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집주(25권)

선문염송집 권21 제855칙

태화당 2022. 2. 4. 07:37

禪門拈頌集註卷第二十一

                                                        禪門拈頌 高麗 慧諶 彙集

                                                        平心寺主 淨圓 讐校 註解

達磨第十一世筠州洞山良价禪師嗣法

洪州雲居山道膺禪師

京兆府華嚴休靜禪師

撫州疎山光仁禪師 洛京白馬遁儒禪師

撫州曺山耽章本寂禪師

潭州龍牙山居遁禪師

筠州洞山師虔禪師 高安白水本仁禪師

澧州欽山文邃禪師 天童山咸啓禪師

 

八五五洪州*雲居*道膺禪師 示衆云 如人將三貫錢 買一隻獵狗 但尋得有蹤跡底 若遇羚羊掛角時 非但不見蹤迹 氣息也不識 僧便問 羚羊未掛角時如何 師曰 六六三十六 僧云 掛角後如何 師云 六六三十六 僧便作禮 師云 會麽 僧曰 不會 師云 不見道無蹤迹 後有僧擧似趙州 州云 雲居師兄猶在 僧便問 羚羊掛角時如何 州云 九九八十一

 

薦福逸頌 羚羊掛角向*甌峯 獵狗茫然不見蹤 却是*石橋橋畔老 三千里外解相逢

承天宗頌 好是六六三十六 尋蹤獵犬豈能知 假饒詞句如珠玉 爭似羚羊掛角時

智海淸頌 羚羊掛角時 六六三十六 貧兒得古錢 瘦馬飡枯粟 報與叅玄人 聽取無生曲 昨夜火燒空 跳入火中浴

白雲昺頌 雲居妙唱三十六 趙老全提八十一 羚羊掛角無蹤迹 獵犬嗷嗷何處覔 無處覔 不辭更爲通消息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悅齋居士頌 六六三十六 *雙妃淚染湘江竹 九九八十一 楊州*賈胡橫羗笛 橫羗笛 六六九九無消息 秋風成陣吹蘆荻

瑯瑘覺拈 雲居恁麽稱提 大似八尺布衫丈二袖

法眞一擧此話 連擧僧又問長慶 羚羊未掛角時如何 慶云 草裏漢 掛角後如何 慶云 亂呌喚 僧云 畢竟如何 慶云 驢事未去馬事到來 師云 此三尊宿對話 且道 爲人在甚麽處 秪如羚羊掛角後 與未掛角時 是同是別

 

第八五五則; 五燈會元十三雲居道膺 上堂 如人將三貫錢 買箇獵狗 祇解尋得有蹤跡底 忽遇羚羊挂角 莫道蹤跡 氣息也無 僧問 羚羊挂角時如何 師曰 六六三十六 曰 挂角後如何 師曰 六六三十六 僧禮拜 師曰 會麼 曰 不會 師曰 不見道無蹤跡 其僧擧似趙州 州曰 雲居師兄猶在 僧便問 羚羊挂角時如何 州曰 九九八十一 曰 挂角後如何 州曰 九九八十一 曰 得恁麼難會 州曰 有甚麼難會 曰 請和尙指示 州曰 新羅新羅 又問長慶 羚羊挂角時如何 慶曰 草裏漢 曰 挂後如何 慶曰 亂呌喚 曰 畢竟如何 慶曰 驢事未去 馬事到來

雲居; 雲居山 位於江西省永修縣西南十七公里處 其山險峻 頂常橫雲 故稱雲居 傳爲歐笈得道之地 故又稱歐山 以洞山之法嗣道膺曾住此 擧揚洞山之宗風而聞名 或謂唐代元和八年(813) 道容於此建寺 號雲居 中和年間 鍾王奏賜龍昌禪院之額 至宋代大中祥符(1008-1016)年間 敕改眞如禪院 明代萬曆年間 嘗敕賜佛像經函匾額等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七 古今圖書集成職方典八六七 同八七一]

