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 권3 제31조 도신대사(道信大師) 02

태화당 2023. 1. 28. 08:39

一日告衆曰 吾武德中遊廬山 登絕頂望破頭山 見紫雲如蓋下有白氣橫分六道 汝等會否 衆皆默然 忍曰 莫是和尙他後橫出一枝佛法否 師曰善 後貞觀癸卯歲 太宗嚮師道味欲瞻風彩 詔赴京師 上表遜謝前後三返 竟以疾辭 第四度命使曰 如果不起卽取首來 使至山諭旨 師乃引頸就刃神色儼然 使異之迴以狀聞 帝彌加歎慕 就賜珍繒以遂其志 迄高宗永徽辛亥歲閏九月四日 忽垂誡門人曰 一切諸法悉皆解脫 汝等各自護念流化未來 言訖安坐而逝壽七十有二 塔于本山 明年四月八日塔戶無故自開 儀相如生 爾後門人不敢復閉 代宗謚大醫禪師慈雲之塔 自圓寂至皇宋景德元年甲辰 凡三百五十六載當云三百五十四載

廬山; 位於江西九江 北倚長江 東接鄱陽湖 又稱匡山 南鄣山 南康山 匡廬 廬阜 輔山 靖廬山 相傳黃帝曾遊止於此 故又稱三天子都 三天子鄣 又傳殷商(或周代)之際 有匡俗者 於山中結廬隱棲修仙道 後羽化而去 僅存空廬 自此遂有廬山之名 東晉太元(376-396)初年 道安之門人慧永來山 於香谷建西林寺 十一年 慧遠應慧永之請 來山建東林寺 世稱東林西林 十五年建般若臺精舍 奉安阿彌陀佛像 與道俗百二十餘人 共結白蓮社 作爲淨土敎修行之根本道場 提倡念佛法門

破頭山; 位於湖北黃梅縣西北 又稱四祖山 破額山 唐武德七年(624) 四祖道信住於此 改名雙峰山 竝就地構築庵室 稱爲正覺寺 又稱四祖寺 住山三十年 致力於宏揚宗風 太宗夙慕道信禪師之道風 欲召見之 師固辭不應 强之 則伸頸就戮 太宗益歎其高行 優禮有加 其後 世人以五祖弘忍住於東山(憑茂山) 而稱雙峰山爲西山 四祖山 [大明一統志六十一 大淸一統志二六三 讀史方輿紀要七十六]

諭旨; 曉諭帝旨 或皇帝的詔令

 

어느 날 대중에게 알려 가로되 내가 무덕(武德; 618-626) 중에 여산(廬山)을 유람하다가 절정(絕頂)에 올라 파두산(破頭山)을 바라보니 자운(紫雲)이 덮개와 같고 아래에 백기(白氣)6(; 줄기)로 횡분(橫分)한 것을 보았다. 너희 등이 아느냐. 대중이 모두 묵연했다. 홍인(弘忍)이 가로되 이는 화상이 타후(他後)1()의 불법을 횡출(橫出)함이 아니겠습니까. 사왈(師曰) 좋구나(). 후에 정관(貞觀) 계묘세(癸卯歲; 643)에 태종(太宗)이 스님의 도미(道味)를 향(; )했고 풍채(風彩)를 보고() 싶어 했다. 조칙(詔勅)으로 경사(京師)에 다다르게 했으나 표문(表文)을 올려 손사(遜謝; 겸손히 辭讓)했는데 전후로 세 번 돌아갔지만 마침내 질병을 써() 사양(辭讓)했다. 네 번째(第四度)에 사자(使者)에게 명령해 가로되 여과(如果; 假如. 假使) 일어나지 않거든 곧 머리를 취해 오너라. 사자가 산에 이르러 유지(諭旨)하자 스님이 이에 목을 늘여 칼날에 나아가되 신색(神色; 態度)이 엄연(儼然)했다. 사자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돌아가 문서()로써 알렸더니() 황제가 더욱 탄모(歎慕)를 더하면서 바로() 진증(珍繒)을 주어 그의 의지(意志)를 이루게() 했다. 고종(高宗) 영휘(永徽) 신해세(辛亥歲; 651) 94일에 이르자()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수계(垂誡)하여 가로되 일체제법(一切諸法)이 모두 다 해탈이다. 너희 등은 각자 호념(護念)하여 미래를 유화流化; 流布하고 교화)하라. 말을 마치자 안좌(安坐)하여 떠났으니 나이는 72. 본산에 탑을 세웠다. 명년 48일 탑호(塔戶)가 까닭 없이 저절로 열렸는데 의상(儀相)이 산 것 같았다. 이후(爾後; 이로부터 以後)에 문인들이 감히 다시 닫지 못했다. 대종(代宗)이 시()하여 대의선사자운지탑(大醫禪師慈雲之塔)이라 했다. 원적(圓寂)함으로부터 황송(皇宋) 경덕(景德) 원년 갑진(甲辰; 1004)에 이르기까지 무릇 356()마땅히 이르되 354.

廬山; 강서 구강(九江)에 위치함. 북쪽은 장강에 기대었고 동쪽은 파양호에 인접했음. 또 명칭이 광산(匡山)ㆍ남장산(南鄣山)ㆍ남강산(南康山)ㆍ광려(匡廬)ㆍ여부(廬阜)ㆍ보산(輔山)ㆍ정려산(靖廬山). 서로 전하기를 황제(黃帝)가 일찍이 유람하다가 여기에서 머물렀다 하며 고로 또 명칭이 삼천자도(三天子都)ㆍ삼천자장(三天子鄣). 또 전하기를 은상(殷商) (혹은 周代)의 즈음에 광속(匡俗)이란 자가 있어 산중에 오두막집을 엮고 은서(隱棲)하며 선도(仙道)를 닦았고 후에 우화(羽化)하여 떠났으며 겨우 공려(空廬)만 잔존한지라 이로부터 드디어 여산(廬山)의 이름이 있었다 함. 동진 태원(376-396) 초년에 도안(道安)의 문인인 혜영(慧永)이 산에 도래하여 향곡에 서림사(西林寺)를 세웠으며 11년에 혜원(慧遠)이 혜영의 청에 응해 산에 도래하여 동림사(東林寺)를 세웠으니 세칭이 동림ㆍ서림임. 15년에 반야대정사를 건립하고 아미타불상을 봉안하고 도속 120여 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정토교 수행의 근본도량으로 삼았으며 염불법문을 제창했음.

破頭山; 호북 황매현 서북에 위치하며 또 명칭이 사조산(四祖山)ㆍ파액산임. 당 무덕 7(624) 4조 도신이 여기에 거주하면서 쌍봉산(雙峰山)으로 개명했으며 아울러 이 땅에 암실(庵室)을 구축하고 정각사로 호칭했으니 또 명칭이 사조사임. 30년 동안 주산(住山)하면서 종풍을 굉양(宏揚)함에 치력(致力; 힘쓰다)했음. 태종이 일찍이 도신선사의 도풍을 흠모하여 그를 불러서 친견하려 했으나 고사(固辭)하며 불응했음. 그를 강박(强迫; )하자 곧 목을 늘이며 죽임에 나아갔고 태종이 그의 고행(高行)에 찬탄을 더하고 우례(優禮)에 더함이 있었음. 그 후 세인이, 5조 홍인이 동산(東山; 빙무산)에 거주했으므로 쌍봉산을 서산(西山)ㆍ사조산(四祖山)으로 호칭했음 [대명일통지61. 대청일통지263. 독사방여기요76].

諭旨; 제지(帝旨)를 효유(曉諭). 혹 황제의 조령(詔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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