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仁祖*皇祐初 遣*銀璫小使 持綠綈*尺一書 召圓通訥住*孝慈大*伽藍 訥稱疾不起 表疏大覺應詔 或曰 聖天子*旌*崇道德 恩被泉石 師何*固辭 訥曰 予*濫廁僧倫 視聽不聰 幸安林下 *飯蔬飮水 雖佛祖有所*不爲 況其他耶 *先哲有言 大名之下 難以久居 予平生行知足之計 不以聲利自*累 若*猒于心 何日而足 故*東坡甞曰 知安則榮 知足則富 避名全節 善始善終 在圓通得之矣〈行實〉
●仁祖; 宋四帝仁宗也
●皇祐; 卽年號也
●銀璫; 耳㻔也 秦漢中以小宦官 著銀璫左貂 明帝改爲金璫右貂 宮中出入傳命使 悉用閹人
●尺一; 漢時制尺一之板 而駕詔書也
●孝慈; 汴京自唐朝毀寺 太祖建隆間復興兩街 止是南山律部 慈恩賢首疏鈔義學而已 士夫聰明超越者 皆厭名相因果 當時天台止觀 達磨禪宗未行 淳化〈太宗年號〉以來 四明尊者 天台懺主遵式行道東南 止觀心宗慧眼照映天下 翰林楊億晁回首發明之 至是時內使李允寧 奏施汴宅一區 創立禪席 賜額十方淨因禪院 帝留意空宗 詔下三省定議 召有道者住持 歐陽修 程師孟 奏請圓通訥禪師 允寧親持詔下江州 訥稱目疾耳背不赴 帝益敬重 聽擧自代 訥擧大覺應詔 天下賢哲 在訥得之矣
●伽藍; 譯爲衆園 園謂生植之所 佛弟子則生植道芽 趣登聖果 能福利羣生 故曰衆園也
●旌; 旗首曰旌 以旌有功者 又欽也
●崇; 敬重也
●固辭; 辭而不受也 三辭爲節 一辭爲禮 二辭爲謙 三辭爲固辭也
●濫廁; 泛雜也
●飯蔬; 飯 食也 蔬 麤食也 聖人之心 渾然天理 雖處困極 而樂亦無不在焉 其視不義之富貴如浮雲之有無 漠然無動其心
●不爲; 性本如空 難名難相 金屑雖貴 落眼成塵
●先哲; 指范蠡也
●累; 縈縛也
●厭; 滿足也
●東坡; 姓蘇 名軾 字子瞻 眉山人 得法東林常聰禪師 仕至翰林 嘗與佛印 激揚酬唱 於黃州築室城東 因號東坡居士
【7】 인조(*仁祖) 황우(*皇祐; 1049-1054) 초(初) 은당(*銀璫) 소사(小使)를 보내어 녹제(綠綈; 저본에 錄綈로 지었음) 척일서(*尺一書)를 가지고 원통눌(圓通訥; 居訥)을 불러 효자대가람(*孝慈大*伽藍)에 주(住)하라 했다. 거눌(居訥)이 칭질(稱疾)하며 일어나지 않았고 표소(表疏; 奏章)로 대각(大覺; 懷璉)이 응조(應詔)하게 했다. 혹왈(或曰; 누가 가로되) 성천자(聖天子)가 도덕(道德)을 정숭(*旌*崇)하면 성은(聖恩)이 천석(泉石)에 미치거늘(被) 스님은 왜 고사(*固辭)하는가. 거눌이 가로되 내가 승륜(僧倫; 승려의 무리)에 남측(*濫廁)하여 시청(視聽)이 총명(聰明)하지 못한데 다행히 임하(林下)에 안거(安倨)하면서 반소음수(*飯蔬飮水)하나니 비록 불조(佛祖)라도 불위(*不爲)할 바가 있거늘 하물며 기타(其他)이겠는가. 선철(*先哲)이 말씀이 있었으니 대명지하(大名之下)엔 구거(久居)하기 어렵다. 내가 평생 지족지계(知足之計; 지족의 活計)를 행하면서 성리(聲利; 名利)로써 스스로 누(*累)하지 않았다. 만약 마음에 만족(*猒)하려면 어느 날에 만족하겠는가. 고로 동파(*東坡)가 일찍이 가로되 지족(知安)하면 곧 영화(榮華)며 지족하면 곧 부귀니 피명(避名)하여 전절(全節; 節操를 穩全히 하다)해야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 했거니와 원통(圓通)에 있으면서 이를 얻었다. 〈行實〉.
