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潤州鶴林寺玄素禪師法嗣
杭州徑山道欽禪師者 蘇州崑山人也 姓朱氏 初服膺儒敎 年二十八玄素禪師遇之 因謂之曰 觀子神氣溫粹眞法寶也 師感悟因求爲弟子 素躬與落髮 乃戒之曰 汝乘流而行 逢徑則止 師遂南行抵臨安 見東北一山 因訪於樵子 曰此徑山也 乃駐錫焉 有僧問 如何是道 師云 山上有鯉魚 水底有蓬塵 馬祖令人送書到 書中作一圓相 師發緘於圓相中作一畫却封迴〈忠國師聞乃云 欽師猶被馬師惑〉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汝問不當 曰如何得當 師曰 待吾滅後卽向汝說 馬祖令門人智藏來問 十二時中以何爲境 師曰 待汝迴去時有信 藏曰 如今便迴去 師曰 傳語却須問取曹谿 唐大曆三年 代宗詔至闕下親加瞻禮 一日師在內庭見帝起立 帝曰 師何以起 師曰 檀越何得向四威儀中見貧道 帝悅 謂忠國師曰 欲錫欽師一名 忠欣然奉詔 乃賜號國一焉 後辭歸本山 於貞元八年十二月示疾說法而逝 壽七十有九 勅諡曰大覺禪師
●杭州; 今浙江省省都
●徑山; 位於浙江省餘杭西北約二十九公里處 在天目山之東北峰 因以小徑通於天目山而得名 唐代天寶元年(74 2) 牛頭宗之道欽(法欽)禪師 入此山結庵 學者輻輳 大曆四年(769) 代宗慕其爲人 賜國一禪師之號 下詔 卽於其庵址建徑山寺 至宋代 圜悟克勤 維林 了一等高僧亦住此山 高宗紹興七年(1 137) 圜悟之門人大慧禪師 來住此寺 弟子來集者多達一千七百餘人 孝宗皇帝親書興聖萬壽禪寺 竝賜圓覺經解 其後又有無準師範 虛堂智愚等臨濟龍象住此 [宋高僧傳九 傳燈錄四 同十 同十一 徑山志 大明一統志六十八 大淸一統志二一六]
●蘇州; 江蘇省南東部都市吳縣的古稱 漢代以來 江南經濟文化中心地 城內有長慶慧稜所住北寺(報恩寺) 南禪寺 瑞光寺 報恩光孝寺 寒山寺 府城西北有十刹之第九位虎印山雲巖寺 西南有靈巖山崇報寺 報恩山(觀音山) 西有天平山白雲寺等 [吳縣志]
●服膺; 銘記在心 衷心信奉
●神氣; 神靈之氣 得意傲慢的樣子 精神
●溫粹; 溫和純正
●駐錫; 僧人出行 以錫杖自隨 故稱僧人住止爲駐錫
●蓬塵; 蓬 量詞 如一蓬花 又同槰 草木盛貌
●圓相; 祖庭事苑二 圓相 圓相之作 始於南陽國師 付授侍者耽源 源承讖記 傳于仰山 今遂目爲潙仰家風 明州五峰良和上 嘗製四十則 明敎子潛子(佛日契嵩禪師 雲門文偃下四世)爲之序 稱道其美 良云 圓相總六名 一圓相 二義海 三暗機 四字海 五意語 六默論
●發緘; 開著器物或書札的札束或封口
●祖師西來意; 初祖達磨自西天來此土傳禪法 究竟意思如何 究此意思者 卽究佛祖之心印也
●十二時; 一日中之十二箇時辰 從子時至亥時
●曹谿; 猶曹溪 ①位於韶州(今廣東曲江縣東南)之河 發源於狗耳嶺 西流與溱水合 以經曹侯塚故 又稱曹侯溪 梁天監元年(502) 天竺婆羅門三藏智藥 到曹溪口 飮其水而知此源爲勝地 乃勸村人建寺 復因其地似西國之寶林山 故稱寶林寺 智藥預言 一七○年後 有肉身菩薩 於此開演無上法門 得道者如林 至唐儀鳳二年(677)春 六祖慧能從弘忍得法後 從印宗剃髮 受具足戒而歸寶林寺 大弘法化 人稱曹溪法門 ②指六祖慧能 慧能以曹溪寶林寺爲中心 開展敎化活動 世人尊稱爲曹溪古佛 曹溪高祖
●檀越; 翻譯名義集一 要覽曰 梵語陀那鉢底 唐言施主 今稱檀那 訛陀爲檀 去鉢底留那也 攝大乘論云 能破慳悋嫉妬及貧窮下賤苦 故稱陀 後得大富 及能引福德資糧 故稱那 又稱檀越者 檀卽施也 此人行施越貧窮海
