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분등록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풍즙(馮楫)

태화당 2026. 7. 4. 09:48

馮楫(佛眼淸遠禪師法嗣)

馮楫 字濟川 遂寧人 壯歲徧參 後依佛眼遠 一日同眼經行法堂 偶童子趨庭 吟曰 萬象之中獨露身 眼拊楫背曰 好 楫於是契入 紹興丁巳除給事 會大慧就明慶開堂 慧下座 楫挽之曰 和尙每言於士大夫前曰 此生決不作這蟲豸 今日因甚却納敗闕 慧曰 盡大地是箇杲上座 你向甚處見他 楫擬對 慧便掌 楫曰 是我招得 時群寮失色 楫大笑曰 長老與楫佛法相見 越月 特丐祠坐夏徑山 榜其室曰不動軒 一日 慧陞座 擧藥山問石頭曰 三乘十二分敎 某甲麤知 承聞南方直指人心 見性成佛 實未明了 伏望慈悲示誨 頭曰 恁麽也不得 不恁麽也不得 恁麽不恁麽總不得 儞作麽生 山罔措 頭曰 子緣不在此 可往江西見馬大師去 山至馬祖處 亦如前問 祖曰 有時敎伊揚眉瞬目 有時不敎伊揚眉瞬目 有時敎伊揚眉瞬目者是 有時敎伊揚眉瞬目者不是 山大悟 慧拈罷 楫隨至方丈曰 適來和尙所擧底因緣 某理會得了 曰 你如何會 曰 恁麽也不得 囌嚧娑婆訶 不恁麽也不得 㗭唎娑婆訶 恁麽不恁麽總不得 囌嚧㗭唎娑婆訶 慧印之以偈曰 梵語唐言 打成一塊 咄哉俗人 得此三昧 楫後知卭州 所至宴晦無倦 甞自詠曰 公事之餘喜坐禪 少曾將脇到床眠 雖然現出宰官相 長老之名四海傳 二十三年秋 預報親知 期以十月三日報終 至日令後廳置高座 見客如平時 辰巳間 降階望闕肅拜 請漕使攝卭事 著僧衣履 踞高座 囑官吏道俗 各宜向道 扶持敎門 建立法幢 漕使請曰 安撫去住如此自繇 何不留一頌以表罕聞 楫張目 索筆書曰 初三十一 中九下七 老人言盡 龜哥眼赤 書畢 拈拄杖按膝而化 楫甞以建炎後名刹 敎藏多燬於兵 給俸補印 凡一百二十八藏 有偈曰 我賦躭痴癖 視財等虗空 不作子孫計 不爲聲色娛 所得月俸給 惟將贖梵書 庶使披閱者 咸得入無餘 古佛爲半偈 尙乃捨全軀 是以不惜財 開示諸迷途 借問惜財者 終日較錙銖 無常忽到日 寧免生死無

淸遠; (1067-1120) 宋代楊岐派僧 號佛眼 臨邛(四川邛崍)李氏 嚴正寡言 因讀法華有疑 造舒州太平 依五祖法演參究不契 辭去 至金陵蔣山 邂逅靈源 靈源勸返 時演已遷海會 及再謁 遂得大悟 隱居大中庵 崇寧萬壽寺新成 王渙之請師開法 次補龍門 逾十二年 居和之褒禪 宣和初(1119) 歸蔣山之東堂 二年 辭世 壽五十四 臘四十 有語錄八卷 [普燈錄十一 續傳燈錄二十五]

; 語氣詞 用于句尾 表示疑問 或陳述結束 正字通 聻 梵書聻爲語助 音你

開堂; 禪院新任住持 始初上堂說法稱作開堂

蟲豸; 有足曰蟲 無足曰豸 [禪林寶訓音義]

敗闕; 失敗缺陷之義 又受挫 挫敗

丐祠; 請求奉祠

娑婆訶; <> svāhā 此翻云究竟 圓滿 成就 吉祥 息災 憶念 爲眞言密咒中最後所附之語句

宴晦; 淸齋佛門 淸淨之持齋也 由下午至明旦不食 謂之齋

法幢; 法旗 喩指禪法

安撫; 安撫使 官名 爲由中央派遣處理地方事務的官員 隋代曾設安撫大使 爲行軍主帥兼職 唐代前期派大臣巡視經過戰爭或受災地區 稱安撫使 宋初沿之 後漸成爲各路負責軍務治安的長官 以知州知府兼任 [百度百科]

