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합주

선림보훈합주 192

태화당 2022. 11. 10. 08:44

192 妙喜曰 愛惡異同 人之常情 惟賢達高明 不被其所轉 昔圓悟住雲居 高菴退東堂 愛圓悟者惡高菴 同高菴者異圓悟 由是叢林紛紛然 有圓悟高菴之黨 竊觀二*大士 播大名于海上 非常流可擬 惜乎昧於輕信小人諂言 惑亂聰明 遂爲識者笑 是故宜其*亮座主*隱山之流 爲高上之士也智林集

大士; 有德之稱 謂當代英賢 思拔羣類 智出衆情 弘道利生 故曰大士也

亮座主; 西蜀人 頗講經論 因參馬祖 發明大事 隱於洪州西山 更無消息 政和間 有熊秀才 遊西山 過翠巖 長老思文與秀才 俱是鄱陽人 故遣二力士 擡籃輿送至 所經林壑 草木蔭翳 偶見一僧 貌古神淸 龐眉雪頂 編葉爲衣 坐於盤石 如壁間𦘕佛圖澄之狀 熊自謂曰 今時無這般僧 甞聞亮座主 隱於西山 疑其猶在 出輿踧踖而前曰 莫是亮座主麽 僧以手向東指 熊方與二力 隨手回視 失僧所在 時小雨初歇 熊登石視 其座處猶乾 躊蹰回顧 太息曰 宿緣不厚 雖遇而不遇也

隱山; 潭州龍山禪師 因參馬祖 發明心要 後隱潭州龍山 一日洞山悟本 與密師伯遊山 前見溪流菜葉 莫有道人居否 遂撥草循溪 行六七里 忽見隱山在菴前 便問 此山無路 闍黎從何處來 洞曰 無路且置 和尙從何而入 師曰 我不從雲水來 洞曰 和尙住此山多少時節 曰春秋不涉 洞曰 此山先住 和尙先住 師曰不知 洞曰 爲甚麽不知 師曰 我不從人天來 洞曰 和尙得何道理便住此山 師曰 我見兩個泥牛鬪入海 直至如今絕消息 洞山良久 具威儀禮拜 便問 如何是主中主 師曰 長年不出戶 洞曰 如何主中賓 師曰 靑山覆白雲 洞曰 賓主相去幾何 師曰 長江水上波 洞曰 賓主相見 有何言句 師曰 淸風拂白雲 洞山辭退 乃述偈曰 三間茅屋從來住 一道神光萬境閑 莫將是非來辯我 浮生穿鑿不相關 自此焚菴 遁入深山幽寂之處 不知所在 因號隱山

 

192 묘희(妙喜; 宗杲)가 가로되 애오(愛惡)와 이동(異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오직 현달(賢達)의 고명(高明)이라야 그 소전(所轉)을 입지 않는다. 지난날() 원오(圓悟; 克勤)는 운거(雲居)에 주()했고 고암(高菴; 善悟)은 동당(東堂)에 퇴거(退居)했는데 원오를 좋아하는() 자는 고암을 싫어했고() 고암과 같은() 자는 원오와 달랐다(). 이로 말미암아 총림이 분분연(紛紛然)했고 원오와 고암의 당()이 있었다. 가만히() 두 대사(*大士)를 관찰하건대 해상(海上)에 대명(大名)을 전파(傳播)했음이 상류(常流)가 가히 비교하지() 못하거늘 애석하게도 경신(輕信)하는 소인의 첨언(諂言; 저본에 謟言으로 지었음)에 어두워() 총명을 혹란(惑亂)해 드디어 식자(識者)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런 고로 의당(宜當) 그 양좌주(*亮座主)와 은산(*隱山)의 무리()가 고상지사(高上之士)가 된다. 智林集.

大士; 유덕(有德)의 명칭이다. 이르자면 당대(當代)의 영현(英賢)이며 사상이 군류(羣類)에서 빼어나고() 지혜가 중정(衆情)을 초출하며 홍도(弘道)하고 이생(利生)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대사(大士).

