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臺山隱峯禪師者 福建邵武人也 姓鄧氏〈時稱鄧隱峯〉 幼若不慧 父母聽其出家 初遊馬祖之門 而未能覩奧 復來往石頭 雖兩番不捷〈語見馬祖章〉 而後於馬大師言下契會 師在石頭時 問云 如何得合道去 石頭云 我亦不合道 師云 畢竟如何 石頭云 汝被遮箇得多少時耶 一日石頭和尙剗草次 師在左側叉手而立 石頭飛剗子向師面前剗一株草 師云 和尙只剗得遮箇 不剗得那箇 石頭提起剗子 師接得剗子乃作剗勢 石頭云 汝只剗得那箇 不解剗得遮箇 師無對〈洞山代云 還有堆阜麽〉 師一日推土車次 馬大師展脚在路上坐 師云 請師收足 大師云 已展不收 師云 已進不退 乃推車碾過 大師脚損 歸法堂執斧子云 適來碾損老僧脚底出來 師便出於大師前引頸 大師乃置斧 師到南泉 覩衆僧參次 南泉指淨缾云 銅缾是境缾中有水 不得動著境 與老僧將水來 師便拈淨缾向南泉面前瀉 南泉便休 師後到潙山 於上座頭解放衣鉢 潙山聞師叔到 先具威儀下堂內 師見來便倒作睡勢 潙山便歸方丈 師乃發去 少間潙山問侍者 師叔在否 對云已去也 潙山云 去時有什麽言語 對云 無言語 潙山云 莫道無言語其聲如雷 師以冬居衡嶽夏止淸涼 唐元和中荐登五臺 路出淮西 屬吳元濟阻兵違拒王命 官軍與賊交鋒未決勝負 師曰 吾當去解其患 乃擲錫空中飛身而過 兩軍將士仰觀 事符預夢鬪心頓息 師旣顯神異 慮成惑衆遂入五臺 於金剛窟前將示滅 先問衆云 諸方遷化坐去臥去吾嘗見之 還有立化也無 衆云 有也 師云 還有倒立者否 衆云 未嘗見有 師乃倒立而化 亭亭然其衣順體 時衆議舁就荼毘屹然不動 遠近瞻視驚歎無已 師有妹爲尼 時在彼乃俯近而咄曰 老兄疇昔不循法津 死更熒惑於人 於是以手推之 僨然而踣 遂就闍維 收舍利入塔
●剗子; 同鏟子
●上座頭; 上座邊 頭 後綴
●淮西; 卽淮右 爲一地域名稱 宋在蘇北和江淮設淮南東路和淮南西路 淮南東路又稱淮左 淮南西路稱淮右 淮右多山 淮左多水 一般指今江淮地區 [百度百科]
●阻兵; 仗恃軍隊
●亭亭; 亭 直也 又指筆直的物體
●熒惑; 使人迷惑 炫惑
오대산(五臺山) 은봉선사(隱峯禪師)란 자는 복건(福建) 소무(邵武) 사람이며 성이 등씨(鄧氏)다〈당시에 호칭이 鄧隱峯이다〉. 어릴(幼; 저본에 幻으로 지었음) 적에 지혜롭지 못한 것 같았고 부모가 그의 출가를 청허(聽許; 허락)했다. 처음에 마조지문(馬祖之門)에 노닐면서 능히 오의(奧義)를 보지(覩) 못했다. 다시 석두(石頭; 希遷)로 내왕(來往)했는데 비록 두 번 민첩(敏捷)하지 못했지만〈語는 馬祖章을 보라〉 이후(而後; 以後)에 마대사(馬大師)의 언하에 계회(契會; 계합해 알다)했다. 스님이 석두에 있을 때 물어 이르되 어찌해야 합도(合道; 도에 합하다)함을 얻어 가겠습니까. 석두가 이르되 나도 또한 합도(合道)하지 못했다. 사운(師云) 필경 어떻습니까. 석두가 이르되 너는 저개(多少)를 입은(被) 지 다소의 시일을 지났느냐(得). 어느 날 석두화상이 풀을 깎던(剗) 차에 스님이 좌측에 있으면서 차수(叉手)하고 섰다. 석두가 잔자(剗子; 낫)를 스님의 면전을 향해 날려 한 포기(株)의 풀을 깎았다. 사운(師云) 화상은 다만 저개(遮箇; 이것)를 잔득(剗得; 得은 조사)했고 나개(那箇; 저것)를 잔득(剗得)하지 못했습니다. 석두가 잔자(剗子)를 제기(提起)했다. 스님이 잔자를 접득(接得)하여 이에 깎는 자세를 지었다. 석두가 이르되 너는 다만 나개(那箇)를 잔득(剗得)하고 저개(遮箇)를 잔득할 줄 알지 못한다.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洞山이 代云 도리어 堆阜(小丘)가 있습니까〉. 스님이 어느 날 토거(土車)를 밀던 차에 마대사가 다리를 펴고(展脚) 노상(路上)에 있으면서 앉았다. 사운 청컨대 스님은 발을 거두십시오. 대사가 이르되 이미 폈으니 거두지 못한다. 사운 이미 나아갔으니 물러서지 못합니다. 곧 수레를 밀어 연과(碾過; 갈고 지나가다)하였으니 대사의 다리가 손상되었다. 법당으로 돌아가 도끼(斧子; 子는 조사)를 잡고 이르되 적래(適來)에 노승의 다리를 갈아 손상(碾損)한 놈(底)은 나오너라. 스님이 바로 대사 앞에 나가 목을 늘어뜨렸다(引頸). 대사가 이에 도끼를 방치했다. 스님이 남천(南泉)에 이르러 보매 중승(衆僧)이 참차(參次)였다. 남천이 정병(淨缾)을 가리키며 이르되 동병(銅缾)은 이 경계(境界; 境)며 병 속에 물이 있다. 