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 25 덕소국사(德韶國師)-자운(慈雲) 광달선사(匡達禪師)

태화당 2025. 10. 5. 14:01

景德傳燈錄卷第二十五

 

吉州靑原山行思禪師第九世上

金陵淸涼文益禪師法嗣上三十人

天台山德韶國師 2270

杭州報恩寺慧明禪師 2298

漳州羅漢智依大師 2303

金陵章義道欽禪師 2305

金陵報恩匡逸禪師 2307

金陵報慈文遂導師 2309

漳州羅漢守仁禪師 2314

杭州永明寺道潛禪師 2317

撫州黃山良匡禪師 2322

杭州靈隱淸聳禪師 2323

金陵報恩玄則禪師 2326

金陵報慈行言導師 2330

金陵淨德智筠禪師 2334

高麗道峯慧炬國師 2338

金陵淸涼泰欽禪師 2338

杭州寶塔寺紹巖禪師 2346

金陵報恩法安禪師 2348

撫州崇壽契稠禪師 2352

洪州雲居淸錫禪師 2354

洪州百丈道常禪師 2355

天台般若敬遵禪師 2358

廬山歸宗策眞禪師 2360

洪州同安紹顯禪師 2362

廬山棲賢慧圓禪師 2362

洪州觀音從顯禪師 2364

廬州長安延規禪師 2366

常州正勤希奉禪師 2366

洛京興善棲倫禪師 2369

洪州新興齊禪師 2369

潤州慈雲匡達禪師已上三十人見錄2370

 

靑原行思禪師第九世上

金陵淸涼文益禪師法嗣

天台山德韶國師 處州龍泉人也 俗姓陳氏 母葉氏 夢白光觸體 因而有娠 及誕尤多奇異 年十五有梵僧勉令出家 十七依本州龍歸寺受業 十八納戒於信州開元寺 梁開平中遊方詣投子山 見大同禪師 乃發心之始 次謁龍牙遁和尙問 雄雄之尊爲什麽近之不得 龍牙曰 如火與火 曰忽遇水來又作麽生 龍牙曰汝不會 師又問 天不蓋地不載 此理如何 龍牙曰 合如是 師不喻旨再請垂誨 龍牙曰 道者汝向後自會去 次問疎山曰 百匝千重是何人境界 疎山曰 左搓芒繩縛鬼子 師進曰 不落古今請師說 曰不說 師曰 爲什麽不說 曰箇中不辨有無 師曰 師今善說 疎山駭之

 

천태산 덕소국사(德韶國師). 처주(處州) 용천(龍泉) 사람이며 속성이 진씨(陳氏). () 섭씨(葉氏)가 백광(白光)이 몸에 닿는 꿈을 꾸었고 인하여 임신(妊娠)이 있었고 탄생함에 이르러 더욱() 기이(奇異)가 많았다. 나이 15에 어떤 범승(梵僧)이 권하여() 출가하게 했고 17에 본주(本州) 용귀사(龍歸寺)에 의지해 수업(受業)했고 18에 신주(信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납계(納戒)했다. () 개평(開平; 907-911) 중 유방(遊方)하다 투자산(投子山)으로 나아가 대동선사(大同禪師)를 참견(參見)했는데 곧() 발심(發心)의 시초(始初)였다. 다음으로 용아둔(龍牙遁; 居遁) 화상을 참알해 묻되 웅웅지존(雄雄之尊)을 무엇 때문에 친근함을 얻지 못합니까. 용아가 가로되 화()와 화()와 같다. 가로되 홀연히 물이 옴을 만나면 또 어떻습니까. 용아가 가로되 네가 알지 못했다. 스님이 또 묻되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하니 이 이치가 무엇입니까. 용아가 가로되 합당히 이와 같다. 스님이 의지(意旨)를 깨치지() 못해 수회(垂誨)를 재청(再請)하자 용아가 가로되 도자(道者)야 네가 향후에 스스로 이회(理會)하여 가리라. 다음으로 소산(疎山; 匡仁)에게 물어 가로되 백잡천중(百匝千重)은 이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소산이 가로되 왼손으로 망승(芒繩; 고삐)을 잘라 귀자(鬼子; 後綴)를 묶는다. 스님이 진왈(進曰) 고금에 떨어지지 말고 스님의 설()을 청합니다. 가로되 설하지 못한다. 사왈 무엇 때문에 설하지 못합니까. 가로되 개중(箇中)에 유무(有無)를 분변하지 못한다. 사왈 스님이 지금 선설(善說)하십니다. 소산이 놀랐다.

 

師如是歷參五十四善知識 皆法緣未契 最後至臨川謁淨慧禪師 淨慧一見深器之 師以遍涉叢林亦倦於參問 但隨衆而已 一日淨慧上堂有僧問 如何是曹源一滴水 淨慧曰 是曹源一滴水 僧惘然而退 師於坐側豁然開悟 平生疑滯渙若氷釋 遂以所悟聞于淨慧 淨慧曰 汝向後當爲國王所師 致祖道光大吾不如也 自是諸方異唱古今玄鍵 與之決擇不留微迹 尋迴本道遊天台山 覩智者顗禪師遺蹤有若舊居 師復與智者同姓 時謂之後身也 初止白沙 時吳越忠懿王以國王子刺台州 嚮師之名延請問道 師謂曰 他日爲覇主無忘佛恩 漢乾祐元年戊申王嗣國位 遣使迎之申弟子之禮

曹源; 曹溪根源 卽指曹溪慧能

光大; 使更加發展興盛

玄鍵; 謂玄妙祕要

 

스님이 이와 같이 54선지식을 역참(歷參)했으나 모두 법연(法緣)이 계합하지 못했다. 최후에 임천(臨川)에 이르러 정혜선사(淨慧禪師; 文益賜號)를 참알했는데 정혜가 한 번 보자 깊이 법기(法器)로 여겼다. 스님이 총림을 편섭(遍涉)했고 또한 참문(參問)에 게을러져() 단지 수중(隨衆)할 따름이었다. 어느 날 정혜가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조원(曹源)의 한방울 물입니까. 정혜가 가로되 이것이 조원의 한방울 물이다. 중이 망연(惘然; 멍한 모양)하여 물러났는데 스님이 좌측(坐側)에서 활연(豁然)히 개오(開悟)하여 평생의 의체(疑滯)가 풀림()이 얼음이 풀리는 듯했다. 드디어 깨친 바를 정혜에게 알리자() 정혜가 가로되 너는 향후에 마땅히 국왕이 스승으로 삼는 바(所師)가 되어 조도(祖道)를 광대(光大)하게 함에 이르리니() 내가 같지 못하리라. 이로부터 제방의 이창(異唱)과 고금의 현건(玄鍵)을 더불어 결택(決擇)하여 미적(微迹)도 머물지() 않았다. 이윽고 본도(本道)로 돌아와 천태산을 유람하다가 지자의(智者顗; 智顗) 선사의 유종(遺蹤)을 보매 또한 구거와 같았다(有若舊居). 스님이 다시 지자(智者)와 동성(同姓)인지라 당시에 이르기를 후신(後身)이라 했다. 처음에 백사(白沙)에 머물렀는데() 때에 오월(吳越) 충의왕(忠懿王)이 국왕자(國王子)로서 태주(台州)를 정찰(偵察; )하다가 스님의 명성을 향()했고 연청(延請)하여 문도(問道)했다. 스님이 일러 가로되 타일(他日)에 패주(覇主)가 되시거든 불은을 잊지 마십시오. () 건우(乾祐) 원년 무신(戊申; 948) 왕이 국위(國位)를 이었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맞이해 제자의 예()를 폈다.

曹源; 조계 근원이니 곧 조계혜능을 가리킴.

光大; 다시 발전과 흥성을 가하게 함.

玄鍵; 이르자면 현묘한 비요(祕要).

 

有傳天台智者敎羲寂者 屢言于師曰 智者之敎年祀寖遠慮多散落 今新羅國其本甚備 自非和尙慈力其孰能致之乎 師於是聞于忠懿王 王遣使及齎師之書 往彼國繕寫備足而迴 迄今盛行于世矣 師上堂曰 古聖方便猶如河沙 祖師道 非風幡動仁者心動 斯乃無上心印法門 我輩是祖師門下客 合作麽生會祖師意 莫道風幡不動汝心妄動 莫道不撥風幡就風幡通取 莫道風幡動處是什麽 有云 附物明心不須認物 有云 色卽是空 有云 非風幡動應須妙會 如是解會與祖師意旨有何交涉 旣不許如是會 諸上座便合知悉 若於遮裏徹底悟去 何法門而不明 百千諸佛方便一時洞了 更有什麽疑情 所以古人道 一了千明一迷萬惑 上座豈是今日會得一則 明日又不會也 莫是有一分向上事難會 有一分下劣凡夫不會 如此見解設經塵劫 只自勞神乏思無有是處

 

천태지자(天台智者)의 교()를 전하는 의적(羲寂)이란 자가 있어 누차 스님에게 말해 가로되 지자(智者)의 교가 연사(年祀; 年歲)가 침원(寖遠; 漸遠)하여 많이 산락(散落)했음을 염려합니다. 지금 신라국에 그 본(; )이 심히 구비(具備)되었는데 스스로 화상의 자력(慈力)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를 이루겠습니까(致之乎). 스님이 이에 충의왕(忠懿王)에게 주문(奏聞)했고 왕이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되 및 스님의 서신을 가지고서() 그 나라에 가서 선사(繕寫)하여 비족(備足)하여 돌아왔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迄今) 세상에 성행한다.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고성(古聖)의 방편이 마치 하사(河沙; 저본에 何沙로 지었음)와 같다. 조사가 말하되 풍번(風幡; 바람과 깃발)이 동()함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동함이다. 이는 곧(斯乃) 무상(無上)의 심인(心印)의 법문이다. 아배(我輩)는 이 조사문하객(祖師門下客)이니 합당히 어떻게 조사의 뜻을 이회(理會)해야 하는가. 풍번이 동함이 아니라 네 마음이 망동(妄動)함이라고 말하지 말며 풍번을 제거하지() 않고 풍번으로 나아가() 통취(通取; 통틀어 취함)한다고 말하지 말며 풍번이 동하는 곳이 이 무엇인가 라고 말하지 말아라. 유운(有云) 사물에 붙어 마음임을 밝히나니 사물을 인정함을 쓰지 않는다. 유운 색이 곧 이 공이다. 유운(有云) 풍번이 동함이 아니니 응당 묘하게 이회(理會)함을 써라. 이와 같은 해회(解會)는 조사의 의지(意旨)와 무슨 교섭이 있으리오. 이미 이와 같이 이회함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제상좌(諸上座)가 바로 합당히 지실(知悉; 알다)해야 하리라. 만약 이 속에서 철저히 오거(悟去)한다면 무슨 법문인들 밝히지 못하겠는가. 백천제불(百千諸佛)의 방편을 일시에 통달했다면(洞了) 다시 무슨 의정(疑情)이 있겠는가.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일료(一了)면 천명(千明)이며 일미(一迷)면 만혹(萬惑)이다. 상좌가 어찌 이 금일에 1()을 회득(會得)하고서 명일 또 불회(不會)하겠는가. 이는 일분(一分)의 향상사(向上事)가 있어 난회(難會)하고 일분의 하열범부(下劣凡夫)가 있어 불회(不會)함이 아닐까 하나니 이와 같은 견해는 설사 진겁(塵劫)을 경과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신핍사(勞神乏思; 정신을 노고롭게 하고 사유를 결핍하게 하다)하는지라 옳은 곳이 있지 않다.

 

僧問 諸法寂滅相 不可以言宣 和尙如何爲人 師曰 汝到諸方更問一遍 曰恁麽卽絕於言句去也 師曰 夢裏惺惺 問櫓櫂俱停如何得到彼岸 師曰 慶汝平生 問如何是三種病人 師曰 恰問著 問如何是古佛心 師曰 此問不弱 問如何是六相 師曰 卽汝是 問如何是方便 師曰 此問甚當 問亡僧遷化向什麽處去也 師曰 終不向汝道 曰爲什麽不向某甲道 師曰 恐汝不會 問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如何是一華開五葉 師曰 日出月明 曰如何是結果自然成 師曰 天地皎然 問如何是無憂佛 師曰 愁殺人 問一切山河大地從何而起 師曰 此問從何而來 問如何是數起底心 師曰 爭諱得 問如何是第二月 師曰 來處甚分明 曰爲什麽不會 師曰 喚什麽作第二月 問如何是沙門眼 師曰 黑如漆 問絕消息時如何 師曰 謝指示 問如何是轉物卽同如來 師曰汝喚什麽作物 曰恁麽卽同如來也 師曰 莫作野干鳴

六相; 華嚴經三十四十地品云 又發大願 願一切菩薩行 廣大無量 不壞不雜 攝諸波羅蜜 淨治諸地 總相別相 同相異相 成相壞相 所有菩薩行 皆如實說 敎化一切 三藏法數十九 六相[出華嚴一乘敎義分齊章] 六相者 謂一眞法界之體 而有六種名義之相也 然法界體同 本無異相 由法入於義 遂有六名 名雖有六 不離一體 交徹融通 一多無礙故也 一總相 一卽具多爲總 謂一法界之體 能具多種之義也 如人之身 能具眼耳等諸根 而爲一體 故云總相 二別相 多卽非一爲別 謂理體雖一 而有種種差別之義也 如身體雖一 而眼耳鼻舌諸根 各各不同 故云別相 三同相 義不相違名同 謂義雖有種種差別 而同一法界緣起故也 如眼耳等諸根 雖各不同 而共一身 不相違背 故曰同相 四異相 多異相望爲異 謂種種差別之義 雖同一體 而各適其宜 不相混濫也 如眼耳等諸根 各得其用 而不雜亂 故云異相 五成相 一多緣起和合爲成 謂種種緣起之義 共成法界總相之體也 如眼耳等諸根 共成一身之用 故云成相 六壞相 諸法各住本位爲壞 謂諸法之義 各各自住本位 則總相不成也 如眼耳等諸根 各住自位 一體不成 故云壞相 祖庭事苑六 六相 金師子云 師子是總相 五根差別是別相 共一緣起是同相 眼耳各不相知是異相 諸根共會是成相 諸緣各住自位是壞相 顯法界中 無孤單法 隨擧一法 具此六相 緣起集成 各無自性 一一相中含無盡相 一一法中具無盡法也 又頌云 總則擧體不分 別則諸緣各別 同則諸緣和合 異則功用各異 成則互徧相資 壞則各住自位

 

승문(僧問) 제법의 적멸상(寂滅相)은 가히 말로써 선양(宣揚)하지 못하거늘(이상 2구는 법화경1에 나옴) 화상이 어떻게 위인(爲人)하겠습니까. 사왈(師曰) 네가 제방에 이르거든 다시 1(; . ) 물어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언구가 단절되어 갈 것입니다. 사왈 꿈 속에서 성성(惺惺)하구나. 묻되 노도(櫓櫂)가 다 멈추었다면(俱停) 어떻게 피안에 득도(得到)합니까. 사왈 너의 평생을 경하(慶賀)한다. 묻되 무엇이 이 삼종병인(三種病人; 盲聾瘂三種病人)입니까. 사왈 마침 물었다(恰問著). 묻되 무엇이 이 고불심(古佛心)입니까. 사왈 차문(此問)이 약하지 않다. 묻되 무엇이 이 육상(六相)입니까. 사왈 곧 네가 이것이다. 묻되 무엇이 이 방편입니까. 사왈 차문(此問)이 심히 합당하다. 묻되 망승(亡僧)이 천화(遷化)하여 어느 곳을 향해 갔습니까. 사왈 마침내 너를 향해 말하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모갑을 향해 말하지 못합니까. 사왈 네가 알지 못할까 염려한다. 묻되 일화(一華)에 오엽(五葉)이 열려 결과를 자연히 이룬다 하니 무엇이 이 일화에 오엽이 열림입니까. 사왈 해가 나오고 달이 밝다. 가로되 무엇이 이 결과를 자연히 이룸입니까. 사왈 천지(天地)가 교연(皎然)하다. 묻되 무엇이 이 무우불(無憂佛)입니까. 사왈 사람을 너무 수심케 하는구나(愁殺人). 묻되 일체의 산하대지가 어디로 좇아 일어납니까. 사왈 차문(此問)은 어디로 좇아왔느냐. 묻되 무엇이 이 삭기지심(數起底心; 자주 일어나는 마음)입니까. 사왈 어찌 숨김을 얻겠는가(諱得). 묻되 무엇이 이 제2월입니까. 사왈 온 곳이 심히 분명하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알지 못합니까. 사왈 무엇을 일러 제2월이라 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사문안(沙門眼)입니까. 사왈 검기가 칠(; )과 같다. 묻되 소식이 끊겼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지시에 감사한다. 묻되 무엇이 이 전물(轉物)하면 곧 여래와 같음입니까. 사왈 네가 무엇을 일러 물()이라 하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여래와 같음입니다. 사왈 야간(野干)의 울음(; 저본에 로 지었음)을 짓지 말아라.

六相; 화엄경34 십지품(十地品)에 이르기를 또 대원을 발하되 일체의 보살행을 서원합니다. 광대하고 무량하며 파괴되지도 않고 잡란하지도 않으며 모든 바라밀을 섭수하여 제지(諸地)를 깨끗이 다스리나니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이다. 소유한 보살행을 다 여실히 설해 일체를 교화하리라. 삼장법수19 육상(六相) [출화엄일승교의분제장] 6()이란 것은 이르자면 하나의 1진법계(眞法界)6종의 명의(名義)의 상()이 있음이다. 그러나 법계의 체가 한가지므로 본래 다른 모양이 없다. 법으로 말미암아 의()에 드나니 드디어 6()이 있다. 이름은 비록 6이 있으나 1체를 여의지 않고 교철(交徹)하여 융통하면서 일다(一多)가 걸림 없는 연고이다. 1. 총상(總相) ()이 곧 다()를 갖춤이 총()이 된다. 이르자면 1법계의 체에 능히 여러 가지의 뜻을 갖춤이다. 예컨대() 사람의 몸이 능히 눈ㆍ귀 등의 여러 제근(諸根)을 갖추어 1체가 되므로 고로 이르되 총상임. 2. 별상(別相) ()는 곧 일()이 아님이 별이 되니 이르자면 이체(理體)는 비록 일()이나 갖가지 차별의 뜻이 있음이다. 예컨대() 신체는 비록 일()이나 눈ㆍ귀ㆍ코ㆍ혀의 제근이 각각 같지 못하므로 고로 이르되 별상임. 3. 동상(同相) 뜻이 서로 위배되지 않음을 이름해 동()이다. 이르자면 뜻에 비록 갖가지 차별이 있지만 동일한 법계의 연기(緣起)인 연고다. 예컨대() 눈ㆍ귀 등 제근이 비록 각기 같지 않지만 한가지로 1()이라서 서로 위배되지 않으므로 고로 가로되 동상임. 4. 이상(異相) 다이(多異)가 서로 바라봄이 이()가 된다. 이르자면 갖가지 차별의 뜻이 비록 동일한 체지만 각기 그 의당함으로 가므로 서로 혼람하지 않음이다. 예컨대() 눈ㆍ귀 등의 제근이 각자 그 씀을 얻어 잡란하지 않으므로 고로 이르되 이상임. 5. 성상(成相) 일다(一多)의 연기가 합해 성()이 된다. 이르자면 갖가지 연기의 뜻이 함께 법계의 총상(總相)의 체를 이룸이다. 예컨대() 눈ㆍ귀 등 제근이 함께 1()의 씀을 이루므로 고로 이르되 성상임. 6. 괴상(壞相) 제법이 각자 본위에 머묾이 괴()가 된다. 이르자면 제법의 뜻이 각각 스스로 본위(本位)에 머묾이니 곧 총상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눈ㆍ귀 등의 제근이 각자 자위(自位)에 머물어 1()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고로 이르되 괴상임. 조정사원6. 육상(六相) 금사자장(金師子章; 1. 宋 承遷註)에 이르되 사자(師子)는 이 총상(總相)이며 5()의 차별은 이 별상(別相)이며 한가지로 한 연기(緣起)임은 이 동상(同相)이며 안이(眼耳)가 각자 서로 알지 못함은 이 이상(異相)이며 제근(諸根)이 함께 모임은 이 성상(成相)이며 제연(諸緣)이 각자 자기 자리에 머묾은 이 괴상(壞相)이다. 법계를 나타낸 가운데 고단법(孤單法)이 없으니 1법을 듦()을 따라 이 6상을 갖추거니와 연기(緣起)로 집성한지라 각기 자성이 없다. 낱낱의 상중(相中)에 무진상(無盡相)을 머금었고 낱낱의 법중(法中)에 무진법을 갖추었다. 또 송에 이르되 총()은 곧 거체(擧體; 全體)가 나뉘지 않음이며/ ()은 곧 제연(諸緣)이 각기 다름이며/ ()은 곧 제연이 화합함이며/ ()는 곧 공용(功用)이 각기 다름이며/ ()은 곧 호편(互徧)하여 서로 도움이며/ ()는 곧 각기 자위(自位)에 머묾이다.

 

問那吒太子析肉還母析骨還父 然後於蓮華上爲父母說法 未審如何是太子身 師曰 大家見上座 問曰 恁麽卽大千同一眞如性也 師曰 依俙似曲才堪聽 又被風吹別調中 問六根俱泯爲什麽理事不明 師曰 何處不明 曰恁麽卽理事俱如也 師曰 前言何在 師有時謂衆曰 大凡言句應須絕滲漏始得 時有僧問 如何是絕滲漏底句 師曰 汝口似鼻孔 問如何是不證一法 師曰 待言語在 曰如何是證諸法 師曰 醉作麽 師有時謂衆曰 只如山僧恁麽對他 諸上座作麽生體會 莫是眞實相爲麽 莫是正恁麽時 無一法可證麽 莫是識伊來處麽 莫是全體顯露麽 莫錯會好 如此見解喚作依草附木 與佛法天地懸隔 假饒答話辯如懸河 只成得箇顚倒知見 若只答話簡辯有什麽難 但恐無益於人翻成賺誤 如上座從前所學 簡辯問答記持說道理極多 爲什麽心疑不息 聞古聖方便特地不會 只爲多虛少實 上座不如從脚跟下一時覻破看是什麽道理 有多少法門 與上座作疑求解 始知從前所學底事 只知生死根源陰界裏活計 所以古人道 見聞不脫如水裏月 無事珍重 師有偈示衆曰 通玄峯頂 不是人間 心外無法 滿目靑山

依草附木; 又曰依草附葉 謂精靈之依附草木者 對人之精靈而云 禪宗轉指對無力自行證悟而一向追隨他人言語之學者 稱爲依草附木精靈

; 通柬 柬 選擇 後作揀

; 欲也

通玄峯; 碧巖錄第七則同種電鈔云 天台山有通玄峰

 

묻되 나타태자(那吒太子)가 살을 쪼개어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뼈를 쪼개어 아버지에게 돌려준 연후에 연화 위에서 부모를 위해 설법한다. 미심하오니 무엇이 이 태자의 몸입니까. 사왈(師曰) 대가(大家; 대중)가 상좌를 본다. 문왈(問曰) 이러하다면 곧 대천(大千)이 동일한 진여성(眞如性)입니다. 사왈 어슴푸레(依俙) 곡조와 같아서 겨우 들을 만하더니 또 바람 붊을 입어 별다른(; 저본에 將別로 지었음) 곡조 가운데로다. 묻되 6()이 모두 민(; 消滅)했거늘 무엇 때문에 이사(理事)가 밝지 못합니까. 사왈 어느 곳이 밝지 않은가.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이사가 모두 여()입니다. 사왈 전언(前言)은 어디에 있는가. 스님이 어떤 때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대범(大凡) 언구는 응당 꼭 삼루(滲漏)가 끊겨야 비로소 옳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삼루가 끊긴 구()입니까. 사왈 너의 입이 콧구멍과 같다. 묻되 무엇이 이 일법(一法)도 증()하지 않음입니까. 사왈 언어를 기다리고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제법(諸法)을 증()함입니까. 사왈 취()해서 무엇하리오. 스님이 어느 때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지여(只如) 산승이 이렇게 대타(對他)하거니와 여러 상좌는 어떻게 체회(體會; 理解)하는가. 이 진실로 상위(相爲)함이 아닐까. 이는 바로 이러할 때 일법(一法)도 가히 증()함이 없음이 아닐까. 이는 그()의 내처(來處)를 앎이 아닐까. 이 전체가 현로(顯露)함이 아닐까. 착회(錯會)하지 말아야 좋으니라. 이와 같은 견해는 의초부목(依草附木)이라 불러 짓나니 불법과는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가요(假饒; 가령) 답화(答話)하고 간변()함이 현하(懸河)와 같더라도 다만 저() 전도(顚倒)된 지견을 성득(成得)한다. 만약 다만 답화하고 간변하고자()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단지 사람에게 무익하고 도리어() 잠오(賺誤; 속이고 그르침)를 이룰까 염려한다. 예컨대() 상좌가 종전(從前)에 배운 바로 간변(簡辯)하고 문답하고 기지(記持)하고 도리를 설함이 극다(極多)지만 무엇 때문에 심의(心疑)를 쉬지 못하는가. 고성(古聖)의 방편을 듣고 특지(特地) 불회(不會)함은 다만 다허소실(多虛少實)이기 때문이다. 상좌가 각근하(脚跟下)로 좇아 일시에 처파(覻破)하고 이 무슨 도리인지 봄만 같지 못하다. 다소의 법문이 있어 상좌에게 작의(作疑)하고 구해(求解)하여 주거니와 비로소 알지니 종전(從前)에 배운 바의 일은 다만 생사의 근원이며 음계(陰界) 속의 활계(活計)임을 알아라.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견문을 벗어나지 못함이 물 속의 달과 같다.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스님이 게가 있어 시중(示衆)해 가로되 통현봉정(通玄峯)/ 이 인간이 아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어/ 눈 가득히 청산이다.

依草附木; 또 가로되 의초부엽(依草附葉). 이르자면 정령(精靈)이 초목에 의부(依附)한 것이니 사람의 정령에 대해서 이른 것임. 선종에서 전()하여 자행(自行)으로 증오(證悟)할 힘이 없고 일향(一向) 타인의 언어를 추수(追隨)하는 학자를 상대해 가리켜 의초부목정령(依草附木精靈)이라 일컬음.

; ()과 통함. ()은 선택이니 후에 간()으로 지었음.

; ().

通玄峯; 벽암록 제7칙 동 종전초에 이르되 천태산에 통현봉이 있다.

