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역해무문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제2칙 백장야호(百丈野狐)

태화당 2019. 8. 12. 08:14

百丈野狐

百丈和尙 凡參次有一老人 常隨衆聽法 衆人退老人亦退 忽一日不退 師遂問 面前立者復是何人 老人云 某甲非人也 於過去迦葉佛時 曾住此山 因學人問 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 某甲對云 不落因果 五百生墮野狐身 今請和尙 代一轉語 貴脫野狐 遂問 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 師云 不昧因果 老人於言下大悟 作禮云 某甲已脫野狐身 住在山後 敢告和尙 乞依亡僧事例 師令維那白槌告衆 食後送亡僧 大衆言議 一衆皆安 涅槃堂又無人病 何故如是 食後只見師領衆 至山後巖下 以杖挑出一死野狐 乃依火葬 師至晩上堂 擧前因緣 黃蘗便問 古人錯祇對一轉語 墮五百生野狐身 轉轉不錯 合作箇甚麽 師云 近前來與伊道 黃蘗遂近前 與師一掌 師拍手笑云 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無門曰 不落因果 爲甚墮野狐 不昧因果 爲甚脫野狐 若向者裏著得一隻眼 便知得前百丈贏得風流五百生

頌曰 不落不昧 兩采一賽 不昧不落 千錯萬錯

百丈; 此指百丈懷海 百丈 百丈山 位於江西奉新縣西北 靠近洞山 巖巒峻極 故號百丈 以山勢超群 故又稱大雄山或大雄峰 唐德宗興元元年(七八四) 懷海入山 創建鄕導庵(卽百丈寺) 大揚禪風 當時有黃檗希運 潙山靈祐 百丈涅槃等才智之士雲集於此 遂營建法堂 僧堂等 竝折衷大小乘律典 制訂禪林淸規(百丈淸規) 自此 始有獨立 完整之禪院 而於此之前 禪僧多居於律寺 憲宗元和九年(八一四)懷海入寂 門人涅槃繼掌住持之職 未久 奉唐宣宗敕命 興建大智聖禪寺 成爲禪宗道場 宋代以後 優秀禪僧輩出 如 明照安 道恒 寶月 智贇 惟政 元肅 惟古 淨悟等師相繼住寺 元文宗至順元年(一三三) 東陽德輝重修法堂 堂上設天下師表閣 以供奉懷海之像 順帝至元元年(一三三五) 重輯百丈淸規 頒行於全國禪林 百丈山因此淸規而著稱於世 明英宗正統七年(一四四二) 沙門忠智再編淸規 現今尙存之古蹟有涅槃禪師碑 木人塚 黃犬塚 野狐巖 大義石 及柳公權所書天下師表等字之大石碑 [宋高僧傳十 傳燈錄六 同九 同二十 同二十五 五燈會元續略二 大明一統志四十九 古今圖書集成山川典第一三六]

百丈和尙; 百丈懷海和尙 懷海(七二~八一四) 唐代僧 俗姓王 福州長樂(今屬福建)人 從慧照禪師落髮 依衡山法朝律師受具足 戒 至浮槎寺閱藏 大曆(七六六~七七九)初 聞馬祖道一于南康(今屬江西)竪南禪法幢 前往參謁 言下開悟 得其大機大用之禪 遂嗣其法 馬祖寂後 受衆之請 住新吳(今江西奉新)百丈山傳播禪法 世稱百丈禪師 其禪名百丈禪 制定禪門規式 後稱百丈淸規 平生苦節高行 凡日常作務 必先于衆 叢林中有一日不作 一日不食的佳話 至晩年猶勤勞不息 元和九年入寂 世壽九十五(陳詡塔銘記其年壽爲六十六) 卒諡大智禪師 塔名大勝寶輪 宋大觀元年(一一) 追諡覺照禪師 元元統三年(一三三五) 加諡弘宗妙行禪師 有百丈懷海禪師語錄 百丈懷海禪師廣錄各一卷行世 嗣法弟子有靈祐希運等人 [宋高僧傳十 傳燈錄六]

; 動詞 卽學人拜見師家以問道 又修行坐禪亦稱參 如參禪辨道 雲門廣錄下 師初參睦州蹤禪師 州纔見師來 便閉却門 名詞 如詰旦升堂爲早參(朝參) 晡時(今午後四時)念誦爲晩參 晩參前坐禪爲坐參 每五日一參爲五參上堂 定期上堂爲大參 住持不定時集衆問答應酬爲小參等 廣燈錄八 江西馬祖 師晩參上堂云 大衆 山下有一虎子 汝等諸人出入好看