●仁祖; 송 4제(帝) 인종(仁宗; 1010-1063 在位1022–1063)이다.
●皇祐; 곧 연호다.
●銀璫; 이타(耳㻔; 귀고리 옥)다. 진한(秦漢) 중에 어린 환관(宦官)은 은당(銀璫)에 좌초(左貂)를 착용했고 명제(明帝)가 고쳐 금당(金璫)에 우초(右貂)로 하였다. 궁중에서 출입하는 전명사(傳命使)는 모두 엄인(閹人)을 채용(採用)했다.
●尺一; 한시(漢時)의 제도(制度)는 척일지판(尺一之板)으로 조서(詔書)를 부렸다(駕).
●孝慈; 변경(汴京)은 당조(唐朝)로부터 사원이 허물어졌고 태조(太祖; 송태조) 건륭(建隆; 960-963) 간에 양가(兩街)를 부흥했으나 다만(止) 이는 남산율부(南山律部)와 자은(慈恩)ㆍ현수(賢首)의 소초(疏鈔)의 의학(義學)일 따름이었다. 사부(士夫)로서 총명(聰明)이 초월한 자들은 모두 명상(名相)과 인과(因果)를 싫어했다. 당시에 천태지관(天台止觀)과 달마선종(達磨禪宗)이 유행(流行)하지 않았는데 순화(淳化; 990-994)〈太宗年號〉 이래로 사명존자(四明尊者)와 천태참주(天台懺主) 준식(遵式)이 동남에서 행도(行道)했다. 지관(止觀)과 심종(心宗)의 혜안(慧眼)이 천하를 조영(照映)하자 한림(翰林) 양억조(楊億晁)가 회수(回首)하여 이를 발명(發明)했다. 이때에 이르러 내사(內使) 이윤녕(李允寧)이 상주(上奏)하여 변택(汴宅; 汴京의 家宅) 일구(一區)를 보시하여 선석(禪席)을 창립(創立)하자 사액(賜額)하여 시방정인선원(十方淨因禪院)이라 했다. 황제가 공종(空宗)에 유의(留意)하여 3성(三省)에 조칙을 내려 정의(定議; 결정을 의논함)하고 도가 있는 자를 불러 주지하게 했다. 구양수(歐陽修)와 정사맹(程師孟)이 원통눌(圓通訥) 선사를 주청(奏請)했고 윤녕(允寧)이 친히 조서를 가지고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성 九江)로 내려갔으나 거눌이 목질(目疾)과 이배(耳背)를 일컬으며 다다르지 않았다. 황제가 더욱(益) 경중(敬重)하며 스스로 대체할 이를 천거함을 청허(聽許)하자 거눌이 대각(大覺)을 천거하여 응조(應詔)했다. 천하의 현철(賢哲)이 거눌에게 있으면서 이를 얻었다.
●伽藍; 번역하면 중원(衆園)이다. 원(園)은 이르자면 생식지소(生植之所)니 불제자(佛弟子)가 곧 도아(道芽)를 생식(生植)하여 성과(聖果)에 취등(趣登)하고 능히 군생(羣生)을 복리(福利)케 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중원(衆園)이다.
●旌; 기수(旗首)를 가로되 정(旌)이니 유공자(有功者)를 정(旌; 나타내다)함이다. 또 흠(欽)이다.
●崇; 경중(敬重; 공경하고 존중함)이다.
●固辭; 사양(辭讓)하며 받지 않음이다. 3사(辭)는 절조(節操)가 되고 1사(辭)는 예의가 되고 2사(辭)는 겸양(謙讓)이 된다. 3사는 고사(固辭)가 된다.
●濫廁; 범잡(泛雜; 널리 섞임)이다.
●飯蔬; 반(飯)은 먹음(食)이며 소(蔬)는 거친 음식(麤食)이다. 성인의 마음은 천리(天理)와 혼연(渾然)하며 비록 곤극(困極)에 처하더라도 낙(樂)이 또한 있지 않음이 없다. 그는 불의(不義)의 부귀를 부운(浮雲)의 유무(有無)와 같이 보므로 막연(漠然)하여 그 마음이 동(動)하지 않는다.
●不爲; 자성(自性)이 본래 공(空)과 같아서 이명이상(難名難相)했다. 금가루가 비록 귀하나 눈에 떨어지면 티끌을 이룬다.
