것을 해석해야 하느냐, 혹자(; , 或者)는 말하되 바람과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네 마음의 망동(妄動)이라 하며 혹자는 말하되 바람과 깃발을 제거하지 않고 바람과 깃발 처()로 나아가 통틀어 취한다 하며 혹자는 말하되 바람과 깃발이 움직이는 곳이 이 무엇인가 하며 혹자는 말하되 사물에 붙어 마음을 밝히는지라 사물을 인정함을 쓰지 않는다 하며 혹자는 말하되 색이 곧 이 공()이라 하며 혹자는 말하되 바람과 깃발이 움직이지 않음에서 응당 묘회(妙會; 玄妙理會)를 써야 한다 하거니와 조사의 의지(意旨)와는 마침내 교섭이 없다. 이미 갖가지 해회(解會; 理解)가 아닐진대 합당히 어떻게 지실(知悉; 知曉, 了解)해야 하느냐. 만약 진실로 보았다면 어떤 법문인들 밝히지 못하겠는가, 비록 백천 제불의 방편일지라도 일시에 통료(洞了; 透徹하게 領悟)하리라.

 

설두현(雪竇顯)이 파릉(巴陵)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바람이 움직임이며 깃발이 움직임이니 이미 이 바람과 깃발일진대 어느 곳을 향해 붙겠는가. 어떤 사람이 파릉에게 작주(巴陵)하여 주려면 또한 나와서 설두와 더불어 상견하라.

 

해인신(海印信)이 염하되 대소(大小) 조사가 화()를 양절(兩截; 量詞)로 이루었나니 좋이 30방 주어야 하리라. 다시 1()가 있나니 동착(動着)함을 간절히 꺼린다.

 

장산천(蔣山泉)이 소참(小叅)에 차화를 들고 이어서 파릉과 설두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두 존숙의 낙처(落處; 歸屬處)를 알고자 하느냐. 장산(蔣山)이 너희를 위해 저() 비유를 설하겠다. 일사(一似; 매우 비슷함) () 인가(人家)의 조상이 종래로 극히 애업(*涯業; 家財産業)이 있었다. 두 형제가 있어 각각 투사(鬪使; 씀을 다투다. 다투어 소비하다)하여 대자(大者; )5백을 쓰고 소자(小者; 동생)1(*一貫)을 썼다. 일왕월래(日往月來)하면서 투사(鬪使)를 그만두지 않아 드디어 조부의 애업(涯業)을 가져다 일시에 탕진(蕩盡)하였고 그의 자손에게 누를 끼쳐 안신입명(*安身立命)할 곳이 없었다. 홀연히 한 친우가 있어 그의 자손들이 고로(*孤露)함을 보고서 드디어 그 집(伊家)의 조상의 택사(宅舍)를 가져다 그들에게 빌려주어 거지(居止; 거주)하게 했다. 그 사이 자손들이 생각을 쓰되 구시(舊時)의 조업(祖業)이 어떻게 도리어 타인에게 예속되었는가. 반드시 방편을 지어 당시의 계서(契書; 계약서)를 찾아야(討得) 비로소 구경(*究竟)이 되리라. 만약 목전을 쫓아 날을 지낸다면 옳기는 곧 옳지만(*得則得) 타인의 옥하(屋下)에 주재(住在)함을 면한지 못한다 하였다. 대중이여, 장산(蔣山)이 너희를 위해 비유를 설해 마쳤거니와 다만() 제인에게 묻노니 어떤 방편을 지어야 당시의 계서(契書)를 찾아 얻겠는가.

 

고목성(枯木成)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제인자(諸仁者)여 조사가 권시(*權時; 잠시)의 시설(施設), 써서 지귀(*指歸; 意向)를 지었거니와 제인이 조사의 단적(端的; 진실, 확실)하게 사람을 위하는 곳을 알고자 하느냐. 양구(良久)하고 이르되 바람과 깃발과 마음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도리어 미()함이다/ 조사의 관려자(*關捩子)를 알고자 하느냐/ 바위 앞에 때로 자규의 울음을 듣는다.

