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28 제방광록(諸方廣語)

태화당 2025. 10. 6. 08:05

景德傳燈錄卷第二十八

 

諸方廣語一十二人見錄

南陽慧忠國師語 2579

洛京荷澤神會大師語 2596

江西大寂道一禪師語 2600

澧州藥山惟儼和尙語 2604

越州大珠慧海和尙語 2608

汾州大達無業國師語 2643

池州南泉普願和尙語 2652

趙州從諗和尙語 2664

鎭州臨濟義玄和尙語 2665

玄沙宗一師備大師語 2669

潭州羅漢桂琛和尙語 2673

大法眼文益禪師語 2679

 

南陽慧忠國師問禪客 從何方來 對曰 南方來 師曰 南方有何知識 曰知識頗多 師曰 如何示人 曰彼方知識直下示學人 卽心是佛佛是覺義 汝今悉具見聞覺知之性 此性善能揚眉瞬目去來運用遍於身中 挃頭頭知挃脚脚知 故名正遍知 離此之外更無別佛 此身卽有生滅 心性無始以來未曾生滅 身生滅者 如龍換骨 蛇脫皮 人出故宅 卽身是無常其性常也 南方所說大約如此 師曰 若然者與彼先尼外道無有差別 彼云 我此身中有一神性 此性能知痛癢 身壞之時神則出去 如舍被燒舍主出去 舍卽無常 舍主常矣 審如此者 邪正莫辨孰爲是乎 吾比遊方 多見此色 近尤盛矣 聚却三五百衆 目視雲漢云 是南方宗旨 把他壇經改換 添糅鄙譚 削除聖意 惑亂後徒 豈成言敎 苦哉吾宗喪矣 若以見聞覺知是佛性者 淨名不應云法離見聞覺知 若行見聞覺知是 則見聞覺知 非求法也

先尼外道; 梵語先尼 意譯有軍 勝軍 又作西尼外道 西儞迦外道 霰尼外道 指篤信神我 崇奉心常相滅之外道 [般涅槃經二十九 三十九 楞嚴經十 可洪音義十一 玄應音義二十三]

 

남양(南陽) 혜충국사(慧忠國師)가 선객에게 묻되 어느 방면으로 좇아왔는가. 대왈(對曰) 남방에서 왔습니다. 사왈(師曰) 남방에 어떤 지식(知識)이 있는가. 가로되 지식이 파다(頗多)합니다. 사왈 어떻게 사람에게 보이는가. 가로되 그 지방 지식은 직하(直下)에 학인에게 보이되 곧 마음이 이 불()이니 불은 이 각의 뜻이다(覺義). 네가 지금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성()을 모두 갖추었나니 이 성()은 잘 능히 양미순목(揚眉瞬目;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작임)하고 거래운용(去來運用)하면서 신중(身中)에 두루하다. 머리를 찌르면() 머리가 알고 다리를 찌르면 다리가 아나니 고로 이름이 정편지(正遍知). 이를 여읜 밖에 다시 별불(別佛)이 없다. 차신(此身)은 곧 생멸이 있지만 심성(心性)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일찍이 생멸하지 않는다. 몸의 생멸이란 것은 용이 환골(換骨)함과 뱀이 탈피(脫皮)함과 사람이 고택(故宅)에서 나감과 같다. 곧 신()은 이 무상(無常)이지만 그 성()은 상()이다. 남방에서 설하는 바가 대약(大約) 이와 같습니다. 사왈 만약 그러할진대 저 선니외도(先尼外道)와 차별이 있지 않다. 그가 이르되(彼云) 나의 이 몸 속에 하나의 신성(神性)이 있나니 차성(此性)이 능히 통양(痛癢)을 안다. 몸이 무너질 때 신()은 곧 나가나니(出去) ()이 불탐을 입으면 사주(舍主)가 나감(出去)과 같다. 집은 곧 무상(無常)이며 사주(舍主)는 상()이다. 이와 같은 자를 살피건대 사정(邪正)을 분변하지 못하거늘 무엇이() 이 옳음이 되겠는가. 내가 요새() 유방(遊方)하다가 이 색(; 氣色)을 많이 보았는데 근래에 더욱() 성하다. 삼오백중(三五百衆)을 모아(聚却) 눈으로 운한(雲漢)을 보면서 이르되 이것이 남방의 종지(宗旨). 저 단경(壇經)을 잡아() 개환(改換)하면서 비담(鄙譚)을 첨유(添糅; 더하고 섞다)하고 성의(聖意)를 삭제(削除)하여 후도(後徒)를 혹란(惑亂)하니 어찌 언교(言敎)를 이루겠는가. 고재(苦哉)로다, 오종(吾宗)이 상()했다. 만약 견문각지를 이 불성이라고 한다면 정명(淨名)이 법이 견문각지를 여의었다고 응당 이르지 않았으리라. 만약 견문각지를 행하며 옳다고 한다면 곧 견문각지이지 구법(求法)이 아니다.

先尼外道; 범어 선니(先尼; senika)는 의역하면 유군(有軍)ㆍ승군(勝軍). 또 서니외도(西尼外道)ㆍ서이가외도(西儞迦外道)ㆍ산니외도(霰尼外道)로 지음. 신아(神我)를 독신하며 심상상멸(心常相滅)을 숭봉(崇奉)하는 외도 [반열반경29, 39. 릉엄경10. 가홍음의11. 현응음의23].

 

僧又問 法華了義開佛知見此復若爲 師曰 他云開佛知見 尙不言菩薩二乘 豈以衆生癡倒便同佛之知見耶 僧又問 阿那箇是佛心 師曰 牆壁瓦礫是 僧曰 與經大相違也 涅槃云 離牆壁無情之物故名佛性 今云是佛心 未審心之與性爲別不別 師曰 迷卽別悟卽不別 曰經云 佛性是常心是無常 今云不別何也 師曰 汝但依語而不依義 譬如寒月水結爲氷 及至暖時氷釋爲水 衆生迷時結性成心 衆生悟時釋心成性 若執無情無佛性者 經不應言三界唯心 宛是汝自違經 吾不違也

 

중이 우문(又問) 법화(法華) 요의(了義; 了義經)는 개불지견(開佛知見; 불지견을 열다)했으니 이것은 다시 어떻습니까(若爲). 사왈(師曰) 그가 이르되 개불지견이라 했고 오히려 보살과 2()을 말하지 않았거늘 어찌 중생의 치도(癡倒; 어리석음의 顚倒)로써 바로 불지지견(佛之知見)과 같다고 하겠는가. 중이 우문(又問) 어느 것(阿那箇)이 이 불심입니까. 사왈 장벽(牆壁)과 와력(瓦礫)이 이것이다. 승왈僧曰) 경과 매우 상위(大相違)합니다. 열반(涅槃; 열반경)에 이르되 장벽의 무정지물(無情之物)을 여읜 고로 이름이 불성이라 했거늘 지금 이르되 이 불심이라 하시니 미심합니다, 심과 성(心之與性)이 다름이 됩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사왈 미()하면 곧 다르고 깨치면 곧 다르지 않다. 가로되 경운(經云) 불성은 이 상()이며 심()은 이 무상(無常)이라 했거늘 지금 이르되 다르지 않다 함은 어찌해서 입니까. 사왈 너는 단지 어()에 의하고 의()에 의하지 않는구나. 비유컨대 한월(寒月)에 물이 얼어() 얼음이 되지만 난시(暖時)에 이르면(及至) 얼음이 풀려 물이 됨과 같다. 중생이 미시(迷時)에 성()을 맺어 심()을 이루고 중생이 오시(悟時)엔 심을 풀어() 성을 이룬다. 만약 무정은 불성이 없다고 집착한다면 경에서 3()가 유심(唯心)이라고 응당 말하지 않았으리라. 완연히() 이는 네가 스스로 위경(違經)함이지 내가 위배한 게 아니다.

 

問無情旣有心性還解說法否 師曰 他熾然常說無有間歇 曰某甲爲什麽不聞 師曰 汝自不聞 曰誰人得聞 師曰 諸佛得聞 曰衆生應無分邪 師曰 我爲衆生說 不爲聖人說 曰某甲聾瞽不聞無情說法師應合聞 師曰 我亦不聞 曰師旣不聞爭知無情解說 師曰 我若得聞卽齊諸佛 汝卽不聞我所說法 曰衆生畢竟得聞否 師曰 衆生若聞卽非衆生 曰無情說法有何典據 師曰 不見華嚴云 刹說衆生說三世一切說 衆生是有情乎 曰師但說無情有佛性 有情復若爲 師曰 無情尙爾況有情耶 曰若然者 前擧南方知識云見聞是佛性 應不合判同外道 師曰 不道他無佛性 外道豈無佛性耶 但緣見錯 於一法中而生二見故非也 曰若俱有佛性 且殺有情卽結業互酬損害 無情不聞有報 師曰 有情是正報 計我我所而懷結恨卽有罪報 無情是其依報無結恨心 是以不言有報

正報; 二報之一 又曰正果 有情之自心也 是爲依過去業因而感得之果報正體 故曰正報

 

묻되 무정이 이미 심성(心性)이 있다면 도리어 설법할 줄 압니까. 사왈(師曰) 그가 치연(熾然)히 상설(常說)하며 간헐(間歇)이 있지 않다. 가로되 모갑은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합니까. 사왈 네가 스스로 듣지 못함이다. 가로되 어떤 사람(誰人)이 득문(得聞)합니까. 사왈 제불이 득문한다. 가로되 중생은 응당 분한이 없습니까. 사왈 나는 중생을 위해 설하고 성인을 위해 설하지 않는다. 가로되 모갑은 농고(聾瞽; 聾人盲人)인지라 무정설법을 듣지 못하거니와 스님은 응당 합당히 듣겠습니다. 사왈 나도 또한 듣지 못한다. 가로되 스님이 이미 듣지 못하신다면 어찌 무정이 설할 줄 아는 줄 압니까. 사왈 내가 만약 득문(得聞)한다면 곧 제불과 제등(齊等)하므로 너는 곧 내가 설하는 바 법을 듣지 못한다. 가로되 중생이 필경 득문합니까. 사왈 중생이 만약 듣는다면 곧 중생이 아니다. 가로되 무정설법은 무슨 전거(典據)가 있습니까. 사왈 보지 못하느냐, 화엄에 이르되 찰이 설하고(刹說) 중생이 설하고 삼세일체(三世一切)가 설한다 했는데 중생이 이 유정인가. 가로되 스님은 단지 무정이 불성이 있음을 설하셨거니와 유정은 다시 어떻습니까(若爲). 사왈 무정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유정이겠는가. 가로되 만약 그러할진대 앞에서 든 남방의 지식이 이르되 견문(見聞)이 이 불성이라 함도 응당 외도와 한가지라고 판별함이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왈 그가 불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니 외도인들 어찌 불성이 없겠는가. 단지 견착(見錯; 견해의 착오) 때문에() 1법 가운데에 2()을 내는 고로 그른 것이다. 가로되 만약 모두() 불성이 있다면 또() 유정을 죽이면 곧 결업(結業)하여 손해(損害)로 서로 갚지만(互酬) 무정은 과보가 있다 함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왈 유정은 이 정보(正報)니 아()와 아소(我所)를 계탁(計度)하여 결한(結恨)을 품는지라 곧 죄보(罪報)가 있지만 무정은 이것이 그 의보(依報)라서 결한(結恨)의 마음이 없나니 이런 까닭으로 과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正報; 2보의 하나. 또 가로되 정과(正果)니 유정의 자심(自心). 이는 과거의 업인(業因)에 의해 감득(感得)하는 과보의 정체(正體)가 되는지라 고로 가로되 정보임.

 

曰敎中但見有情作佛 不見無情受記 且賢劫千佛孰是無情佛耶 師曰 如皇太子未受位時唯一身爾 受位之後國土盡屬於王 寧有國土別受位乎 今但有情受記作佛之時 十方國土悉是遮那佛身 那得更有無情受記耶 曰一切衆生盡居佛身之上 便利穢污佛身 穿鑿踐蹋佛身 豈無罪耶 師曰 衆生全體是佛欲誰爲罪 曰經云 佛身無罣礙 今以有爲質礙之物而作佛身 豈不乖於聖旨 師曰 大品經云 不可離有爲而說無爲 汝信色是空否 曰佛之誠言那敢不信 師曰 色旣是空寧有罣礙 曰衆生佛性旣同 只用一佛修行 一切衆生應時解脫 今旣不爾同義安在 師曰 汝不見華嚴六相義云 同中有異異中有同 成壞總別類例皆然 衆生佛雖同一性 不妨各各自修自得 未見他食我飽

類例; 類別與體例

 

가로되 교중(敎中)에 단지 유정의 작불(作佛)은 보았지만 무정의 수기(受記)를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현겁(賢劫) 천불(千佛)에 누가() 이 무정불(無情佛)입니까. 사왈 예컨대 황태자가 수위(受位)하지 않았을 땐 오직 일신(一身) 뿐이지만 수위한 후론 국토가 모두() 왕에게 속한다. 어찌() 국토가 따로 수위함이 있겠는가. 여금에 단지 유정이 수기(受記)하여 작불(作佛)할 땐 시방국토가 모두() 이 자나불신(遮那佛身)이거늘 다시 무정의 수기가 있음을 어찌 얻겠는가(那得). 가로되 일체중생이 모두() 불신지상(佛身之上)에 거주하며 변리(便利; 똥과 오줌)로 불신(佛身)을 예오(穢污; 더럽힘)하고 불신을 천착(穿鑿)하고 천답(踐蹋; 밟다)하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사왈 중생의 전체가 이 불()이거늘 누가 죄를 짓고 싶어 하겠느냐(欲誰爲罪). 가로되 경운(經云) 불신(佛身)은 괘애(罣礙)가 없다 했는데 여금에 유위(有爲)의 질애(質礙; 障礙)의 물건으로써 불신(佛身)을 지으니 어찌 성지(聖旨)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사왈 대품경(大品經)에 이르되 가히 유위(有爲)를 여의고서 무위(無爲)를 설하지 못한다 했다. 너는 색이 이 공임을 믿느냐. 가로되 불타의 성언(誠言)을 어찌() 감히 불신하겠습니까. 사왈 색이 이미 이 공이거늘 어찌() 괘애(罣礙)가 있겠는가. 가로되 중생의 불성이 이미 한가지라서 다만 일불(一佛)의 수행을 써서 일체중생이 응시(應時; 隨時. 卽刻)에 해탈해야 하거늘 이제 이미 그렇지 않으니 동의(同義)가 어디에 있습니까(安在). 사왈 네가 보지 못하느냐, 화엄육상의(華嚴六相義)에 이르되 동중(同中)에 유이(有異)하고 이중(異中)에 유동(有同)하나니 성괴(成壞)와 총별(總別)도 유례(類例)가 다 그러하다. 중생과 불이 비록 동일한 성()이지만 각각 자수자득(自修自得)함에 방애되지 않는다. 그가 먹었는데 내가 배부르다 함을 보지 못했다.

類例; 유별(類別)과 체례(體例).

 

曰有知識示學人 但自識性了無常時 拋却㲉漏子一邊著 靈臺智性逈然而去 名爲解脫 此復若爲 師曰 前已說了 猶是二乘外道之量 二乘厭離生死欣樂涅槃 外道亦云 吾有大患爲吾有身 乃趣乎冥諦 須陀洹人八萬劫 餘三果人六四二萬 辟支佛一萬劫 住於定中 外道亦八萬劫住非非想中 二乘劫滿猶能迴心向大 外道還却輪迴 曰佛性一種爲別 師曰 不得一種 曰何也 師曰 或有全不生滅 或半生半滅 半不生滅 曰孰爲此解 師曰 我此間佛性全不生滅 汝南方佛性半生半滅半不生滅 曰如何區別 師曰 此則身心一如心外無餘 所以全不生滅 汝南方身是無常神性是常 所以半生半滅半不生滅 曰和尙色身豈得便同法身不生滅耶 師曰 汝那得入於邪道 曰學人早晩入邪道 師曰 汝不見金剛經色見聲求皆行邪道 今汝所見不其然乎 曰某甲曾讀大小乘敎 亦見有說 不生不滅中道正性之處 亦見有說 此陰滅彼陰生 身有代謝而神性不滅之文 那得盡撥同外道斷常二見 師曰 汝學出世無上正眞之道 爲學世間生死斷常二見耶 汝不見 肇公云 譚眞則逆俗 順俗則違眞 違眞故迷性而莫返 逆俗故言淡而無味 中流之人如存若亡 下士拊掌而不顧 汝今欲學下士笑於大道乎 曰師亦言卽心是佛 南方知識亦爾 那有異同 師不應自是而非他 師曰 或名異體同 或名同體異 因茲濫矣 只如菩提涅槃眞如佛性名異體同 眞心妄心佛智世智名同體異 緣南方錯將妄心言是眞心 認賊爲子 有取世智稱爲佛智 猶如魚目而亂明珠 不可雷同事須甄別 曰若爲離得此過 師曰 汝但子細反觀陰入界處一一推窮 有纖毫可得否 曰子細觀之不見一物可得 師曰 汝壞身心相耶 曰身心性離有何可壞 師曰 身心外更有物不 曰身心無外寧有物耶 師曰 汝壞世間相耶 曰世間相卽無相那用更壞 師曰 若然者卽離過矣 禪客唯然受敎

㲉漏子; 殼漏子 指人之肉體

逈然; 卓越不群貌 二猶孑然 孤獨貌 三形容差得很遠 此指二

外道亦云; 道德經寵辱章第十三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冥諦; 數論師所立二十五諦之第一 是爲萬物之本源 冥漠無諦 故曰冥諦 又云冥性 又爲萬物之本源 萬差之諸法由此生出 故名自性 一名本性 亦云勝性 [金七十論上 百論疏上中 楞嚴長水疏二上]

須陀洹; <> srotāpanna 聲聞乘四果中最初之聖果 又稱初果 卽斷盡見惑之聖者所得之果位 全稱須陀般那 舊譯作入流 逆流 新譯作預流 入流 意指初入聖者之流 逆流 謂斷三界之見惑已 方違逆生死之流 又初證聖果者 預入聖道之法流 故稱預流 須陀洹分因果二位 自入見道初心 至第十五心之間 爲趣向須陀洹果之因位 稱須陀洹向 見道之終 卽第十六心之位 而對於前之向位 則稱須陀洹果 [俱舍論二十三 華嚴五敎章三]

餘三果; 斯陀含 阿那含 阿羅漢

色見聲求; 祖庭事苑五 色見聲求 金剛般若偈曰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代謝; 更替 交替變換

如存若亡; 義同若存若亡 未能決定 或信或疑 未分於存亡

下士笑於大道; 道德經第四十一聞道章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唯然; 金剛經註上 唯然者 應諾之辭 金剛略疏 唯然者 順從之辭 金剛經筆記 唯然者 敬對之辭 卽曾子曰 唯 言應之速 而無疑也

 

가로되 어떤 지식은 학인에게 보이되 단지 스스로 식성(識性)이 무상(無常)함을 깨달을() 때 각루자(㲉漏子)를 일변(一邊著)에 던져버리고 영대(靈臺; 一心. 불성)의 지성(智性)만 형연(逈然)히 가나니 이름하여 해탈(解脫)이다. 이것은 다시 어떻습니까(若爲). 사왈(師曰) 앞에서 이미 설했나니 오히려 이는 2()과 외도의 헤아림()이다. 2승은 생사를 염리(厭離)하고 열반을 흔요(欣樂)하며 외도도 또한 이르되(外道亦云) 나에게 대환(大患)이 있나니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에 명제(冥諦)로 향한다(). 수다원인(須陀洹)8만 겁이며 나머지 3과인(餘三果)642만이며 벽지불(辟支佛)1만 겁 동안 정중(定中)에 머문다. 외도도 또한 8만 겁 동안 비비상(非非想) 가운데 머문다. 2승은 겁이 차면 오히려 능히 회심(迴心)하여 향대(向大; 대승을 향함)하거니와 외도는 도리어(還却) 윤회한다. 가로되 불성은 일종(一種)입니까 다름이 뙵니까. 사왈 일종을 얻지 못한다. 가로되 왜입니까. 사왈 혹 전불생멸(全不生滅)이 있거나 혹 반생반멸(半生半滅)이거나 반불생멸(半不生滅)이다. 가로되 누가(; 저본에 으로 지었음) 이 이해(理解; )를 합니까. 사왈 나의 차간(此間)에선 불성이 전불생멸(全不生滅)이지만 너희 남방에선 불성이 반생반멸(半生半滅)이며 반불생멸(半不生滅)이다. 가로되 어떻게 구별(區別)합니까. 사왈 여기에선 곧 신심(身心)이 일여(一如)라서 심외(心外)에 나머지가 없는지라 소이로 전불생멸(全不生滅)이지만 너희 남방에선 신()은 이 무상(無常)이며 신성(神性)은 이 상()이니 소이로 반생반멸(半生半滅)ㆍ반불생멸(半不生滅)이다. 가로되 화상이시여, 색신이 어찌 바로 법신의 불생멸(不生滅)과 같음을 얻겠습니까. 사왈 네가 어찌() 사도(邪道)에 득입(得入)하느냐. 가로되 학인이 조만(早晩; 언제)에 사도에 들었습니까. 사왈 네가 금강경을 보지 못했느냐, 색견성구((色見聲求)는 모두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했다. 지금 너의 소견(所見)이 그렇지(其然) 않는가. 가로되 모갑이 일찍이 대소승교(大小乘敎)를 읽었는데 또한 설함이 있음을 보았으니 불생불멸이 중도(中道)의 정성(正性)의 처소라 했습니다. 또한 설함이 있음을 보았으니 차음(此陰; 五陰)이 멸하고 피음(彼陰)이 생하나니 신()은 대사(代謝)가 있으나 신성(神性)은 불멸한다는 글입니다. 어찌() 진발(盡撥; 모두 제거)하여 외도의 단상이견(斷常二見)과 같음을 얻겠습니까. 사왈 너는 출세(出世; 출세간)의 무상정진지도(無上正眞之道)를 배우느냐, 세간의 생사의 단상이견(斷常二見)을 배움이 되느냐. 네가 보지 못하느냐, 조공(肇公)이 이르되 진을 얘기하면(譚眞) 곧 역속(逆俗)하고 속에 순하면(順俗) 곧 위진(違眞)한다. 위진(違眞)하는 고로 성()을 미()해 막반(莫返; 돌이키지 못함)하고 역속(逆俗)하는 고로 언어가 담박하여 무미(無味)하다. 중류(中流; 中根의 무리)의 사람은 여존약망(如存若亡)하며 하사(下士)는 부장(拊掌)하며 돌아보지 않는다. 너는 지금 하사가 대도를 웃음(下士笑於大道)을 배우려고 하는가. 가로되 스님도 또한 말하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했고 남방의 지식도 또한 그러하거늘 어찌() 이동(異同)이 있겠습니까. 스님은 응당 자기는 옳고(自是) 남은 그르다고(非他)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왈 혹 이름은 다르나 체는 같고(名異體同) 혹은 이름은 같으나 체는 다르나니 이로 인해(因茲) 범람(氾濫; )한다. 지여(只如) 보리ㆍ열반ㆍ진여ㆍ불성은 이름이 다르나 체가 같고 진심(眞心)ㆍ망심(妄心)ㆍ불지(佛智)ㆍ세지(世智)는 이름은 같으나 체가 다르다. 남방에선 망심(妄心)을 착장(錯將; 잘못 가지다)하여 이 진심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도적을 인정해 아들로 삼음이다(認賊爲子). 세지(世智)를 취해 호칭(呼稱; )하기를 불지(佛智)라 함이 있음이 마치 어목(魚目)으로 명주(明珠)를 어지럽힘()과 같나니 가히 뇌동(雷同)하지 말고 사실(事實; )을 견별(甄別; 區別. 鑑別)함을 써라(). 가로되 어찌해야(若爲) 이 허물을 여읨을 얻겠습니까. 사왈 네가 단지 자세히 음(; 5)ㆍ입(; 6)ㆍ계(; 18)ㆍ처(; 12)를 반관(反觀; 돌이켜 봄)하여 하나하나 추궁(推窮)하라. 섬호(纖毫; 저본에 纖豪로 지었음)라도 가히 얻음이 있느냐. 가로되 자세히 관()하매 일물(一物)도 가히 얻음을 보지 못합니다. 사왈 너는 신심(身心)의 상()을 무너뜨렸느냐. 가로되 신심의 성()이 리(; 諸相을 여읨)거늘 무슨 가히 무너뜨릴 게 있겠습니까. 사왈 신심(身心) 밖에 다시 사물(事物; )이 있느냐. 가로되 신심은 밖이 없거늘 어찌() 사물이 있겠습니까. 사왈 네가 세간상(世間相)을 무너뜨렸느냐. 가로되 세간상이 곧 무상(無相)이거늘 어찌() 다시 무너뜨림을 쓰겠습니까. 사왈 만약 그러할진대 곧 허물을 여의었다. 선객이 유연(唯然)하며 수교(受敎)했다.

㲉漏子; 각루자(殼漏子)와 같음 사람의 육체를 가리킴.

逈然; 1. 탁월(卓越)하여 불군(不群)인 모양. 2. 혈연(孑然 )과 같음. 고독한 모양. 3. 차이가 아주 멂을 얻음을 형용.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外道亦云; 도덕경 총욕장 제13. 나에게 대환(大患)이 있는 소이(所以)란 것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몸이 없다면 내가 무슨 우환이 있으리오.

冥諦; 수론사(數論師)가 세운 바 25(; 원음이 체. 慣音이 제)의 하나. 이것은 만물의 본원이니 명막(冥漠)하여 무제(無諦)인지라 고로 가로되 명제며 또 이르되 명성(冥性). 또 만물의 본원이 되며 만차(萬差)의 제법이 이로 말미암아 출생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자성이며 일명이 본성이며 또 이르되 승성(勝性)[금칠십론상. 백론소상중. 릉엄장수소2].

須陀洹; <> srotāpanna. 성문승 4() 중 최초의 성과(聖果)니 또 명칭이 초과(初果). 곧 견혹(見惑)을 끊어 없앤 성자가 얻는 바의 과위(果位). 전칭이 수다반나(須陀般那)니 구역엔 입류(入流)ㆍ역류(逆流)로 지었고 신역은 예류(預流)로 지었음. 입류란, 뜻이 성자의 흐름()에 초입(初入함을 가리키며 역류란, 이르자면 3계의 견혹을 끊은 다음 비로소 생사의 흐름에 위역(違逆)함임. 또 처음으로 성과(聖果)를 증득한 자는 미리 성도(聖道)의 법류(法流)에 드는지라 고로 명칭이 예류(預流). 수다원을 인과(因果) 2위로 분별하나니 견도(見道)에 든 초심으로부터 제15()에 이르는 사이는 수다원과에 취향하는 인위(因位)과 되므로 명칭이 수다원향(須陀洹向)이며 견도의 후 곧 제16심의 위()는 앞의 향위(向位)에 대해 곧 명칭이 수다원과(須陀洹果)[구사론23. 화엄오교장3].

餘三果;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色見聲求; 조정사원5. 색견성구(色見聲求) 금강반야의 게에 가로되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지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代謝; 경체(更替; 바꾸다). 교체하고 변환함.

如存若亡; 뜻이 약존약망(若存若亡)과 같음. 능히 결정하지 못해 혹 믿기도 하고 혹 의심하여 존망(存亡)을 나누지 못함임.

下士笑於大道; 도덕경 제41 문도장. 상사(上士)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이를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면 약존약망(若存若亡;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의심하는 모양)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그것을 크게 웃나니 웃지 않으면 족히 도가 되지 못한다.

唯然; 금강경주상. 유연(唯然)이란 것은 응낙의 말이다. 금강약소. 유연(唯然)이란 것은 순종함의 말이다. 금강경필기. 유연(唯然)이란 것은 경대(敬對)의 말이다. 곧 증자(曾子)가 가로되 유(), 말하자면 응대가 신속하고 의심이 없음이다.

