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합주

선림보훈합주 001

태화당 2022. 9. 7. 08:45

禪林寶訓合註卷第一

                                                  虎林淨慧居士張文嘉仲嘉較定

 

1*明敎*和尙曰 尊莫尊乎* 美莫美乎* 道德之所存 雖匹夫非窮也 道德之所不存 雖*天下非通也 *伯夷叔齊 昔之餓夫也 今以其人而比之 而人皆喜 **** 昔之人主也 今以其人而比之 而人皆怒 是故學者患道德之不充乎身 不患勢位之不在乎己鐔津集

明敎; 杭州佛日明敎契嵩禪師 字仲靈 自號潛子 藤州鐔津李氏子 嗣洞山曉聰 淸源下十世 七歲出家 十三得度 十九遊方 常戴觀音像一軸 日誦聖號十萬 率以爲常 世間經書莫不徧覽 作原敎論十萬餘言 儒釋之道一貫 以抗韓愈排佛之說 開封府龍圖王公素 歐陽修 程師孟奏進 仁宗覧之嘉歎 付編修入藏 曰輔敎篇三卷 賜紫衣方袍明敎之號也

和尙; 梵本正名鄔波迦 傳之于闐翻爲和尙 傳至此土翻爲力生 謂出家者 因師之力 而生長法身 出功德財 養智慧命 故曰力生也

; 心通曰道 又成名之謂道 卽佛祖微妙之道也 在儒卽允執厥中之妙道也

; 身正曰德 立身之謂也 僧有戒定慧 儒有孝悌忠信 皆謂之德也

; 去聲 凡有天下者 人稱曰王 又身臨四海曰王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也 孤竹國名 姓墨胎氏 其子伯夷名允 字公信 季子叔齊名智 字公達 曰 伯夷叔齊 其父將薨 遺命立叔齊 齊以天倫爲重 我在位不義 伯夷以父命爲尊 我在位不孝 二人俱逃 國人立其仲子爲君 其二人聞西伯昌善養老 盍往而歸之 文王卒 武王伐紂 二人叩馬首而諫曰 父死不塟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弒君 可謂忠乎 左右欲兵之 太公曰 此義人也 扶而去之 武王平定 天下宗周 夷齊耻不食周粟 遂隱首陽山 採薇而食 卒之餓死

夏桀; 名履癸 帝發之子 謚法賊人多殺曰桀 荒淫無道 得施氏女名曰妹喜 作瓊樓瑤臺 極意取娛 酒池運船糟堤可望十里 龍逢以忠諫不從而殺 殷湯有德 伊尹佐湯伐桀 桀戰不勝 奔三椶國 湯又從而伐之 放桀於南巢而死

商紂; 名辛 亦名受 帝乙之子 謚法殘義損善曰紂 得蘇氏女妲己 甚寵愛之 設酒池肉林 使男女躶形相逐其間 作長夜宮 用炮烙之刑 刳孕剒涉 造鹿臺 七年乃成 虐害忠良 臣叔比干 竭忠而諫 遂剖心而死 太師箕子 徉狂而爲奴 庶兄微子 爲其亡仁 避而去之 後武王擧兵伐之 敗登鹿臺 蒙頭赴火而死

周幽; 名宮涅 宣王之子 謚法壅遏不通曰幽 殆政虐民 遂致岐山自崩 山川水竭 得褒人女名褒似以寵之 乃貶申后 并太子宜臼 褒姒不好笑 於驤山擧火 戲媚褒姒之笑 後申侯怒 召犬戎殺於驪山之下

周厲; 名胡 夷王之子 謚法殺戮無辜曰厲 王行無道 侈傲暴虐 國人謗之 王使衛巫監謗 但有謗者盡殺之 召公諫曰 塞下之口 遂上之過 恐爲社稷憂 王不聽 國人叛之 禍及於王 王乃出奔於彘 太子幼 周召二公相和恊 共理國事 故稱共和也 小雅二十二篇 皆文武成康之善政 至此而盡廢矣

 