●先哲; 범려(范蠡)를 가리킨다.
●累; 영박(縈縛; 얽매이다)이다.
●厭; 만족이다.
●東坡; 성은 소(蘇)며 이름은 식(軾; 1036-1101)이며 자는 자첨(子瞻)이니 미산(眉山) 사람이며 동림(東林; 동림선원) 상총선사(常聰禪師; 黃龍慧南을 이었음)를 이었으며 벼슬(仕)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일찍이 불인(佛印; 了元이니 운문종승)과 더불어 격양(激揚)하며 수창(酬唱)했고 황주(黃州; 지금의 호북성 黃岡)에서 성동(城東)에 축실(築室)한지라 인하여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다.
林下; 田野 山野 山林 常指遠離塵囂的僧人修行之地 又隱退閑居之地
전야(田野; 논밭과 들). 산야. 산림. 늘 진효(塵囂; 속세의 소란함과 번거로움)를 멀리 여읜 승인의 수행의 땅을 가리킴. 또 은퇴하여 한가하게 거주하는 땅.
左貂; 冠飾 以貂尾飾於冠左
관식(冠飾)이니 초미(貂尾)로써 관좌(冠左)를 장식(裝飾)함.
閹人; 割去生殖器官的男子
생식기관을 베어 제거한 남자.
尺一之板; 亦稱尺一牘 尺一板 古時詔板長一尺一寸 故稱天子的詔書爲尺一 亦指一般書信 [百度百科]
또한 명칭이 척일독(尺一牘)ㆍ척일판(尺一板)이니 고시 조판(詔板)은 길이가 1척1촌인지라 고로 천자의 조서를 일컬어 척일(尺一)이라 함. 또한 일반의 서신을 가리킴 [백도백과].
汴京; 古稱汴州 東京 大梁 今河南開封 是中國多個重要王朝的首都 戰國時期 魏國建都於此 稱大梁 五代十國時期國家四分五裂 先後成爲後梁 後晉 後漢及後周的國都 公元九六〇 後周大將趙匡胤發動陳橋兵變 代後周稱帝 建立宋朝(北宋) 仍以開封爲首都 稱爲東京 [百度百科]
고칭(古稱)은 변주(汴州)ㆍ동경(東京)ㆍ대량(大梁)이었음. 지금의 하남 개봉이니 이는 중국 다개(多個)의 중요한 왕조의 수도였음. 전국시기 위국(魏國)이 여기에 건도(建都)하여 대량(大梁)이라 일컬었음.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 국가가 사분오열되자 선후로 후량ㆍ후진ㆍ후한 및 후주의 국도가 되었음. 공원 960 후주 대장 조광윤(趙匡胤)이 진교병변(陳橋兵變)을 발동하여 후주를 대체해 칭제(稱帝)하고 송조(宋朝; 北宋)를 건립했는데 그대로 개봉을 수도로 삼았고 일컬어 동경이라 했음 [백도백과].
兩街; 左右街 原是唐代之官職名稱 唐代時 長安有六街 分爲左三街右三街 左右街使司掌巡察巡警之責 德宗貞元年間(785-805) 沿用左右街之名稱 而置左右街大功德使 專門總理僧尼之名籍 唐憲宗元和年間(806-820) 於兩街功德使之下 設置僧錄 以雲邃爲右街僧錄 端甫爲左街僧錄 又左右僧錄司有時倂爲一職 稱爲兩街僧錄或左右街僧錄 [大宋僧史略中 釋門正統四 宋高僧傳六 同十七 同二十九]
좌우가(左右街)니 원래 이 당대(唐代)의 관직의 명칭이었음. 당대의 시절에 장안에 6가(街)가 있었는데 나누어 좌3가(左三街) 우3가(右三街)로 삼았음. 좌우가사(左右街使)는 순찰과 순경(巡警)의 책무를 맡아 장악했음. 덕종(德宗) 정원년 간(785-805) 좌우가의 명칭을 따라 써 좌우가대공덕사(左右街大功德使)를 설치하였는데 전문적으로 승니의 명적(名籍)을 총리(總理)하였음. 당 헌종(憲宗) 원화년 간(806-820) 양가(兩街)의 공덕사(功德使) 아래 승록(僧錄)을 설치했고 운수(雲邃)를 우가승록으로 삼고 단보(端甫)를 좌가승록으로 삼았음. 또 좌우승록사는 어떤 때엔 합병하여 1직(職)으로 만들었으며 양가승록 혹은 좌우가승록이라고 일컬었음 [대송승사략중. 석문정통4. 송고승전6, 동17, 동29].