 

常州僧靈覺問曰 發心出家本擬求佛 未審如何用心卽得 師曰 無心可用卽得成佛 曰無心可用阿誰成佛 師曰 無心自成佛 成佛亦無心 曰佛有大不可思議爲能度衆生 若也無心阿誰度衆生 師曰 無心是眞度生 若見有生可度者 卽是有心宛然生滅 曰今旣無心 能仁出世說許多敎迹豈可虛言 師曰 佛說敎亦無心 曰說法無心應是無說 師曰 說卽無無卽說 曰說法無心造業有心否 師曰 無心卽無業 今旣有業心卽生滅何得無心 曰無心卽成佛 和尙卽今成佛未 師曰 心尙自無誰言成佛 若有佛可成還是有心 有心卽有漏何處得無心 曰旣無佛可成 和尙還得佛用否 師曰 心尙自無用從何有 曰茫然都無 莫落斷見否 師曰 本來無見阿誰道斷 曰本來無莫落空否 師曰 空旣是無墮從何立 曰能所俱無 忽有人持刀來取命 爲是有是無 師曰 是無 曰痛否 師曰 痛亦無 曰痛旣無死後生何道 師曰 無死無生亦無道 曰旣得無物自在 饑寒所逼若爲用心 師曰 饑卽喫飯寒卽著衣 曰知饑知寒應是有心 師曰 我問汝 有心心作何體段 曰心無體段 師曰 汝旣知無體段 則是本來無心 何得言有 曰山中逢見虎狼如何用心 師曰 見如不見來如不來 彼卽無心惡獸不能加害 曰寂然無事獨脫無心名爲何物 師曰 名金剛大士 曰金剛大士有何體段 師曰 本無形段 曰旣無形段 喚何物作金剛大士 師曰 喚作無形段金剛大士 曰金剛大士有何功德 師曰 一念與金剛相應 能滅殑伽沙劫生死重罪 得見殑伽沙諸佛 其金剛大士功德無量 非口所說非意所陳 假使殑伽沙劫住世說 亦不可得盡 曰如何是一念相應 師曰 憶智俱忘卽是相應 曰憶智俱忘誰見諸佛 師曰 忘卽無無卽佛 曰無卽言無 何得喚作佛 師曰 無亦空佛亦空 故曰無卽佛佛卽無 曰旣無纖毫可得名爲何物 師曰 本無名字 曰還有相似者否 師曰 無相似者 世號無比獨尊 汝努力依此修行 無人能破壞者 更不須問任意遊行獨脫無畏 常有河沙賢聖之所覆護 所在之處常得河沙天龍八部之所恭敬 河沙善神來護永無障難 何處不得逍遙 又問 迦葉在佛邊聽 爲聞不聞 師曰 不聞聞 曰云何不聞聞 師曰 聞不聞 曰如來有說不聞聞 無說不聞聞 師曰 如來無說說 曰云何無說說 師曰 言滿天下無口過

能仁; 釋加牟尼 一譯曰能仁 修行本起經上 釋迦文 漢言能仁

體段; 身段 形段

天龍八部; 又稱八部衆 卽天 龍 夜叉 阿修羅 迦樓羅 乾闥婆 緊那羅 摩睺羅迦 爲守護佛法而有大力之諸神 八部衆中 以天龍二衆爲上首 故標擧其名 統稱天龍八部 [無量壽經上 法華經四]

言滿天下無口過; 孝經注 言滿天下無口過 行滿天下無怨惡 注 禮法之言 焉有口過 道德之行 自無怨惡 口過; 言語的過失

 

상주승(常州僧) 영각(靈覺)이 문왈(問曰) 발심하여 출가함은 본래 구불(求佛)하려고 함입니다. 미심(未審)하오니 어떻게 용심(用心)해야 곧 얻습니까. 사왈(師曰) 마음을 가히 씀이 없다면(無心可用) 곧 성불함을 얻는다. 가로되 마음을 가히 씀이 없다면 누가(阿誰) 성불합니까. 사왈 무심하면 저절로 성불하고 성불(成佛; 成佛 2補入)하매 또한 무심하다. 가로되 부처는 대불가사의(大不可思議)가 있어 능히 중생을 제도합니다. 만약에 무심하면 누가 중생을 제도합니까. 사왈 무심이 이 참다운 도생(度生; 중생을 제도함)이다. 만약 가히 제도할 중생(衆生; )이 있다고 본다면 즉시(卽是) 유심(有心)이라서 완연(宛然)히 생멸이다. 가로되 이제 이미 무심이라면 능인(能仁)이 출세하여 허다한 교적(敎迹)을 설한 게 어찌 가히 허언(虛言)이라 하겠습니까. 사왈 부처가 설교(說敎)함도 또한 무심이다. 가로되 설법이 무심이라면 응당 이 무설(無說)이라야 할 것입니다. 사왈 설()이 곧 무()며 무가 곧 설이다. 가로되 설법은 무심이지만 조업(造業)은 유심(有心)입니까. 사왈 무심(無心)이면 곧 무업(無業)이다. 이제 이미 유업(有業)이니 심이 곧 생멸이거늘 어찌 무심을 얻겠는가. 가로되 무심이 곧 성불이면 화상은 즉금 성불했습니까 아닙니까. 사왈 심도 오히려 스스로 없거늘 누가 성불을 말하리오. 만약 가히 이룰 부처가 있다면 도리어 이 유심이다. 유심이면 곧 유루(有漏)이거늘 어느 곳에서 무심을 얻겠는가. 가로되 이미 가히 이룰 부처가 없다면 화상은 도리어 부처의 씀(佛用)을 얻습니까. 사왈 심도 오히려 스스로 없거늘 용()이 어디로 좇아 있겠는가. 가로되 망연(茫然)히 모두() 없다면 단견(斷見)에 떨어짐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본래 견()이 없거늘 누가(阿誰) ()을 말하는가(). 가로되 본래 무()라면 공()에 떨어짐()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공도 이미 이 없거늘 타()를 어디로 좇아 세우리오. 가로되 능소(能所)가 모두 없다면 홀연히 어떤 사람이 칼을 가지고 와서 목숨을 취하면 이 유()가 됩니까, 이 무()입니까. 사왈 이 무다. 가로되 아픕니까(). 사왈 아픔도 또한 없다. 가로되 아품이 이미 없다면 사후(死後)에 어느 도()에 출생합니까. 사왈 사도 없고 생도 없고 또한 도()도 없다. 가로되 이미 물건이 없는(無物) 자재(自在)를 얻었다면 기한(饑寒)의 소핍(所逼; 핍박을 받는 바)에 어떻게(若爲) 용심(用心)합니까. 사왈 주리면() 곧 밥을 먹고 추우면 곧 옷을 입는다(著衣). 가로되 주림을 알고 추위를 앎은 응당 이 유심(有心)입니다. 사왈 내가 너에게 묻는다. 유심이면 심이 어떤 체단(體段)을 지었느냐. 가로되 심은 체단이 없습니다. 사왈 네가 이미 체단이 없음을 알았으니 곧 이 본래 무심이거늘 어찌 유라고 말함을 얻겠는가. 가로되 산중에서 호랑(虎狼)을 봉견(逢見)하면 어떻게 용심(用心)해야 합니까. 사왈 보아도 보지 않음과 같고 와도 오지 않음과 같나니 그가 곧 무심하면 악수(惡獸)도 능히 가해(加害)하지 못한다. 가로되 적연(寂然)하여 무사(無事)하고 독탈(獨脫)하여 무심하면 이름하여 무슨 물건입니까. 사왈 이름이 금강대사(金剛大士). 가로되 금강대사는 어떤 체단(體段)이 있습니까. 사왈 본래 형단(形段)이 없다. 가로되 이미 형단이 없다면 무슨 물건을 일러 금강대사라 합니까. 사왈 무형단(無形段)의 금강대사라고 불러 짓는다. 가로되 금강대사는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사왈 일념(一念)이 금강과 상응하여 능히 긍가사겁(殑伽沙劫)의 생사의 중죄(重罪)를 멸하고 긍가사의 제불을 득견(得見)하나니 그 금강대사의 공덕이 무량하여 입으로 설할 바가 아니며 뜻으로 진술할 바가 아니다. 가사(假使) 긍가사겁(殑伽沙劫)에 주세(住世)하며 설하더라도 또한 가히 다함을 얻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이 이 일념에 상응함입니까. 사왈 억지(憶智; 기억과 지혜)를 모두() 잊어야 즉시(卽是) 상응이다. 가로되 억지를 모두 잊으면 누가 제불을 봅니까. 가로되 잊으면 곧 무()며 무()면 곧 불()이다. 가로되 무()이면 곧 무()라고 말해야 하거늘 어찌 불()이라고 불러 지음을 얻습니까. 사왈 무()도 또한 공()이며 불()도 또한 공인지라 고로 가로되 무가 곧 불이며 불이 곧 무다. 가로되 이미 섬호(纖毫; 저본에 纖豪로 지었음)도 가히 얻음이 없다면 이름하여 무슨 물건입니까. 사왈 본래 명자(名字)가 없다. 가로되 도리어 상사(相似)한 것이 있습니까. 사왈 상사한 것이 없나니 세상에서 호()하되 무비독존(無比獨尊)이라 한다. 네가 노력하여 이에 의해 수행하면 사람이 능히 파괴할 자가 없다. 다시 물음을 쓰지() 않으며 임의(任意)로 유행(遊行)하여도 독탈(獨脫)하여 무외(無畏)하리라. 늘 하사(河沙)의 현성(賢聖)의 부호(覆護)하는 바가 있으며 소재(所在)하는 곳에 늘 하사의 천룡팔부(天龍八部)의 공경하는 바를 얻으며 하사의 선신(善神)이 와서 옹호하여 영원히 장난(障難)이 없으리니 어느 곳인들 소요(逍遙)함을 얻지 못하리오. 우문(又問) 가섭이 불변(佛邊)에 있으면서 들었는데 문()이 됩니까, 불문(不聞)입니까. 사왈 들음이 없이 들었다(不聞聞). 가로되 어찌하여 들음이 없이 들었습니까. 사왈 들어도 들음이 아니다(聞不聞). 가로되 여래가 설이 있어 들음 없이 들었습니까(不聞聞), 설이 없어 들음 없이 들었습니까. 사왈 여래는 설함 없이 설했다(無說說). 가로되 어떻게(云何) 설함 없이 설했습니까. 사왈 말이 천하에 가득하면 구과가 없다(言滿天下無口過).

能仁; 석가모니를 한편으로 번역해 가로되 능인임. 수행본기경상. 석가문(釋迦文) ()나라 말로 능인이다.

體段; 신단(身段). 형단(形段). .

天龍八部; 또 명칭이 8부중이니 곧 천ㆍ용ㆍ야차ㆍ아수라ㆍ가루라ㆍ건달바ㆍ긴나라ㆍ마후라가며 불법을 수호하면서 대력(大力)이 있는 제신(諸神). 8부중 가운데 천룡 2()이 상수(上首)가 되는지라 고로 그 이름을 표거(標擧)하면 천룡8부를 통칭(統稱)[무량수경상. 법화경4].

言滿天下無口過; 효경주(孝經注) 언만천하무구과(言滿天下無口過)며 행만천하무원오(行滿天下無怨惡). () 예법(禮法)의 말에 어찌 구과(口過)가 있으며 도덕의 행엔 스스로 원오(怨惡)가 없다. 口過; 언어의 과실.

 

洛京荷澤神會大師示衆曰 夫學者須達自源 四果三賢皆名調伏 辟支羅漢未斷其疑 等妙二覺了達分明 覺有淺深敎有頓漸 其漸也歷僧祇劫猶處輪迴 其頓也屈伸臂頃便登妙覺 若宿無道種徒學多知 一切在心邪正由己 不思一物卽是自心 非智所知更無別行 悟入此者眞三摩提 法無去來前後際斷 故知無念爲最上乘 曠徹淸虛頓開寶藏 心非生滅性絕推遷 自淨則境慮不生 無作乃攀緣自息 吾於昔日轉不退輪 今得定慧雙修如拳如手 見無念體不逐物生 了如來常更何所起 今此幻質元是眞常 自性如空本來無相 旣達此理誰怖誰憂 天地不能變其體 心歸法界萬象一如 遠離思量智同法性 千經萬論只是明心 旣不立心卽體眞理都無所得 告諸學衆無外馳求 若最上乘應當無作 珍重

四果; 聲聞乘聖果之差別也 其階段依次爲預流果(須陀洹果) 一來果(斯陀含果) 不還果(阿那含果) 阿羅漢果

三賢; 指修善根以制伏煩惱 使心調和之三種修行階位 可分小乘之五停心 別相念住 總相念住 與大乘之十住 十行 十回向三位 [四敎義五 菩薩瓔珞本業經疏下 華嚴經探玄記五 華嚴五敎章三]

推遷; 推移變遷

 

낙경(洛京) 하택신회(荷澤神會) 대사가 시중(示衆)해 가로되 무릇 학자는 모름지기 자원(自源)을 통달(通達)해야 하나니 4(四果)3(三賢)을 모두 이름해 조복(調伏)이며 벽지(辟支)와 라한(羅漢)도 그 의혹을 끊지 못하고 등묘(等妙) 2()이라야 요달(了達)하여 분명하다. ()에 천심(淺深)이 있고 교()에 돈점(頓漸)이 있나니 그 점()이란 승기겁(僧祇劫)을 경력(經歷)하더라도 오히려 윤회(輪迴)에 처하고 그 돈()이란 팔을 굴신(屈伸)하는 동안()에 바로 묘각(妙覺)에 오른다. 만약 숙세(宿世)에 도종(道種)이 없다면 도연(徒然)히 다지(多知)를 배운다. 일체가 마음에 있고 사정(邪正)이 자기로 말미암나니 일물(一物)도 생각하지 않음이 즉시(卽是) 자심(自心)이다. 지혜로 알 바가 아니며 다시 별행(別行)이 없나니 여기에 오입(悟入)하는 자라야 참다운 삼마제(三摩提; 三昧). 법엔 거래가 없어서 전후제(前後際)가 끊겼나니 고로 알지니 무념이 최상승(最上乘)이 된다. 널리() 청허(淸虛)에 통해야() 단박에 보장(寶藏)을 여나니 심()은 생멸이 아니며 성()은 추천(推遷)이 끊겼나니 자정(自淨; 스스로 청정)하면 곧 경려(境慮; 경계와 사려)가 생기지 않고 무작(無作)이면 이에 반연(攀緣)이 저절로 쉬어진다. 내가 석일(昔日)에 더욱() 불퇴전(不退輪)했다가 지금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얻어 여권여수(如拳如手)하여 무념(無念)의 체()가 사물 쫓아 나지 않음을 보았다. 여래의 상()을 요달하였으니 다시 무슨 일어나는 바이겠는가. 지금의 이 환질(幻質; 幻軀)이 원래 이 진상(眞常)이니 자성이 공()과 같아서 본래 무상(無相)이다. 이미 이 이치를 통달했거늘 누가 두려워 하며 누가 근심하겠는가. 천지(天地)가 능히 그 체를 변화시키지 못하나니 마음이 법계로 돌아가고 만상(萬象)이 일여(一如). 사량(思量)을 원리(遠離)하여 지혜가 법성(法性)과 같나니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다만 이 명심(明心)한다. 이미 마음을 세우지 않으니 곧 체가 진리며 도무지 소득이 없다. 여러 학중(學衆)에게 고()하나니 밖으로 치구(馳求)하지 말아라. 만약 최상승일진대 응당 무작(無外)이다. 진중(珍重)하라.

四果; 성문승(聲聞乘) 성과(聖果)의 차별임. 그 계단은 차제헤 의해 예류과(수다원과)ㆍ일래과(사다함과)ㆍ불환과(아나함과)ㆍ아라한과가 됨.

三賢; 선근을 닦아 번뇌를 제복(制伏)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게 하는 3종의 수행계위(修行階位)를 가리킴. 가히 소승의 오정심(五停心)ㆍ별상념주(別相念住)ㆍ총상념주(總相念住)와 대승의 10()10()10회향(回向) 3위로 분류함 [사교의5. 보살영락본업경소하. 화엄경탐현기5. 화엄오교장3].

推遷; 추이(推移)하며 변천함.

 

人問 無念法有無否 師曰 不言有無 曰恁麽時作麽生 師曰 亦無恁麽時 猶如明鏡若不對像終不見像 若見無物乃是眞見 師於大藏經內有六處有疑 問於六祖 第一問戒定慧 曰戒定慧如何所用 戒何物 定從何處修 慧因何處起 所見不通流 六祖答曰 定則定其心 將戒戒其行 性中常慧照 自見自知深 第二問 本無今有有何物 本有今無無何物 誦經不見有無義 眞似騎驢更覓驢 答曰 前念惡業本無 後念善生今有 念念常行善行 後代人天不久 汝今正聽吾言 吾卽本無今有 第三問 將生滅却滅 將滅滅却生 不了生滅義 所見似聾盲 答曰 將生滅却滅 令人不執性 將滅滅却生 令人心離境 未若離二邊 自除生滅病 第四問 先頓而後漸 先漸而後頓 不悟頓漸人 心裏常迷悶 答曰 聽法頓中漸 悟法漸中頓 修行頓中漸 證果漸中頓 頓漸是常因 悟中不迷悶 第五問 先定後慧先慧後定 定慧後初何生爲正 答曰 常生淸淨心 定中而有慧 於境上無心 慧中而有定 定慧等無先 雙修自心正 第六問 先佛而後法 先法而後佛 佛法本根源 起從何處出 答曰 說卽先佛而後法 聽卽先法而後佛 若論佛法本根源 一切衆生心裏出

 

사람이 묻되 무념법(無念法)은 있습니까 없습니까(有無). 사왈(師曰) 유무를 말하지 않는다. 가로되 이러한 때(恁麽時) 어떻습니까(作麽生). 사왈 또한 임마시(恁麽時)가 없다. 마치 명경(明鏡)이 만약 상()을 대하지 않으면 마침내 상()을 나타내지() 않음과 같다. 만약 무물(無物)을 본다면 곧 이 진견(眞見)이다. 스님이 대장경 내에 6()가 있어 의심이 있었고 6()에게 물었다. 1(第一問) 계정혜(戒定慧). 가로되 계정혜는 어떻게 쓰는 것이며(所用) 계는 무슨 물건이며 정은 어느 곳으로 좇아 닦으며 혜는 어느 곳으로 인해 일어나기에 소견(所見)이 통류(通流)하지 않습니까. 6조가 답왈(答曰) ()은 곧 그 마음을 정()하며 계()를 가져 그 행을 계(; 警戒)하며 성중(性中)에 늘 혜()로 비추어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깊음을 안다. 2문 본무금유(本無今有)는 무슨 물건이 있으며 본유금무(本有今無)는 무슨 물건이 없습니까. 송경(誦經)하면서 유무의 뜻을 보지 못하니 참으로 나귀를 타고 다시 나귀를 찾음과 흡사합니다. 답왈 전념(前念)의 악업은 본무(本無)며 후념(後念)의 선생(善生; 선이 생함)은 금유(今有). 염념(念念)에 선행을 늘 행하면 후대에 인천(人天)이 오래지 않으리라. 너는 이제 나의 말을 바로 들을지니(正聽) 나는 곧 본무금유(本無今有). 3문 생()을 가지고 멸()을 멸각(滅却)하고 멸을 가지고 생을 멸각하거니와 생멸의 뜻을 요달(了達; )하지 못하니 소견(所見)이 농맹(聾盲)과 흡사합니다. 답왈 생을 가지고 멸을 멸각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성()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멸을 가지고 생을 멸각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경계를 여의게 하거니와 2()을 여의어 스스로 생멸의 병()을 제()함만 같지 못하다(未若). 4문 먼저 돈() 이후(而後)에 점()입니까, 먼저 점 이후에 돈입니까. 돈점을 깨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 속이 늘 미민(迷悶)합니다. 답왈 청법(聽法)은 돈중(頓中)의 점()이며 오법(悟法)은 점중(漸中)의 돈이며 수행은 돈중의 점이며 증과(證果)는 점중의 돈이다. 돈점은 이 상인(常因)이니 오중(悟中)에 미민(迷悶)하지 않는다. 5문 선정후혜(先定後慧)입니까, 선혜후정(先慧後定)입니까. 정혜(定慧)의 후초(後初)를 어떻게 생기(生起; )해야 정()이 됩니까. 답왈 늘 청정심을 생기(生起; )해야 정중(定中)에 혜()가 있고 경상(境上)에 마음이 없어야(無心) 혜중(慧中)에 정()이 있다. 정혜가 제등(齊滕; )하여 선()이 없나니 쌍수(雙修)해야 자심(自心)이 바르다(). 6문 먼저 불() 이후(而後)에 법입니까 먼저 법 이후에 불입니까. 불법의 본래 근원(根源)은 일어남이 어느 곳으로 좇아 나옵니까. 답왈 설()은 곧 먼저 불 이후에 법이며 청()은 곧 먼저 법 이후에 불이다. 만약 불법의 본래 근원을 논하자면 일체중생의 마음 속에서 나온다.

 

江西大寂道一禪師示衆云 道不用修但莫污染 何爲污染 但有生死心造作趣向皆是污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謂平常心無造作無是非無取捨無斷常無凡無聖 經云 非凡夫行非賢聖行是菩薩行 只如今行住坐臥應機接物盡是道 道卽是法界 乃至河沙妙用不出法界 若不然者云何言心地法門 云何言無盡燈 一切法皆是心法 一切名皆是心名 萬法皆從心生 心爲萬法之根本 經云 識心達本故號沙門 名等義等一切諸法皆等純一無雜 若於敎門中得隨時自在 建立法界盡是法界 若立眞如盡是眞如 若立理一切法盡是理 若立事一切法盡是事 擧一千從 理事無別 盡是妙用更無別理 皆由心之迴轉 譬如月影有若干眞月無若干 諸源水有若干水性無若干 森羅萬象有若干虛空無若干 說道理有若干無礙慧無若干 種種成立皆由一心也 建立亦得 掃蕩亦得 盡是妙用 妙用盡是自家 非離眞而有立處 立處卽眞盡是自家體 若不然者更是何人 一切法皆是佛法 諸法卽解脫 解脫者卽眞如 諸法不出於眞如 行住坐臥悉是不思議用不待時節 經云 在在處處則爲有佛 佛是能仁有智慧善機情 能破一切衆生疑網 出離有無等縛 凡聖情盡人法俱空 轉無等輪超於數量 所作無礙事理雙通 如天起雲忽有還無不留礙迹 猶如畫水成文不生不滅 是大寂滅 在纏名如來藏 出纏名大法身 法身無窮體無增減 能大能小能方能圓 應物現形如水中月 滔滔運用不立根栽 不盡有爲不住無爲 有爲是無爲家用 無爲是有爲家依 不住於依故云如空無所依 心生滅義 心眞如義 心眞如者 譬如明鏡照像 鏡喻於心像喻諸法 若心取法卽涉外 因緣卽是生滅義 不取諸法卽是眞如義 聲聞聞見佛性 菩薩眼見佛性 了達無二名平等性 性無有異用則不同 在迷爲識 在悟爲智 順理爲悟 順事爲迷 迷卽迷自家本心 悟卽悟自家本性 一悟永悟不復更迷 如日出時不合於冥 智慧日出不與煩惱暗俱 了心及境界 妄想卽不生 妄想旣不生 卽是無生法忍 本有今有不假修道坐禪 不修不坐卽是如來淸淨禪 如今若見此理眞正 不造諸業隨分過生 一衣一鉢坐起相隨 戒行增熏積於淨業 但能如是何慮不通 久立諸人珍重

 

강서(江西) 대적(大寂) 도일선사(道一禪師)가 시중해 이르되 도는 닦음을 쓰지 않고 단지 오염(污染)되게 하지 않는다.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단지 생사심(生死心)이 있어 조작하고 취향하면 모두 이 오염이다. 만약 그 도를 바로 알고 싶다면 평상심이 이 도다(平常心是道). 이르자면 평상심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고 범부가 없고 성인이 없다(無凡無聖). 경운(經云) 범부행(凡夫行)이 아니며 현성행(賢聖行)이 아니며 이 보살행이다. 다만 여금에 행주좌와하고 응기접물(應機接物)함이 모두() 이 도다. 도는 곧 이 법계니 내지 하사(河沙)의 묘용(妙用)이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云何) 말하되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며 어찌하여 말하되 무진등(無盡燈)이라 하겠는가. 일체법이 모두 이 심법(心法)이며 일체명(一切名)이 모두 이 심명(心名)이며 만법이 모두 심으로 좇아 생겨나나니 심은 만법의 근본이 된다. 경운 심을 알아 근본을 통달하는지라 고로 호가 사문이다. 이름이 평등하고(名等) 뜻이 평등하고(義等) 일체 제법이 모두 평등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다. 만약 교문(敎門) 중에서 얻으면 수시(隨時)하여 자재하나니 법계를 건립하면 모두() 이 법계며 만약 진여를 건립하면 모두 이 진여며 만약 리()를 건립하면 일체법이 이 리()며 만약 사()를 건립하면 일체법이 모두 이 사(). 하나를 들매 천이 좇는다(擧一千從). 이사(理事)가 무별(無別)하며 모두 이 묘용(妙用)이며 다시 별리(別理)가 없나니 모두() ()의 회전(迴轉)을 말미암는다. 비여(譬如) 월영(月影)은 약간(若干)이 있지만 진월(眞月)은 약간이 없으며 제원(諸源)의 수()는 약간이 있지만 수성(水性)은 약간이 없으며 삼라만상은 약간이 있지만 허공은 약간이 없으며 도리를 설함은 약간이 있지만 무애(無礙)의 혜()는 약간이 없나니 갖가지 성립이 모두 일심을 말미암는다. 건립해도 또한 옳고() 소탕(掃蕩)해도 또한 옳나니 모두 이 묘용이며 묘용은 모두 이 자가(自家). ()을 여의고서 입처(立處)가 있음이 아니니 입처가 곧 진()이며 모두 이 자가(自家)의 체().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이 어떤 사람이겠는가. 일체법이 모두 이 불법이며 제법이 곧 해탈이다. 해탈이란 것은 곧 진여니 제법이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행주좌와가 모두() 이 부사의(不思議)한 용()이니 시절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운(經云) 재재처처(在在處處; 在處疊語)에 곧 불()이 있음이 된다. ()은 이 능인(能仁)이니 지혜가 있고 기정(機情; 根機事情)을 잘 알아() 능히 일체중생의 의망(疑網)을 타파한다. 유무(有無) 등의 계박(繫縛; )을 출리(出離)하고 범성(凡聖)의 정()을 없애고 인법(人法)을 모두() ()하게 하고 무등륜(無等輪; 齊等함이 없는 법륜)을 굴리고 수량(數量)을 초월하고 소작(所作)이 무애(無礙)하고 사리(事理)를 쌍통(雙通)한다. 하늘이 홀연히 구름을 일으키매 홀연히 있다가 도리어 없음과 같이 애적(礙迹; 障礙痕迹)을 남기지 않으며 마치 물에 그으매(畫水) 문채를 이루지만 불생불멸임과 같나니 이 대적멸(大寂滅)이다. (; 번뇌의 纏縛)에 있으면 이름이 여래장(如來藏)이며 전()을 벗어나면 이름이 대법신(大法身)이다. 법신은 무궁하고 체()는 증감이 없나니 능대능소(能大能小)하고 능방능원(能方能圓)하며 응물(應物; 사람에 응함)하여 현형(現形)함이 수중(水中)의 달과 같다. 도도(滔滔)히 운용(運用)하지만 근재(根栽; 뿌리를 심음)를 세우지 않고 유위(有爲)를 없애지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 않나니 유위는 이 무위가(無爲家)의 용()이며 무위는 이 유위가(有爲家)의 의(). ()에 부주(不住)하는지라 고로 이르되 공과 같아서 의하는 바가 없다(如空無所依). 심은 생멸의 뜻이며 심은 진여의 뜻이니 심진여(心眞如)란 것은 비여(譬如) 명경(明鏡)이 형상을 비추매(照像) 거울은 심에 비유하고 형상(形像)은 제법에 비유한다. 만약 심이 취법(取法)하면 곧 밖으로 건넘이다(涉外). 인연은 즉시(卽是) 생멸의 뜻이며 제법을 취하지 않음은 즉시 진여의 뜻이다. 성문(聲聞)은 들어서() 불성을 보고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보나니 무이(無二)를 요달하면 이름이 평등성(平等性)이다. ()은 다름()이 있지 않지만 용()은 곧 부동(不同)하다. 재미(在迷)하면 식()이 되고 재오(在悟)하면 지()가 되며 리()에 순()하면 오()가 되고 사()에 순하면 미()가 된다. ()하면 곧 자가(自家)의 본심을 미하고 오()하면 곧 자가의 본성을 오한다. 한 번 오()하면 영원히 오인지라 다시는() 다시() 미하지 않는다. 해가 나왔을 때 어둠()과 합하지 않음과 같이 지혜의 해가 나오면 번뇌의 어둠()과 함께하지() 않는다. () 및 경계를 깨치면() 망상이 곧 불생하고 망상이 이미 불생하면 즉시(卽是)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본유금유(本有今有)는 수도와 좌선을 빌리지 않나니 불수부좌(不修不坐; 수도하지 않고 좌선하지 않음)가 즉시(卽是)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여금에 이 이치의 진정(眞正)을 보고 제업(諸業)을 짓지 않고 분한 따라 일생을 지내되(隨分過生) 11(一衣一鉢)로 좌기(坐起)하며 상수(相隨)하고 계행(戒行)을 증훈(增熏)하고 정업(淨業)을 쌓을지니 단지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 불통(不通)을 염려하리오. 구립(久立)했다. 제인이여, 진중(珍重)하라.

 

澧州藥山惟儼和尙上堂曰 祖師只敎保護 若貪瞋起來切須防禦 莫敎揨直庚切觸 是爾欲知枯木石頭 却須擔荷 實無枝葉可得 雖然如此更宜自看 不得絕却言語 我今爲汝說遮箇語 顯無語底 他那箇本來無耳目等貌 時有僧問云 何有六趣 師曰 我此要輪 雖在其中元來不染 問不了身中煩惱時如何 師曰 煩惱作何相狀 我且要爾考看 更有一般底 只向紙背上記持言語 多被經論惑 我不曾看經論策子 汝只爲迷事走失自家不定 所以便有生死心 未學得一言半句一經一論 便說恁麽菩提涅槃 世攝不攝 若如是解卽是生死 若不被此得失繫縛 便無生死 汝見律師說什麽 尼薩耆突吉羅最是生死本 雖然恁麽 窮生死且不可得 上至諸佛下至螻蟻 盡有此長短好惡大小不同 若也不從外來 何處有閑漢掘地獄待爾 爾欲識地獄道 只今鑊湯煎煮者是 欲識餓鬼道 卽今多虛少實不令人信者是 欲識畜生道 見今不識仁義不辨親疎者是 豈須披毛戴角斬割倒懸 欲識人天 卽今洗淨威儀持甁挈鉢者是 保任免墮諸趣 第一不得棄遮箇 遮箇不是易得 須向高高山頂立 深深海底行 此處行不易 方有少相應 如今出頭來 盡是多事人 覓箇癡鈍人不可得 莫只記策子中言語以爲自己見知 見他不解者便生輕慢 此輩盡是闡提外道 此心直不中 切須審悉 恁麽道猶是三界邊事 莫在衲衣下空過 到遮裏更微細在 莫將等閑 須知珍重

尼薩耆; 尼薩耆波逸提 五篇罪之一 略稱尼薩耆 尼薩耆爲盡捨 波逸提爲墮 此罪聚總關於衣缽等之財物 故以其所犯之財物 捨於衆中而懺悔之 謂之盡捨 若不懺悔 則結墮獄之罪 故曰墮 總有三十種 稱爲三十捨墮 [四分比丘戒本疏下 四分比丘尼鈔一 行事鈔中二 中三 資持記中二 中三]

突吉羅; <> duṣkṛta 乃一切輕罪之總稱 四分律分之爲身口二業 而譯爲惡作(身業)惡說(口業) 明了論 合身口二業譯曰惡作(惡作之作 以意名 以依意之作動而起身口二業故也)

審悉; 詳細了解

 

예주(澧州) 약산유엄(藥山惟儼) 화상이 상당하여 가로되 조사가 다만 보호(保護)하게 했나니 만약 탐진(貪瞋)이 일어나면 간절히 방어(防禦)함을 쓰고 정(; 부딪다)直庚切()하게 하지 말아라. 이 너희가 고목(枯木)ㆍ석두(石頭)를 알고 싶다면 도리어 담하(擔荷; 짊어지다)함을 쓸지니 실로 지엽(枝葉)을 가히 얻지 못한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다시 의당(宜當) 스스로 볼지니 언어를 절각(絕却)함을 얻지 말아라. 내가 지금 너희를 위해 저개(遮箇)의 말을 설함은 무어의 것(無語底)을 나타냄이다. 그 어느 것(他那箇)이 본래 이목(耳目) 등이 없는 모양인가. 때에 어떤 중이 문운(問云) 6()가 있습니까. 사왈 내가 바퀴()를 요하나니 비록 그 가운데 있어도 원래 물들지 않는다. 묻되 신중(身中)의 번뇌를 깨치지() 못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번뇌가 어떤 상상(相狀)을 지었느냐. 내가 다만() 너에게 고간(考看; 考察해 봄)함을 요한다. 다시 일반(一般)의 것이 있어 다만 지배상(紙背上; 종이의 背面上)을 향해 언어를 기지(記持)하여 다분히 경론의 혹란(惑亂; )을 입는다. 나는 일찍이 경론의 책자(策子; 冊子)를 보지 않았다. 너희는 사실(事實; )을 미()하여 자가(自家)를 주실(走失)하여 결정(決定; )하지 못하나니 소이로 곧(便) 생사심(生死心)이 있다. 일언반구(一言半句)와 일경일론(一經一論)을 학득(學得)하지 못하고 바로 이렇게(恁麽) 보리열반을 설하면 세간(世間; )에서 거두느냐() 거두지 않느냐.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즉시(卽是) 생사다. 만약 이런 득실의 계박(繫縛)을 입지 않는다면 바로 생사가 없다. 너희가 보아라, 율사(律師)가 무엇을 설하느냐. 니살기(尼薩耆)ㆍ돌길라(突吉羅)가 가장 이 생사의 근본이다. 비록 그러하여 이러하나 생사를 궁구하려면 또() 불가득이다. 위로 제불에 이르고 아래로 누의(螻蟻; 땅강아지와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장단(長短)ㆍ호오(好惡)와 대소(大小)의 부동(不同)함이 있거니와 만약에 밖으로 좇아오지 않았다면 어느 곳에 한한(閑漢)이 있어 지옥을 굴착(掘鑿)하여 너희를 기다리겠는가. 너희가 지옥도(地獄道)를 알고 싶다면 지금(只今) 확탕(鑊湯)에 전자(煎煮)하는 자가 이것이며 아귀도(餓鬼道)를 알고 싶다면 즉금 다허소실(多虛少實)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지 않게 하는 자가 이것이며 축생도(畜生道)를 알고 싶다면 현금(見今)에 인의(仁義)를 알지 못하고 친소(親疎)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이것이거늘 어찌 피모대각(披毛戴角)하고 참할도현(斬割倒懸; 베고 자르고 거꾸로 매달림)함을 쓰겠는가(). 인천(人天)을 알고 싶다면 즉금 세정(洗淨)하고 위의(威儀)로 지병(持甁)하고 설발(挈鉢; 발우를 손에 들다)하는 자가 이것이다. 보임(保任; 保持)하여 제취(諸趣)에 떨어짐을 면하려거든 첫째(第一) 저개(遮箇)를 포기함을 얻지 말지니 저개는 이 쉽게 얻지 못한다. 모름지기 고고(高高)한 산정(山頂)을 향해 서고 심심(深深)한 해저(海底)로 다녀라. 이곳을 다님은 쉽지 않나니 바야흐로 조금 상응함이 있다. 여금에 출두하여 옴은 모두 이 다사인(多事人)이니 저() 치둔(癡鈍)한 사람을 찾으매 불가득이다. 다만 책자(策子) 속의 언어를 기록하여 자기의 견지(見知)로 삼지 말지니 저() 알지 못하는 자(不解者)를 보고 바로 경만(輕慢)을 낸다면 이런 무리(此輩)는 모두 이 천제(闡提)며 외도다. 이 마음을 바로 맞히지() 못하거든 간절히 심실(審悉)을 써라. 이러한 말(恁麽道)은 오히려 이 3() 가의 일이니 납의하(衲衣下)에 있으면서 공과(空過; 헛되이 지냄)하지 말아라. 이 속에 이르러 다시 미세(微細)하나니 등한(等閑)함을 가지지 말고 모름지기 진중(珍重)할 줄 알아라.

