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 권3 제30조 승찬대사(僧璨大師) 02

태화당 2023. 1. 27. 07:16

師又曰 昔可大師付吾法 後往鄴都行化三十年方終 今吾得汝何滯此乎 卽適羅浮山優游二載 却旋舊址逾月 士民奔趨大設檀供 師爲四衆廣宣心要訖 於法會大樹下合掌立終 卽隋煬帝大業二年丙寅十月十五日也 唐玄宗謚鑑智禪師覺寂之塔 至皇宋景德元年甲辰歲 凡四百載矣 初唐河南尹李常 素仰祖風深得玄旨 天寶乙酉歲 遇荷澤神會問曰 三祖大師葬在何處 或聞入羅浮不迴 或說終於山谷 未知孰是 會曰 璨大師自羅浮歸山谷 得月餘方示滅 今舒州見有三祖墓 常未之信也 會謫爲舒州別駕 因詢問山谷寺衆僧曰 聞寺後有三祖墓是否 時上坐慧觀對曰 有之 常欣然與寮佐同往瞻禮 又啓壙取眞儀闍維之 得五色舍利三百粒 以百粒出己俸建塔焉 百粒寄荷澤神會 以徵前言 百粒隨身 後於洛中私第設齋以慶之 時有西域三藏犍那等在會中 常問三藏 天竺禪門祖師多少 犍那答曰 自迦葉至般若多羅 有二十七祖 若敍師子尊者傍出達磨達四世 二十二人 總有四十九祖 若從七佛至此璨大師 不括橫枝凡三十七世 常又問會中耆德曰 嘗見祖圖 或引五十餘祖 至於支派差殊宗族不定 或但有空名者 以何爲驗 時有智本禪師者 六祖門人也 答曰 斯乃後魏初佛法淪替 有沙門曇曜 於紛紜中以素絹單錄 得諸祖名字 或忘失次第 藏衣領中隱于巖穴 經三十五載 至文成帝卽位 法門中興 曇曜名行俱崇 遂爲僧統 乃集諸沙門重議結集 目爲付法藏傳 其間小有差互 卽曇曜抄錄時怖懼所致 又經一十三年 帝令國子博士黃元眞與北天竺三藏佛陀扇多吉弗煙等 重究梵文甄別宗旨次敍師承 得無紕繆也

鄴都; 後漢獻帝建安九年(24) 曹操平定袁紹 修繕營建鄴城 後定爲魏王王都 魏文帝曹丕在此受禪登基稱帝後移都洛陽 仍以鄴城爲五都之一 史稱鄴都(在今河北省臨漳縣) 鄴城先後爲曹魏 後趙 冉魏 前燕 東魏 北齊六朝都城 另五代後唐以魏州爲興唐府 號卽爲鄴都 [百度百科]

羅浮山; 亦稱東樵山 與南海縣西樵山齊名 位於廣東廣州東方博羅縣西北之羅浮山脈中 長二八餘公里 高峰四百餘座 爲嶺南名勝

優游; 生活得十分閑適

士民; 士大夫和普通百姓的並稱 猶言士庶 泛指人民 百姓

; 檀 檀那 又作柁那 拕那 馱曩 略作檀 此云布施 施 卽給與施捨之意

別駕; 別駕從事史 官名 亦稱別駕從事 簡稱別駕 漢置 爲州刺史的佐官 隋初廢郡存州 改別駕爲長史 唐初改郡丞爲別駕 高宗又改別駕爲長史 另以皇族爲別駕 後廢置不常 宋各州的通判 職任似別駕 後世因以別駕爲通判之習稱 [百度百科]

上坐; 猶上座 參禪僧中的首座稱爲上座 多用作對禪僧的尊稱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下三之二 毘尼母云 從無夏至九夏是下座 十夏至十九夏名中座 二十夏至四十九夏名上座 五十夏已去 一切沙門國王所尊敬 是耆舊長老