南山; 唐道宣 四分律宗之祖也 住終南山之紵麻蘭若 故號南山大師
당 도선(道宣)은 사분율종의 시조며 종남산의 저마란야에 거주했으므로 고로 호가 남산대사임.
慈恩; 慈恩宗 卽法相宗 法相宗又稱唯識宗 應理圓實宗 有相宗 相宗 在古印度 稱瑜伽行宗 在中國 爲唐朝慈恩三藏玄奘 及其弟子窺基所創 此宗立五位百法 分判有爲無爲等諸法 以鼓吹萬法唯識之旨 以其爲窮明萬法性相之宗派 故此一大乘敎派卽稱法相宗 又以玄奘窺基皆住於慈恩寺 故稱慈恩宗 習法相之學者 則稱慈恩家 因主張以依他起 遍計所執 圓成實等三相 解釋宇宙萬有故 又稱三相宗 主要經典爲華嚴經 解深密經 瑜伽師地論 成唯識論
자은종(慈恩宗)이니 곧 법상종(法相宗)임. 법상종은 또 명칭이 유식종(唯識宗)ㆍ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ㆍ유상종(有相宗)ㆍ상종(相宗)임. 고인도에선 유가행종(瑜伽行宗)이라 호칭했고 중국에선 당조(唐朝) 자은삼장 현장(玄奘) 및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창립한 바가 됨. 이 종은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세우고 유위무위 등의 제법을 분판(分判)하면서 만법유식의 지취를 고취함. 그것이 만법성상(萬法性相)을 궁명(窮明)하는 종파가 되는지라 고로 이 하나의 대승교파를 곧 법상종이라 일컬음. 또 현장과 규기가 모두 자은사에 거주한지라 고로 호칭이 자은종이며 법상을 학습하는 학자를 곧 일컬어 자은가라 함. 의타기(依他起)ㆍ편계소집(遍計所執)ㆍ원성실(圓成實) 등 3상(相)을 주장하며 우주만유를 해석하기 때문에 고로 또 호칭이 삼상종(三相宗)임. 주요한 경전은 화엄경ㆍ해심밀경ㆍ유가사지론ㆍ성유식론임.
賢首; 賢首宗 華嚴宗也 唐代華嚴宗第三祖法藏 字賢首 至賢首而此宗大成 故名
현수종이니 화엄종임. 당대 화엄종 제3조 법장의 자가 현수며 현수에 이르러 이 종이 대성(大成)한지라 고로 이름함.
義學; 卽名相訓義之學 理論之學 又稱解學 亦卽有關敎義理論之學問
곧 이름ㆍ형상ㆍ훈고(訓詁)ㆍ의리(義理)의 학문이니 이론의 학문임. 또 칭호가 해학(解學)이며 또한 곧 교의(敎義)의 이론과 관련이 있는 학문임.
士夫; 一通稱男子 二士大夫
1. 남자의 통칭(通稱). 2. 사대부(士大夫).
名相; 名 事物之名稱 相 事物之形相 ▲漢語大字典 相 佛敎名詞 對性而言 佛敎把一切事物外現的形象狀態 稱之爲相
명(名)은 사물의 명칭이며 상(相)은 사물의 형상(形相)임. ▲한어대자전. 상(相) 불교의 명사(名詞)니 성(性)을 상대해 말함이다. 불교에선 일체의 사물과 밖으로 나타난 형상(形象)과 상태(狀態)를 잡아 이를 일컬어 상(相)이라 한다.