 

師後於般若寺開堂說法十二會 第一會 師初開堂日示衆云 一毛吞海 海性無虧 纖芥投鋒 鋒利無動 見與不見 會與不會 唯我知焉 乃有頌曰 暫下高峯已顯揚 般若圓通遍十方 人天浩浩無差別 法界縱橫處處彰 珍重 師陞堂日有僧問 承古有言 若人見般若卽被般若縛 若人不見般若亦被般若縛 旣見般若爲什麽却被縛 師云 爾道般若見什麽 學云 不見般若爲什麽却被縛 師云 爾道般若什麽處不見 又云 若見般若不名般若 不見般若亦不名般若 般若且作麽生說見不見 所以古人道 若欠一法不成法身 若剩一法不成法身 若有一法不成法身 若無一法不成法身 此是般若之眞宗諸上座 又僧問 乍離凝峯丈室來坐般若道場 今日家風請師一句 師云 虧汝什麽處 學云 恁麽卽雷音震動乾坤地 人人無不盡霑恩 師云 幸然未會且莫探頭 探頭卽不中 諸上座相共證明令法久住國土安樂 珍重

探頭; 原爲刺探之意 轉指師家之勘辨

 

스님이 후에 반야사(般若寺)에서 개당하여 설법하기 12()였다. 1(第一會) 스님이 처음 개당일에 시중(示衆)해 이르되 일모(一毛)가 바다를 삼켜도 해성(海性)은 이지러짐()이 없고 섬개(纖芥)를 칼날()에 던져도 칼날의 예리함은 움직임이 없다. ()과 불견(不見), ()와 불회(不會)를 오직 나만이 안다. 이에 송이 있어 가로되 잠시 고봉(高峯)에서 내려와 이미 현양(顯揚)했나니/ 반야(般若)의 원통(圓通)이 시방에 두루한다/ 인천(人天)이 호호(浩浩)하되 차별이 없고/ 법계에 종횡으로 곳곳에 나타난다(). 진중(珍重). 스님이 승당(陞堂)하던 날 어떤 중이 묻되 듣건대() 고인이 말씀이 있어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면 곧 반야에 묶임을 입으며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지 못하면 또한 반야에 묶임을 입는다 하였거니와 이미 반야를 보았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묶임을 입습니까. 사운(師云) 네가 말하라, 반야가 무엇을 보느냐. 학인이 이르되(學云) 반야를 보지 못하면 무엇 때문에 또한 묶임을 입습니까. 사운 네가 말하라, 반야를 어느 곳에서 보지 못하느냐. 또 이르되 만약 반야를 보면 반야라고 이름하지 못하고 반야를 보지 못하면 또한 반야라고 이름하지 못하나니 반야를 또 어떻게 견()과 불견(不見)을 설하겠느냐. 소이로 고인(古人; 저본에 으로 지었음)이 말하되 만약 일법(一法)이 모자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일법이 남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일법이 있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일법이 없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한다 했나니 이것이 이 반야의 진종(眞宗)이다, 제상좌(諸上座). 또 승문(僧問) 처음으로 응봉(凝峯)의 장실(丈室)을 떠나와서 반야도량에 앉으셨습니다. 금일 가풍을, 스님의 1구를 청합니다. 사운 너의 어느 곳이 모자라느냐(). 학운(學云) 이러하다면 곧 뇌음(雷音)이 건곤지(乾坤地)를 진동(震動)하매 사람마다 모두 은혜에 젖지 않음이 없습니다. 사운 다행히(幸然) 알지 못했으니 다만() 탐두(探頭)하지 말아라. 탐두하면 곧 맞지 않다. 제상좌(諸上座), 서로 함께(相共) 증명하여 법이 구주(久住)하고 국토가 안락하게 하자. 진중(珍重).

探頭; 원래는 자탐(刺探; 偵探)의 뜻이 됨. ()하여 사가의 감변(勘辨)을 가리킴.

 

第二會 師上堂有僧問 承敎有言 歸源性無二 方便有多門 如何是歸源性 師云 爾問我答 學云 如何是方便門 師云 爾答我問 學云 如何趣向 師云 顚倒作麽 又僧問 一身卽無量身 無量身卽一身 如何是無量身 師云 一身 學云 恁麽卽昔日靈山今來親覩 師云 理當卽行 又云 三世諸佛一時證明上座 上座且作麽生會 若會時不遷 無絲毫可得移易 何以故 爲過去未來現在三際是上座 上座且非三際 澤霖大海滴滴皆滿 一塵空性法界全收 珍重

澤霖; 雨水充足

 

2.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듣건대() ()에 말씀이 있어 귀원성(歸源性)은 무이(無二)나 방편에 다문(多門)이 있다. 무엇이 이 귀원성입니까. 사운(師云) 네가 묻고 내가 답한다. 학운(學云) 무엇이 이 방편문입니까. 사운 네가 답하고 내가 묻는다. 학운 어떻게 취향(趣向)해야 합니까. 사운 전도(顚倒)하여 무엇하리오. 또 승문(僧問) 일신(一身)이 곧 무량신(無量身)이며 무량신이 곧 일신이라 하니 무엇이 이 무량신입니까. 사운 일신이다. 학운 이러하다면 곧 석일(昔日)의 영산(靈山)을 지금 와서 친히 봅니다(). 사운 이치가 합당하면 곧 행하라. 우운(又云) 삼세제불이 일시에 상좌를 증명하리니 상좌가 또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만약 이회할 때는 변천(變遷; )하지 않아서 사호(絲毫)도 가히 이역(移易)함을 얻지 못한다. 무슨 연고냐, 과거ㆍ미래ㆍ현재 3()가 이 상좌이기 때문이지만 상좌는 또 3제가 아니다. 대해에 택림(澤霖)하면 적적(滴滴)이 모두 충만하고 일진(一塵)의 공성(空性)이 법계를 전부 거둔다. 진중(珍重).

澤霖; 우수(雨水)가 충족함.

 

第三會 師上堂有僧問 四衆雲集人天恭敬 目覩尊顔願宣般若 師云 分明記取 學云 師宣妙法 國王萬歲 人民安樂 師云 誰向爾道 學云 法爾如然 師云 爾靈利 又僧問 三世諸佛不知有 狸奴白牯却知有 旣是三世諸佛 爲什麽却不知有 師云 却是爾知有 學云 狸奴白牯爲什麽却知有 師云爾什麽處見三世諸佛 又僧問 承敎有言 眼不見色塵 意不知諸法 如何是眼不見色塵 師云 却是耳見 學云 如何是意不知諸法 師云 眼知 學云 恁麽卽見聞路絕聲色喧然 師云 誰向爾道 又云 夫一切問答如針鋒相投 無纖毫參差相 事無不通 理無不備 良由一切言語 一切三昧 橫竪深淺 隱顯去來 是諸佛實相門 只據如今一時驗取 珍重

 

3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사중(四衆)이 운집했고 인천이 공경하며 눈으로 존안(尊顔)을 바라보니() 원컨대 반야를 선양(宣揚)하십시오. 사운(師云) 분명히 기취(記取)하라. 학운(學云; 학인이 이르되) 스님이 묘법을 선양하니 국왕이 만세(萬歲)하시고 인민이 안락합니다. 사운 누가 너를 향해 말했느냐. 학운 법이 그렇게 여연합니다(法爾如然). 사운 네가 영리(靈利)하다. 또 승문(僧問) 삼세제불은 지유(知有)하지 못하고 이노백고(狸奴白牯)는 도리어 지유한다. 이미 이 삼세제불이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지유하지 못합니까. 사운 도리어 이 네가 지유한다. 학운 이노백고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지유합니까. 사운 네가 어느 곳에서 삼세제불을 보느냐. 또 승문 듣건대() ()에 말씀이 있어 눈이 색진(色塵)을 보지 못하고 뜻()이 제법(諸法)을 알지 못한다. 무엇이 이 눈이 색진을 보지 못함입니까. 사운 도리어 이 귀가 본다. 학운 무엇이 이 뜻이 제법을 알지 못함입니까. 사운 눈이 안다. 학운 이러하다면 곧 견문(見聞)의 길이 끊기고 성색(聲色)이 훤연(喧然)합니다. 사운 누가 너를 향해 말했느냐. 우운(又云) 무릇 일체의 문답은 침봉(針鋒)을 서로 던짐과 같아서 섬호(纖毫; 저본에 纖豪로 지었음)의 참치(參差)한 형상(形相)이 없나니 사()는 불통(不通)함이 없고 리()는 불비(不備)함이 없다. 진실로() 일체의 언어와 일체의 삼매로 말미암아 횡수(橫竪)로 심천(深淺)하고 은현(隱顯)하며 거래하나니 이것이 제불의 실상문(實相門)이다. 다만 여금에 의거하여 일시에 험취(驗取)하라. 진중(珍重).

 

第四會 師上堂擧 古人云 如何是禪三界綿綿 如何是道十方浩浩 因什麽道三界綿綿 何處是十方浩浩底道理 要會麽 塞却眼塞却耳塞却舌身意 無空闕處無轉動處 上座作麽會 橫亦不得竪亦不得 縱亦不得奪亦不得 無用心處亦無施設處 若如是會得 始會法門絕擇 一切言語絕滲漏 曾有一僧問 作麽是絕滲漏底語 向他道 口似鼻孔甚好 上座如此會 自然不通風去 如識得盡 十方世界是金剛眼睛 無事珍重

 

4회 스님이 상당하여 거()했다. 고인이 이르되 무엇이 이 선()인가, 3()에 면면(綿綿)하다. 무엇이 이 도인가, 시방에 호호(浩浩)하다. 무엇으로 인해 말하되 3계에 면면하다 했으며 어느 곳이 이 시방에 호호한 도리인가. 알고자 하느냐, 눈을 막아버리고(塞却) 귀를 막아버리고 혀ㆍ몸ㆍ뜻을 막아버려야 공결처(空闕處)가 없고 전동처(轉動處)가 없다. 상좌가 어떻게(作麽) 이회(理會)하느냐. 가로()도 또한 얻지 못하고 세로()도 또한 얻지 못하고 놓아줌()도 또한 얻지 못하고 뺏음()도 또한 얻지 못하나니 용심(用心)할 곳이 없고 또한 시설(施設)할 곳도 없다. 만약 이와 같이 회득(會得)한다면 비로소 법문에 간택이 끊어졌음(絕擇)을 알며() 일체의 언어에 삼루(滲漏)가 끊긴다. 일찍이 1()이 있어 묻되 무엇이(作麽) 이 삼루가 끊긴 언어입니까. 그를 향해 말하되 입이 콧구멍과 같아야 심히 좋다. 상좌여 이와 같이 알아야 자연히 바람도 통하지 않으며 식득(識得)하여 다할 것 같으면 시방세계가 이 금강안정(金剛眼睛)이다.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第五會 師上堂有僧問云 天下太平大王長壽如何是王 師云 日曉月明 學云 如何領會 師云 誰是學人 又云 天下太平大王長壽 國土豐樂無諸患難 此是佛語 古不易今 不遷一言 可以定古定今 會取好諸上座 又僧問 承古有言 有物先天地 無形本寂寥 如何是有物先天地 師云 非同合 學云 如何是無形本寂寥 師云 誰問先天地 學云 恁麽卽隨靜林間獨自遊 師云 亂道作麽 又云 佛法不是遮箇道理 要會麽 言發非聲色前不物 始會天下太平大王長壽 久立珍重

 

5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문운(問云) 천하가 태평하고 대왕이 장수하시니 무엇이 이 왕입니까. 사운(師云) 해가 밝고 달이 밝다(日曉月明). 학운(學云) 어떻게 영회(領會)해야 합니까. 사운 누가 이 학인인가. 우운(又云) 천하가 태평하고 대왕이 장수하시고 국토가 풍락(豐樂)하고 여러 환난(患難)이 없다. 이것은 이 불어(佛語). 옛을 지금과 바꾸지 못하고 일언(一言)도 옮기지 않아야 가이(可以) 정고정금(定古定今)하나니 회취(會取)해야 좋다, 제상좌(諸上座). 또 승문(僧問) 듣건대() 고인(古人; 傅大士)이 말씀이 있어 물건이 있어 천지보다 앞이니 무형(無形)이며 본래 적료(寂寥)하다. 무엇이 이 물건이 있어 천지보다 앞입니까. 사운 함께 합함이 아니다(非同合). 학운(學云) 무엇이 무형이며 본래 적료함입니까. 사운 누가 천지보다 앞임을 묻는가. 학운 이러하다면 곧 고요한 임간(林間)을 따라 독자(獨自)로 노닐겠습니다. 사운 어지럽게 말해 무엇하랴. 우운(又云) 불법이 이 저개(遮箇)의 도리가 아니다. 알고자 하느냐. 말을 발()해도 소리가 아니며 색 앞은 물건이 아니라야 비로소 천하태평과 대왕장수를 안다.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第六會 師上堂示衆云 佛法現成 一切具足 古人道 圓同太虛無欠無餘 若如是且誰欠誰剩誰是誰非 誰是會者 誰是不會者 所以道 東去亦是上座 西去亦是上座 南去亦是上座 北去亦是上座 上座因什麽得成東西南北 若會得自然見聞覺知路絕 一切諸法現前 何故如此 爲法身無相觸目皆形 般若無知對緣而照 一時徹底會取好 諸上座 出家兒合作麽生 此是本有之理未爲分外 識心達本源 故號爲沙門 若識心皎皎地 實無絲毫障礙 上座久立珍重

 

6회 스님이 상당하여 시중(示衆)해 이르되 불법은 현성(現成)했고 일체에 구족했다. 고인(古人; 3)이 말하되 원만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만약 이와 같다면 또 누가 모자라며 누가 남으며 누가 옳으며 누가 그르며 누가 이 아는 자며(會者)며 누가 이 알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소이로 말하되 동으로 가도 역시(亦是) 상좌며 서로 가도 역시 상좌며 남으로 가도 역시 상좌며 북으로 가도 역시 상좌다. 상좌가 무엇으로 인해 동서남북을 득성(得成)하는가. 만약 회득(會得)한다면 자연히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길이 끊기고 일체제법이 현성(現前)한다.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은가. 법신은 무상(無相)이지만 촉목(觸目)하면 모두 형상(形狀)하고 반야는 무지(無知)지만 대연(對緣)하면 비추기 때문이다(). 일시에 철저히 회취(會取)해야 좋다. 제상좌(諸上座), 출가아(出家兒)가 합당히 어찌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 본유지리(本有之理)니 분한 밖이 되지 않는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을 통달(通達; )해야 고로 호()하여 사문이다. 만약 마음을 알아 교교지(皎皎地)면 실로 사호(絲毫; 저본에 絲豪로 지었음)의 장애도 없다. 상좌여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第七會 師上堂有僧問 欲入無爲海 先乘般若船 如何是般若船 師云 常無所住 如何是無爲海 師云 且會般若船 又僧問 古德云 登天不借梯 遍地無行路 如何是登天不假梯 師云 不遺絲髮地 學云 如何是遍地無行路 師云 適來向爾道什麽 師又云 百千三昧門 百千神通門 百千妙用門 盡不出得般若海中 何以故 爲於無住本建立諸法 所以道 生滅去來邪正動靜千變萬化 是諸佛大定門無過於此 諸上座 大家究取 增於佛法壽命珍重

 

7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무위해(無爲海)에 들고자 한다면 먼저 반야선(般若船)을 타라 하니 무엇이 이 반야선입니까. 사운(師云) 늘 머무는 바가 없다. 무엇이 이 무위해입니까. 사운 다만() 반야선을 알아라. 또 승문(僧問) 고덕(古德)이 이르되 하늘에 오르면서 사다리()를 빌리지 않고 온 땅(遍地)에 행로(行路)가 없다. 무엇이 이 하늘에 오르면서 사다리를 빌리지 않음입니까. 사운(師云) 사발지(絲髮地)도 유실(遺失; )하지 않았다. 학운(學云) 무엇이 이 온 땅에 행로가 없음입니까, 사운 적래(適來) 너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스님이 우운(又云) 백천(百千) 삼매문(三昧門)ㆍ백천 신통문(神通門)ㆍ백천 묘용문(妙用門)이 모두() 반야해(般若海) 가운데를 출득(出得)하지 못한다. 무슨 연고냐, 무주(無住)의 본()에 제법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소이로 말하되 생멸거래(生滅去來)ㆍ사정동정(邪正動靜)ㆍ천변만화(千變萬化)가 이 제불의 대정문(大定門)이니 이것을 초과할 게 없다. 제상좌여, 대가(大家)가 구취(究取)하여 불법의 수명을 더하게 하라. 진중(珍重).

 

第八會 師上堂有僧問 世尊有正法眼 付囑摩訶迦葉 只如迦葉在賓鉢羅窟 未審付囑何人 師云 敎我向誰說 學云 恁麽卽靈山付囑不異今日 師云 爾什麽處見靈山 又僧問 淨慧寶印 和尙親傳 未審今日一會當付何人 師云 鼕鼕鼓一頭打兩頭鳴 學云 恁麽卽千聖同儔古今不異 師云 禪河浪靜尋水迷源 又僧淸遇云 帝王請命師赴王恩 般若會中請師擧唱 師云 分明記取 學云恁麽卽雲臺寶網同演妙音 師云 淸遇何在 學云 法王法如是 師云 阿誰證明 又云 靈山付囑分明 諸上座一時驗取 若驗得更無別理 只是如今 譬如太虛 日明雲暗 山河大地一切有爲世界 悉皆明現 乃至無爲亦復如是 世尊付囑迄至于今 竝無絲毫差別 更付阿誰 所以祖師道 心自本來心 本心非有法 法法有本心 非心非本法 此是靈山付囑牓樣 諸上座徹底會取好 莫虛度時光 國王恩難報 諸佛恩難報 父母師長恩難報 十方施主恩難報 況建置如是次第 佛法興隆 若非國王恩力焉得如此 若要報恩 應須明徹道眼 入般若性海始得 久立珍重

祖師道; 本錄一第四祖優波毱多偈云 心自本來心 本心非有法 有法有本心 非心非本法

 

8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세존이 정법안(正法眼)이 있어 마하가섭에게 부촉했거니와 지여(只如) 가섭은 빈발라굴(賓鉢羅)에 있으면서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에게 부촉했습니까. 사운(師云) 나로 하여금 누구를 향해 설하게 하느냐. 학운(學云) 이러하다면 곧 영산의 부촉이 금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운 네가 어느 곳에서 영산을 보느냐. 또 승문(僧問) 정혜(淨慧; 文益)의 보인(寶印)을 화상이 친히 전수(傳受)했거니와 미심하오니 금일의 일회(一會)는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부촉합니까. 사운 동동고(鼕鼕鼓)는 일두(一頭; 一邊)를 치면 양두(兩頭; 兩邊)가 울린다. 학운(學云) 이러하다면 곧 천성(千聖)이 동주(同儔; 同伴)며 고금이 불이(不異)합니다. 사운 선하(禪河)의 파랑이 고요한데 물을 찾으면 근원을 미()한다. 또 승() 청우(淸遇)가 이르되 제왕(帝王)이 청명(請命)하여 스님이 왕은(王恩)에 다다랐으니 반야의 회중(會中)에 스님의 거창(擧唱)을 청합니다. 사운 분명히 기취(記取)하라. 학운(學云) 이러하다면 곧 운대(雲臺)와 보망(寶網)이 묘음(妙音)을 함께 연설합니다. 사운 청우(淸遇)는 어디에 있느냐. 학운 법왕의 법이 이와 같습니다. 사운 누가(阿誰) 증명하느냐. 우운(又云) 영산의 부촉이 분명하니 제상좌(諸上座)는 일시에 험취(驗取)하라. 만약 험득(驗得)한다면 다시 다른 이치가 없고 다만 이 여금(如今)이다. 비유컨대 태허(太虛)에 일명운암(日明雲暗)하고 산하대지와 일체의 유위세계(有爲世界)가 모두 다 환히 나타남과 같나니 내지 무위(無爲)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세존이 부촉하여 우금(于今; 至今)에 이르기까지(迄至) 모두() 사호(絲毫; 저본에 絲豪로 지었음)의 차별이 없거늘 다시 누구(阿誰)에게 부촉하느냐. 소이로 조사가 말하되(祖師道) 마음은 스스로 본래의 마음이니/ 본래의 마음은 법이 있지 않다/ 법법(法法)에 본심이 있나니/ 마음도 아니고 본법도 아니다. 이것이 이 영산에서 부촉한 방양(牓樣; 榜樣과 같음)이다. 제상좌(諸上座)가 철저히 회취(會取好)해야 좋나니 헛되이 시광(時光)을 지내지() 말아라. 국왕의 은혜를 갚기 어렵고 제불의 은혜를 갚기 어렵고 부모와 사장(師長)의 은혜를 갚기 어렵고 시방 시주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 하물며 이와 같이 차제(次第)를 건치(建置; 건립하고 설치)하여 불법이 흥륭(興隆)함이겠는가. 만약 국왕의 은력(恩力)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음을 얻겠는가. 만약 보은(報恩)을 요한다면 응당 모름지기 도안(道眼)이 명철(明徹; 明晰. 明白)해 반야의 성해(性海)에 들어가야 비로소 옳다.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祖師道; 본록1 4조 우바국다의 게에 이르되 마음은 스스로 본래의 마음이니/ 본래의 마음은 법이 있지 않다/ 법이 있으면 본래의 마음이 있겠지만/ 마음이 아니라서 본래의 법이 아니다.

 

第九會 師上堂有僧問 承先德云 人空法亦空 二相本來同 如何是二相本來同 師云 山河大地 學云 不會乞師方便 師云 什麽處是不方便處 又僧問 承敎有言 心淸淨故法界淸淨 如何是淸淨心 師云 迦陵頻伽共命之鳥 學云 心與法界是一是二 師云 爾自問別人問 師又云 大道廓然詎齊今古 無名無相是法是修 良由法界無邊心亦無際 無事不彰 無言不顯 如是會得喚作般若現前 理極同眞際 一切山河大地森羅萬象牆壁瓦礫 竝無絲毫可得虧闕 無事久立珍重

迦陵頻伽; <> kalaviṅka 此翻爲好聲鳥 美音鳥 此鳥産於印度 本出自雪山 山谷曠野亦多 其色黑似雀 羽毛甚美 喙部呈赤色 在卵殼中卽能鳴 音聲淸婉 和雅微妙 一切鳥聲所不能及 [新華嚴經七十八 大智度論二十八 翻譯名義集六]

共命之鳥; 法華天台文句輔正記十云 命命鳥者亦名共命之鳥 命共形殊以命從形 故云命命 三藏法數三十七云 共命鳥者 一身二頭之鳥也 謂如來所說法音 吉祥如彼禽之聲也

 

9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듣건대() 선덕(先德)이 이르되 인공(人空)이며 법도 또한 공()이니 2()이 본래 같다(). 무엇이 이 2상이 본래 같음입니까. 사운(師云) 산하대지다. 학운(學云) 알지 못하겠으니 스님의 방편을 구걸합니다. 사운 어느 곳이 이, 방편이 아닌 곳인가. 또 승문(僧問) 듣건대() ()에 말씀이 있어 마음이 청정한 연고로 법계도 청정하다. 무엇이 이 청정한 마음입니까. 사운 가릉빈가(迦陵頻伽)와 공명지조(共命之鳥). 학운 마음과 법계가 이 하나입니까 이 둘입니까. 사운 네가 스스로 묻는가 다른 사람이 묻는가. 스님이 또 이르되 대도(大道)가 확연(廓然)하니 어찌() 금고(今古)와 제등(齊等)한가. 무명무상(無名無相)인 이 법을 이 닦는다. 진실로() 법계가 무변함으로 말미암아 마음도 또한 무제(無際)니 나타나지() 않는 사()가 없고 나타나지() 않는 언()이 없다. 이와 같이 회득(會得)해야 반야가 현전한다고 불러 짓나니 이치가 다하면 진제와 같다(理極同眞際). 일체의 산하대지와 삼라만상과 장벽와력(牆壁瓦礫)이 모두() 사호(絲毫)만큼이라도 가히 휴궐(虧闕)함을 얻음이 없다. 무사(無事)하거늘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迦陵頻伽; <> kalaviṅka. 여기에선 호성조(好聲鳥)ㆍ미음조(美音鳥)로 번역함. 이 새는 인도에서 생산되는데 본래 설산으로부터 나왔으며 산곡과 광야에도 또한 많음. 그 색은 검고 참새와 비슷하며 깃털이 매우 아름다우며 부리 부분에 적색을 보임. 알껍질 속에 있으면서 곧 능히 우는데 음성이 청완(淸婉)하며 화아하고 미묘하여 일체의 새소리가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임 [신화엄경78. 대지도론28. 번역명의집6].

共命之鳥; 법화천태문구보정기10에 이르되 명명조(命命鳥)란 것은 또한 이름이 공명지조(共命之鳥). ()은 한가지며 형()은 다르나니 명이 형을 좇는지라 고로 이르되 명명(命命)이다. 삼장법수37에 이르되 공명조(共命鳥)란 것은 일신이두(一身二頭)의 새다. 이르자면 여래가 설하는 바 법음의 길상(吉祥)이 그 새()의 소리와 같음이다.

第十會師上堂有僧問 承師有言 九天擎玉印 七佛兆前心 如何是印 師云 不露文 如何是心 師云 爾名安嗣 又云 法界性海如函如蓋如鉤如鎖 如金與金色 位位皆齊無纖毫參差 不相混濫 非一非異 非同非別 若歸實地去 法法皆到底 不是上來問箇如何若何便是 不問時便非 在長連床上坐時是有 不坐時是無 只如諸方老宿言敎在世 如恒河沙 如來一大藏經卷卷皆說佛理 句句盡言佛心 因什麽得不會去 若一向纖絡言敎意識解會 饒上座經塵沙劫亦不能得徹 此喚作顚倒知見識心活計 竝無得力處 此蓋爲根脚下不明 若究盡諸佛法源 河沙大藏一時現前 不欠絲毫不剩絲毫 諸佛時常出世 時常說法度人 未曾間歇 乃至猿啼鳥叫草木叢林 常助上座發機 未有一時不爲上座 有如是奇特處 可惜許 諸上座大家究取令法久住世間 增益人天壽命 國王安樂 無事久立珍重

九天; 又稱九霄 天的最高處 形容極高 祖庭事苑五 九天者 中央鈞天 東方蒼天 東北方玄天 西北幽天 西方浩天 西南朱天 南方炎天 東南陽天 其說見淮南子(天文訓)

到底; 同到頭 最終 結果

根脚; 同脚根 卽脚跟 有行步作用

 

10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듣건대() 스님이 말씀이 있어 구천(九天)은 옥인(玉印)을 받들고() 칠불(七佛)은 짐조(朕兆) 전의 심()이다. 무엇이 이 인()입니까. 사운(師云) 문채(文彩; )가 드러나지 않는다. 무엇이 이 심()입니까. 사운 너의 이름은 안사(安嗣). 우운(又云) 법계의 성해(性海)가 여함여개(如函如蓋)하고 여구여쇄(如鉤如鎖)하고 금과 금색과 같나니 위위(位位)가 모두 가지런하고 섬호(纖毫)의 참치(參差)가 없고 서로 혼람(混濫)하지 않고 비일비이(非一非異)며 비동비별(非同非別)이다. 만약 실지(實地)로 돌아간다면 법법(法法)이 모두 도저(到底)라 이는 상래(上來)에 물은 여하약하(如何若何)는 바로 옳고 묻지 않을 때는 바로 그르고 장련상상(長連床上)에 앉았을 때는 이 있고 앉지 않았을 때는 이 없음이 아니다. 지여(只如) 제방의 노숙의 언교(言敎)가 재세(在世)함이 항하사와 같고 여래의 일대장경(一大藏經)의 권권(卷卷)마다 모두 불리(佛理)를 설하고 구구(句句)마다 모두 불심을 말하거늘 무엇 때문에(因什麽) 알지 못함을 얻느냐. 만약 일향(一向) 언교(言敎)에 섬호(纖毫)만큼이라도 잇거나() 의식으로 해회(解會)한다면 가령() 상좌가 진사겁(塵沙劫)을 경과하더라도 또한 능히 득철(得徹)하지 못한다. 이것을 전도된 지견이며 식심(識心)의 활계(活計)라고 불러 짓나니 모두 득력처(得力處)가 없다. 이것은 대개 근각(根脚) 아래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제불의 법원(法源)을 구진(究盡)한다면 하사(河沙)의 대장(大藏)이 일시에 현전하며 사호(絲毫; 저본에 絲豪로 지었음)도 모자라지 않고 사호(絲毫; 저본에 絲豪로 지었음)도 남지 않는다. 제불이 때로 늘 출세하고 때로 늘 설법하여 사람을 제도하되 일찍이 간헐(間歇)하지 않나니 내지 원제조규(猿啼鳥叫)와 초목총림이 상좌의 발기(發機)를 늘 도우되 일시라도 상좌를 위하지 아니함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기특처(奇特處)가 있거늘 가석하구나(可惜許). 제상좌여 대가(大家)가 구취(究取)하여 법으로 하여금 세간에 오래 머물게 하고 인천의 수명을 증익(增益)하고 국왕이 안락하소서. 무사(無事)하거늘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九天; 또 명칭이 구소(九霄)니 하늘의 가장 높은 곳. 극히 높음을 형용. 조정사원5 구천(九天)이란 것은 중앙은 균천이며 동방은 창천이며 동북방은 현천이며 서북은 유천이며 서방은 호천이며 서남은 주천이며 남방은 염천이며 동남은 양천이다. 그 설은 회남자(천문훈)를 보라.