1명교(*明敎) 숭화상(*和尙)이 가로되 높음()은 도(*)보다 높은 게 없고 아름다움()은 덕(*)보다 아름다운 게 없다. 도덕(道德)이 존재하는 곳(所存)은 비록 필부(匹夫)일지라도 궁()하지 않고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비록 천하에 왕 노릇 할지라도(*天下) ()하지 않는다.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옛적의 아부(餓夫; 굶주린 사내)지만 여금에 그 사람으로써 이에() 비교하면 사람이 다 기뻐하고 걸(*)ㆍ주(*)ㆍ유(*)ㆍ여(*)가 옛적의 인주(人主; 一國. 帝王)지만 여금에 그 사람으로써 이에 비교하면 사람이 모두 성낸다(). 이런 고로 학자는 도덕(道德)이 몸에 충만하지 않음을 우환(憂患)으로 여기고 세위(勢位)가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우환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鐔津集.

明敎; 항주(杭州; 지금의 浙江省 省都) 불일(佛日; 錢塘 佛日山) 명교(明敎; 契嵩賜號) 계숭선사(契嵩禪師; 1007 -1072)니 자가 중령(仲靈)이며 자호(自號)가 잠자(潛子)며 등주(藤州; 지금의 廣西 藤縣) 심진(鐔津) 이씨의 아들. 동산효총(洞山曉聰)을 이었으니 청원하(淸源下) 10. 7세에 출가했고 13에 득도(得度)했고 19에 유방(遊方)했다. 늘 관음상(觀音像) 1()을 이고() 날마다 성호(聖號) 10만을 외웠으니 대략(大略; ) 일상(日常)으로 삼았다. 세간(世間)의 경서(經書)를 편람(徧覽)하지 않음이 없었고 원교론(原敎論) 10만여 언()을 지어 유석지도(儒釋之道)를 일관(一貫)하여 한유(韓愈)의 배불지설(排佛之說)에 항거(抗拒)했다. 개봉부(開封府; 지금의 河南 개봉)를 지()한 용도(龍圖) 왕공소(王公素)ㆍ구양수(歐陽修)ㆍ정사맹(程師孟)이 주진(奏進; 上奏하여 進上)하자 인종(仁宗; 1010-1063 재위 10221063)이 이를 열람하고 가탄(嘉歎)했으며 편수(編修)에 맡겨 입장(入藏)했으니 가로되 보교편(輔敎篇) 3권이며 자의방포와 명교란 호를 주었다(賜紫衣方袍明敎之號也).

和尙; 범본(梵本)의 정명(正名)은 오파가(鄔波迦)니 우전(于闐)에 전해지자 번역해 화상(和尙)이라 했고 차토(此土)에 전지(傳至)하자 번역해 역생(力生)이라 했다. 이르자면 출가자가 스승의 힘으로 인해 법신(法身)을 생장(生長)하여 공덕재(功德財)를 내고 지혜명(智慧命)을 양육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역생이다.

; 심통(心通; 마음이 통달함)을 가로되 도()며 또 성명(成名; 名聲을 성취함)을 일러 도라 하나니 곧 불조(佛祖)의 미묘한 도다. ()에 있어선 곧 육집궐중(允執厥中)의 묘도(妙道).

; 신정(身正)을 가로되 덕()이니 입신(立身)을 말함이다. ()은 계정혜(戒定慧)가 있고 유()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있으니 모두 이를 일컬어 덕이라 한다.

; ()은 거성(去聲). 무릇 천하를 가진() 자를 사람이 일컬어 가로되 왕()이라 하며 또 몸이 사해(四海)에 임()함을 가로되 왕().