龜哥; 古代鑽龜甲而卜吉凶 哥 兄也 美稱之也

古佛爲半偈; 祖庭事苑一 夜叉說半偈 涅槃經(13)云 佛言 過去之世 佛日未出 我於爾時作婆羅門 修菩薩行 周徧求索大乘經典 乃至不聞方等文字 住雪山中 思惟坐禪 時釋提桓因心大驚怪 要當自試 自變其身作羅刹像 去其不遠 其聲淸雅 宣過去佛所說半偈 諸行無常 是生滅法 聞是半偈 心生歡喜 卽從座起 四向顧視云 向所聞偈 誰之所說 唯見羅刹 卽便前至 善哉大士 汝於何處 得是過去離怖畏者所說半偈 卽答我言 我不食多日 心亂䆿語 非我本心之所知也 汝所食者爲是何物 答言 食人暖肉 飮人熱血 汝但具足說是半偈已 當以此身奉施 誰當信汝爲八字故 捨所愛身 我所證者 梵天釋提桓因十方世尊 汝若如是 諦聽諦聽 當爲汝說 生滅滅已 寂滅爲樂

錙銖; 指重量 錙 古重量單位 六銖 或八銖 十二銖 六兩 八兩 皆稱爲錙 銖 古衡制單位 一兩之二十四分之一爲一銖 孫子算經上 稱之所起 起于黍 十黍爲一絫 十絫爲一銖 二十四銖爲一兩 十六兩爲一斤

 

풍즙(馮楫)(佛眼 淸遠禪師法嗣)