天台止觀; 天台止觀有四本 一曰圓頓止觀 大師於荊州玉泉寺說 章安記爲十卷 二曰漸次止觀 在瓦官寺說 弟子法愼記 本三十卷 章安治定爲十卷 今禪波羅蜜是 三曰不定止觀 卽陳尙書令毛喜請大師出 有一卷 今六妙門是 四曰小止觀 卽今文是 亦名童蒙止觀 大師爲俗兄陳鍼出 寔大部之梗槪 入道之樞機 曰止觀 曰定慧 曰寂照 曰明靜 皆同出而異名也 [百度文庫]
천태지관은 4본(本)이 있음. 1은 가로되 원돈지관(圓頓止觀)이니 대사(大師)가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에서 설했고 장안(章安)이 기록했으며 10권이 됨. 2는 가로되 점차지관(漸次止觀)이니 와관사(瓦官寺)에서 설했고 제자 법신(法愼)이 기록했으며 본래 30권이었으나 장안(章安)이 치정(治定)하여 10권으로 만들었음. 지금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이것임. 3은 가로되 부정지관(不定止觀)이니 곧 진(陳) 상서령(尙書令) 모희(毛喜)의 청으로 대사가 내었음. 1권이 있으며 지금의 육묘문(六妙門)이 이것임. 4는 가로되 소지관(小止觀)이니 즉금의 문(文)이 이것이며 또 이름이 동몽지관(童蒙止觀)임. 대사가 속형(俗兄) 진침(陳鍼)을 위해 내었음. 참으로(寔) 대부(大部)의 경개(梗槪; 대강의 줄거리)며 입도(入道)의 추기(樞機)니 가로되 지관(止觀)이며 가로되 정혜(定慧)며 가로되 적조(寂照)며 가로되 명정(明靜)이거니와 모두 동출(同出)하여 다른 이름임 [백도문고].
達磨禪宗; 略稱禪宗 以菩提達磨爲初祖 探究心性本源 以期見性成佛之大乘宗派 [佛祖統紀二十九]
약칭이 선종. 보리달마를 초조로 삼아 심성의 본원을 탐구하여 견성성불을 기약하는 대승종파 [불조통기29].
四明尊者; 宋代知禮法師居浙江寧波四明山 弘天台之正義 號四明尊者
송대 지례법사(知禮法師)가 절강 영파 사명산에 거주하며 천태의 정의(正義)를 홍포했으며 호가 사명존자임.
遵式; (964-1032) 宋代僧 台州臨海(浙江寧海)人 俗姓葉 字知白 投天台義全出家 十八歲落髮 二十歲於禪林寺受具足戒 翌年復就守初習律 嘗於普賢像前燃一指 誓傳天台敎法 雍熙元年(984) 從寶雲寺義通修學天台宗典籍 盡其奧祕 與同門之知禮成爲山家派中心人物 後復興故天竺寺居之 懺講不絶 從學者恆逾千人 眞宗乾興元年(1022)敕賜慈雲之號 天聖二年(1024) 師奏請天台敎部編入大藏 竝撰敎藏隨函目錄 仁宗明道元年示寂 世壽六十九 師之撰著極夥 除大彌陀懺儀 小彌陀懺儀 往生淨土懺願儀 金光明三昧儀等有關懺儀之作外 另有大乘止觀釋要 肇論疏科 金園集 天竺別集等專論數十種 以師所撰懺儀甚多 故世稱百本懺主 又稱慈雲懺主 慈雲尊者 哲宗高宗時 復分別追贈法寶大師 懺主禪慧法師之號 嗣法弟子有妙果文昌 明智祖韶 法喜淸鑑等 [釋門正統五 鐔津文集十二 同十五 佛祖統紀十 同二十五 佛祖歷代通載二十七 四明尊者敎行錄一 同七 釋氏稽古略四]
(964-1032) 송대승. 태주 임해(절강 영해) 사람이며 속성은 섭이며 자는 지백. 천태의전에게 투신해 출가했음. 18세에 낙발(落髮)했고 20세에 선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다음해 다시 수초(守初)에게 나아가 율을 학습했음. 일찍이 보현상(普賢像) 앞에서 한 손가락을 태우면서 천태교법을 전하기로 맹세했음. 옹희 원년(984) 보운사 의통(義通)을 좇아 천태종 전적을 학습하여 그 오비(奧祕)를 다했음. 동문의 지례(知禮)와 산가파(山家派)의 중심인물이 되었음. 후에 고천축사(故天竺寺)를 부흥하여 거기에 거주하며 참강(懺講)을 단절하지 않았고 따르는 학자가 항상 천 인을 넘었음. 진종 건흥 원년(1022) 자운(慈雲)의 호를 칙사(敕賜)했고 천성 2년(1024) 스님이 주청하여 천태교부(天台敎部)를 대장(大藏)에 편입했고 아울러 교장수함목록(敎藏隨函目錄)을 찬(撰)했음. 인종 명도 원년에 시적했고 세수는 69. 스님의 찬저(撰著)가 극히 많았음. 대미타참의ㆍ소미타참의ㆍ왕생정토참원의ㆍ금광명삼매의 등 참의(懺儀)와 유관한 저작을 제한 밖에 따로 대승지관석요ㆍ조론소과ㆍ금원집ㆍ천축별집 등 전론(專論) 수십 종이 있음. 스님이 지은 바 참의가 매우 많은지라 고로 세칭이 백본참주(百本懺主)며 또 호칭이 자운참주(慈雲懺主)ㆍ자운존자(慈雲尊者)임. 철종과 고종 때 다시 분별하여 법보대사ㆍ참주선혜법사의 호를 추증(追贈)했음. 사법제자에 묘과문창ㆍ명지조소ㆍ법희청감 등이 있음 [석문정통5. 심진문집12, 동15. 불조통기10, 동25. 불조역대통재27. 사명존자교행록1, 동7. 석씨계고략4].