伯夷叔齊;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고죽은 나라 이름이니 성은 묵태씨(墨胎氏)며 그 아들 백이(伯夷)는 이름이 윤()이며 자는 공신(公信). 계자(季子; 막내아들) 숙제(叔齊)는 이름이 지()며 자는 공달(公達). 시왈(; 와 같음) 백이숙제(伯夷叔齊) 그의 부친이 장차 훙()하려 하자 유명(遺命)으로 숙제(叔齊)를 세웠다. 숙제가 천륜(天倫)을 중요하게 여겨 내가 재위(在位)함은 불의(不義)라 했고 백이(伯夷)는 부명(父命)을 존중하여 내가 재위하면 불효(不孝)라 했다. 두 사람이 모두 달아나자 국인(國人)이 그 중자(仲子)를 세워 국군(國君)으로 삼았다. 그 두 사람이 서백창(西伯)이 양로(養老)를 잘한다 함을 듣고 모두 가서 그에게 귀의했다. 문왕(文王; 1152-1056)이 죽자() 무왕(武王)이 주()를 정벌했다. 두 사람이 말머리를 잡아당기며() 간해 가로되 부왕이 죽고 장사도 지내지 못했는데 이에 간과(干戈; 방패와 창. 전쟁)에 이른다면 가히 효()라고 이르겠는가.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한다면 가히 충()이라고 이르겠는가. 좌우가 그를 죽이려() 하자 태공(太公; 呂尙)이 가로되 이는 의인(義人)이다. 부축해 떠나게 했다. 무왕이 평정(平定)하자 천하가 주()를 종앙(宗仰)했다. 이제(夷齊)는 수치로 여겨 주속(周粟; 주의 곡식)을 먹지 않고 드디어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면서 고사리를 채취해 먹었는데 마침내 아사(餓死)했다.

夏桀; 이름이 이계(履癸)며 제발(帝發)의 아들이다. 시법() 적인(賊人)이 많이 죽임을 가로되 걸()이다. 황음(荒婬)하여 도가 없었다. 시씨(施氏)의 딸을 얻었으니 이름을 가로되 매희(妹喜)였다. 경루(瓊樓; 은 옥 경)와 요대(瑤臺; 는 아름다운 옥 요)를 만들어 뜻을 다해 오락을 취했다. 주지(酒池)에 배를 운행했는데 조제(糟堤; 는 지게미 조. 곧 지게미의 제방)가 가히 10리를 바라보았다. 용봉(龍逢)이 충성으로써 간()했으나 따르지 않고 죽였다. 은탕(殷湯)이 덕이 있어 이윤(伊尹)이 탕()을 보좌해 걸()을 정벌했다. 걸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자 삼종국(三椶國)으로 달아났다. 탕이 또 따라가서 그를 정벌했고 걸을 남소(南巢)로 추방하여 죽었다.

商紂; 이름이 신()이며 또한 이름이 수()니 제을(帝乙)의 아들이다. 시법() 잔의손선(殘義損善)을 가로되 주(). 소씨(蘇氏)의 딸 달기(妲己)를 얻어 매우 그를 총애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시설하고 남녀로 하여금 나형(躶形)으로 그 사이에서 상축(相逐)하게 했다. 장야궁(長夜宮)을 지어 포락지형(炮烙之刑; 뜨겁게 달군 쇠로 살을 지지는 형벌)을 썼고 과잉착섭(刳孕剒涉; 孕婦의 태를 가르고 才士의 다리를 자름)했다. 녹대(鹿臺)를 조성했는데 7년 만에 완성했고 충량(忠良)을 학해(虐害)했다. 신숙(臣叔)인 비간(比干)이 충성을 다해 간하자 드디어 심장을 갈라 죽였다. 태사(太師) 기자(箕子)는 미친 척하며 노복(奴僕)이 되었고 서형(庶兄)인 미자(微子)는 그가 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피해 떠났다. 후에 무왕이 거병하여 그를 정벌했다. 패해 녹대에 올라 머리를 싸고 불에 다다라 죽었다.