풍즙(馮楫; ?-1153)은 자가 제천(濟川)이며 수녕(遂寧) 사람이다. 장세(壯歲)에 편참(徧參)했고 후에 불안원(佛眼遠; 淸遠)에게 의지했다. 어느 날 불안(佛眼; )과 함께 법당을 경행(經行)했는데 우연히 동자(童子)가 뜰을 걸으면서(; . ) 읊어 가로되 만상(萬象) 가운데 독로(獨露)한 몸이여. 불안이 즙()의 등을 두드리며() 가로되 좋지(). 즙이 이에서 계입(契入)했다. 소흥(紹興) 정사(丁巳; 1137) 급사(給事)에 제수(除授; )했다. 마침() 대혜(大慧)가 명경(明慶)으로 나아가 개당(開堂)했다. 대혜가 하좌하자 즙이 당기며(挽之) 가로되 화상은 매번 사대부(士大夫) 앞에서 말해 가로되 차생(此生)에 결정코 이 충치(蟲豸)를 짓지 않겠다 했거늘 금일 무엇으로() 인해 도리어 패결(敗闕)을 받아들입니까(). 혜왈(慧曰) 온 대지가 시개(是箇) 고상좌(杲上座; 宗杲)거늘 네가 어느 곳을 향해 그를 보느냐. 즙이 대답하려고 하자 대혜가 바로 장()했다. 즙왈(楫曰) 이는 내가 초득(招得)했다. 때에 군료(群寮; 同官)가 실색(失色)했다. 즙이 대소(大笑)하고 가로되 장로(長老)와 즙()이 불법으로 상견했다. 달을 넘기자(越月) 특별히 개사(丐祠)하여 경산(徑山)에서 좌하(坐夏)했다. 그 실()을 방()해 가로되 부동헌(不動軒)이라 했다. 어느 날 대혜가 승좌(陞座)하여 거()했다. 약산(藥山; 惟儼)이 석두(石頭; 希遷)에게 물어 가로되 312분교는 모갑이 대략() 압니다만 승문(承聞)컨대 남방에선 인심(人心)을 직지하여 견성하고 성불한다 하니 실로 환히 깨닫지(明了) 못했습니다. 복망(伏望)하오니 자비로 시회(示誨)하십시오. 두왈(頭曰) 이러해도(恁麽也) 얻지 못하고 이러하지 않아도 얻지 못하고 이러하거나 이러하지 않거나 모두 얻지 못하나니 너()는 어떠한가(作麽生). 약산이 망조(罔措)했다. 두왈(頭曰) 자네의 인연이 여기에 있지 않나니 가히 강서로 가서 마대사(馬大師)를 보러 가거라. 약산이 마조(馬祖)의 처소에 이르러 또한 전문(前問)과 같았다. 조왈(祖曰) 어떤 때는 그()로 하여금 양미순목(揚眉瞬目;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작임)하게 하고 어떤 때는 그로 하여금 양미순목하지 못하게 하고 어떤 때는 그로 하여금 양미순목하게 하는 자를 옳다고 하고 어떤 때는 그로 하여금 양미순목하게 하는 자를 옳지 않다고 한다. 약산이 대오했다. 대혜가 염해 마치자(拈罷) 즙이 따라가 방장에 이르러 가로되 아까(適來) 화상이 든 바의 인연을 모()가 이회(理會)함을 얻었습니다. 가로되 네가 어떻게 이회하느냐. 가로되 이러함도 얻지 못하고 소로사바하(囌嚧娑婆訶) 이러하지 않음도 얻지 못하고 실리사바하(㗭唎娑婆訶) 이러하거나 이러하지 않거나 모두 얻지 못한다. 소로실리사바하. 대혜가 게로써 인가(印可; )하며 가로되 범어(梵語)와 당언(唐言)/ 일괴를 이루었다(打成一塊)/ 돌재(咄哉) 속인이/ 이 삼매를 얻었구나. ()이 후에 공주(卭州)를 지(; 主宰)했다. 이르는 곳(所至)에 연회(宴晦)하며 게으름이 없었다. 일찍이 자영(自詠)해 가로되 공사(公事)의 여가(餘暇; )에 좌선을 좋아하나니/ 일찍이 옆구리를 가지고 상()에 이르러 수면(睡眠; )함이 적었다()/ 비록 그렇게 재관(宰官; 널리 官吏를 가리킴)의 상(; 形相)을 현출(現出)했지만/ 장로란 이름이 사해(四海)에 전한다. 23(1153) 가을에 친지(親知)에게 예보(預報)하되 103일을 기한(期限; )으로 보종(報終; 報緣을 마침)한다. 날에 이르자 후청(後廳)에 고좌(高座)를 안치하게 하고 견객(見客)함이 평시와 같았다. 진사(辰巳) 간에 이르러 섬돌로 내려와(降階) 대궐을 바라보며 숙배(肅拜)했다. 조사(漕使) 섭공사(攝卭事)를 청했다. 승의(僧衣)와 신을 입고() 고좌(高座)에 걸터앉아() 관리와 도속(道俗)에게 부촉하되 각자 의당 향도(向道)하여 교문(敎門)을 부지(扶持)하고 법당(法幢)을 건립하라. 조사(漕使)가 청왈(請曰) 안무(安撫)가 거주(去住)에 이와 같이 자유(自繇; 自由)거늘 왜 1()을 머물러 한문(罕聞)을 표()하지 않습니까. 즙이 눈을 벌리더니(張目) 붓을 찾아 서사(書寫; )해 가로되 초()31이며/ ()9며 하()7이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귀가(龜哥)의 눈이 붉다. 서사해 마치자 주장자를 집어 안슬(按膝)하고 화(; 遷化)했다. 즙이 일찍이 건염(建炎; 1127-1130) 후에 명찰(名刹)에서 장교(敎藏)가 다분히 병화(兵火; )로 불탔는데() 급봉(給俸)으로 보인(補印)했으니 무릇 128()이다. ()가 있어 가로되 내가 치벽(痴癖; 어리석은 버릇)을 탐(; 좋아하다. 즐기다)함을 부(; 시가를 짓다)하나니/ 허공과 같이() 재물을 본다/ 자손의 생계(生計; )를 짓지 않고/ 성색(聲色)의 오락(娛樂)을 위함이 아니다/ 소득(所得)의 월봉급(月俸給)/ 오직 가져서() 범서(梵書)를 속()한다/ 바라건대() 피열(披閱)하는 자로 하여금/ 모두() 무여(無餘; 殘餘가 없음)에 듦을 얻게 하소서/ 고불이 반게를 위해(古佛爲半偈)/ 오히려() () 전구(全軀)를 버렸다/ 이런 까닭으로 석재(惜財)하지 않나니/ 모든 미도(迷途)에게 개시(開示)한다/ 석재(惜財)하는 자에게 차문(借問)하나니/ 종일 치수(錙銖)를 비교하느냐/ 무상(無常)이 홀연히 이르는 날/ 어찌() 생사가 없음을 면하겠는가.