道膺; (838-902) 唐代曹洞宗僧 薊門玉田(河北)人 俗姓王 二十五歲於范陽延壽寺受具足戒 學小乘戒律 復從學於終南山翠微寺之無學 後參學於筠州(江西)之洞山良价座下 竝嗣其法 初住於三峰山(江西宜豐) 其後於雲居山(江西建昌西南) 開創眞如寺(又稱飛白寺 龍昌寺) 住持三十年 大振曹洞宗風 得南平王鍾傳之護持 天復二年示寂(佛祖通載作天復元年示寂) 壽六十八 敕諡弘覺禪師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七] 拈頌說話 僧寶傳云 禪師名道膺 幽州玉田人也 姓王氏 十歲出家 一鉢南來 造謁良价 宗鏡云 雲居物外宗師 此土七生爲善知識 道德高邁 智海洪深 具大慈悲 常盈千衆

甌峯; 拈頌說話云 雲居山有甌峯

石橋橋畔老; 指趙州從諗 碧巖錄第五十二則曰 趙州有石橋 蓋李膺造也 至今天下有名

雙妃淚染湘江竹; 雙妃 娥皇與女英 舜之二妃名 史記一云 於是堯妻之二女 正義云 妻音七計反 二女 娥皇 女英也 娥皇無子 女英生商均 舜升天子 娥皇爲后 女英爲妃 獨異志(唐 李冘撰)云 娥皇女英從舜巡狩 行及湘川 聞舜崩于蒼梧 泣下 泪洒湘川之竹 皆成斑文

賈胡; 經商的胡人 泛指外國商人

 

八五五홍주(洪州) 운거(*雲居) 도응선사(*道膺禪師)가 시중하여 이르되 어떤 사람이 3()의 돈을 가지고 1()의 엽구(獵狗)를 샀는데 단지 종적(蹤跡)이 있는 것만 심득(尋得)한다. 만약 영양(羚羊)이 괘각(掛角)함을 만났을 땐 단지 종적을 보지 못함 만이 아니라 기식(氣息)도 또한 알지 못한다. 중이 곧 묻되 영양이 괘각하지 않았을 땐 어떻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육육 삼십육이다. 중이 이르되 괘각한 후엔 어떻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육육 삼십육이다. 중이 곧 작례(作禮)했다. 스님이 이르되 아느냐. 중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이르되 종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느냐. 후에 어떤 중이 조주에게 거사(擧似)했다. 조주가 이르되 운거사형(雲居師兄)이 오히려 있다. 중이 곧 묻되 영양이 괘각했을 땐 어떻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구구 팔십일이다.

 

천복일(薦福逸)이 송하되 영양(羚羊)이 괘각(掛角)하여 구봉(*甌峯)을 향했나니/ 엽구(獵狗)가 망연(茫然)하여 종적을 보지 못한다/ 도리어 이 석교 교반의 노한(*石橋橋畔老)/ 3천 리 밖에서 상봉할 줄 알았다.

 

승천종(承天宗)이 송하되 좋기로는 이 육육 삼십육이니/ 종적을 찾는 엽견(獵犬)이 어찌 능히 알겠는가/ 가요(假饒; 가령) 사구(詞句)가 주옥(珠玉)과 같더라도/ 어찌 영양이 괘각할 때와 같으랴.

 

지해청(智海淸)이 송하되 영양이 괘각했을 때/ 육육 삼십육이다/ 빈아(貧兒; 貧人)가 고전(古錢)을 얻고/ 수마(瘦馬)가 고속(枯粟)을 먹는다/ 참현인(叅玄人)에게 알려 주나니/ 무생곡(無生曲)을 청취하라/ 어젯밤 불이 하늘을 태우매/ 불 속에 뛰어들어가 목욕했다.