耆德; 年老德高道行深湛之老者

淪替; 衰落 廢棄

僧統; 僧官名 僧史略中曰 姚秦初立僧官 稱爲正 魏改之 稱爲統 有沙門統 僧統 沙門都統三名 皇始年(396397)中 法果初任沙門統 文成帝再興佛法後 罽賓沙門五人給僧統 孝文帝世初任曇曜爲沙門都統 其後至隋世初起大統之稱 以曇延任之

國子; 國子學 是中國封建時代的敎育管理機關和最高學府 晉武帝咸寧二年(276)始設 與太學並立 [百度百科]

博士; 官名 現爲學位名稱 古代爲掌管書籍文典 通曉史事的官職 後成爲學術上專通一經或精通一藝 從事敎授生徒的官職 六國時有博士 秦漢因之 唐有太學博士 算學博士等 皆敎授官 明淸仍之 稍有不同 [百度漢語 百度百科]

佛陀扇多; <> buddhaśānta 北魏竺僧 此云覺定 北印度人 內外博通 善方言 工藝術 從正光六年(525) 至元象二年(539) 於洛陽白馬寺 鄴都金華寺 譯出金剛上味等經十部 [六學僧傳二 開元釋敎錄]

 

스님이 또 가로되 옛적에 혜가대사(慧可大師)가 나에게 법을 부촉하시고는 후에 업도(鄴都)로 가서 행화(行化)한 지 30년 만에 바야흐로 마치셨다. 여금에 내가 너를 얻었거늘 어찌 여기에서 지체(遲滯)하겠는가.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서() 2() 동안 우유(優游)하고 도리어 구지(舊址)로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었다(). 사민(士民)이 분추(奔趨; 奔走)하며 크게 단공(檀供)을 베풀었다. 스님이 4()을 위해 심요(心要)를 광선(廣宣)하고는 법회(法會)의 대수(大樹) 아래에서 합장한 채 입종(立終; 서서 죽음)했다. 곧 수양제 대업(大業) 2년 병인(丙寅; 606) 1015일이다. 당현종(唐玄宗)이 시()하여 감지선사각조지탑(鑑智禪師覺寂之塔)이라 했다. 황송(皇宋) 경덕(景德) 원년(元年) 갑진세(1004)에 이르기까지 무릇 400(). 처음에 당() 하남윤(河南尹; 은 벼슬 이름) 이상(李常)은 본디 조풍(祖風)을 흠앙했고 현지(玄旨)를 깊이 얻었는데 천보(天寶) 을유세(乙酉歲; 745) 하택신회(荷澤神會)를 만나 물어 가로되 3조 대사(大師)는 장지(葬地)가 어느 곳에 있습니까. 혹 듣기로 나부(羅浮; 羅浮山)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혹 설하기를 산곡(山谷; 山谷寺)에서 마쳤다 하니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회가 가로되 찬대사(璨大師)는 나부(羅浮)로부터 산곡(山谷)에 돌아온 지 월여(月餘)를 얻고 바야흐로 시멸(示滅)했으며 여금의 서주(舒州)에 삼조묘(三祖墓)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상(李常)이 믿지 못했다. 마침() 폄적(貶謫; 降職)되어 서주별가(舒州別駕)가 되었는데 인하여 산곡사(山谷寺) 중승(衆僧)에게 순문(詢問)하여 가로되 듣건대 절 뒤에 삼조묘(三祖墓)가 있다는데 그렇습니까. 때에 상좌(上坐) 혜관(慧觀)이 대답해 가로되 있습니다. 이상이 흔연(欣然)하며 요좌(寮佐; 属官)와 더불어 함께 가서 첨례(瞻禮)했다. 또 계광(啓壙)하여 진의(眞儀; 眞容)를 취해 그것을 사유(闍維)했는데 5색 사리 300(; )을 얻었다. 백립(百粒)은 자기의 봉록(俸祿)을 내어 건탑(建塔)했고 백립은 하택신회에게 기탁했으니 전언(前言)을 징험(徵驗; 證明)했고 백립은 수신(隨身; 몸에 지니다)했다. 후에 낙중(洛中; 洛陽城을 가리킴)의 사제(私第; 私邸)에서 설재(設齋)하여 그것을 경하(慶賀)했다. 당시에 서역삼장(西域三藏) 건나(犍那) 등이 회중(會中)에 있었는데 이상이 삼장에게 묻되 천축의 선문(禪門)의 조사(祖師)는 얼마입니까(多少). 건나가 답왈 가섭으로부터 반야다라(般若多羅)에 이르기까지 27조가 있거니와 만약 사자존자(師子尊者)의 방출(傍出) 달마달(達磨達) 4()를 서술(敍述)하자면 22인이니 총 49조가 있습니다. 만약 7()로 좇아 이 찬대사(璨大師)에 이르기까지 횡지(橫枝)를 포괄(包括)하지 않으면 무릇 37세입니다. 이상이 또 회중의 기덕(耆德)에게 물어 가로되 일찍이 조도(祖圖)를 보았는데 혹 60여 조()를 인출(引出)했고 지파(支派)의 차수(差殊)와 종족(宗族)의 부정(不定)에 이르기까지 혹 단지 공명(空名)만 있는 자는 무엇으로써 증험(證驗)하겠습니까. 때에 지본선사(智本禪師)란 자가 있었는데 6조의 문인(門人)이었다. 답왈 이것은 곧 후위(後魏) 초 불법이 윤체(淪替)하자 사문 담요(曇曜)가 있어 분운(紛紜)한 중에 흰 비단(素絹)에 명단(名單)을 기록하여 제조(諸祖)의 명자(名字)를 얻었는데 혹 차제(次第)를 망실(忘失)했습니다. 옷깃(衣領) 속에 감추고 암혈(巖穴)에 은거했고 35()가 경과하여 문성제(文成帝; 440-465)가 즉위함에 이르러 법문이 중흥(中興)했고 담요(曇曜)의 명행(名行)을 모두 숭상했고 드디어 승통(僧統)이 되었습니다. 이에 여러 사문을 모아 중의(重議)해 결집(結集)했고 서목(書目)을 부법장전(付法藏傳; 付法藏因緣傳)이라 했는데 그 사이에 조금() 차호(差互; 差錯)가 있었으니 곧 담요가 초록(抄錄)할 때 포구(怖懼)의 소치(所致)였습니다. 13년이 경과하자 황제가 국자(國子) 박사(博士) 황원진(黃元眞)과 북천축 삼장 불타선다(佛陀扇多)ㆍ길불연(吉弗煙) 등으로 하여금 거듭 범문(梵文)을 연구하고 종지(宗旨)를 견별(甄別; 뚜렷하게 나눔)하여 사승(師承)을 차서(次敍; 차례로 서술)하니 비류(紕繆; 誤謬. 저본에 𧘱謬로 지었음)가 없음을 얻었습니다.