尼薩耆; 니살기바일제(尼薩耆波逸提) <> naiḥsargika-prāya ścittika. 5편죄(篇罪)의 하나. 약칭이 니살기. 니살기는 진사(盡捨)가 되고 바일제는 타()가 됨. 이 죄취(罪聚)는 모두 의발 등의 재물에 상관되는지라 고로 그가 범한 바의 재물을 대중 가운데 버리고 그것을 참회함을 일컬어 진사(盡捨). 만약 참회하지 않으면 곧 지옥에 떨어지는 죄를 결성하므로 고로 가로되 타(). 모두 30종이 있으며 일컬어 30사타(捨墮)라 함 [사분비구계본소하. 사분비구니초1. 행사초중2, 3. 자지기중2, 3].

突吉羅; <> duṣkṛta. 곧 일체 가벼운 죄의 총칭. 사분율에 이를 분리해 신구(身口) 2업으로 삼았으며 악작(惡作; 身業)과 악설(惡說; 口業)로 번역했음. 명료론은 신구 2업을 합했으며 번역하여 가로되 악작(惡作; 악작의 로서 이름함이니 作動에 의해 身口 2업을 일으키는 연고임)이라 했음.

審悉; 상세하게 요해(了解).

 

越州大珠慧海和尙上堂曰 諸人幸自好箇無事人 苦死造作 要檐枷落獄作麽 每日至夜奔波道 我參禪學道解會佛法 如此轉無交涉也 只是逐聲色走有何歇時 貧道聞江西和尙道 汝自家寶藏一切具足 使用自在不假外求 我從此一時休去 自己財寶隨身受用 可謂快活 無一法可取 無一法可捨 不見一法生滅相 不見一法去來相 遍十方界無一微塵許不是自家財寶 但自子細觀察 自心一體三寶常自現前無可疑慮 莫尋思莫求覓 心性本來淸淨 故華嚴經云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又淨名經云 觀身實相觀佛亦然 若不隨聲色動念 不逐相貌生解 自然無事去 莫久立珍重

一體三寶; 三種三寶之一 又作同體三寶 同相三寶 三寶指佛法僧三者 名稱雖異 於其本體實同爲一 宗鏡錄二十六 一體三寶者 只是一心 心性自能覺照卽佛寶 心體本自性離名法寶 心體無二卽僧寶

奔波; 辛苦地往來奔走

華嚴經云; 華嚴經十六云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월주(越州) 대주혜해(大珠慧海) 화상이 상당하여 가로되 제인(諸人)은 행자(幸自; 본래. 本自) 호개(好箇)의 무사인(無事人)이거늘 괴롭게 죽도록(苦死) 조작하여 담가(檐枷; 칼을 지다)하고 지옥에 떨어짐(落獄)을 요해 무엇하리오. 매일 밤에 이르기까지 분파(奔波)하며 말하되 나는 참선학도(參禪學道)하여 불법을 해회(解會)한다 하거니와 이와 같음은 더욱() 교섭이 없다. 다만 이, 성색(聲色)을 쫓아 달리니 무슨 쉴() 때가 있으리오. 빈도(貧道)는 강서(江西) 화상이 말하되 너의 자가(自家)의 보장(寶藏)이 일체를 구족하여 사용이 자재하므로 밖으로 구함을 빌리지 않는다 함을 듣고 내가 이로 좇아 일시에 쉬었다(休去). 자기의 재보(財寶)를 수신(隨身)하며 수용(受用)하니 가위(可謂) 쾌활하다고 할 만하다. 1법도 가히 취함이 없고 1법도 가히 버림이 없고 1법의 생멸상(生滅相)을 보지 않고 1법의 거래상(去來相)도 보지 않나니 시방계(十方界)에 두루하여 1미진 만큼(一微塵許)도 이 자가의 보장이 아닌 게 없다. 단지 스스로 자세히 관찰할지니 자심(自心)의 일체삼보(一體三寶)가 늘 스스로 현전(現前)하여 가히 의려(疑慮)할 게 없으므로 심사(尋思)하지 말고 구멱(求覓)하지 말아라.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나니 고로 화엄경에 이르되(華嚴經云) 일체법이 불생이며/ 일체법이 불멸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제불이 늘 현전하리라. 또 정명경(淨名經; 維摩經下)에 이르되 관신(觀身; 저본에 觀聲으로 지었음)하니 실상(實相)이며 관불(觀佛)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성색 따라 동념(動念)하지 않고 상모(相貌)를 쫓아 생해(生解)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무사하리라(無事去). 구립(久立)하지 말아라. 진중(珍重).

一體三寶; 33보의 하나. 또 동체삼보(同體三寶)ㆍ동상삼보(同相三寶)로 지음. 3보는 불법승 3()를 가리키며 명칭은 비록 다르나 그 본체는 실로 같아서 하나가 됨. 종경록26. 일체삼보(一體三寶)란 것은 다만 이 일심이다. 심성(心性)이 스스로 능히 각조(覺照)함은 곧 불보며 심체(心體)가 본래 스스로 성리(性離)는 이름이 법보며 심체가 무이(無二)는 곧 승보다.

奔波; 신고(辛苦)하며 왕래하면서 분주함.

華嚴經云; 화엄경16에 이르되 일체법은 무생이며/ 일체법은 무멸이니/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제불이 늘 현전하리라.

此日大衆普集久而不散 師曰 諸人何故在此不去 貧道已對面相呈 還肯休麽 有何事可疑 莫錯用心枉費氣力 若有疑情一任諸人恣意早問 時有僧法淵問曰 云何是佛 云何是法 云何是僧 云何是一體三寶 願師垂示 師曰 心是佛不用將佛求佛 心是法不用將法求法 佛法無二和合爲僧 卽是一體三寶 經云 心佛與衆生是三無差別 身口意淸淨名爲佛出世 三業不淸淨名爲佛滅度 喻如嗔時無喜喜時無嗔 唯是一心實無二體 本智法爾無漏現前 如蛇化爲龍不改其鱗 衆生迴心作佛不改其面 性本淸淨不待修成 有證有修卽同增上慢者 眞空無滯應有無窮無始無終 利根頓悟用無等等 卽是阿耨菩提 心無形相 卽是微妙色身 無相卽是實相法身 性相體空卽是虛空無邊身 萬行莊嚴卽是功德法身 此法身者乃是萬化之本 隨處立名 智用無盡名無盡藏 能生萬法名本法藏 具一切智是智慧藏 萬法歸如名如來藏 經云 如來者卽諸法如義 又云 世間一切生滅法 無有一法不歸如也

 

이날 대중이 보집(普集)하여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사왈(師曰) 제인(諸人)은 무슨 연고로 여기에 있으면서 가지 않는가. 빈도(貧道)는 이미 대면하여 상정(相呈)했나니 도리어 쉼()을 수긍하느냐. 무슨 일이 있어 가히 의심하는가, 잘못 용심(用心)하지 말지니 헛되이() 기력을 허비한다. 만약 의정(疑情)이 있다면 제인이 자의(恣意; 任意)로 조문(早問)함에 일임한다. 때에 법연(法淵)이란 중이 있어 문왈(問曰) 무엇이(云何)이 불이며 무엇이 이 법이며 무엇이 이 승이며 무엇이 이 일체삼보(一體三寶)입니까. 스님의 수시(垂示)를 원합니다. 사왈 심()이 이 불이니 불을 가지고 불을 구함을 쓰지() 않으며 심이 이 법이니 법을 가지고 법울 구함을 쓰지 않으며 불ㆍ법이 둘이 없어 화합함이 승이 되나니 즉시(卽是) 일체삼보다. 경운(經云; 六十華嚴十) 심ㆍ불과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신구의(身口意)가 청정하면 이름하여 불출세(佛出世)3업이 청정하지 못하면 이름하여 불멸도(佛滅度). 비유컨대 성낼 때 기쁨이 없고 기쁠 때 성냄이 없음과 같나니 오직 이 1심이며 실로 2()가 없다. 본지(本智)의 법이 그러하여(法爾) 무루(無漏)가 현전한다. 예컨대() 뱀이 변화하여 용이 되더라도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중생이 회심(迴心)하여 부처가 되더라도 그 얼굴을 바꾸지 않는다. 자성(自性; )이 본래 청정하여 수성(修成)을 기다리지 않나니 유증유수(有證有修)는 곧 증상만자(增上慢者)와 같다. 진공(眞空)은 무체(無滯)하여 응함에 무궁함이 있어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이근(利根)은 돈오(頓悟)하며 용()이 무등등(無等等)이니 즉시 아뇩보리(阿耨菩提). 심은 형상(形相)이 없나니 즉시 미묘한 색신이며 무상(無相)이 즉시 실상(實相)의 법신이다. ()ㆍ상()의 체가 공함이 즉시 허공의 무변신(無邊身)이며 만행(萬行)으로 장엄(莊嚴)함은 즉시 공덕의 법신이다. 이 법신이란 것은 곧 이(乃是) 만화(萬化)의 근본이니 곳을 따라 입명(立名)한다. 지용(智用)이 무진(無盡)하니 이름이 무진장(無盡藏)이며 능히 만법을 내니 이름이 본법장(本法藏)이며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었으니 이 지혜장(智慧藏)이며 만법이 귀여(歸如)하니 이름이 여래장(如來藏)이다. (; 금강경)에 이르되 여래란 것은 제법이 여의 뜻이다(如義). 우운(又云) 세간의 일체 생멸법은 1법이라도 귀여(歸如)하지 않음이 있지 않다.

 

時有人問云 弟子未知律師法師禪師何者最勝 願和尙慈悲指示 師曰 夫律師者 啓毘尼之法藏 傳壽命之遺風 洞持犯而達開遮 秉威儀而行軌範 牒三番羯磨作四果初因 若非宿德白眉焉敢造次 夫法師者 踞獅子之座瀉懸河之辯 對稠人廣衆啓鑿玄關 開般若妙門等三輪空施 若非龍象蹴蹋安敢當斯 夫禪師者 撮其樞要直了心源 出沒卷舒縱橫應物 咸均事理頓見如來 拔生死深根 獲見前三昧 若不安禪靜慮 到遮裏總須茫然 隨機授法三學雖殊 得意忘言一乘何異 故經云 十方佛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但以假名字 引導於衆生 曰和尙深達佛旨得無礙辯

白眉; 指同輩或同類人中的傑出者

懸河之辯; 卽說話像河水下瀉 滔滔不絶 形容能言善辯 正字通 懸 掛也 廣韻 懸 說文云繫也 晉書五十列傳 郭象 字子玄 少有才理 好老莊 能淸言 太尉王衍每云 聽象語 如懸河瀉水 注而不竭

三輪空; 三輪 此指施者受者與施物 三藏法數七 三輪體空[出能斷金剛經論] 一施空 謂能施之人 體達我身本空 豈有我爲能施 旣知無我 則無希望福報之心 是名施空 二受空 謂旣體達本無我爲能施之人 亦無他人爲受施之者 是名受空 三施物空 物卽資財珍寶等物 謂能體達一切皆空 豈有此物而爲所施 是名施物空

龍象; 此指象中之殊勝者 維摩經中不思議品 譬如龍象蹴踏 非驢所堪 注維摩詰經六 肇曰 能不能爲諭 象之上者 名龍象 維摩經義疏四謂 稱爲龍象 非有二物 如好馬名龍馬 故好象稱龍象

無二亦無三; 謂成佛之道 唯一而無二道三道也

 

때에 어떤 사람이 문운(問云) 제자가 율사ㆍ법사ㆍ선사에 어떤 자가 가장 수승한지 알지 못하니 원컨대 화상이 자비로 지시하십시오. 사왈(師曰) 무릇 율사란 것은 비니(毘尼)의 법장(法藏)을 열어() 수명(壽命)의 유풍(遺風)을 전하나니 지범(持犯)을 통달(洞達; )하고 개차(開遮)를 통달(通達; )하여 위의를 가지고() 궤범(軌範)을 행한다. 삼번(三番)의 갈마(羯磨; 저본에 羯麽로 지었음)를 첩()하여 4()의 초인(初因)을 짓나니 만약 숙덕(宿德)의 백미(白眉)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조차(造次; 輕率)하겠는가. 무릇 법사란 것은 사자지좌(獅子之座)에 걸터앉아() 현하의 변설(懸河之辯)을 쏟고 조인(稠人; 빽빽한 사람)의 광중(廣衆)을 상대하여 현관(玄關)을 계착(啓鑿; 열고 뚫다)하고 반야의 묘문(妙門)을 열어 평등하게 삼륜공(三輪空)을 시행(施行)하나니 만약 용상(龍象)의 차고 밟음(蹴蹋)이 아니면 어찌() 감히 이()에 당하겠는가. 무릇 선사란 것은 그 추요(樞要)를 모아() 바로() 심원(心源)을 요달(了達; )하고 출몰권서(出沒卷舒)하며 종횡으로 응물(應物; 사람에 응함)하고 사리(事理)를 모두 균등히(咸均) 하여 여래를 돈견(頓見)하고 생사의 심근(深根)을 뽑고 현전(見前)의 삼매를 얻나니() 만약 안선(安禪)하여 정려(靜慮)하지 않는다면 저리(遮裏)에 이르러 모두() 꼭 망연(茫然)하리라. 수기(隨機)하여 수법(授法)하매 삼학(三學)이 비록 다르나 득의(得意)하여 망언(忘言)하면 일승(一乘)이거늘 어찌 다르리오. 고로 경(법화경1)에 이르되 시방의 불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 있는지라/ 둘이 없고 또 셋이 없나니(無二亦無三)/ 불타의 방편설을 제한다./ 단지 거짓 명자(名字)로써/ 중생을 인도한다. 가로되 화상은 깊이 불지(佛旨)를 통달하여 무애변(無礙辯)을 얻었습니다.

白眉; 동배 혹 동류의 사람 중에 걸출한 자를 가리킴

懸河之辯; 곧 설화(說話)하는 게 강물이 아래로 쏟아지면서 도도(滔滔)하게 끊어지지 않음을 형상(形像)함이니 능히 말하고 잘 변론(辯論)함을 형용함. 정자통(正字通) () ()이다. 광운(廣韻) () 설문(說文)에 이르되 맴()이다. 진서50 열전(列傳). 곽상(郭象)은 자()가 자현(子玄)이다. 어릴 적에 재리(才理)가 있었고 노장(老莊)을 좋아했으며 청언(淸言)에 능했다. 태위(太尉) 왕연(王衍)이 매번 이르되 곽상의 말을 들으면 마치 현하사수(懸河瀉水)가 흘러() 다하지 않는 듯하다.

三輪空; 삼륜(三輪)은 여기에선 시자(施者)ㆍ수자(受者)ㆍ시물(施物)을 가리킴. 삼장법수7. 삼륜체공(三輪體空) [출능단금강경론] 1. 시공(施空) 이르자면 능시(能施)의 사람이 아신(我身)의 본공(本空)을 체달(體達)한다면 어찌 내가 능시함이 있으랴. 이 무아임을 알아 곧 복보(福報)를 희망하는 마음이 없음이니 이 이름이 시공이다. 2. 수공(受空) 이르자면 이미 본래 능시(能施)할 사람이 무아임을 체달한지라 또한 수시(受施)할 자인 타인도 없음이니 이 이름이 수공이다. 3. 시물공(施物空) 물은 곧 자재(資財)나 진보(珍寶) 등의 물건이다. 이르자면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체달하면 어찌 이 물건이 소시(所施)가 됨이 있으리오. 이 이름이 시물공이다.

龍象; 여기에선 코끼리 중에 수승한 것을 가리킴. 유마경중 부사의품. 비유컨대 용상(龍象)이 차고 밟음과 같아서 나귀가 감내할 바가 아니다. 주유마힐경6(注維摩詰經六). (; 僧肇)가 가로되 능과 불능으로 비유를 삼는다. 코끼리의 상등(上等)인 것을 이름해 용상(龍象)이다. 유마경의소4에 이르되 호칭하여 용상이라 함은 두 물건이 있음이 아니다. 예컨대() 호마(好馬)를 이름해 용마(龍馬)라 하나니 고로 호상(好象)을 일컬어 용상(龍象)이라 한다.

無二亦無三; 이르자면 성불의 도는 유일하여 2()가 없고 3도가 없음.

 

又問 儒道釋三敎同異如何 師曰 大量者用之卽同 小機者執之卽異 總從一性上起用 機見差別成三 迷悟由人不在敎之同異 講唯識道光座主問曰 禪師用何心修道 師曰 老僧無心可用無道可修 曰旣無心可用無道可修 云何每日聚衆勸人學禪修道 師曰 老僧尙無卓錐之地 什麽處聚衆來 老僧無舌何曾勸人來 曰禪師對面妄語 師曰 老僧尙無舌勸人焉解妄語 曰某甲却不會禪師語論也 師曰 老僧自亦不會 講華嚴志座主問 禪師何故不許靑靑翠竹盡是法身 欝欝黃華無非般若 師曰 法身無象應翠竹以成形 般若無知對黃華而顯相 非彼黃華翠竹而有般若法身 故經云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黃華若是般若 般若卽同無情 翠竹若是法身 翠竹還能應用 座主會麽 曰不了此意 師曰 若見性人道是亦得道不是亦得 隨用而說不滯是非 若不見性人說翠竹著翠竹 說黃華著黃華 說法身滯法身 說般若不識般若 所以皆成爭論 志禮謝而去

 

우문(又問) 유도석(儒道釋) 3()의 동이(同異)가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대량자(大量者)가 이를 쓰면 곧 같지만() 소기자(小機者)는 이에 집착하니 곧 다르다(). 모두() 일성상(一性上)으로 좇아 기용(起用)하거니와 근기(根機; )가 차별을 보니 셋을 이룬다. 미오(迷悟)는 사람으로 말미암나니 교()의 동이(同異)에 있음이 아니다. 유식(唯識)을 강()하는 도광(道光) 좌주가 문왈(問曰) 선사는 어떤 마음을 써서 수도합니까. 사왈 노승은 마음을 가히 씀이 없고 도를 가히 닦음이 없다. 가로되 이미 마음을 가히 씀이 없고 도를 가히 닦음이 없다면 어찌하여(云何) 매일 취중(聚衆)하여 사람에게 학선수도(學禪修道)를 권합니까. 사왈 노승은 오히려 송곳 세울 땅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취중(聚衆)하여 오겠는가. 노승은 혀가 없거늘 어찌 일찍이 사람에게 권하여 오겠는가. 가로되 선사는 대면하여 망어(妄語)합니다. 사왈 노승은 오히려 사람에게 권할 혀가 없거늘 어찌() 망어할 줄 알겠는가(). 가로되 모갑은 도리어 선사의 어론(語論)을 이회(理會)하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노승 자신(自身; )도 또한 이회하지 못한다. 화엄(華嚴)을 강()하는 지좌주(志座主)가 묻되 선사는 무슨 연고로 청청취죽(靑靑翠竹)이 모두 이 법신이며 울울황화(欝欝黃華)가 반야가 아님이 없다 함을 불허(不許)합니까. 사왈 법신은 무상(無象)이지만 취죽에 응해 형상(形象; )을 이루고 반야는 무지(無知)이지만 황화를 대하여 형상(形相)을 나타내나니() () 황화와 취죽에 반야와 법신이 있음이 아니다. 고로 경(; 金光明經二)에 이르되 불()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응물(應物)하여 형상(形相)을 나타냄이 수중의 달과 같다. 황화가 만약 이 반야라면 반야가 곧 무정(無情)과 같으며 취죽이 만약 이 법신이라면 취죽이 도리어 능히 응용(應用)할 것이다. 좌주는 알겠는가. 가로되 이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고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아서 씀을 따라 설하되 시비에 막히지() 않지만 만약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취죽을 설하면 취죽에 붙고() 황화를 설하면 황화에 붙고 법신을 설하면 법신에 막히고() 반야를 설하면 반야를 알지 못하는지라 소이로 모두 쟁론(爭論)을 이룬다. ()가 예사(禮謝)하고 갔다.

 

人問 將心修行幾時得解脫 師曰 將心修行喻如滑泥洗垢 般若玄妙本自無生 大用現前不論時節 曰凡夫亦得如此否 師曰 見性者卽非凡夫 頓悟上乘超凡越聖 迷人論凡論聖 悟人超越生死涅槃 迷人說事說理 悟人大用無方 迷人求得求證 悟人無得無求 迷人期遠劫 悟人頓見 維摩座主問 經云 彼外道六師等是汝之師 因其出家彼師所墮汝亦隨墮 其施汝者不名福田 供養汝者墮三惡道 謗於佛毀於法不入衆數 終不得滅度 汝若如是乃可取食 今請禪師明爲解說 師曰 迷徇六根者號之爲六師 心外求佛名爲外道 有物可施不名福田 生心受供墮三惡道 汝若能謗於佛者是不著佛求 毀於法者是不著法求 不入衆數者是不著僧求 終不得滅度者智用現前 若有如是解者 便得法喜禪悅之食

外道六師; 古印度佛陀時代 中印度(恒河中流一帶)勢力較大之六種外道 一富蘭那迦葉 富蘭那其字 迦葉其姓 立一切之法 斷滅性空 無君臣父子忠孝之道者 二末伽梨拘賖梨子 末伽梨 其字 拘賖梨 其母名 計衆生之苦樂 非由因緣 惟爲自然者 三刪闍夜毘羅胝子 刪闍夜其字 毘羅胝其母名 計不求道 但經生死劫數間 自盡苦際 如縷丸轉於高山 縷盡自止者 四阿耆多翅舍欽婆羅 阿耆多翅舍其字 欽婆羅者麤衣也 身著弊衣 五熱灸身 以苦行爲道者 五迦羅鳩馱迦旃延 迦羅鳩馱其字 迦旃延其姓 計諸法亦有相亦無相 應物而起見者 若人問爲有耶 則答爲無 爲無耶 則答爲有 六尼犍陀若提子 尼健陀爲出家總名 若提爲母名 計苦樂罪福 盡由前世 必當償之 非今行道所能斷者 已上六師與佛同世 自稱爲一切智者 [維摩經弟子品 涅槃經十九 止觀十上]

 

사람이 묻되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면 어느 때 해탈합니까. 사왈(師曰)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면 비유컨대 활니(滑泥)로 때를 씻음과 같다. 반야는 현묘(玄妙)하여 본래 스스로 무생(無生)이며 대용(大用)이 현전하매 시절을 논하지 않는다. 가로되 범부도 또한 이와 같음을 얻습니까. 사왈 견성한 자는 곧 범부가 아니며 상승(上乘; 大乘)을 돈오(頓悟)하여 초범월성(超凡越聖)한다. 미인(迷人)은 논범논성(論凡論聖)하지만 오인(悟人)은 생사와 열반을 초월하며 미인은 설사설리(說事說理)하지만 오인은 대용(大用)이 무방(無方; 方所가 없음)하며 미인은 구득구증(求得求證)하지만 오인은 무득무구(無得無求)하며 미인은 원겁(遠劫)을 기약하지만 오인은 돈견(頓見)한다. 유마좌주(維摩座主)가 묻되 경운(經云) 저 외도육사(外道六師) 등이 이 너의 스승이며 그로 인해 출가하여 그 스승이 떨어지는 곳에 너 또한 따라서 떨어져야 한다. 그 너에게 보시하는 자는 이름이 복전이 아니며 너에게 공양하는 자는 3악도에 떨어진다. 불을 비방하고 법을 헐고 중수(衆數)에 들지 않아서 마침내 멸도를 얻지 않는다. 네가 만약 이와 같다면 이에 가히 취식(取食)한다. 지금 선사에게 청하오니 밝게 해설하십시오. 사왈 미혹하여 6()을 따름()을 호하여 6()라 하고 마음 밖에 부처를 구함을 이름하여 외도다. 가히 보시할 물건이 있으면 이름이 복전이 아니다. 마음을 내어 공양을 받으면 3악도에 떨어진다. 네가 만약 능히 불을 비방함이란 것은 이는 불에 집착해 구하지 않음이다. 법을 헌다는 것은 이는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음이다. 중수에 들지 않음이란 것은 이는 승에 집착해 구하지 않음이다. 마침내 멸도를 얻지 않음이란 것은 이는 지용(智用)이 현전함이다. 만약 이와 같은 이해가 있는 자면 바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의 식()을 얻는다.

外道六師; 고인도(古印度) 불타시대 중인도(恒河 중류 일대)에서 세력이 조금 컸던 6종의 외도임. 1.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 Pūraṇakāśyapa). 부란나는 그의 자며 가섭은 그의 성. 일체법은 단멸했고 자성이 공했으며 군신부자와 충효의 도가 없음을 세운 자임. 2. 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賖梨子; Maskarī-Gośālīputra) 말가리는 그의 자며 구사리는 그 모친의 이름임. 헤아리기를 중생의 고락은 인연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자연으로 된다고 하는 자임. 3. 산사야비라지자(刪闍夜毘羅胝子; Sanjayī-vairaṭīputra) 산사야는 그 자며 비라지는 그 모친의 이름임. 헤아리기를 구도하지 않아도 단지 생사의 겁수를 지나는 사이에 저절로 고제(苦際)가 없어짐이 누환(縷丸)을 고산에서 굴리매 누()가 다하면 자연히 멈춤과 같다 함. 4. 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 AjitaKesakambala) 아기다시사는 그 자()며 흠바라란 것은 추의(麤衣). 몸에 낡은 옷을 입고 5()로 몸을 지지면서 고행을 도로 삼는 자임. 5. 가라구타가전연(迦羅鳩馱迦旃延; Paku dha-Kaccāyan) 가라구타는 그의 자며 가전연은 그의 성임. 제법이 역유상역무상(亦有相亦無相)이라고 계착(計著)하여 사물에 응해 견해를 일으키는 자임. 어떤 사람이 묻되 유()가 되는가 하면 곧 답하기를 무()가 된다. 무가 되는가 하면 곧 답하기를 유가 된다. 6. 니건타야제자(尼犍陀若提子; Nigaṇṭha-nāeaputta) 니건타는 출가의 총명(總名)이며 야제는 모친의 이름임. 헤아리기를 고락과 죄복은 모두 전세를 말미암으며 꼭 마땅히 그것을 갚아야 하며 지금의 행도로 능히 끊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의 6사는 불타와 동세(同世)였고 자칭 일체지자(一切智者)라 했음 [유마경제자품. 열반경19. 지관10].