●四威儀; 謂行住坐臥四種威儀 出家人所必須遵守之儀則 敎中有三千威儀八萬細行等語
●國師; 祖庭事苑七 國師 西域之法 推重其人 外內攸同 邪正俱有 擧國歸依 乃彰斯號 聲敎東漸 唯北齊高僧法常 齊主崇爲國師 國師之號 自常公始 陳隋之代 天台智顗爲陳宣隋煬菩薩戒師 故時號國師 唐則天朝 神秀召入京師 及中睿玄凡四朝 皆號爲國師 後有慧忠 肅代二朝 入禁中說法 亦號國師 元和中 敕署知玄號悟達國師 若偏覇之國 則蜀後主 賜右街僧錄光業爲祐聖國師 吳越稱德韶爲國師 [大宋僧史略卷中]
항주(杭州) 경산(徑山) 도흠선사(道欽禪師)란 자는 소주(蘇州) 곤산(崑山) 사람이며 성은 주씨(朱氏)다. 처음에 유교(儒敎)를 복응(服膺)했고 나이 28에 현소선사(玄素禪師)가 그를 만났는데 인하여 그에게 일러 가로되 자네를 보건대 신기(神氣)가 온수(溫粹)하니 참다운 법보(法寶)다. 스님이 감오(感悟)했고 인하여 제자가 됨을 구하자 현소가 몸소 낙발(落髮)해 주었다. 이에 그에게 경계(警戒)하여 가로되 네가 흐름을 타고 가다가 경(徑)을 만나거든 곧 멈추거라. 스님이 드디어 남행(南行)하여 임안(臨安)에 다다라(抵) 동북의 1산(山)을 보았다. 인하여 초자(樵子)에게 물으니(訪) 가로되 이것은 경산(徑山)입니다. 이에 주석(駐錫)했다.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사운(師云) 산 위에 이어(鯉魚; 잉어)가 있고 물 밑에 봉진(蓬塵)이 있다. 마조(馬祖)가 사람을 시켜 송서(送書)하여 이르렀는데 서중(書中)에 1원상(圓相)을 지었다. 스님이 발함(發緘)하고는 원상 가운데에 1획(畫)을 짓고 도리어 봉(封)하여 돌려주었다〈忠國師가 듣고서 이에 이르되 欽師가 오히려 馬師의 惑亂을 입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사왈 너의 질문은 합당하지 않다. 가로되 어찌해야 합당함을 얻겠습니까. 사왈 내가 멸(滅)한 후를 기다린다면 곧 너를 향해 말하겠다. 마조(馬祖)가 문인(門人) 지장(智藏)을 시켜 묻게 하되 십이시(十二時) 중에 무엇으로써 경계를 삼습니까. 사왈 네가 회거(迴去)할 때를 기다린다면 신(信; 消息)이 있을 것이다. 지장이 가로되 여금에 바로 회거(迴去)합니다. 사왈 전어(傳語)는 도리어 꼭 조계(曹谿)에게 문취(問取)해야 한다. 당 대력(大曆; 저본에 大歷으로 지었음) 3년(768) 대종(代宗)이 조칙으로 궐하(闕下)에 이르게 하고 친히 첨례(瞻禮)를 더했다. 어느 날 스님이 내정(內庭)에 있다가 황제를 보고 기립(起立)했다. 제왈(帝曰) 스님은 무엇 때문에(何以) 일어나십니까. 사왈 단월(檀越)은 왜 사위의(四威儀) 가운데를 향해 빈도(貧道)를 봄을 얻습니까. 황제가 기뻐했다(悅). 충국사(忠國師; 慧忠國師)에게 일러 가로되 흠사(欽師)에게 1명(名)을 주고(錫) 싶습니다. 혜충이 흔연(欣然)히 봉조(奉詔)하여 이에 국일(國一)이란 호를 주었다. 후에 고별하고 본산(本山)으로 돌아갔다. 정원(貞元) 8년(792) 12월에 시질(示疾)하더니 설법하고 서거(逝去)했다. 나이는 79다. 칙시(勅諡)하여 가로되 대각선사(大覺禪師)라 했다.