경계를 동착(動著; 著은 조사)함을 얻지 않고 노승을 위해(與) 물을 가지고 오너라. 스님이 바로 정병을 집어 남천의 면전을 향해 쏟았다. 남천이 바로 쉬었다. 스님이 후에 위산(潙山)에 이르러 상좌두(上座頭)에 의발(衣鉢)을 풀어 놓았다(解放). 위산이 사숙(師叔)이 이르렀다 함을 듣고 먼저 위의를 갖추고 당내(堂內)로 내려갔다. 스님이 옴을 보자 바로 넘어져 자는 자세를 지었다. 위산이 바로 방장으로 돌아갔다. 스님은 곧 떠났다(發去). 소간(少間; 조금 후)에 위산이 시자에게 묻되 사숙이 계시는가. 대운(對云) 이미 가셨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떠날 때 무슨 언어가 있었는가. 대운(對云) 언어가 없었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언어가 없다고 말하지 말지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스님이 형악(衡嶽)에서 동거(冬居)하고 여름은 청량(淸涼)에 머물렀다(止). 당 원화(元和; 806-820) 중 거듭(荐) 오대(五臺)에 오르는데 길이 회서(淮西)로 났고(出). 오원제(吳元濟)가 조병(阻兵)하며 왕명(王命)에 위거(違拒)함을 당했다(屬). 관군과 도적이 교봉(交鋒)하며 승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사왈(師曰) 내가 마땅히 가서 그 우환을 해결하리라. 이에 공중으로 석장(錫杖; 주장자)을 던지고 몸을 날려 지나가자 양군(兩軍)의 장사(將士)가 앙관(仰觀)했다. 일이 예몽(預夢)과 부합(符合)한지라 투심(鬪心)을 문득 쉬었다. 스님이 이미 신이(神異)를 나타내고는 혹중(惑衆)함을 이룰까 염려하면서 드디어 오대(五臺)에 들어갔다. 금강굴 앞에서 장차 시멸(示滅)하려 하면서 먼저 대중에게 물어 이르되 제방에서 천화(遷化)하매 좌거(坐去; 앉아 죽음)하고 와거(臥去)함을 내가 일찍이 그것을 보았거니와 도리어 입화(立化; 서서 죽음)함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대중이 이르되 있습니다. 스님이 이르되 도리어 도립(倒立)한 자가 있느냐. 대중이 이르되 일찍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곧 도립해 천화(遷化)했는데 꼿꼿해(亭亭然) 그 옷도 몸을 따랐다(順). 당시에 대중이 의논해 마주들어 다비(荼毘)를 이루려고(就) 했으나 흘연(屹然; 위엄스레 우뚝 솟은 모양)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원근에서 첨시(瞻視)하며 경탄(驚歎)을 그치지 않았다(無已). 스님에게 여동생이 있었는데 니(尼)가 되었다. 때에 거기에 있다가 이에 부근(附近)에서 돌왈(咄曰) 노형(老兄)이 주석(疇昔; 往昔. 以前)에도 법률을 따르지(循) 않더니 죽어서도 다시 사람들을 형혹(熒惑)합니까. 이에 손으로써 그것을 미니 분연(僨然; 넘어지듯)히 넘어졌다(踣). 드디어 사유(闍維)를 이루었고 사리를 거두어 입탑(入塔)했다.
●剗子; 산자(鏟子; 대패. 낫)와 같음.
●上座頭; 상좌변(上座邊)이니 두(頭)는 후철(後綴).
●淮西; 곧 회우(淮右)니 한 지역의 명칭이 됨. 송(宋)에서 소북(蘇北)과 강회(江淮)에 회남동로(淮南東路)와 회남서로(淮南西路)를 설치했는데 회남동로는 또 명칭이 회좌(淮左)며 회남서로는 명칭이 회우(淮右)니 회우엔 산이 많고 회좌엔 물이 많음. 일반으로 지금의 강회지구(江淮地區)를 가리킴 [백도백과].
●阻兵; 군대를 장시(仗恃; 倚仗. 依靠. 恃)함.
●亭亭; 정(亭)은 직(直)임. 또 붓처럼 곧은 물체를 가리킴.
●熒惑;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함. 현혹(炫惑)함.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40만 원. 할인. 잔본 81질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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