止觀; 梵名奢摩他 毘鉢舍那 譯言止觀 定慧 寂照 明靜 止者停止之義 停止於諦理不動也 此就能止而得名 又止息之義 止息妄念也 此就所觀而得名 觀者觀達之義 觀智通達 契會眞如也 此就能觀而得名 又貫穿之義 智慧之利用 穿鑿煩惱而殄滅之也 若就所修之方便而言 則止屬于空門 眞如門 緣無爲之眞如而遠離諸相也 觀者屬於有門 生滅門 緣有爲之事相而發達智解也 若就所修之次第而言 則止在前 先伏煩惱 觀在後 斷煩惱 正證眞如 蓋止伏妄念 譬如磨鏡 磨已 則鏡體離諸垢(是斷惑) 能現萬像(是證理) 是卽觀也 若眞止眞觀必爲不二 以法性寂然是止 法性常照是觀也 然則眞觀必寂然 故觀卽止 眞止必明淨 故止卽觀也 [注維摩經二 摩訶止觀一至三 止觀輔行一 大乘義章十] ▲摩訶止觀一 法性寂然名止 寂而常照名觀
범명(梵名) 사마타(奢摩他; 梵 śamatha)와 비발사나(毘鉢舍那; 梵 vipaśyanā)는 번역해 말하되 지관(止觀)ㆍ정혜(定慧)ㆍ적조(寂照)ㆍ명정(明靜)임. 지(止)란 것은 정지(停止)의 뜻이니 체리(諦理)를 정지하여 부동(不動)함이며 이것은 능지(能止)로 나아가 득명(得名)했음. 또 지식(止息)의 뜻이니 망념을 지식함이며 이것은 소관(所觀)으로 나아가 득명(得名)했음. 관(觀)이란 것은 관달(觀達)의 뜻이니 관지(觀智)를 통달하여 진여에 계회(契會)함이며 이는 능관(能觀)으로 나아가 득명(得名)했음. 또 관천(貫穿)의 뜻이니 지혜의 이용(利用)으로 번뇌를 천착하여 진멸(殄滅)함임. 만약 소수(所修)의 방편으로 나아가 말하면 곧 지(止)는 공문(空門)ㆍ진여문(眞如門)에 속하며 무위의 진여를 반연(攀緣)하여 제상(諸相)을 원리(遠離)함임. 관(觀)이란 것은 유문(有門)ㆍ생멸문(生滅門)에 속하며 유위의 사상(事相)을 반연하여 지해(智解)를 발달시킴. 만약 소수(所修)의 차제로 나아가 말하면 곧 지(止)는 앞에 있어 먼저 번뇌를 굴복시키며 관(觀)은 뒤에 있어 번뇌를 단절하고 진여를 정증(正證)함. 대개 망념을 지복(止伏)함은 비유컨대 마경(磨鏡)과 같나니 연마해 마치면 곧 경체(鏡體)가 제구(諸垢)를 여의고(이것이 斷惑) 능히 만상을 나타내나니(이것이 證理) 이것이 곧 관(觀)임. 만약 진지진관(眞止眞觀)이면 반드시 불이(不二)가 되나니 법성이 적연(寂然)함은 이 지(止)며 법성이 상조(常照)함은 이 관(觀)임. 그러한 즉 진관(眞觀)은 반드시 적연(寂然)하므로 고로 관이 곧 지임. 진지(眞止)는 반드시 명정(明淨)하므로 고로 지가 곧 관임 [주유마경2. 마하지관1지3. 지관보행1. 대승의장10]. ▲마하지관1. 법성이 적연함은 이름이 지(止)며 적연하면서 늘 비춤은 이름이 관(觀)이다.