周幽; 이름이 궁열(宮涅; 으로 의심됨)이며 선왕(宣王)의 아들이다. 시법(謚法) 옹알(壅遏)하여 통하지 않음을 가로되 유(). 태정학민(殆政虐民; 위태한 정치에 인민을 학대함)했고 드디어 기산(岐山)이 스스로 붕괴되고 산천의 물이 고갈됨에 이르렀다. 포인(褒人)의 여자를 얻었는데 이름이 포사(褒姒)며 그를 총애했다. 이에 신후(申后)와 아울러 태자 의구(宜臼)를 폄출(貶黜)했다. 포사가 웃는 걸 좋아하지 않자 여산(驪山)에 봉화를 들어올려 희롱으로 포사의 웃음에 아첨했다. 후에 신후가 노하여 견융(犬戎)을 불러들여 여산(驪山)의 아래에서 죽였다.

周厲; 이름이 호()니 이왕(夷王)의 아들이다. 시법(謚法) 무고(無辜)를 살육함을 가로되 려(). 왕은 무도(無道)를 행했고 치오포학(侈傲暴虐)했다. 나라 사람이 그를 비방하자 왕이 위무(衛巫)를 시켜 비방을 감시하게 했다. 다만 비방함이 있는 자는 모두 죽였다. 소공(召公)이 간해 가로되 하()의 입을 막으면 상()의 허물을 이룹니다. 사직(社稷)에 근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왕이 듣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반란하였고 화가 왕에게 미쳤다. 왕이 이에 체()로 출분(出奔)했다. 태자가 어린지라 주소(周召) 2()이 서로 화협(和恊)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린지라 고로 호칭이 공화(共和). 소아(小雅) 22편은 모두 문무성강(文武成康)의 선정(善政)이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모두 폐()했다.

 


禪林寶訓合註; 四卷 淸代張文嘉較定 張文憲參閱 淸順治七年(1650)序刊 爲禪林寶訓注釋書之一 本書以淨善重編之禪林寶訓 大建之禪林寶訓音義爲藍本 參照有關禪林寶訓之注釋書 刪其繁蕪 增補其不備者 於各篇附註 並於各卷末附音切 今收錄於嘉興藏第二十八冊 卍續藏第一一三冊

4권. 청대 장문가(張文嘉)가 교정하고 장문헌(張文憲)이 참열(參閱; 참여해 校閱)했음. 청 순치 7(1650) 처음 간행했음. 선림보훈의 주석서의 하나가 됨. 본서는 정선(淨善)이 중편한 선림보훈과 대건(大建)의 선림보훈음의를 남본(藍本; 원본)으로 삼고 선림보훈과 유관한 주석서를 참조하여 그 번무(繁蕪)를 깎고 그 불비자(不備者)를 증보하고 각편(各篇)에 부주(附註)하고 아울러 각권의 끝에 음절(音切)을 첨부했음. 지금 가흥장 제28책과 만속장 제113책에 수록되었음.

 

張文嘉; (1611-1678) 字仲嘉 錢塘(今屬杭州)[百度百科]

(1611-1678) 자는 중가(仲嘉)며 전당(錢塘; 지금 항주에 속함) 사람 [백도백과].

 

; 古代對男子的美稱 也作甫 廣韻 父 尼父尙父 皆男子的美稱

고대 남자에 대한 미칭. 또한 보()로 지음. 광운 보() 니보(尼父)ㆍ상보(尙父)는 다 남자의 미칭이다.

 

淸源下; 淸源 禪書多作靑原 指唐代之靑原行思禪師 下 派下之意 卽六祖慧能法嗣靑原行思之法系 對稱於六祖弟子南嶽懷讓所出系統南嶽下 行思得法之後 住於江西吉州靑原山之靜居寺 闡揚禪旨

청원(淸源)은 선서(禪書)에 다분히 청원(靑原)으로 지음. 당대의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를 가리키며 하()는 파하(派下)의 뜻이니 곧 6조 혜능의 법사 청원행사의 법계(法系). 6조의 제자 남악회양에서 나온 바의 계통 남악하(南嶽下)와 대칭됨. 행사는 득법한 후 강서 길주 청원산의 정거사에 주()하면서 종지를 천양(闡揚)했음.