到底; 도두(到頭)와 같음. 최종. 결과.

根脚; 각근(脚根)과 같음. 곧 각근(脚跟; 발뒤꿈치). 행보(行步; 보행)의 작용이 있음.

 

第十一會 師上堂擧古人云 吾有一言 天上人間 若人不會 綠水靑山 且作麽生是一言底道理 古人語須是曉達始得 若是將言而名於言 未有箇會處 良由究盡諸法根蔕 始會一言 不是一言半句思量解會喚作一言 若會言語道斷心行處滅 始到古人境界 亦不是閉目藏睛 暗覩無所見 喚作言語道斷 且莫賺會 佛法不是遮箇道理 要會麽 假饒經塵沙劫說 亦未曾有半句到 諸上坐經塵沙劫不說 亦未曾欠少半句 應須徹底會去始得 若如是斟酌名言 空勞心力竝無用處 與諸上座相共證明 後學初心速須究取 久立珍重

 

11회 스님이 상당하여 들었다(). 고인이 이르되 나에게 일언(一言)이 있나니 천상인간(天上人間)이며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한다면 녹수청산(綠水靑山; 저본에 으로 지었음)이다. 그래 무엇이(作麽生) 이 일언(一言)의 도리인가. 고인의 말을 모름지기 이 효달(曉達)해야 비로소 옳다. 만약 이 언()을 가지고 언()이라 이름한다면 이() 아는 곳(會處)이 있지 않나니 진실로() 제법의 근체(根蔕)를 구진(究盡)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일언을 안다(). 이는 일언반구(一言半句)로 사량(思量)하고 해회(解會)하여 일언이라 불러 짓지 않나니 만약 언어의 길이 끊기고(言語道斷) 심행의 처소가 멸함을 안다면 비로소 고인의 경계에 이른다. 또한 이는 눈을 감아 눈동자를 감추거나(閉目藏睛) 어두워서 보아도() 보이는 바가 없음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불러 짓지 않나니 다만 잘못 알지 말아라(且莫賺會). 불법은 이 저개(遮箇)의 도리가 아니다. 알고자 하느냐, 가요(假饒; 가령) 진사겁(塵沙劫)을 경과하며 설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반구(半句)에 이름이 있지 않으며 제상좌(諸上坐)가 진사겁을 경과하며 불설(不說)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반구(半句)가 흠소(欠少)하지 않나니 응당 꼭 철저히 알아야(會去) 비로소 옳다. 만약 이와 같이 명언(名言; 名稱과 언구)을 짐작(斟酌)하면 공연히 심력(心力)을 노고롭게 하고 모두 쓸 곳(用處)이 없다. 제상좌와 더불어 상공(相共) 증명하나니 후학과 초심은 속히 구취(究取)함을 써라.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第十二會 師上堂有僧問 髑髏常干世界 鼻孔摩觸家風 如何是髑髏常干世界 師云 更待答話在 學云 如何是鼻孔摩觸家風 師云 時復擧一遍 又僧問 一人執炬自盡其身 一人抱氷橫屍於路 此二人阿誰辨道 師云 不遺者 學云 不會乞師指示 師云 爾名敬新 學云 未審還有人證明也無 師云有 學云 什麽人證明 師云 敬新證明 又僧問 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云 異境靈蹤覩者皆羨 僧又云 見後如何 師云 適來向爾道什麽 又僧問 承古有言 敲打虛空鳴觳觳 石人木人齊應諾 六月降雪落紛紛 此是如來大圓覺 如何是敲打虛空底 師云 崑崙奴著鐵袴 打一棒行一步 學云 恁麽卽石人木人齊應諾也 師云 爾還聞麽 又云 諸佛法門時常如是 譬如大海千波萬浪 未曾暫住 未嘗暫有 未嘗暫無 浩浩地光明自在 宗三世於一毛端 圓古今於一念 應須徹底明達始得 不是問一則語記一轉話巧作道理 風雲水月四六八對 便當佛法 莫自賺諸上座究竟無益 若徹底會去實無可隱藏 無刹不彰 無塵不現 直下凡夫位齊諸佛 不用纖毫氣力 一時會取好 無事久立珍重

崑崙奴; 又作崑崙子 卽崑崙國(南海諸國)之黑人 或對來自印度西域人之蔑稱

 

12회 스님이 상당하자 어떤 중이 묻되 촉루(髑髏)가 세계를 상간(常干; 늘 범하다)하고 비공(鼻孔)이 가풍을 마촉(摩觸)한다. 무엇이 이 촉루가 세계를 상간함입니까. 사운(師云) 답화(答話)를 다시 기다린다. 학운(學云) 무엇이 이 비공이 가풍을 마촉함입니까. 사운 때에 다시 일편(一遍; 一回) 들어라(). 또 승문(僧問) 한 사람은 횃불을 가지고(執炬) 그 몸을 스스로 없애고(自盡) 한 사람은 얼음을 안고 길에 시체를 가로놓았습니다(橫屍). 이 두 사람에 누가(阿誰) 도를 분변했습니까. 사운 남기지 않는 자다(不遺者). 학운(學云) 알지 못하오니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운 너의 이름은 경신(敬新)이다. 학운 미심하오니 도리어 증명할 사람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운 있다. 학운 어떤 사람이 증명합니까. 사운 경신(敬新)이 증명한다. 또 승문 우두(牛頭)4조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운 이경(異境)과 영종(靈蹤)은 보는 자(覩者)가 모두 선망(羨望)한다. 중이 또 이르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적래(適來) 너를 향해 무어라고 말했는가. 또 승문 듣건대 고인이 말씀이 있어 허공을 고타(敲打)하니 울면서 자꾸 곱송그리고(鳴觳觳)/ 석인과 목인이 일제히 응낙한다/ 6월에 강설(降雪)하여 분분(紛紛)히 떨어지나니/ 이것이 이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다. 무엇이 이, 허공을 고타(敲打)하는 것입니까. 사운 고륜노(崑崙奴)가 철고를 입었나니(著鐵袴) 1() 때리매 1() 간다(). 학운(學云) 이러하다면 석인과 목인이 일제히 응낙함입니다. 사운 네가 도리어 듣느냐. 우운(又云) 제불의 법문이 때로 늘 이와 같나니 비유컨대 대해의 천파만랑(千波萬浪)이 일찍이 잠주(暫住)하지 않고 일찍이 잠유(暫有)하지 않고 일찍이 잠무(暫無)하지 않음과 같다. 호호지(浩浩地)에 광명이 자재하고 일모단(一毛端)에 삼세(三世)를 조종(朝宗; )하고 일념에 고금을 원만(圓滿; )히 하나니 응당 꼭 철저히 명달(明達)해야 비로소 옳다. 1칙어(則語)를 묻고 1전화(轉話)를 기록하여 교묘히 도리를 지어 풍운수월과 사륙팔대(四六八對)로 바로 불법에 당함은 옳지 못하다. 스스로 제상좌(諸上座)를 속이지() 말지니 구경(究竟)에 무익하다. 만약 철저히 알면(會去) 실로 가히 은장(隱藏)함이 없어 나타나지() 않는 찰토(刹土; )가 없고 나타나지() 않는 티끌이 없다. 직하(直下; 즉시)에 범부가 제불과 지위가 가지런하여 섬호(纖毫; 저본에 纖豪로 지었음)의 기력을 쓰지 않나니 일시에 회취(會取)해야 좋다. 무사(無事)하거늘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崑崙奴; 또 곤륜자(崑崙子)로 지음. 곧 곤륜국(崑崙國; 남해의 여러 나라)의 흑인. 혹은 인도와 서역으로부터 온 사람에 대한 멸칭.

 

開寶四年辛未 華頂西峯忽摧 聲震一山 師曰 吾非久矣 明年六月大星隕于峯頂 林木變白 師乃示疾於蓮華峯 參問如常 二十八日集衆言別 跏趺而逝 壽八十二 臘六十五

 

개보(開寶) 4년 신미(辛未; 971) 화정(華頂) 서봉(西峯)이 홀연히 꺾이면서 소리가 일산(一山)을 진동(震動)했다. 사왈(師曰) 내가 오래지 못하리라. 명년 6월 대성(大星)이 봉정(峯頂)에 떨어졌고() 임목(林木)이 백색으로 변했고 스님이 이에 연화봉에서 시질(示疾)했다. 참문(參問)은 여상(如常)했고 28일 집중(集衆)하여 이별을 말하고는 가부(跏趺)하여 서거했다. 나이는 82며 납은 65.

 

杭州報恩寺慧明禪師 姓蔣氏 幼出家三學精練 志探玄旨 乃南遊於閩越間 歷諸禪會莫契本心 後至臨川謁淨慧禪師 師資道合 尋迴鄞水大梅山庵居 時吳越部內禪學者雖盛 而以玄沙正宗置之閫外 師欲整而導之 一日有二禪客到 師問曰 上座離什麽處 曰都城 師曰 上座離都城到此山 則都城少上座 此山剩上座 剩則心外有法 少則心法不周 說得道理卽住 不會卽去 其二禪客不能對 新到僧問 如何是大梅主 師曰 闍梨今日離什麽處 僧無對 師尋遷於天台山白沙卓庵 時有朋彦上座 博學强記來訪師 敵論宗乘 師曰 言多去道遠矣 今有事借問 只如從上諸聖及諸先德 還有不悟者也無 朋彦曰 若是諸聖先德豈不有悟者哉 師曰 一人發眞歸源 十方虛空悉皆消殞 今天台山嶷然 如何得消殞去 朋彦不知所措 自是他宗汎學來者皆服膺矣

閫外; 祖庭事苑二 閫外 馮唐(漢代人)曰 閫外 上古王者遣將也 跪而推轂曰 閫以內者 寡人制之 閫以外者 將軍制之 韋昭曰 此郭門之閫 門中橛曰閫

 

항주(杭州) 보은사(報恩寺) 혜명선사(慧明禪師). 성이 장씨(蔣氏)며 어릴 적에 출가하여 삼학(三學)을 정련(精練)했고 의지(意志)가 현지(玄旨)를 탐구(探究)했다. 이에 민월(閩越) 사이를 남유(南遊)하며 여러 선회(禪會)를 경력(經歷)했으나 본심에 계합하지 못했다. 후에 임천(臨川)에 이르러 정혜선사(淨慧禪師; 文益)를 참알해 사자(師資)의 도가 합했다. 이윽고 은수(鄞水) 대매산(大梅山)으로 회귀하여 암거(庵居)했다. 때에 오월(吳越)의 부내(部內)에서 선학자(禪學者)가 비록 성()했지만 현사(玄沙)의 정종(正宗)을 곤외(閫外)로 안치한지라 스님이 정제(整齊)하고 인도(引導)하려고 했다. 어느 날 두 선객이 이르렀다. 스님이 문왈(問曰) 상좌는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도성(都城)입니다. 사왈(師曰) 상좌가 도성을 떠나 차산(此山)에 이르렀으니 곧 도성엔 상좌가 적어졌고() 차산엔 상좌가 남는다(). 남으면 곧 마음 밖에 법이 있음이며 적으면 곧 심법(心法)이 두루하지 못하다. 도리를 설득(說得)하면 곧 머물고 알지 못하면 곧 가거라. 그 두 선객이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신도승(新到僧)이 묻되 무엇이 이 대매주(大梅主)입니까. 사왈 사리(闍梨)는 금일 어느 곳을 떠났느냐. 중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이윽고 천태산 백사(白沙)로 옮겨 탁암(卓庵)했다. 때에 붕언(朋彦) 상좌가 있어 박학강기(博學强記)했고 스님을 내방하여 종승(宗乘)을 대적(對敵)해 논했다. 사왈 말이 많으면 도와의 거리가 멀다. 이제 유사(有事)하여 차문(借問)하나니 지여(只如) 종상(從上)의 제성(諸聖) 및 제선덕(諸先德)에 도리어 깨치지 못한 자가 있는가 또는 없는가. 붕언이 가로되 만약 이 제성과 선덕일진대 어찌 깨치지 않은 자가 있겠습니까. 사왈 한 사람이 발진(發眞)하여 귀원(歸源)하면 시방 허공이 모두 다 소운(消殞)한다 했는데(릉엄경9에 나옴). 지금 천태산이 억연(嶷然; 높은 모양)하거늘 어째해야 소운(消殞)함을 얻어 가겠는가. 붕언이 조처(措處)할 바를 알지 못했다. 이로부터 타종(他宗)에서 널리() 배우러 오는 자가 모두 복응(服膺)했다.

閫外; 조정사원2. 곤외(閫外) 풍당(馮唐; 漢代 사람)이 가로되 상고의 왕자(王者)가 장수를 파견하매 꿇어앉아 수레의 바퀴를 밀며 가로되 곤() 이내의 것은 과인이 통제하리니 곤 이외의 것은 장군이 그것을 통제하시오. 위소(韋昭; 삼국시대 의 문학가. 弘嗣)가 가로되 이것은 곽문(郭門)의 곤이다. 문 가운데의 문지방()을 가로되 곤임.

 

漢乾祐中吳越忠懿王延入王府問法 命住資崇院 師盛談玄沙宗一大師及地藏法眼宗旨臻極 王因命翠巖令參等諸禪匠及城下名公定其勝負 天龍禪師問曰 一切諸佛及佛法皆從此經出 未審此經從何而出 師曰 道什麽 天龍方再問 師曰 過也 資嚴長老問 如何是現前三昧 師曰 還聞麽 曰某甲不患聾 師曰 果然患聾 師擧雪峯塔銘問老宿云 夫從緣有者始終而成壞 非從緣有者歷劫而長堅 堅之與壞卽且置 雪峯只今在什麽處法眼別云 只今是成是壞 衆皆無對 設有對者亦不能當其徵詰 時群彦弭伏 王大悅命師居之 署圓通普照禪師

 

() 건우(乾祐; 948-950) 중 오월(吳越) 충의왕(忠懿王)이 왕부(王府)로 맞아들여 문법(問法)했고 명()하여 자숭원(資崇院)에 주()하게 했다. 스님이 현사 종일대사(宗一大師) 및 지장(地藏)ㆍ법안의 종지(宗旨)를 성담(盛談)해 극에 이르렀다(臻極). 왕이 인하여 취암영참(翠巖令參; 저본에 翠巖令三으로 지었음) 등 여러 선장(禪匠) 및 성하(城下)의 명공(名公)에게 명하여 그 승부를 정하게 했다. 천룡선사(天龍禪師)가 문왈 일체제불 및 불법이 모두 이 경을 좇아나온다. 미심하오니 이 경은 어디로 좇아나옵니까. 사왈(師曰)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천룡이 바야흐로 다시 물으려 하자 사왈 지나갔습니다(過也). 자엄장로(資嚴長老)가 묻되 무엇이 이 현전삼매(現前三昧)입니까. 사왈 도리어 듣습니까. 가로되 모갑은 환롱(患聾; 귀먹은 질환)이 아닙니다. 사왈 과연 환롱(患聾)이로구나. 스님이 설봉의 탑명(塔銘)을 들어 노숙(老宿)에게 물어 이르되 무릇 인연으로 좇아 있는 것은 시종 무너짐()을 이루고 인연으로 좇아 있지 않는 것은 역겁(歷劫)에 길이() 견고하다(). ()과 괴()는 곧 차치(且置)하고 설봉이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法眼別云 只今은 이 입니까, 입니까. 대중이 모두 대답이 없었다. 설사 대답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징힐(徵詰; 責問하며 詰難)을 당하지 못했다. 때에 군언(群彦; 賢士)이 미복(弭伏; 馴伏. 順服)했다. 왕이 대열(大悅)하며 스님에게 명하여 거주하게 하고 서()하여 원통보조선사(圓通普照禪師)라 했다.

 

師上堂謂衆曰 諸人還委得麽 莫道語默動靜無非佛事好 且莫錯會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汝還見香臺麽 曰某甲未會乞師指示 師曰 香臺也不識 問離却目前機 如何是西來意 師曰 汝何不問 曰恁麽卽委是去也 師曰 也是虛施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我見燈明佛 本光瑞如此 問如何是學人自己 師曰 特地申問是什麽意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十萬八千眞跋涉 直下西來不到東 問如何是第二月 師曰 揑目看華華數朵 見精明樹幾枝枝

燈明佛; 日月燈明佛 乃於過去世中出現 宣說法華經之佛 其光明在天如日月 在地如燈 故得此名 按法華經序品 過去世有二萬日月燈明佛 同名相繼出世 而說法華經 又佛本行集經一云 六萬諸佛皆同號燈明如來 楞嚴經五云 彌勒往昔曾從日月燈明佛出家 [佛名經一 法華經玄義一上 四明尊者敎行錄四]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제인(諸人)은 도리어 아느냐(委得麽).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불사(佛事)가 아님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좋나니 다만()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승문(僧問)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師曰) 너는 도리어 향대(香臺)를 보느냐. 가로되 모갑이 알지 못하오니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향대도 알지 못하느냐. 묻되 목전기(目前機)를 여의어버리고 무엇이 이 서래의입니까. 사왈 너는 왜 묻지 않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이것을 알겠습니다(委是去也). 사왈 또한 이 헛된 시설(施設)이다.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내가 등명불(燈明佛)을 보매 본래의 광서(光瑞)가 이와 같다(이상 2구는 법화경1에 나옴).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사왈 특지(特地) 신문(申問; 물음을 펴다)함은 이 무슨 뜻인가.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입니까. 사왈 십만팔천(十萬八千; 108천 리)을 참으로 발섭(眞跋)하면서 직하(直下)에 서래(西來)했으나 동()에 이르지 않았다. 묻되 무엇이 이 제2월입니까. 사왈 날목(揑目; 눈을 비비다)하여 꽃을 보매 꽃이 몇 떨기며 정명수(精明樹)를 보매 몇 지지(枝枝)던가.

燈明佛; 일월등명불이니 곧 과거세에 출현하여 법화경을 선설(宣說)한 부처. 그 광명이 하늘에 있으면 일월과 같고 땅에 있으면 등과 같은지라 고로 이 명칭을 얻었음. 법화경 서품을 안험컨대 과거세에 2만 일월등명불이 있어 동명(同名)으로 상계(相繼)하여 출세해 법화경을 설했음. 또 불본행집경1에 이르되 6만의 제불이 모두 동호(同號)의 등명여래다. 릉엄경5에 이르되 미륵이 지난 옛적에 일찍이 일월등명불을 좇아 출가했다 [불명경1. 법화경현의1. 사명존자교행록4].

 

漳州羅漢宣法大師智依 師上堂曰 盡十方世界無一微塵許法與汝作見聞覺知 還信麽 然雖如此 也須悟始得 莫將爲等閑 不見道 單明自己不悟目前 此人只具一隻眼 還會麽 僧問 纖塵不立爲什麽好醜現前 師曰 分明記取別處問人 問大衆雲集誰是得者 師曰 還曾失麽 問如何是佛 師曰 汝是 行脚僧問 如何是寶壽家風 師曰 一任觀看 曰恁麽卽大衆有賴 師曰 汝作麽生 曰終不敢謾大衆 師曰 嫌少作麽 師問僧 受業在什麽處 曰在佛迹 師曰 佛在什麽處 曰什麽處不是 師擧起拳曰 作麽生 曰和尙收取 曰放闍梨七棒 師問僧 今夏在什麽處 曰在無言上座處 師曰 還曾問訊他否 曰也曾問訊 師曰 無言作麽生問得 曰若得無言什麽處不問得 師喝之曰 恰似問老兄 師與彦端長老喫餠餤徒濫切 端曰 百種千般其體不二 師曰 作麽生是不二體 端拈起餠餤 師曰 只者百種千般 端曰 也是和尙見處 師曰 汝也是羅公詠梳頭樣 師將示滅 乃謂衆曰 今晩四大不和暢 雲騰鳥飛風動塵起浩浩地 還有人治得麽 若治得永劫不相識 若治不得 時時常見我 言訖告寂

餠餤; 餅類食品

 

장주(漳州) 라한(羅漢) 선법대사(宣法大師) 지의(智依).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온 시방세계에 1미진만큼(微塵許)의 법이라도 너희에게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지어 줌이 없나니 도리어 믿느냐.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또한 모름지기 깨달아야 비로소 옳나니 장차 등한(等閑)으로 삼지 말아라. 말함을 보지 못했는가, 자기를 홑으로 밝히고 목전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다만 일척안(一隻眼)을 갖추었다. 도리어 아느냐. 승문(僧問) 섬진(纖塵)도 세우지 않거늘 무엇 때문에 호추(好醜)가 현전합니까. 사왈 분명히 기취(記取)했다가 다른 곳에서 사람에게 물어라. 묻되 대중이 운집했는데 누가 이 득자(得者)입니까. 사왈 도리어 일찍이 잃었느냐.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네가 이것이다. 행각승이 묻되 무엇이 이 보수(寶壽)의 가풍입니까. 사왈 관간(觀看)하는 대로 일임한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대중이 신뢰함이 있습니다. 사왈 너는 어떠한가. 가로되 마침내 감히 대중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사왈 적음을 싫어해(嫌少) 무엇하랴. 스님이 중에게 묻되 수업(受業; 受業師)은 어느 곳에 있는가. 가로되 불적(佛迹)에 있습니다. 사왈 불()은 어느 곳에 있느냐. 가로되 어느 곳인들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스님이 주먹을 들어 일으키며 가로되 무엇인가(作麽生). 가로되 화상이 수취(收取)하십시오. 가로되 사리(闍梨)에게 7() 놓는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금년 여름은 어느 곳에 있었느냐. 가로되 무언(無言) 상좌의 처소에 있었습니다. 사왈 일찍이 그에게 문신(問訊)했느냐. 가로되 또한 일찍이 문신했습니다. 사왈 무언이거늘 어떻게 물음을 얻느냐. 가로되 만약 무언을 얻었다면 어느 곳엔들 물음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스님이 할()하고 가로되 노형(老兄)에게 물음과 흡사하다. 스님이 언단(彦端) 장로와 더불어 병담(餠餤)徒濫切을 먹는데 언단이 가로되 백종천반(百種千般)이 그 체()가 둘이 아니다. 사왈 무엇이(作麽生) 이 둘이 아닌 체인가. 언단이 병담을 집어 일으켰다. 사왈 다만 이것이(只者) 백종천반이다. 언단이 가로되 또한 이는 화상의 견처다. 사왈 너는 또한 이 나공이 빗을 읊는(羅公詠梳頭) 양상(樣相; )이다. 스님이 장차 시멸하려 하자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오늘 저녁 4()가 화창(和暢)하지 못하니 운등조비(雲騰鳥飛)하고 풍동진기(風動塵起)함이 호호지(浩浩地). 도리어 어떤 사람이 치료함을 얻겠는가. 만약 치료 함을 얻으면 영겁토록 서로 알지 못할 것이며 만약 치료함을 얻지 못한다면 시시(時時)로 늘 나를 보리라. 말을 마치자 고적(告寂)했다.

餠餤; 병류(餅類)의 식품.

 

金陵鍾山章義禪師道欽 太原人也 初住廬山棲賢 師上堂曰 道遠乎哉 觸事而眞 聖遠乎哉 體之則神 我尋常示汝 何不向衣鉢下坐地直下參取 要須上來討箇什麽 旣上來我卽事不獲已 便擧古德少許方便 抖擻些子龜毛兔角解落 諸上座欲得省要麽 僧堂裏三門下寮舍裏參取好 還有會處也未 若有會處試說看 與上座證明 僧問 如何是棲賢境 師曰 棲賢有什麽境 問古人拈椎竪拂 還當宗乘中事也無 師曰 古人道了也 問學人創入叢林 乞和尙指示 師曰 一手指天一手指地

 

금릉(金陵) 종산(鍾山) 장의선사(章義禪師) 도흠(道欽). 태원(太原) 사람이며 여산(廬山) 서형(棲賢)에 초주(初住)했다.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도가 멀다 하겠는가, 사물에 부딪히면(觸事) ()이며 성()을 멀다 하겠는가, 이를 체득하면(體之) 곧 신()이다. 내가 심상(尋常)에 너희에게 보이되 왜 의발하(衣鉢下)의 좌지(坐地)를 향해 직하(直下)에 참취(參取)하지 않느냐. 요컨대 올라옴을 써서 저() 무엇을 찾느냐(). 이미 올라왔으니 내가 즉사(卽事)하여 불획이(不獲已)해 바로 고덕의 소허(少許)의 방편을 들겠다. 사자(些子)의 귀모(龜毛)를 두수(抖擻; 떨치다)하니 토각(兔角)이 떨어질 줄 안다. 제상좌여 성요(省要)를 얻고자 하느냐, 승당 속ㆍ삼문(三門) 아래ㆍ요사(寮舍) 속에서 참취(參取)해야 좋으니라. 도리어 아는 곳(會處)이 있느냐 또는 아니냐. 만약 아는 곳이 있다면 시험 삼아 설해 보아라. 상좌에게 증명해 주겠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현경(棲賢境)입니까. 사왈(師曰) 서현에 무슨 경()이 있겠는가. 묻되 고인이 염추수불(拈椎竪拂)함은 도리어 종승(宗乘) 중의 일에 당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고인이 말해 마쳤다. 묻되 학인이 처음() 총림에 들었으니 화상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킨다.

 

江南國主請師居章義道場 示衆曰 總來遮裏立作什麽 善知識如河沙數 常與汝爲伴 行住坐臥不相捨離 但長連床上穩坐地 十方善知識自來參 上座何不信取 作得如許多難易 他古聖嗟見今時人不奈何了 乃曰 傷夫人情之感久矣 口對眞而不覺 此乃嗟汝諸人看却不知 且道看却什麽不知 何不體察古人方便 只爲信之不及致得如此 諸上座但於佛法中留心無不得者 無事體道去 僧問 如何是西來意 師曰 不東不西 問百年暗室一燈能破時如何 師曰 莫謾語 問佛法還受變異也無 師曰 上座是 僧問大衆雲集請師擧揚宗旨 師曰 久矣 問如何是玄旨 師曰 玄有什麽旨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청하여 스님이 장의도량(章義道場)에 거주했다. 시중(示衆)해 가로되 모두() 이 속으로 와, 서서 무엇하려느냐. 선지식이 하사수(河沙數)와 같으며 늘 너희에게 반려가 되어 주면서 행주좌와에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다. 단지 장련상상(長連床上)의 온좌지(穩坐地)에 시방의 선지식이 스스로 내참(來參)하거늘 상좌가 왜 신취(信取)하지 않고 허다한 것 같은 난이(難易)를 작득(作得)하느냐. () 고성(古聖), 금시의 사람이 어찌하지 못함(不奈何)을 탄식(歎息; )하며 보고 나서 이에 가로되 인정지감(人情之感)이 상한 지(傷夫) 오래되었다. 입이 대진(對眞)하고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곧() 너희 제인이 간각(看却)하고도 알지 못함을 탄식함이다. 그래 말하라, 무엇을 간각하고도 알지 못하느냐. 왜 고인의 방편을 체찰(體察; 體會하고 觀察)하지 않느냐. 다만 믿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음을 치득(致得; 이르게 하다)한다. 제상좌(諸上座)가 단지 불법 중에 유심(留心)하면 얻지 못할 자가 없다. 무사하니 체도(體道; 도를 體會)하라.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래의입니까. 사왈(師曰)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니다. 묻되 백 년 암실을 1()으로 능히 깨뜨릴 때 어떻습니까. 사왈 속이는 말(謾語)을 하지 말아라. 묻되 불법이 도리어 변이(變異)를 받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상좌가 이것이다. 승문 대중이 운집했으니 청컨대 스님이 종지(宗旨)를 거양(擧揚)하십시오. 사왈 오래되었다. 묻되 무엇이 이 현지(玄旨)입니까. 사왈 현()에 무슨 지()가 있겠는가.