 

有行者問 有人問佛答佛問法答法 喚作一字法門不知是否 師曰 如鸚鵡學人語話自語不得 爲無智慧故 譬如將水洗水將火燒火都無義趣 人問 言之與語爲同爲異 師曰 夫一字曰言 成句名語 且如靈辯滔滔譬大川之流水 峻機疊疊如圓器之傾珠 所以郭象號懸河 春鸚稱義海 此是語也 言者一字表心也 內著玄微外現妙相 萬機撓而不亂 淸濁渾而常分 齊王到此猶慚大夫之辭 文殊到此尙歎淨名之說 如今常人云何能解 源律師問 禪師常譚卽心是佛無有是處 且一地菩薩分身百佛世界 二地增于十倍 禪師試現神通看 師曰 闍梨自己是凡是聖 曰是凡 師曰 旣是凡僧能問如是境界 經云 仁者心有高下不依佛慧 此之是也 又問 禪師每云 若悟道現前身便解脫無有是處 師曰 有人一生作善忽然偸物入手 卽身是賊否 曰故知是也 師曰 如今了了見性 云何不得解脫 曰如今必不可 須經三大阿僧祇劫始得 師曰 阿僧祇劫還有數否 源抗聲曰 將賊比解脫道理得通否 師曰 闍梨自不解道 不可障一切人解 自眼不開瞋一切人見物 源作色而去云雖老渾無道 師曰 卽行去者是汝道

郭象; (252 ?-312) 西晉思想家 河南人 字子玄 早歲卽精通老莊 結交王衍等淸談之士 辯才無礙 人稱魏之王弼再世 歷任司徒掾 司空掾 太學博士 黃門侍郞等職 晉惠帝永安元年(304)之後 專致於政治而權勢大振 著有莊子注三十三卷

齊王到此猶慚大夫之辭; 古代齊王在大臣諫言面前有慚愧心 [百度]

 

어떤 행자가 묻되 어떤 사람이 불을 물으면 불을 답하고 법을 물으면 법을 답하면서 일자법문(一字法門)이라고 불러 지으면 알지 못하오니 옳습니까(是否). 사왈(師曰) 앵무(鸚鵡)가 사람의 어화(語話)를 배우지만 스스로 말함을 얻지 못함과 같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의 연고이다. 비유컨대 물을 가지고 물을 씻고 불을 가지고 불을 태움과 같아서 모두() 의취(義趣)가 없다. 사람이 묻되 언과 어(言之與語)는 같음이 됩니까 다름이 됩니까. 사왈 무릇 1자를 가로되 언()이라 하고 구()를 이루면 이름이 어(). 차여(且如) 영변(靈辯)이 도도(滔滔)함은 대천(大川)의 유수(流水)에 비유하고 준기(峻機)가 첩첩(疊疊)함은 원기(圓器)가 구슬을 기울임(傾珠)과 같다. 소이로 곽상(郭象)을 호()해 현하(懸河)라 하고 춘앵(春鸚)을 일컬어 의해(義海)라 하나니 이것이 이 어(). ()이란 것은 1자로 표심(表心)함이니 안으론 현미(玄微)를 나타내고() 밖으론 묘상(妙相)을 나타내나니() 만기(萬機)가 어지럽혀도() 어지럽지() 않고 청탁(淸濁)이 뒤섞어도() 늘 나뉜다(). 제왕이 이에 이르러 오히려 대부의 말에 부끄러워 했고(齊王到此猶慚大夫之辭) 문수가 이에 이르러 오히려 정명(淨名)의 말을 칭탄(稱歎; )했다. 여금에 상인(常人)이 어떻게 능히 이해(理解; )하겠는가. 원율사(源律師)가 묻되 선사가 즉심시불(卽心是佛)을 상담(常譚)하지만 옳은 곳이 있지 않습니다. () 일지보살(一地菩薩)이 백불세계(百佛世界)로 분신(分身)하고 이지(二地)는 십배(十倍)로 증가합니다. 선사가 시험 삼아 신통을 나타내어 보십시오. 사왈 사리(闍梨)는 자기가 이 범부인가 이 성인인가. 가로되 이 범부입니다. 사왈 이미 이 범승(凡僧)이거늘 능히 이와 같은 경계를 묻는가. (; 維摩經上)에 이르되 인자(仁者)는 마음에 고하(高下)가 있고 불혜(佛慧)에 의하지 않는다 했으니 이것이 이것이다(此之是也). 우문(又問) 선사는 매번 이르되 만약 오도하면 현전(現前)의 몸이 바로 해탈한다 하거니와 옳은 곳이 있지 않습니다. 사왈 어떤 사람이 일생토록 작선(作善)하다가 홀연히 물건을 훔쳐 입수(入手)한다면 곧 몸이 이 도둑인가. 가로되 짐짓 이것인 줄 압니다. 사왈 여금에 요료(了了)히 견성했다면 어찌하여(云何) 해탈을 얻지 못하겠는가. 가로되 여금엔 반드시 불가(不可)하나니 모름지기 3대아승기겁(大阿僧祇劫)을 경과해야 비로소 옳습니다. 사왈 아승기겁은 도리어 수()가 있는가. ()이 항성(抗聲)으로 가로되 도둑을 가지고 해탈의 도리에 비유(比喩)하면 신통을 얻습니까. 사왈 사리(闍梨)는 자기가 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일체인의 이해를 장애함은 옳지 못하다. 자기의 눈을 열지 못하고 일체인의 견물(見物; 물건을 봄)을 성내는구나. ()이 작색(作色)하고 떠나면서 이르되 비록 늙었지만 온통() 도가 없구나. 사왈 즉행(卽行)하여 가는 것이 이 너의 도다.

郭象; (252 ?-312) 서진(西晉)의 사상가. 하남 사람이며 자가 자현. 젊은 나이에 곧 노장에 정통하였으며 왕연 등 청담지사(淸談之士)와 결교하였으며 변재가 무애했음. 사람들이 일컫기를 위()의 왕필이 재세(再世; 부활)했다 했음. 사도연ㆍ사공연ㆍ태학박사ㆍ황문시랑 등의 직책을 역임했음. 진 혜제 영안 원년(304)의 후에 정치를 마음대로 다하여 권세를 크게 떨쳤음. 저서에 장자주(莊子注) 33권이 있음.

齊王到此猶慚大夫之辭; 고대(古代) 제왕(齊王)이 대신(大臣)이 간언(諫言)하는 면전(面前)에서 참괴심(慚愧心)이 있었음 [백도].

 

講止觀慧座主問 禪師辨得魔否 師曰 起心是天魔 不起心是陰魔 或起不起是煩惱魔 我正法中無如是事 曰一心三觀義又如何 師曰 過去心已過去 未來心未至 現在心無住 於其中間更用何心起觀 曰禪師不解止觀 師曰 座主解否 曰解 師曰 如智者大師 說止破止 說觀破觀 住止沒生死 住觀心神亂 且爲當將心止心 爲復起心觀觀 若有心觀是常見法 若無心觀是斷見法 亦有亦無成二見法 請座主子細說看 曰若如是問俱說不得也 師曰 何曾止觀 人問 般若大否 師曰大 曰幾許大 師曰 無邊際 曰般若小否 師曰小 曰幾許小 師曰 看不見 曰何處是 師曰 何處不是

天魔; 天子魔之略稱 四魔之一 第六天之魔王也 其名云波旬 有無量之眷屬 常障礙佛道者

陰魔; 五陰能害衆生佛性 故譬之魔 四魔之一

煩惱魔; 十種魔之一 貪等煩惱 迷惑事理 障蔽正道 害慧命者

一心三觀; 見上五永嘉玄覺章三觀一心

 

지관(止觀)을 강()하는 혜좌주(慧座主)가 묻되 선사는 마()를 변득(辨得)합니까. 사왈(師曰) 마음을 일으키면 이 천마(天魔)며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 음마(陰魔)며 혹 일으키거나 일으키지 않음은 이 번뇌마(煩惱魔)이거니와 나의 정법(正法) 중엔 이와 같은 일이 없다. 가로되 13(一心三觀)의 뜻은 또 어떻습니까. 사왈 과거심은 이미 지나갔고(過去) 미래심은 이르지 않았고 현재심은 머묾이 없거늘 그 중간에 다시 어떤 마음을 써서 관()을 일으키리오. 가로되 선사는 지관을 이해(理解; )하지 못합니다. 사왈 좌주는 이해하는가. 가로되 이해합니다. 사왈 예컨대() 지자대사(智者大師)가 지()를 설하면 지를 파()하고 관()을 설하면 관을 파하고 지()에 주()하면 생사에 잠기고() ()에 주하면 심신(心神)이 어지럽거늘 또() 마땅히 심()을 가지고 심을 지()하는가, 다시 심을 일으켜 관()을 관하는가. 만약 유심(有心)으로 관하면 이 상견법(常見法)이며 만약 무심으로 관하면 이 단견법(斷見法)이며 역유역무(亦有亦無)는 이견법(二見法)을 이룬다. 청컨대 좌주가 자세히 설해 보아라. 가로되 만약 이와 같이 묻는다면 모두() 설함을 얻지 못합니다. 사왈 어찌 일찍이 지관(止觀)이리오. 사람이 묻되 반야가 큽니까. 사왈 크다. 가로되 얼마나(幾許) 큽니까. 사왈 변제(邊際)가 없다. 가로되 반야가 작습니까. 사왈 작다. 가로되 얼마나 작습니까. 사왈 보아도 보지 못한다. 가로되 어느 곳이 이것입니까. 사왈 어느 곳이 이것이 아니냐.

天魔; 천자마(天子魔)의 약칭이니 4마의 하나임. 6천의 마왕임. 그 이름은 파순(波旬)이라 이르며 무량한 권속이 있어 늘 불도를 장애하는 자임.

陰魔; 5()이 능히 중생의 불성을 해하는지라 고로 마()에 비유함. 4마의 하나.

煩惱魔; 십종마(十種魔)의 하나. 탐 등의 번뇌는 사리를 미혹하여 정도를 장폐(障蔽)하고 혜명을 해치는 것임.

一心三觀; 5 영가현각장(永嘉玄覺章) 삼관일심(三觀一心)을 보라.

 

維摩座主問 經云 諸菩薩各入不二法門維摩默然 是究竟否 師曰 未是究竟 聖意若盡第三卷更說何事 座主良久曰 請禪師爲說未究竟之意 師曰 如經第一卷 是引衆呵十大弟子住心 第二諸菩薩各說入不二法門 以言顯於無言 文殊以無言顯於無言 維摩不以言不以無言故默然 收前言語故 第三卷從默然起說 又顯神通作用 座主會麽 曰奇怪如是 師曰 亦未如是 曰何故未是 師曰 且破人執情作如此說 若據經意只說色心空寂令見本性 敎捨僞行入眞行 莫向言語紙墨上討意度 但會淨名兩字便得 淨者本體也 名者迹用也 從本體起迹用 從迹用歸本體 體用不二本迹非殊 所以古人道 本迹雖殊不思議一也 一亦非一 若識淨名兩字假號 更說什麽究竟與不究竟 無前無後非本非末非淨非名 只示衆生本性不思議解脫 若不見性人終身不見此理

 

유마좌주(維摩座主)가 묻되 경운(經云) 제보살(諸菩薩)이 각자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자 유마가 묵연(默然)했는데 이것이() 구경(究竟)입니까. 사왈(師曰) 이 구경이 아니니 성의(聖意)가 만약 다했다면() 3권에서 다시 무슨 일을 설하겠는가. 좌주가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청컨대 선사가 구경(究竟)이 아닌 뜻을 설하십시오. 사왈 예컨대() 경의 제1권은 이 중인(衆人; )을 당기어() 십대제자(十大弟子)의 주심(住心)을 꾸짖었고 제2는 제보살(諸菩薩)이 각자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을 설함은 언()으로써 무언(無言)을 나타내었고() 문수는 무언으로써 무언을 나타내었고 유마는 언()을 쓰지() 않고 무언을 쓰지 않은 연고로 묵연하였으니 앞의 언어를 거둔 연고이다. 3권은 묵연으로 좇아 설()을 일으켰으며 또 신통의 작용을 나타내었다. 좌주는 아느냐. 가로되 기괴하나니 이와 같습니다. 사왈 또한 이와 같지 않다. 가로되 무슨 연고로 이것이 아닙니까. 사왈 다만() 사람의 집정(執情)을 깨뜨려 이와 같은 설을 지었지만 만약 경의(經意)에 의거하자면 다만 색심이 공적(空寂)함을 설해 본성을 보게 하였으며 위행(僞行)을 버리고 진행(眞行)에 들게 하였다. 언어의 지묵상(紙墨上)을 향해 뜻을 찾아 헤아리지() 말지니 단지 정명(淨名) 두 자만 알면() 바로 얻는다. ()이란 것은 본체(本體)며 명()이란 것은 적용(迹用)이니 본체로 좇아 적용을 일으키고 적용으로 좇아 본체로 돌아가므로 체용(體用)이 둘이 아니며 본적(本迹; 本體迹用)이 다르지() 않다.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본적(本迹)이 비록 다르나 부사의(不思議)는 일()이지만 일 또한 일이 아니다. 만약 정명이란 두 자의 가호(假號)를 안다면 다시 무슨 구경(究竟)과 불구경(不究竟)을 설하겠는가. 무전무후(無前無後)며 비본비말(非本非末)이며 비정비명(非淨非名)이니 다만 중생의 본성의 부사의한 해탈을 보였다. 만약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종신토록 이런 이치를 보지 못한다.

 

僧問 萬法盡空識性亦爾 譬如水泡一散更無再合 身死更不再生 卽是空無 何處更有識性 師曰 泡因水有 泡散可卽無水 身因性起 身死豈言性滅 曰旣言有性將出來看 師曰 汝信有明朝否 曰信 師曰 試將明朝來看 曰明朝實是有如今不可得 師曰 明朝不可得不是無明朝 汝自不見性不可是無性 今見著衣喫飯行住坐臥對面不識 可謂愚迷 汝欲見明朝 與今日不異 將性覓性萬劫終不見 亦如盲人不見日不是無日 講靑龍疏座主問 經云 無法可說是名說法 禪師如何體會 師曰 爲般若體畢竟淸淨無有一物可得 是名無法 卽於般若空寂體中具河沙之用 卽無事不知 是名說法 故云無法可說是名說法 講華嚴座主問 禪師信無情是佛否 師曰 不信 若無情是佛者 活人應不如死人 死驢死狗亦應勝於活人 經云 佛身者卽法身也 從戒定慧生 從三明六通生 從一切善法生 若說無情是佛者 大德如今便死應作佛去

靑龍疏; 唐靑龍寺翻經沙門良賁 奉勅作新譯仁王經疏三卷 稱爲靑龍疏 又靑龍寺沙門道氤 奉玄宗詔 造金剛經疏 亦稱靑龍疏

 

승문(僧問) 만법이 모두() ()했으며 식성(識性)도 또한 그러하나니 비여(譬如) 수포(水泡)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재합(再合)함이 없고 몸이 죽으면 다시 재생(再生)하지 못하나니 즉시(卽是) 공무(空無)이거늘 어느 곳에 다시 식성(識性)이 있겠습니까. 사왈(師曰) 거품()은 물로 인해 있으므로 거품이 흩어지면 가히 곧 물이 없다. 몸은 성()으로 인해 일어나나니 몸이 죽으매 어찌 성()이 없어진다고 말하겠는가. 가로되 이미 성이 있다고 말했으니 가져 내어 와 보십시오. 사왈 너는 명조(明朝)가 있음을 믿느냐. 가로되 믿습니다. 사왈 시험 삼아 명조를 가져 와 보아라. 가로되 명조가 실로 이 있지만 여금엔 불가득입니다. 사왈 명조를 불가득이지만 이 명조가 없음이 아니다. 네가 스스로 견성(見性)하지 못했음이지 이 무성(無性)이라 함은 옳지 못하다. 지금 보매 착의끽반(著衣喫飯)하고 행주좌와하면서 대면하여 알지 못하니 가위(可謂) 우미(愚迷)하다고 할 만하다. 네가 명조(明朝)를 보고 싶다면 금일과 다르지 않나니 성()을 가지고 성을 찾으면 만겁토록 마침내 보지 못한다. 또한 맹인이 해를 보지 못하지만 이 해가 없음이 아님과 같다. 청룡소(靑龍疏)를 강()하는 좌주가 묻되 경운(經云) 법을 가히 설함 없음이 이 이름이 설법이다. 선사는 어떻게 체회(體會)합니까. 사왈 반야의 체는 필경 청정하여 한 물건도 가히 얻음이 없기 때문에 이 이름이 무법(無法)이다. 반야의 공적(空寂)한 체 가운데 하사(河沙)의 용()을 갖추어 알지 못할 일이 없나니 이 이름이 설법이다. 고로 이르되 법을 가히 설함 없음이 이 이름이 설법이다. 화엄을 강()하는 좌주가 묻되 선사는 무정(無情)이 이 불()임을 믿습니까. 사왈 불신한다. 만약 무정이 이 불일진대 활인(活人)이 응당 사인(死人)만 같지 못하며 사려사구(死驢死狗)도 또한 응당 활인 보다 수승하리라. 경운(經云) 불신(佛身)이란 것은 곧 법신이니 계정혜로 좋아 생하고 삼명육통(三明六通)으로 좇아 생하고 일체의 선법(善法)으로 좇아 생한다. 만약 무정이 이 불이라고 설한다면 대덕이 여금에 바로 죽어 응당 작불(作佛)하여 가리라.

靑龍疏; 당 청룡사(靑龍寺) 번경사문(翻經沙門) 양분(良賁)이 봉칙(奉勅)하여 신역인왕경소(新譯仁王經疏) 3권을 지었으며 일컬어 청룡소(靑龍疏)라 함. 또 청룡사 사문 도인(道氤)이 현종의 조칙을 받들어 금강경소(金剛經疏)를 지었으며 또한 명칭이 청룡소(靑龍疏).

 

有法師問 持般若經最多功德 師還信否 師曰 不信 曰若爾靈驗傳十餘卷皆不堪信也 師曰 生人持孝自有感應 非是白骨能有感應 經是文字紙墨性空何處有靈驗 靈驗者在持經人用心 所以神通感物 試將一卷經安著案上 無人受持自能有靈驗否 僧問 未審一切名相及法相語之與默 如何通會卽得無前後 師曰 一念起時本來無相無名 何得說有前後 不了名相本淨 妄計有前後 夫名相關鎖 非智鑰不能開 中道者病在中道 二邊者病在二邊 不知現用是無等等法身 迷悟得失常人之法 自起生滅埋沒正智 或斷煩惱或求菩提 背却般若波羅蜜 人問 律師何故不信禪 師曰 理幽難顯名相易持 不見性者所以不信 若見性者號之爲佛 識佛之人方能信入 佛不遠人而人遠佛 佛是心作 迷人向文字中求 悟人向心而覺 迷人修因待果 悟人了心無相 迷人執物守我爲己 悟人般若應用見前 愚人執空執有生滯 智人見性了相靈通 乾慧辯者口疲 大智體了心泰 菩薩觸物斯照 聲聞怕境昧心 悟者日用無生 迷人見前隔佛

 

어떤 법사가 묻되 반야경을 수지(受持; )하면 공덕이 최다(最多)니 스님은 도리어 믿습니까. 사왈(師曰) 불신한다. 가로되 만약 그러하다면() 영험전(靈驗傳) 10여 권을 모두 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생인(生人; 산 사람)이 지효(持孝)하면 저절로 감응이 있나니 이 백골이 능히 감응이 있음이 아니다. 경은 이 문자며 지묵(紙墨)의 성()이 공했거늘 어느 곳에 영험이 있겠는가. 영험이란 것은 지경(持經)하는 사람의 용심(用心)에 있나니 소이로 신통으로 감물(感物; 사람에게 감응함)한다. 시험 삼아 1권의 경을 가져다 책상 위(案上)에 놓아두어라(安著). 수지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능히 영험이 있느냐. 승문(僧問) 미심하오니 일체의 명상(名相) 및 법상(法相), 어와 묵(語之與默)에 어떻게 통회(通會)해야 곧 전후(前後)가 없음을 얻습니까. 사왈 일념이 일어날 때 본래 무상무명(無相無名)이거늘 어찌 전후가 있음을 설함을 얻겠는가. 명상(名相)이 본래 청정함을 깨닫지() 못해 전후가 있음을 망계(妄計; 허망하게 計度)한다. 무릇 명상의 관쇄(關鎖; 빗장의 자물쇄)는 지약(智鑰; 지혜의 열쇠)이 아니면 능히 열지 못한다. 중도(中道)란 것은 병이 중도에 있고 이변(二邊)이란 것은 병이 이변에 있나니 현용(現用)이 이 무등등(無等等)의 법신임을 알지 못한다. 미오(迷悟)와 득실은 상인(常人)의 법이니 스스로 생멸을 일으켜 정지(正智)를 매몰(埋沒)한다. 혹 번뇌를 끊거나 혹 보리를 구함은 반야바라밀을 배각(背却)함이다. 사람이 묻되 율사는 무슨 연고로 선()을 믿지 않습니까. 사왈 이치는 그윽하여(理幽) 나타내기() 어렵고 명상(名相)은 가지기가 쉽다(易持). 견성하지 못한 자는 소이로 불신하나니 만약 견성한 자라면 호()하여 불()이라 한다. 식불(識佛)하는 사람이라야 바야흐로 능히 신입(信入)하나니 부처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거늘 사람이 부처를 멀리한다. 부처는 이 마음이 짓는다. 미인(迷人)은 문자 가운데를 향해 구하고 오인(悟人)은 마음을 향해 깨치며 미인은 인을 닦아 과를 기다리고(修因待果) 오인은 마음의 무상(無相)을 깨달으며() 미인은 사물에 집착하여(執物) 나를 지켜 자기로 삼고 오인은 반야의 응용(應用)이 현전(見前)하며 우인(愚人)은 집공집유(執空執有)하여 막힘()을 내고 지인(智人)은 견성요상(見性了相; 성을 보고 상을 깨달음)하여 영통(靈通)한다. 건혜(乾慧)로 변설(辯說)하는 자는 입이 피로(疲勞)하고 대지(大智)는 체료(體了)하여 마음이 태연(泰然; )하다. 보살은 촉물(觸物)하면 이를 비추고(斯照) 성문은 파경(怕境; 경계를 두려워 함)하여 마음을 매하며(昧心) 오자(悟者)는 일용(日用)하면서 무생(無生)이지만 미인(迷人)은 현전(見前)하매 격불(隔佛; 부처를 )한다.

 

人問 如何得神通去 師曰 神性靈通遍周沙界 山河石壁去來無礙 刹那萬里往返無蹤 火不能燒水不能溺 愚人自無心智 欲得四大飛空 經云 取相凡夫隨宜爲說 心無形相卽是微妙色身 無相卽是實相 實相體空喚作虛空無邊身 萬行莊嚴故云功德法身 卽此法身是萬行之本 隨用立名 實而言之 只是淸淨法身也 人問 一心修道過去業障得消滅否 師曰 不見性人未得消滅 若見性人如日照霜雪 又見性人猶如積草等須彌 只用一星之火 業障如草 智慧似火 曰云何得知業障盡 師曰 見前心通前後生事猶如對見 前佛後佛萬法同時 經云 一念知一切法是道場 成就一切智故 有行者問云 何得住正法 師曰 求住正法者是邪 何以故 法無邪正故 曰云何得作佛去 師曰 不用捨衆生心 但莫污染自性 經云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曰若如是解者得解脫否 師曰 本自無縛不用求解 法過語言文字 不用數句中求 法非過現未來 不可以因果中契 法過一切不可比對 法身無象應物現形 非離世間而求解脫

 

사람이 묻되 어찌해야 신통을 얻습니까. 사왈(師曰) 신성(神性)은 영통(靈通)하여 사계(沙界)에 두루하나니(遍周) 산하(山河)와 석벽(石壁)도 거래하매 무애(無礙)하다. 찰나에 만 리를 왕반(往返)하되 자취()가 없고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고 물이 능히 빠지게() 하지 못한다. 우인(愚人)이 스스로 심지(心智)가 없으면서 4()가 비공(飛空)함을 얻고 싶어 한다. (; 법화경2)에 이르되 취상(取相)하는 범부에게 마땅함을 따라 설한다. 마음은 형상(形相)이 없음이 즉시 미묘한 색신이며 무상(無相)이 즉시(卽是) 실상(實相)이다. 실상의 체가 공()함을 허공의 무변신(無邊身)으로 불러 짓고 만행으로 장엄하는지라 고로 이르되 공덕법신(功德法身)이다. 곧 이 법신이 이 만행의 근본이니 씀을 따라 이름을 세우거니와 실로 이를 말하자면 다만 이 청정법신이다. 사람이 묻되 일심으로 수도하면 과거의 업장이 소멸함을 얻습니까. 사왈 견성하지 못한 사람은 소멸함을 얻지 못하지만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해가 상설(霜雪)을 비춤과 같다. 또 견성한 사람은 마치 적초(積草)가 수미(須彌)와 제등(齊等; )함과 같더라도 다만 일성(一星)의 불을 쓴다. 업장은 초()와 같고 지혜는 불과 같다. 가로되 어찌해야 업장이 없어짐()을 득지(得知)합니까. 사왈 현전(見前)하는 마음이 전후생(前後生)의 일을 통함이 대견(對見)함과 같나니 전불후불(前佛後佛)의 만법이 동시(同時). (; 維摩經上)에 이르되 일념으로 일체법이 이 도량임을 아나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한 연고이다. 어떤 행자가 문운(問云) 어찌해야 정법(正法)에 주()함을 얻습니까. 사왈 정법에 주함을 구하는 자는 이 사(). 무슨 연고냐(何以故), 법엔 사정(邪正)이 없는 연고이다. 가로되 어찌해야(云何) 작불(作佛)함을 얻습니까. 사왈 중생심을 버림을 쓰지 말고 단지 자성을 오염되게 하지 말아라. (; 六十華嚴十)에 이르되 심ㆍ불 및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가로되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하는 자는 해탈을 얻습니까. 사왈 본래 스스로 묶임이 없으니 해탈을 구함을 쓰지 않는다. 법은 어언문자(語言文字)를 초과하므로 수구(數句) 중에서 구함을 쓰지 않으며 법은 과()ㆍ현()ㆍ미래가 아니므로 가히 인과 가운데에 계합함을 쓰지() 않으며 법은 일체를 초과하므로 가히 비대(比對)하지 못한다. 법신은 무상(無象)하며 응물(應物)하여 현형(現形)하나니 세간을 여의고 해탈을 구하지 않는다.

 

僧問 何者是般若 師曰 汝疑不是者試說看 又問云 何得見性 師曰 見卽是性無性不能見 又問 如何是修行 師曰 但莫污染自性卽是修行 莫自欺誑卽是修行 大用現前卽是無等等法身 又問 性中有惡否 師曰 此中善亦不立 曰善惡俱不立將心何處用 師曰 將心用心是大顚倒 曰作麽生卽是 師曰 無作麽生亦無可是 人問 有人乘船船底刺殺螺蜆 爲是人受罪 爲復船當辜 師曰 人船兩無心罪正在汝 譬如狂風折樹損命 無作者無受者 世界之中無非衆生受苦處 僧問 未審託情勢指境勢語默勢乃至揚眉動目等勢 如何得通會於一念間 師曰 無有性外事 用妙者動寂俱妙 心眞者語默總眞 會道者行住坐臥是道 爲迷自性萬惑茲生 又問 如何是法有宗旨 師曰 隨其所立卽有衆義 文殊於無住本立一切法 曰莫同太虛否 師曰 汝怕同太虛否 曰怕 師曰 解怕者不同太虛 又問 言方不及處如何得解 師曰 汝今正說時疑何處不及

 

승문(僧問) 무엇이(何者) 이 반야입니까. 사왈(師曰) 네가 이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을 시험 삼아 설해 보아라. 또 문운(問云) 어찌해야 견성(見性)함을 얻습니까. 사왈 견()이 즉시(卽是) ()이니 성이 없으면 능히 보지 못한다. 우문(又問) 무엇이 이 수행입니까. 사왈 단지 자성을 오염하지 않음이 즉시 수행이며 스스로 기광(欺誑)하지 않음이 즉시 수행이며 대용(大用)이 현전함이 즉시 무등등(無等等)의 법신이다. 우문(又問) 성중(性中)에 악()이 있습니까. 사왈 차중(此中)엔 선()도 또한 세우지 않는다. 가로되 선악을 모두() 세우지 않으면 마음을 가져다(將心) 어느 곳에 씁니까. 사왈 장심(將心)과 용심(用心)은 이 대전도(大顚倒). 가로되 어떻게 해야(作麽生) 곧 옳습니까(). 사왈 작마생(作麽生)이 없고 또한 가히 옳음()도 없다. 사람이 묻되 어떤 사람이 승선(乘船)했는데 배 밑바닥(船底)이 나현(螺蜆; 소라와 바지락)을 찔러 죽이면 이 사람이 수죄(受罪)합니까, 다시 배가 고(; 허물. 재난)에 당합니까. 사왈 사람과 배, 둘은 무심(無心)하니 죄는 바로 너에게 있다. 비유컨대 광풍(狂風)이 나무를 꺾어 목숨을 손상하면 작자(作者)도 없고 수자(受者)도 없음과 같다. 세계의 가운데 중생의 수고(受苦)하는 곳이 아님이 없다. 승문(僧問) 미심하오니 탁정세(託情勢)ㆍ지경세(指境勢)ㆍ어묵세(語默勢) 내지 양미동목(揚眉動目)하는 등의 세()에 어떻게(如何) 일념간(一念間)에 통회(通會; 모두 알다)함을 얻습니까. 사왈 성() 밖의 일이 있지 않나니 묘()를 쓰는 자는 동적(動寂)이 모두 묘하며 마음이 진실한 자(心眞者)는 어묵(語默)이 모두 진이며(總眞) 도를 아는 자(會道者)는 행주좌와가 이 도다. 자성을 미()하면 만혹(萬惑)이 이에서() 생겨난다. 우문(又問) 무엇이 이 법에 종지(宗旨)가 있음입니까. 사왈 그 소립(所立)을 따라 곧 뭇 뜻(衆義)이 있나니 문수는 무주의 근본(無住本)에 일체법을 세운다. 가로되 태허(太虛)와 같지 않습니까. 사왈 너는 태허와 같음을 두려워() 하는가. 가로되 두려워 합니다. 사왈 두려움을 아는 것은 태허와 같지 않다. 우문(又問) 언방(言方; 언어와 방법)이 미치지 않는 곳을 어떻게 득해(得解)합니까. 사왈 네가 지금 바로 설할 때 어느 곳에 미치지 못함을 의심하는가.