亮座主; 서촉(西蜀) 사람이다. 자못 경론을 강설했다. 마조를 참함으로 인해 대사(大事)를 발명(發明)하고 홍주(洪州) 서산(西山)에 은거했는데 다시 소식이 없었다. 정화(政和; 1111-1118) 간 웅수재(秀才)가 있어 서산(西山)을 유람하다가 취암(翠巖)에 이르렀는데() 장로 사문(思文)과 수재(秀才)는 모두 이 파양(鄱陽) 사람인지라 고로 두 역사(力士)를 보내어 남여(籃輿;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생긴 가마)를 들어 송지(送至; 보내고 이르다)하게 했다. 경과하는 바 임학(林壑; 숲 골짜기)에 초목이 음예(蔭翳; 그늘로 가림)했는데 우연히 한 승인을 보았다. 모고신청(貌古神淸; 形貌高古하고 心神淸朗)하고 방미설정(龐眉雪頂; 눈썹이 흑백의 잡색이며 백발의 頭頂)이었고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삼았다. 반석에 앉은 게 벽 사이에 불도징(佛圖澄; 저본에 佛圓澄으로 지었음)의 형상(形狀)을 그린 듯했다. ()이 스스로 일러 가로되 금시에 이러한 승인이 없다, 일찍이 들으니 양좌주(亮座主)가 서산에 은거한다 했는데 그가 아직 있음인가 하고 의심했다. 가마에서 나가 축적(踧踖; 공경하며 삼가는 모양)하며 접근해 가로되 이 양좌주가 아니십니까. 승인이 손으로 동쪽을 향해 가리켰다. 웅이 바야흐로 두 역사(力士)와 손 따라 돌아보았는데 승인의 소재를 잃었다. 때에 소우(小雨; 가랑비)가 처음 그쳤는데 웅이 돌에 올라 보니 그가 앉은 곳은 오히려 건조했다. 주저(躊躇)하며 돌아보면서 매우 탄식하며 가로되 숙연(宿緣)이 두텁지 못해 비록 그를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다.

隱山; 담주(潭州) 용산선사(龍山禪師)가 마조를 참()함으로 인해 심요(心要)를 발명(發明)하고 후에 담주 용산에 은거했다. 어느 날 동산오본(洞山悟本; 洞山良价)이 밀사백(密師伯; 神山僧密)과 더불어 유산(遊山)하다가 계곡에 채소 잎이 떠내려감이 앞에 보였다. 도인의 거처가 있지 않을까. 드디어 풀을 헤치고 계곡을 돌며 6, 7리를 갔는데 홀연히 은산(隱山)이 암전(菴前)에 있음을 보았다. 곧 묻되 이 산은 길이 없거늘 사리(闍黎)가 어느 곳을 좇아왔는가. 동산이 가로되 길 없음은 그래 두고 화상은 어디로부터 들어왔습니까. 사왈(師曰) 나는 운수(雲水)를 좇아오지 않았다. 동산이 가로되 화상이 이 산에 거주하신 지 얼마의 시절입니까. 가로되 춘추에 교섭치 않는다. 동산이 가로되 이 산이 먼저 머물렀습니까, 화상이 먼저 머물렀습니까. 사왈(師曰) 알지 못하느니라. 동산이 가로되 무엇 때문에 알지 못합니까. 사왈(師曰) 나는 인천(人天)을 좇아오지 않았다. 동산이 가로되 화상이 무슨 도리를 얻어 곧 이 산에 거주하십니까. 사왈(師曰) 내가 보았는데 두 개의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에 들더니 바로 여금에 이르기까지 소식이 끊겼다. 동산이 양구(良久)하고는 위의를 갖춰 예배하고 바로 묻되 무엇이 이 주중주(主中主)입니까. 사왈(師曰) 오랜 해 동안 문호를 나가지 않았다(長年不出戶). 동산이 가로되 무엇이 이 주중빈(主中賓)입니까. 사왈(師曰) 청산이 백운에 덮였다. 동산이 가로되 빈주(賓主)가 서로 떨어지기가 얼마입니까. 사왈(師曰) 장강의 수상의 파도니라. 동산이 가로되 빈주가 상견하면 무슨 언구(言句)가 있습니까. 사왈(師曰) 청풍이 백운을 떨친다. 동산이 고별하고 물러났다. 이에 술게(述偈)하여 가로되 3()의 띳집에 종래로 거주하니/ 한 가닥() 신광(神光)이라 만경(萬境)이 한적하다/ 시비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분변하지 말지니/ 부생(浮生)의 천착(穿鑿)엔 상관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암자를 불사르고 심산(深山)의 유적(幽寂)한 곳에 둔입(遁入)했는데 소재(所在)를 알지 못했다. 인하여 호가 은산(隱山)이다.

 


賢達; 賢能通達之人 有才德聲望的人

현능(賢能)하고 통달한 사람. 재덕(才德)과 성망(聲望)이 있는 사람.

 

高明; 見解獨特不同凡人 或技藝高超

견해가 독특하여 범인과 같지 않거나 혹은 기예가 고초(高超).