鄴都; 후한 헌제 건안 9(24) 조조(曹操)가 원소(袁紹)를 평정하고 업성(鄴城)을 수선(修繕)하고 영건(營建)했으며 후에 위왕(魏王)의 왕도(王都)로 정했음. 위 문제 조비(曹丕)가 여기에 있으면서 수선(受禪)하고 등기(登基)하여 칭제(稱帝)한 후에 낙양으로 이도(移都)했으나 그대로 업성은 5()의 하나가 되었음. 사칭(史稱)이 업도(鄴都; 지금 하북성 임장현에 있음). 업성은 선후로 조위ㆍ후조ㆍ염위ㆍ전연ㆍ동위ㆍ북제 6()의 도성이 되었음. 따로 5대 후당은 위주(魏州)를 흥당부로 삼고 호하여 곧 업도(鄴都)라 했음 [백도백과].

羅浮山; 또 명칭이 동초산(東樵山)이니 남해현 서초산과 이름을 가지런히 함. 광동 광주 동방의 박라현 서북의 나부산맥 가운데 위치함. 길이는 280며 고봉이 4백여 좌(; 量詞)니 영남의 명승이 됨.

優游; 생활에 십분 한적(閑適)함을 얻음.

士民; 사대부(士大夫)와 보통 백성의 병칭(並稱). 사서(士庶)라고 말함과 같음. 널리 인민, 백성을 가리킴.