 

世間; 世爲遷流之義 破壞之義 覆眞之義 間爲中之義 墮於世中之事物 謂之世間 又間隔之義 世之事物 個個間隔而爲界畔 謂之世間 卽與所謂世界相同 大要有二種 一有情世間 謂有生者 二器世間 國土也 [楞嚴經四 唯識述記一本]

()는 천류(遷流)의 뜻이며 파괴의 뜻이며 부진(覆眞)의 뜻이며 간()은 중()의 뜻이 됨. 세중(世中)의 사물(事物)에 떨어짐을 이를 일러 세간이라 함. 또 간격(間隔)의 뜻이니 세()의 사물은 개개(個個)가 간격하여 계반(界畔)이 되며 이를 일러 세간이라 함. 곧 이른 바 세계(世界)와 서로 같나니 대요(大要)2종이 있음. 1은 유정세간(有情世間)이니 이르자면 생자(生者)가 있음이며 2는 기세간(器世間)이니 국토임 [릉엄경4. 유식술기1].

 

韓愈; (768-824) 唐代古文家 字退之 鄧州南陽(河南南陽)人 先世居昌黎 讚揚儒家 反對佛敎道敎 憲宗時 官至刑部侍郞 後以諫迎佛骨事 貶爲潮州刺史 晩年官至吏部侍郞 人稱韓吏部 嘗問道於大顚和尙 長慶四年十二月卒 時年五十七 贈禮部尙書 謚曰文 [舊唐書一六新唐書一七六 祖庭事苑四 百度百科]

(768-824) 당대(唐代)의 고문가(古文家). 자는 퇴지(退之)며 등주 남양(하남 남양) 사람이니 선세(先世; 前代. 先祖)는 창려에 거주했음. 유가(儒家)을 찬양(讚揚)했고 불교와 도교에 반대했음. 헌종 때 벼슬이 형부시랑에 이르렀고 후에 불골(佛骨)을 영접하는 사건을 간하다가 폄직(貶職)되어 조주자사가 되었음. 만년에 벼슬이 이부시랑에 이르렀고 사람들이 한이부(韓吏部)라 일컬었음. 일찍이 대전화상(大顚和尙)에게 도를 물었고 장경 412월에 졸()했으며 당시의 나이는 57. 예부상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가로되 문()이라 했음 [구당서160. 신당서176. 조정사원4. 백도백과].

 

; 主管 碧巖錄第四十八則種電鈔云 知字官領也 又司也 太守謂之知也

주관(主管). 벽암록 제48칙 종전초에 이르되 지자(知字)는 관령(官領). 또 사(). 태수를 일러 지()라 함.

 

龍圖; 宋代龍圖閣學士的省稱 [百度百科]

송대 용도각학사의 생칭(省稱) [백도백과].

 

歐陽修; (1007-1072) 北宋文學家 史學家 吉州廬陵(江西吉安)人 字永叔 號醉翁 六一居士 諡號文忠 唐宋八大家之一 天聖八年(1030) 進士及第 歷任地方刺史 四十八歲時受召爲翰林學士 嘉祐五年(1060) 任樞密副使 次年 任參知政事 熙寧四年(1071)罷官 次年逝世 享年六十六 著有本論三篇 極力排斥佛老思想 且其編輯唐書及新五代史時 盡刪除有關佛敎紀事二百餘則 然至晩年 一反而成爲佛敎信徒

(1007-1072) 북송의 문학가며 사학가. 길주 여릉(강서 길안) 사람. 자는 영숙이며 호는 취옹ㆍ육일거사며 시호는 문충. 당송팔대가의 하나임. 천성 8(1030) 진사로 급제하였고 지방의 자사를 역임했음. 48세 때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가 되었고 가우 5(1060) 추밀부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참지정사에 임명되었음. 희녕 4(1071) 관직이 파직되었고 다음해 세상을 떠났음. 향년 66. 저서에 본론 3편이 있음. 극력으로 불로사상(佛老思想)을 배척했음. 그가 당서 및 신오대사를 편집할 때 불교에 유관한 기사 200여 칙을 모두 산제(刪除)했음.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한 번 돌이키자 불교 신도가 되었음.