 

金陵報恩匡逸禪師 明州人也 初住潤州慈雲 江南國主請居上院 署凝密禪師 一日上堂衆集 師顧視大衆曰 依而行之卽無累矣 還信麽 如太陽赫奕皎然地 更莫思量 思量不及 設爾思量得及 喚作分限智慧 不見先德云 人無心合道 道無心合人 人道旣合是名無事人 且自何而凡自何而聖 此若未會 也只爲迷情所覆 便去不得 迷時卽有窒礙 爲對爲待種種不同 忽然惺去亦無所得 譬如演若達多認影爲頭 豈不是擔頭覓頭 然正迷之時頭且不失 及乎悟去亦不爲得 何以故 人迷謂之失 人悟謂之得 得失在於人 何關於動靜 僧問 諸佛設法普潤群機 和尙設法什麽人得聞 師曰 只有汝不聞 問如何是報恩一句 師曰 道不是得麽 問十二時中思量不到處如何行履 師曰 汝如今在什麽處 問祖師西來如何擧唱 師曰 不違所請 問如何是一句 師曰 我答爭似汝擧 問佛爲一大事因緣出世 未審和尙出世如何 師曰 恰好 曰恁麽卽大衆有賴 師曰 莫錯會

赫奕; 一光輝炫耀貌 二顯赫貌 美盛貌

 

금릉(金陵) 보은(報恩) 광일선사(匡逸禪師). 명주(明州) 사람이며 윤주(潤州) 자운(慈雲)에 초주(初住)했다.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청하여 상원(上院)에 거주했고 서()하여 응밀선사(凝密禪師)라 했다. 어느 날 상당하여 대중이 모이자 스님이 대중을 돌아보고 가로되 의()하여 행하면 곧 누()가 없나니 도리어 믿느냐. 태양이 혁혁(赫奕)하여 교연지(皎然地)와 같나니 다시 사량(思量)하지 말아라, 사량이 미치지 못한다. 설사 너희가 사량하여 미침을 얻더라도 분한(分限)의 지혜라고 불러 짓는다. 보지 못하느냐, 선덕(先德)이 이르되 사람이 무심해야 도와 합하고 도가 무심해야 사람과 합한다. 사람과 도가 이미 합했으니 이 이름이 무사인(無事人)이다. () 어디로부터(自何) ()이며 어디로부터 성()인가. 이것을 만약 알지 못한다면(未會) 또한 다만 미정(迷情)에 덮인 바가 되어 바로 제거()함을 얻지 못한다. 미시(迷時)에 곧 질애(窒礙)가 있어 대()가 되고 대()가 되어 갖가지로 부동(不同)하거니와 홀연히 깨닫더라도(惺去) 또한 소득이 없다. 비유컨대 연야달다(演若達多)가 그림자를 인정하여 머리로 삼음과 같나니 어찌 이 머리를 지고 머리를 찿음(擔頭覓頭)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바로 미()했을 때 머리는 또() 잃지 않았고 오거(悟去)함에 이르러서도 또한 얻음이 되지 않는다. 무슨 연고냐, 사람이 미()함을 일컬어 실()이라 하고 사람이 오()함을 일컬어 득()이라 하거니와 득실은 사람에게 있거늘 어찌 동정(動靜)에 상관되겠는가. 승문(僧問) 제불이 설법(設法)하여 군기(群機)를 널리 윤택케 하거니와 화상이 설법(設法)하매 어떤 사람이 득문(得聞)합니까. 사왈(師曰) 다만 네가 듣지 못함이 있다. 묻되 무엇이 이 보은(報恩)1구입니까. 사왈 이것이 아니라고 말함을(道不是) 얻겠느냐. 묻되 12시 중에 사량(思量)이 이르지 않는 곳을 어떻게 행리(行履)합니까. 사왈 네가 여금에 어느 곳에 있느냐. 묻되 조사가 서래하여 어떻게 거창(擧唱)했습니까. 사왈 소청(所請)에 거스르지 않았다. 묻되 무엇이 이 1구입니까. 사왈 나의 답이 너의 거()와 어찌 같겠는가. 묻되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출세하셨거니와 미심하오니 화상의 출세는 어떻습니까. 사왈 흡호(恰好).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대중이 신뢰함이 있을 것입니다. 사왈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赫奕; 1. 광휘(光輝)가 현요(炫耀)한 모양. 2. 현혁(顯赫)한 모양. 미성(美盛)한 모양.

 

金陵報慈道場文遂導師 杭州人也 姓陸氏 乳抱中父母徙家于宣城 纔丱歲挺然好學 乃禮池州僧正落髮登戒 年十六觀方禪敎俱習 嘗究首楞嚴經十軸 甄分眞妄緣起本末精博 於是節科注釋文句交絡 厥功旣就 謁于淨慧禪師述己所業 深符經旨 淨慧問曰 楞嚴豈不是有八還義 師曰是 曰明還什麽 師曰 明還日輪 曰日還什麽 師懵然無對 淨慧誡令焚其所注之文 師自此服膺請益始忘知解 初住吉州止觀 乾德二年國主延入居長慶 次淸涼次報慈大道場 署雷音覺海大導師 禮待異乎他等

乳抱; 此指幼年時期

精博; 精深博大

八還; 八還辨見 諸變化相 各還本所因處 有八種也 楞嚴經二曰 阿難汝咸看此諸變化相 吾今各還本所因處 云何本因 阿難此諸變化 明還日輪 何以故 無日不明 明因屬日 是故還日 暗還黑月 通還戶牖 擁還牆宇 緣還分別 頑虛還空 欝𡋯還塵 淸明還霽 則諸世間一切所有 不出斯類 汝見八種見精明性 當欲誰還 何以故 若還於明 則不明時無復見暗 雖明暗等種種差別 見無差別 諸可還者自然非汝 不汝還者非汝而誰 則知汝心本妙明淨 汝自迷悶喪本受輪 於生死中常被漂溺 是故如來名可憐愍

 

금릉(金陵) 보자도량(報慈道場) 문수도사(文遂導師). 항주(杭州) 사람이며 성이 육씨(陸氏). 유포(乳抱) 중에 부모가 선성(宣城)으로 집을 이사(移徙)했고 겨우 관세(丱歲)에 정연(挺然)히 학문을 좋아했다. 이에 지주(池州) 승정(僧正)을 참례(參禮)하여 낙발(落髮)하고 등계(登戒)했다. 나이 16에 제방을 관람하면서 선교(禪敎)를 모두() 익혔다. 일찍이 수릉엄경 10()을 탐구(探究)했고 진망(眞妄) 연기(緣起)의 본말을 견분(甄分; 밝게 분변)하고 정박(精博)했다. 이에 절과(節科)를 주석(注釋)하여 문구(文句)가 교락(交絡)했다. 그 공(厥功)을 이미 이루자 정혜선사(淨慧禪師)를 참알하여 자기의 소업(所業; 작업한 바)을 진술했는데 깊이 경지(經旨)에 부합(符合)했다. 정혜가 문왈(問曰) 릉엄에 어찌 이 팔환(八還)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 사왈(師曰) 그렇습니다. 가로되 명()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사왈 명은 일륜(日輪)으로 돌아갑니다. 가로되 일()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스님이 몽연(懵然)하여 대답이 없었다. 정혜가 훈계(訓誡)하면서 그 소주지문(所注之文)을 불사르게 했다. 스님이 이로부터 복응(服膺)하며 청익했고 비로소 지해(知解)를 잊었다. 처음은 길주(吉州) 지관(止觀)에 주()했는데 건덕(乾德) 2(964) 국주(國主)가 맞아들여 장경(長慶)에 거주케 했다. 다음은 청량(淸涼)이었고 다음은 보자대도량(報慈大道場)이었다. ()하여 뇌음각해대도사(雷音覺海大導師)라 했고 예대(禮待)가 타인 등과 달랐다.

乳抱; 여기에선 유년시기(幼年時期)를 가리킴.

精博; 정심(精深)하고 박대(博大).

八還; 팔환변견(八還辨見)이니 모든 변화의 모양은 각각 본래 인했던 바의 곳으로 돌아가나니 8종이 있음. 릉엄경2에 가로되 아난아, 네가 이 모든 변화의 모양을 다 보거니와 내가 이제 본래 인했던 바의 곳으로 돌리겠다. 무엇이 본인(本因)인가. 아난아, 이 모든 변화는 밝음은 일륜으로 돌아간다. 무슨연고인가. 해가 없으면 밝지 못하나니 밝음의 인()은 해에 속한다. 이런 고로 해로 돌아간다. 어둠은 흑월(黑月)로 돌아가고 통()은 호유(戶牖; )로 돌아가고 옹색(壅塞; )은 장우(牆宇; 屋邊)로 돌아가고 연()은 분별로 돌아가고 완허(頑虛)는 허공으로 돌아가고 울발(欝𡋯; 𡋯은 티끌)은 티끌로 돌아가고 청명(淸明)은 갬()으로 돌아간다. 곧 모든 세간의 일체 소유가 이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네가 보는 8종의 견정명성(見精明性)은 마땅히 누구에게 돌리려 하느냐. 무슨 연고인가 하면 만약 밝음으로 돌린다면 곧 밝지 않을 때엔 다시 어둠을 보지 못한다. 비록 명암 등이 갖가지로 차별이지만 견()은 차별이 없다. 모든 가히 돌려주는 것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네가 돌려주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곧 알지니 너의 마음은 본래 묘하고 명정(明淨)하지만 네가 스스로 미민(迷悶)하여 근본을 상실하고 윤회를 받아 생사 중에 늘 표닉(漂溺)함을 입는다. 이런 고로 여래가 이름해 가히 연민(憐愍)이라 한다.

 

師上堂謂衆曰 天人群生類 皆承此恩力 威權三界 德被四生 共稟靈光咸稱妙義 十方諸佛常頂戴 汝誰敢是非及乎 向遮裏喚作開方便門 對根設敎便有如此 如彼流出無窮 若能依而奉行 有何不可 所以淸涼先師道 佛卽是無事人 且如今覓箇無事人也不可得 僧問 崇壽佛法付囑止觀 止觀佛法付囑何人 師曰 汝試擧崇壽佛法看 問巔山巖崖還有佛法也無 師曰 汝喚什麽作巔山巖崖 問如何是道 師曰 忘想顚倒 師謂衆曰 老僧平生百無所解 日日一般雖住此間隨緣任運 今日諸上座與本無異 僧問 如何是無異底事 師曰 千差萬別 僧再問 師曰 止止不須說 且會取千差萬別 問如何是和尙家風 師曰 方丈板門扇 問如何是無相道場 師曰 四郞五郞廟 問如何是吹毛劍 師曰 簳麫杖 問如何是正直一路 師曰 遠遠近近 曰便恁麽去時如何 師曰 咄哉癡人此是險路 師問僧 從什麽處來 曰撫州曹山來 師曰 幾到此 曰七程 師曰 行却許多山林谿㵎 何者是汝自己 曰總是 師曰 衆生顚倒認物爲己 曰如何是學人自己 師曰 總是 師又曰 諸上座各在止觀經冬過夏 還有人悟自己也無 止觀與汝證明 令汝眞見不被邪魔所惑 問如何是學人自己 師曰 好箇師僧眼目甚分明

方丈板; 懸於方丈室前之板

; 里程 距離 字彙 程 驛程道里也 淸代顧炎武日知錄十 凡陸行之程 馬日七十里 步及驢五十里 車三十里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천()ㆍ인() 군생류(群生類)가 모두 이 은력(恩力)을 승수(承受)하나니 위()3()를 장악(掌握; )하고 덕()4()에 미치며() 함께(; 저본에 으로 지었음) 영광(靈光)을 받아() 모두() 묘의(妙義)라고 일컫는다(). 시방제불이 늘 정대(頂戴)하거늘 너희의 누가 감히 시비를 언급(言及; )하겠는가. 이 속을 향해 방편문을 열었다고 불러 짓나니 대근(對根)하여 설교(設敎)하는지라 바로 이와 같음이 있으며 그 유출(流出)이 무궁함과 같다. 만약 능히 의()하여 봉행한다면 어떤 불가(不可)함이 있으리오. 소이로 청량선사(淸涼先師; 文益)가 말하되 부처는 즉시(卽是) 무사인(無事人)이거늘 다만() 여금에 저() 무사인을 찾으면 또한 불가득이다. 승문(僧問) 숭수(崇壽; 文益)의불법은 지관(止觀; 文遂)에게 부촉했거니와 지관의 불법은 어떤 사람에게 부촉합니까. 사왈(師曰) 네가 시험 삼아 숭수의 불법을 들어 보아라. 묻되 전산암애(巔山巖崖)에 도리어 불법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네가 무엇을 일러 전산암애라 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사왈 망상으로 전도(顚倒)됨이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노승은 평생 온갖 아는 바가 없나니(百無所解) 날마다 일반(一般)으로 비록 차간(此間)에 거주하지만 수연(隨緣)하여 임운(任運)한다. 금일 제상좌(諸上座)는 본래와 다름이 없다. 승문 무엇이 이 다름이 없는 일입니까. 사왈 천차만별이다. 중이 재문(再問)하자 사왈 그쳐라, 그쳐라, 설함을 쓰지 않으리니 다만() 천차만별을 회취(會取)하라.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방장판(方丈板)과 문선(門扇; 문짝)이다. 묻되 무엇이 이 무상도량(無相道場)입니까. 사왈 사랑오랑(四郞五郞)의 묘(). 묻되 무엇이 이 취모검(吹毛劍)입니까. 사왈 간면장(簳麫杖; 은 볏줄기)이다. 묻되 무엇이 이 정직(正直)한 일로(一路)입니까. 사왈 먼 데는 멀고 가까운 데는 가깝다(遠遠近近). 가로되 바로 이렇게 갈 때 어떻습니까. 사왈 돌재(咄哉) 치인(癡人), 이것이 이 험로(險路).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으로 좇아왔느냐. 가로되 무주(撫州) 조산(曹山)에서 왔습니다. 사왈 몇 정() 만에 여기에 이르렀는가. 가로되 7()입니다. 사왈 허다한 산림과 계간(谿㵎)을 행각(行却)했거니와 무엇이(何者) 이 너의 자기인가. 가로되 모두 이것입니다(總是). 사왈 중생이 전도(顚倒)하여 사물을 인정해 자기로 삼는구나(認物爲己). 가로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사왈 모두 이것이다. 스님이 우왈(又曰) 제상좌(諸上座)가 각자 지관(止觀)에 있으면서 경동과하(經冬過夏)하거니와 도리어 어떤 사람이 자기를 깨쳤느냐 또는 아니냐. 지관이 너에게 증명해 주어 너로 하여금 참으로 보아서 사마(邪魔)의 혹란(惑亂)하는 바를 입지 않게 하겠다.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사왈 호개(好箇)의 사승(師僧)이 안목이 심히 분명하구나.

方丈板; 방장실 앞에 매단 판.

; 이정(里程). 거리. 자휘 정() 역정(驛程)의 도리(道里). 청대 고염무의 일지록10 무릇 육행(陸行)의 정()은 말은 하루에 70리며 도보 및 나귀는 50리며 수레는 30리다.

 

漳州羅漢院守仁禪師 泉州永春人也 初參淨慧 後迴故郡止東安興敎寺上方院 示衆曰 只據如今誰欠誰剩 然雖如此猶是第二義門 上座若明達得去 也且是一是二 更須子細看 僧問 如何是祖師西來的的意 師曰 卽今是什麽意 問如何是涅槃 師曰 生死 曰如何是生死 師曰 適來道什麽 僧衆晩參 師謂衆曰 物物本來無處所 一輪明月印心池 便歸方丈

 

장주(漳州) 라한원(羅漢院) 수인선사(守仁禪師). 천주(泉州) 영춘(永春) 사람이다. 정혜(淨慧)를 초참(初參)했고 후에 고군(故郡)으로 회귀하여 동안(東安) 흥교사(興敎寺) 상방원(上方院)에 머물렀다(). 시중(示衆)해 가로되 다만 여금에 의거하거늘 누가 모자라며 누가 남는가.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오히려 이는 제2의문(第二義門)이다. 상좌가 만약 명달(明達)하여 얻어 간다면 또한 다만(也且) 이 하나인가 이 둘인가. 다시 자세히 봄을 써라. 승문(僧問)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 적적(的的; 확실)한 뜻입니까. 사왈(師曰) 즉금은 이 무슨 뜻인가. 묻되 무엇이 이 열반입니까. 사왈 생사(生死). 가로되 무엇이 이 생사입니까. 사왈 적래(適 來)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승중(僧衆)이 만참(晩參)하자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물건마다 본래 처소가 없나니 일륜(一輪) 명월이 심지(心池)에 인()을 친다. 바로 방장으로 돌아갔다.

 

師次住漳州報恩院 謂衆曰 報恩遮裏不曾與人揀話 今日與諸上座揀一兩則話 還願樂麽 諸上座鶴脛長鳧脛短 甘草甜黃蘗苦 恁麽揀辨還愜雅意麽 諸上座莫道血脈不通泥水有隔好 且莫錯會 珍重 僧問 如何是西來意 師曰 喚什麽作西來意 曰恁麽卽無西來也 師曰 由汝口頭道 問如何是報恩家風 師曰 無汝著眼處 問學人未委稟承 請師方便 師曰 莫相孤負麽 曰恁麽卽有師資之分也 師曰 叢林見多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向汝道什麽 問如何是無生之相 師曰 捨身受身 曰恁麽卽生死無過也 師曰 料汝恁麽會 師又曰 人人皆備理 一一盡圓常 問如何是圓常之理 師曰 無事不參差 曰恁麽卽縱橫法界也 師曰 巧道有何難 問如何是不到三寸 師曰 汝問我答 師問僧 什麽處來 曰福州來 師曰 跋涉如許多山嶺 阿那箇是上座自己 曰某甲親離福州 師曰 恁麽商量別有商量 曰更作麽生商量 師曰 汝話墮也 問不昧緣塵請師一接 師曰 喚什麽作緣塵 僧曰 若不伸問焉息疑情 師曰 若不是今日便作官方

雅意; 一素來的意願 本意 二風雅的情趣 三美意 好意

官方; 政府方面

 

스님이 다음 장주(漳州) 보은원(報恩院)에 주()했다.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보은(報恩)의 이 속에선 일찍이 화()를 간()하여 사람에게 주지 않았지만 금일 제상좌에게 일양칙화(一兩則話)를 가려() 주겠나니 도리어 원요(願樂)하느냐. 제상좌여, 학의 정강이()는 길고 오리의 정강이는 짧고 감초(甘草)는 달고 황벽(黃蘗)은 쓰다. 이러한 간변(揀辨)은 도리어 아의(雅意)에 알맞은가(). 제상좌여 혈맥이 불통하고 이수(泥水)가 유격(有隔)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좋으니라. 다만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진중(珍重).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래의입니까. 사왈(師曰) 무엇을 일러 서래의라 하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서래(西來)가 없습니다. 사왈 너의 구두(口頭)로 말미암아 말한다. 묻되 무엇이 이 보은(報恩)의 가풍입니까. 사왈 네가 착안(著眼)할 곳이 없다. 묻되 학인이 품승(稟承)을 알지() 못하니 스님의 방편을 청합니다. 사왈 서로 고부(孤負)함이 아니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사자(師資)의 나눔이 있습니다. 사왈 총림에서 봄이 많다(見多).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너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묻되 무엇이 이 무생지상(無生之相)입니까. 사왈 사신(捨身)하고 수신(受身)한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생사에 허물이 없습니까. 사왈 사료(思料)컨대 네가 이렇게 아는구나. 스님이 우왈(又曰) 사람마다 모두 비리(備理)하여 하나하나 모두 원상(圓常)이다. 묻되 무엇이 이 원상지리(圓常之理)입니까. 사왈 무사(無事)하고 참치(參差)가 아니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종횡으로 법계입니다. 사왈 교묘한 말은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묻되 무엇이 이 삼촌(三寸; )에 이르지 않음입니까. 사왈 네가 묻고 내가 답한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복주(福州)에서 옵니다. 사왈 허다한 것 같은 산령(山嶺)을 발섭(跋涉)했거니와 어느 것(阿那箇)이 이 상좌의 자기인가. 가로되 모갑은 친히 복주를 떠났습니다. 사왈 이렇게 상량(商量)하는가, 달리 상량이 있는가. 가로되 다시 어떻게 상량해야 합니까. 사왈 너는 화타(話墮)했다. 묻되 연진(緣塵)을 불매(不昧)하고 스님의 일접(一接)을 청합니다. 사왈 무엇을 일러 연진이라 하느냐. 승왈 만약 신문(伸問)하지 않았다면 어찌() 의정(疑情)을 쉬겠습니까. 사왈 만약 이 금일이 아니었다면 바로 관방(官方)을 지었으리라.

雅意; 1. 소래(素來)의 의원(意願). 본의. 2. 풍아(風雅)한 정취(情趣). 3. 미의(美意). 호의(好意).

官方; 정부(政府) 방면.

 

杭州永明寺道潛禪師 河中府人也 姓武氏 初詣臨川謁淨慧禪師 一見異之便容入室 一日淨慧問曰 子於參請外看什麽經 師曰 看華嚴經 淨慧曰 總別同異成壞六相 是何門攝屬 師對曰 文在十地品中 據理則世出世間一切法皆具六相 曰空還具六相也無 師懵然無對 淨慧曰 子却問吾 師乃問曰 空還具六相也無 淨慧曰空 師於是開悟踊躍禮謝 淨慧曰 子作麽生會 師曰空 淨慧然之 異日因四衆士女入院 淨慧問師曰 律中道 隔壁聞釵釧聲卽名破戒 見覩金銀合雜朱紫騈闐 是破戒不是破戒 師曰 好箇入路 淨慧曰 子向後有五百毳徒 而爲王侯所重在 師尋禮辭駐錫於衢州古寺 閱大藏經而已 後忠懿王錢氏命入府受菩薩戒 署慈化定慧禪師 建大伽藍號慧日永明 請居之 師曰 欲請塔下羅漢銅像過新寺供養 王曰 善矣 予昨夜夢十六尊者乞隨禪師入寺 何昭應之若是 仍於師號加應眞二字 師坐永明大道場常五百衆

隔壁聞釵釧聲; 祖庭事苑五 聞釵釧 若有菩薩自言戒淨 雖不與彼女人身合嘲調戲笑 於壁障外 遙聞女人瓔珞環釧種種諸聲 心生愛著 如是菩薩成就欲法 毁破淨戒 汙辱梵行 不得名爲淨戒具足 見涅槃(31)

 

항주(杭州) 영명사(永明寺) 도잠선사(道潛禪師). 하중부(河中府) 사람이며 성이 무씨(武氏). 처음 임천(臨川)으로 나아가 정혜선사(淨慧禪師)를 예알하자 한 번 보매 이상하게 여기고 바로 입실을 허용했다. 어느 날 정혜가 문왈(問曰) 자네가 참청(參請)하는 외에 무슨 경을 보는가. 사왈(師曰) 화엄경을 봅니다. 정혜가 가로되 총별동이성괴(總別同異成壞)6()은 이 어떤 문에 섭속(攝屬)되었는가. 스님이 대왈(對曰) 글이 십지품(十地品) 중에 있습니다. 이치에 의거하자면 곧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이 다 6상을 갖췄습니다. 가로되 공()은 도리어 6상을 갖췄는가 또는 아닌가. 스님이 몽연(懵然)하여 대답이 없었다. 정혜가 가로되 자네가 도리어 나에게 물어라. 스님이 이에 문왈(問曰) 공은 도리어 6상을 갖추었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정혜가 가로되 공(). 스님이 이에 개오(開悟)했고 용약(踊躍)하고 예사(禮謝)했다. 정혜가 가로되 자네는 어떠한가. 사왈 공(). 정혜가 그렇다 하였다. 다른 날에 4()의 사내와 여자들이 사원에 들어옴으로 인해 정혜가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율 가운데 말하기를 벽 너머에서 비녀와 팔찌 소리만 들어도(聞釵釧聲) 곧 이름이 파계라 했다. 현재() 금은이 합잡(合雜)하고 주자(朱紫)가 변전(駢闐; 한 곳에 모임)함을 보는데 이 파계인가, 이 파계가 아닌가. 사왈 좋은 입로입니다(好箇入路). 정혜가 가로되 자네는 향후에 5백 취도(毳徒; 僧徒)가 있을 것이며 왕후(王侯)가 존중하는 바가 될 것이다. 스님이 이윽고 예사(禮辭)하고 구주(衢州) 고사(古寺)에 주석(駐錫)하며 대장경을 열람할 따름이었다. 후에 충의왕(忠懿王) 전씨(錢氏)가 입부(入府)를 명()하고 보살계를 받고 서()하여 자화정혜선사(慈化定慧禪師)라 했다. 대가람(大伽藍)을 건립하여 호를 혜일영명(慧日永明)이라 하고 거주를 청했다. 사왈 청하려 하시거든 탑하(塔下)의 라한(羅漢) 동상(銅像)을 신사(新寺)에 이르게 하여() 공양하십시오. 왕왈(王曰) 좋습니다(善矣). 내가 어젯밤 꿈에 16존자가 선사를 따라 입사(入寺)하기를 구걸했습니다. 어찌하여 소응(昭應; 應驗)이 이와 같을까요(若是). 인하여() 사호(師號)에 응진(應眞) 2자를 더했다. 스님이 영명대도량(永明大道場)에 앉으매 늘 오백중(五百衆)이었다.

隔壁聞釵釧聲; 조정사원5. 문차천(聞釵釧) 만약 어떤 보살이 스스로 계()가 청정하다고 말하며 비록 저 여인과 몸을 합치거나 조조(嘲調; 는 희롱할 조. 調는 어울릴 조. 곧 어울려 희롱함)하고 희소(戲笑)하지 않더라도 벽장(壁障; 벽의 障碍) 밖에서 멀리 여인의 영락(瓔珞)과 환천(環釧; 은 고리 환. 은 팔찌 천)의 갖가지 여러 소리를 듣고서 마음에 애착을 내면 이와 같은 보살은 욕법(欲法)을 성취하고 정계(淨戒)를 훼파(毀破)하며 범행(梵行)을 오욕(汙辱)했으므로 정계를 구족했다고 이름함을 얻지 못한다. 열반경(31)을 보라.