; 答應聲

某甲; 此指自稱之詞 某甲 自稱之詞 相當于我 聯燈會要四 百丈懷海 師謂衆曰 我要一人去 傳語西堂 阿誰去得 五峰出云 某甲去得 代替人名 洞山錄 師問僧 名什麽 僧云 某甲

迦葉佛; 又作迦葉波佛 迦攝波佛 迦攝佛 此翻爲飮光佛 過去七佛中之第六佛 又爲現在賢劫千佛中之第三佛

因果; 因者能生 果者所生 有因則必有果 有果則必有因 是謂因果之理 佛敎通之三世說善惡應報之義

一轉語; 一句或一則機語 多指應對語 轉 量詞 相當于回 次

貴脫野狐; 貴 此指使 使得 貴 希望 貴 欲也 五燈會元十 天台德韶 若祇貴答話揀辨 有甚麽難 但恐無益於人 使 使得 五燈會元十二 琅邪慧覺 汝等諸人若到諸方 遇明眼作者 與我通箇消息 貴得祖風不墜

; 無字疑衍 諸禪錄無無字

維那; 禪院中的職事僧 主持法事儀式 管理僧衆紀律等 祖庭事苑八 維那 寄歸傳(南海寄歸內法傳四)云 華梵兼擧也 維是綱維 華言也 那是略梵語刪去羯磨陀三字 此云悅衆也 又十誦云 以僧坊中無人知時 限唱時至 及打楗椎 又無人塗治掃灑講堂食處 無人相續鋪牀 衆亂時無人彈指等 佛令立維那 又聲論飜爲次第 謂知事之次第者也 今禪門令掌僧藉及表白等事 必選當材

白槌; 同白椎 椎 捶擊的器具 後作槌 祖庭事苑八 白槌 世尊律儀 欲辨佛事 必先秉白 爲穆衆之法也 今宗門白椎 必命知法尊宿以當其任 長老才據座已 而秉白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長老觀機法會 酬唱旣終 復秉白曰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此蓋先德之眞規 皆不失佛意 且見叢林多擧世尊升座文殊白椎 或謂徧閱藏乘 不見其緣 然秉白儀範旣出聖製 復何區區求文殊之說 以恣無益之論耶 百丈淸規八 椎 齋粥二時 僧堂內開鉢 念佛唱食遍食 施財白衆皆鳴之 維那主之 下堂時聖僧侍者鳴之 知事告退時 請知事時亦鳴之 住持入院開堂將說法時 諸山上首鳴之 謂之白椎也

涅槃堂; 又作延壽堂 省行堂 無常院 將息寮 安置老病僧人 釋氏要覽下 西域傳云 祇桓西北角 日光沒處 爲無常院 若有病者 當安其中 意爲凡人內心貪著房舍衣鉢道具 生戀著心 無厭背故 制此堂 令聞名見題 悟一切法無有常故 今稱延壽堂涅槃堂者 皆後人隨情愛名之也 禪林寶訓音義 延壽堂 撫安老病之所也 古者叢林老僧送安樂堂 病者送延壽堂也 又今涅槃堂是

只見; 只見二字疑衍 諸禪錄無只見二字

上堂; 此指爲演法而上法堂也 上堂 上法堂 爲演法而上法堂也 此有旦望上堂 五參上堂 九參上堂 謝秉拂上堂 謝都寺上堂 出隊上堂 出鄕上堂等 從容錄第一則世尊陞座 講肆謂之陞座 禪林號曰上堂 上僧堂 爲喫粥飯而上僧堂也 五燈會元四 石梯 一日見侍者拓鉢赴堂 乃喚侍者 者應諾 師曰 甚處去 者曰 上堂齋去 上間 敕修淸規五 大掛搭歸堂 參頭燒香 同衆大展三拜 巡堂一匝 自上堂至下堂 仍如前排立問訊

因緣; 此指公案 因緣 一物之生 親與强力者爲因 疏添弱力者爲緣 例如種子爲因 雨露農夫等爲緣 此因緣和合而生米 大乘入楞伽經二 一切法因緣生 禪家把機語或示機應機的行爲動作等 稱爲因緣 意同公案 法演語錄上 上堂云 適來思量得一則因緣 而今早忘了也 是拄杖記得 乃拈起拄杖云 拄杖子也忘了 遂卓一下云 同坑無異土 咄 梵語尼陀羅 華言因緣 十二分敎(十二部經)之一 祖庭事苑一 十二分 …… 五尼陀羅 因緣