 

程師孟 字公辟 號正議 蘇州吳縣(今江蘇蘇州市)人 生於官宦之家 宋景祐元年(1034)進士 歷任光水 錢塘縣令 桂州通判 楚州夔路和河東提點刑獄 [百度百科]

()는 공벽(公辟)이며 호는 정의(正議)니 소주(蘇州) 오현(吳縣; 지금의 강소 소주시) 사람. 환관지가(官宦之家)에서 출생했고 송 경우 원년(1034) 진사(進士). 광수ㆍ전당 현령(縣令), 계주통판(桂州通判), 초주(楚州)ㆍ기로(夔路)와 하동 제점형옥(提點刑獄)을 역임했음 [백도백과].

 

賜紫衣方袍; 古代朝廷敕賜臣下服章以朱紫爲貴 及於唐朝 乃仿此制 由朝廷敕賜紫袈裟授有功德之僧 以表榮貴 案大宋僧史略下 唐武則天時 法朗等重譯大雲經 陳符命之言 謂武則天乃彌勒下生 爲閻浮提主 唐氏合微 武則天爲此封法朗薛懷義等九人爲縣公 竝敕賜紫袈裟 此乃賜僧紫衣之始 方袍; 比丘之法衣(袈裟)皆爲方形 故稱方袍 又稱方服 [方服圖記]

고대 조정에서 신하의 복장(服章)을 칙사(敕賜)하면서 주자(朱紫)를 존귀함으로 삼았음. 당조(唐朝)에 이르러 이에 이 제도를 본떠 조정을 말미암아 자가사(紫袈裟)를 칙사(敕賜)하여 공덕이 있는 승인에게 수여하여 영귀(榮貴)를 표시했음. 대송승사략하를 안험컨대 당 무측천(武則天) 때 법랑(法朗) 등이 대운경(大雲經)을 중역(重譯)하자 부명(符命; 하늘에서 제왕이 될 만한 사람에게 주는 상서로운 징조)의 말을 진술하되 이르기를 무측천은 곧 미륵이 하생하였으며 염부제(閻浮提)의 주()가 될 것이며 당씨(唐氏)는 합당히 미소(微小)하리라. 무측천이 이 때문에 법랑과 설회의 등 9인을 봉()해 현공(縣公)으로 삼고 아울러 자가사(紫袈裟)를 칙사했으니 이것이 곧 승인에게 자의(紫衣)를 줌의 시작이었음. 方袍; 비구의 법의(가사)가 모두 방형이 되는지라 고로 명칭이 방포며 또 명칭이 방복임 [방복도기].

 

于闐; 于闐國 西域古王國 又作于塡 于殿 于遁 谿旦 屈丹 位於新疆西部 卽今和闐之地 西紀三世紀前後 稱爲瞿薩旦那(此云地乳) 印度人則稱屈丹 自古卽爲印度波斯中國間之貿易途徑 亦爲東西文化之要衝 [西域記十二 慧琳音義十一 翻譯名義集三]

우전국(于闐國; Udayana)이니 . 서역의 고대 왕국임. 또 우전(于塡)ㆍ우전(于殿)ㆍ우둔(于遁)ㆍ계단(谿旦)ㆍ굴단(屈丹)으로 지음. 신강성 서부에 위치하며 즉금의 화전(和闐)의 땅임. 서기 3세기 전후에 구살단나(瞿薩旦那; Ku-stana. 여기에선 이르되 地乳)로 일컬었으며 인도인은 곧 굴단(屈丹)으로 일컬었음. 자고로 곧 인도ㆍ파사(波斯; 페르시아)중국 간의 무역의 길이었으며 또한 동서 문화의 요충지가 되었음 [서역기12. 혜림음의11. 번역명의집3].

 

法身; 佛三身之一 謂證得淸淨自性 成就一切功德之身

불타의 3신의 하나. 이르자면 청정한 자성을 증득하여 일체 공덕을 성취한 몸.