 

師上堂謂衆曰 佛法顯然因什麽却不會去 諸上座欲會佛法 但問取張三李四 欲會世法則參取古佛叢林 無事久立 僧問 如何是永明的的意 師曰 今日十五明朝十六 曰覽師的的意 師曰 何處覽 問如何是永明家風 師曰 早被上座答了也 問三種病人如何接 師曰 汝是聾人 曰請師方便 師曰 是方便 問牛頭未見四祖時爲什麽百鳥銜華 師曰 見東見西 曰見後爲什麽不銜華 師曰 見南見北 曰昔日作麽生 師曰 且會今日 問如何是第二月 師曰月 問如何是覿面事 師曰 背後是什麽 問文殊仗劍擬殺何人 師曰 止止 曰如何是劍 師曰 眼是 問諸餘卽不問 向上宗乘亦且置 請師不答 師曰 好箇師僧子 曰恁麽卽禮拜去也 師曰 不要三拜 盡汝一生去 一日大衆參 師指香鑪曰 汝諸人還見麽 若見一時禮拜各自歸堂 僧問 至道無言借言顯道 如何是顯道之言 師曰 切忌揀擇 問如何是慧日祥光 師曰 此去報慈不遠 曰恁麽卽親蒙照燭也 師曰 且喜沒交涉

文殊仗劍; 仗 持也 握也 祖庭事苑六 文殊仗劍 五百菩薩得宿命智 知億多劫所作重罪 以憂悔故 不證無生 時文殊師利 知其念已 於大衆中 把刀害佛 佛言 若欲害我 爲善害我 文殊白佛 云何名爲若欲害我 爲善害我 佛因廣說一切諸法皆如幻化 若能如是 是善害我 菩薩由是照知宿罪皆如幻化 得無生忍 五百菩薩 異口同音而說偈言 文殊大智士 深達法源底 自手握利劍 持逼如來身 如劍佛亦爾 一相無有二 無相無所生 是中云何殺 見寶積百五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불법이 현연(顯然)하거늘 무엇으로 인해 도리어 알지 못하느냐(不會去). 제상좌(諸上座)가 불법을 알려고 하거든 단지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문취(問取)하고 세법(世法)을 알려고 하거든 곧 고불총림(古佛叢林)을 참취하라. 무사(無事)하거늘 구립(久立)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영명(永明)의 적적(的的)한 뜻입니까. 사왈(師曰) 금일은 15며 명조(明朝)16이다. 가로되 스님의 적적한 뜻을 보았습니다(). 사왈 어느 곳에서 보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영명(永明)의 가풍입니까. 사왈 벌써 상좌가 답료(答了)함을 입었다. 묻되 삼종병인(三種病人; 盲聾瘂)을 어떻게 접인(接引)합니까. 사왈 너는 이 농인(聾人)이다. 가로되 스님의 방편을 청합니다. 사왈 이것이 방편이다. 묻되 우두(牛頭)4조를 뵙지 않았을 때 무엇 때문에 백조(百鳥)가 함화(銜華)했습니까. 사왈 동을 보고 서를 보았다. 가로되 뵌 후엔 무엇 때문에 함화하지 않았습니까. 사왈 남을 보고 북을 보았다. 가로되 석일(昔日)은 어떻습니까. 사왈 다만() 금일을 알아라. 묻되 무엇이 이 제2(第二月)입니까. 사왈 월()이다. 묻되 무엇이 이 적면사(覿面事)입니까. 사왈 배후(背後)는 이 무엇인가. 묻되 문수가 장검하여(文殊仗劍; 저본에 으로 지었음)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사왈 그쳐라(), 그쳐라. 가로되 무엇이 이 검입니까. 사왈 눈이 이것이다(眼是). 묻되 제여(諸餘)는 곧 묻지 않고 향상종승(向上宗乘)도 또한 차치(且置)하고 스님의 부답(不答)을 청합니다. 호개(好箇)의 사승자(師僧子; 는 조사)로구나.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예배하겠습니다. 사왈 삼배(三拜)를 요하지 않나니 너의 일생(一生)을 없애어라. 어느 날 대중이 참()하자 스님이 향로(香鑪)를 가리키며 가로되 너희 제인(諸人)이 도리어 보느냐. 만약 보았거든 일시에 예배하고 각자 귀당(歸堂)하라. 승문(僧問) 지도(至道)는 무난(無言)하나니 말을 빌려 도를 나타낸다(借言顯道). 무엇이 이 도를 나타내는 말입니까. 사왈 간택(揀擇)을 간절히 꺼린다. 묻되 무엇이 이 혜일(慧日)의 상광(祥光)입니까. 사왈 여기에서 보자(報慈)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친히 조촉(照燭)을 입었습니다. 사왈 다만 교섭이 없음을 기뻐한다(且喜沒交涉).

文殊仗劍; ()은 지(). (; 쥐다). 조정사원6 문수장검(文殊仗劍) 5백 보살이 숙명지(宿命智)를 얻어서 억다겁(億多劫)에 지은 바 중죄를 알아 우회(憂悔; 근심하고 후회함)를 쓰는 연고로 무생(無生)을 증득하지 못했다. 때에 문수사리가 그들의 생각을 안 다음 대중 중에서 칼을 잡고 부처를 해치려 했다. 불타가 말씀하시되 만약 나를 해치려거든 선()하게 나를 해쳐라. 문수가 불타에게 사뢰되 무엇을 이름하여 만약 나를 해치려거든 선하게 나를 해침입니까. 불타가 인하여 일체제법이 다 환화(幻化)와 같음을 광설하셨다. 만약 능히 이와 같다면 이것이 선()하게 나를 해침이다. 보살이 이로 말미암아 숙죄(宿罪; 宿世에 지은 죄)가 다 환화와 같은 줄을 조지(照知)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5백 보살이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게를 설해 말하되 문수대지사(文殊大智士)/ 법원(法源)의 바닥을 깊이 통달하여/ 스스로 손수 이검(利劍)을 쥐고서/ 가지고 여래의 몸을 핍박했다/ 검과 같이 불타도 또한 그러하여/ 1()이라서 둘이 있지 않나니/ 형상도 없고 소생(所生)도 없거늘/ 이 중에 어떻게 죽이리오. 보적경105를 보라.

 

撫州黃山良匡禪師 吉州人也 上堂謂衆曰 高山頂上空蔬飯無可祇待 諸道者 唯有金剛眼睛憑助汝發明眞心 汝若會得能破無明黑暗 汝若不會眞箇不壞 便起歸方丈 僧問 如何是黃山家風 師曰 築著汝鼻孔 問如何是物不遷義 師曰 春夏秋冬 問如何是一路涅槃門 師曰 汝問宗乘中一句豈不是 曰恁麽卽不哆哆 師曰 莫哆哆好 問衆星攢月時如何 師曰 喚什麽作月 曰莫卽遮箇便是也無 師曰 遮箇是什麽 問明鏡當臺森羅爲什麽不現 師曰 那裏當臺 曰爭奈卽今何 師曰 又道不現 問如何是禪 師曰 三界綿綿 曰如何是道 師曰 四生浩浩

哆哆; 口張大貌

四生; 卵生 胎生 濕生 化生 人趣與畜生趣 各具四生 鬼趣通胎化二生 一切地獄諸天及中有 唯爲化生 [俱舍論八]

 

무주(撫州) 황산(黃山) 양광선사(良匡禪師). 길주(吉州) 사람이다.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고산(高山)의 정상(頂上)에 소반(蔬飯)이 비어서() 가히 지대(祇待)할 게 없다. 여러 도자(道者)여 오직 금강안정(金剛眼睛)이 있어 너희의, 진성(眞心)을 발명(發明)함을 크게 도운다(憑助). 너희가 만약 회득(會得)한다면 능히 무명(無明)의 흑암(黑暗)을 깨뜨리려니와 너희가 만약 알지 못한다면 진개(眞箇; 는 조사)로 파괴되지 않는다. 바로 일어나 방장으로 돌아갔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황산(黃山)의 가풍입니까. 사왈(師曰) 너의 콧구멍을 찌른다(築著). 묻되 무엇이 이 사물이 변천하지 않는 뜻(物不遷義)입니까. 사왈 춘하추동이다. 묻되 무엇이 이 일로(一路)의 열반문(涅槃門)입니까. 사왈 네가 종승(宗乘) 중의 1구를 물음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치치(哆哆)하지 않겠습니다. 사왈 치치하지 말아야 좋다. 묻되 뭇 별이 달에 모일() 때 어떻습니까. 사왈 무엇을 일러 달이라 하느냐. 가로되 곧 저개(遮箇)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저개는 이 무엇인가. 묻되 명경(明鏡)이 당대(當臺)했거늘 삼라(森羅)가 무엇 때문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사왈 어느 속(那裏)이 당대(當臺)인가. 가로되 즉금은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해라. 묻되 무엇이 이 선()입니까. 사왈 삼계(三界)가 면면(綿綿)하다. 가로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사왈 사생(四生)이 호호(浩浩)하다.

哆哆; 입을 크게 벌린 모양.

四生; 난생ㆍ태생ㆍ습생ㆍ화생이니 인취와 축생취는 각기 4생을 갖췄고 귀취는 태ㆍ화 2생에 통하고 일체의 지옥ㆍ제천 및 중유(中有)는 오직 화생함 [구사론8].

 

杭州靈隱山淸聳禪師 福州福淸縣人也 初參淨慧 一日淨慧指雨謂師曰 滴滴落上座眼裏 師初不喻旨 後因閱華嚴經感悟 承淨慧印可 迴止明州四明山卓庵 節度使錢億 執師事之禮 忠懿王命於臨安兩處開法 後居靈隱上寺 署了悟禪師

 

항주(杭州) 영은산(靈隱山) 청용선사(淸聳禪師). 복주 복청현(福淸縣) 사람이다. 정혜(淨慧)를 초참(初參)했다. 어느 날 정혜가 비를 가리키며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방울방울 상좌의 눈 속에 떨어진다. 스님이 처음엔 의지(意旨)를 깨닫지() 못했는데 후에 화엄경을 열람함으로 인해 감오(感悟)했고 정혜의 인가(印可)를 승수(承受)했다. 회귀하여 명주(明州) 사명산(四明山)에 머물면서() 탁암(卓庵)했다. 절도사(節度使) 전억(錢億)이 사사지례(師事之禮)를 가졌고() 충의왕(忠懿王)이 명()하여 임안(臨安)의 두 곳에서 개법(開法)했다. 후에 영은(靈隱) 상사(上寺)에 거주했고 서()하여 요오선사(了悟禪師)라 했다.

 

師上堂示衆曰 十方諸佛常在汝前 還見麽 若言見 將心見將眼見 所以道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又曰 見色便見心 且喚什麽作心 山河大地萬象森羅靑黃赤白男女等相 是心不是心 若是心爲什麽却成物象去 若不是心又道見色便見心 還會麽 只爲迷此而成顚倒種種不同 於無同異中强生同異 且如今直下承當頓豁本心 皎然無一物可作見聞 若離心別求解脫者 古人喚作迷波討源 卒難曉悟

一切法不生下; 華嚴經十六云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스님이 상당하여 시중(示衆)해 가로되 시방제불이 늘 너희 앞에 있나니 도리어 보느냐. 만약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을 가지고 보느냐 눈을 가지고 보느냐. 소이로 말하되 일체법이 불생이며(一切法不生) 일체법이 불멸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제불이 늘 현전(現前)한다. 우왈(又曰) 색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본다. 그래 무엇을 일러 마음이라 하느냐. 산하대지ㆍ만상삼라ㆍ청황적백ㆍ남녀 등의 상()이 이 마음인가 이 마음이 아닌가. 만약 이 마음이라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물상(物象)을 이루며 만약 이 마음이 아니라면 또 말하되 색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본다 하였다. 도리어 아느냐. 다만 이것을 미()했기 때문에() 전도(顚倒)를 이루어 갖가지로 부동(不同)하여 동이(同異)가 없는 가운데 억지로 동이를 낸다. 다만() 여금에 직하(直下)에 승당(承當)하여 문득 본심(本心)이 환하면() 교연(皎然)하여 일물(一物)도 가히 견문(見聞)을 지음이 없겠지만 만약 마음을 여의고 달리 해탈을 구하는 자는 고인이 불러 짓기를 물결을 미하고 수원(水源)을 찾는다() 했으니 마침내 효오(曉悟)하기 어렵다.

一切法不生下; 화엄경16에 이르되 일체법이 무생이며/ 일체법이 무멸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제불이 늘 현전한다.

 

根塵俱泯爲什麽事理不明 師曰 事理且從 喚什麽作俱泯底根塵 問如何是觀音第一義 師曰錯 問無明實性卽佛性 如何是佛性 師曰 喚什麽作無明 問如何是和尙家風 師曰 亘古亘今 問不問不答時如何 師曰 寱語作麽 問如何是巔山巖崖裏佛法 師曰 用巔山巖崖作麽 問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靑山綠水 曰見後如何 師曰 綠水靑山 師問僧 汝會佛法麽 曰不會 師曰 汝端的不會 曰是 師曰 且去待別時來 其僧珍重 師曰 不是遮箇道理 問如何是摩訶般若 師曰 雪落茫茫 僧無語 師曰 會麽 曰不會 師遂有頌曰 摩訶般若 非取非捨 若人不會 風寒雪下

根塵; 指六根(眼耳鼻舌身意)與 六塵(色聲香味觸法) 又作根境

亘古亘今; 又作亘今亘古 貫串古今 從古至今 形容久遠長久

 

묻되 근진(根塵)이 모두 사라졌거늘(俱泯) 무엇 때문에 사리(事理)가 밝지 않습니까. 사왈(師曰) 사리는 다만 좇거니와(且從) 무엇을 일러 구민(俱泯)의 근진(根塵)이라 하는가. 묻되 무엇이 이 관음(觀音)의 제1(第一義)입니까. 사왈 틀렸다(). 묻되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라 하니 무엇이 이 불성입니까. 사왈 무엇을 일러 무명이라 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긍고긍금(亘古亘今)이다. 묻되 묻지 않고 답하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잠꼬대(寱語)하여 무엇하려느냐. 묻되 무엇이 이 전산암애(巔山巖崖) 속의 불법입니까. 사왈 전산암애를 써서 무엇하려느냐. 묻되 우두(牛頭)4조를 뵙지 않은 때 어떻습니까. 사왈 청산녹수(靑山綠水). 가로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녹수청산이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너는 불법을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네가 단적(端的; 확실)히 알지 못하느냐. 가로되 그렇습니다. 사왈 다만 가고(且去) 다른 때를 기다렸다가 오너라. 그 중이 진중(珍重)이라 하자 사왈 이는 저개(遮箇)의 도리가 아니다. 묻되 무엇이 이 마하반야입니까. 사왈 눈이 떨어져 망망하다(雪落茫茫). 중이 말이 없자 사왈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드디어 송이 있어 가로되 마하반야(摩訶般若)/ 비취비사(非取非捨)/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한다면/ 바람이 차고 눈이 내린다(風寒雪下).

根塵; 6(六根;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6(六塵;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을 가리킴. 또 근경(根境)으로 지음.

亘古亘今; 또 긍금긍고(亘今亘古)로 지음. 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임. 구원(久遠; 몹시 오래됨)하고 장구함을 형용.

 

金陵報恩院玄則禪師 滑州衛南人也 初問靑峯有本云白兆如何是佛有云自己 靑峯曰 丙丁童子來求火 師得此語藏之於心 及謁淨慧 詰其悟旨 師對曰 丙丁是火而更求火 亦似玄則將佛問佛 淨慧曰 幾放過元來錯會 師雖蒙開發頗懷猶豫 復退思旣殆莫曉玄理 乃投誠請益 淨慧曰 汝問我與汝道 師乃問 如何是佛 淨慧曰 丙丁童子來求火 師豁然知歸 後住報恩院

猶豫; 慧琳音義二十三 惠苑撰花嚴經音義 爾雅曰 猶獸名也 其形似麂 善登木 性多疑慮 常止山中 忽聞有聲 恐人來害 卽豫上樹 久無方下 須臾又上 如此非一 故謂不決多猜慮者爲猶豫焉 或曰隴西時俗呼犬子爲猶 犬隨人行 喜豫在先 行人未至 却來迎候 因謂心所不決爲猶豫也

知歸; 識心見性 回歸心源

 

금릉(金陵) 보은원(報恩院) 현칙선사(玄則禪師). 활주(滑州) 위남(衛南) 사람이다. 처음 청봉(靑峯)어떤 책엔 이르되 白兆에게 묻되 무엇이 이 불()혹 이르되 自己입니까. 청봉이 가로되 병정동자가 와서 화()를 구한다(丙丁童子來求火). 스님이 이 말을 얻자 마음에 저장(貯藏)했다. 및 정혜(淨慧)를 참알하자 그 깨친 뜻(悟旨)을 힐문(詰問)했다. 스님이 대왈(對曰) 병정(丙丁)은 이 화()거늘 다시 화()를 구하니 또한 현칙(玄則)이 불()을 가지고 불()을 물음과 흡사합니다. 정혜가 가로되 거의() 방과(放過)할 뻔했나니 원래 잘못 알았다(錯會). 스님이 비록 개발(開發)을 입었으나() 자못 유예(猶豫)를 품었다. 다시 물러나 사유하다가 이미 지쳤으나() 현리(玄理)를 깨닫지() 못했다. 이에 정성을 던져 청익하자 정혜가 가로되 네가 나에게 묻는다면 너에게 말해 주겠다. 스님이 이에 묻되 무엇이 이 불()입니까. 정혜가 가로되 병정동자가 와서 화()를 구한다. 스님이 활연(豁然)히 지귀(知歸)했고 후에 보은원(報恩院)에 주()했다.

猶豫; 혜림음의23. 혜원찬화엄경음의 이아(爾雅)에 가로되 유()는 짐승의 이름이다. 모양이 큰 노루 같으며 나무에 잘 오르며 성질이 의심과 염려가 많아 늘 산중에 거주하며 홀연히 소리 있음을 들으면 사람이 와서 해칠까 두려워해 곧 미리() 나무에 올라간다. 오랫동안 없어야 비로소 내려왔다가 수유(須臾; 잠시)에 또 올라가나니 이와 같이 하기를 한 번이 아닌지라 고로 이르기를 결단하지 못하고 시려(猜慮; 의심하며 염려하다)가 많은 것을 유예(猶豫)라 한다. 혹 가로되 농서(隴西)의 시속(時俗; 그때의 풍속이나 유행)에 견자(犬子; )를 호칭해 유()라 한다. 개는 사람을 따라 가다가 미리 앞에 있기를 좋아하며 가던 사람이 이르지 않으면 돌아와서 영후(迎候; 맞이해 기다림)하나니 인하여 이르기를 마음에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유예라 한다.

知歸; 식심(識心)하고 견성하여 심원(心源)으로 회귀함.

 

師上堂顧視大衆曰 好箇話頭只是無人解問得 所以勞他古人三度喚之 諸人卽不勞他喚也 此卽且從 古人意作麽生 還說得麽 千佛出世亦不增一絲毫 六道輪迴也不減一絲毫 皎皎地現無絲頭翳礙 古人道 但有纖毫卽是塵 且如今物象嶷然地 作麽生消遣得 汝若於此消遣不得 便是凡夫境界 然也莫嫌朴實說話 也莫嫌說著祖佛 何以故 見說祖佛便擬超越去 若恁麽會大沒交涉 也須子細詳究看 不見他古德究離生死 亦無剃頭剪爪工夫 如今看見大難繼續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을 돌아보고 가로되 호개(好箇)의 화두(話頭)지만 다만 이 물을 줄 앎을 얻는 사람이 없다. 소이로 저() 고인(古人)을 노고롭게 해 세 차례(三度) 부르게() 했거니와(). 제인(諸人)은 곧 그를 노고롭게 해 부르게 하지 말아라. 이것은 곧 다만 좇거니와(且從) 고인의 뜻이 무엇인가. 도리어 설함을 얻겠는가. 천불(千佛)이 출세해도 또한 1사호(絲毫)도 늘지() 않으며 6()에 윤회하더라도 또한 1사호도 줄지() 않는다. 교교지(皎皎地) 사두(絲頭)의 예애(翳礙)도 없음을 나타낸다. 고인이 말하되 단지 섬호(纖毫)만 있어도 즉시(卽是) ()이다. 다만() 여금에 물상(物象)이 억연지(嶷然地)거늘 어떻게 소견(消遣; 消除)함을 얻겠는가. 너희가 만약 여기에서 소견함을 얻지 못한다면 바로 이 범부 경계다. 그러하여 또한 박실(朴實)한 설화(說話)를 싫어하지 말며 또한 조불(祖佛)을 설착(說著)함을 싫어하지도 말아라. 무슨 연고냐, 조불을 설함을 보면 바로 초불(超越)하려고 하거니와 만약 이렇게 안다면 매우 교섭이 없나니 또한 꼭 자세히 상구(詳究)하여 보아라. 보지 못하느냐, 저 고덕은 생사를 여읨을 연구했고 또한 체두(剃頭)와 전조(剪爪)의 공부(工夫)가 없었다. 여금에 간견(看見)하매 계속(繼續)하기가 매우 어렵다.

問了了見佛性 如何是佛性 師曰 不欲便道 問如何是金剛大士 師曰 見也未 問如何是諸聖密密處 師曰 却須會取自己 曰如何是和尙密密處 師曰 待汝會始得 師謂衆曰 諸上座盡有常圓之月 各懷無價之珍 所以月在雲中 雖明而不照 智隱惑內 雖眞而不通 無事久立 問如何是不動尊 師曰 飛飛颺颺 問如何是了然一句 師曰 對汝又何難 曰恁麽道莫便是也無 師曰 不對又何難 曰深領和尙恁麽道 師曰 汝道我道什麽 問亡僧遷化向什麽處去也 師曰 待汝生卽道 曰賓主歷然 師曰 汝立地見亡僧 問如何是學人本來心 師曰 汝還曾道著也未 曰只如道著如何體會 師曰 待汝問始得 問敎中有言 樹能生果作頗梨色 未審此果何人得喫 師曰 樹從何來 曰學人有分 師曰 去果八萬四千 問如何是不遷 師曰 江河競注日月旋流 問宗乘中玄要處請師一言 師曰 汝行脚來多少時也 曰不曾逢伴侶 師曰 少瞌睡

頗梨; 翻譯名義集三 頗梨 或云塞頗胝迦 此云水玉 卽蒼也 或云水精 又云白珠 刊正記云 正名窣坡致迦 其狀似此方水精 然有赤有白

 

묻되 요료(了了)히 불성을 본다 하니 무엇이 이 불성입니까. 사왈(師曰) 바로 말하고 싶지 않다. 묻되 무엇이 이 금강대사(金剛大士)입니까. 사왈 보느냐 또는 아니냐. 묻되 무엇이 이 제성(諸聖)의 밀밀처(密密處)입니까. 사왈 도리어 자기를 회취(會取)함을 써라. 가로되 무엇이 이 화상의 밀밀처입니까. 사왈 너의 이회(理會)함을 기다려야 비로소 옳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제상좌(諸上座)가 모두 상원(常圓)의 달이 있고 각기 무가(無價)의 보배를 품었다. 소이로 달이 운중(雲中)에 있으면 비록 밝더라도 비추지 못하고 지혜가 혹내(惑內)에 숨으면 비록 진정(眞正)하더라도 통하지 못한다. 무사(無事)하거늘 구립(久立)했다. 묻되 무엇이 이 부동존(不動尊)입니까. 사왈 비비양양(飛飛颺颺; 자꾸 비행해 날다)한다. 묻되 무엇이 이 요연(了然)1구입니까. 사왈 너를 대()함이 또 무엇 어렵겠는가. 가로되 이러한 말씀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부대(不對)함이 또 무엇 어렵겠는가. 가로되 화상의 이러한 말씀을 깊이 영회(領會)했습니다. 사왈 네가 말하라, 내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묻되 망승(亡僧)이 천화(遷化)하여 어느 곳을 향해 갔습니까. 사왈 너의 생(; 살다)함을 기다렸다가 곧 말하겠다. 가로되 빈주(賓主)가 역연(歷然)합니다. 사왈 네가 입지(立地; 즉시. 바로) 망승을 보았다.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본래심(本來心)입니까. 사왈 네가 도리어 일찍이 말했는가(道著) 또는 아닌가. 가로되 지여(只如) 말했다면 어떻게 체회(體會)해야 합니까. 사왈 너의 물음을 기다려야 비로소 옳다. 묻되 교중(敎中)에 말씀이 있어 나무가 능히 과실(果實)을 내는데() 파리색(頗梨)이다. 미심하오니 이 과실은 어떤 사람이 먹음을 얻습니까. 사왈 나무는 어디로 좇아왔느냐. 가로되 학인이 분한이 있습니까. 사왈 과실과 떨어짐이 팔만사천이다. 묻되 무엇이 이 불천(不遷)입니까. 사왈 강하가 경주(競注)하고 일월이 선류(旋流)한다. 묻되 종승 중의 현요처(玄要處), 스님의 일언을 청합니다. 사왈 네가 행각하여 온 지 다소의 시일이냐. 가로되 일찍이 반려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왈 조금 갑수(瞌睡; 졸음)하라.

頗梨; 번역명의집3. 파리(頗梨; sphaṭika) 혹은 이르되 새파지가(塞頗胝迦)며 여기에선 이르되 수옥(水玉)이니 곧 푸른빛()이다. 혹은 이르되 수정(水精)이며 또 이르되 백주(白珠). 간정기에 이르되 바른 명칭은 솔파치가(窣坡致迦)니 그 형상은 이 지방의 수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붉은 게 있고 흰 게 있다.

 

金陵報慈道場玄覺導師行言 泉州晉江人也 得法於淨慧禪師 上堂示衆曰 凡行脚人參善知識 到一叢林放下甁鉢 可謂行菩薩之道能事畢矣 何用更來遮裏擧論眞如涅槃 此是非時之說 然古人有言 譬如披沙識寶 沙礫若除眞金自現 便喚作常住世間具足僧寶 亦如一味之雨 一般之地 生長萬物 大小不同甘辛有異 不可道地與雨有大小之名也 所以道 方卽現方圓卽現圓 何以故爾 法無偏正 隨相應現 喚作對現色身 還見麽 若不見也莫閑坐地 問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此問不當 問坐却是非 如何合得本來人 師曰 汝且作麽生坐

能事; 祖庭事苑二 能事 能 獸也 有筋力 善緣木 故今善其事曰能

 

금릉(金陵) 보자도량(報慈道場) 현각도사(玄覺導師) 행언(行言). 천주(泉州) 진강(晉江) 사람이며 정혜선사(淨慧禪師)에게서 득법했다. 상당하여 시중(示衆)해 가로되 무릇 행각인(行脚人)이 선지식을 참()하면서 1총림에 이르면 병발(甁鉢)을 내려놓나니(放下) 가위(可謂) 보살지도(菩薩之道)를 행하며 능사(能事)를 마쳤다 하리라. 이 속에 다시 와서 진여열반을 거론(擧論)함을 어찌 쓰겠는가. 이것은 이 비시(非時)의 설()이다. 그러하여 고인이 말씀이 있었으니 비유컨대 모래를 헤쳐 보배를 앎과 같나니 사력(沙礫)을 만약 제거하면 진금이 저절로 나타난다. 바로 상주(常住)하는 세간이며 승보(僧寶)를 구족했다고 불러 짓는다. 또한 일미지우(一味之雨)와 일반지지(一般之地)가 만물을 생장함과 같나니 대소(大小)가 같지 못하고 감신(甘辛)이 다름이 있지만 가히 지()와 우()에 대소(大小)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소이로 말하되 모남은 곧 모남을 나타내고 둥긂은 곧 둥긂을 나타낸다. 무슨 연고로 그러한가(何以故爾), 법엔 편정(偏正)이 없지만 상() 따라 응현(應現)하나니 상대하여 색신을 나타냄(對現色身)이라고 불러 짓는다. 도리어 보느냐, 만약 보지 못한다면 한가히 앉지 말아라(莫閑坐地).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師曰) 이 물음은 부당(不當)하다. 묻되 시비를 앉혀버리고(坐却) 어떻게 본래인(本來人)을 합당히 얻습니까. 사왈 네가 그래 어떻게 앉히느냐().

能事; 조정사원2. 능사(能事) (; 곰 능. 熊屬)은 짐승이니 근력이 있고 나무에 잘 오르며 고로 이제 그 일을 잘함을 가로되 능이라 함.