 

백운병(白雲昺)이 송하되 운거가 삼십육을 묘창(妙唱)하매/ 조로(趙老; 조주 노한)가 팔십일을 전제(全提)했다/ 영양이 괘각하면 종적이 없나니/ 엽견(獵犬)이 오오(嗷嗷; 매우 시끄러운 모양)하며 어느 곳에서 찾으랴/ 찾을 곳이 없으므로/ 다시 소식을 통해 줌을 사양하지 않는다/ 낙하(落霞)는 고목(孤鶩; 외로운 오리)과 가지런히 날고/ 추수(秋水)는 장천(長天)과 함께 일색(一色)이다.

 

열재거사(悅齋居士)가 송하되 육육 삼십육이여/ 쌍비의 눈물이 상강의 대를 물들인다(*雙妃淚染湘江竹)/ 구구 팔십일이여/ 양주에서 고호(*賈胡)가 강적(羗笛)을 횡으로 분다/ 강적을 횡으로 붊이여/ 육육구구에 소식이 없고/ 추풍이 진()을 이루어 노적(蘆荻; 갈대와 물억새)에 분다.

 

낭야각(瑯瑘覺)이 염하되 운거의 이러한 칭제(稱提; 稱說)8척 포삼(布衫)에 장이(丈二)의 소매와 매우 흡사하다.

 

법진일(法眞一)이 차화를 들고 이어서 들되 중이 또 장경(長慶)에게 묻되 영양이 괘각하지 않은 때는 어떻습니까. 장경이 이르되 초리한(草裏漢)이다. 괘각한 후엔 어떻습니까. 장경이 이르되 어지럽게 규환(呌喚)한다. 중이 이르되 필경 어떻습니까. 장경이 이르되 여사(驢事)가 가지 않았는데 마사(馬事)가 도래한다. 스님이 이르되 이 세 존숙의 대화에 그래 말하라 사람을 위함이 어느 곳에 있느냐. 지여(秪如) 영양이 괘각한 후가 괘각하지 않은 때와 더불어 이 같은가, 이 다른가.

 

第八五五則; 오등회원13 운거도응(雲居道膺). 상당(上堂). 비여(譬如) 사람이 삼관(三貫)의 돈을 가지고 저() 사냥개(獵狗)를 샀는데 단지 종적(蹤跡)이 있는 것만 찾음을 얻을 줄 아나니 홀연히 영양(羚羊)이 뿔을 걺을 만나면 종적을 말하지 말아라 기식(氣息)도 또한 없다. 중이 묻되 영양이 뿔을 걸 때 어떠합니까. 스님이 가로되 육육삼십육(六六三十六)이다. 가로되 뿔을 건 후엔 어떠합니까. 스님이 가로되 육육 삼십육이니라. 중이 예배하자 스님이 가로되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가로되 종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 중이 조주(趙州)에게 거사(擧似)하자 조주가 가로되 운거사형(雲居師兄; 同輩間에 가끔 사형이라는 호칭을 씀)이 오히려 있다. 중이 곧 묻되 영양이 뿔을 걸 때 어떠합니까. 조주가 가로되 구구팔십일(九九八十一)이다. 가로되 뿔을 건 후엔 어떠합니까. 조주가 가로되 구구 팔십일이다. 가로되 이러히 알기 어려움을 얻습니까. 조주가 가로되 무슨 알기 어려움이 있으랴. 가로되 청컨대 화상이 지시(指示)하십시오. 조주가 가로되 신라신라(新羅新羅). 또 장경(長慶)에게 묻되 영양이 영양이 뿔을 걸 때 어떠합니까. 장경이 가로되 초리한(草裏漢)이다. 가로되 건 후엔 어떠합니까. 장경이 가로되 어지럽게 규환(呌喚)한다. 가로되 필경 어떻습니까. 장경이 가로되 나귀 일(驢事)이 가지 않았는데 말 일(馬事)이 도래한다.