 

有宿德十餘人同問 經云破滅佛法 未審佛法可破滅否 師曰 凡夫外道謂佛法可破滅 二乘人謂不可破滅 我正法中無此二見 若論正法非但凡夫外道 未至佛地者二乘亦是惡人 又問 眞法幻法空法非空法各有種性否 師曰 夫法雖無種性應物俱現 心幻也一切俱幻 若有一法不是幻者 幻卽有定 心空也一切皆空 若有一法不空空義不立 迷時人逐法 悟時法由人 如森羅萬象至空而極 百川衆流至海而極 一切賢聖至佛而極 十二分經五部毘尼五圍陀論至心而極 心者是總持之妙本萬法之洪源 亦名大智慧藏無住涅槃 百千萬名盡心之異號耳 又問 如何是幻 師曰 幻無定相如旋火輪 如乾闥婆城 如機關木人 如陽焰 如空華 俱無實法

五部毘尼; 五部律 佛滅後百年時 付法藏第五祖優婆毱多之下 有五弟子 同時於律藏生五部之派別 一曇無德部 又曰曇摩毱多 是部主之名 譯爲法正 法護 法鏡 法密等 律本於此土曰四分律 二薩婆多部 或曰薩婆諦婆 譯言一切有 從宗計而取名 律本曰十誦律 三彌沙塞部 譯言不著有無觀 從行而名 律本曰五分律 四迦葉遺部 此曰重空觀 以空亦空爲觀 就行而名 但戒本傳譯曰解脫戒經 其戒相與五分律同 五婆麤富羅部 又曰婆蹉富羅 譯言犢子 從部主之名 又從宗計曰著有行 以執有實我故也 律本未傳 [大集經二十 行事鈔資持記上一之二 戒疏一上 義林章三末]

五圍陀論; 疑四圍陀論 圍陀 又作吠陀 韋陀 毘陀 皮陀 鞞陀 薜陀等 譯曰明智 明分等 婆羅門所傳經典之名也 明實事 發生智慧故名 大本別爲四分 西域記二曰 其婆羅門 學四吠陀論 一曰壽 謂養生繕性 二曰祠 謂享祭祈禱 三曰平 謂禮儀占卜 兵法軍陣 四曰術 謂異能伎數 禁咒醫方 旋火輪; 以火旋轉而爲輪形者 輪形似有而非實 以譬一切事法之假相 楞嚴經三 生死死生 生生死死 如旋火輪 未有休息

機關木人; 祖庭事苑七 機關木人 大般若四百五十六云 如巧工匠 或彼弟子 有所爲故 造諸機關 或女或男 或象馬等 此諸機關雖有所作 而於彼事無所分別 何以故 機關法爾 無分別故 甚深般若波羅蜜多亦復如是 有所爲故 而成立之 旣成立已 雖能成辨 所作所說 而於其中都無分別 法爾無分別故

 

숙덕(宿德) 10여 인이 있어 함께 물었다. 경운(經云) 불법을 파멸(破滅)한다. 미심하오니 불법을 가히 파멸합니까. 사왈(師曰) 범부와 외도가 이르되 불법을 가히 파멸한다. 이승인(二乘人)이 이르되 가히 파멸하지 못한다. 나의 정법(正法) 가운데엔 이 2()이 없다. 만약 정법을 논할진대 단지 범부와 외도 만이 아니라 불지(佛地)에 이르지 못한 자인 이승(二乘)도 또한 이 악인이다. 우문(又問) 진법(眞法)ㆍ환법(幻法)ㆍ공법(空法)ㆍ비공법(非空法)이 각기 종성(種性)이 있습니까. 사왈 무릇 법은 비록 종성이 없지만 응물(應物)하여 모두() 나타난다. ()이 환()이면 일체 모두()가 환이니 만약 1법이라도 이 환이 아닌 것이 있다면 환이 곧 정()함이 있다. 심이 공()이면 일체가 모두 공이니 만약 1법이라도 공이 아님이 있다면 공의 뜻이 서지 못한다. 미시(迷時)엔 사람이 법을 쫓지만() 오시(悟時)엔 법이 사람을 말미암는다. 예컨대() 삼라만상은 공()에 이르러 다하고() 백천(百川)의 중류(衆流)는 바다에 이르러 다하고 일체의 현성(賢聖)은 불()에 이르러 다하고 십이분교(十二分經; 十二部經)ㆍ오부비니(五部毘尼)ㆍ오위타론(五圍陀論)은 심()에 이르러 다한다. 심이란 것은 총지(總持)의 묘본(妙本)이며 만법의 홍원(洪源)이며 또한 이름이 대지혜장(大智慧藏)이며 무주열반(無住涅槃)이다. 백천만의 이름이 모두() 심의 이호(異號)일 뿐이다. 우문(又問) 무엇이 이 환()입니까. 사왈 환은 정한 상()이 없나니 선화륜(旋火輪)과 같고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고 기관목인(機關木人)과 같고 양염(陽焰)과 같고 공화(空華)와 같아서 모두() 실법(實法)이 없다.

五部毘尼; 곧 오부율(五部律)이니 불타가 멸도한 후 100년 때 부법장(付法藏) 5조 우바국다(優婆毱多)의 아래 5제자가 있어 동시에 율장에 5부의 파별(派別)이 생기(生起)했음. 1. 담무덕부(曇無德部) 또 가로되 담마국다(曇摩毱多)니 이는 부주(部主)의 이름이며 번역하면 법정(法正)ㆍ법호(法護)ㆍ법경(法鏡)ㆍ법밀(法密) 등임. 율본(律本)은 이 땅에선 가로되 사분율(四分律). 2. 살바다부(薩婆多部) 혹은 가로되 살바체바(薩婆諦婆)니 번역하면 일체유(一切有)며 종계(宗計)를 좇아 이름을 취했음. 율본은 가로되 십송률(十誦律). 3. 미사새부(彌沙塞部) 번역해 말하면 불착유무관(不著有無觀)이니 행()을 좇아 이름했음. 율본을 가로되 오분율(五分律). 4. 가섭유부(迦葉遺部) 여기에선 가로되 중공관(重空觀)이니 공()도 또한 공으로써 관을 삼으며 행으로 나아가 이름했음. 단지 계본을 전역(傳譯)해 가로되 해탈계경(解脫戒經)이니 그 계상(戒相)은 오분율과 같음. 5. 바추부라부(婆麤富羅部) 또 가로되 바차부라(婆蹉富羅)니 번역해 말하면 독자(犢子)며 부주(部主)의 이름을 좇았음. 또 종계(宗計)를 좇아 가로되 착유행(著有行)이니 실아(實我)가 있다고 집착하는 연고임. 율본이 전래하지 않았음 [대집경20. 행사초자지기상12. 계소1. 의림장3].

五圍陀論; 사위타론(四圍陀論)으로 의심됨. 위타(圍陀; veda)는 또 폐타(吠陀)ㆍ위타(韋陀)ㆍ비타(毘陀)ㆍ피타(皮陀)ㆍ비타(鞞陀)ㆍ벽타(薜陀)등으로 지음. 번역해 가로되 명지(明智)ㆍ명분(明分) 등이니 바라문이 전수하는 바의 경전의 이름임. 실사(實事)를 밝혀 지혜를 발생하는 고로 이름했음. 대본(大本)4분으로 분리했으니 서역기2에 가로되 그 바라문은 4폐타론(吠陀論)을 배운다. 1은 가로되 수()니 이르자면 양생(養生)과 선성(繕性; 본성을 涵養)이며 2는 가로되 사()니 이르자면 향제(享祭; 祭祀)와 기도며 3은 가로되 평()이니 이르자면 예의와 점복(占卜), 병법과 군진(軍陣)이며 4는 가로되 술()이니 이르자면 이능(異能; 특이한 技能)과 기수(伎數; 方伎數術), 금주(禁咒)와 의방(醫方)이다.

旋火輪; 불을 선전(旋轉; 빙빙 돌림)하여 윤형(輪形)을 이룬 것이니 윤형은 있는 듯하지만 실다운 게 아님. 일체 사법(事法)의 가상(假相)에 비유함. 릉엄경3. ()했다가 사()하고 사했다가 생하면서 자꾸 생하고 자꾸 사함이 선화륜(旋火輪)과 같나니 휴식이 있지 아니하다.

機關木人; 조정사원7. 기관목인(機關木人) 대반야456에 이르되 예컨대() 교묘한 공장(工匠)이나 혹은 그의 제자가 할 바가 있는 고로 여러 기관(機關)을 만드나니 혹은 여자며 혹은 남자며 혹은 코끼리며 혹은 말 등이다. 이 여러 기관이 비록 짓는 바가 있지만 그 일에 분별하는 바가 없나니 무엇 때문인 연고냐. 기관의 법이 그러하여 분별이 없는 연고이다.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할 바가 있는 고로 그것을 성립하지만 이미 성립한 다음엔 비록 능히 갖춤을 이루어(成辨) 짓는 바며 설하는 바이지만 그 가운데 모두 분별이 없나니 법이 그러하여 분별이 없는 연고이다.

 

又問 何名大幻師 師曰 心名大幻師 身爲大幻城 名相爲大幻衣食 河沙世界無有幻外事 凡夫不識幻 處處迷幻業 聲聞怕幻境 昧心而入寂 菩薩識幻法達體幻 不拘一切名相 佛是大幻師 轉大幻法輪 成大幻涅槃 轉幻生滅得不生不滅 轉河沙穢土成淸淨法界 僧問 何故不許誦經喚作客語 師曰 如鸚鵡只學人言不得人意 經傳佛意 不得佛意而但誦是學語人 所以不許 曰不可離文字言語別有意耶 師曰 汝如是說亦是學語 曰同是語言何偏不許 師曰 汝今諦聽經有明文 我所說者義語非文 衆生說者文語非義 得意者越於浮言 悟理者超於文字 法過語言文字 何向數句中求 是以發菩提者得意而忘言 悟理而遺敎 亦猶得魚忘筌得兔忘蹄也

 

우문(又問) 무엇을 이름해 대환사(大幻師)라 합니까. 사왈(師曰) ()의 이름이 대환사며 신()이 대환성(大幻城)이 되며 명상(名相)이 대환의식(大幻衣食)이 되나니 하사세계(河沙世界)에 환 밖의 일이 있지 않다. 범부는 환을 알지 못해 처처에 환업(幻業)을 미()하고 성문은 환경(幻境)을 두려워 해 심()을 매(; 違背)하여 입적(入寂)하고 보살은 환법(幻法)을 알아 체()가 환임을 요달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에 구애되지 않는다. ()은 이 대환사(大幻師)니 대환법륜(大幻法輪)을 굴리고 대환열반(大幻涅槃)을 이루고 환생멸(幻生滅)을 전()하여 불생불멸을 얻고 하사(河沙)의 예토(穢土)를 전()하여 청정한 법계를 이룬다. 승문(僧問) 무슨 연고로 송경(誦經)을 허락하지 않고 객어(客語; 客說)로 불러 짓습니까. 사왈 앵무가 다만 사람의 말을 배우고 사람의 뜻을 얻지 못함과 같다. 경은 불의(佛意)를 전()하는데 불의를 얻지 못하고 단지 외우기만 하니 이는 말을 배우는 사람인지라(學語人) 소이로 불허한다. 가로되 가히 문자언어를 여의고 달리 뜻이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너의 이와 같은 말도 역시 학어(學語). 가로되 한가지로 이 어언(語言)이거늘 왜 편벽(偏僻; )되게 불허합니까. 사왈 네가 이제 체청(諦聽; 자세히 듣다)할지니 경(; 金剛三昧經)에 밝힌 글이 있다. 내가 설하는 바의 것은 의어(義語; 뜻의 말)며 문()이 아니거니와 중생이 설하는 것은 문어(文語; 의 말)며 뜻()이 아니다(以上經文). 득의자(得意者)는 부언(浮言)을 초월(超越; )하고 오리자(悟理者)는 문자를 초과(超過; )한다. 법은 어언문자를 초과하거늘 어찌 수구(數句) 중을 향해 구하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보리를 발한 자는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며 리()를 깨닫고 교()를 버리나니() 또한 득어망전(得魚忘筌)ㆍ득토망제(得兔忘蹄)와 같다().

 

有法師問 念佛是有相大乘 禪師意如何 師曰 無相猶非大乘 何況有相 經云 取相凡夫隨宜爲說 又問 願生淨土 未審實有淨土否 師曰 經云 欲得淨土當淨其心 隨其心淨卽佛土淨 若心淸淨所在之處皆爲淨土 譬如生國王家決定紹王業 發心向佛道是生淨佛國 其心若不淨在所生處皆是穢土 淨穢在心不在國土 又問 每聞說道 未審何人能見 師曰 有慧眼者能見 曰甚樂大乘如何學得 師曰 悟卽得不悟不得 曰如何得悟去 師曰 但諦觀 曰似何物 師曰 無物似 曰應是畢竟空 師曰 空無畢竟 曰應是有 師曰 有而無相 曰不悟如何 師曰 大德自不悟亦無人相障 人問 佛法在於三際否 師曰 見在無相不在其外 應用無窮不在於內 中間無住處 三際不可得 曰此言大混 師曰 汝正說混之一字時在內外否 曰弟子究檢 內外無蹤迹 師曰 若無蹤迹明知上來語不混 曰如何得作佛 師曰 是心是佛是心作佛 曰衆生入地獄佛性入否 師曰 如今正作惡時更有善否 曰無 師曰 衆生入地獄佛性亦如是 曰一切衆生皆有佛性如何 師曰 作佛用是佛性 作賊用是賊性 作衆生用是衆生性 性無形相隨用立名 經云 一切賢聖皆以無爲法而有差別 僧問 何者是佛 師曰 離心之外卽無有佛 曰何者是法身 師曰 心是法身 謂能生萬法故號法界之身 起信論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卽依此心顯示摩訶衍義

畢竟空; 十八空之一 又作至竟空 卽以有爲空無爲空破一切法 畢竟無有遺餘

 

어떤 법사가 묻되 염불은 이 유상대승(有相大乘)이라 하나니 선사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무상(無相)도 오히려 대승이 아니거늘 어찌 하물며 유상(有相)이겠는가. (; 법화경2)에 이르되 취상(取相)하는 범부에게 마땅함을 따라 설한다. 우문(又問) 정토에 출생함을 원한다. 미심하오니 실로 정토가 있습니까. 사왈 경(; 維摩經上)에 이르되 정토를 얻고 싶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청정히 할지니 그 마음의 청정함을 따라 곧 불토도 청정하다(以上經文). 만약 마음이 청정하면 소재(所在)하는 곳이 모두 정토가 된다. 비유컨대 국왕가(國王家)에 출생하면 결정코 왕업(王業)을 이음()과 같다. 발심하여 불도를 향하면 이는 청정한 불국에 출생한다. 그 마음이 만약 부정(不淨)하면 재소(在所)나 생처(生處)가 모두 이 예토(穢土)니 정예(淨穢)는 마음에 있고 국토에 있지 않다. 우문(又問) 매번 듣건대 도를 말하거니와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이 능히 봅니까. 사왈 혜안(慧眼)이 있는 자가 능히 본다. 가로되 심히 대승을 좋아하거니와() 어찌해야 학득(學得)합니까. 사왈 깨쳐야 곧 얻고 깨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 가로되 어찌해야 득오합니까(得悟去). 사왈 단지 자세히 살펴야 한다(諦觀). 가로되 어떤 물건과 흡사합니까. 사왈 흡사한 물건이 없다(無物似). 가로되 응당 이 필경공(畢竟空)입니까. 사왈 공은 필경이 없다. 가로되 응당 이 유()입니까. 사왈 유는 무상이다(有而無相). 가로되 깨치지 못하겠으니 무엇입니까(如何). 사왈 대덕이 스스로 깨치지 못함이니 또한 서로 장애할 사람이 없다. 사람이 묻되 불법은 3()에 있습니까. 사왈 현재(見在)는 무상(無相)이니 그 밖에 있지 않고 응용이 무궁하니 안에 있지 않고 중간에 주처(住處)가 없으니 3()를 불가득이다. 가로되 이 말씀은 매우 혼란합니다(大混). 사왈 네거 바로() ()이란 1자를 설할 때 내외에 있는가. 가로되 제자가 구검(究檢)하니 내외가 종적이 없습니다. 사왈 만약 종적이 없다면 상래(上來)의 말이 불혼(不混)임을 환히 안다(明知). 가로되 어찌해야 작불(作佛)함을 얻습니까. 사왈 이 심()이 이 불()이며 이 심이 작불한다. 가로되 중생이 지옥에 들어가면 불성도 들어갑니까. 사왈 여금에 바로() 악을 지을 때 다시 선()이 있는가. 가로되 없습니다. 사왈 중생이 지옥에 들어가면 불성도 또한 이와 같다. 가로되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음은 어떻습니까. 사왈 불용(佛用; 불의 씀)을 지으면 이 불성이며 적용(賊用)을 지으면 이 적성(賊性)이며 중생용(衆生用)을 지으면 이 중생성(衆生性)이다. ()은 형상(形相)이 없고 용()을 따라 이름을 세운다. (금강경)에 이르되 일체의 현성(賢聖)이 모두 무위법(無爲法)을 써서() 차별이 있다. 승문(僧問) 무엇이(何者) 이 불()입니까. 사왈 심을 여읜 밖에 곧 불이 있지 않다. 가로되 무엇이 이 법신입니까. 사왈 심이 이 법신이니 이르자면 능히 만법을 내는지라 고로 호가 법계의 몸이다. 기신론에 이르되 말한 바 법이란 것은 이르자면 중생심이니 곧 차심(此心)에 의해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뜻을 현시(顯示)한다.

畢竟空; 8공의 하나. 또 지경공(至竟空)으로 지음. 곧 유위공무위공(有爲空無爲空)으로 일체법을 타파하여 필경 나머지(遺餘)가 있지 않음.

 

又問 何名有大經卷內在一微塵 師曰 智慧是經卷 經云 有大經卷量等三千大千界 內在一微塵中 一塵者是一念心塵也 故云 一念塵中演出河沙偈時人自不識 又問 何名大義城 何名大義王 師曰 身爲大義城 心爲大義王 經云 多聞者善於義 不善於言說 言說生滅義 不生滅義無形相 在言說之外 心爲大經卷 心爲大義王 若不了了識心者不名善義 只是學語人也 又問 般若經云 度九類衆生皆入無餘涅槃 又云 實無衆生得滅度者 此兩段經文如何通會 前後人說皆云 實度衆生而不取衆生相 常疑未決 請師爲說 師曰 九類衆生一身具足隨造隨成 是故無明爲卵生 煩惱包裹爲胎生 愛水浸潤爲濕生 歘起煩惱爲化生 悟卽是佛 迷號衆生 菩薩只以念念心爲衆生 若了念念心體空 名爲度衆生也 智者於自本際上度於未形 未形旣空卽知實無衆生得滅度者 僧問 言語是心否 師曰 言語是緣不是心 曰離緣何者是心 師曰 離言語無心 曰離言語旣無心若爲是心 師曰 心無形相非離言語非不離言語 心常湛然應用自在 祖師云 若了心非心始解心心法 僧問 如何是定慧等學 師曰 定是體慧是用 從定起慧從慧歸定 如水與波一體更無前後 名定慧等學 夫出家兒莫尋言逐語 行住坐臥竝是汝性用 什麽處與道不相應 且自一時休歇去 若不隨外境風 心性水常自湛湛 無事珍重

經云; 華嚴經五十一云 譬如有大經卷 量等三千大千世界 …… 此大經卷雖復量等大千世界 而全住在一微塵中

通會; 疏通會合之意 又作和會

九類衆生; 一卵生 二胎生 三濕生 四化生 五有色 六無色 七有想 八無想 九非有想非無想 [金剛經]

無餘涅槃; 二種涅槃之一 四種涅槃之一 新云無餘依涅槃 略稱無餘涅槃 謂出離生死苦所顯現之眞理 卽煩惱斷盡 所餘五陰之身亦滅 失去一切有爲法之所依 自然歸於滅盡 衆苦永寂 [攝大乘論釋十三 成唯識論了義燈七末]

滅度; 謂命終證果 滅障度苦 卽涅槃 圓寂 遷化之意

愛水; 自愛欲之情 流出之水液 如精液者 又愛欲之煩惱 能潤業而引未來之果 故譬之以水

本際; 指根本究竟之邊際 眞理之根源 萬物之根本 又作眞際 實際

 

우문(又問) 무엇을 이름해 대경권(大經卷)이 있어 1미진(微塵)에 내재(內在)한다 합니까. 사왈(師曰) 지혜가 이 경권이다. 경운(經云) 대경권이 있어 양이 삼천대천계와 제등(齊等)하나니 1미중 중에 내재(內在)한다. 1()이란 것은 이 일념심(一念心)의 진()이다. 고운(故云) 일념의 진중(塵中)에 하사게(河沙偈)를 연출(演出)하나니 시인(時人)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 우문(又問) 무엇을 이름해 대의성(大義城)이며 무엇을 이름해 대의왕(大義王)입니까. 사왈 신()이 대의성이 되며 심이 대의왕이 된다. 경운 다문자(多聞者)는 의()를 잘하고() 언설을 잘하지 못한다. 언설은 생멸의 뜻이며(生滅義) 불생멸의 뜻은 형상(形相)이 없고 언설의 밖에 있다. 심이 대경권이 되며 심이 대의왕(大義王)이 된다. 만약 요료(了了)히 식심(識心)하지 못하는 자면 이름이 선()의 뜻이 아니며 다만 이 학어(學語; 말을 배우다)하는 사람이다. 우문(又問) 반야경(般若經)에 이르되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멸도(滅度; )하여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한다. 우운(又云) 실로 중생이 멸도(滅度)를 얻는 자 없다. 이 양단(兩段)의 경문을 어떻게 통회(通會)합니까. 전후인(前後人)의 설()에 모두 이르되 실로 중생을 멸도하되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늘 의심하며 미결(未決)했으니 청컨대 스님이 설하십시오. 사왈 구류중생을 일신(一身)에 구족하여 곧바로 짓고 곧바로 이룬다(隨造隨成). 이런 고로 무명은 난생(卵生)이 되고 번뇌로 포과(包褁; 싸다)함은 태생이 되고 애수(愛水)로 침윤(浸潤; 점점 배어 들어감)함은 습생이 되고 갑자기() 번뇌를 일으킴은 화생이 된다. ()하면 즉시 불이며 미()하면 호가 중생이다. 보살은 다만 염념심(念念心)을 중생으로 삼으며 만약 염념의 심체(心體)가 공했음을 깨치면 이름하여 중생을 제도함이다. 지자(智者)는 자기의 본제상(本際)에서 미형(未形)을 제도하나니 미형이 이미 공한지라 곧 실로 중생이 멸도를 얻는 자 없음을 안다. 승문(僧問) 언어가 이 심()입니까. 사왈 언어는 이 연()이며 이 심이 아니다. 가로되 연()을 여의면 무엇이(何者) 이 심입니까. 사왈 언어를 여의면 심이 없다(無心). 가로되 언어를 여의면 이미 심이 없거늘 어떻게(若爲) 이 심이라 합니까. 사왈 심은 형상(形相)이 없고 언어를 여의지 않고 언어를 여의지 않음도 아니다. 심은 늘 담연(湛然)하며 응용이 자재하다. 조사(祖師; 第六祖 彌遮迦)가 이르되 만약 심이 비심(非心)임을 깨치면 비로소 심과 심법을 이해하리라. 승문 무엇이 이 정혜(定慧)를 제등(齊等)히 배움입니까. 사왈 정()이 이 혜()며 혜는 이 용()이다. 정으로 좇아 혜를 일으키고 혜로 좇아 정으로 돌아간다. 예컨대() 물과 파도가 일체(一體)라서 다시 전후가 없나니 이름이 정혜를 제등히 배움이다. 무릇 출가아(出家兒)가 심언축어(尋言逐語)하지 말아야 하나니 행주좌와가 모두() 이 너의 성()의 용()이거늘 어느 곳(什麽處)이 도와 상응하지 않느냐. 다만() 스스로 일시에 휴헐할지니(休歇去) 만약 외경(外境)의 바람을 따르지 않는다면 심성(心性)의 수()가 늘 스스로 담담(湛湛)하리라.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經云; 화엄경51에 이르되 비여(譬如) 대경권(大經卷)이 있으니 양()이 삼천대천세계와 제등하다 …… 이 대경권이 비록 양이 대천세계와 제등하지만 전부 1미중(微塵) 중에 주재(住在)한다.

會通; 소통하여 회합함의 뜻. 또 화회(和會)로 지음.

九類衆生; 1. 난생 2. 태생 3. 습생 4. 화생 5. 유색 6. 무색 7. 유상 8. 무상 9. 비유상비무상 [금강경].

無餘涅槃; 2종 열반의 하나. 4종 열반의 하나. 신역에 이르되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며 약칭이 무여열반. 이르자면 생사고를 출리(出離)하여 나타내는 바의 진리임. 곧 번뇌를 단진(斷盡)하여 나머지 것인 5()의 몸도 또한 없어지고 일체 유위법의 소의(所依)를 잃어버려서 자연히 멸진(滅盡)으로 돌아가 뭇 고가 영원히 적멸함 [섭대승론석13. 성유식론요의등7].

滅度; 이르자면 목숨을 마치고 과를 증득함. 업장을 소멸하고 고를 제도함. 곧 열반ㆍ원적ㆍ천화의 뜻..

愛水; 애욕의 정으로부터 유출한 수액이 정액과 같은 것. 또 애욕의 번뇌가 능히 윤업(潤業)하여 미래의 결과를 당기는지라 고로 물로 이에 비유함.

本際; 근본구경(根本究竟)의 변제(邊際)ㆍ진리의 근원ㆍ만물의 근본을 가리킴. 또 진제(眞際)ㆍ실제로 지음.

 

汾州大達無業國師上堂有僧問曰 十二分敎流于此土 得道果者非止一二 云何祖師東化別唱玄宗 直指人心見性成佛 豈得世尊說法有所未盡 只如上代諸德高僧 竝學貫九流洞明三藏 生肇融叡盡是神異間生 豈得不知佛法遠近 某甲庸昧願師指示 師曰 諸佛不曾出世 亦無一法與人 但隨病施方 遂有十二分敎 如將蜜果換苦葫蘆 淘汝諸人業根都無實事 神通變化及百千三昧門 化彼天魔外道 福智二嚴爲破執有滯空之見 若不會道及祖師來意 論什麽生肇融叡

九流; 祖庭事苑五 九流 一曰儒流 謂順陰陽 陳敎化 述唐虞之政 宗仲尼之道也 二曰道流 謂守弱自卑 陳堯舜揖讓之德 明南面爲政之術 奉易之謙也 三曰陰陽流 謂順天歷象 敬授民時也 四曰法流 謂明賞敕法 以助禮制也 五曰名流 謂正名別位 言順事成也 六曰墨流 謂淸廟宗祀 養老施惠也 七曰縱橫流 謂受命使平 專對權事也 八曰雜流 謂兼儒墨之詮 含名法之訓 知國大體 事無不貫也 九曰農流 謂勸厲耕桑 備陳食貨也

生肇融叡; 竺道生 僧肇 道融 僧叡也 是稱關中之四聖 皆羅什門下也

庸昧; 謂資質愚鈍 才識淺陋 常用作謙詞

二嚴; 一智慧莊嚴 硏智慧而爲身之莊嚴者 二福德莊嚴 積福德而爲身之莊嚴者 [涅槃經二十七]

 

분주(汾州) 대달(大達) 무업국사(無業國師)가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문왈(問曰) 십이분교가 차토(此土)에 유입(流入)하매 도과(道果)를 얻은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않거늘 어찌하여 조사가 동화(東化; 東土에서 교화)하여 현종(玄宗; 현묘한 宗乘)을 별창(別唱)하여 인심(人心)을 직지(直指)하며 견성성불하게 했습니까. 어찌 세존의 설법에 미진(未盡)한 바가 있음을 얻겠습니까. 지여(只如) 상대(上代)의 제덕(諸德)과 고승이 모두() 학문이 구류(九流)를 꿰고() 3()을 통명(洞明; 환희 밝힘)했으니 생조융예(生肇融叡)는 모두 이 신이(神異)하며 간생(間生; 間或 출생함)이거늘 어찌 불법의 원근(遠近)을 알지 못함을 얻었겠습니까. 모갑은 용매(庸昧)하니 스님의 지시를 원합니다. 사왈 제불이 일찍이 출세하지 않았고 또한 1법도 사람에게 줌이 없었다. 단지 병 따라 약방(藥方)을 시여(施與) 했나니(隨病施方) 드디어 십이분교가 있다. 밀과(蜜果)를 가지고 쓴 호로(苦葫蘆)와 바꿈과 같이 너희 제인(諸人)의 업근(業根)을 일었고() 도무지() 실사(實事)가 없다. 신통변화(神通變化) 및 백천(百千)의 삼매문(三昧門)은 저() 천마(天魔)와 외도를 교화하고 복지이엄(福智二嚴)은 집유체공(執有滯空)의 견해를 깨뜨리기 위함이다. 만약 도() 및 조사의 내의(來意)를 알지() 못한다면 무슨(什麽) 생조융예(生肇融叡)를 논하겠는가.

九流; 조정사원5. 구류(九流) 1은 가로되 유류(儒流)니 이르자면 음양을 따라 교화를 베풀고 당우(唐虞)의 정치를 진술하고 중니의 도를 근본()으로 한다. 2는 가로되 도류(道流)니 이르자면 약()을 지켜 스스로 낮추고 요순의 읍양(揖讓; 하는 동작을 갖추면서 사양함)의 덕을 진술하고 남면(南面; 남쪽을 향함이니 임금이 앉던 방향)하여 정치를 하는 술법을 밝히고 역()의 겸양을 받드는 것이다. 3은 가로되 음양류(陰陽流)니 이르자면 하늘의 경력하는 형상에 순응해 공경하며 민시(民時; 백성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시기. 곧 봄에 밭 갈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거두는 때. 人時)를 수여하는 것이다. 4는 가로되 법류(法流)니 이르자면 칙법(敕法)을 밝혀 상 주고 예제(禮制)를 도우는 것이다. 5는 가로되 명류(名流)니 이르자면 이름을 바르게 하고 자리를 분별하며 말이 순순하고 일을 이루는 것이다. 6은 가로되 묵류(墨流)니 이르자면 청묘(淸廟; 맑고 깨끗한 宗廟)를 종사(宗祀; 받들어 제사함)하고 양로하며 시혜(施惠; 혜택을 베풂)함이다. 7은 가로되 종횡류(縱橫流)니 이르자면 명령을 받아 평화롭게 하며 오로지 권사(權事)에 대응함이다. 8은 가로되 잡류(雜流)니 이르자면 유묵儒墨; 유가와 묵가)의 전형(詮衡; 인물 등을 시험해 뽑음)을 겸하고 명법(名法; 名流法流)의 교훈을 포함하여 나라의 대체(大體)를 알아 일이 관통하지 않음이 없음이다. 9는 가로되 농류(農流)니 이르자면 경상(耕桑; 경작과 양잠)을 권려(勸厲; 는 힘쓸 려. 곧 힘쓰기를 권함)하여 식화(食貨; 음식과 재물)를 비진(備陳; 갖추어 진열함)함이다.

生肇融叡; 축도생ㆍ승조ㆍ도융ㆍ승예니 이를 일컬어 관중의 4()이라 함. 모두 라집의 문하임.