 

江南國主新建報慈大道場 命師大闡宗猷 海會二千餘衆 別署導師之號 師謂衆曰 此日英賢共會海衆同臻 諒惟佛法之趣無不備矣 若是英鑒之者 不須待言也 然言之本無何以默矣 是以森羅萬象諸佛洪源 顯明則海印光澄 冥昧則情迷自惑 苟非通心上士逸格高人 則何以於諸塵中 發揚妙極卷舒物象 縱奪森羅示生非生應滅非滅 生滅洞已乃曰眞常 言假則影散千途 論眞則一空絕迹 豈可以有無生滅而計之者哉 問國王再請 蓋特薦先朝 和尙今日如何擧唱 師曰 汝不是問再唱人 曰恁麽卽天上人間無過此也 師曰 勿交涉 問遠遠投師請垂一接 師曰 却依舊處去

宗猷; 禪法 猷 道也

海會; 大衆聚集 海 人或事物積聚衆而且廣

英賢; 德才傑出的人

英鑒; 猶明鑒 明察 亦指明察的人

海印; 佛所得之三昧名 如於大海中印象一切之事物 湛然於佛之智海印現一切之法也 大集經十五 譬如閻浮提一切衆生身及餘外色 如是等色 海中皆有印像 以是故爲大海印 寶積經二十五 如大海一切衆流悉入其中 一切諸法入法印中 亦復如是 故名海印 修華嚴奧旨妄盡還源觀 言海印者 眞如本覺也 妄盡心澄 萬像齊現 猶如大海由風起浪 若風止息 海水澄淸 無像不現 楞嚴經四 如我按指 海印發光 汝暫擧心 塵勞先起

先朝; 前朝 多指上一個朝代 又指先帝

 

강남국주(江南國主)가 보자대도량(報慈大道場)을 새로 건립하고 스님에게 명()해 종유(宗猷)를 크게 밝히게(大闡) 했는데 해회(海會)2천여 대중이었고 도사(導師)의 호()를 별서(別署)했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차일(此日)은 영현(英賢)이 함께 모였고(共會) 해중(海衆)이 함께 이르렀으니(同臻) 참으로(諒惟) 불법의 지취(旨趣)를 갖추지 않음이 없다. 만약 이 영감지자(英鑒之者)라면 언설을 기다림을 쓰지 않으리라. 그러나 언어가 본래 없거늘 무엇 때문에(何以) 침묵하겠는가. 이런 까닭으로(是以) 삼라만상이 제불의 홍원(洪源)이니 현명(顯明; 환희 밝음)하면 곧 해인(海印)의 빛이 맑고() 명매(冥昧; 幽暗)하면 곧 정()이 미()해 자혹(自惑)한다. 만약() 통심(通心)의 상사(上士)나 일격(逸格)의 고인(高人)이 아니라면 곧 무엇으로써(何以) 제진(諸塵) 가운데에 묘극(妙極)을 발양(發揚)하고 물상(物象)을 권서(卷舒)하겠는가. 삼라(森羅)를 종탈(縱奪)하고 생()을 보이되 비생(非生)이며 멸()에 응하되 비멸(非滅)이니 생멸을 꿰뚫고 나면(洞已) 이에 가로되 진상(眞常)이다. ()를 말하자면 곧 그림자가 천도(千途)에 흩어지고 진()을 논하자면 곧 한결같이 공(一空)인지라 자취가 끊어지거늘 어찌 가히 유무와 생멸로써 계교(計較; )하겠는가. 묻되 국왕이 재청(再請)함은 대개(大蓋) 선조(先朝)를 특별히 천도(薦度)하심이니 화상이 금일 어떻게 거창(擧唱)하겠습니까. 사왈(師曰) 너는 이 재창(再唱)을 묻는 사람이 아니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천상과 인간에 이것을 초과할 게 없습니다. 사왈 교섭이 없다. 묻되 멀고도 멀리서 스님에게 투신했으니 청컨대 일접(一接)을 내리십시오. 사왈 도리어 구처(舊處)에 의지하러 가거라.

宗猷; 선법(禪法). ()는 도().

海會; 대중이 취집(聚集). ()는 사람 혹 사물이 적취(積聚)하여 많고도 또 넓음임.

英賢; 덕재(德才) 걸출한 사람.

英鑒; 명감(明鑒)과 같음. 명찰(明察). 또한 명찰하는 사람을 가리킴.

海印; 불타가 얻은 바의 삼매 이름임. 마치 대해 중에 일체의 사물을 인상(印象; 형상을 을 침)함과 같이 담연(湛然)히 불타의 지해(智海)에 일체의 법을 인()을 쳐서 나타냄임. 대집경15. 비유컨대 염부제의 일체중생의 몸과 및 여외(餘外)의 색, 이와 같은 등의 색이 바다 중에 다 인상(印像)이 있음과 같나니 이런 연고로 대해인(大海印)이 된다. 보적경25. 마치 대해에 일체의 중류(衆流)가 모두 그 가운데 유입함과 같이 일체 제법이 법인(法印) 가운데 들어감도 또한 다시 이와 같나니 고로 이름이 해인이다. 수화엄오지망진환원관(1. 唐 法藏 述). 말한 해인이란 것은 진여의 본각이다. 망상이 없어지고 마음이 맑으면 만상이 제등히 나타남이 마치 대해가 바람으로 말미암아 파랑을 일으키다가 만약 바람이 지식(止息)하면 해수가 맑아져서 나타나지 않는 형상이 없음과 같다. 릉엄경4. 내가 손가락을 누를 것 같으면 해인(海印)이 빛을 내지만 너희는 잠시 마음을 들매 진로(塵勞;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

先朝; 전조(前朝)니 다분히 위 1개 조대(朝代)를 가리킴. 또 선제(先帝)를 가리킴.

 

金陵淨德道場達觀禪師智筠 河中府人也 姓王氏 弱齡邁俗 依普救寺杲大師披削 年滿受具 始遊方謁撫州龍濟修山主 親附久之機緣莫契 後詣金陵報恩道場 參淨慧頓悟玄旨 後住廬山棲賢寺 師上堂謂衆曰 從上諸聖方便門不少 大抵只要諸仁者有箇見處 然雖未見且不參差一絲髮許 諸仁者亦未嘗違背一絲髮許 何以故 烜赫地顯露 如今便會取 更不費一毫氣力 還省要麽 設道毘盧有師法身有主 斯乃抑揚對機施設 諸仁者作麽生會對底道理 若也會且莫嫌他佛語 莫重祖師 直下是自己眼明始得 僧問 如何是的的之言 師曰 道什麽 問紛然覓不得時如何 師曰 覓箇什麽不得 問如何是祖師意 師曰 用祖師意作什麽 問今朝呈遠瑞正意爲誰來 師曰 大衆盡見汝恁麽問

邁俗; 超脱世俗

 

금릉(金陵) 정덕도량(淨德道場) 달관선사(達觀禪師) 지균(智筠). 하중부(河中府) 사람이며 성이 왕씨니 약령(弱齡)에 매속(邁俗)했다. 보구사(普救寺) 과대사(杲大師)에게 의지해 피삭(披削)했고 나이가 차자 수구(受具)했다. 처음() 유방(遊方)하다가 무주(撫州) 용제(龍濟) 수산주(修山主)를 참알했고 친부(親附; 친근하며 倚附)한 지 오래되었으나 기연(機緣)이 계합하지 못했다. 후에 금릉 보은도량(報恩道場)으로 나아가 정혜(淨慧)를 참해 현지(玄旨)를 돈오(頓悟)했고 후에 여산(廬山) 서현사(棲賢寺)에 주()했다.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종상(從上)의 제성(諸聖)의 방편문이 적지 않지만 대저(大抵; 저본에 大底로 지었음) 다만 제인자(諸仁者)에게 저() 견처(見處)가 있음을 요한다. 그러하여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또() 1사발만큼(絲髮許)도 참치(參差)하지 않으며 제인자(諸仁者)도 또한 일찍이 1사발만큼도 위배되지 않는다. 무슨 연고냐, 훤혁지(烜赫地; 밝게 빛남) 현로(顯露; 환희 드러남)했으니 여금에 바로 회취(會取)하라, 다시 일호(一毫; 저본에 一豪로 지었음)의 기력도 허비하지 않는다. 도리어 성요(省要)하느냐. 설사 비로(毘盧)에게 스승이 있고 법신에 주()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것은 이에(斯乃) 억양(抑揚)하며 대기(對機)한 시설(施設)이다. 제인자(諸仁者)가 어떻게 대(; 對機)한 도리를 이회(理會)하느냐. 만약에 이회한다면 또() () 불어(佛語)를 혐의하지 않으며 조사를 존중하지 않으리니 직하(直下)에 이는 자기의 눈이 밝아야 비로소 옳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적적(的的)한 말입니까. 사왈(師曰) 무어라고 말했느냐. 묻되 분연(紛然)하여 찾아도 얻지 못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저() 무엇을 찾기에 얻지 못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조사의(祖師意)입니까. 사왈 조사의를 써서 무엇하려느냐. 묻되 금조(今朝)에 원서(遠瑞)와 정의(正意)를 보임()은 누구를 위해 옴입니까. 사왈 대중이 너의 이러한 물음을 모두 본다.

邁俗; 세속을 초탈(超脱).

 

乾德三年江南國主仰師道化 於北苑建大道場曰淨德 延請居之 署大禪師之號 上堂謂衆曰 夫欲慕道 也須上上根器始得 造次中下不易承當 何以故 佛法非心意識境界 上座莫恁麽㒝偰地 他古人道 沙門眼把定世界函蓋乾坤 綿綿不漏絲髮 所以諸佛讚歎讚歎不及 比喻比喻不及 道上座威光赫奕亘古亘今 幸有如是家風何不紹續取 爲什麽自生卑劣 枉受辛勤不能曉悟 只爲如此所以諸佛出興於世 只爲如此所以諸佛唱入涅槃 只爲如此所以祖師特地西來 僧問 諸聖皆入不二法門 如何是不二法門 師曰 但恁麽入 曰恁麽卽今古同然去也 師曰 汝道什麽處是同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恰問著 曰恁麽卽學人禮拜也 師曰 汝作麽生會 問如何是佛 師曰 如何不是 師復謂衆曰 吾不能投身巖谷滅迹市𢌅 而出入禁庭以重煩世主 吾之過也 遂屢辭歸故山 國主錫以五峯棲玄蘭若 開寶二年八月十七日安坐告寂 壽六十四 臘四十四

㒝偰地; 猥瑣自卑 地 助詞

 

건덕(乾德) 3(965)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스님의 도화(道化)를 숭앙(崇仰)하여 북원(北苑)에 대도량(大道場)을 건립하고 가로되 정덕(淨德)이라 했으며 연청(延請)하여 거주케 하고 대선사(大禪師)의 호를 서(; 簽署)했다.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무릇 도를 흠모하려고 한다면 또한 모름지기 상상근기(上上根器)라야 비로소 옳나니 조차(造次; 輕率)의 중하(中下)는 쉽게 승당(承當)하지 못한다. 무슨 연고냐, 불법은 심의식(心意識)의 경계가 아니니 상좌가 이러한 멸설지(㒝偰地)를 하지 말아라. () 고인이 말하되 사문안(沙門眼)이 세계를 파정(把定)하고 건곤을 함개(函蓋)하여 면면(綿綿)히 사발(絲髮)도 새지 않는다. 소이로 제불이 찬탄하려고 해도 찬탄이 미치지 못하고 비유하려고 해도 비유가 미치지 못한다. 말하노니 상좌의 위광(威光)이 혁혁(赫奕)하여 긍고긍금(亘古亘今)하나니 다행히 이와 같은 가풍이 있거늘 왜 소속(紹續)해 취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스스로 비열(卑劣)을 내면서 헛되이() 신근(辛勤)을 받으며 능히 효오(曉悟)하지 못하느냐. 다만 이와 같기 때문에 소이로 제불이 세상에 출흥(出興)하며 다만 이와 같기 때문에 소이로 제불이 입열반(入涅槃)을 창()하며 다만 이와 같기 때문에 소이로 조사가 특지(特地) 서래(西來)하였다. 승문(僧問) 제성(諸聖)이 모두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갑니다. 무엇이 이 불이법문입니까. 사왈(師曰) 단지 이렇게 들어가거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금고(今古)가 한가지로 그러할 것입니다(同然去也). 사왈 네가 말하라, 어느 곳이 이 한가지()인가.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마침 물었다(恰問著).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학인이 예배하겠습니다. 사왈 네가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무엇이 이것이 아니냐. 스님이 다시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능히 암곡(巖谷)에 투신(投身)하거나 시전(市𢌅)에 멸적(滅迹)하지 못하고 금정(禁庭; 宮廷)에 출입하며 세주(世主)를 거듭 번거롭게 함은 나의 허물이다. 드디어 누차(屢次) 고별하며 고산(故山)으로 돌아가겠다 하자 국주(國主)가 오봉(五峯) 서현란야(棲玄蘭若)를 주었다. 개보(開寶) 2(969) 817일 안좌(安坐)하여 고적(告寂)했다. 나이는 64며 납은 44.

㒝偰地; 외쇄(猥瑣: 더럽고 자질구레함)하며 스스로 비하함. ()는 조사.

 

高麗道峯山慧炬國師 始發機於淨慧之室 本國主思慕遣使來請 遂迴故地 國主受心訣禮待彌厚 一日請入王府上堂 師指威鳳樓示衆曰 威鳳樓爲諸上座擧揚了 諸上座還會麽 儻若會且作麽生會 若道不會威鳳樓作麽生不會 珍重 師之言敎未被中華 亦莫知所終

儻若; 假如 假使

 

고려(高麗)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 정혜지실(淨慧之室)에서 처음 발기(發機)했다. 본국주(本國主)가 사모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와서 청했고 드디어 고지(故地)로 회귀했다. 국주(國主)가 심결(心訣)을 받았고 예대(禮待)가 더욱() 두터웠다. 어느 날 청하여 왕부(王府)에 들어가 상당했다. 스님이 위봉루(威鳳樓)를 가리키며 시중(示衆)해 가로되 위봉루가 제상좌를 위해 거양(擧揚)해 마쳤나니 제상좌가 도리어 아느냐. 당약(儻若) 안다면 또 어떻게 알며 만약 말하되 알지 못한다 하면 위봉루를 어떻게 알지 못하느냐. 진중(珍重). 스님의 언교(言敎)가 중화(中華)에 미치지() 못했으며 또한 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

儻若; 가여(假如). 가사(假使).

 

金陵淸涼法燈禪師泰欽 魏府人也 生而知道辯才無礙 入淨慧之室海衆歸之 僉曰敏匠 初受請住洪州幽谷山雙林院 上堂未升座乃曰 此山先代一二尊宿曾說法來 此座高廣不才何升 昔古有言 作禮須彌燈王如來乃可得坐 且道須彌燈王如來今在何處 大衆要見麽 一時禮拜 師便升座良久曰 爲大衆只如此也 還有會處麽 僧問 如何是雙林境 師曰 畫也不成 曰如何是境中人 師曰 且去 又曰 境也未識且討人 問一佛出世震動乾坤 和尙出世震動何方 師曰 什麽處見震動 曰爭奈卽今何 師曰 今日有什麽事 有僧出禮拜 師曰 道者前時謝汝請 我將什麽與汝好 僧擬問次 師曰 將謂相悉却成不委 問如何是西來密密意 師曰苦 問一佛出世普潤群生 和尙出世當爲何人 師曰 不徒然 曰恁麽卽大衆有賴也 師曰 何必 師告衆曰 且住得也久立 官人及諸大衆 今日相請勤重 此箇殊功比喻何及 所以道未了之人聽一言 只遮如今誰動口 師便下坐立 倚拄杖而告衆曰 還會麽 天龍寂聽而雨華 莫作須菩提㡧子畫將去 且恁麽信受奉行

須彌燈王如來; 東方須彌相世界之如來 據吳支謙所譯維摩詰經上不思議品載 此佛身長八萬四千由延 其獅子座高六萬八千由延 以維摩詰顯神通力 故此佛卽時遣三萬二千獅子座 入於維摩詰丈室

勤重; 惜重 愛重

 

금릉(金陵) 청량(淸涼) 법등선사(法燈禪師) 태흠(泰欽). 위부(魏府) 사람이며 태어나자 도를 알았고 변재(辯才)가 무애(無礙)했다. 정혜지실(淨慧之室)에 들어가자 해중(海衆)이 귀의했고 다 가로되(僉曰) 민장(敏匠)이라 했다. 처음 수청(受請)하여 홍주(洪州) 유곡산(幽谷山) 쌍림원(雙林院)에 주()했다. 상당하여 승좌(升座)하지 아니한 전에 이에 가로되 이 산은 선대(先代)에 한두 존숙이 일찍이 설법하여 왔고 이 법좌는 고광(高廣)하거늘 부재(不才)가 어찌 오르겠는가. 석고(昔古; 지난 옛날)에 말이 있었으니 수미등왕여래(須彌燈王如來)에게 작례(作禮)해야 이에 가히 득좌(得坐)한다. 그래 말하라, 수미등왕여래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 대중이 보기를 요하느냐. 일시에 예배하라. 스님이 바로 승좌하여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대중을 위해 다만 이와 같나니 도리어 아는 곳이 있느냐. 승문(僧問) 무엇이 이 쌍림경(雙林境)입니까. 사왈(師曰) 그림을 또한 이루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이 이 경중인(境中人)입니까. 사왈 다만 가거라(且去). 우왈(又曰) ()도 알지 못하거늘 또 사람을 찾는가(). 묻되 1불이 출세하면 건곤을 진동(震動)하거니와 화상은 출세하여 어느 지방을 진동합니까. 사왈 어느 곳에서 진동을 보느냐. 가로되 즉금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사왈 금일 무슨 일이 있느냐. 어떤 중이 나와서 예배하자 사왈 도자(道者)야 전시(前時)에 너의 청을 물리쳤거늘() 내가 무엇을 가져 너에게 주어야 좋겠는가. 중이 물으려고 하던 차에 사왈 다만() 이르기를 상실(相悉; 서로 알다)한다 했더니 도리어 알지() 못함을 이루었구나. 묻되 무엇이 이 서래(西來)의 밀밀의(密密意)입니까. 사왈 괴롭다(). 묻되 1불이 출세하면 군생(群生)을 널리 윤택하게 하거니와 화상이 출세하여 마땅히 어떤 사람을 위합니까. 사왈 도연(徒然)하지 않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대중이 신뢰함이 있을 것입니다. 사왈 하필(何必). 스님이 고중(告衆)해 가로되 다만 주득(住得)하였고 또한 구립(久立)했나니 관인(官人) 및 여러 대중이 금일 상청(相請)하며 근중(勤重)했다. 차개(此箇)의 수공(殊功)은 비유가 어찌 미치겠는가. 소이로 말하되 미료지인(未了之人)은 일언(一言)을 들을지니 다만 이() 여금이거늘 누가 동구(動口)하겠는가. 스님이 바로 하좌하여 서서 주장자에 기대어 고중(告衆)해 가로되 도리어 아느냐, 천룡(天龍; 천과 용)이 적청(寂聽)하매 꽃을 비 내리나니 수보리가 되어 정자(㡧子; 그림 簇子)에 그려 가지고 가지 말아라. 다만 이렇게 신수봉행(信受奉行)하라.

須彌燈王如來; 동방 수미상세계의 여래니 오() 지겸이 번역한 바 유마힐경상 부사의품의 기재에 의거하면 이 부처의 신장은 84천 유연(由延)이며 그 사자좌의 높이는 68천 유연임. 유마힐이 신통력을 나타낸지라 고로 이 부처가 즉시 32천 사자좌를 보내어 유마힐의 장실(丈室)에 들였음.

勤重; 석중(惜重; 아끼며 존중함). 애중(愛重).

 

師次住上藍護國院 僧問 十方俱擊鼓 十處一時聞 如何是聞 師曰 汝從那方來 問善行菩薩道 不染諸法相 如何是菩薩道 師曰 諸法相 曰如何得不染去 師曰 染著什麽處 問不久開選場 還許學人選也無 師曰 汝是點額人 又曰 汝是什麽科目 問如何是演大法義 師曰 我演何似汝演

 

스님이 다음으로 상람(上藍) 호국원(護國院)에 주()했다. 승문(僧問) 시방에서 모두 북을 치면 십처(十處)에서 일시에 듣습니다. 무엇이 이 들음입니까. 사왈(師曰) 너는 어느 방면(那方)으로 좇아왔느냐. 묻되 보살도(菩薩道)를 잘 행하면 모든 법상(法相)에 물들지 않는다 하니 무엇이 이 보살도입니까. 사왈 모든 법상이다. 가로되 어찌해야 물들지 않음을 얻습니까. 사왈 어느 곳에 물들었느냐(染著). 묻되 오래지 않아 선장(選場)을 열거니와 도리어 학인이 뽑힘()을 허락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너는 이 점액인(點額人)이다. 우왈(又曰) 너는 이 어떤 과목이냐(什麽科目). 묻되 무엇이 이 대법의(大法義)를 폄()입니까. 사왈 나의 폄이 너의 폄과 어찌 같은가(何似).

 

師次住金陵龍光院 上堂升座 維那白椎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師曰 維那是第二義 長老只今是第幾義 師又擧衣袖謂衆曰 會麽大衆 此是山呼舞蹈 莫道五百生前曾爲樂主來 或有疑情請垂見示 時有僧問 如何是諸佛正宗 師曰 汝是什麽宗 曰如何 師曰 如何卽不會 問上藍一曲師親唱 今日龍光事若何 師曰 汝什麽時到上藍來 曰諦當事如何 師曰 不諦當卽別處覓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且問小意却來與汝大意

山呼; 漢武帝登嵩山 群臣三呼萬歲,稱爲山呼 見漢書卷六武帝紀 後以此作爲臣民祝頌天子之辭 [百度]

 

스님이 다음으로 금릉 용광원(龍光院)에 주()했다. 상당하여 승좌(升座)하자 유나(維那)가 백추(白椎)하고 이르되 법연(法筵)의 용상중(龍象衆)이여 마땅히 제1의를 관()하라. 사왈(師曰) 유나는 이 제2의니 장로는 지금 이 몇 번째의 의(第幾義). 스님이 또 옷소매를 들고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아느냐 대중이여, 이것은 이 산호(山呼)의 무도(舞蹈)니 오백생(五百生) 전에 일찍이 악주(樂主)가 되어 왔다가 말하지 말아라. 혹 의정(疑情)이 있다면 청컨대 현시(見示; 보이다)를 내려라.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제불의 정종(正宗)입니까. 사왈 너는 이 무슨 종()이냐. 가로되 무엇입니까(如何). 사왈 무엇인가(如何) 한다면 곧 알지 못했다. 묻되 상람(上藍)의 일곡(一曲)은 스님이 친창(親唱)했거니와 금일 용광(龍光)의 일은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어느 때 상람(上藍)에 이르렀다 왔느냐. 가로되 체당(諦當; 穩當)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왈 체당하지 않다면 곧 다른 곳에서 찾아라.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다만() 소의(小意)를 물었다가 돌아오면(却來) 너에게 대의를 주겠다.

山呼; 한무제가 숭산에 오르매 군신이 만세를 세 번 불렀는데 일컬어 산호(山呼)라 함. 한서 권6 무제기를 보라. 후에 이로써 신민(臣民)이 천자를 축송(祝頌)하는 말로 삼았음 [백도].

 

師後入金陵住淸涼大道場 上堂陞座 僧出問次 師曰 遮僧最先出爲大衆已了答國主深恩 問國主請命祖席重開 學人上來請師直指心源 師曰 上來却下去 問法眼一燈分照天下 和尙一燈分付何人 師曰 法眼什麽處分照來 江南國主爲鄭王時 受心法於淨慧之室 暨淨慧入滅 復嘗問於師曰 先師有什麽不了底公案 師對曰 見分析次 異日又問曰 承聞長老於先師有異聞底事 師作起身勢 國主曰 且坐 師謂衆曰 先師法席五百衆 今只有十數人在諸方爲導首 爾道莫有錯指人路底麽 若錯指敎他入水入火落坑落塹 然古人又道 我若向刀山刀山自摧折 我若向鑊湯鑊湯自消滅 且作麽生商量 言語卽熟 及問著便生疎去 何也只爲隔闊多時 上座但會我什麽處去不得 有去不得者 爲眼等諸根色等諸法 諸法且置 上座開眼見什麽 所以道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珍重

導首; 卽敎化引導衆生入於佛道之導師 法華經五云 一一菩薩 皆是大衆唱導之首

 

스님이 후에 금릉에 들어가 청량대도량((淸涼大道場)에 주()했다. 상당하여 승좌하자 중이 나와 묻는 차에 사왈(師曰) 이 중이 가장 먼저 나와서 대중을 위해 이미 국주(國主)의 심은(深恩)에 답(; 저본에 로 지었음)해 마쳤다. 묻되 국주의 청명(請命)으로 조석(祖席)을 거듭 열었습니다. 학인이 상래(上來)하여 스님에게 청하오니 심원(心源)을 직지(直指)하십시오. 사왈 상래(上來)했으면 도리어 하거(下去)하라. 묻되 법안(法眼)의 일등(一燈)은 천하에 분조(分照)하거니와 화상의 일등은 어떤 사람에게 분부합니까. 사왈 법안이 어느 곳에서 분조(分照)하여 오느냐.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정왕(鄭王)이 되었을 때 정혜지실(淨慧之室)에서 심법(心法)을 받았다. 정혜가 입멸함에 이르자 다시 일찍이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선사(先師)가 무슨 마치지 못한 공안(不了底公案)이 있습니까. 스님이 대왈(對曰) 현재 분석하던 차입니다(見分析次). 다른 날 또 문왈(問曰) 승문(承聞)컨대 장로가 선사(先師)에게서 달리 들은 일이 있다 합디다. 스님이 몸을 일으키는 자세를 지었다. 국주가 가로되 다만 앉으시오(且坐).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선사(先師)의 법석(法席)엔 오백중(五百衆)이었지만 여금엔 다만 십수인(十數人)이 있어 제방에서 도수(導首)가 되었거니와 너희가 말하라 인로(人路)를 착지(錯指)하는 이가 있지 않느냐. 만약 착지(錯指)하면 그들로 하여금 입수입화(入水入火)하고 낙갱낙참(落坑落塹)하게 하리라. 그러나 고인이 또 말하되 내가 도산(刀山)을 향하면 도산이 저절로 최절(摧折)하고 내가 만약 확탕(鑊湯)을 향하면 확탕이 저절로 소멸한다. 그래 어떻게 상량(商量)하느냐. 언어(言語)는 곧 익숙하지만() 및 문착(問著)하면 바로 생소하나니(生疎去) 왜냐 하면 다만 격활(隔闊)한 지 다시(多時)이기 때문이다. 상좌는 단지, 내가 어느 곳에 감을 얻지 못하는지 알아야 하나니 감을 얻지 못함이 있는 것은 안() 등의 제근(諸根)과 색 등의 제법(諸法) 때문이다. 제법은 차치(且置)하고 상좌가 개안(開眼)하면 무엇을 보느냐. 소이로 말하되 일법(一法)도 보지 않아야 곧 여래니 바야흐로 이름해 관자재라 함을 얻는다(증도가의 2). 진중(珍重)하라.

導首; 즉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불도에 들게 하는 도사(導師). 법화경5에 이르되 하나하나 보살이 모두 이 대중의 창도지수(唱導之首).

