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 권6 백장회해(百丈懷海) 01

태화당 2023. 3. 1. 07:51

洪州百丈山懷海禪師者 福州長樂人也 丱歲離塵三學該練 屬大寂闡化南康乃傾心依附 與西堂智藏禪師同號入室 時二大士爲角立焉 一夕二士隨侍馬祖翫月次 祖曰 正恁麽時如何 西堂云 正好供養 師云 正好修行 祖云 經入藏禪歸海 馬祖上堂大衆雲集 方陞坐良久 師乃卷却面前禮拜席 祖便下堂 師一日詣馬祖法塔 祖於禪床角取拂子示之 師云 只遮箇更別有 祖乃放舊處云 爾已後將什麽何爲人 師却取拂子示之 祖云 只遮箇更別有 師以拂子挂安舊處 方侍立 祖叱之 自此雷音將震 果檀信請於洪州新吳界 住大雄山 以居處巖巒峻極故 號之百丈 旣處之未期月 玄參之賓四方麏至 卽有潙山黃蘗當其首

百丈山; 位於江西奉新縣西北 靠近洞山 巖巒峻極 故號百丈 以山勢超群 故又稱大雄山或大雄峰 唐德宗興元元年(784) 懷海入山 創建鄕導庵(卽百丈寺) 大揚禪風 當時有黃檗希運 潙山靈祐 百丈涅槃等才智之士雲集於此 遂營建法堂 僧堂等 竝折衷大小乘律典 制訂禪林淸規(百丈淸規) 自此 始有獨立 完整之禪院 而於此之前 禪僧多居於律寺 憲宗元和九年(814)懷海入寂 門人涅槃繼掌住持之職 未久 奉唐宣宗敕命 興建大智聖禪寺 成爲禪宗道場 宋代以後 優秀禪僧輩出 如 明照安 道恒 寶月 智贇 惟政 元肅 惟古 淨悟等師相繼住寺 元文宗至順元年(1330) 東陽德輝重修法堂 堂上設天下師表閣 以供奉懷海之像 順帝至元元年(1335) 重輯百丈淸規 頒行於全國禪林 百丈山因此淸規而著稱於世 明英宗正統七年(1442) 沙門忠智再編淸規 崇禎年間(1628-1644) 瑞白明雪住寺 撰闢語 闢妄說各一篇 駁斥費隱通容之說 淸世祖順治年間(16 44-1661) 爲霖道霈來此弘法 現今尙存之古蹟有涅槃禪師碑 木人塚 黃犬塚 野狐巖 大義石 及柳公權所書天下師表等字之大石碑 [宋高僧傳十 傳燈錄六 同九 同二十 同二十五 五燈會元續略二 大明一統志四十九 古今圖書集成山川典一三六]

福州; 今福建省福州 南北朝時代晉安 隋代建安 唐代稱福州 附近有雪峰山

離塵; 離開塵世離塵脫俗 袈裟的別稱

該練; 博通熟習

角立; 超群 二爭持 角 競爭 比試 此指一

檀信; 施主也 謂修檀行的信士

麏至; 群集而來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회해선사(懷海禪師)란 자는 복주(福州) 장락(長樂) 사람이다. 관세(丱歲; 童年)에 이진(離塵)하고 삼학(三學; 戒學定學慧學)을 해련(該練)했다. 대적(大寂; 마조의 시호)이 남강(南康)에서 천화(闡化)함을 당해() 이에 마음을 기울여 의부(依附)했다.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와 더불어 동호(同號)가 입실(入室; 입실하여 嗣法)이니 당시에 두 대사가 각립(角立) 하였다. 어느 날 저녁 2()가 마조를 수시(隨侍)하며 달구경하던 차에 마조가 가로되 바로 이러한 때 어떠한가. 서당이 이르되 바로 공양하기에 좋습니다(正好供養). 사운(師云) 바로 수행하기에 좋습니다. 마조가 이르되 경()은 입장(入藏; 지장에게 들어감)하고 선()은 귀해(歸海; 회해에게 돌아감)했다. 마조가 상당하여 대중이 운집했고 바야흐로 승좌(陞坐)하여 양구(良久)했다. 스님이 이에 면전의 예배석(禮拜席)를 걷어버렸다(卷却). 마조가 바로 하당(下堂)했다. 스님이 어느 날 마조의 법탑(法塔)으로 나아가자 마조가 선상(禪床) 모서리에서 불자(拂子)를 취해 이를 보였다. 사운(師云) 다만 저개(遮箇; 이것)입니까, 다시 달리 있습니까. 마조가 이에 구처(舊處)에 방치(放置)하고 이르되 네가 이후에 무엇을 가져 어떻게 사람을 위하겠는가. 스님이 도리어 불자를 취해 이를 보였다. 마조가 이르되 다만 저개(遮箇)인가, 다시 달리 있는가. 스님이 불자를 구처에 걸어 놓고(挂安) 바야흐로 시립(侍立)했는데 마조가 이를 꾸짖었다. 이로부터 뇌음(雷音)을 장차 떨치려고() 하는데 과연 단신(檀信)이 홍주(洪州) 신오(新吳)의 경계에 청하여 대웅산(大雄山)에 거주했다. 거처의 암만(巖巒)이 준극(峻極)한 연고로써 이를 호해 백장이라 했다. 이미 거처한 지 기월(期月; 온 한 달. 만 한 달)도 안되어 현참지빈(玄參之賓)이 사방에서 균지(麏至)했고 곧 위산(潙山)과 황벽(黃蘗)이 있어 그 수위(首位)에 당했다.