●杭州; 지금의 절강성 성도(省都).
●徑山; 절강성 여항 서북 약 29㎞ 곳에 위치함. 천목산(天目山)의 동북 봉우리에 있음. 작은 길(小徑)이 천목산으로 통함으로 인해 이름을 얻었음. 당대 천보 원년(742) 우두종의 도흠(道欽; 법흠)선사가 이 산에 들어가 암자를 엮자 학자들이 복주(輻輳)하였음. 대력 4년(769) 대종이 그 사람됨을 흠모해 국일선사(國一禪師)의 호를 주고 조칙을 내려 곧 그 암자 터에 경산사를 건립했음. 송대에 이르러 원오극근ㆍ유림ㆍ요일 등의 고승이 또한 이 산에 거주했음. 고종 소흥 7년(1137) 원오의 문인인 대혜선사가 이 절에 와서 거주했으며 제자가 와서 모인 자 많게는 1천 7백여 인에 달했음. 효종황제가 친서하여 흥성만수선사라 했으며 아울러 원각경해(圓覺經解)를 주었음. 그 후에 또 무준사범ㆍ허당지우 등의 임제의 용상이 여기에 거주함이 있었음 [송고승전9. 전등록4, 동10, 동11. 경산지. 대명일통지68. 대청일통지216].
●蘇州; 강소성 남동부 도시 오현의 고칭(古稱). 한대(漢代) 이래 강남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임. 성내에 장경혜릉(長慶慧稜)이 거주했던 곳인 북사(北寺; 報恩寺)ㆍ남선사ㆍ서광사ㆍ보은광효사ㆍ한산사가 있으며 부성(府城) 서북에 10찰(刹)의 제9위 호인산 운암사가 있으며 서남에 영암산 숭보사ㆍ보은산(관음산)이 있으며 서쪽에 천평산 백운사 등이 있음 [오현지].
●服膺; 명기(銘記)하여 마음에 둠이니 충심(衷心; 속에서 眞情으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신봉함.
●神氣; 신령(神靈)한 기(氣). 득의(得意)하여 오만(傲慢)한 양자(樣子; 形狀). 정신(精神).
●溫粹; 온화(溫和)하고 순정(純正)함.
●駐錫; 승인이 출행(出行)하면 석장(錫杖)이 저절로 따르므로 고로 승인이 주지(住止)함을 일컬어 주석(駐錫)이라 함.
●蓬塵; 봉(蓬)은 양사니 예컨대(如) 1봉화(蓬花). 도 봉(槰)과 같음. 초목이 성한 모양.
●圓相; 조정사원2. 원상(圓相) 원상의 시작이 남양국사(南陽國師; 慧忠國師)에서 비롯해 시자인 탐원(耽源)에게 부수(付授)했고 탐원이 참기(讖記)를 이어 앙산에게 전했으며 지금 드디어 제목해 위앙가풍으로 삼는다. 명주 오봉량화상(五峰良和上)이 일찍이 40칙을 만들고 명교자잠자(明敎子潛子; 佛日契嵩禪師니 운문문언하 4세)가 서문을 지어 그 아름다움을 일컬어 말했다. 양(良)이 이르되 원상은 모두 6명(名)이니 1은 원상(圓相)이며 2는 의해(義海)며 3은 암기(暗機)며 4는 자해(字海)며 5는 의어(意語)며 6은 묵론(默論)이다.
●發緘; 기물(器物)이나 혹 서찰(書札)의 찰속(札束) 혹 봉구(封口)를 개착(開著)함.
●祖師西來意; 초조 달마가 서천(西天; 인도)으로부터 차토(此土; 중국)로 와서 선법(禪法)을 전했거니와 구경(究竟; 畢竟) 의사(意思)가 어떠한가. 이 의사를 궁구하는 것이 곧 불조의 심인(心印)을 궁구하는 것임.
