師墜腰石鐫龍朔元年盧居士誌八字 此石今存黃梅東禪 又唐王維右丞 爲神會大師作祖師記云 師混勞侶積十六載 會印宗講經 因爲削𩬊 又柳宗元刺史 作祖師諡號碑云 師受信具 遯隱南海上十六年 度其可行 乃居曹溪爲人師 又張商英丞相 作五祖記云 五祖演化於黃梅縣之東禪院 蓋其便於將母 龍朔元年 以衣法付六祖已 散衆入東山結庵 有居人憑茂 以山施師 爲道場焉 以此考之 則師至黃梅傳受五祖衣法 實龍朔元年辛酉歲 至儀鳳丙子 得一十六年 師方至法性祝髮 他本或作師咸亨中至黃梅 恐非
스님의 추요석(墜腰石)에 용삭원년노거사지(龍朔元年盧居士誌)란 8자가 새겨졌다. 이 돌은 현금에 황매의 동선(東禪; 東禪院)에 존재한다. 또 당(唐) 왕유(王維) 우승(右丞)이 신회대사(神會大師)를 위해 조사기(祖師記)를 지어 이르되 스님이 노려(勞侶)에 섞여 16재(載)를 쌓고서야 인종(印宗)을 만나 강경(講經)했고 인하여 삭발(削𩬊)했다. 떠 유종원(柳宗元) 자사(刺史)가 조사시호비(祖師諡號碑)를 지어 이르되 스님이 신구(信具)를 받고 남해상(南海上)에 둔은(遯隱)하기 16년이었다. 그 가히 행함을 탁량(度量)하고 이에 조계에 거주하며 사람들의 스승이 되었다. 또 장상영(張商英) 승상(丞相)이 오조기(五祖記)를 지어 이르되 5조는 황매현(黃梅縣)의 동선원(東禪院)에서 연화(演化)했으니 대개 그것이 장모(將母; 奉母. 將은 奉)하기야 편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 661) 의법(衣法)을 6조에게 부촉하고 나서 대중을 흩고 동산(東山)에 들어가 결암(結庵)했는데 거인(居人; 居民) 빙무(憑茂)가 있어 산을 스님에게 보시하여 도량(道場)으로 삼았다. 이로써 그것을 고찰(考察)하건대 곧 스님이 황매에 이르러 5조의 의법(衣法)을 전수(傳受)함은 실로 용삭 원년 신유세(辛酉歲)며 의봉(儀鳳) 병자(丙子; 676)에 이르기까지 16년을 얻고서야 스님이 바야흐로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러 축발(祝髮)했다. 타본(他本)에 혹 스님이 함형(咸亨; 670-674) 중에 황매에 이르렀다 한 것은 그른가 염려된다.
王維; (699-759) 唐代詩人畵家 南宗文人畵始祖 字摩詰 山西省太原人 開元(713-741)中右拾遺監察御史 天寶(742-755)末拜給事中 歷官尙書右丞 與弟縉皆篤志奉佛 居常蔬食 不茹葷血 晩年長齋 不衣文綵 乾元二年(759)七月卒(新唐書云 上元初卒 年六十一) [新唐書二王維傳 名公法喜志二]
(699-759) 당대 시인이며 화가. 남종(南宗) 문인화(文人畵)의 시조니 자는 마힐(摩詰)이며 산서성 태원 사람. 개원(713-741) 중 우습유감찰어사였고 천보(742-755) 말 급사중(給事中)에 제배(除拜)되었음.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역관(歷官)했고 동생 진(縉)과 더불어 모두 독지(篤志)로 봉불(奉佛)했음. 거상(居常; 평상시) 소식(蔬食)했고 훈혈(葷血)을 먹지 않았음. 만년에 장재(長齋)하며 문채(文綵; 무늬 있는 비단)를 입지 않았음. 건원 2년(759) 7월에 졸했음(신당서에 이르되 上元 초에 卒했고 나이는 61) [신당서2왕유전. 명공법희지2].
右丞; 官名 自漢至金有尙書左丞尙書右丞 元及明初有中書右丞中書左丞(元先右 明先左) 又淸末新設和部及民國袁世凱統治時期亦置右丞 [百度百科]
벼슬 이름. 한(漢)으로부터 금(金)에 이르기까지 상서좌승(尙書左丞)과 상서우승이 있었음. 원(元) 및 명초(明初)에 중서우승(中書右丞)과 중서좌승(元은 先右며 明은 先左)이 있었음. 또 청말에 화부(和部)를 신설했고 및 민국 원세개(袁世凱)가 통치하던 시기에 또한 우승(右丞)을 설치했음 [백도백과].
勞侶; 一塵勞之黨侶也 塵勞者煩惱之異名 二指寺院中從事雜役者 此指一
1. 진로(塵勞)의 당려(黨侶; 한동아리의 벗). 진로란 것은 번뇌의 다른 이름. 2. 사원 중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자를 가리킴.