雲居; 운거산(雲居山)이니 강서성 영수현 서남 17곳에 위치함. 그 산은 험준하고 산정에 항상 구름이 가로 놓인지라 고로 명칭이 운거임. 전하기를 구급(歐笈)이 득도한 땅이라 하며 고로 또 명칭이 구산(歐山). 동산(洞山)의 법사 도응(道膺)이 일찍이 여기에 거주하며 동산의 종풍을 거양(擧揚)하여 이름이 알려졌음. 혹 이르기를 당대 원화 8(813) 도용(道容)이 여기에 사원을 건립하고 호를 운거라 했음. 중화년 간 종왕(鍾王)이 주청하여 용창선원의 편액을 주었음. 송대 대중상부(1008-1016)년 간에 이르러 칙명으로 고쳐 진여선원이라 했음. 명대 만력년 간 일찍이 불상ㆍ경함(經函)ㆍ편액 등을 칙사(敕賜)했음 [송고승전12. 전등록17. 고금도서집성직방전867, 871].

道膺; (838-902) 당대 조동종 승. 계문 옥전(하북) 사람이며 속성은 왕. 25세에 범양 연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소승계율(小乘戒律)을 배우다가 다시 종남산 취미사의 무학(無學)을 좇아 배웠음. 후에 균주(강서)의 동산양개(洞山良价)의 좌하(座下)에서 참학하였고 아울러 그 법을 이었음. 처음엔 삼봉산(三峰山; 강서 의풍)에 거주했고 그 후에 운거산(강서 건창 서남)에서 진여사(또 명칭이 비백사ㆍ용창사)를 개창하여 30년 동안 주지(住持)했음. 조동종풍을 크게 떨쳤으며 남평왕 종전의 호지(護持)를 얻었음. 천복 2년에 시적(불조통재에 천복 원년에 시적했다고 지어졌음)했음. 나이 68. 칙시가 홍각선사(弘覺禪師) [송고승전12. 전등록17]. 염송설화. 승보전(僧寶傳)에 이르되 선사의 이름은 도응(道膺)이며 유주 옥전 사람이며 성은 왕씨다. 10세에 출가했고 일발(一鉢)로 남래(南來)하여 양개(良价)에게 조알(造謁)했다 종경(宗鏡)에 이르되 운거는 물외(物外)의 종사다. 차토(此土)에서 7()에 선지식이 되었다. 도덕이 고매(高邁)하고 지해(智海)가 홍심(洪深)했고 대자비를 갖추었고 늘 천중(千衆)을 채웠다.

甌峯; 염송설화에 이르되 운거산에 구봉(甌峯)이 있다.

石橋橋畔老; 조주종심(趙州從諗)을 가리킴. 벽암록 제52칙에 가로되 조주에 석교(石橋)가 있다. 대개 이응(李膺)이 조성했으며 지금(至今)토록 천하에 유명하다.

雙妃淚染湘江竹; 쌍비(雙妃)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니 순()2()의 이름임. 사기1에 이르되 이에 요()가 두 딸(二女)을 시집보냈다. 정의(正義)에 이르되 처()는 음이 칠계반(七計反)이다. 2()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다. 아황은 자식이 없었고 여영은 상균(商均)을 낳았다. ()이 천자에 오르자 아황은 후()가 되고 여영은 비()가 되었다. 독이지(獨異志; 唐 李冘 撰)에 이르되 아황과 여영이 순을 좇아 순수(巡狩)했는데 가다가 상천(湘川)에 이르러 순이 창오(蒼梧)에서 붕어했다 함을 듣고 읍하(泣下; 눈물을 흘림)하자 눈물이 상천(湘川)의 대나무에 뿌려져 모두 반문(斑文; 얼룩 무늬)을 이루었다.

賈胡; 상업을 경영하는 호인(胡人). 널리 외국 상인을 가리킴.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blog.daum.net

 

'선문염송집주(25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문염송집 권21 제860칙  (0) 2022.02.04
선문염송집 권21 제859칙  (0) 2022.02.04
선문염송집 권21 제858칙  (0) 2022.02.04
선문염송집 권21 제857칙  (0) 2022.02.04
선문염송집 권21 제856칙  (0)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