 

정자본(淨慈本)이 소참에 이르되 6조가 행자로 되었을 때 인종법사(印宗法師)의 회하에 이르렀는데 홀연히 보매 두 중이 풍번(風幡)을 봄으로 인해 함께 서로 논의하되 하나는 이르되 바람이 움직임이라 하고 하나는 이르되 깃발이 움직임이라 하여 왕복하며 분운(紛紜)하되 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타가(他家; , 는 조사)가 당시에 길에서 불평(不平; 공평하지 않음)을 본지라 곧 말하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이 노로(老盧)가 일기(一期)에 접인(接引)함은 곧 없지 않으나 또 다만 능히 후인의 입을 색단(塞斷)하지 못했다. 산승의 이 속은 곧 그러하지 않나니 당시에 만약 이 중을 보았을진대 다만 그를 향해 말하되 갑수한(瞌睡漢; 조는 자)아 네가 무엇을 일러 풍번(風幡; 바람과 깃발)이라 하느냐 했겠다. 그래 말하라, 조사가 말한 것과 더불어 이 같은가 이 다른가. 눈 밝은 이는 비추어 보아라(鑒看).

 

법진일(法眞一)이 차화를 들고 이어서 파릉과 설두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그래 말하라, 두 노숙의 말이 이 같은가 이 다른가, 만약 정당(*定當; 判明)함을 얻었거든 나와서 산승과 더불어 상견하라.

 

황룡심(黃龍心)이 법창우(法昌遇)에게 물어 가로되 이 바람이 아니며 물을 건너느라 차구나. 어찌 이 화상의 게가 아니겠습니까. ()가 가로되 그렇다, 이 말이 있었다. ()이 가로되 또한 매우 기특합니다. 우가 가로되 네가 말하라, 조사가 전단(前段)에서 사람을 위했는가, 후단(後段)에서 사람을 위했는가. 대답해 가로되 조사는 마침내 망어를 하지 않습니다. 우가 가로되 뜻이 무엇인가. 대답해 가로되 어찌 말한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했습니다. 우가 가로되 여우가 물을 건넘과 같거늘 무슨 쾌활함이 있으리오. 심이 가로되 스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우가 불자를 흔들었다. 심이 가로되 또한 이는 뱀을 위해 발을 그림입니다. 심이 가로되 난통(*亂統; 법통을 어지럽힘)하여 무엇하리오. 심이 가로되 모름지기 이는 화상이라야 비로소 옳습니다.

 

조계명(曹溪明)이 상당하여 이르되 이 깃발이 아니며 이 바람이 아니라 하니/ 어찌 번가롭게 재후(齋後)에 도리어 종소리를 내는가/ 영양이 괘각하면(*羚羊掛角) 보는 사람이 없거늘/ 다만(*) 거농(*渠儂)의 억지로 지종(指蹤)함을 입었다. 이에 들되 6조 대사가 어느 날 두 중이 풍번(風幡)을 쟁론(爭論)함을 보았는데 두 중이 이로 인하여 성오(省悟)했다. 스님이 이르되 대중이여 이 2(*) 도인이 이렇게 오거(悟去; 는 조사)함에 의거한다면 지옥에 들어가기가 화살을 쏨과 같으리라. 만약 이 피하(皮下)에 피가 있는 자일진대 그가 말하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이 너의 마음이 움직임이다 함을 본다면 돌(). 이 무슨 말인가 했으리라. 당시에 만약 이 1()을 내렸더라면 비로소 전신(轉身)1()가 있었으리라. 그대가 보지 못하는가 고덕이 말씀이 있었으니(*古德有言) 이 마음이 아니며 이 부처가 아니며 이 물건이 아니라 하였다. 필경 이() 무엇이라고 불러 지어야 하느냐, 드디어 불자를 던져 떨어뜨리고 이르되 노승이 금일 제인에게 감파(勘破)됨을 입었다.