柳宗元; (773-819) 唐代文人 唐宋八大家之一人 字子厚 世稱柳柳州 山西河東人 貞元(785-804)中拜監察御史 元和(806-820)中爲柳州剌史 後貶永州司馬 撰淨土院記 南嶽大明律師碑 著有柳河東集等 [舊唐書一六〇 名公法喜志二]
(773-819) 당대 문인.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자는 자후(子厚)며 세칭이 유유주(柳柳州)니 산서 하동 사람. 정원(785-804) 중에 감찰어사에 제배(除拜)되었고 원화(80 6-820) 중에 유주자사(柳州剌史)가 되었음. 후에 영주사마로 강등되었음. 정토원기와 남악대명율사비를 지었음. 저서에 유하동집 등이 있음 [구당서160. 명공법희지2].
信具; 禪宗傳法以袈裟和鉢盂作爲信標 此衣鉢稱爲信具
선종에서 전법하면서 가사와 발우로써 신표(信標)를 삼는데 이 의발을 일컬어 신구(信具)라 함.
張商英; (1043-1121) 北宋黃龍派居士 蜀州(四川崇慶)新津人 字天覺 號無盡居士 自幼卽銳氣倜儻 日誦萬言 初任通州主簿 一日入寺見藏經之卷冊齊整 怫然曰 吾孔聖之書 乃不及此 欲著無佛論 後讀維摩經有感 乃歸信佛法 神宗(1068-1085)時 受王安石推擧入朝 大觀年間 爲尙書右僕射 未久因事謫於外 及遷江西運使 禮謁東林寺常總(嗣黃龍) 得其印可 復投兜率寺從悅(黃龍下二世) 就巖頭末後之句有所參究 得嗣其法 紹聖(1094-1 098)初年 受召爲左司諫 因上書論司馬光呂公著而左遷 又常詆當時宰相蔡京 故屢受貶 大觀四年(1110)六月 天久旱 乃受命祈雨 晩忽雨 徽宗大喜 賜商霖二字 後受蔡京讒言 貶知河南府 宣和四年歿 壽七十九 賜諡文忠 著有護法論一卷 [釋氏稽古略四 居士傳二十八 宋史三五一]
(1043-1121) 북송 황룡파 거사. 촉주(蜀州; 사천 숭경) 신진(新津) 사람이며 자는 천각(天覺)이며 호는 무진거사(無盡居士). 어릴 적부터 곧 예기(銳氣)가 척당(倜儻; 근기가 卓異)하여 하루에 만언(萬言)을 외웠음. 처음에 통주주부(通州主簿)에 임용되었는데 어느 날 입사(入寺)하여 장경(藏經)의 권책(卷冊)이 제정(齊整)함을 보고 발끈하며 가로되 우리 공성(孔聖)의 서책이 여기에도 미치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고 했음. 후에 유마경을 읽고 느끼는 게 있어 이에 불법에 귀신(歸信)했음. 신종(神宗; 1068-1085) 때 왕안석(王安石)의 추거(推擧)를 받아 입조(入朝)했고 대관년 간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사건으로 인해 외지(外地)로 적강(謫降)되었다가 강서운사(江西運使)로 좌천(左遷)됨에 이르렀음. 동림사(東林寺) 상총(常總; 황룡을 이었음)을 예알(禮謁)하고 그의 인가(印可)를 얻었음. 다시 도솔사 종열(從悅; 황룡하 2세)에게 투입해 암두(巖頭)의 말후지구(末後之句)로 나아가 참구하는 바가 있었고 그의 법 이음을 얻었음. 소성(紹聖; 1094-1098) 초년(初年) 부름을 받아 좌사간(左司諫)이 되었는데 글을 올려 사마(司馬) 광려공(光呂公)의 저서를 논함으로 인해 좌천되었고 또 늘 당시의 재상 채경(蔡京)을 욕한지라 고로 여러 차례 폄강(貶降)을 받았음. 대관(大觀) 4년(1110) 6월에 하늘이 오래 가물었는데 칙명을 받고 기우(祈雨)하여 저녁에 홀연히 비가 와 휘종(徽宗)이 크게 기뻐하며 상림(商霖) 2자(字)를 주었음. 후에 채경(蔡京)의 참언(讒言)을 받아 지하남부(知河南府)로 폄강(貶降)되었음. 선화(宣和) 4년에 죽었으니 나이는 79며 사시(賜諡)가 문충(文忠). 저서에 호법론(護法論) 1권이 있음 [석씨계고략4. 거사전28. 송사351].
丞相; 官名 一般指皇帝下面的最高行政官 輔佐皇帝總理百政的官員 戰國 秦朝 漢朝 輔佐君主的最高官吏 宰相不一定是丞相 宰相在不同朝代 有不同的官職對應 比如在唐玄宗時期改尙書僕射爲丞相 當時的丞相就不是宰相之職 元朝的行省丞相則爲地方官 亦非宰相 [百度百科]
벼슬 이름. 일반으로 황제 하면(下面)의 최고 행정관을 가리킴. 황제를 보좌하며 백정(百政)을 총리(總理)하는 관원임. 전국(戰國)ㆍ진조(秦朝)ㆍ한조(漢朝)에선 군주를 보좌하는 최고 괸리였음. 재상(宰相)은 일정한 이 승상이 아니었음. 재상은 부동(不同)의 조대(朝代)에 부동의 관직의 대응이 있었으니 비여(比如) 당 현종 시기엔 상서복야(尙書僕射)를 고쳐 승상(丞相)이라 했고 당시의 승상은 그대로 이 재상의 직이 아니었음. 원조(元朝)의 행성(行省)의 승상은 지방관이 되었으며 또한 재상이 아니었음 [백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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