淸遠; (1067-1120) 송대 양기파승. 호는 불안(佛眼)이며 임공(臨邛; 사천 공래) 이씨(李氏). 엄정(嚴正)하고 말이 적었음. 법화경을 읽다가 의심이 있음으로 인해 서주(舒州) 태평(太平)으로 나아가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의지(依止)해 참구(參究)했으나 계합(契合)치 못하자 고별하고 떠나 금릉 장산(蔣山)에 이르렀는데 영원(靈源)을 해후(邂逅)했으며 영원이 돌아가기를 권했음. 때에 법연(法演)은 이미 해회(海會)로 옮겼는데 재알(再謁)함에 이르러 드디어 대오(大悟)를 얻었으며 대중암(大中庵)에 은거했음. 숭녕만수사(崇寧萬壽寺)를 새로 만들자 왕환지(王渙之)가 스님에게 청해 개법(開法)했음. 다음으로 용문(龍門)에 보임(補任)하여 12년을 넘자 화()의 포선(褒禪)에 거주하다가 선화 초(1119) 장산(蔣山)의 동당(東堂)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4며 승랍은 40. 어록 8권이 있음 [보등록11. 속전등록25].

; 어기사(語氣詞). 구미(句尾)에 쓰며 의문을 표시하거나 혹은 결속을 진술함. 정자통 니() 범서(梵書)에서 니()를 어조사로 삼는다. 음이 니().

開堂; 선원의 신임 주지가 처음으로 상당하여 설법함을 일컬어 개당이라 함.

蟲豸; 발이 있음을 가로되 충()이며 발이 없음을 가로되 치()[선림보훈음의].

敗闕; 실패결함(失敗缺陷)의 뜻. 또 수좌(受挫; 좌절을 받음). 좌패(挫敗; 꺾여 패함).

丐祠; 봉사(奉祠)를 청구(請求).

娑婆訶; <> svāhā. 여기에선 번역해 이르되 구경ㆍ원만ㆍ성취ㆍ길상ㆍ식재(息災)ㆍ억념이니 진언 밀주(密咒) 중 최후에 붙이는 바의 어구.

宴晦; 불문(佛門)에 청재(淸齋). 청정한 지재(持齋). 하오(下午)로부터 명단(明旦)에 이르기까지 불식(不食)함을 일러 재()라 함.

法幢; 법기(法旗)니 선법을 비유로 가리킴.

安撫; 안무사(安撫使)니 벼슬 이름. 중앙으로 말미암아 파견되어 지방 사무를 처리하는 관원. 수대(隋代)에 일찍이 안무대사(安撫大使)를 설치하여 행군(行軍)과 주수(主帥)를 겸직했음 당대 전기(前期)에 대신을 파견해 전쟁 혹 수재지구(受災地區)를 순시하고 경과했는데 명칭이 안무사였음. 송초에 이를 따랐고 후에 점차 각로(各路)에 군무(軍務)와 치안을 부책(負責)하는 장관이 되었고 지주지부(知州知府)를 겸임했음 [백도백과].

龜哥; 고대에 거북의 등 껍데기를 뚫어 길흉을 점쳤음. ()는 형이니 미칭임.