黃蘗; 黃蘗希運 希運(?~八五) 唐代僧 福州閩縣人 姓氏不詳 幼出家於洪州黃檗山 聰慧利達 學通內外 人稱黃檗希運 相貌殊異 額肉隆起如珠 號爲肉珠 後遊京師 遇一姥指示 遂還洪州謁百丈懷海 得百丈所傳心印 後於黃檗山鼓吹直指單傳之心要 四方學子雲集而來 時河東節度使裴休鎭宛陵 建寺 迎請說法 以師酷愛舊山 故凡所住山 皆以黃檗稱之 大中四年示寂(入寂年度諸書不同 宗統編年十三作大中二年 佛祖統紀四十二作大中九年 佛祖歷代通載十六作大中三年等) 年壽不詳 諡號斷際禪師 門下有臨濟義玄 睦州道縱等十數人 裴休輯師之語錄二卷 黃檗斷際禪師宛陵錄 與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廣行於世 [傳燈錄九 傳法正宗記七 佛祖歷代通載二十三 釋氏稽古略三十]

祇對; 又作秖對秪對 回答 應對 祇 與秖秪用同

轉轉; 轉 漸漸 更加也

將謂胡鬚赤更有赤鬚胡; 意謂强手之外 還有更强者

一隻眼; 此指於佛法上 具有眞實正見之慧眼 一隻眼 指於佛法上 具有眞實正見之慧眼 非凡夫之肉眼 義同頂門眼 正眼 活眼 明眼 碧巖錄第八則曰 具一隻眼 可以坐斷十方 壁立千仞 與兩隻眼相對 只見一邊的深刻的眼光 傳燈錄二十五 宣法大師智依 單明自己 不悟目前 此人只具一隻眼

前百丈; 指野狐老人

兩采一賽; 同兩彩一賽 采 同彩 彩卽賭博得勝 賽卽競爭較量 兩彩一賽 原指一場競賽之後 竟有兩人得彩 意謂雙方棋逢對手 難分勝負 於禪林中 轉指禪者之間 相互勘辨挨拶 其參禪修學之境界 兩俱優勝而不分高下

 

백장야호(百丈野狐)

백장화상(百丈和尙)이 무릇 참차(參次)에 한 노인이 있어 늘 대중을 따라 청법(聽法)했다. 중인(衆人)이 물러가면 노인도 또한 물러갔는데 홀연히 어느 날 물러가지 않았다. 스님이 드디어 묻되 면전에 선 자는 다시 이 어떤 사람인가. 노인이 이르되 예(), 모갑(某甲)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 가섭불(迦葉佛) 때 일찍이 이 산에 거주했는데, 학인(學人)이 묻되 크게 수행한 사람은 도리어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또는 아닙니까 모갑이 대답해 이르되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 했음으로 인해 오백생(五百生)에 들여우의 몸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화상에게 청하오니 일전어(一轉語)를 대체(代替)해 들여우를 벗게 하십시오(). 드디어 묻되 크게 수행한 사람은 도리어 인과에 떨어집니까 또는 아닙니까. 스님이 이르되 인과에 어둡지 않는다(不昧因果). 노인이 언하(言下)에 대오했다. 작례(作禮)하고 이르되 모갑(某甲)이 이미 들여우의 몸을 벗어 산 뒤에 머물러 있습니다. 감히 화상에게 고하오니 망승(亡僧)의 사례(事例)에 의거(依據)하기를 걸구(乞求)합니다. 스님이 무유나(維那)를 시켜 백추(白槌)하고 대중에게 고하되 식후에 망승(亡僧)을 보낼 것입니다. 대중이 말하며 의논(議論)하기를 일중(一衆)이 다 편안하고 열반당(涅槃堂)에도 또 병든 사람이 없거늘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을까. 식후에 지견(只見)하니 스님이 대중을 거느리고 산 뒤의 바위 아래 이르러 주장자로 한 죽은 들여우를 들어내어 이에 의법(依法)히 화장했다. 스님이 저녁에 이르러 상당(上堂)해 앞의 인연(因緣)을 들었다. 황벽(黃蘗)이 곧 묻되 고인(古人)이 일전어(一轉語)를 어긋나게 지대(祇對)해 오백생에 들여우의 몸에 떨어졌거니와 전전(轉轉)이 어긋나지 않았다면 합당히 무엇을 지었겠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에게 말해 주리라. 황벽이 드디어 앞으로 가까이 가서 스님에게 일장(一掌)을 갈겨 주었다. 스님이 박수(拍手)하며 웃고 이르되 장차 이르기를 오랑캐 수염이 붉다 하렸더니 다시 붉은 수염 오랑캐가 있구나(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무문(無門)이 가로되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매 무엇 때문에 들여우에 떨어지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 하매 무엇 때문에 들여우를 벗었는가. 이 속을 향해 한 짝 눈(一隻眼)을 붙인다면 바로 전백장(前百丈)이 나머지로 풍류(風流)의 오백생을 얻은 줄 알 것이다.