 

允執厥中; 意指言行不偏不倚 符合中正之道 允 誠信 執 遵守 厥 其 中 中正 書大禹謨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뜻은 언행이 불편불의(不偏不倚; 치우치지 않음)하고 중도의 도에 부합함을 가리킴. ()은 성신(誠信)이며 집()은 준수(遵守)며 궐()은 기()며 중()은 중정(中正). () 대우모(大禹謨). 인심은 오직 위험하고 도심(道心)은 오직 미묘하다. 오직 정()하고 오직 일()이라야 진실로 그 중()을 잡는다.

 

去聲; 古漢語平上去入四聲中的第三聲 平聲者哀而妄 上聲者厲而擧 去聲者淸而遠 入聲者直而促 [百度百科]

옛 한어 평ㆍ상ㆍ거ㆍ입 4성 중의 제3. 평성(平聲)이란 것은 애처로우면서 허망하며 상성(上聲)이란 것은 힘을 쓰면서 높음이며 거성(去聲)이란 것은 맑으면서 멀며 입성(入聲)이란 것은 곧으면서 급함 [백도백과].

 

; 君主時代帝王貴族大臣等死後 依其生前事跡所給予的稱號

군주시대 제왕ㆍ귀족ㆍ대신 등의 사후에 그 생전의 사적(事跡)에 의해 급여(給予)했던 칭호.

 

西伯; 一爵位 自周始祖後稷以至周文王等十餘人都曾在西伯位 二特指周文王 [百度百科]

1. 작위니 주()의 시조 후직(後稷)으로부터 이지(以至; 내지) 주문왕 등 10여 인이 모두 일찍이 서백위(西伯位)에 있었음. 2. 특별히 주문왕(周文王; 姬昌)을 가리킴 [백도백과].

 

太公; 呂尙(約前1156-約前1017) 姜姓 呂氏 名尙 一名望 字子牙 或單呼牙 也稱呂望 別號飛熊 商朝末年人 其先祖爲四嶽 佐禹平水土甚有功 虞夏之際封於呂 從其封姓 故以呂爲氏 出生地主要有東海說和河內說 [百度百科]

여상(呂尙; 1156-1017)이니 강성(姜姓)이며 여씨(呂氏). 이름음 상()이니 일명이 망(). 자는 자아(子牙)니 혹 단호(單呼)하여 아(). 또 명칭이 여망(呂望)이며 별호가 비웅(飛熊)이니 상조(商朝) 말년의 사람. 그 선조는 사악(四嶽)이 되며 우()를 도와 수토(水土)를 평정하는 데 매우 공이 있었음. 우하(虞夏)의 즈음에 여()에 봉해졌으며 그 봉성(封姓)을 좇은지라 고로 여()로 씨()를 삼았음. 출생지는 주요한 게 동해설(東海說)과 하내설(河內說)이 있음 [백도백과].

 

首陽山; 現山西省永濟縣南 [百度漢語]

현재 산서성 영제현 남쪽 [백도한어].

 

; 按死者行跡立號之法 以表彰其行爲事跡 始於周 廢於秦 漢時又恢復其法 沿至淸末始廢 [百度漢語]

죽은 자의 행적을 안험(按驗; 查驗)하여 입호(立號)하던 법이니 그의 행위와 사적(事跡)을 표창(表彰)했음. ()에서 비롯했고 진()에서 폐했고 한시(漢時)에 또 그 법을 회복했고 연습(沿襲)하다가 청말에 이르러 비로소 폐했음 [백도한어].

 

殷湯; ()은 혹 명칭이 은상(殷商)이니 성탕(成湯)이 하걸(夏桀)을 멸한 후 건립한 국가의 이름이 상()이었고 후에 여러 차례 천사(遷徙)했는데 공원전 14세기 반경(盤庚)이 은(;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 서)으로 옮기고 국호를 고쳐 은이라 했음.