庸昧; 이르자면 자질이 우둔하고 재식(才識)이 천루(淺陋). 상용하여 겸사(謙詞)를 지음.

二嚴; 1은 지혜장엄이니 지혜를 연마하여 몸의 장엄을 삼는 것. 2는 복덕장엄이니 복덕을 쌓아 몸의 장엄을 삼는 것 [열반경27].

 

如今天下解禪解道如河沙數 說佛說心有百千萬億 纖塵不去未免輪迴 思念不亡盡須沈墜 如斯之類尙不能自識業果 妄言自利利他 自謂上流竝他先德 但言觸目無非佛事 擧足皆是道場 原其所習不如一箇五戒十善凡夫 觀其發言嫌他二乘十地菩薩 且醍醐上味爲世珍奇 遇斯等人翻成毒藥 南山尙自不許呼爲大乘 學語之流 爭鋒唇舌之間 鼓論不形之事 竝他先德 誠實苦哉 只如野逸高士 尙解枕石漱流棄其利祿 亦有安國理民之謀徵而不赴 況我禪宗途路且別 看他古德道人得意之後 茆茨石室向折脚鐺子裏 煮飯喫過三十二十年 名利不干懷 財寶不爲念 大忘人世隱跡巖叢 君王命而不來 諸侯請而不赴 豈同我輩貪名愛利汩沒世途 如短販人有少希求而忘大果 十地諸賢豈不通佛理可不如一箇博地凡夫 實無此理 他說法如雲如雨 猶被佛呵云 見性如隔羅縠 只爲情存聖量見在果因 未能逾越聖情過諸影跡 先賢古德碩學高人博達古今洞明敎網 蓋爲識學詮文水乳難辨 不明自理念靜求眞 嗟乎得人身者如爪甲上土 失人身者如大地土 良可傷哉

自利利他; 又作自益益他 自利利人 自行化他 自利他利 自他二利 自利 乃利己之意 卽爲自身之功德而努力修行 以此所産生之善果而自得其利 利他 乃利益他人之意 卽非爲己利 而爲救濟諸有情而致力行善

南山; 唐道宣 四分律宗之祖也 住終南山之紵麻蘭若 故號南山大師

野逸; 一純朴閑適 二指放縱不羈 三指隱逸的人或隱居生活

高士; 高尙之士 又菩薩之舊譯 三敎指歸二曰 菩薩 古維摩經翻高士

古德; 乃對古昔有德高僧之尊稱 或尊稱古佛

茆茨; 一茅草蓋的屋頂 亦指茅屋 二指簡陋的居室 三用以謙稱自己的家

羅縠; 布之稀簿輕妙者 天衆之衣

聖量; 聖賢的商量或度量

敎網; 衆生譬魚 佛之敎譬網

 

여금의 천하에 해선해도(解禪解道)하는 이가 하사수(河沙數)와 같으며 설불설심(說佛說心)하는 이가 백천만억이 있지만 섬진(纖塵)을 제거하지 못하면(不去) 윤회를 면치 못하고 사념(思念)이 불망(不亡)하면 모두() 꼭 침추(沈墜)한다. 이와 같은 무리(如斯之類)는 오히려 능히 스스로 업과(業果)를 알지 못하면서 허망하게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말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상류(上流)라 하면서 저() 선덕(先德)과 병렬(竝列; )하여 단지 말하되 촉목(觸目)하매 불사가 아님이 없고 거족(擧足)하매 모두 이 도량이다. 그 소습(所習)을 추구(追求; )하매 1개의 오계십선(五戒十善)의 범부만 같지 못하고 그의 발언(發言)을 보건대() () 2()과 십지보살(十地菩薩)을 혐오(嫌惡; )한다. 다만() 제호(醍醐)의 상미(上味; 가장 좋은 맛)가 세상에서 진기(珍奇)하지만 이런 등의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을 이룬다. 남산(南山)도 오히려 스스로 대승(大乘)으로 호칭(呼稱)함을 불허하였거늘 말을 배우는 무리(學語之流)가 순설(唇舌; 脣舌과 같음)을 쟁봉(爭鋒)하는 사이에 불형지사(不形之事; 形言하지 못할 일)를 고론(鼓論; 戱論)하며 저() 선덕과 병렬(竝列; )하려 하니 성실(誠實; 참으로)로 고재(苦哉)로다. 지여(只如) 야일(野逸)의 고사(高士)도 오히려 돌을 베개로 하고 유수에 씻으면서(枕石漱流) 그 이록(利祿)을 버릴 줄 알았고(). 또한 안국이민(安國理民)의 모략(謀略)이 있었지만 불러도() 다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우리 선종(禪宗)은 도로(途路)가 또() 다름에랴. () 고덕(古德)과 도인(道人)을 보건대() 득의(得意)한 후에 모자(茆茨)나 석실(石室)에서 다리 부러진 쟁자(鐺子; ) 속을 향해 자반(煮飯)하여 먹으며 30, 20년을 지나면서 명리(名利)는 품음()에 상간(相干; )하지 않고 재보(財寶)는 생각()하지 않고 인세(人世)를 대망(大忘)하고 암총(巖叢; 바위와 숲)에 은적(隱跡)했다. 군왕(君王)이 명()해도 오지 않았고 제후가 청해도 다다르지 않았거늘 어찌 아배(我輩)의 탐명애리(貪名愛利)하여 세도(世途)에 골몰(汩沒)함과 같았겠으며 단판인(短販人; 小賣人)이 조금 희구(希求)함이 있어 대과(大果)를 잊음과 같았겠는가. 십지제현(十地諸賢)이 어찌 불리(佛理)를 통하지 못해 가히 일개 박지범부(博地凡夫)만 같지 못하겠는가. 실로 이런 이치가 없지만 그(; 十地諸賢)의 설법이 여운여우(如雲如雨)하더라도 오히려 불타의 꾸짖음을 입었으니 이르되 견성이 나곡을 격함과 같다(如隔羅縠). 다만 정()에 성량(聖量)이 존재하고 견()이 과인(果因)에 있기 때문에 능히 성정(聖情)을 유월(逾越; 超越)하지 못하고 여러 영적(影跡)을 통과하지 못한다. 선현(先賢)ㆍ고덕(古德)ㆍ석학(碩學)ㆍ고인(高人)은 고금을 박달(博達)하고 교망(敎網)을 통명(洞明)했지만 대개 식학(識學)하고 전문(詮文)하되 수유(水乳)를 분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리(自理)를 밝히지 못하고 염정(念靜; 생각을 고요히 함)하여 구진(求眞)했다. 슬프다(嗟乎), 인신(人身)을 얻는 자는 조갑(爪甲; 손발톱) 위의 흙과 같고 인신을 잃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나니 참으로 가히 상심(傷心)하노라.

自利利他; 또 자익익타(自益益他)ㆍ자리이인(自利利人)ㆍ자행화타(自行化他)ㆍ자리타리ㆍ자타이리(自他二利)로 지음. 자리(自利)는 곧 이기(利己)의 뜻이니 곧 자신의 공덕을 위해 노력하고 수행함이며 이로써 산생한 바의 선과(善果)로 스스로 그 이익을 얻음. 이타(利他)는 곧 타인을 이익되게 함의 뜻이니 곧 자기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유정을 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아 행선(行善).

南山; 당 도선(道宣)은 사분율종의 시조며 종남산의 저마란야(紵麻蘭若)에 거주했으므로 고로 호가 남산대사임.

野逸; 1. 순박하고 한적(閑適). 2. 방종(放縱)하여 불기(不羈; 얽매이지 않음)를 가리킴. 3. 은일(隱逸)한 사람 혹 은거생활을 가리킴.

高士; 고상한 사내. 또 보살의 구역임. 삼교지귀2에 가로되 보살 고유마경에선 고사(高士)로 번역했다.

古德; 오랜 옛날의 유덕한 고승에 대한 존칭. 혹 존칭이 고불임.

茆茨; 1. 띠풀로 덮은 옥정(屋頂). 또한 모옥(茅屋)을 가리킴. 2. 간루(簡陋)한 거실을 가리킴. 3. 써서 자기의 집을 겸칭(謙稱).

羅縠; 베의 성기고 얇으면서 가볍고 묘한 것이니 천중(天衆)의 옷임.

聖量; 성현의 상량 혹 탁량(度量).

敎網; 중생을 물고기에 비유하고 불타의 교를 그물에 비유함.

設有悟理之者有一知一解 不知是悟中之則入理之門 便謂永出世利 巡山傍㵎輕忽上流 致使心漏不盡理地不明 空到老死無成虛延歲月 且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苦輪 假使才竝馬鳴解齊龍樹 只是一生兩生不失人身 根思宿淨聞之卽解 如彼生公何足爲羨與道全遠 共兄弟論實不論虛 只遮口食身衣 盡是欺賢罔聖 求得將來他心慧眼 觀之如喫膿血一般 總須償他始得 阿那箇有道果 自然招得他信施來不受者 學般若菩薩不得自謾 如氷凌上行 似劍刃上走 臨終之時一毫凡聖情量不盡 纖塵思念未忘 隨念受生輕重五陰 向驢胎馬腹裏託質 泥犁鑊湯裏煮煠一遍了 從前記持憶想見解智慧 都盧一時失却 依前再爲螻蟻 從頭又作蚊虻 雖是善因而遭惡果 且圖什麽 兄弟只爲貪欲成性 二十五有向脚跟下繫著 無成辦之期

託質; 質 形體 廣雅 質 軀也

二十五有; 由因必得果 因果不亡 故稱爲有 天台四敎儀曰 言二十五有者 四洲 四惡趣 六欲 幷梵天 四禪 四空處 無想 五那含(四洲四趣成八 六欲天幷梵王天成十五 四禪四空處成二十三 無想天及那含天成二十五) 別則二十五有 總則六道生死

 

설사 오리(悟理)한 자가 있어 일지일해(一知一解)가 있더라도 이 오중(悟中)의 곧 입리(入理)하는 문()인 줄 알지 못하고 바로 이르기를 길이() 세리(世利)를 벗어났다 하고선 순산(巡山)하고 방간(傍㵎; 개울을 가까이 함)하면서 상류(上流; 上等)를 경홀(輕忽)하므로 심루(心漏; 마음의 번뇌)가 다하지 못하고 이지(理地)가 밝지 못하게 됨에 이르니 헛되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이룸이 없고 세월만 헛되이 연장(延長; )한다. () 총명(聰明)이 능히 업()을 대적(對敵)하지 못하고 건혜(乾慧)가 고륜(苦輪; 괴로운 윤회)을 면하지 못하나니 가사(假使) 재능이 마명(馬鳴)과 병렬(竝列; )하고 견해가 용수(龍樹)와 제등(齊等; )하더라도 다만 이는 일생(一生)이나 양생(兩生)에 인신(人身)을 잃지 않는다. 근사(根思; 根機思考)가 숙세(宿世; 宿)에 청정(淸淨; )하여 이를 들으매() 곧 이해함이 저() 생공(生公; 道生)과 같더라도 어찌 족히 선망(羨望; )하겠는가. 도와 전부 멀다. 형제와 함께 논실(論實)하고 논허(論虛)하지 않나니 다만 이() 구식(口食)과 신의(身衣)는 모두 이 기현망성(欺賢罔聖; 현성을 欺罔)함이며 장래의 타심(他心; 他心通)의 혜안(慧眼)을 구득(求得)하더라도 이를 관()하매 농혈(膿血)을 먹음과 일반(一般)으로 같나니 모두() 그에게 상환(償還; )함을 써야() 비로소 옳다. 어느 것(阿那箇)이 도과(道果)가 있는가, 자연히 저() 신시(信施)가 오매 받지 않는 자를 초득(招得; 招致하다)하리라.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자만(自謾; 스스로 속임)함을 얻지 않나니 빙릉(氷凌; 얼음) 위를 다님()과 같고 검인(劍刃; 칼날) 위를 달림과 같아야 한다. 임종(臨終)했을 때 일호(一毫; 저본에 一豪로 지었음)의 범성(凡聖)이란 정량(情量; 情識俗念)이 다하지 않고 섬진(纖塵)의 사념(思念)이 없어지지 않으면(未忘) 수념수생(隨念受生)하되 경중(輕重)5()이 여래(驢胎)와 마복(馬腹) 속을 향해 탁질(託質)하고 니리(泥犂)의 확탕 속에서 1(; . ) 자잡(煮煠; 끓이고 데치다)해 마치면 종전(從前)에 기지(記持)했던 억상(憶想)ㆍ견해ㆍ지혜를 도로(都盧; 全部) 일시에 잃어버리고 의전(依前)히 다시 누의(螻蟻; 땅강아지와 개미)가 되고 처음으로 좇아(從頭) 또 문맹(蚊虻; 모기와 등에)이 되나니 비록 이 선인(善因)이라도 악과(惡果)를 만나거늘 또 무엇을 도모하리오(且圖什麽). 형제가 다만 탐욕이 성품(性品)을 이루기 때문에 이십오유(二十五有)를 각근(脚跟; 발꿈치) 아래를 향해 묶고는(繫著) 성판(成辦; 완성. 成功)할 기약이 없다.

託質; ()은 형체. 광아 질() ().

二十五有; 인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과를 얻으며 인과가 망하지 않는지라 고로 호칭하여 유()라 함. 천태사교의에 가로되 말한 25유란 것은 4()4악취(惡趣)6() 아울러 범천ㆍ4()4공처(空處)ㆍ무상(無想)5나함(那含)이다(44취가 8을 이루고 6욕천과 아울러 범왕천이 15를 이루고 44공처가 23을 이루고 무상천 및 나함천이 25를 이룸). ()은 곧 25()며 총()은 곧 육도생사(六道生死).

 

祖師觀此土衆生有大乘根性 唯傳心印指示迷情 得之者卽不揀凡之與聖愚之與智 且多虛不如少實 大丈夫兒如今直下便休歇去 頓息萬緣越生死流逈出常格 靈光獨照物累不拘 巍巍堂堂三界獨步 何必身長丈六紫磨金輝 項佩圓光 廣長舌相 若以色見我是行邪道 設有眷屬莊嚴不求自得 山河大地不礙眼光 得大總持一聞千悟 都不希求一餐之直 汝等諸人儻不如是 祖師來至此土 非常有損有益 有益者百千人中撈摝一箇半箇堪爲法器 有損者如前已明 從他依三乘敎法修行 不妨却得四果三賢有進修之分 所以先德云 了卽業障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物累; 外物給予人的拖累

 

조사(祖師; 달마)가 차토(此土) 중생이 대승근성(大乘根性)이 있음을 보았고() 오직 심인(心印)을 전하며 미정(迷情; 미혹한 有情)에게 지시했다. 이를 얻는 자는 곧 범부와 성인, 우인(愚人)과 지자(智者)를 가리지() 않지만 다만() 다허(多虛)가 소실(少實)만 같지 못하다. 대장부아(大丈夫兒)는 여금에 직하(直下)에 바로 휴헐하여(休歇去) 만연(萬緣)을 돈식(頓息)하고 생사의 흐름을 초월하고 상격(常格)을 멀리 벗어나나니(逈出) 영광(靈光)이 독조(獨照)하여 물루(物累)에 구속되지 않으며 외외당당(巍巍堂堂)하여 3()를 독보(獨步)하거늘 신장(身長)이 장륙(丈六)이며 자마금(紫磨金)으로 빛내며 목에 원광(圓光)을 차며() 광장설상(廣長舌相)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면 이는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했다. 설사 권속(眷屬)의 장엄(莊嚴)이 있더라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으며 산하대지가 안광(眼光)을 장애하지 못하며 대총지(大總持)를 얻어 일문천오(一聞千悟)하며 도무지 일찬(一餐; 一頓飯)의 가치()를 희구(希求)하지 않는다. 너희 등 제인이 만일() 이와 같지 못하다면 조사가 차토(此土)에 내지(來至)하매 비상(非常)으로 유손유익(有損有益)하다. 유익(有益)한 것은 백천(百千)의 사람 중에 일개반개(一箇半箇)를 노록(撈摝; 건지다)하여 가히() 법기(法器)로 삼음이며 유손(有損)한 것은 앞에 이미 밝힌 것과 같다. 그로 좇아 3()의 교법(敎法)에 의해 수행하여 도리어 4()3()을 얻고 진수(進修; 精進과 수행)할 분한이 있음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소이로 선덕(先德; 永嘉玄覺)이 이르되 깨치면 곧 업장이 본래 공()이지만 깨치지 못하면 도리어 꼭 묵은 빛(宿債)을 갚아야 한다.

物累; 외물(外物)이 사람에게 급여(給予)하는 타루(拖累; 를 끌어당기다).

 

池州南泉普願和尙上堂曰 諸子老僧十八上解作活計 有解作活計者出來 共爾商量 是住山人始得 良久顧視大衆合掌曰 珍重無事各自修行 大衆不去 師曰 如聖果大可畏 勿量大人尙不奈何 我且不是渠 渠且不是我 渠爭奈我何 他經論家說法身爲極則 喚作理盡三昧義盡三昧 似老僧向前被人敎返本還源去 幾恁麽會禍事 兄弟近日禪師太多 覓箇癡鈍人不可得 不道全無於中還少 若有出來共爾商量 如空劫時有修行人否 有無作麽不道 阿爾尋常巧脣薄舌 及乎問著總皆不道 何不出來 莫論佛出世時事 兄弟今時人擔佛著肩上行 聞老僧言心不是佛智不是道 便聚頭擬推老僧 無爾推處 爾若束得虛空作棒打得老僧著一任推

十八上; 十八歲也 上 置數詞後表年齡 五家正宗贊四芭蕉淸 師諱慧淸 嗣南塔 新羅人也 師謂衆曰 十八上到仰山 見南塔

聖果; 菩提涅槃也 是依聖道所得 故曰聖果 此果爲眞正 故曰聖果

勿量大人; 猶沒量大人 超越尋常見識氣度 而難以一般尺寸度量之大器人物

 

지주(池州) 남천보원(南泉普願) 화상이 상당하여 가로되 제자(諸子; 男子)여 노승은 십팔상(十八上)에 활계(活計)를 지을 줄 알았나니 활계를 지을 줄 아는 자가 있거든 나오너라. 너와 함께 상량(商量)하겠다. 이는 주산인(住山人)이라야 비로소 옳다. 양구(良久)하고 대중을 돌아보며 합장(合掌)하고 가로되 진중(珍重)하라, 무사(無事)하니 각자 수행하라. 대중이 가지 않자 사왈(師曰) 예컨대() 성과(聖果)는 매우 가외(大可畏)니 물량대인(勿量大人)도 오히려 어찌하지 못한다(不奈何). 나는 또() 이 거()가 아니지만 거()는 또 이 내가 아니니 거()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 경론가(經論家)가 법신이 극칙(極則)이 된다고 설하면서 불러 짓기를 이진삼매(理盡三昧)며 의진삼매(義盡三昧)라 한다. 노승이 향전(向前; 以前)에 사람이 반본환원(返本還源)하게 함을 입음과 흡사하나니 거의() 이렇게(恁麽) 이회(理會)한다면 화사(禍事). 형제여, 근일(近日) 선사가 매우 많나니(太多) () 치둔인(癡鈍人)을 찾으면 불가득이다. 전무(全無)하다고 말하진 않으나 어중(於中)에 도리어 적다. 만약 있다면 나오너라, ()와 함께 상량(商量)하겠다. 예컨대() 공겁(空劫)일 때 수행인이 있느냐. 유무(有無)를 어찌하여(作麽) 말하지 못하느냐. 너희(阿爾; 前綴이니 接頭辭)가 심상(尋常)에 교순박설(巧脣薄舌)이더니 문착(問著)함에 이르러선(及乎) 모두 다(總皆) 말하지 못하는구나. 왜 나오지 않느냐. 불출세(佛出世) 때의 일을 논하지 않나니 형제여 금시인(今時人)이 부처를 지고() 어깨 위에 두고() 다니다가 노승이 말하되 심()은 이 불이 아니며 지()는 이 도가 아니라 함을 들으면 바로 취두(聚頭)하여 노승을 밀려고(擬推) 하지만 너희가 밀 곳이 없다. 너희가 만약 허공을 묶어(束得) ()을 만들어 노승을 때린다면(打得) 미는 대로 일임하겠다.

十八上; 18세임. ()은 수사(數詞) 뒤에 두어서 연령을 표시함. 오가정종찬4 파초청. 스님의 휘()는 혜청이며 남탑을 이었고 신라 사람이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18()에 앙산에 이르러 남탑을 참견했다.

聖果; 보리열반임. 이는 성도(聖道)에 의해 얻는 바라 고로 가로되 성과임. 이 과가 진정(眞正)이 되므로 고로 가로되 성과임.

勿量大人; 몰량대인(沒量大人)과 같음. 심상(尋常)의 견식과 기도(氣度)를 초월하는지라 일반의 척촌(尺寸)으로 도량(度量)하기 어려운 큰 그릇의 인물.

 

時有僧問 從上祖師至江西大師 皆云 卽心是佛平常心是道 今和尙云 心不是佛智不是道 學人悉生疑惑 請和尙慈悲指示 師乃抗聲答曰 爾若是佛休 更涉疑却問 老僧何處有恁麽傍家疑佛來 老僧且不是佛亦不曾見祖師 爾恁麽道自覓祖師去 曰和尙恁麽道 敎學人如何扶持得 師曰 爾急手托虛空著 曰虛空無動相云何托 師曰 爾言無動相早是動也 虛空何解道我無動相 此皆是爾情見 曰虛空無動相尙是情見 前遣某甲托何物 師曰 爾旣知不應言托 擬何處扶持他 曰卽心是佛旣不得 是心作佛否 師曰 是心是佛是心作佛情計所有斯皆想成 佛是智人心是采集主 皆對物時他便妙用 大德莫認心認佛 設認得是境 被他喚作所知愚 故江西大師云 不是心不是佛不是物 且敎爾後人恁麽行履 今時學人披箇衣服 傍家疑恁麽閑事還得否 曰旣不是心不是佛不是物 和尙今却云心不是佛智不是道 未審若何 師曰 爾不認心一有不字是佛智不是道 老僧勿一作忽得心來復何處著 曰總旣不得何異太虛 師曰 旣不是物比什麽太虛 又敎誰異不異 曰不可無他不是心不是佛不是物 師曰 爾若認遮箇還成心佛去也 曰請和尙說 師曰 老僧自不知 曰何故不知 師曰 敎我作麽生說 曰可不許學人會道 師曰 會什麽道又作麽生會 曰某甲不知 師曰 不知却好 若取老僧語喚作依通人 設見彌勒出世 還被他燖却頭尾 曰使後人如何 師曰 爾且自看莫憂他後人 曰前不許某甲會道 今復令某甲自看 未審如何 師曰 冥會妙會許爾 爾作麽生會 曰如何是妙會 師曰 還欲學老僧語 縱說是老僧說 大德如何 曰某甲若自會 卽不須和尙乞慈悲指示 師曰 不可指東指西賺人 爾當哆哆和和時 作麽不來問老僧 今時巧黠始道我不會圖什麽 爾若此生出頭來道 我出家作禪師 如未出家時曾作什麽來 且說看共爾商量 曰恁麽時某甲不知 師曰 旣不知卽今認得可可是耶 曰認得旣不是不認是否 師曰 認不認是什麽語話 曰到遮裏某甲轉不會也 師曰 爾若不會我更不會 曰某甲是學人卽不會 和尙是善知識合會 師曰 遮漢向爾道不會 誰論善知識 莫巧黠

急手; 一急速 二快手 動作敏捷

依通; 通力之一種 依憑藥力咒術等而現神通之作用 故云依通 所謂神仙之類是也 五通之一 宗鏡錄十五 何謂依通 約法而知 緣身而用 乘符往來 藥餌靈變 此謂依通

可可; 恰好 正巧

 

때에 어떤 중이 묻되 종상(從上)의 조사, 강서대사(江西大師; 馬祖道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르되 곧 심()이 이 불()이며 평상심이 이 도다. 여금에 화상은 이르되 심()이 이 불이 아니며 지()는 이 도가 아니다. 학인이 모두() 의혹을 내니 청컨대 화상이 자비로 지시하십시오. 스님이 이에 항성(抗聲)으로 답왈(答曰) 네가 만약 이 불이라면 쉴 것이지 다시 섭의(涉疑; 의심에 건너다)하여 도리어 묻느냐. 노승이 어느 곳에서 이렇게 방가(傍家; 옆집)로 의불(疑佛)하여 옴이 있으리오. 노승은 또() 이 불이 아니며 또한 일찍이 조사를 보지 못했다. 네가 이렇게 말함은 스스로 조사를 찾음이다. 가로되 화상이 이렇게(恁麽) 말하심은 학인으로 하여금 어떻게(如何) 부지(扶持)함을 얻게 하겠습니까. 사왈 네가 급수(急手)로 허공을 밀어라(). 가로되 허공은 동상(動相)이 없거늘 어떻게 밉니까. 사왈 네가 말한 동상이 없다 함이 벌써 이 동()이다. 허공이, 나는 동상이 없다고 어찌 말할 줄 알겠는가. 이것은 모두 이 너의 정견(情見)이다. 가로되 허공이 동상이 없음도 오히려 이 정견이라면 앞에 모갑을 보내어 무슨 물건을 밀게() 했습니까. 사왈 네가 응당 밂()을 말하지 않아야 함을 이미 알거늘 어느 곳에서 그것을 부지(扶持)하려고 하느냐. 가로되 곧 심()이 이 불()임을 이미 얻지 못한다면 이 심이 작불(作佛)합니까. 사왈 이 심이 이 불이라든지 이 심이 작불함다 함은 정계(情計; 心情計度)의 소유인지라 이는 모두 생각()으로 이룸이다. ()은 이 지인(智人)이며 심()은 이 채집(采集)하는 주체(主體; )니 모두 대물(對物)할 때 그것이 바로 묘용(妙用)한다. 대덕(大德)은 인심인불(認心認佛)하지 말지니 설사 인득(認得)하더라도 이는 경계(境界; )며 남이 소지우(所知愚)라고 불러 지음을 입는다. 고로 강서대사(江西大師)가 이르되 이 심이 아니며 이 불이 아니며 이 물()이 아니라 했음은 다만() 너희 후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행리(行履)하게 했음이다. 금시의 학인이 저() 의복을 입고 방가(傍家)에서 이러한 한사(閑事)를 의심하려 하면 도리어 얻겠는가. 가로되 이미 이 심이 아니며 이 불이 아니며 이 물이 아니거늘 화상이 여금에 도리어 이르되 심은 이 불이 아니며 지()는 이 도가 아니라 하심은 미심하오니 어떻습니까(若何). 사왈 네가 심()一本不字가 있다이 이 불이며 지가 이 도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노승이 심을 가지고 오지 않으매()一本로 지었다다시 어느 곳에 두겠는가(). 가로되 모두() 이미 얻지 못한다면 어찌 태허(太虛)와 다르겠습니까. 사왈 이미 이 물()이 아니거늘 무슨 태허에 비교하겠는가. 또 누구로 하여금 다르거나 다르지 않게 하겠는가. 가로되 저() 불시심(不是心)ㆍ불시불(不是佛)ㆍ불시물(不是物)이 없다고 함은 옳지 못합니다. 사왈 네가 만약 이것(遮箇)을 인정한다면 도리어 심()ㆍ불()을 이룬다. 가로되 화상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 노승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가로되 무슨 연고로 알지 못합니까. 사왈 나로 하여금 어떻게(作麽生) 설하게 하겠는가. 가로되 가히 학인이 도를 앎()을 불허합니까. 사왈 무슨(什麽) 도를 알며() 또 어떻게 아느냐. 가로되 모갑이 알지() 못합니다. 사왈 알지 못함이 도리어 좋다(). 만약 노승의 말을 취한다면 의통인(依通)이라고 불러 짓나니 설사 미륵이 출세함을 보더라도 도리어 그가 두미(頭尾)를 삶아버림(燖却)을 입으리라. 가로되 후인으로 하여금 어떻게(如何) 하라 하십니까. 사왈 네가 다만() 스스로 볼 것이며 저 후인을 근심하지 말아라. 가로되 앞에서 모갑이 도를 앎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이제 다시 모갑으로 하여금 스스로 보라 하시니 미심합니다, 어떻습니까. 사왈 명회(冥會; 默契. 暗合)하고 묘회(妙會)함을 너에게 허락하거니와 네가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가로되 무엇이 이 묘회(妙會)입니까. 사왈 도리어 노승의 말을 배우려고 한다면 비록() 설하더라도 이는 노승의 말이니 대덕은 어떠한가. 가로되 모갑이 만약 스스로 안다면() 곧 화상에게 자비로 지시하심을 구걸함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왈 지동지서(指東指西)하며 사람을 속임()이 옳지 않나니 네가 치치화화(哆哆和和)할 때를 당해 어찌하여(作麽) 노승에게 내문(來問)하지 못하고 금시(今時)에 교힐(巧黠; 狡猾)하자 비로소 말하되 내가 알지 못한다 하니 무엇을 도모하느냐. 네가 만약 차생(此生)에 출두(出頭)하여 와서 말하되 나는 출가하여 선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예컨대() 출가하지 않은 때 일찍이 무엇이 되어(作什麽) 왔느냐. 다만() 설해 보아라, 너와 함께 상량(商量)하겠다. 가로되 이러한 때(恁麽時) 모갑이 알지 못합니다. 사왈 이미 알지 못하니 즉금 가가(可可)를 인득(認得)함은 옳으냐(是耶). 가로되 인득함이 이미 옳지 못하니 인정하지 않음은 옳습니까. 사왈 인()과 불인(不認)은 이 무슨 어화(語話). 가로되 이 속에 이르러선 모갑이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네가 만약 알지 못한다면 나도 다시 알지 못한다. 가로되 모갑은 이 학인이므로 곧 알지 못하지만 화상은 이 선지식이므로 합당히 아실 것입니다. 사왈 저한(遮漢; 이 자), 너를 향해 말하되 알지 못한다 했지 누가 선지식을 논했느냐. 교힐(巧黠)하지 말아라.

急手; 1. 급속(急速). 2. 쾌수(快手)니 동작이 민첩함.

依通; 통력의 일종이니 약력(藥力)이나 주술 등에 의빙하여 신통의 작용을 나타내므로 고로 이르되 의통이니 이른 바 신선의 무리가 이것이며 5통의 하나임. 종경록15. 무엇을 일러 의통(依通)이라 하는가, 법에 의거(依據; )하여 앎과 몸을 반연하여 씀과 부적을 타고 왕래함과 약과 음식으로 신령하게 변화함이니 이를 일러 의통(依通)이라 한다.

可可; 흡호(恰好). 정교(正巧).