송왈(頌曰) 불락(不落)과 불매(不昧),/ 양채일새(兩采一賽)며/ 불매(不昧)와 불락(不落)이여,/ 천착만착(千錯萬錯)이로다.

백장(百丈); 여기에선 백장회해(百丈懷海)를 가리킴. 백장(百丈) 백장산(百丈山)이니 강서(江西) 봉신현(奉新縣) 서북(西北)에 위치하며 동산(洞山)을 등져 가까이했음. 바위의 봉우리가 험준(險峻)을 다한지라 고로 호가 백장(百丈). 산세(山勢)가 무리를 초출(超出)했기 때문에 고로 또 명칭이 대웅산(大雄山) 혹은 대웅봉(大雄峰). () 덕종(德宗) 흥원원년(興元元年. 784) 회해(懷海)가 입산하여 향도암(鄕導庵. 百丈寺)을 창건(創建)하고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렸음. 당시(當時)에 황벽희운(黃檗希運)ㆍ위산영우(潙山靈祐)백장열반(百丈涅槃) 등의 재지(才智)의 사내들이 여기에 운집(雲集)했고 드디어 법당(法堂)과 승당(僧堂) 등을 영건(營建)했으며 아울러 대소승(大小乘)의 율전(律典)을 절충(折衷)해 선림청규(禪林淸規. 百丈淸規)를 제정(制訂)했으니 이로부터 비로소 독립된 완정(完整)의 선원(禪院)이 있었음. 이 이전(以前)에는 선승(禪僧)이 많이들 율사(律寺)에 거처했음. 헌종(憲宗) 원화구년(元和九年. 814) 회해(懷海)가 입적(入寂)하자 문인(門人)인 열반(涅槃)이 주지(住持)의 직()을 계장(繼掌)했고 오래지 않아 당() 선종(宣宗)의 칙명(敕命)을 받들어 대지성선사(大智聖禪寺)를 흥건(興建)해 선종도량(禪宗道場)을 이루었음. 송대(宋代) 이후 우수한 선승을 배출했으니 예컨대() 명조안(明照安)도항(道恒)보월(寶月)지윤(智贇)유정(惟政)원숙(元肅)유고(惟古)정오(淨悟) 등의 스님들이 서로 이어 주사(住寺)했음. () 문종(文宗) 지순원년(至順元年. 1330) 동양덕휘(東陽德輝)가 법당을 중수(重修)하고 당상(堂上)에 천하사표각(天下師表閣)을 설립해 회해(懷海)의 상()을 공봉(供奉)했음. 순제(順帝) 지원원년(至元元年. 1335)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중집(重輯)하여 전국선림(全國禪林)에 반행(頒行)했으며 백장산은 이 청규로 인해 세상에 명칭이 두드러졌음. () 영종(英宗) 정통칠년(正統七年. 1442) 사문(沙門) 충지(忠智)가 청규를 재편(再編)했음. 현금(現今)에 아직 존재하는 고적(古蹟)으로는 열반선사비(涅槃禪師碑)ㆍ목인총(木人塚)ㆍ황견총(黃犬塚)ㆍ야호암(野狐巖)ㆍ대의석(大義石) 및 류공권(柳公權)이 쓴 바 천하사표(天下師表) 등 글자의 대석비(大石碑)가 있음. [宋高僧傳十 傳燈錄六 同九 同二十 同二十五 五燈會元續略二 大明一統志四十九 古今圖書集成山川典第一三六].