 

秀才; 秀才是中國古代選拔官吏的科目 亦曾作爲學校生員的專稱 漢武帝改革選官制度 令地方官府考察和推擧人才 卽爲察擧 元封四年(107) 命公卿 諸州每年各擧薦秀才一名 意爲優秀人才 東漢因避光武帝名諱 遂改稱茂才 三國曹魏時沿襲察擧 復改稱秀才 至南北朝時 擧薦秀才尤爲重視 隋代始行科擧制 設秀才科 唐初沿置此科 及第者稱秀才 後廢秀才科 秀才遂作爲一般讀書人的泛稱 宋代爲士子和應擧者的統稱 明代曾一度采用薦擧之法 亦有擧秀才 明淸時期 秀才亦專用以稱府州縣學生員 [百度百科]

수재는 이 중국 고대 관리를 선발하는 과목이며 또한 일찍이 학교 생원(生員)의 전칭(專稱)으로 지었음. 한무제(漢武帝)가 선관제도(選官制度)를 개혁해 지방 관부(官府)에 인재를 고찰(考察)하고 그리고 추거(推擧; 추천)하게 했으니 곧 찰거(察擧)가 됨. 원봉 4(107) 공경(公卿)과 제주(諸州)에 명해 매년 각기 수재 1명을 거천(擧薦; 천거)하게 했으니 뜻이 우수한 인재가 됨. 동한(東漢)은 광무제의 명휘(名諱)를 피함으로 인해 드디어 무재(茂才)로 개칭했음. 삼국 조위(曹魏) 때 연습(沿襲; 전례를 따라서 함)하여 찰거(察擧; 선발)하면서 다시 수재로 개칭했음. 남북조 때에 이르러 수재를 거천(擧薦)함을 더욱 중시했음. 수대(隋代)에 과거제(科擧制)를 시행(始行)했고 수재과(秀才科)를 설치했음. 당초(唐初) 이 과()를 따라서 설치했고 급제한 자를 일컬어 수재라 했음. 후에 수재과를 폐지했으며 수재는 드디어 일반 독서인의 범칭(泛稱)이 되었음. 송대엔 사자(士子; 지식인)와 응거자(應擧者;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통칭(統稱)이 되었음. 명대에 일찍이 천거(薦擧)의 법을 한 차례 채용했고 또한 수재를 천거함이 있었음. 명ㆍ청 시기 수재는 또한 부주현(府州縣)의 학생원(學生員)의 명칭으로 전용했음 [백도백과].

 

佛圓澄; (232-348) 佛圖澄者梵語 無翻名 晉代西域僧 帛氏 少出家 淸貞務學 志弘大法 永嘉四年(310)來洛陽 時石勒屯兵葛陂 專以殺戮爲務 澄多方開導 勒信服 稍歛其焰 且每事必諮澄而後行 尊之爲大和尙 勒死 弟石虎襲位 雖暴戾有加 但亦傾心事澄 澄得專事化度 興立佛寺 廣致徒衆 宣講奥理 一時僧朗道安輩 皆出其門 [梁高僧傳十 釋氏六帖十一 六學僧傳二十九]

(232-348) 불도징이란 것은 범어며 번명(翻名)이 없음. 진대(晉代) 서역승이며 백씨(帛氏). 어릴 적에 출가했고 청정(淸貞)하게 학문에 힘썼으며 대법을 홍포함에 뜻을 세우고 영가 4(310) 낙양으로 왔음. 때에 석륵(石勒)이 갈파에 둔병(屯兵)하고 오로지 살육으로 업무로 삼았음. 징이 다방(多方)으로 개도하매 석륵이 신복(信服)했음. 조금 그 화염을 거두자 또 매사를 반드시 징에게 물은 후에 행했음. 그를 존칭해 대화상이라 했음. 석륵이 죽자 동생 석호(石虎)가 자리를 이었고 비록 포악하고 사나움을 더함이 있었으나 다만 또 마음을 기울여 징을 모셨음. 징이 오로지 화도(化度)에 종사함을 얻자 불사(佛寺)를 흥립(興立)하고 널리 도중을 이르게 했으며 오묘한 이치를 선강(宣講)했음. 일시의 승랑(僧朗)ㆍ도안(道安)의 무리도 모두 그의 문에서 배출되었음 [양고승전10. 석씨육첩11. 육학승전29].

 

闍黎; 梵語阿闍黎的簡稱 又作闍梨 意爲僧人之師 常用作對僧人的稱呼

범어 아사리(阿闍黎; Ācārya)의 간칭. 또 사리(闍梨)로 지음. 뜻이 승인의 스승이 됨. 상용하여 승인에 대한 칭호로 지음.

 

良久; 默然 沈默 原意爲許久之時間 於禪林中 轉指無言無語之狀態

묵연. 침묵. 원래의 뜻은 허구(許久; 매우 오래)한 시간이 되지만 선림 중에선 전()하여 무언무어(無言無語)의 상태를 가리킴.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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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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