; ()은 단나(檀那)며 또 타나(柁那)ㆍ타나(拕那)ㆍ타낭(馱曩)으로 지으며 간략히 단()으로 지음. 여기에선 이르되 보시ㆍ시(). 곧 급여ㆍ시사(施捨)의 뜻.

別駕; 별가종사사(別駕從事史)니 벼슬 이름. 또 명칭이 별가종사(別駕從事)며 간칭이 별가. ()에서 설치했고 주자사(州刺史)의 좌관(佐官)이 됨. 수초(隋初)에 군()을 폐하고 주()를 두면서 별가를 고쳐 장사(長史)라 했음. 당초(唐初)에 군승(郡丞)을 고쳐 별가라 했는데 고종이 또 별가를 고쳐 장사(長史)로 삼고 황족으로 별가를 삼았음. 후에 폐치(廢置)가 일정하지() 않았음. ()은 각 주의 통판(通判)의 직임이 별가와 비슷했음. 후세에 인하여 별가를 통판의 습칭(習稱)으로 삼았음 [백도백과].

上坐; 상좌(上座)와 같음. 참선승(參禪僧) 중에 수좌(首座)를 상좌(上座)라고 호칭함. 다분히 선승(禪僧)에 대한 존칭으로 쓰임.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하32. 비니모(毘尼母)에 이르되 무하(無夏)로부터 내지 9()는 이 하좌(下座)10() 내지 19()는 이름이 중좌(中座)20하 내지 49하는 이름이 상좌(上座)50하 이거(已去; 이후)는 일체의 사문과 국왕이 존경하는 바이니 이는 기구장로(耆舊長老).

耆德; 연로하고 덕이 높으면서 도행이 깊고 맑은 노자(老者; 노인).

淪替; 쇠락(衰落). 폐기(廢棄).

僧統; 승관(僧官)의 이름. 승사략중에 가로되 요진(姚秦) 초에 승관(僧官)을 세웠으니 일컬어 정()이라 했다. ()에서 이를 고쳐 일컬어 통()이라 했으니 사문통(沙門統)ㆍ승통(僧統)ㆍ사문도통(沙門都統)3()이 있었다. 황시년(396397) 중 법과(法果)가 처음으로 사문통에 임명되었다. 문성제가 불법을 재흥(再興)한 후 계빈사문(罽賓沙門) 5인에게 승통을 급여했다. 효문제세(孝文帝世; 효문제 시대) 초 담요(曇曜)를 사문도통에 임명했다. 그 후 수세초(隋世初)에 이르러 대통(大統)의 명칭을 일으켰으니 담연(曇延)을 이에 임명했다.

國子; 국자학(國子學)이니 이는 중국 봉건시대의 교육의 관리기관(管理機關)과 최고의 학부(學府). 진무제(晉武帝) 함녕(咸寧) 2(276) 처음으로 설치했고 태학(太學)과 더불어 병립(並立)했음 [백도백과].

博士; 벼슬 이름. 현재는 학위의 명칭이 됨. 고대에 서적과 문전(文典)을 장관(掌管; 관장)하면서 사사(史事)를 통효(通曉)한 관직이 됨. 후에 학술상 1()을 전통(專通)하거나 혹 1()를 정통하여 생도의 교수에 종사한 관직이 되었음. 6() 때 박사가 있었고 진한(秦漢)은 이를 따랐으며 당은 태학박사ㆍ산학박사(算學博士) 등이 있었는데 모두 교수관(敎授官)이었음. 명ㆍ청도 이를 그대로 따랐으나 조금 같지 않음이 있었음 [백도한어. 백도백과].

佛陀扇多; <> buddhaśānta. 북위 천축승. 여기에선 이르되 각정(覺定)이니 북인도 사람. 내외에 박통했고 방언(方言)을 잘했고 예술에 공교(工巧)했음. 정광 6(525)으로부터 원상 2(539)에 이르기까지 낙양 백마사와 업도 금화사에서 금강상미 등의 경 10부를 번역해 내었음 [육학승전2. 개원석교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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