心宗; 禪宗 禪宗提倡直指人心 明心見性 故稱
선종이니 선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ㆍ명심견성(明心見性)을 제창하는지라 고로 일컬음.
翰林; (一)翰林院 唐代以來歷代王朝所置的官廳之一 按唐會要五十七 翰林院開元(713-741)初置 本在銀臺門內 麟德殿西廂重廊之後 蓋天下以藝能技術見召者之所處也 學士院者 開元二十六年之所置 在翰林之南 別戶東向 (二)皇帝的文學侍從官 唐朝以後始設 明淸改從進士中選拔 [百度漢語]
(1) 한림원(翰林院)이니 당대 이래 역대 왕조에서 설치한 바의 관청의 하나. 당회요57을 안험컨대 한림원은 개원(713-741)초에 설치했으며 본래 은대문(銀臺門) 안, 인덕전(麟德殿) 서상중랑(西廂重廊; 廂은 곁채)의 뒤에 있었음. 대개 천하에서 예능과 기술로 현소(見召; 부름에 알현)하는 자의 소처(所處)임. 학사원(學士院)이란 것은 개원 26년에 설치한 곳이며 한림의 남쪽에 있고 별호(別戶)는 동향임. (2) 황제의 문학시종관(文學侍從官)이니 당조(唐朝) 이후에 비로소 설치했음. 명ㆍ청에선 진사(進士) 가운데로부터 고쳐서 선발했음 [백도한어].
內使; 指傳達皇帝詔令的內監
황제의 조령을 전달하는 내감을 가리킴.
空宗; 有宗之對稱 指主張一切皆空 般若皆空之宗派 大乘之般若思想卽其代表 以宣揚中道之空觀爲主 從主張諸法皆空之龍樹提婆之敎系中 相對於小乘敎俱舍宗之有宗而言 指成實宗 相對於大乘法相宗(唯識)而言 則指三論宗 又禪宗亦稱空宗 主張佛魔皆空 以言語思辨爲閑葛藤而排遣之 此外 有稱佛敎爲空宗者 以佛敎主張諸法無我之故 [大乘起信論義記上 原人論 宗鏡錄三十四]
유종(有宗)의 대칭. 일체가 모두 공했으며 반야가 다 공했다고 주장하는 종파를 가리킴. 대승의 반야사상이 곧 그것의 대표니 중도의 공관을 선양함으로써 주(主)로 삼으며 제법이 모두 공했음을 주장하는 용수와 제바의 교계(敎系) 가운데를 좇음. 소승교인 구사종(俱舍宗)의 유종(有宗)을 상대해 말한다면 성실종(成實宗)을 가리키며 대승의 법상종(法相宗; 유식)을 상대해 말한다면 곧 삼론종을 가리킴. 또 선종을 또한 공종이라고 호칭하나니 불마(佛魔; 부처와 마군)가 다 공했다고 주장하며 언어와 사변(思辨)을 한갈등(閑葛藤)으로 삼아 그것을 배견(排遣)함. 이 외에 불교를 일컬어 공종으로 삼는 자가 있으니 불교는 제법무아를 주장하는 연고임 [대승기신론의기상. 원인론. 종경록34].
三省; 三省制度 肇始於隋 完善於唐 宋遼沿用 三省卽中書省 門下省 和尙書省 分別負責起草詔書 審核詔書和執行政令 一定程度上起到防止個人專斷的作用 三省爲中書省決策 門下省審議 尙書省執行 三省的長官都是宰相 [百度百科]
3성(省)의 제도는 수(隋)에서 비롯했고 당에서 완선(完善)했으며 송ㆍ요는 따라서 썼음. 3성은 곧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 부책(負責; 부담하고 책임짐)을 분별하자면 조서(詔書)를 기초(起草)하고 조서의 심핵(審核; 審查核定)과 정령을 집행하고 일정한 정도상(程度上)에서 개인의 전단(專斷)을 방지하는 작용을 일으킴. 3성에서 중서성은 결책(決策; 政策을 결정)하고 문하성은 심의하고 상서성은 집행함. 3성의 장관은 모두 이 재상임 [백도백과].
耳背; 背 聽覺不靈 靈 聰明 曉
배(背)는 청각이 불령(不靈)이니 령(靈)은 총명, 효(曉).
漠然; 毫不在意 毫不關心的樣子
터럭만큼도 뜻에 두지 않음. 터럭만큼도 관심이 없는 양자.