백장화상(百丈和尙); 백장회해화상(百丈懷海和尙). 회해(懷海. 720~814) 당대(唐代)의 승려며 속성(俗姓)은 왕()이며 복주장락(福州長樂. 지금 福建에 속함) 사람임. 혜조선사(慧照禪師)를 좇아 낙발(落髮)했고 형산(衡山)의 법조율사(法朝律師)에 의지(依止)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부사사(浮槎寺)에 이르러 장경(藏經)을 열람(閱覽)했음. 대력(大曆. 766~779) 초에 마조도일(馬祖道一)이 남강(南康. 지금 江西에 속함)에서 남선(南禪. 南宗禪)법당(法幢)을 세웠다 함을 듣고 앞으로 가서 참알(參謁)했으며 언하(言下)에 개오(開悟)하여 그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을 얻었으며 드디어 그 법을 이었음. 마조가 입적(入寂)한 후 대중의 청을 받아 신오(新吳. 지금의 江西 奉新)의 백장산(百丈山)에 머물며 선법(禪法)을 전파(傳播)했음. 세칭(世稱)이 백장선사(百丈禪師)며 그 선()의 이름이 백장선(百丈禪). 선문(禪門)의 규식(規式)을 제정(制定)하였으니 후에 백장청규(百丈淸規)라 일컬었음. 평생에 고절(苦節) 고행(高行. 高尙한 행위)하여 무릇 일상(日常)의 작무(作務)에 반드시 대중에 앞선지라 총림(叢林)에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말이 있으며 만년(晩年)에 이르도록 근로(勤勞)하며 쉬지 않았음. 원화구년(元和九年)에 입적했으니 세수(世壽)가 아흔다섯임(陳詡塔銘記에 그 나이가 예순여섯이라 했음). 죽어서의 시호(諡號)는 대지선사(大智禪師)며 탑명은 대보승륜(大勝寶輪). () 대관원년(大觀元年. 1107) 추시(追諡)하여 각조선사(覺照禪師)라 했고 원() 원통삼년(元統三年. 1335) 가시(加諡)하여 홍종묘행선사(弘宗妙行禪師)라 했음. 백장회해선사어록(百丈懷海禪師語錄)백장회해선사광록(百丈懷海禪師廣錄) 1권이 있어 행세(行世). 법을 이은 제자에 영우(靈祐) 희운(希運)등의 사람이 있음 [宋高僧傳十 傳燈錄六].

(); 동사(動詞). 곧 학인(學人)사가(師家)를 배견(拜見)하고 도를 물음이며 또 수행하며 좌선함도 또한 호칭이 참()이니 예컨대() 참선(參禪)하며 변도(辨道)하다. 운문광록하(雲門廣錄下). 스님이 처음 목주종선사(睦州蹤禪師)를 참()했다. 목주가 스님이 옴을 겨우 보자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명사(名詞). 예컨대() 힐단(詰旦. 이른 아침)의 승당(升堂)을 조참(早參. 朝參)이라 하고 포시(晡時. 지금의 오후 4)의 염송(念誦)을 만참(晩參)이라 하고 만참 전의 좌선을 좌참(坐參)이라 하고 매() 5일마다 일참(一參)함을 오참상당(五參上堂)이라 하고 정기상당(定期上堂)을 대참(大參)이라 하고 주지가 부정시(不定時)에 집중(集衆)하여 문답(問答)하며 응수(應酬)함을 소참(小參)이라 하는 등임. 광등록팔(廣燈錄八) 강서마조(江西馬祖). 스님이 만참(晩參)에 상당(上堂)해 이르되 대중이여, 산 아래 한 마리 범이 있으니 너희 등 제인(諸人)은 출입하면서 잘 보아라.

(); 답응(答應)하는 소리임.

모갑(某甲); 여기에선 자칭(自稱)의 말을 가리킴. 모갑(某甲) 자칭(自稱)의 말이니 아()에 상당(相當). 연등회요사(聯燈會要四) 백장회해(百丈懷海).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한 사람이 가서 서당(西堂. 西堂智藏)에게 전어(傳語)함을 내가 요구한다. 누가 가겠는가. 오봉(五峰)이 나와 이르되 모갑(某甲)이 가겠습니다. 인명(人名)을 대체(代替). 동산록(洞山錄). 스님이 중에게 묻되 이름이 무엇인가. 중이 이르되 모갑(某甲)입니다.

가섭불(迦葉佛); 또 가섭파불(迦葉波佛)ㆍ가섭파불(迦攝波佛)ㆍ가섭불(迦攝佛)로 지음. 여기에서 번역하면 음광불(飮光佛). 과거칠불(過去七佛) 중의 체육불(第六佛)이며 또 현재현겁천불(現在賢劫千佛) 중의 제삼불(第三佛).