 

師開寶七年六月示疾告衆曰 老僧臥疾 强牽拕與汝相見 如今隨處道場宛然化城 且道作麽生是化城 不見古導師云 寶所非遙須且前進 及至城所又道 我所化作 今汝諸人試說箇道理看 是如來禪祖師禪 還定得麽 汝等雖是晩生 須知僥忝我國主 凡所勝地建一道場 所須不闕 只要汝開口 如今不知阿那箇是汝口 爭答効他四恩三有 欲得會麽 但識口必無咎 縱有咎因汝有我 今火風相逼 去住是常道 老僧住持將逾一紀 每承國主助發 至于檀越十方道侶主事小師皆赤心爲我 默而難言 或披麻帶布 此卽順俗 我道違眞 且道順好違好 然但順我道卽無顚倒 我之遺骸 必於南山大智藏和尙左右乞二墳冢 升沈皎然 不淪化也 努力努力 珍重 卽其月二十四日安坐而終

晩生; 後輩對前輩自謙之稱 二後進 晚輩 此指二

僥忝; 謙辭 僥幸愧居其列

赤心; 純眞之心 赤 喩純眞 如赤誠

 

스님이 개보(開寶) 7(974) 6월 시질(示疾)하더니 고중(告衆)해 가로되 노승이 와질(臥疾)하면서 억지로 끌어다(牽拕) 너희와 상견했다. 여금에 수처(隨處)의 도량이 완연(宛然)히 화성(化城)이다. 그래 말하라 무엇이 이 화성인가. 보지 못하느냐 옛 도사(導師)가 이르되 보소(寶所)가 멀지 않나니 모름지기 다만(須且) 전진하라. 및 성소(城所)에 이르자 또 말하되 내가 화작한 것이다(我所化作). 이제 너희 제인이 저() 도리를 시험 삼아 설해 보아라. 이 여래선인가, 조사선인가. 도리어 정()함을 얻겠는가. 너희 등이 비록 이 만생(晩生)이지만 모름지기 요첨(僥忝)을 알아야 하나니 우리 국주(國主)가 무릇 수승한 바의 땅에 1도량(道場)을 건립하고 소수(所須; 需要하는 바)를 궐()하지 않음은 다만 너희의 개구(開口)를 요하심이다. 여금에 알지 못하나니(不知; 저본에 不如로 지었음) 어느 것(阿那箇)이 이 너희의 입인가. 어떻게 답해야 저 사은삼유(四恩三有)를 본받겠는가(). 이회(理會)를 얻고자 하느냐. 단지 입을 알면 반드시 허물()이 없나니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너희의 유아(有我)를 인()한다. 여금에 화풍(火風)이 상핍(相逼)하며 거주(去住)함은 이 상도(常道). 노승이 주지한 지 거의() 1(一紀; 12)가 넘었는데() 매번 국주(國主)의 조발(助發; 협조하고 啓發)을 승수(承受)했고 단월ㆍ시방의 도려(道侶)ㆍ주사(主事)ㆍ소사(小師)가 모두 적심(赤心)으로 나를 위함에 이르렀으니 침묵하며 말하기 어려웠다. 혹 마대포(麻帶布)를 입는다면 이것은 곧 순속(順俗)이며 나의 도가 진리에 위배된다. 그래 말하라 순()함이 좋으냐 위()함이 좋으냐. 그러나 단지 나의 도에 순한다면 곧 전도(顚倒)가 없다. 나의 유해(遺骸)는 반드시 남산(南山) 대지장화상(大智藏和尙)의 좌우에 두 분총(墳冢; 저본에 墳冡으로 지었음)을 구걸한다면 승침(升沈)이 교연(皎然)하고 윤화(淪化; 變化)하지 않으리라. 노력(努力)하고 노력하라. 진중(珍重). 곧 그 달 24일 안좌(安坐)하여 마쳤다.

晩生; 1. 후배가 전배(前輩; 선배)에 대한 자겸(自謙)의 호칭. 2. 후진(後進). 만배(晚輩).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僥忝; 겸사(謙辭)니 요행(僥幸)으로 부끄럽게도 그 대열(隊列)에 거처함.

赤心; 순진(純眞)한 마음. ()은 순진에 비유하니 예컨대() 적성(赤誠).

 

杭州眞身寶塔寺紹巖禪師 雍州人也 姓劉氏 七歲依高安禪師出家 十八進具於懷暉律師 暨遊方與天台韶國師同受記於臨川 尋於浙右水心寺掛錫宴寂 後止越州法華山 續入居塔寺上方淨院 吳越王命師開法 署了空大智常照禪師 上堂謂衆曰 山僧素寡知見 本期閑放念經待死 豈謂今日大王勤重苦勉山僧 効諸方宿德施張法筵 然大王致請也 只圖諸仁者明心 此外無別道理 諸仁者還明心也未 莫不是語言譚笑時 凝然杜默時 參尋知識時 道伴商略時 觀山翫水時 耳目絕對時 是汝心否 如上所解盡爲魔魅所攝 豈曰明心 更有一類人 離身中妄想 外別認遍十方世界 含日月包太虛 謂是本來眞心 斯亦外道所計非明心也 諸仁者要會麽 心無是者亦無不是者 汝擬執認其可得乎 問六合澄淸時如何 師曰 大衆誰信汝 問見月忘指時如何 師曰 非見月 曰豈可認指爲月耶 師曰 汝參學來多少時也 師開寶四年七月示疾 謂門弟子曰 諸行無常卽常住相 言訖跏趺而逝 壽七十三 臘五十五

商略; 討議 商議 商討

 

항주(杭州) 진신보탑사(眞身寶塔寺) 소암선사(紹巖禪師). 옹주(雍州) 사람이며 성은 유씨(劉氏). 7세에 고안선사(高安禪師)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18에 회휘율사(懷暉律師)에게서 진구(進具)했다. 유방(遊方)함에 이르러() 천태 소국사(韶國師)와 더불어 임천(臨川)에서 함께 수기(受記)했다. 이윽고 절우(浙右) 수심사(水心寺)에 괘석(掛錫)하고 연적(宴寂)하다가 후에 월주(越州) 법화산(法華山)에 머물렀으며() 이어서 탑사(塔寺) 상방정원(上方淨院)에 들어가 거주했다. 오월왕(吳越王)이 스님에게 개법을 명()하고 서()하여 요공대지상조선사(了空大智常照禪師)라 했다.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산승은 본디() 지견(知見)이 적어서() 본래 한방(閑放)하며 염경(念經)하면서 대사(待死)를 기대(期待)했는데 어찌 금일 대왕이 근중(勤重; 惜重. 愛重)하여 산승에게 고면(苦勉)하시매 제방의 존숙이 법연(法筵)을 시장(施張; 베풀어 벌이다)함을 본받으리라 일렀겠는가. 그러나 대왕이 치청(致請; 요청하다)함은 다만 제인자(諸仁者)의 명심(明心; 마음을 밝힘)을 기도(企圖)함이며 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제인자가 도리어 명심했는가 또는 아닌가. 이 어언(語言)하며 담소(譚笑)할 때, 응연(凝然)하며 두묵(杜默; 침묵)할 때, 지식을 참심(參尋)할 때, 도반과 상략(商略)할 때, 관산(觀山)하고 완수(翫水)할 때, 이목(耳目)에 절대(絕對)할 때 이 너희의 마음이 아님이 없다(莫不) 하겠는가. 위와 같은 소해(所解)는 모두 마매(魔魅; 魔鬼)에 거두어지는 바가 되거늘 어찌 가로되 명심(明心)이라 하겠는가. 다시 일류(一類)의 사람이 있어 신중(身中)의 망상을 여의고 밖으로 달리 인정하되 온 시방세계와 일월을 포함하고 태허를 포함해(含日月包太虛) 이 본래의 진심이라고 이르나니 이것() 또한 외도의 소계(所計; 計度하는 바)며 명심이 아니다. 제인자(諸仁者)가 알기를 요하느냐. 마음은 이것도 없고 또한 이것이 아님도 없나니 너희가 집인(執認)하려 한다면 그 가히 얻겠는가. 묻되 육합(六合)이 징청(澄淸)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대중에 누가 너를 믿겠는가. 묻되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달을 보지 못했다(非見月). 가로되 어찌 가히 손가락을 인정해 달로 삼겠습니까. 사왈 네가 참학(參學)하여 온 지 다소(多少)의 시일인가. 스님이 개보(開寶) 4(971) 7월 시질(示疾)하더니 문제자(門弟子)에게 일러 가로되 제행무상(諸行無常)이 곧 상주상(常住相)이다. 말을 마치자 가부(跏趺)하고 서거했다. 나이는 73이며 납은 55.

商略; 토의(討議). 상의(商議). 상토(商討).

 

金陵報恩院法安慧濟禪師 太和人也 印心於法眼之室 初住撫州曹山崇壽院爲第四世 上堂謂衆曰 知幻卽離不作方便 離幻卽覺亦無漸次 諸上座且作麽生會 不作方便又無漸次 古人意在什麽處 若會得諸佛常見前 若未會莫向圓覺經裏討 夫佛法亘古亘今未嘗不見前 諸上座一切時中咸承此威光 須具大信根荷擔得起始得 不見佛讚猛利度人堪爲器用 亦不賞他向善久修淨業者 要似他廣額兇屠 拋下操刀便證阿羅漢果 直須恁麽始得 所以長者道 如將梵位直授凡庸 僧問 大衆旣臨於法會 請師不吝句中玄 師曰 謾得大衆麽 曰恁麽卽全應此問也 師曰 不用得 問古人有言一切法以不生爲宗 如何是不生宗 師曰 好箇問處 問佛法中請師方便 師曰 方便了也 問如何是古佛心 師曰 何待問

猛利; 謂意志猛烈 根機銳利

器用; 器皿用具 比喻人才

廣額兇屠; 祖庭事苑五 廣額 涅槃經(19)云 波羅奈國有屠兒 名曰廣額 於日日中 殺無量羊 見舍利弗卽受八戒 經一日夜 以是因緣 命終得北方天王毘沙門子 又迦葉言 拘尸那城有旃陀羅 名曰歡喜 佛記此人 由一發心 當於此界千佛數中 速成無上正眞之道 以何等故 如來不記舍利弗目犍連等速成佛道 佛言 善男子 或有聲聞緣覺菩薩 作誓願言 我當久久護持正法 然後乃成無上佛道 以發願速故 與速記 詳觀此經 卽無我是千佛之語 恐傳言誤耳

長者道; 新華嚴經合論二云 如將寶位直授凡庸

凡庸; 謂凡常無奇異也 與平凡凡俗等辭同義

 

금릉(金陵) 보은원(報恩院) 법안(法安) 혜제선사(慧濟禪師). 태화(太和) 사람이니 법안지실(法眼之室)에서 인심(印心)했고 무주(撫州) 조산(曹山) 숭수원(崇壽院)에 초주(初住)했으며 제4세가 된다.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환()임을 알면 곧 이(; 을 여읨)라서 방편을 짓지 않으며 환을 여의면 곧 각()이라서 또한 점차(漸次)가 없다. 제상좌여 그래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방편을 짓지 않고 또 점차도 없다 하니 고인의 뜻이 어느 곳에 있느냐. 만약 회득(會得)한다면 제불이 늘 현전(見前)하려니와 만약 이회하지 못한다면 원각경 속을 향해 찾지 말아라. 무릇 불법이 긍고긍금(亘古亘今)하여 일찍이 현전(見前)하지 않음이 없으며() 제상좌(諸上座)가 일체의 시중(時中)에 모두() 이 위광(威光)을 승수(承受)하거니와 모름지기 대신근(大信根)을 갖추어 하담(荷擔)하여 일으킴을 얻어야 비로소 옳다. 보지 못하느냐, 불타가 찬탄하되 맹리(猛利)하게 도인(度人)해야 가히() 기용(器用)이 된다 했으며 또한 그가 향선(向善)하며 정업(淨業)을 구수(久修)하는 자를 칭찬하지() 않았다. 요컨대 저() 광액흉도(廣額兇屠)가 조도(操刀; 잡은 칼)를 던져 떨어뜨리고 바로 아라한과를 증득함과 같아야() 하리니 바로 꼭 이러해야 비로소 옳다. 소이로 장자가 말하되(長者道) 마치 범위(梵位)를 가지고 바로 범용(凡庸)에게 줌과 같다. 승문(僧問) 대중이 이미 법회에 임했으니 청컨대 스님이 구중현(句中玄)을 아까지() 마십시오. 사왈(師曰) 대중을 속임을 얻겠는가.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차문(此問)에 전응(全應)함입니다. 사왈 얻음을 쓰지 말아라(不用得). 묻되 고인이 말씀이 있어 일체법은 불생(不生)으로써 종()을 삼는다. 무엇이 이 불생의 종입니까. 사왈 호개(好箇)의 문처(問處). 묻되 불법 중에 스님의 방편을 청합니다. 사왈 방편을 마쳤다(方便了也). 묻되 무엇이 이 고불심(古佛心)입니까. 사왈 어찌 물음을 기다리겠는가.

猛利; 이르자면 의지(意志)가 맹렬하고 근기가 예리함.

器用; 기명(器皿; 그릇)의 용구(用具). 인재(人才)에 비유.

廣額兇屠; 조정사원5. 광액(廣額) 열반경(19)에 이르되 바라나국에 도아(屠兒; 는 죽일 도. 는 조사. 白丁)가 있었으니 이름해 가로되 광액이다. 날마다의 가운데에 무량한 양을 도살했다. 사리불을 뵙고 곧 8()를 받아 한 낮과 밤을 경과했다. 이 인연으로써 목숨을 마쳐 북방의 천왕인 비사문(毘沙門; 4천왕 중의 하나)의 아들이 되었다. 또 가섭이 말하되 구시나성에 전다라(旃陀羅)가 있었으니 이름해 가로되 환희입니다. 불타가 이 사람에게 수기(授記)하시되 한 번 발심함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이 세계의 천불의 수 가운데라 속히 위없는 정진(正眞)의 도를 얻는다 하시고 무엇 등의 연고로써 여래가 사리불과 목건련 등에게는 속히 불도를 이룬다고 수기하지 않으십니까. 불타가 말씀하시되 선남자여, 혹은 성문ㆍ연각ㆍ보살이 있어 서원을 지어 말하되 나는 마땅히 오래오래 정법을 호지한 연후에 이에 위없는 불도를 이루리라 하나니 발원이 신속함을 쓰는 연고로 속기(速記)를 주느니라(또 가섭이 말하되 이하는 열반경10에 나오는 말). 상세히 이 경을 보건대 곧 나도 이 천불이란 말이 없나니 전언(傳言)의 오류인가 염려됨.

長者道; 신화엄경합론2에 이르되 마치 보위(寶位)를 가지고 바로 범용(凡庸)에게 줌과 같다.

凡庸; 이르자면 범상(凡常)하여 기이함이 없음. 평범, 범속(凡俗) 등의 말과 같은 뜻.

 

江南國主請入居報恩 署號攝衆 師上堂謂衆曰 此日奉命令住持當院爲衆演法 適來見維那白槌了 多少好 令敎當觀第一義 且作麽生是第一義 若遮裏參得多少省要 如今更別說箇什麽卽得 然承恩旨不可杜默去也 夫禪宗示要法爾常規 圓明顯露亘古亘今 至於達磨西來 也只與諸人證明 亦無法可得與人 只道直下是 便敎立地覯取 古人雖卽道立地覯取 如今坐地還覯得也無 有疑請問 僧問 三德奧樞從佛演 一音玄路請師明 師曰 汝道有也未 問如何是報恩境 師曰 大家見汝問 師開寶中示滅于本院

坐地; 坐 坐著 地後綴

奧樞; 猶樞機 關鍵

 

강남국주(江南國主)의 청으로 보은(報恩)에 들어가 거주했고 서호(署號)하여 섭중(攝衆)이라 했다.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날 봉명(奉命)했으니 당원(當院)에 주지하며 대중을 위해 연법(演法)하게 하셨다. 적래(適來) 유나가 백추(白槌)한 것을 보매 다소 좋나니 마땅히 제1(第一義)를 관()하게 했는데 그래 무엇이 이 제1의인가. 만약 이 속에서 참득(參得)한다면 다소 성요(省要)이거늘 여금에 다시 저() 무엇을 별설(別說)해야 곧 옳겠는가. 그러나 은지(恩旨; 恩典)를 승수(承受)했으니 두묵(杜默; 침묵)함은 옳지 못하다. 무릇 선종의 시요(示要)는 법이 그러하여(法爾) 상규(常規)니 원명(圓明)히 현로(顯露)하여 긍고긍금(亘古亘今)한다. 달마가 서래함에 이르러 또한 다만 제인에게 증명해 주었으되 또한 법을 가히 얻어 사람에게 줌이 없었다. 다만 말하되 직하(直下)가 이것이라 하여 바로(便) 입지(立地)에 구취(覯取)하게 하였다. 고인이 비록 곧 말하되 입지에 구취하라 했으나 여금에 좌지(坐地)에 도리어 구득(覯得)하느냐 또는 아니냐. 의심이 있거든 청문(請問)하라. 승문(僧問) 3()의 오추(奧樞)는 불타의 연설을 좇거니와 1()의 현로(玄路)는 스님의 설명(說明)을 청합니다. 사왈(師曰) 네가 말하라 있느냐 또는 아니냐. 묻되 무엇이 이 보은경(報恩境)입니까. 사왈 대가(大家; 대중)가 너의 질문을 본다. 스님이 개보(開寶; 968-976) 중 본원(本院)에서 시멸()했다.

坐地; ()는 좌착(坐著)이며 지()는 후철.

奧樞; 추기(樞機)와 같음. 관건(關鍵).

 

撫州崇壽院契稠禪師 西州人也 上堂升座 僧問 四衆諦觀第一義 如何是第一義 師曰 何勞更問 師又曰 大衆欲知佛性義 當觀時節因緣 作麽生是時節因緣 上座如今便散去 且道有也未 若無因什麽便散去 若有作麽生是第一義 上座第一義現成 何勞更觀 恁麽顯明得佛性常照 一切法常住 若見有法常住 猶未是法之眞源 作麽生是法之眞源 上座不見古人道 一人發眞歸元 十方虛空悉皆消殞 還有一法爲意解麽 古人有如是大事因緣 依而行之卽是 何勞長老多說 衆中有未知者便請相示 僧問 淨慧之燈 親然汝水 今日王侯請命 如何是淨慧之燈 師曰 更請一問 問古人見不齊處請師方便 師曰 古人見什麽處不齊 問如何是佛 師曰 如何是佛 曰如何領解 師曰 領解卽不是 問的的西來意 師當第幾人 師曰 年年八月半中秋 問如何是和尙爲人一句 師曰 觀音擧上藍擧 師淳化三年示滅

諦觀; 認眞視察 仔細留意

古人道; 首楞嚴經九云 汝等一人發眞歸元 此十方空皆悉銷殞

汝水; 水經注 汝水出河南汝州梁縣勉鄕西天息山 上游卽今河南北汝河 [百度百科]

 

무주(撫州) 숭수원(崇壽院) 계조선사(契稠禪師). 서주(西州; 여러 선록에 모두 泉州로 지었음) 사람이다. 상당하여 승좌하자 승문(僧問) 4()이 제1(第一義)를 체관(諦觀)합니다. 무엇이 이 제1의입니까. 사왈(師曰) 어찌 노고롭게 다시 묻느냐. 스님이 우왈(又曰) 대중이 불성의 뜻을 알고 싶다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찰하라. 무엇이 이 시절인연인가. 상좌가 여금에 바로 산거(散去)하면 그래 말하라 있느냐 또는 아니냐. 만약 없다면 무엇으로 인해 바로 산거(散去)하며 만약 있다면 무엇이(作麽生) 이 제1의인가. 상좌여 제1의가 현성(現成)했거늘 어찌 노고롭게 다시 관찰하랴. 이렇게 환히 밝음(顯明)이 불성이 상조(常照)함을 얻음이며 일체법으로 상주(常住)함이다. 만약 법이 상주함이 있음을 본다면 오히려 이 법의 진원(眞源)이 아니다. 무엇이 이 법의 진원인가. 상좌가 보지 못하느냐 고인이 말하되(古人道) 한 사람이 발진(發眞)하여 근원(根源; )으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모두 다 소운(消殞; 사라져 없어짐)한다. 도리어 의해(意解)1법이 있느냐. 고인이 이와 같은 대사인연(大事因緣)이 있나니 의()하여 행해야 곧 옳거늘() 어찌 노고롭게 장로가 다설(多說)하리오. 중중(衆中)에 일지 못하는 자가 있거든 바로 청하노니 상시(相示)하라. 승문(僧問) 정혜지등(淨慧之燈)은 여수(汝水)와 친연(親然; 親密)합니다. 오늘 왕후(王侯)가 청명(請命)하시니 무엇이 정혜지등입니까. 사왈 다시 일문(一問)을 청한다. 묻되 고인의 견해가 부제(不齊)한 곳을, 스님의 방편을 청합니다. 사왈 고인의 견해가 어느 곳이 부제(不齊)한가.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무엇이 이 부처인가. 가로되 어떻게 영해(領解)해야 합니까. 사왈 영해하면 곧 옳지() 못하다. 묻되 적적(的的)한 서래의에 스님은 몇 번째 사람에 해당(該當; )합니까. 사왈 해마다 8월의 반이 중추(中秋).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이 위인(爲人)하는 1구입니까. 사왈 관음(觀音)에서 들었고() 상람(上藍)에서 들었다. 스님이 순화(淳化) 3(992) 시멸(示滅)했다.

諦觀; 진리를 인식하고 시찰하면서 자세히 유의(留意).

古人道; 수릉엄경9에 이르되 너희 등 한 사람이 발진귀원(發眞歸元)하면 이 시방의 허공이 모두 다 소운(銷殞; 사라져 없어지다)한다.

汝水; 수경주(水經注) 여수(汝水)는 하남 여주 양현 면향 서쪽 천식산에서 나온다. 상유(上游; 上流)는 즉금의 하남 북쪽 여하(汝河)[백도백과].

 

洪州雲居山淸錫禪師 泉州人也 初住龍須山廣平院 有僧問 如何是廣平境 師曰 識取廣平 曰如何是境中人 師曰 驗取 次住雲居山 僧問 如何是雲居境 師曰 汝喚什麽作境 曰如何是境中人 師曰 適來向汝道什麽 師後住泉州西明院 有廖天使入院 見供養法眼和尙眞 乃問曰 眞前是什麽果子 師曰 假果子 天使曰 旣是假果子 爲什麽將供養眞 師曰 也只要天使識假 問如何是佛 師曰 容顔甚奇妙

 

홍주(洪州) 운거산(雲居山) 청석선사(淸錫禪師). 천주(泉州) 사람이다. 용수산(龍須山) 광평원(廣平院)에 초주(初住)했다.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광평경(廣平境)입니까. 사왈(師曰) 광평을 식취(識取)하라. 가로되 무엇이 이 경중인(境中人)입니까. 사왈 험취(驗取)하라. 다음으로 운거산(雲居山)에 거주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운거경(雲居境)입니까. 사왈 네가 무엇을 일러 경()이라 하느냐. 가로되 무엇이 이 경중인(境中人)입니까. 사왈 적래(適來) 너를 향해 무어라고 말했느냐. 스님이 후에 천주(泉州) 서명원(西明院)에 주()했다. 유천사(廖天使)가 있어 입원(入院)하여 법안화상(法眼和尙)의 진(; 肖像)에 공양함을 보고 이에 문왈(問曰) 진전(眞前)에 이 무슨 과자(果子)입니까. 사왈 가과자(假果子)입니다. 천사가 가로되 이미 이 가과자이거늘 무엇 때문에 가져다() ()에 공양합니까. 사왈 또한 다만 천사가 가()를 알기를 요합니다.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용안(容顔)이 심히 기묘(奇妙)하다.

 

洪州百丈山大智院道常禪師 本山出家 禮照明禪師披剃 尋參淨慧獲預函丈 因請益問 外道問佛不問有言不問無言 敍語未終 淨慧曰 住住汝擬向世尊良久處會去 師從此悟入 後本山請歸住持 當第十一世 學者尤盛 師上堂示衆曰 乘此寶乘直至道場 每日勞諸上座訪及 無可祇延 時寒不用久立 却請迴車 珍重 僧問 如何是學人行脚事 師曰 拗折拄杖得也未 問古人有言 釋迦與我同參 未審參何人 師曰 唯有同參方得知 曰未審此人如何親近 師曰 恁麽卽不解參也 問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往往問不著 問還鄕曲子作麽生唱 師曰 設使唱落汝後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대지원(大智院) 도상선사(道常禪師). 본산(本山)에서 출가했고 조명선사(照明禪師)를 예알해 피체(披剃)했다. 이윽고 정혜(淨慧)를 참해 함장(函丈)에 참예(參預)함을 얻었다. 인하여 청익해 묻되 외도가 불타에게 묻되 유언(有言)을 묻지 않고 무언(無言)을 묻지 않습니다. 서어(敍語)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정혜가 가로되 멈추어라(), 멈추어라. 네가 세존이 양구(良久)한 곳을 향해 이회(理會)하려고 하느냐. 스님이 이로 좇아 오입(悟入)했다. 후에 본산(本山)에서 청해 귀환하여 주지했으니 제11세에 해당하며 학자가 더욱() 성했다. 스님이 상당하여 시중해 가로되 이 보승(寶乘)을 타고 바로 도량에 이르나니 매일 제상좌를 노고롭게 방급(訪及; 參訪해 이르다)하게 하거니와 가히 지연(祇延; 應待)할 게 없다. 때가 추우니 구립(久立)함을 쓰지 말고 도리어 청컨대 회거(迴車)하라. 진중(珍重). 승문(僧問) 무엇이 이 학인의 행각사(行脚事)입니까. 사왈 주장자를 요절(拗折)함을 얻었느냐 또는 아니냐. 묻되 고인이 말씀이 있어 석가와 내가 동참(同參)이다.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을 참()했습니까. 사왈 오직 동참이 있어야 바야흐로 득지(得知)한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이 사람은 어떻게 친근합니까. 사왈 이러하다면 곧 참할 줄 알지 못한다.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 왕왕(往往) 묻지 못하더라(問不著). 묻되 환향곡자(還鄕曲子; 는 조사)를 어떻게 창()합니까. 사왈 설사 창하더라도 너의 뒤에 떨어진다.

 

問如何是百丈境 師曰 何似雲居 問如何是百丈爲人一句 師曰 若到諸方總須問過 師又謂衆曰 實是無事與上座各各是佛 更有何疑得到遮裏 古人只道 十方同共聚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心空是及第 且作麽生會心空 不是那裏閉目冷坐是心空 此正是識陰想解 上坐要心空麽 但且識心 所以道 過去已過去 未來更莫算 兀然無事坐 何曾有人喚 設有人喚 上座應他好不應好 若應阿誰喚上座 若不應不患聾也 三世體空且不是木頭 所以古人道 心空得見法王 還見法王麽 也只是老病僧 又莫是渠自伐麽 珍重 僧問 如何是佛 師曰 汝有多少事不問 僧擧人問玄沙曰 三乘十二分敎卽不問 如何是祖師西來意 玄沙曰 三乘十二分敎不要 其僧不會 請師爲說 師曰 汝實不會 曰實不會 師示偈曰 不要三乘要祖宗 三乘不要與君同 君今欲會通宗旨 後夜猿啼在亂峯 師淳化二年示滅 塔于本山

後夜; 卽後分之夜 乃晝夜六時之一 印度之夜間區分爲初中後三時 此爲其後分 相當於寅時 近於日出之時

 

묻되 무엇이 이 백장경(百丈境)입니까. 사왈(師曰) 운거와 어찌 같은가(何似雲居). 묻되 무엇이 이 백장의 위인(爲人)하는 1구입니까. 사왈 만약 제방에 이르거든 모두() 문과(問過; 는 조사)함을 써라. 스님이 또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실로 이 무사(無事)하여 상좌와 더불어 각각 이(; 저본에 로 지었음) 부처거늘 다시 무슨 의심이 있어 이 속에 이름을 얻는가. 고인(古人; 龐居士)이 다만 말하되 시방이 동공(同共)으로 모여/ 개개가 무위를 배운다/ 여기()는 이 선불장(選佛場)이니/ 마음이 공해야(心空) 급제(及第)하여 돌아간다. 마음이 공해야 이 급제라 하니 그래 어떻게 심공(心空)을 아느냐. 이는 나리(那裏)에서 눈을 감고 냉좌(冷坐)함이 이 심공이 아니니 이것은 바로 이 식음(識陰)으로 상상(想像)해 이해함이다(想解). 상좌가 마음이 공하기를 요하느냐, 단지 다만() 마음을 알아라(識心). 소이로 말하되 과거는 이미 과거며/ 미래를 다시 계산하지 말아라/ 올연(兀然)히 일 없이 앉았거늘/ 어찌 일찍이 부르는 사람이 있겠는가(이상은 南嶽懶瓚和尙歌4). 설사 부르는 사람이 있더라도 상좌가 그에 응함이 좋으냐, 불응함이 좋으냐. 만약 응한다면 누가(阿誰) 상좌를 부르며 만약 불응한다면 환롱(患聾)이 아니다. 삼세(三世)의 체()가 공했지만 또() 이 목두(木頭; 木材. 는 조사)가 아니다.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마음이 공해야 법왕을 득견(得見)한다. 도리어 법왕을 보느냐. 또한 다만 이 늙은 병승(病僧)이다. 또 이는 거()가 스스로 자랑함()이 아니냐. 진중(珍重)하라.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너는 다소사(多少事)가 있거늘 묻지 않는구나. 중이 거()했다. 사람이 현사에게 물어 가로되 삼승 십이분교는 곧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현사가 가로되 삼승 십이분교를 요하지 않는다. 그 중이 알지 못했다. 청컨대 스님이 설하십시오. 사왈 네가 실로 알지 못하느냐. 가로되 실로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게를 보여 가로되 삼승을 요하지 않고 조종(祖宗)을 요하나니/ 삼승을 요하지 않아야 그대와 더불어 한가지다/ 그대가 이제 알아서 종지를 통하고 싶다면/ 후야(後夜)에 원숭이가 울며 난봉(亂峯)에 있다. 스님이 순화(淳化) 2(991) 시멸(示滅)했고 본산에 탑을 세웠다.