古佛爲半偈; 조정사원1. 야차설반게(夜叉說半偈) 열반경(13)에 이르되 불타가 말씀하셨다. 과거 세상에 불일(佛日)이 아직 나오지 않았을 적에 내가 이때 바라문이 되어 보살행을 닦으면서 대승경전을 두루 구색(求索)했건만 내지 방등문자(方等文字)를 듣지 못해 설산 중에 머물면서 사유하며 좌선했다. 때에 석제환인(釋提桓因)이 마음에 크게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요컨대 마땅히 스스로 시험코자 스스로 그 몸을 변화하여 라찰(羅刹)의 형상(形像)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떨어지기가 멀지 않았다. 그 소리가 청아(淸雅)하게 과거 불타가 설하신 바 반게(半偈)를 선창(宣暢; 은 화창할 창. 후련할 창)했으니 제행은 무상이라 이 생멸법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 이 반게를 듣고서 마음에 환희를 내어 곧 자리로부터 일어나 사향(四向; 동서남북)을 돌아보고 이르되 아까 들은 바 게는 누가 설한 것인가. 오직 라찰만 보이는지라 곧 바로 앞에 이르러 선재(善哉)로다 대사(大士), 그대는 어느 곳에서 이 과거이포외자(過去離怖畏者; 과거의, 포외를 여읜 자)의 소설(所說)인 반게를 얻었는가. 곧 나에게 답해 이르되 내가 먹지 못한 지 여러 날이라 심란(心亂)하여 잠꼬대(는 잠꼬대 예)한 것이니 내 본심의 알 바가 아니다. 그대가 먹는 바의 것은 이 어떤 물건이 되는가. 답해 말하되 사람의 더운 살을 먹고 사람의 뜨거운 피를 마신다. 그대가 단지 이 반게를 구족히 설한 다음에 마땅히 이 몸을 봉시(奉施)하리라. 누가 마땅히 네가 여덟 글자를 위하는 고로 아끼는 바 몸을 버린다 함을 믿겠는가. 내가 증득한 바의 것은 범천(梵天)이며 석제환인(釋提桓因)이며 시방의 세존이다. 네가 만약 이와 같다면 체청(諦聽; 는 살필 체. 자세할 체)하고 체청하라.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하리라. 생멸이 멸한 다음 적멸로 낙을 삼는다(生滅滅已 寂滅爲樂).

錙銖; 중량을 가리킴. ()는 고대의 중량단위니 6() 8수ㆍ12수ㆍ6()8량을 모두 일컬어 치()라 함. ()는 고대의 형제단위(衡制單位)1량의 24분의 11수가 됨. 손자산경상. 저울의 일어남은 서(; 기장 서)에서 일어났다. 10서가 1()가 되며 10류가 1()가 되며 24수가 1()이 되며 16량이 1()이 된다.

 

贊曰 馮濟川 不動軒 千尋雪嶺萬丈寒潭 咦 著甚來繇 佛眼會中竊得些小活計 一齊斷送徑山老漢

活計; 一生活之計策 禪錄中多比喩禪法或種種機用作略 二生活的工具家産 比喩俗情妄念 此指一

斷送; 打發 發送 餞送 二毀滅

 

찬왈 풍제천(馮濟川; 馮楫)과 부동헌(不動軒)은 천심(千尋; 천 길)의 설령(雪嶺)이며 만장(萬丈)의 한담(寒潭)이다. (). 무슨 내유(來繇; 來由)를 이루겠는가(). 불안회중(佛眼會中)에서 몰래() 사소(些小)한 활계(活計)를 얻어 일제히 경산노한(徑山老漢; 대혜)에게 단송(斷送; 發送)했다.

活計; 1. 생활(生活)의 계책(計策)이니 선록 중에 다분히 선법(禪法) 혹은 갖가지 기용(機用)의 작략(作略)에 비유함. 2. 생활의 공구(工具)와 가산(家産). 속정(俗情)의 망념(妄念)에 비유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斷送; 1. 타발(打發; 파견해서 일을 처리하게 함). 발송. 전송(餞送). 2. 훼멸(毀滅).

 

往生集云 馮楫初訪道禪林 晚年專崇淨業 作西方文彌陀懺儀 初帥瀘南 率道俗作繫念會 蓮池本師 贊曰 傳燈錄載公初參龍門遠 次參妙喜 各有證悟 臨終刻期陞座拈拄杖按膝脫去 其自在顯赫宛有宗門諸大老操略 然都不言念佛往生 何也 良繇著述家彼此立義爲門不同各隨所重而已 彼重直指人心 自應專取了明心地而略淨土 如懷玉金臺再至 圓照蓮蕋標名 皆不錄是也 此重指歸淨土 故詳其生平念佛報盡往生而了明心性自在 其中如所謂旣得見彌陀何愁不開悟是也 喻如重德則顔子列德行之科而不言政事 重才則顔子具王佐之器而不言德行 亦爲門不同耳 淨業人願篤信無惑

往生集; 三卷 明代袾宏撰 收於大正藏第五十一冊 本書集錄中國與印度往生西方者

刻期; 猶克期 約定或限定日期

操略; 應機接物的行爲擧措 機緣運用

懷玉金臺再至; 禮念彌陀道場懺法四 徃生傳云 懷玉丹丘人 注想淨業 近四十年 天寶元年 玉念佛間 忽見西方聖衆 數若恒沙 中有一人 手擎銀臺前以示玉 玉曰 如玉者 本望金臺 何爲銀臺耶 臺乃隱 人亦隱 於是彌加精苦 至三七日 向之擎臺者 復來告云 法師以精苦故 得升上品 (中略)佛與二菩薩共乘金臺 傍千百化佛自西而下迎玉