 

상방익(上方益)이 차화를 들고 이어서 파릉과 설두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1()이 짖을 형세면 백견(百犬)이 소리 내어 짓는다. 당시에 만약 이 금색두타(金色頭陁)였을진대 문 앞의 찰간을 넘어뜨려버려라 했을 것이며 또한 남북 선화(禪和)가 풍번(風幡)에 너무 달림(*走殺)을 입음을 면했으리라.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금색두타를 위해 작주(作主; 主宰를 짓다)한다면 곧 옳으려니와 법운(*法雲)과 더불어 상견하려 한다면 미재(未在; 未得).

 

백운병(白雲昺)이 차화를 들고 이어서 파릉과 설두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파릉이 이르되 이미 이 풍번(風幡)이 아닐진대 어느 곳을 향해 붙겠는가 하였고 설두가 이르되 이미 이 풍번이거늘 어느 곳을 향해 붙겠는가 하였거니와 그러한 즉 물로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 금과 바꾸지 못한다. 홀연히 저() 성명(性命)을 아끼지 않는 자가 있어 2()의 발꿈치를 절단해야 또한 세제(世諦; 俗諦)로 유포됨을 면하리라.

 

불안원(佛眼遠)이 상당하여 이르되 지난날 6조 대사가 거사가 되었을 때 광주(*廣州) 법성사 인종법사의 석하(席下)에 은거했다. 밤을 만나 낭무(廊廡; 은 곁채 랑. 행랑 랑. 는 문간방 무. 正殿에 부속된 건물) 사이에서 두 중이 풍번(風幡)을 경변(競辯)함이 있었는데 그 이치를 다하지 못했다. 조사가 섭보(躡步; 踏步걸음을 내디딤)하여 일러 가로되 가히 속사(俗士)가 고론(高論)에 득예(得預; 參預를 얻다)함을 용납하겠습니까 하고는 바로 바람과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움직임입니다로써 그들에게 고했다. 대중이여, 지여(秪如) 야래(夜來; 는 조사)에 바람이 일어나면 그래 말하라, 이 바람이 움직임인가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닌가. 만약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와 같이 발()에 부딪치고 문호()를 움직이고 흙을 까부르고 티끌을 날리거늘 어찌하여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닌가. 도리어 판단하여 냄을 얻겠는가. 산승이 말하노니 또한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며 또한 이 마음이 움직임이 아니라 하노니 식득(識得)할 사람이 있느냐, 청산이 무한히 아름답거늘 오히려 돌아감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는구나.

 

육왕심(育王諶)이 차화를 들고 이어서 파릉과 설두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이 세 존숙에 한 사람은 방행(*放行)하여 언덕을 무너뜨리고 돌을 찢음과 같고 한 사람은 파정(*把定)하여 대해가 조수(潮水)를 삼킴과 같고 한 사람은 단좌(端坐)하여 움직이지 않음이 수미산과 같다. 현녕(*顯寧)의 이러한 설은 너무(大殺) 조장(條章)을 돌아보지 않았다.

 

운문고(雲門杲)가 보설(普說)에 차화를 들고 이르되 산승이 일찍이 1() 장로에게 청익(請益)하기를 의지(意旨)가 무엇인가, 장로가 적삼의 소매를 가지고 흔들어 바람이 움직이는 자세를 짓고 이르되 이 뭣고 했으니 고재고재(苦哉苦哉)로다, 사람을 너무 참황(慚惶; 부끄럽고 두려움)하게 하며 사람을 너무 둔치(*鈍置)하게 했다. 어떤 자는 말하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라 결정코 이 마음이 움직임이라 한다. 산승이 심상(尋常)에 학자에게 묻되 이 바람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이 움직임이 아니며 이 마음이 움직임이 아니니 어떠한가, 이 속에 어찌 눈 깜작임을 용납하겠는가.

 

선문염송집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선문염송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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