百丈山; 강서 봉신현(奉新縣) 서북에 위치하며 동산(洞山)을 등져 가까이했음. 바위의 봉우리가 험준(險峻)을 다한지라 고로 호가 백장(百丈). 산세가 무리를 초출했기 때문에 고로 또 명칭이 대웅산(大雄山) 혹은 대웅봉(大雄峰). 당 덕종(德宗) 흥원 원년(784) 회해(懷海)가 입산하여 향도암(鄕導庵; 百丈寺)을 창건하고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렸음. 당시(當時)에 황벽희운(黃檗希運)ㆍ위산영우(潙山靈祐)ㆍ백장열반(百丈涅槃) 등의 재지(才智)의 사내들이 여기에 운집했고 드디어 법당과 승당 등을 영건(營建)했으며 아울러 대소승(大小乘)의 율전(律典)을 절충(折衷)해 선림청규(禪林淸規; 百丈淸規)를 제정(制訂)했으니 이로부터 비로소 독립된 완정(完整)의 선원(禪院)이 있었음. 이 이전에는 선승이 많이들 율사(律寺)에 거처했음. 헌종 원화 9(814) 회해(懷海)가 입적하자 문인인 열반(涅槃)이 주지(住持)의 직()을 계장(繼掌)했고 오래지 않아 당 선종(宣宗)의 칙명을 받들어 대지성선사(大智聖禪寺)를 흥건(興建)해 선종도량(禪宗道場)을 이루었음. 송대(宋代) 이후 우수한 선승을 배출했으니 예컨대() 명조안(明照安)ㆍ도항(道恒)ㆍ보월(寶月)ㆍ지윤(智贇)ㆍ유정(惟政)ㆍ원숙(元肅)ㆍ유고(惟古)ㆍ정오(淨悟) 등의 스님들이 서로 이어 주사(住寺)했음. 원 문종 지순 원년(1330) 동양덕휘(東陽德輝)가 법당을 중수(重修)하고 당상(堂上)에 천하사표각(天下師表閣)을 설립해 회해의 상()을 공봉(供奉)했음. 순제 지원 원년(1335)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중집(重輯)하여 전국 선림(禪林)에 반행(頒行)했으며 백장산은 이 청규로 인해 세상에 명칭이 두드러졌음. 명 영종 정통 7(1442) 사문 충지(忠智)가 청규를 재편(再編)했음. 숭정년 간(1628-16 44) 서백명설(瑞白明雪)이 주사(住寺)하며 벽어(闢語)ㆍ벽망설(闢妄說) 1편을 지어 비은통용(費隱通容)의 설을 박척(駁斥; 논박하여 배척하다)했음. 청세조 순치년 간(16441661) 위림도패(爲霖道霈)가 여기에 와서 홍법했음. 현금(現今)에 아직 존재하는 고적(古蹟)으로는 열반선사비(涅槃禪師碑)ㆍ목인총(木人塚)ㆍ황견총(黃犬塚)ㆍ야호암(野狐巖)ㆍ대의석(大義石) 및 유공권(柳公權)이 쓴 바 천하사표(天下師表) 등 글자의 대석비(大石碑)가 있음. [송고승전10. 전등록6, 9, 20, 25. 오등회원속략2. 대명일통지49. 고금도서집성산천전136].

福州; 지금의 복건성 복주니 남북조시대의 진안(晉安)이며 수대의 건안(建安)이니 당대에 복주로 일컬었음. 부근에 설봉산이 있음.

離塵; 진세(塵世)를 떠나고(離開) 이진(離塵)하여 탈속(脫俗). 가사(袈裟)의 별칭(別稱).

該練; 박통(博通)하고 숙습(熟習).

角立; 1. 무리를 초월함. 2. 다투어 가짐. ()은 경쟁이며 비시(比試). 여기에선 1을 가리킴.

檀信; 시주(施主)니 이르자면 단행(檀行)을 닦는 신사(信士).

麏至; 무리가 모여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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