 

왕생집(往生集)에 이르되 풍즙(馮楫)이 처음엔 선림(禪林)을 방도(訪道; 問道)했으나 만년엔 오로지 정업(淨業)을 숭상(崇尙; )하여 서방문미타참의(西方文彌陀懺儀)를 지었다. 처음 노남(瀘南)을 거느리면서() 도속(道俗)을 인솔(引率)하여 계념회(繫念會)를 만들었다. 연지본사(蓮池本師; 袾宏)가 찬왈(贊曰) 전등록에 실리기를() ()이 용문원(龍門遠; 淸源)을 초참(初參)했고 묘희(妙喜)를 차참(次參)하여 각기 증오(證悟)가 있었으며 임종에 각기(刻期)하고 승좌(陞座)하여 주장자를 집어 안슬(按膝)하고 탈거(脫去; 死去)했다 했으니 그()의 자재(自在)하고 현혁(顯赫)함이 완연히 종문(宗門)의 여러 대로(大老)의 조략(操略)이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염불왕생(念佛往生)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 참으로() 저술가(著述家)가 피차(彼此) 입의(立義)하여 문()을 삼음이 부동(不同)함으로 말미암아() 각기 소중(所重)함을 따를 따름이다. ()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중히 여기는지라 스스로 응당 심지(心地)를 요명(了明)함을 전취(專取)하여 정토를 생략했음이다. 예컨대() 회옥은 금대가 다시 이르렀고(懷玉金臺再至) 원조(圓照)는 연예(蓮蕋; 연꽃)에 표명(標名)했으나 모두 기록하지 않은 게 이것이니 이것은 정토를 지귀(指歸)함을 중히 여겼음이다. 고로 상고(詳考; )하건대 그는 생평(生平)에 염불했고 보()가 다하자 왕생했으며 심성(心性)을 요명(了明)하여 자재(自在)했다. 기중(其中)에 이른 바와 같이 이미 미타(彌陀)를 득견(得見)했거늘 어찌 개오(開悟)하지 못함을 근심하랴한 게 이것이다. 유여(喻如; 비유를 듦) ()을 중히 여기면 곧 안자(顔子; 顔回)를 덕행(德行)의 과()에 나열하고 정사(政事)를 말하지 않으며 재()를 중히 여기면 곧 안자를 왕좌(王佐)의 기()를 갖추었다 하면서 덕행을 말하지 않나니 또한 문()이 부동(不同)할 뿐이다. 정업인(淨業人)은 독신(篤信)하여 무혹(無惑)하기를 바란다.

往生集; 3. 명대 주굉(袾宏)이 찬()했고 대정장 제51책에 수록되었음. 본서는 중국과 인도에서 왕생서방한 자를 집록했음.

刻期; 극기(克期)와 같음. 약정(約定) 혹 일기(日期)를 한정(限定).

操略; 응기접물(應機接物)하는 행위의 거조(擧措; 행동거지)와 기연의 운용.

懷玉金臺再至; 예념미타도량참법4 왕생전에 이르되 회옥(懷玉)은 단구(丹丘) 사람이다. 정업(淨業)을 주상(注想)하기 거의() 40년이었다. 천보(天寶) 원년(742) 회옥이 염불하는 사이에 홀연히 서방 성중(聖衆)을 보았는데 수가 항사(恒沙)와 같았으며 가운데 1인이 있어 손으로 은대(銀臺)를 받들고 앞에서 회옥에게 보였다. 옥왈(玉曰) 회옥 같은 자는 본래 금대(金臺)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은대(銀臺)입니까. ()가 이에 숨고 사람도 또한 숨었다. 이에 더욱 정고(精苦)를 더했고 삼칠일(三七日)에 이르자 접때의 경대자(擎臺者)가 다시 와서 고해 이르되 법사(法師)가 정고(精苦)를 쓴 연고로 상품(上品)에 오름을 얻었습니다. (중략) 부처와 두 보살이 함께 금대(金臺)를 탔고 곁에 천백(千百) 화불(化佛)이 서쪽으로부터 내려와 회옥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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