 

看他江西老宿在日 有一學士問 如水無筋骨能勝萬斛舟此理如何 老宿云 遮裏無水亦無舟 論什麽筋骨 兄弟他學士便休去可不省力 所以數數向道佛不會道 我自修行用知作麽 曰如何修行 師曰 不可思量得向人道 恁麽修恁麽行大難 曰還許學人修行否 師曰 老僧不可障得爾 曰某甲如何修行 師曰 要行卽行不可專尋他背 曰若不因善知識指示無以得會 如和尙每言 修行須解始得 若不解卽落他因果無自由分 未審如何修行卽免落他因果 師曰 更不要商量 若論修行何處不去得 曰如何去得 師曰 爾不可逐背尋得 曰和尙未說 敎某甲作麽生尋 師曰 縱說何處覓去 且如爾從旦至夜 忽東行西行 爾尙不商量道去得不得 別人不可知得爾 曰當東行西行總不思量是否 師曰 恁麽時誰道是不是 曰和尙每言 我於一切處而無所行 他拘我不得 喚作遍行三昧普現色身 莫是此理否 師曰 若論修行何處不去 不說拘與不拘 亦不說三昧 曰何異有法得菩提道 師曰 不論異不異 曰和尙所說修行 迢然與大乘別 未審如何 師曰 不管他別不別 兼不曾學來 若論看敎自有經論座主 他敎家實大可畏 爾且不如聽去好 曰究竟令學人作麽生會 師曰 如汝所問元只在因緣邊 看爾且不奈何 緣是認得六門頭事 爾但會佛那邊却來 我與爾商量 兄弟莫恁麽尋逐不住恁麽 不取古人語行菩薩行 唯一人行 天魔波旬領諸眷屬 常隨菩薩後覓心行起處便擬撲倒 如是經無量劫覓一念異處不得 方與眷屬禮辭讚歎供養 猶是進修位中下之人 便不奈何 況絕功用處 如文殊普賢 更不話他 兄弟作麽生道行是無 覓一日行底人不可得 今時傍家從年至歲 只是覓究竟作麽生 空弄脣舌生解 曰當恁麽時無佛名無衆生名 使某甲作麽圖度 師曰 爾言無佛名無衆生名 早是圖度了也 亦是記他言語 曰若如是悉屬佛出世時事 了不可不言 師曰 爾作麽生言 曰設使言言亦不及 師曰 若道言不及是及語 爾虛恁麽尋逐 誰與爾爲境 曰旣無爲境者 誰是那邊人 師曰 爾若不引敎來卽何處論佛 旣不論佛老僧與誰論遮邊那邊 曰果雖不住道而道能爲因如何 師曰 是他古人 如今不可不奉戒 我不是渠渠不是我 作得伊如狸奴白牯行履却快活 爾若一念異卽難爲修行 曰云何一念異難爲修行 師曰 才一念異便有勝劣二根 不是情見隨他因果 更有什麽自由分 曰每聞和尙說報化非眞佛亦非說法者 未審如何 師曰 緣生故非 曰報化旣非眞佛 法身是眞佛否 師曰 早是應身也 曰若恁麽卽法身亦非眞佛 師曰 法身是眞非眞 老僧無舌不解道 爾敎我道卽得 曰離三身外何法是眞佛 師曰 遮漢共八九十老人相罵 向爾道了也 更問什麽離不離 擬把楔釘他虛空 曰伏承華嚴經是法身佛說如何 師曰 爾適來道什麽語 其僧重問 師顧視歎曰 若是法身說 爾向什麽處聽 曰某甲不會 師曰 大難大難 好去珍重

 

보건대 저 강서노숙(江西老宿; 마조)이 재일(在日)에 한 학사(學士)가 있어 묻되 예컨대() 물이 근골(筋骨)이 없지만 능히 만곡(萬斛; 만 섬)의 배를 이긴다(; 저본에 으로 지었음) 했는데 이 이치가 무엇입니까. 노숙이 이르되 이 속(遮裏)에 물도 없고 또한 배도 없거늘 무슨 근골을 논하느냐. 형제여, 저 학사가 바로 쉬었으니(休去) 가히 생력(省力)함이 아니겠는가. 소이로 자주자주(數數) 향해 말하되 부처는 도를 알지 못한다 했다. 내가 스스로 수행하거늘 지()를 써서 무엇하겠는가. 가로되 어떻게 수행합니까. 사왈(師曰) 가히 사량(思量)하여 사람을 향해 말함을 얻지 못하나니 이렇게 닦고 이렇게 행함은 매우 어렵다. 가로되 도리어 학인의 수행을 허락합니까. 사왈 노승이 가히 너를 장애하지(障得) 못한다. 가로되 모갑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사왈 행하려면 곧 행할 것이지 오로지 남의 등()을 찾음은 옳지 못하다. 가로되 만약 선지식의 지시를 인하지 않는다면 이회(理會)를 얻을 까닭()이 없습니다. 예컨대() 화상이 매번 말씀하되 수행하여 이해함을 써야() 비로소 옳나니 만약 이해하지 못한다면 곧 저 인과(因果)에 떨어져 자유분(自由分)이 없다 하셨습니다. 미심하오니 어떻게 수행해야 곧 저 인과에 떨어짐을 면하겠습니까. 사왈 상량(商量)함을 다시 요하지 않는다. 만약 수행을 논하자면 어느 곳엔들 가서 얻지 못하겠는가. 가로되 어떻게 가서 얻습니까. 사왈 네가 등을 쫓아(逐背) 심득(尋得)함은 옳지 못하다. 가로되 화상이 설하지 않으시면 모갑으로 하여금 어떻게(作麽生) 찾게 하겠습니까. 사왈 비록 설하더라도 어느 곳으로 찾으러 가겠는가(覓去). 차여(且如) 네가 아침으로 좇아 밤에 이르기까지 홀연히 동행서행(東行西行)하면서 네가 오히려 상량(商量)하여 말하되 감을 얻는다 얻지 못한다 하지 못하거늘 다른 사람이 너를 지득(知得)함은 불가하다. 가로되 동행서행(東行西行)함에 당해서 모두() 사량하지 못함은 옳습니까(是否). 사왈 이러한 때 누가 시()와 불시(不是)를 말하느냐. 가로되 화상이 매번 말씀하되 내가 일체처에서 행하는 바가 없어 남이 나를 구속함을 얻지 못하나니 편행삼매(遍行三昧)ㆍ보현색신(普現色身)으로 불러 짓는다. 이는 이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사왈 만약 수행을 논하자면 어느 곳엔들 가지 못하겠는가. ()와 불구(不拘)를 설하지 않으며 또한 삼매를 설하지 않는다. 가로되 법이 있어 보리도(菩提道)를 얻음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사왈 이()와 불이(不異)를 논하지 않는다. 가로되 화상이 설하는 바 수행은 초연(迢然; 먼 모양)하여 대승(大乘)과 다르다고 하면 미심하오니 어떻습니까. 사왈 저 별()과 불별(不別)에 상관(相管; )하지 않으며 겸해 일찍이 배워 오지 않았다. 만약 간교(看敎)를 논할진대 스스로 경론좌주(經論座主)가 있으며 저 교가(敎家)는 실로 매우 가외(可畏)하나니 네가 다만() 들으러 감의 좋음만 같지 못하다. 가로되 구경(究竟)에 학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이회(理會)하게 합니까. 사왈 네가 물은 바와 같은 것은 원래 다만 인연변(因緣邊)에 있나니 보건대 네가 또 어찌하지 못한다.()은 이, 육문두(六門頭; 六根門)의 일을 인득(認得)함이니 네가 단지 부처의 나변(那邊)을 알고 돌아온다면 내가 너와 상량(商量)하겠다. 형제가 이렇게(恁麽) 심축(尋逐)하지 말고 이러함(恁麽)에 머물지 말고 고인이 말한 보살행을 행하라 한 것을 취하지 말아라. 오직 한 사람이 행했다. 천마파순(天魔波旬)이 모든 권속을 거느리고 늘 보살의 뒤를 따르며 심행(心行)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 바로 박도(撲倒; 때려서 넘어뜨리다)하려 했는데 이와 같이 무량겁을 경과하면서 일념의 이처(異處)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드디어() 권속과 더불어 예사(禮辭)하고 찬탄하고 공양했다. 오히려 이 진수위(進修位)의 중하지인(中下之人)이지만 바로 어찌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공용(功用)이 끊긴 곳이겠는가. 예컨대() 문수보현도 다시 그것을 얘기 하지 못하거늘 형제가 어떻게 행이 이 없음을 말하겠는가. 하루를 행하는 사람을 찾아도 불가득이다. 금시(今時)에 방가(傍家)에서 종년지세(從年至歲)토록 다만 이, 구경(究竟)을 찾으니 어찌하겠는가(作麽生). 헛되이() 순설(脣舌)을 희롱하며 이해를 낸다. 가로되 이러한 때를 당해 불명(佛名)도 없고 중생명(衆生名)도 없으니 모갑으로 하여금 어떻게 도탁(圖度 헤아리다)하게 하십니까. 사왈 네가 말한 불명도 없고 중생명도 없다 한 게 벌써 이 도탁(圖度)한 것이며 역시(亦是) 남의 언어를 기억했음이다. 가로되 만약 이와 같다면 모두() 불출세시(佛出世時)의 일에 속했음이니 마침내() 말하지 않음은 옳지 못합니다. 사왈 네가 어떻게 말하겠는가. 가로되 설사(設使) 말해도 말이 또한 미치지 못합니다. 사왈 만약 말하되 말이 미치지 못한다 하면 이는 미치는 말이다. 네가 헛되이 이렇게 심축(尋逐)하니 누가 너에게 경계가 되어 주었느냐. 가로되 이미 경계가 된 것이 없거늘 누가 이 나변인(那邊人)입니까. 사왈 네가 만약 당겨서 오게 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논하겠는가. 이미 부처를 논하지 않으니 노승이 누구와 더불어 저변나변(遮邊那邊)을 논하겠는가. 가로되 과연 비록 도에 머물지 않더라도 도가 능히 인()이 됨은 어떻습니까. 사왈 이는 저 고인이며 여금엔 봉계(奉戒)하지 않음은 옳지 못하다. 나는 이 거()가 아니고 거()는 이 내가 아니니 그()가 이노백고(狸奴白牯)와 같은 행리(行履)를 작득(作得)해야 도리어 쾌활하다. 네가 만약 일념이라도 다르면 곧 수행하기 어렵다. 가로되 어찌하여 일념이라도 다르면 수행하기 어렵습니까. 사왈 겨우 일념이 다르면 바로 승렬(勝劣) 2()이 있어 이 정견(情見)이 저 인과(因果)를 따름이 아니겠는가. 다시 무슨 자유분(自由分)이 있으리오. 가로되 매번 듣건대 화상이 설하되 보화(報化)는 진불(眞佛)이 아니며 또한 설법하는 자도 아니다(). 미심하오니 어떻습니까. 사왈 연생(緣生)인 고로 비(). 가로되 보화는 이미 진불이 아니라면 법신은 이 진불입니까. 사왈 벌써 이 응신(應身)이다. 가로되 만약 이러하다면 곧 법신도 또한 진불이 아닙니다. 사왈 법신이 이 진()인지 비진()인지 노승은 혀가 없어 말할 줄 알지 못하나니 네가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곧 옳다. 가로되 3()을 여읜() 밖에 어떤 법이 이 진불입니까. 사왈 저한(遮漢; 이 자)이 팔구십 노인과 함께 상매(相罵)하려느냐, 너를 향해 말해 마쳤거늘 다시 무슨 이()와 불리(不離)를 묻느냐. 말뚝을 잡아 저 허공에 못질()하려고 하느냐. 가로되 엎드려 듣건대(伏承) 화엄경은 이 법신불이 설하다 하니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적래(適來) 무슨 말(什麽語)을 말했는가. 그 중이 거듭() 묻자 스님이 돌아보고 탄식하며 가로되 만약 이 법신이 설한다면 네가 어느 곳을 향해 듣느냐. 가로되 모갑이 알지 못합니다. 사왈 매우 어렵다(大難), 매우 어렵다. 잘 가거라(好去). 진중(珍重).

 

趙州從諗和尙上堂云 金佛不度鑪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眞佛內裏坐 菩提涅槃眞如佛性盡是貼體衣服 亦名煩惱 不問卽無煩惱 且實際理什麽處著得 一心不生萬法無咎 汝但究理坐看三二十年 若不會道截取老僧頭去 夢幻空華何勞把捉 心若不異萬法一如 旣不從外得 更拘執作什麽 如羊相似亂拾物安向口裏 老僧見藥山和尙道 有人問著者便敎合却口 老僧亦敎合却口 取我是淨 一似獵狗專欲喫物 佛法在什麽處 遮裏一千人盡是覓作佛漢子 於中覓一箇道人無 若與空王爲弟子 莫敎心病最難醫 未有世間時早有此性 世界壞時此性不壞 從一見老僧後更不是別人 只是一箇主人公 遮箇更用向外覓物作什麽 正恁麽時莫轉頭換腦 若轉頭換腦卽失却去也 時有僧問 承師有言 世界壞時此性不壞 如何是此性 師曰 四大五陰 僧曰 此猶是壞底 如何是此性 師曰 四大五陰法眼云 是一箇兩箇是壞不壞 且作麽生會 試斷看

 

조주(趙州) 종심화상(從諗和尙)이 상당하여 이르되 금불(金佛)은 화로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이불(泥佛)은 물을 건너지 못하나니 진불(眞佛)은 내리(內裏)에 앉았다. 보리ㆍ열반ㆍ진여ㆍ불성은 모두 이 몸에 붙는(貼體) 의복이며 또한 이름이 번뇌니 묻지 않으면 곧 번뇌가 없다. 또 실제(實際)의 이치를 어느 곳에 붙임을 얻겠는가. 일심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때()가 없다. 너희가 단지 구리(究理)하되 삼이십 년 좌간(坐看)하여도 만약 도를 알지() 못한다면 노승의 머리를 절취(截取)해 가거라. 몽환(夢幻)과 공화(空華)를 어찌 노고롭게 파착(把捉)하겠는가.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일여(一如). 이미 밖으로 좇아 얻음이 아니거늘 다시 구집(拘執)하여 무엇 하겠는가. ()과 상사(相似)하여 어지럽게 물건을 거두어() 입속을 향해 둠()과 같다. 노승이 보매 약산화상(藥山和尙)이 말하되 사람이 문착(著者)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입을 닫아버리게 한다. 노승도 또한 입을 닫아버리게 하겠다. ()를 취해 이 정()이라 하면 사냥개가 오로지 끽물(喫物)하려고 함과 일사(一似; 一如)하나니 불법이 어느 곳에 있느냐. 이 속의 1천 사람은 모두 이 작불(作佛)을 찾는 한자(漢子; 는 조사)니 가운데에 1개의 도인이 없다. 만약 공왕(空王)에게 제자가 되어 주려면 심병(心病)을 가장 치료하기() 어렵게 하지 말아라. 세간이 있지 않았을 때 벌써 차성(此性)이 있었나니 세계가 무너질 때 차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노승을 일견(一見)한 후로 좇아 다시는 이 별인(別人)이 아니니 다만 이는 일개의 주인공이다. 저개(遮箇)를 다시 밖을 향해 멱물(覓物)함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때 전두환뇌(轉頭換腦)하지 말지니 만약 전두환뇌하면 곧 잃어버릴 것이다. 때에 어떤 쭝이 묻되 듣건대() 스님이 말씀이 있어 세계가 무너질 때 차성(此性)은 무너지지 않는다. 무엇이 이 차성입니까. 사왈(師曰) 4()5()이다. 승왈(僧曰) 이것은 오히려 이 무너지는 것(壞底)입니다. 무엇이 이 차성입니까. 사왈 4대와 5음이다法眼云 이는 一箇인가 兩箇인가. 인가 不壞인가. 다만 어떻게 이회하느냐, 시험 삼아 판단해 보아라.

 

鎭州臨濟義玄和尙示衆曰 今時學人且要明取自己眞正見解 若得自己見解 卽不被生死染去住自由 不要求他殊勝殊勝自備 如今道流且要不滯於惑 要用便用 如今不得病在何處 病在不自信處 自信不及卽便忙忙徇一切境 脫大德若能歇得念念馳求心 便與祖師不別 汝欲識祖師麽 卽汝目前聽法底是 學人信不及便向外馳求 得者只是文字學 與他祖師大遠在 莫錯大德 此時不遇萬劫千生輪迴三界 徇好惡境向驢牛肚裏去也 如今諸人與古聖何別 汝且欠少什麽 六道神光未曾間歇 若能如此見 是一生無事人 一念淨光是汝屋裏法身佛 一念無分別光是汝報身佛 一念無差別光是汝化身佛 此三身卽是今日目前聽法底人 爲不向外求有此三種功用 據敎三種名爲極則 約山僧道三種是名言 故云身依義而立 土據體而論 法性身法性土明知是光影 大德 且要識取弄光影人 是諸佛本源 是一切道流歸舍處 大德 四大身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 是汝目前歷歷孤明 勿形段者解說法聽法 所以山僧向汝道 五蘊身田內有無位眞人 堂堂顯露無絲髮許間隔 何不識取 心法無形通貫十方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手執捉 在足運奔 心若不在隨處解脫 山僧見處坐斷報化佛頂 十地滿心猶如客作兒 等妙二覺如擔枷帶鎖 羅漢辟支猶如糞土 菩提涅槃繫驢馬橛 何以如斯 蓋爲不達三祇劫空有此障隔 若是眞道流盡不如此 如今略爲諸人大約話破 自看遠近 時光可惜各自努力 珍重

法性身; 三藏法數一 二佛身[出涅槃經] 一法性身 法性卽法身也 謂此法性之身 遍滿十方 無量無邊 色像端正 相好莊嚴 以無量光明無量音聲 能度十方法身菩薩 是名法性身 二生死身 謂佛以方便力 現生現滅 示初出家乃至成佛得道 一切惡法盡斷 一切善法悉皆成就 次第說法 度諸衆生 是名生死身

法性土; 三藏法數五 三佛土[出華嚴經疏] 一法性土 法性土者 卽法身如來所依之土 乃理土也 二受用土 受用土者 卽報身如來受用之土也 三變化土 變化土者 卽應身如來變化之土也

光影; 喩指虛幻不實之物 亦常指禪家接人之方便法門 方便法門非眞實大法 故稱

十地滿心; 十地 大智滿足 故云滿心

客作兒; 兒 後綴 本義爲傭夫 禪家常用作斥責之語 含有不見自心佛性 盲目隨逐外物之義 亦作客作漢

擔枷帶鎖; 比喩束縛和限制 鎖 枷 古代犯人刑具

 

진주(鎭州) 임제의현(臨濟義玄) 화상이 시중(示衆)해 가로되 금시의 학인이 다만 자기의 진정(眞正)한 견해를 명취(明取)함을 요하나니 만약 자기의 견해를 얻는다면 곧 생사에 물듦을 입지 않고 거주(去住)에 자유(自由)이리라. 저 수승(殊勝)을 요구하지 않아도 수승을 스스로 갖추었다. 여금에 도류(道流)가 다만 혹()에 막히지 않음을 요한다면 쓰려고 하매 바로 써야 하거늘 여금에 얻지 못함은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병이 자신(自信)하지 못하는 곳에 있다. 자신이 미치지 못하면 곧 바로 바쁘고 바쁘게 일체경(一切境)을 따른다(). 혹시(或是; ) 대덕(大德)이 만약 능히 생각생각 치구(馳求)하는 마음을 헐득(歇得)한다면 바로 조사와 다르지 않다. 너희가 조사를 알고자 하느냐. 곧 너희의 목전에 청법하는 것(聽法底)이 이것이다. 학인이 믿음이 미치지 못하여 바로 밖을 향해 치구(馳求)하면서 얻는 것은 다만 이 문자학(文字學)이라 저 조사와 매우 머나니(大遠在; 는 조사) 착각(錯覺; )하지 말아라 대덕이여. 차시(此時)에 만나지 못하면 만겁천생(萬劫千生)토록 3계에 윤회하나니 호오경(好惡境)을 따라() 나귀나 소의 뱃속을 향해 간다. 여금에 제인(諸人)이 고성(古聖)과 무엇이 다르며(何別) 너희가 또 흠소(欠少)한 게 무엇인가. 6()의 신광(神光)이 일찍이 간헐(間歇)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이 일생에 무사인(無事人)이다. 일념의 정광(淨光)은 이 너희의 옥리(屋裏)의 법신불(法身佛)이며 일념의 무분별광(無分別光)은 이 너희의 보신불(報身佛)이며 일념의 무차별광(無差別光)은 이 너희의 화신불(化身佛)이다. 3()은 즉시(卽是) 금일 목전에 청법(聽法)하는 사람이다. 밖을 향해 구하지 않기 때문에() 3종의 공용(功用)이 있나니 교()에 의거하자면 3종을 이름하여 극칙(極則)이며 산승의 말을 대약(大約)하면 이는 명언(名言; 名字와 언어)이다. 고로 이르되 신()은 의()에 의해 성립하고 토()는 체()에 의거하여 논한다 하노니 법성신(法性身)과 법성토(法性土), 이 광영(光影)임을 환히 안다(明知). 대덕이여, 다만 광영을 희롱하는 사람을 식취(識取)하고자 한다면 이 제불의 본원(本源)이며 이 일체 도류(道流)가 귀사(歸舍; 歸家)하는 곳이다. 대덕이여, 4대의 몸이 설법청법(說法聽法)할 줄 알지 못하고 허공이 설법청법할 줄 알지 못하고 이 너희 목전에 역력(歷歷)히 고명(孤明)하여 형단(形段)이 없는() 것이 설법청법할 줄 안다. 소이로 산승이 너희를 향해 말하되 5()의 신전(身田) 안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어 당당(堂堂)히 현로(顯露)하여 사발만큼(絲髮許)의 간격(間隔)도 없거늘 왜 식취(識取)하지 않느냐. 심법(心法)은 무형(無形)이며 시방을 통관(通貫)하나니 눈에 있으면 가로되 견()이며 귀에 있으면 가로되 문()이며 손에 있으면 집착(執捉)하고 발에 있으면 운분(運奔)한다. ()이 만약 있지 않으면(不在) 곳을 따라 해탈한다. 산승의 견처는 보화불정(報化佛頂)을 좌단(坐斷)하나니 십지만심(十地滿心)은 마치 객작아(客作兒)와 같고 등묘이각(等妙二覺)은 담가대쇄(擔枷帶鎖)와 같고 라한(羅漢)과 벽지(辟支)는 마치 분토(糞土)와 같고 보리와 열반은 여마(驢馬)를 묶는 말뚝이다. 무엇 때문에(何以) 이와 같은가, 대개 삼기겁(三祇劫)의 공()을 통달하지 못해 이 장격(障隔)이 있다. 만약 이 참다운 도류(道流)라면 모두 이와 같지 않으리라. 여금에 간략히 제인을 위해 대약(大約)하여 화파(話破; 說破)했나니 스스로 원근(遠近)을 보아라. 시광(時光)이 가석(可惜)하니 각자 노력하라. 진중(珍重).

法性身; 삼장법수1. 2불신(佛身) [出涅槃經] 1. 법성신(法性身) 법성은 곧 법신이다. 이르자면 이 법성의 몸이 시방에 두루 충만해 무량무변하나니 색상이 단정하고 상호가 장엄하며 무량한 광명과 무량한 음성으로 능히 시방의 법신보살을 제도하나니 이 이름이 법성신임. 2. 생사신(生死身) 이르자면 불타가 방편의 힘으로 탄생을 나타내고 멸도를 나타냄이니 처음 출가와 내지 성불과 득도를 보이며 일체의 악법을 다 끊고 일체의 선법을 모두 다 성취하여 차례로 설법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함이니 이 이름이 생사신임.

法性土; 삼장법수5. 3불토 [出華嚴經疏] 1. 법성토(法性土) 법성토란 것은 곧 법신여래가 의지하는 바의 토니 곧 이토(理土). 2. 수용토(受用土) 수용토란 것은 곧 보신여래가 수용하는 토임. 3. 변화토(變化土) 변화토란 것은 곧 응신여래가 변화한 토임.

光影; 허환하여 실답지 못한 사물을 비유로 가리킴. 또한 늘 선가에서 접인(接人)하는 방편법문을 가리킴. 방편법문은 진실한 대법이 아니므로 고로 일컬음.

十地滿心; 십지(十地)니 대지(大智)를 만족한지라 고로 이르되 만심(滿心).

客作兒; ()는 후철(後綴). 본래 뜻은 용부(傭夫; 고용살이 하는 남자)가 되지만 선가에선 척책(斥責; 責罵)하는 말로 상용함. 자심의 불성을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외물을 따라 쫓아감의 뜻을 함유했음. 또 객작한으로 지음.

擔枷帶鎖; 속박과 한제(限制; 제한)에 비유함. (; )와 쇄(; 쇠사슬. 수갑)는 고대 범인의 형구(刑具).

 

玄沙宗一師備大師上堂曰 太虛日輪是一切人成立 太虛見在 諸人作麽生 滿目覷不見 滿耳聽不聞 此兩處不省得便是𥋙睡漢 若明徹得坐却凡聖 坐却三界夢幻身心 無一物如針鋒許爲緣爲對 直饒諸佛出來作無限神通變現 設如許多敎網未曾措著一分毫 唯助初學誠信之門 還會麽 水鳥樹林却解提綱 他甚端的自是少人聽 非是小事 天魔外道是孤恩負義 天人六趣是自欺自誑 如今沙門不薦此事 翻成弄影漢 生死海裏浮沈幾時休息去 自家幸有此廣大門風不能紹繼得 更向五蘊身田裏作主宰 還夢見麽 如許多田地敎誰作主宰 大地載不起 虛空包不盡 豈是小事 若要徹卽今遮裏便明徹去 不敎仁者取一法如微塵大 不敎仁者捨一法如毫髮許 還會麽

 

현사(玄沙) 종일(宗一) 사비대사(師備大師)가 상당하여 가로되 태허(太虛)와 일륜(日輪)은 이 일체인이 성립했으니 태허가 현재(見在)한다. 제인(諸人)은 어떠한가. 눈에 가득하지만 엿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고 귀에 가득하지만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하나니 이 양처(兩處)를 성득(省得; 성찰함을 얻음)하지 못하면 바로 이 압수한(𥋙睡漢; 자는 자. 조는 자)이다. 만약 명철(明徹)함을 얻으면 범성(凡聖)을 좌각(坐却)하고 3계의 몽환(夢幻)의 신심(身心)을 좌각하여 침봉만큼(針鋒許)과 같은 연()이 되고 대()가 될 일물(一物)이 없다. 직요(直饒; 가령) 제불이 출래(出來)하여 무한한 신통과 변현(變現)을 짓거나 설사 허다한 교망(敎網) 같은 것도 일찍이 일분호(一分毫; 저본에 一分豪로 지었음)도 조착(措著)하지 못한다. 오직 초학(初學)을 도우는 성신지문(誠信之門)이니 도리어 아느냐. 수조(水鳥)와 수림(樹林)이 도리어 제강(提綱)할 줄 아나니() 그것이 심히 단적(端的)하지만 스스로 이 적은 사람이 들으니 이 소사(小事)가 아니다. 천마(天魔)와 외도는 이 고은부의(孤恩負義; 은혜를 저버리고 의를 등지다)하고 천ㆍ인 6()는 이 자기자광(自欺自誑)한다. 여금의 사문이 차사(此事)를 불천(不薦; 領會하지 못함)하여 도리어 농영한(弄影漢)을 이루며 생사해 속에서 부침(浮沈)하니 어느 때에 휴식하겠는가(休息去). 자가(自家)가 다행히 이 광대한 문풍(門風)이 있지만 능히 소계(紹繼)함을 얻지 못하고 다시 5()의 신전(身田) 속을 향해 주재(主宰)를 지으니 도리어 꿈에라도 보느냐. 예컨대() 허다한 전지(田地)에 누구로 하여금 주재(主宰)를 짓게 해야 하는가. 대지(大地)가 실어 일으키지 못하고 허공이 싸도() 다하지 못하니 어찌 이 소사(小事)이겠는가. 만약 철저함을 요하거든 즉금 저리(遮裏)에서 바로 명철(明徹)하여 가거라. 인자(仁者)로 하여금 미진의 크기와 같은 1법도 취하게 하지 않으며 인자로 하여금 호발만큼(毫髮許; 저본에 豪髮許로 지었음)과 같은 1법도 버리게 하지 않나니 도리어 아느냐.