 

伊尹; (1649-1549) 伊姓 名摯 小名阿衡 尹 不是名字 而是右相的意思 夏朝末年生於空桑(一說今河南杞縣 一說今洛陽伊川縣) 因其母居伊水之上 故以伊爲氏 伊尹傷中國無賢君 歎斯道不行 隱耕於有莘之野 湯三往聘之 拜爲相 [禪林寶訓音義 百度百科]

(1649-1549) 이성(伊姓)이며 이름은 지()니 어릴 적 이름은 아형(阿衡)이었음. ()은 이 명자가 아니라 이는 우상(右相)의 의사(意思). 하조(夏朝) 말년 공상(일설엔 지금의 하남 기현이며 일설은 지금의 낙양 이천현)에서 출생했음. 그의 모친이 이수(伊水)의 위쪽에 거주했음으로 인해 고로 이()로써 씨를 삼았음. 이윤이 중국에 현군(賢君)이 없음을 상심하고 이 도가 행하지 않음을 탄식하면서 유신지야(有莘之野)에서 은거하며 경작했는데 탕()이 세 번 가서 그를 초빙하여 제배(除拜)하여 상()으로 삼았음 [선림보훈음의. 백도백과].

 

妲己; 蘇妲己 冀州侯蘇護之女 河內溫(今河南省溫縣蘇王村)人 有蘇氏之女 有蘇氏部落之女 世稱蘇妲己 商紂王妃子 己姓 字妲 據左傳記載 公元前一四七 商紂王發動大軍 攻擊有蘇部落 有蘇部落抵擋不住强大的商軍進攻 在滅亡和屈膝間 有蘇部落首領選擇屈膝 獻出牛羊馬匹及美女妲己 [百度百科]

소달기(蘇妲己)니 기주후(冀州侯) 소호(蘇護)의 딸. 하내온(지금의 하남성 온현 소왕촌) 사람. 유소씨(有蘇氏)의 딸이며 유소씨 부락의 여자니 세칭이 소달기. () 주왕(紂王)의 비자(妃子; 황제의 첩. 지위는 황후의 다음). 기성(己姓)이며 자는 달(). 좌전의 기재에 의거하자면 공원전 1047에 상() 주왕(紂王)이 대군을 발동하여 유소부락을 공격하자 유소부락에서 강대한 상군의 진공을 저당(抵擋; 저항)하여 멈추게 하지 못해 멸망과 굴슬(屈膝; 무릎을 꿇음)의 사이에 있었음. 유소부락의 수령이 굴슬을 선택하고 소ㆍ양ㆍ마필(馬匹; 말과에 딸린 집짐승의 하나) 및 미녀 달기를 내어 바쳤음 [백도백과].

 

比干; (1125-1063) 子姓 沫邑(今河南淇縣)人 商代帝王太丁的次子 帝辛的叔父 官少師(丞相) [百度百科]

(1125-1063) 자성(子姓)이며 말읍(지금의 하남 기현) 사람. 상대(商代) 제왕 태정(太丁)의 둘째 아들이며 제신(帝辛)의 숙부. 관직이 소사(少師; 丞相)였음 [백도백과].

 

太師; 三公(太師太傅太保)之一 補佐天子的中國最高地位也

3(三公; 太師太傅太保)의 하나. 천자를 보좌하는 중국 최고의 지위임.

 

褒姒; 史記作襃姒 生卒年不詳 姒姓 褒國人 周幽王姬宮湦之第二任王后 太子姬伯服的生母 周平王姬宜臼的後母 前七七九年 周幽王攻打褒國 褒國兵敗 獻出褒姒乞降 [百度百科]

사기에 포사(襃姒)로 지어졌음. 생졸년은 불상(不詳). 사성(姒姓)이며 포국(褒國) 사람이며 주유왕(周幽王) 희궁생(姬宮湦)의 제2() 왕후(王后)며 태자 희백복(姬伯服)의 생모며 주평왕 희의구(姬宜臼)의 후모(後母). () 779년 주유왕이 포국을 공타(攻打)했고 포국이 전쟁에서 패하자 포사를 헌출(獻出)하고 항복을 구걸했음 [백도백과].

 

犬戎; 西戎種族的一支 多分布於今陝西涇渭流域一帶

서융 종족의 일지(一支). 다분히 지금의 섬서 경위(涇渭) 유역의 일대(一帶)에 분포했음.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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