後夜; 곧 후분(後分)의 밤이니 곧 주야 6시의 하나. 인도의 야간은 초ㆍ중ㆍ후 3시로 구분하며 이것은 그 후분이 됨. 인시(寅時)에 상당하며 일출할 시간에 가까움.

 

天台山般若寺通慧禪師敬遵 上堂謂衆曰 皎皎烜赫地亘古亘今也 未曾有纖毫間斷相 無時無節長時拶定上座無通氣處 所以道 山河大地是上座善知識 放光動地觸處露現 實無絲頭許法可作隔礙 如今因什麽却不會 特地生疑去 無事不用久立 僧問 優曇華坼人皆覩 般若家風賜一言 師曰 不因上座問 不曾擧似人 曰恁麽卽般若雄峯詎齊今古 師曰 也莫錯會 問牛頭未見四祖時爲什麽百鳥銜華 師曰 汝什麽處見 曰見後爲什麽不銜華 師曰 且領話好 問靈山一會迦葉親聞 未審今日一會何人得聞 師曰 汝試擧迦葉聞底看 曰恁麽卽迦葉親聞去也 師曰 亂道作麽 師自述眞讚曰 眞兮廖廓 郢人圖 嶽聳雲空 澄潭月躍

廖廓; 同寥廓 空曠深遠

; 紅色或靑色的可作顏料的礦物 泛指好的彩色

 

천태산 반야사 통혜선사(通慧禪師) 경준(敬遵).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교교(皎皎)히 훤혁지(烜赫地; 밝게 빛남. 는 조사) 긍고긍금(亘古亘今)하나니 일찍이 섬호(纖毫 저본에 纖豪로 지었음)도 간단(間斷)의 상()이 없고 시도 없고 절도 없이(無時無節) 장시(長時)에 상좌를 찰정(拶定; 핍박하여 固定시킴)하여 통기(通氣)할 곳이 없다. 소이로 말하되 산하대지가 이 상좌의 선지식이니 방광동지(放光動地)하며 촉처에 노현(露現)하여 실로 실낱만큼(絲頭許)의 법이라도 가히 격애(隔礙)를 지음이 없거늘 여금에 무엇으로 인해 도리어 알지 못하고서 특지(特地) 의심을 내느냐. 무사(無事)하니 구립(久立)함을 쓰지 말아라. 승문(僧問) 우담화(優曇華)가 터져 사람이 모두 보나니() 반야의 가풍을, 일언(一言) 하사하십시오(). 사왈(師曰) 상좌의 물음을 인하지 않았다면 일찍이 사람에게 거사(擧似; 들어 보이다)하지 못한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반야의 웅봉(雄峯)이 어찌() 금고(今古)와 가지런하겠습니까. 사왈 또한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묻되 우두(牛頭)4조를 뵙지 않았을 때 무엇 때문에 백조(百鳥)가 함화(銜華)했습니까. 사왈 네가 어느 곳에서 보느냐. 가로되 뵌 후엔 무엇 때문에 함화(銜華)하지 않았습니까. 가로되 다만() ()를 영회(領會)해야 좋다. 묻되 영산(靈山)의 일회(一會)에선 가섭이 친문(親聞)했거니와 미심하오니 금일의 일회(一會)는 어떤 사람이 득문(得聞)합니까. 사왈 네가 시험 삼아 가섭이 들은 것(聞底)을 들어 보아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가섭이 친문(親聞)했습니다. 사왈 어지럽게 말해 무엇하려느냐. 스님이 진찬(眞讚)을 자술(自述)해 가로되 진(; 肖像)이 요확(廖廓)하니/ 영인(郢人)이 확(; 저본에 으로 지었음)을 그렸다()/ 산악이 운공(雲空)에 솟았고/ 징담(澄潭)에 달이 도약(跳躍; )한다.

廖廓; 요확(寥廓)과 같음. 공광(空曠; 비어서 넓음)하고 심원(深遠).

; 홍색 혹 청색의, 가히 안료(顏料)를 만드는 광물(礦物). 널리 아름다운 채색(彩色)을 가리킴.

 

廬山歸宗寺法施禪師策眞 曹州人也 姓魏氏本名慧超 升淨慧之堂 問如何是佛 淨慧曰 汝是慧超 師從此信入 其語播于諸方 初自廬山余家峯請下住歸宗 上堂示衆曰 諸上座 見聞覺知只可一度 只如會了 是見聞覺知不是見聞覺知 要會麽 與諸上座說破了也 待汝悟始得 久立珍重 僧問 如何是佛 師曰 我向汝道卽別有也 問如何是歸宗境 師曰 是汝見什麽 曰如何是境中人 師曰 出去 問國王請命大啓法筵 不落見聞請師速道 師曰 閑言語 曰師意如何 師曰 又亂說 問承敎有言 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塵刹卽不問 如何是報佛恩 師曰 汝若是卽報佛恩 問無情說法大地得聞 獅子吼時如何 師曰 汝還聞麽 曰恁麽卽同無情也 師曰 汝不妨會 問古人以不離見聞爲宗 未審和尙以何爲宗 師曰 此問甚好 曰猶是三緣四緣 師曰 莫亂道 師次住金陵奉先寺 未幾復遷止報恩道場 太平興國四年歸寂

敎有言; 楞嚴經三云 將此深心奉塵剎 是則名爲報佛恩

 

여산(廬山) 귀종사(歸宗寺) 법시선사(法施禪師) 책진(策眞). 조주(曹州) 사람이니 성이 위씨(魏氏)며 본명이 혜초(慧超). 정혜지당(淨慧之堂)에 올라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정혜가 가로되 너는 이 혜초(慧超). 스님이 이로 좇아 신입(信入)했고 그 말이 제방에 전파되었다. 처음에 여산(廬山) 여가봉(余家峯)으로부터 요청으로 귀종(歸宗)에 내려와 거주했다. 상당하여 시중해 가로되 제상좌(諸上座)여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다만 가히 일도(一度; 一回)니 지여(只如) 영회(領會; )해 마치면 이 견문각지가 이 견문각지가 아니다. 알고자 하느냐, 제상좌를 위해() 설파(說破)해 마쳤으니 너희의 깨침을 기다려야 비로소 옳다.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師曰) 내가 너를 향해 말하면 곧 달리 있음이다(別有也). 묻되 무엇이 이 귀종경(歸宗境)입니까. 사왈 이 네가 무엇을 보느냐(; 저본에 로 지었음). 가로되 무엇이 이 경중인(境中人)입니까. 사왈 나가거라(出去). 묻되 국왕이 청명(請命)하여 법연(法筵)을 크게 열었으니(). 견문에 떨어지지 말고 청컨대 스님이 속히 말하십시오. 사왈 쓸데없는 언어(閑言語). 가로되 스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왈 또 어지럽게 설하는구나. 묻되 듣건대() 교에 말씀이 있어(敎有言) 이 신심(身心)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들어야 이를 곧 이름하여 불은을 갚음이라 한다. 진찰은 곧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불음을 갚음입니까. 사왈 네가 만약 옳다면() 곧 불은을 갚음이다. 묻되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대지(大地)가 득문(得聞)합니다만 사자후(獅子吼)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너는 도리어 듣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무정과 같습니다. 사왈 너는 이회(理會)함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묻되 고인이 견문을 여의지 않음으로써 종()을 삼았습니다. 미심하오니 화상은 무엇으로써 종을 삼습니까. 사왈 이 질문이 심히 좋다. 가로되 오히려 이는 삼연사연(三緣四緣)입니다. 사왈 어지럽게 말하지 말아라. 스님이 다음에 금릉 봉선사(奉先寺)에 주()했고 오래지 않아 다시 보은도량(報恩道場)으로 옮겨 머물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4(979) 귀적(歸寂)했다.

敎有言; 릉엄경3에 이르되 이 심심(深心)을 가지고 진찰(塵剎)을 받들어야 이를 곧 이름하여 불은을 갚음이라 한다.

 

洪州鳳棲山同安院紹顯禪師 僧問 王恩降旨師親受 熊耳家風乞一言 師曰 已道了也 問千里投師請師一接 師曰 好入處 雲蓋山僧乞瓦造殿 有官人問 旣是雲蓋何用乞瓦 無對 師代曰 罕遇奇人

 

홍주(洪州) 봉서산(鳳棲山) 동안원(同安院) 소현선사(紹顯禪師). 승문(僧問) 왕은(王恩)의 강지(降旨; 諭旨를 내리다)를 스님이 친수(親受)하셨으니 웅이(熊耳)의 가풍을, 일언(一言)을 구걸합니다. 사왈(師曰) 이미 말해 마쳤다. 묻되 천 리에서 스님에게 투신했으니 스님의 일접(一接)을 청합니다. 사왈 좋은 입처다(好入處). 운개산(雲蓋山)의 중이 와조전(瓦造殿)을 구걸하자 어떤 관인(官人)이 묻되 이미 이 운개(雲蓋)거늘 왜 걸와(乞瓦)를 씁니까.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대왈(代曰) 드물게 기인(奇人)을 만났습니다.

 

江州廬山棲賢寺慧圓禪師 上堂示衆曰 出得僧堂門見五老峯 一生參學事畢 何用更到遮裏來 雖然如此 也勞上座一轉 無事珍重 僧問 不是風動不是幡動 未審古人意旨如何 師曰 大衆一時會取 又上堂有僧擬問 師乃指其僧曰 住住 其僧進步問 從上宗乘請師擧唱 師曰 前言不 後語難追 曰未審今日事如何 師曰 不會人言語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好 問如何是棲賢境 師曰 入得三門便合知 問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此欠少 問祖燈重耀 不吝慈悲 更垂中下 師曰 委得麽 曰恁麽卽方便門已開 師曰 也賺

; 明了 領悟 契合 亦作構 覯

此欠少; 諸禪錄作此土不欠少

 

강주(江州) 여산(廬山) 서현사(棲賢寺) 혜원선사(慧圓禪師). 상당하여 시중해 가로되 승당문(僧堂門)을 나감을 얻어(出得) 오로봉(五老峯)을 보면 일생의 참학사(參學事)를 마치거늘 어찌 다시 이 속에 이르러 옴을 쓰리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또한 상좌를 1(; . ) 노고롭게 한다.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승문(僧問) 이 풍동(風動)이 아니며 이 번동(幡動)이 아니라 하니 미심합니다, 고인의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사왈(師曰) 대중은 일시에 회취(會取; 領會하다)하라. 또 상당하매 어떤 중이 물으려 하자 스님이 이에 그 중을 가리키며 가로되 멈추어라(), 멈추어라. 그 중이 걸음을 전진하고(進步) 묻되 종상(從上)의 종승(宗乘)을 청컨대 스님이 거창(擧唱)하십시오. 사왈 전언(前言)이 불구()하면 후어(後語)가 쫓기 어렵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금일사(今日事)가 어떻습니까. 사왈 사람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구나.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좋구나(). 묻되 무엇이 이 서현경(棲賢境)입니까. 사왈 삼문(三門)에 듦을 얻으면 바로 합당히 알아라.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 여기는 흠소한가(此欠少). 묻되 조등(祖燈)이 거듭 빛나니(重耀) 자비를 아끼지 말고 다시 중하(中下)에게 내리십시오(). 사왈 앎을 얻었느냐(委得麽).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방편문이 이미 열렸습니다. 사왈 또 속이는구나(也賺).

; 명료. 영오(領悟; 깨달아 앎). 계합. 또 구()구ㆍ()로 지음.

此欠少; 여러 선록에 차토에도 흠소하지 않다(此土不欠少)로 지었음.

 

洪州觀音院從顯禪師 泉州莆田人也 少依本邑石梯山出家具戒 參法眼受記 初住昇州妙果院 後住茲院參學頗衆 師上堂衆集 良久謂曰 文殊深贊居士 未審居士受贊也無 若受贊何處有居士耶 若不受贊文殊不可虛發言 大衆作麽生會 若會眞箇衲僧 時有僧問 居士默然文殊深贊此意如何 師曰 汝問我答 曰恁麽人出頭來又作麽生 師曰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僧問 如何是觀音家風 師曰 眼前看取 曰忽遇作者來 作麽生見待 師曰 貧家只如此 未必便言歸 問久負沒絃琴 請師彈一曲 師曰 作麽生聽 其僧側耳 師曰 賺殺人 師謂衆曰 盧行者當時大庾嶺頭爲明上座言 莫思善莫思惡 還我明上座本來面目來 觀音今日不恁麽道 還我明上座來 恁麽道是曹谿子孫 若是曹谿子孫 又爭合除却四字 若不是又過在什麽處 試出來商量看 良久師又曰 此一衆眞行脚人也 珍重 太平興國八年九月中 師謂檀那袁長史曰 老僧三兩日間歸鄕去 袁曰 和尙尊年何更思鄕 師曰 歸鄕圖得好鹽喫 袁不測其言 翌日師不疾而坐亡 壽七十有八 袁長史建塔于西山

見待; 接待 招待

長史; 官名 亦稱別駕 漢代相國或三公的佐吏 魏晉以後王公府的佐吏 後世州刺史的佐吏

 

홍주(洪州) 관음원(觀音院) 종현선사(從顯禪師). 천주(泉州) 보전(莆田) 사람이니 소년(少年)에 본읍(本邑) 석제산(石梯山)에 의지해 출가하고 구계(具戒)했고 법안을 참해 수기(受記)했다. 처음은 승주(昇州) 묘과원(妙果院)에 주()했고 후에 자원(茲院)에 주했는데 참학(參學)이 자못 많았다().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이 모이자 양구(良久)하고 일러 가로되 문수(文殊)가 거사(유마거사)를 심찬(深贊; 깊이 칭찬)했거니와 미심하나니 거사가 칭찬을 수용(受容; )했는가 또는 아닌가. 만약 칭찬을 수용했다면 어느 곳에 거사가 있겠는가. 만약 칭찬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문수가 헛되이 발언함이 옳지 못하다. 대중은 어떻게 이회(理會)하는가. 만약 이회한다면 진개(眞箇)의 납승이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거사가 묵연하고 문수가 심찬(深贊)한 이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師曰) 네가 묻고 내가 답한다. 가로되 이러한 사람(恁麽人)이 출두해 온다면 또 어떻습니까. 사왈 가서 물이 다한 곳에서 앉아 구름이 일어남을 볼 때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관음(觀音)의 가풍입니까. 사왈 눈 앞을 간취(看取)하라. 가로되 홀연히, 작자가 옴을 만나면 어떻게 견대(見待)하겠습니까. 사왈 빈가(貧家)가 다만 이와 같으니 돌아간다고 바로 말함이 필요치 않다. 묻되 오래 몰현금(沒絃琴)을 짊어졌으니 청컨대 스님이 일곡(一曲) 탄주(彈奏; )하십시오. 사왈 어떻게 들을건가(). 그 중이 귀를 기울였다. 사왈 사람을 너무 속이는구나(賺殺人).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노행자(盧行者)가 당시에 대유령두(大庾嶺頭)에서 명상좌(明上座)를 위해 말하되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명상좌의 본래면목을 송환해 오너라. 관음은 금일 이렇게 말하지 않겠다. 나에게 명상좌를 송환해 오너라 하리니 이렇게 말함이 이 조계(曹谿; 慧能)의 자손이다. 만약 이 조계의 자손이라면 또 어찌해야() 합당히 4(四字; 曹谿子孫)를 제각(除却)하겠는가. 만약 옳지() 않다면 또 허물이 어느 곳에 있느냐. 시험 삼아 나와서 상량(商量)해 보아라. 양구(良久)하고 스님이 또 가로되 이 일중(一衆; 一群)은 참다운 행각인이다. 진중(珍重). 태평흥국(太平興國) 8(983) 9월 중 스님이 단나(檀那; 시주) 원장사(長史)에게 일러 가로되 노승이 삼양일(三兩日) 사이에 귀향(歸鄕)하겠다. 원왈(袁曰) 화상은 존년(尊年; 高齡)인데 어찌 다시 사향(思鄕)합니까. 사왈 귀향(歸鄕)하여 호염(好鹽)을 먹음을 기도(企圖)하겠다(圖得). ()이 그 말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다음날(翌日) 스님이 질병 없이 좌망(坐亡)했다. 나이는 78이다. 원장사가 서산에 건탑(建塔)했다.

見待; 접대(接待). 초대(招待).

長史; 벼슬 이름. 또한 명칭이 별가(別駕)니 한대(漢代) 상국(相國) 혹 삼공의 좌리(佐吏)였고 위진(魏晉) 이후엔 왕공부(王公府)의 좌리였고 후세엔 주자사(州刺史)의 좌리였음.

 

廬州長安院延規禪師 僧問 如何是庵中主 師曰 到諸方但道從長安來 師化緣將畢 以住持付門人辯實接武說法 乃歸本院西堂示滅

接武; 繼承 武 跡也

 

여주(廬州; 저본에 盧州로 지었음) 장안원(長安院) 연규선사(延規禪師). 승문(僧問) 무엇이 이 암중주(庵中主)입니까. 사왈(師曰) 제방에 이르거든 단지 말하되 장안으로부터 왔다 하라. 스님이 화연(化緣)을 장차 마치려고 하자 주지를 문인(門人) 변실(辯實)에게 부촉하여 설법을 접무(接武)하게 하고 이에 본원(本院) 서당(西堂)으로 돌아가 시멸(示滅)했다.

接武; 계승(繼承). ()는 적().

 

常州正勤院希奉禪師 蘇州人也 姓謝氏 住本院爲第二世 初上堂示衆曰 古聖道 圓同太虛無欠無餘 又云 一一法一一宗 衆多法一法宗 又道起唯法起 滅唯法滅 又云 起時不言我起 滅時不言我滅 據此說話 屈滯久在叢林上座 若是初心兄弟 且須體道 人身難得正法難聞 莫同等閑 施主衣食不易消遣 若不明道 箇箇盡須還他 上座要會道麽珍重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什麽處得遮箇消息 問如何是諸法空相 師曰 山河大地 問僧衆雲集 請師擧唱宗乘 師曰 擧來久矣 問佛法付囑國王大臣 今日正勤將何付囑 師曰 萬歲萬歲 問古人有言 山河大地是汝眞善知識 如何得山河大地爲善知識去 師曰 汝喚什麽作山河大地 問如何是合道之言 師曰 汝問我答 問靈山會上迦葉親聞 未審今日誰人得聞 師曰 迦葉親聞箇什麽 問古佛道場學人如何得到 師曰 汝今在什麽處 問如何是和尙圓通 師敲禪床三下 問如何是脫却根塵 師曰 莫妄想 問人王法王是一是二 師曰 人王法王 問如何是諸法寂滅相 師曰 起唯法起滅唯法滅 問如何是未曾生底法 師曰 汝爭得知 問無著見文殊 爲什麽不識 師曰 汝道文殊還識無著麽 問得意誰家新曲妙 正勤一句請師宣 師曰 道什麽 曰豈無方便也 師曰 汝不會我語

屈滯; 一久居下位 二形容語言艱澀

 

상주(常州) 정근원(正勤院) 희봉선사(希奉禪師). 소주(蘇州) 사람이며 성이 사씨(謝氏). 본원(本院)에 주(; 住持)하니 제2세가 된다. 처음에 상당하여 시중해 가로되 고성(古聖; 3)이 말하되 원만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우운(又云) 하나하나의 법이 하나하나의 종()이며 중다(衆多)한 법이 일법(一法)의 종()이다. 또 말하되 일어남은 오직 법이 일어남이며 멸함은 오직 법이 멸함이다. 우운(又云) 일어날 때 내가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고 멸할 때 내가 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설화(說話)에 의거하자면 총림에 오래 있은 상좌를 굴체(屈滯)케 한다. 만약 이 초심의 형제일진대 다만 꼭 도를 체달(體達)해야 하나니 인신(人身)은 얻기 어렵고 정법은 듣기 어렵다. 등한(等閑)함과 같지 말아야 하나니 시주의 의식(衣食)은 소견(消遣; 消除)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도를 밝히지 못한다면 개개(箇箇)가 모두 그에게 상환(償還)함을 써야() 한다. 상좌가 도를 알고자 하느냐, 진중(珍重). 승문(僧問)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師曰) 어느 곳에서 저개(遮箇)의 소식을 얻었느냐. 묻되 무엇이 이 제법의 공상(空相)입니까. 사왈 산하대지다. 묻되 승중(僧衆)이 운집했으니 청컨대 스님이 종승(宗乘)을 거창(擧唱)하십시오. 사왈 들어 온(擧來) 지 오래되었다. 묻되 불법을 국왕과 대신에게 부촉한다 하니 금일 정근(正勤; 正勤院)은 무엇을 가져 부촉합니까. 사왈 만세, 만세. 묻되 고인이 말씀이 있어 산하대지가 이 너의 참다운 선지식이다 했거니와 어찌해야 산하대지가 선지식이 됨을 얻습니까. 사왈 네가 무엇을 일러 산하대지라 하느냐. 묻되(; 저본에 로 지었음) 무엇이 이 도에 합하는 말입니까. 사왈 네가 묻고 내가 답한다. 묻되 영산회상에선 가섭이 친문(親聞)했습니다만 미심하오니 금일은 어떤 사람(誰人)이 득문(得聞)합니까. 사왈 가섭이 저() 무엇을 친문했는가. 묻되 고불의 도량에 학인이 어떻게 득도(得到)합니까. 사왈 네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원통(圓通)입니까. 스님이 선상을 세 번(三下) 두드렸다. 묻되 무엇이 이 근진(根塵)을 탈각(脫却)함입니까. 사왈 망상하지 말아라. 묻되 인왕(人王)과 법왕이 이 하나입니까 이 둘입니까. 사왈 인왕이며 법왕이다. 묻되 무엇이 이 제법의 적멸상(寂滅相)입니까. 사왈 일어남은 오직 법이 일어남이며 멸함은 오직 법이 멸함이다. 묻되 무엇이 이 일찍이 생하지 않은 법입니까. 사왈 네가 어찌 득지(得知)하겠는가. 묻되 무착이 문수를 보고 무엇 때문에 알지 못했습니까. 사왈 네가 말하라, 문수는 도리어 무착을 알았느냐. 묻되 득의(得意)한 뉘집의 신곡(新曲)이 묘하거니와 정근(正勤)1구를 청컨대 스님이 선설(宣說)하십시오. 사왈 무어라고 말했느냐. 가로되 어찌 방편이 없겠습니까. 사왈 너는 나의 말을 알지 못한다.

屈滯; 1. 하위(下位)에 구거(久居). 2. 어언이 난삽(艱澀)함을 형용.

 

洛京興善棲倫禪師 僧問 如何是佛 師曰 向汝恁麽道卽得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適來猶記得 因宮師致政李公繼勳終世 有僧問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未審宮師李公向什麽處去也 師曰 恰被汝問著 曰恁麽卽虛申一問 師曰 汝不妨靈利

宮師; 宋代太子少師之別稱 相對於太子太師而言 [百度]

致政; 猶致仕 指官吏將執政的權柄歸還給君主

 

낙경(洛京) 흥선(興善) 서륜선사(棲倫禪師).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師曰) 너를 향해 이렇게 말함이 곧 옳다.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입니까. 사왈 적래(適來)에 오히려 기득(記得)했다. 궁사(宮師)가 치정(致政)하고는 이공(李公) 계훈(繼勳)이 세상을 마침으로 인해 어떤 중이 묻되 이 법이 법위(法位)에 머물면서 세간상(世間相)으로 상주(常住)한다 했는데 미심하오니 궁사(宮師) 이공(李公)이 어느 곳을 향해 갔습니까. 사왈 마침 너의 물음을 입었다(恰被汝問著).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헛되이 일문(一問)을 폈습니다(). 사왈 너는 영리(靈利)함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宮師; 송대(宋代) 태자소사(太子少師)의 별칭.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상대하여 말함임 [백도].

致政; 치사(致仕)와 같음. 관리가 집정()의 권병()을 가져다 돌려보내어 군주에게 환급(還給; 돌려줌).

 

洪州武寧嚴陽新興齊禪師 僧問 如何得出三界去 師曰 汝還信麽 曰信卽深信 乞和尙慈悲 師曰 只此信心亘古亘今 快須究取何必沈吟 要出三界三界唯心 師因雪謂衆曰 諸上座還見雪麽 見卽有眼 不見無眼 有眼卽常 無眼卽斷 恁麽會得佛身充滿 僧問 學人辭去泐潭 乞和尙示箇入路 師曰 好箇入路 道心堅固 隨衆參請 隨衆作務 要去卽去 要住卽住 去之與住更無他故 若到泐潭不審馬祖

 

홍주(洪州) 무녕(武寧) 엄양(嚴陽) 신흥제(新興齊) 선사. 승문(僧問) 어찌해야 3()를 벗어남을 얻겠습니까. 사왈(師曰) 네가 도리어 믿느냐. 가로되 믿기는 곧 깊이 믿지만 화상의 자비를 구걸합니다. 사왈 다만 이 신심(信心)이 긍고긍금(亘古亘今)하나니 쾌히 구취(究取)함을 쓸 것이지 하필 침음(沈吟)하느냐. 3계를 벗어나길 요한다면 3계가 오직 마음이다. 스님이 설()로 인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제상좌여 도리어 설을 보느냐. 보면 곧 안()이 있음이며 보지 못하면 안이 없다. 안이 있으면 곧 상()이며 안이 없으면 곧 단()이다. 이렇게 회득(會得)해야 불신(佛身)이 충만하다. 승문 학인이 고별하고 늑담(泐潭)으로 가겠습니다. 화상에게 구걸하오니 저() 입로(入路)를 보이십시오. 사왈 호개(好箇)의 입로니 도심(道心)이 견고해야 한다. 대중 따라 참청(參請)하고 대중 따라 작무(作務)하라. 가려고 하면 곧 가고 머물려고 하면 곧 머물지니 감과 머묾이 다시 딴 게 없는 연고이다. 만약 늑담에 이른다면 마조(馬祖)에게 불심(不審)이라 하라.

 

潤州慈雲匡達禪師 僧問 佛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 未審和尙出世如何 師曰 恰好 曰作麽生 師曰 不好

 

윤주(潤州) 자운(慈雲) 광달선사(匡達禪師). 승문(僧問) 부처가 일대사인연을 쓰는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미심하오니 화상의 출세는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흡호(恰好). 가로되 어째서입니까(作麽生). 사왈 불호(不好).

 

景德傳燈錄卷第二十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