 

時有僧問 從上宗旨如何 師默然 僧再問 師乃叱之 僧問 從何方便門令學人得入 師曰 入是方便 僧問 初心人來師如何指示 師曰 什麽處得初心來 僧問 學人創入叢林乞師提接 師以杖指之 僧曰 學人不會 師曰 我恁麽爲汝却成抑屈於人 如今若的自肯當人分上 不論初學入叢林 可謂共諸人久踐 與過去諸佛無所乏少 如大海水一切魚龍初生至老吞吐受用悉皆平等 所以道 初發心者與古佛齊肩 奈何汝無始積劫動諸妄情結成煩惱 如重病人心狂熱悶 顚倒亂見都無實事 如今所覩一切境界皆亦如是 對汝諸根盡成顚倒 古人以無窮妙藥醫療對治 直至十地未得惺惺 將知大不容易 古人思惟如喪考妣 如今兄弟見似等閑 何處別有人爲汝了得 可惜時光虛度 何妨密密地自究子細觀 尋至無著力處 自息諸緣去 縱未發萠種子猶在 若總取我傍家打鼓 弄粥飯氣力 將此造次排遣生死 賺汝一生有何所益 應須如實知取好 無事珍重

提接; 提示接引

 

때에 어떤 중이 묻되 종상(從上)의 종지(宗旨)가 무엇입니까. 스님이 묵연(默然)했다. 중이 재문(再問)하자 스님이 이에 꾸짖었다. 승문(僧問) 어떤 방편문(方便門)을 좇아야 학인으로 하여금 득입(得入)하게 하겠습니까. 사왈(師曰) ()이 이 방편이다. 승문 초심인(初心人)이 오면 스님이 어떻게 지시하겠습니까. 사왈(師曰) 어느 곳에서 초심을 얻어 왔는가. 승문 학인이 비로소() 총림에 들었으니 스님의 제접(提接)을 구걸합니다. 스님이 주장자로써 그를 가리켰다. 승왈(僧曰)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함도 도리어 사람을 억굴(抑屈)함을 이루나니 여금에 만약 적실(的實)히 당인(當人)의 분상(分上)을 자긍(自肯)한다면 초학이 총림에 듦을 논하지 않는다. 가위(可謂) 제인(諸人)과 함께 오래 이천(履踐)했고 과거의 제불과 더불어 핍소(乏少)한 바가 없다. 예컨대() 대해수(大海水)의 일체 어룡(魚龍)이 초생(初生)하여 늙음에 이르기까지 탄토(吞吐)하며 수용(受用)하되 모두 다(悉皆) 평등하다. 소이로 말하되 초발심한 자는 고불과 제견(齊肩)하다 하지만 너희가 무시(無始)의 적겁(積劫; 累劫)에 여러 망정(妄情)을 움직여 번뇌를 결성하였음을 어찌하랴(奈何). 중병인의 마음이 미쳐서 열민(熱悶)함과 같으며 전도(顚倒)된 난견(亂見)이라 도통(都統) 실사(實事)가 없다. 여금에 보는 바의 일체 경계도 모두 또한 이와 같나니 너희의 제근(諸根)을 상대하여 모두() 전도(顚倒)를 이루었다. 고인이 무궁한 묘약으로써 의료(醫療)하고 대치(對治)하였으나 바로 십지(十地)에 이르러서도 성성(惺惺)함을 얻지 못하니 이에() 매우 용이(容易)하지 않음을 안다. 고인은 사유(思惟)하되 고비가 죽은 것과 같았지만(如喪考妣) 여금의 형제는 보는 게 등한(等閑)함과 흡사하거늘 어느 곳에서 달리 사람이 있어 너희를 위해 요득(了得)하게 하겠는가. 가석하게도 시광(時光)을 헛되이 지내니 어찌 밀밀지(密密地)에 스스로 연구하여 자세히 관()함에 방애(妨礙)되리오. 찾아서 착력(著力)할 곳이 없음에 이르러야 스스로 제연(諸緣)을 쉬나니 비록 싹을 틔우지 못하더라도 종자(種子)는 오히려 있다. 만약 모두() 취아(取我)하여 방가(傍家)에서 타고(打鼓)하매 죽반(粥飯)의 기력을 희롱하며 이 조차(造次; 경솔)를 가지고 생사를 배견(排遣)하려고 한다면 너희의 일생을 속이리니() 무슨 이익된 바가 있겠는가. 응당 꼭 여실히 지취(知取)해야 좋다. 무사(無事)하다. 진중(珍重)하라.

提接; 제시(提示)하고 접인(接引).

 

漳州羅漢桂琛和尙上堂 大衆立久 師曰 諸上座 不用低頭思量 思量不及 便道不用揀擇 委得下口處麽 汝向什麽處下口 試道看 還有一法近得汝 還有一法遠得汝麽 同得汝異得汝麽 旣然如是爲什麽却特地艱難去 蓋爲不丈夫男子 㒝㒝偰偰無些子威光 慼慼地遮護箇意根 恐怕人問著 我常道 汝若有達悟處 但去却人我披露將來 與汝驗過 直下作麽不肯 莫把牛迹裏水以爲大海 佛法遍周沙界 莫錯向肉團心上妄立知見以爲疆界 此見聞覺知識想情緣 然非不是 若向遮裏點頭道我眞實卽不得 只如古人道此事唯我能知 是何境界 還識得麽 莫是汝見我我見汝便是麽 莫錯會 若是遮箇我我隨生滅 身有卽有身無卽無 所以古佛爲汝今日人說 異法有故異法出生 異法無故異法滅盡 莫將爲等閑 生死事大 此一團子消殺不到 在處乖張不少聲色 若不破受想行識 亦然役得汝骨出在 莫道五陰本來空也 不由汝口便解空去 所以道 須得親徹須眞實也 不是今日老師始解恁麽道 他古聖告報汝 喚作金剛祕密不思議光明藏 覆蔭乾坤生凡育聖 亘古亘今誰人無分 旣若如此更藉何人 所以諸佛慈悲見汝不奈何 開方便門示眞實相 我今方便也汝還會麽 若不會莫向意根下揑怪

㒝㒝偰偰; 猥瑣自卑

肉團心; 梵語紇利陀耶 譯曰肉團心 略稱肉心 凡夫肉身五臟中之心臟 卽意根之所託 其形自八瓣之肉葉而成 翻譯名義集六 紇利陀耶 此云肉團心 卽意根所託也 故云意如幽室見

 

장주(漳州) 라한(羅漢) 계침화상(桂琛和尙)이 상당했다. 대중이 선 지 오래되었다. 사왈(師曰) 제상좌(諸上座), 머리를 숙이고 사량(思量)함을 쓰지 말지니 사량이 미치지 못한다. 바로 말하나니 간택(揀擇)을 쓰지 말아라. 하구(下口; 開口)할 곳을 알아 얻었느냐(委得). 너희가 어느 곳을 향해 하구하겠는가, 시험 삼아 말해 보아라. 도리어 1법이 있어 너희에게 가까이 함을 얻느냐. 도리어 1법이 있어 너희를 멀리 함을 얻느냐. 너희와 같음을 얻거나 너희와 다름을 얻느냐. 이미 그러하여 이와 같거늘 무엇 때문에(爲什麽) 도리어 특지(特地; 특별히) 간난(艱難)한가. 대개 부장부(不丈夫)의 남자이기 때문에 멸멸설설(㒝㒝偰偰)하여 조금(些子)의 위광(威光)도 없다. 척척지(慼慼地; 매우 근심하는 모양) () 의근(意根)을 차호(遮護)하여 사람이 문착(問著)할까 두려워한다(恐怕). 내가 늘 말하되 너희가 만약 달오처(達悟處)가 있다면 단지 인아(人我)를 제거해버리고(去却) 피로(披露)해 가지고 오너라. 너에게 험과(驗過; 는 조사)해 주겠다. 직하(直下)에 어찌하여(作麽) 불긍(不肯)하느냐. 소의 발자국 속의 물을 가지고 대해로 삼지 말지니 불법이 사계(沙界)에 두루하다(遍周). 잘못 육단심상(肉團心)을 향해 지견(知見)을 망립(妄立)하여 강계(疆界; 境界)로 삼지 말지니 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식상(識想)의 정연(情緣; 情識의 인연)이다. 그러하여 이것()이 아닌 건 아니지만 만약 이 속을 향해 점두(點頭)하며 말하되 내가 진실하다 하면 곧 얻지 못했다. 지여(只如) 고인이 말하되 차사(此事)는 오직 나 만이 능히 안다 했으니 이 어떤 경계인가. 도리어 식득(識得)하겠는가. 이는 네가 나를 보고 내가 너를 봄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만약 이 저개(遮箇)의 아()라면 아()는 생멸을 따르나니 몸이 있으면 곧 있지만 몸이 없으면 곧 없다. 소이로 고불이 너희 금일인(今日人)을 위해 설하되 이법(異法)이 있는 고로 이법이 출생하고 이법이 없는 고로 이법이 멸진(滅盡)한다. 장차 등한(等閑)으로 삼지 말지니 생사의 일이 크다. 이 일단자(一團子)는 소살(消殺; 消滅해 없앰)이 이르지 못하나니 재처(在處)에 괴장(乖張; 違背)하고 성색(聲色)이 적지 않다. 만약 수상행식(受想行識)을 깨뜨리지 못하면 또한 그렇게 너희를 부림을 얻어(役得) 뼈가 나올 것이다. 5()이 본래 공했다고 말하지 말지니 너희의 입을 말미암지 않아도 바로 공()을 이해한다. 소이로 말하되 모름지기 친철(親徹; 친히 통함)을 얻어야 모름지기 진실이다. 이는 금일 노사(老師)가 처음으로() 이렇게 말할 줄 아는 게 아니다. () 고성(古聖)이 너희에게 고보(告報)하되 금강비밀(金剛祕密)이며 부사의한 광명장(光明藏)으로 불러 짓나니 건곤을 부음(覆蔭; 덮어 가리다)하고 생범육성(生凡育聖; 凡聖生育)하고 긍고긍금(亘古亘今)한다 했거니와 어떤 사람(誰人)이 분한이 없겠는가(無分). 이미 만약 이와 같다면 다시 어떤 사람을 빌리겠는가(). 소이로 제불이 자비로 너희가 어찌하지 못함을 보고 방편문을 열어 진실상(眞實相)을 보였다. 나도 지금 방편이니 너희가 도리어 아느냐. 만약 알지 못하면 의근(意根) 아래를 향해 날괴(揑怪; 괴이를 捏造. 과 통함)하지 말아라.

肉團心; 범어 흘리다야(紇利陀耶; hṛdaya)는 번역해 가로되 육단심이며 약칭이 육심(肉心). 범부 육신의 5() 중의 심장이니 곧 의근(意根)의 소탁(所託). 그 형상은 8(; 외씨. 꽃잎)의 육엽(肉葉)으로부터 이루어졌음. 번역명의집6. 흘리다야(紇利陀耶) 여기에선 이르되 육단심이니 곧 의근(意根)의 소탁(所託)인지라 고로 이르되 의()는 유실견(幽室見)과 같다.

㒝㒝偰偰; 외쇄(猥瑣: 더럽고 자질구레함)하며 스스로 비하함.

 

僧問從上宗門乞師方便 師曰 方便卽不無 汝喚什麽作宗門 曰恁麽卽學人虛施此問 師曰 汝有什麽罪過 問佛法還受雕琢也無 師曰 作麽不受 曰如何雕琢 師曰 佛法 問諸行無常是生滅法 如何是不生不滅法 師曰 用不生不滅作麽 問才擬是過不擬時如何 師曰 擬有什麽過 曰恁麽卽便自無瘡也 師曰 合取口 問諸境中以何爲主 師曰 那箇是諸境 曰莫是疑處是麽 師曰 把將疑處來 問正恁麽時是什麽 師曰 不恁麽時是什麽 曰學人道不得 師曰 口裏是什麽塞却 師又曰 諸人朝晡恁麽上來下去 也只是被些子聲色惑亂身心不安 若是聲色名字不是佛法 又疑伊什麽 若是佛法不是聲色名字 汝又作麽生擬把身心湊泊伊 若是聲色名字 總是聲色名字 若是佛法總是佛法 會麽 異聲無聲 異色無色 離字無名 離名無字 試把舌頭點看 有多少聲色名字 自何而色以何爲名 三界如是崢嶸 尙覓出頭不得 因什麽却特地難爲去 只爲諸人自生顚倒 以常爲斷悟假迷眞 妄外馳求强揑異見 終日共人商量便有佛法 不與人商量便是世間閑人 話到遮裏才擧著佛法 便道擬心卽差 動念卽乖 尋常諸處元無口似紡車 總便不差去 佛法事不是隔日瘧 皆由汝狂識凡情作差與不差解 忽然見我拈箇槌子槌背 便作意度顧覽 不然見我把箇箒子掃東掃西 便各照管 是汝尋常打柴 何不顧覽招呼便悟去 上座佛法莫向意根下皮袋裏作測度 汝成自賺 我不敢網絆初心籠罩後學 各自究去 無事珍重

照管; 照察管理

打柴; 砍伐柴木

 

승문(僧問) 종상(從上)의 종문(宗門)에 스님의 방편을 구걸합니다. 사왈(師曰) 방편은 곧 없지 않으나 네가 무엇을 일러 종문이라 하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학인이 이 질문을 헛되이 베풀었습니다. 사왈 네가 무슨 죄과(罪過)가 있겠느냐. 묻되 불법이 도리어 조탁(雕琢)을 받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어찌(作麽) 받지 않겠는가. 가로되 어떻게 조탁합니까. 사왈 불법(佛法)이다. 묻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여 이 생멸법이니 무엇이 이 불생불멸의 법입니까. 사왈 불생불멸을 써서 무엇하려느냐. 묻되 겨우 헤아리면() 이 허물이니 헤아리지 않을 시 어떻습니까. 사왈 헤아린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바로(卽便) 스스로 부스럼()이 없습니다. 사왈 입을 닫아라(合取口). 묻되 제경(諸境) 중에 무엇으로써 주()를 삼습니까. 사왈 나개(那箇)가 이 제경인가. 가로되 이 의처(疑處)가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의처를 잡아 가지고(把將) 오너라. 묻되 바로 이러한 때 이 무엇입니까. 사왈 이러하지 않을 때 이 무엇인가. 가로되 학인은 말함을 얻지 못합니다. 사왈 입속이 이 무엇이기에(是什麽) 색각(塞却)하는가. 스님이 우왈(又曰) 제인이 조포(朝晡; 朝夕)에 이렇게 상래하거(上來下去)하면서 또한 다만 이, 조금의 성색(聲色)이 신심(身心)을 혹란(惑亂)함을 입어 불안하거니와 만약 이 성색과 명자(名字)가 이 불법이 아니라면 또 그것()의 무엇(什麽)을 의심하리오. 만약 이 불법이라면 이 성색과 명자가 아니거늘 너희가 또 어떻게(作麽生) 신심(身心)을 잡아() 그것()에 주박(湊泊)하려고 하겠는가. 만약 이 성색과 명자라면 모두() 이 성색과 명자며 만약 이 불법이라면 모두 이 불법이다. 아느냐. 이성(異聲)은 무성(無聲)이며 이색(異色)은 무색(無色)이며 자()를 여의면 명()이 없고 명을 여의면 자가 없다. 시험 삼아 혀(舌頭)를 가지고() 점검(點檢; )해 보아라, 다소의 성색과 명자가 있느냐. 무엇으로부터 색이며 무엇으로써 명()을 삼느냐. 3()가 이와 같이 쟁영(崢嶸)한데 오히려 출두(出頭)함을 찾더라도 얻지 못하거늘 무엇으로 인해 도리어 특지(特地) 어렵다 하는가(難爲去). 다만 제인이 스스로 전도(顚倒)를 내기 때문에 상()을 단()으로 삼으며 가를 깨닫고 진을 미하며(悟假迷眞) 허망하게 밖으로 치구(馳求)하고 억지로 이견(異見)을 날조(捏造; )한다. 종일 사람과 함께 상량하면 바로 불법이 있다가 사람과 더불어 상량하지 않으면 바로 이 세간의 한인(閑人)이다. 이야기가 이 속에 이르러 겨우 불법을 들면(擧著) 바로 말하되 의심(擬心; 思慮)하면 곧 어긋나고() 동념(動念)하면 곧 어그러진다(). 심상(尋常)의 여러 곳에선 원래 입이 방거(紡車; 물레)와 비슷함이 없어 모두() 바로 어긋나지 않으며 불법의 일이 이 격일학(隔日瘧)이 아니지만 모두 너희의 광식(狂識)과 범정(凡情)으로 말미암아 차()와 불차(不差)란 이해를 짓는다. 홀연히 내가 저() 망치(槌子)를 집어 등을 침()을 보면 바로 의탁(意度)하며 고람(顧覽; 돌아봄)함을 짓는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저() 추자(箒子; )를 가지고 소동소서(掃東掃西)함을 보면 바로 각자 조관(照管)한다. 이 너희가 심상(尋常)에 타시(打柴; 땔나무를 베다)하면서 왜 돌아보거나(顧覽) 부르면서(招呼) 바로 깨닫지 않느냐. 상좌여, 불법을 의근(意根) 아래와 피대(皮袋; 육체) 속을 향해 측탁(測度; 저본에 則度으로 지었음)하지 말지니 너희가 스스로 속음()을 이룬다. 나는 감히 초심을 망반(網絆; 그물로 얽음)하거나 후학을 농조(籠罩; 덮다)하지 않나니 각자 연구하라(究去). 무사하니 진중(珍重)하라.

照管; 조찰(照察)하며 관리함.

打柴; 시목(柴木; 땔나무)을 감벌(砍伐; 자르다).

 

大法眼文益禪師上堂曰 諸上座時寒何用上來 且道上來好不上來好 或有上座道 不上來却好什麽處不是 更用上來作什麽 更有上座道 是伊也不得一向 又須到和尙處始得 諸上座且道遮兩箇人於佛法中還有進趣也未 上座 實是不得竝無少許進趣 古人喚作無孔鐵鎚 生盲生聾無異 若更有上座出來道 彼二人總不得 爲什麽如此 爲伊執著所以不得 諸上座總似恁麽行脚 總似恁麽商量 且圖什麽 爲復只要弄脣嘴 爲復別有所圖 恐伊執著且執著什麽 爲復執著理執著事執著色執著空 若是理理且作麽生執 若是事事且作麽生執 著色著空亦然 山僧所以尋常向諸上座道 十方諸佛十方善知識時常垂手 諸上座時常接手 十方諸佛垂手時有也 什麽處是諸上座時常接手處 還有會處會取好 若未會得莫道 總是都來圓取 諸上座傍家行脚 也須審諦著些精彩 莫只藉少智慧過却時光 山僧在衆見此多矣 更有一般上座 自己東西猶未知 向遮邊那邊東聽西聽 說得少許以爲胸襟 仍爲他人注脚 將爲自己眼目 上座總似遮箇行脚 自賺亦乃賺他 奉勸諸上座 且明取道眼好 些子粥飯智慧不足可恃 若是世間造作種種非違之事 入地獄猶有劫數且有出期 若是錯與他人開眼目 陷在地獄冥冥長夜無有出期 莫將爲等閑 奉勸且依古聖慈悲門好 他古聖所見諸境唯見自心 祖師道 不是風動幡動仁者心動 但且恁麽會好 別無親於親處也

審諦; 仔細考察或觀察

 

대법안(大法眼) 문익선사(文益禪師)가 상당하여 가로되 제상좌여 때가 춥거늘 왜 상래(上來)함을 쓰느냐. 그래 말하라(且道), 상래(上來)함이 좋은가 상래하지 않음이 좋은가. 혹 어떤 상좌가 말하되 상래하지 않음이 좋나니 어느 곳인들 옳지() 않겠는가, 다시 상래함을 써서 무엇하리오. 다시 어떤 상좌가 말하되 이 그()는 일향(一向; 한결같음)을 얻지 못하므로 또 모름지기 화상의 처소에 이르러야 비로소 옳다. 제상좌여 그래 말하라, 이 두 개의 사람이 불법 중에 도리어 진취(進趣)가 있느냐 또는 아니냐. 상좌여 실로 이는 얻지 못했고 아울러() 조금(少許)의 진취도 없다. 고인이 무공철투(無孔鐵鎚)라고 불러 지었나니 생롱생맹(生盲生聾)과 다름이 없다. 만약 다시 어떤 상좌가 나와서 말하되 저 2인은 모두 얻지 못했나니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그가 집착했기 때문에 소이로 얻지 못했다. 제상좌여 모두() 이러함(恁麽)과 같이 행각하거나 모두 이러함과 같이 상량한다면 그래 무엇을 도모하겠는가. 다시 다만 순취(脣嘴; 주둥이)를 희롱함을 요함이 되는가, 다시 달리 도모하는 바가 있음이 되는가. ()가 집착할까 염려한다 하니 그래 무엇에 집착하는가. 다시 리()에 집착하는가 사()에 집착하는가 색에 집착하는가 공()에 집착하는가. 만약 이 리()라면 리()를 또 어떻게 집착하며 만약 이 사()라면 사를 또 어떻게 집착하는가. 색에 집착함과 공에 집착함(著色著空)도 또한 그러하다. 산승이 소이로 심상(尋常)에 제상좌를 향해 말하되 시방제불과 시방의 선지식이 때로 늘 수수(垂手)하고 제상좌가 때로 늘 접수(接手)한다. 시방제불이 수수(垂手)할 때가 있으면 어느 곳이 이 제상좌가 때로 늘 접수하는 곳인가. 도리어 아는 곳(會處)이 있다면 회취(會取)함이 좋거니와 만약 회득(會得)하지 못한다면 말하지 말아라. 모두() 이 도래(都來; 完全) 원취(圓取; 원만히 취함). 제상좌가 방가(傍家)로 행각하면서 또한 모름지기 심체(審諦)하여 조금()의 정채(精彩)를 붙여야 하나니 다만 적은 지혜를 빌려() 시광(時光)을 지내버리지(過却) 말아라. 산승이 재중(在衆)하면서 이것을 봄이 많았다. 다시 일반(一般)의 상좌가 있나니 자기의 동서(東西)를 오히려 알지 못하면서 저변나변(遮邊那邊)을 향해 동청서청(東聽西聽)하여 조금(少許)을 설득(說得)하여 흉금(胸襟)으로 삼고 인하여() 타인을 위해 주각(注脚)하고 이에() 자기의 안목으로 삼는다. 상좌가 모두 저개(遮箇)와 같이 행각한다면 스스로 속고 또한 이에 남을 속인다. 제상좌에게 봉권(奉勸)하나니 다만() 도안(道眼)을 밝게 취해야 좋다. 사자(些子; 些少)의 죽반지혜(粥飯智慧)는 족히 가히 믿을() 게 아니다. 만약 이 세간에서 갖가지 비위지사(非違之事)를 조작한다면 지옥에 들어가서도 오히려 겁수(劫數)가 있으며 또() 출기(出期)가 있겠지만 만약 이 잘못 타인에게 안목을 열어 주면 지옥에 빠져 있으면서 명명장야(冥冥長夜)에 출기가 있지 않나니 장차 등한(等閑)으로 삼지 말아라. 봉권(奉勸)하나니 다만() 고성(古聖)의 자비문(慈悲門)에 의지함이 좋다. 저 고성이 본 바 제경(諸境)은 오직 자심(自心)을 보았다. 조사가 말하되 이 풍동(風動)ㆍ번동(幡動)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심동(心動)이다. 단차(但且) 이렇게 이회해야 좋나니 달리 친함 보다 친할 게 없는 곳이다.

審諦; 자세히 고찰(考察)하거나 혹 관찰함.

 

師良久又云 諸上座貶也得剝也得 時僧問 學人不爲別事請師直道 師曰 汝是不爲別事 問如何是不生不滅底心 師曰 那箇是生滅底心 僧曰 爭奈學人不見 師曰 汝若不見不生不滅底也不是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便會取 問古人才見人恁麽來便叫失也古人意如何 師曰 汝不信但問別人 問維摩與文殊對談何事 師曰 汝不妨聰明 問法同法性入諸法故古意如何 師曰 汝是行脚僧 問如何是解修行底人 師曰 汝是什麽人 曰恁麽卽不落因果也 師曰 莫作野干鳴 問識本還源時如何 師曰 謾語 問明暗不分時如何 師曰 道什麽 問如何是對境數起底心 師曰 恰道著 問如何是學人本分事 師曰 謝指示 問決擇之次如履輕氷如何決擇 師曰 待汝疑卽道 曰學人卽今疑 師曰 嚇阿誰 問從上宗乘如何履踐 師曰 雷聲甚大雨點全無 問如何是末後句 師曰苦 問如何是玄言妙旨 師曰 用玄言妙旨作什麽 問如何是直道 師曰 恐難副此問 問承敎有言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如何得恁麽 師曰 如何得恁麽 問敎云 佛以一音演說法 衆生隨類各得解 學人如何解 師曰 汝甚解 師又曰 此問已是不會古人語也 因什麽却向伊道 汝甚解 何處是伊解處 莫是於伊分中便點與伊麽 莫是爲伊不會問却反射伊麽 且素非此理 愼莫錯會 除此兩會別又如何商量 諸上座若會得此語 也卽會得諸聖總持門 且作麽生會 若也會得一音演說不會隨類各解 恁麽道莫是有過無過說麽 莫錯會好 旣不恁麽會 作麽生說一音演說隨類得解 有箇去處始得 每日空上來下去 又不當得人事 且究道眼始得 他古人道 一切聲是佛聲 一切色是佛色 何不且恁麽會取 僧問 遠遠尋聲請師一接 師曰 汝尋底是什麽聲 是僧聲是俗聲是凡聲是聖聲 還有會處麽 若也實不會 上座吵吵是聲吵吵是色 聲色不奈何 莫將爲等閑 上座若會得卽是眞實 若不會卽是幻化 若也會得卽是幻化 若也不會卽是眞實 他古人亦向上座道 唯我能知 除此外別無作計校處 上座成不成從何而出 是不是從何而出 理無事而不顯 事無理而不消 事理不二不事不理不理不事 恁麽注解與上座 若更不會不如且依古語好 他古人見上座百般不得 所以垂慈向汝道 將聞持佛佛 何不自聞聞 無事珍重

識本; 謂自識本心 自見本性

 

스님이 양구(良久)하고 또 이르되 제상좌여 폄()해도 옳고() (; 깎다)해도 옳다. 때에 승문(僧問) 학인은 별다른 일을 위함이 아니니 스님의 바로 말씀하심을 청합니다. 사왈 너는 이, 별다른 일을 위함이 아니다. 묻되 무엇이 이 불생불멸하는 마음입니까. 사왈 어느 것(那箇)이 이 생멸하는 마음이냐. 승왈(僧曰) 학인이 보지 못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네가 만약 불생불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또한 옳지() 못하다.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바로 회취(會取; 領會)하라. 묻되 고인이 겨우 사람이 이렇게 옴을 보면 바로 부르짖되 잃었다(失也). 고인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 네가 불신(不信)하거든 단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라. 묻되 유마와 문수가 무슨 일을 대담(對談)했습니까. 사왈 너는 총명함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묻되 법이 법성과 같아서 제법(諸法)에 드는 연고다 라고 한 고의(古意)가 무엇입니까. 사왈 너는 이 행각승이다. 묻되 무엇이 이 수행을 아는() 사람입니까. 사왈 너는 이 어떤(什麽) 사람이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인과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왈 야간명(野干鳴)을 짓지 말아라. 묻되 식본(識本)하여 환원(還源)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헛된 말(謾語; 과 통함)이다. 묻되 명암을 나누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묻되 무엇이 이 경계를 대해 자주() 일어나는 마음입니까. 사왈 마침 말했다(恰道著).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본분사(本分事)입니까. 사왈 지시에 감사한다. 묻되 결택(決擇)하는 차()에 경빙(輕氷)을 밟음()과 같을 때 어떻게 결택합니까. 사왈 네가 의심함을 기다렸다가 곧 말하겠다. 가로되 학인이 즉금 의심합니다. 사왈 누구를 으르느냐(嚇阿誰). 묻되 종상(從上)의 종승(宗乘)을 어떻게 이천(履踐)합니까. 사왈 뇌성(雷聲)은 심히 크지만 빗방울(雨點)은 전무(全無)하구나. 묻되 무엇이 이 말후구(末後句)입니까. 사왈 괴롭다(). 묻되 무엇이 이 현언묘지(玄言妙旨)입니까. 사왈 현언묘지를 써서 무엇하려느냐. 묻되 무엇이 이 직도(直道)입니까. 사왈 차문(此問)에 맞추기(; 相稱)가 어려울까 염려스럽다. 묻되 듣건대() (; 金光明經二)에 말씀이 있어 부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응물(應物)하여 형상(形相)을 나타냄이 수중의 달과 같다. 어찌하여 이러함(恁麽)을 얻습니까. 사왈 어찌하여 이러함을 얻느냐. 묻되 교(; 維摩經佛國品)에 이르되 불()이 일음(一音)으로써 법을 연설하매 중생이 종류 따라 각기 득해(得解)한다. 학인이 어떻게 이해(理解; )합니까. 사왈 너는 심히 이해한다. 스님이 우왈(又曰) 차문(此問)은 이미 이, 고인의 말을 이회(理會)하지 못했거늘 무엇으로 인해 도리어 그()를 향해 네가 심히 이해했다 했는가. 어느 곳이 이 그()가 이해한 곳인가. 이는 그()의 분중(分中; 本分 )에 바로 점검()하여 그에게 준 게 아닐까. 이는 그가 물을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에게 반사(反射)한 게 아닐까. 다만() 본디() 이런 이치(此理)가 아니니 삼가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이 두 이회(兩會)의 분별을 제()하고 또 어떻게 상량하겠는가. 제상좌여 만약 이 말을 회득(會得)하면 또한() 곧 제성(諸聖)의 총지문(總持門)을 회득하나니 그래 어떻게 이회하느냐. 만약에 일음으로 연설함은 회득하지만 종류 따라 각기 이해함은 알지() 못한다 하면 이렇게 말함이 이 유과무과(有過無過)의 설이 아닐까. 착회(錯會)하지 말아야(; 저본에 으로 지었음) 좋다. 이미 이렇게 이회하지 않는다면 일음으로 연설하매 종류 따라 득해(得解)함을 어떻게 설하겠는가(作麽生說). () 거처(去處. 領悟處)가 있어야 비로소 옳다. 매일 헛되이() 상래하거(上來下去)하고 또 부당(不當)하게 인사(人事)를 얻으니 다만() 도안(道眼)을 궁구해야 비로소 옳다. 저 고인이 말하되 일체의 소리가 이 불성(佛聲)이며 일체의 색이 이 불색(佛色)이다. 왜 다만() 이렇게 회취(會取)하지 않느냐. 승문(僧問) 멀고도 멀리서 소리를 찾았으니(尋聲) 스님의 일접(一接; 한 번의 接引)을 청합니다. 사왈 네가 찾은 것(尋底)은 이 무슨 소리인가. 이 승성(僧聲)인가, 이 속성(俗聲)인가, 이 범성(凡聲)인가, 이 성성(聖聲)인가. 도리어 아는 곳이 있느냐. 만약에 실로 알지 못한다면 상좌가 초초(吵吵; 큰 소리로 떠듦)함이 이 소리인가, 초초함이 이 색인가. 성색(聲色)이 어찌하지 못하나니(不奈何) 장차 등한(等閑)으로 삼지 말아라. 상좌가 만약 회득(會得)한다면 즉시(卽是) 진실이지만 만약 왈지() 못한다면 즉시 환화(幻化)며 만약에 회득한다면 즉시 환화며 만약에 알지 못한다면 즉시 진실이다. 저 고인도 또한 상좌를 향해 말하되 오직 나 만이 능히 안다. 이를 제한 밖에 달리 계교(計校)를 지을 곳이 없다. 상좌여 성()과 불성(不成)이 어디로 좇아나오며 시()와 불시不是)가 어디로 좇아나오느냐. ()는 사()가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사는 이가 없으면 사라지지() 않는다. 사리(事理)가 둘이 아니니 사가 업으면 이가 없고(不事不理) 이가 없으면 사가 없다(不理不事). 이렇게 주해하여 상좌에게 주었거니와 만약 다시 알지 못한다면 다만() 고어(古語)에 의()하는 좋음만 같지 못하다. 저 고인이 상좌가 백반(百般)으로 얻지 못함을 본지라 소이로 수자(垂慈)하여 너를 향해 말하되 장차 들으려거든 불불(佛佛)을 가질지니() 왜 스스로 문문(聞聞)하지 않느냐. 무사하다. 진중(珍重)하라.

識本; 이르자면 스스로 본심을 앎. 스스로 본성을 봄.

 

景德傳燈錄卷第二十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