●十二時; 1일 중의 12개 시진(時辰)이니 자시로부터 해시에 이르기까지.
●曹谿; 조계(曹溪)와 같음. ①소주(韶州; 지금의 광동 曲江縣 동남)의 강하(江河)에 위치함. 구이령(狗耳嶺)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진수(溱水)와 합함. 조후총(曹侯塚)을 경유하는 연고로써 또 호칭이 조후계(曹侯溪)임. 양(梁) 천감원년(天監元年; 502) 천축 바라문삼장(婆羅門三藏)인 지약(智藥)이 조계의 입구에 이르러 그 물을 마시고는 이 근원이 승지(勝地)가 됨을 알았음. 이에 촌인(村人)에게 권해 사원을 세우게 하고 다시 그 땅이 서국(西國)의 보림산(寶林山)과 흡사하다 하여 고로 보림사(寶林寺)로 호칭했음. 지약이 예언해 말하되 170년 후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있어 여기에서 무상법문(無上法門)을 개연(開演)할 것이며 득도(得道)하는 자가 숲과 같으리라. 당(唐) 의봉2년(儀鳳二年; 677) 봄에 이르자 6조 혜능(慧能)이 홍인(弘忍)을 좇아 법을 얻은 후 인종(印宗)을 좇아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고는 보림사(寶林寺)로 돌아가 법화(法化)를 크게 홍포(弘布)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계법문(曹溪法門)이라 일컬음. ②6조 혜능(慧能)을 가리킴. 혜능이 조계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삼아 교화활동을 개전(開展)하였으므로 세인이 존칭하여 조계고불(曹溪古佛)ㆍ조계고조(曹溪高祖)라 함.
●檀越; 번역명의집1. 요람(要覽)에 가로되 범어 다나발지(陀那鉢底; 梵 danapati)는 당나라 말로는 시주이다. 지금 단나(檀那)라고 일컫는 것은 타(陀)를 그릇되이 단(檀)으로 삼았으며 발지(鉢底)를 제거하고 나(那)를 남겼음이다. 섭대승론에 이르되 능히 간린ㆍ질투 및 빈궁ㆍ하천의 고를 깨뜨리므로 고로 명칭이 타(陀)며 후에 큰 부를 얻고 및 능히 복덕의 자량(資糧)을 당기므로 고로 명칭이 나(那)다. 또 단월(檀越)로 일컫는 것은 단(檀)는 곧 시(施)다. 이 사람이 시를 행하여 빈궁의 바다를 초월함이다.
●四威儀; 이르자면 행ㆍ주ㆍ좌ㆍ와의 4종 위의니 출가인이 필수로 준수해야 할 바의 의칙(儀則). 교중에 3천 위의 8만 세행(細行) 등의 말이 있음.
●國師; 조정사원7. 국사(國師) 서역의 법은 그 사람을 추중(推重; 추대하여 존중)하되 외내가 같은 바며 사정(邪正)을 다 가졌으면 거국(擧國; 전국)이 귀의하므로 이에 이 호가 현창(顯彰; 환히 나타남)했다. 성교(聲敎)가 동점(東漸; 東進)하여 오직 북제의 고승 법상(法常)을 제주(齊主; 文宣帝)가 높여 국사로 삼았으니 국사의 호는 상공(常公)으로부터 비롯했다. 진(陳)ㆍ수(隋)의 시대엔 천태지의(天台智顗)가 진(陳) 선제(宣帝)와 수 양제의 보살계사가 되므로 고로 때에 국사로 호했고 당 측천조(則天朝)에 신수(神秀)를 경사에 불러 들였으며 및 중종ㆍ예종ㆍ현종, 무릇 4조(朝)에 다 국사로 호했으며 뒤에 혜충(慧忠)이 있어 숙종과 대종, 2조(朝)에 금중에 들어가 설법했으며 또한 국사로 호했다. 원화 중에 칙령해 지현(知玄)을 임명(署)해 오달국사로 호했다. 만약 편패(偏覇; 偏國의 覇者)의 나라라면 곧 촉후주가 우가승록 광업(光業)에게 주어 우성국사로 삼았으며 오월에선 덕소(德韶)를 일컬어 국사라 했다 [대송승사략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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