范蠡; (前536-前448) 字少伯 華夏族 春秋時期楚國宛地三戶(今河南淅川縣滔河鄕)人 春秋末著名的政治家 軍事家 經濟學家和道家學者 [百度百科] ▲史記四十一越王句踐世家 范蠡事越王句踐 旣苦身戮力 與句踐深謀二十餘年 竟滅吳 報會稽之恥 北渡兵於淮 以臨齊晉 號令中國 以尊周室 句踐以霸 而范蠡稱上將軍 還反國 范蠡以爲大名之下 難以久居 且句踐爲人可與同患 難與處安 …… 乃裝其輕寶珠玉 自與其私徒屬 乘舟浮海以行 終不反 於是句踐表會稽山以爲范蠡奉邑 范蠡浮海出齊 變姓名 自謂鴟夷子皮 耕於海畔 苦身戮力 父子治産 居無幾何 致産數十萬 齊人聞其賢 以爲相 范蠡喟然歎曰 居家則致千金 居官則至卿相 此布衣之極也 久受尊名不祥 乃歸相印 盡散其財 以分與知友鄕黨 而懷其重寶 間行以去 止於陶 以爲此天下之中 交易有無之路通 爲生可以致富矣 於是自謂陶硃公 複約要父子耕畜 廢居 候時轉物 逐什一之利 居無何 則致貲累巨萬 天下稱陶硃公
(前 536-前 448) 자는 소백이며 화하족(華夏族)임. 춘추시기 초국(楚國) 완지 삼호(지금의 하남 석천현 도하향) 사람. 춘추말의 저명한 정치가ㆍ군사가ㆍ경제학가 그리고 도가학자 [백도백과]. ▲사기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범려(范蠡)가 월왕 구천(句踐)을 섬겼다. 이미 몸을 노고롭게 하며 힘을 모아 구천과 함께 깊이 모의하기 20여 년이었고 마침내 오(吳)를 멸해 회계(會稽)의 치욕을 갚았다. 북방으로 회(淮)에 군사를 도하(渡河)시켜 제(齊)와 진(晉)에 임해 중국을 호령하면서 주실(周室)을 존중했다. 구천이 패자(霸者)가 되자 범려를 상장군(上將軍)으로 호칭했고 귀환하여 나라로 돌아왔는데 범려가 대명지하(大名之下)에 오래 거주하기 어렵다 했다(大名之下 難以久居). 또 구천의 사람됨이 가히 더불어 동환(同患)하지만 더불어 처안(處安)하기 어렵다 했다 …… 이에 그 경보(輕寶)와 주옥(珠玉)을 싣고 스스로 그의 집안(私) 도속(徒屬)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떠나더니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구천이 회계산에 표시하여 범려의 봉읍(奉邑)으로 삼았다. 범려가 바다에 떠서 제(齊)로 나가 성명을 바꾸어 스스로 이르기를 치이자피(鴟夷子皮)라 했다. 바닷가에 경작하면서 몸을 노고롭게 하고 힘을 모아 부자(父子)가 치산(治産; 산업을 경영함)했는데 거주한 지 얼마 안되어 수십만의 재산을 이루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 현명을 듣고 재상으로 삼았다. 범려가 한숨 지으며 탄식해 가로되 거가(居家)하매 곧 천금을 이루고 거관(居官)하매 곧 경상(卿相)에 이름은 이것은 포의(布衣)의 극치다. 오래 존명(尊名)을 받음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는 상인(相印; 재상의 인장)을 돌려주었다. 그의 재산을 모두 흩쳐 지우(知友)와 향당(鄕黨)에게 분배해 주고 그 중보(重寶)만 품었다. 사잇길로 행하면서 떠나 도(陶)에 이르렀다. 여기가 천하 중에서 유무(有無)를 교역하는 노통(路通; 통로)이라 하며 위생(爲生; 謀生)한다면 가이(可以) 치부(致富)하리라. 이에 스스로 이르기를 도주공(陶硃公)이라 했다. 거듭 약요(約要; 약속)하여 부자가 경축(耕畜)했다. 폐거(廢居; 화물을 매매함의 뜻)하여 시세를 살펴가며 전물(轉物)했는데 열에 하나의 이득을 좇아 거처한 지 얼마 안되어 곧 재물 여러 거만(巨萬)을 이루었다. 천하에서 일컫기를 도주공이라 했다.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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