인과(因果); ()이란 것은 능생(能生)이며 과()란 것은 소생(所生). ()이 있으면 곧 반드시 과()가 있고 과가 있으면 곧 반드시 인이 있나니 이것을 인과의 이치라고 말함. 불교에선 삼세(三世)를 통해 선악(善惡)의 응보(應報)의 뜻을 설함.

일전어(一轉語); 일구(一句)나 혹은 일칙(一則)의 기어(機語)니 다분히 응대어(應對語)를 가리킴. () 양사(量詞)니 회()ㆍ차()에 상당(相當).

귀탈야호(貴脫野狐); () 여기에선 사(使)ㆍ사득(使得)을 가리킴. () 희망(希望)이니 귀()는 욕(). 오등회원십(五燈會元十) 천태덕소(天台德韶). 만약 단지 답화(答話)하여 간변(揀辨)하고자()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만 다만 사람에게 이익이 없을까 염려한다. (使). 사득(使得)오등회원십이(五燈會元十二) 낭야혜각(琅邪慧覺). 너희 등 제인(諸人)이 만약 제방(諸方)에 이르러 명안작자(明眼作者)를 만나거든 나에게 소식(消息)을 통하게 해 조풍(祖風)이 추락하지 않게 하라(貴得).

(); 무자(無字)는 연(. 문장 중에 잘못 들어간 글자)으로 의심됨. 여러 선록(禪錄)에 무자(無字)가 없음.

유나(維那); 선원(禪院) 중의 직사승(職事僧)이니 법사의식(法事儀式)을 주지(主持)하며 승중기율(僧衆紀律) 등을 관리(管理). 조정사원팔(祖庭事苑八) .유나(維那) 기귀전(寄歸傳. 南海寄歸內法傳四)에 이르되 화범(華梵)을 겸거(兼擧)했다. ()는 이 강유(綱維)니 화언(華言)이며 나()는 이 범어(梵語)를 줄였으니 갈마타(羯磨陀) 석 자를 산거(刪去. 은 깎을 산. 삭제할 산)했다. 여기에선 이르되 열중(悅衆)이다. 십송율(十誦律)에 이르되 승방(僧坊) 중에 시()를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시지(時至. 때가 이르렀습니다)를 창()하거나 및 건추(楗椎)를 두드림에 한정(限定)됐으며 또 강당(講堂)과 식처(食處)를 도치(塗治)하고 소쇄(掃灑)할 사람이 없었으며 상속(相續)하여 포상(鋪牀. 을 폄)할 사람이 없었으며 대중이 혼란할 때 탄지(彈指. 손가락을 퉁김)할 사람 등이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유나(維那)를 세우게 했다. 성론(聲論)에선 번역하여 차제(次第)로 삼나니 이르자면 사()의 차제(次第)를 지()하는 자이다(十誦 아래의 글은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卷上에 나옴). 지금 선문(禪門)에서 승자(僧藉. 는 깔개 자리 자) 표백(表白) 등의 일을 관장(管掌)함엔 반드시 당재(當材)를 선택해야 함.

백추(白槌); 백추(白椎)와 같음. ()는 추타(捶擊)하는 기구(器具)며 후에 추()로 지었음. 조정사원팔(祖庭事苑八). 백추(白槌) 세존(世尊)의 율의(律儀)는 불사(佛事)를 분변(分辨)코자 하면 반드시 먼저 병백(秉白. 羯摩一種)함이 대중을 화목(和睦. )하게 하는 법이다. 여금(如今)에 종문(宗門)의 백추(白椎)는 반드시 법을 아는 존숙(尊宿)에게 임명(任命)해 그 소임을 충당한다. 장로(長老)가 겨우 거좌(據座)한 다음 병백(秉白)하여 이르되 법연(法筵)용상중(龍象衆)이여 마땅히 제일의(第一義)를 보아라. 장로가 법회의 기틀을 본다. 수창(酬唱. 서로 주고 받으며 부름)을 이미 마치면 다시 병백(秉白)하여 가로되 법왕(法王)의 법을 체관(諦觀)하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 이것은 대개 선덕(先德)의 진규(眞規)며 다 불의(佛意)를 잃지 않았다. 또 보니 총림에서 많이들 세존이 승좌(升座)하자 문수(文殊)가 백추(白椎)한 것을 들거니와 혹은 이르기를 장승(藏乘)을 두루 열람했지만 그 인연이 보이지 않는다 하거니와 그러나 병백(秉白)의 의범(儀範)이 이미 성제(聖製)에서 나왔거늘 다시 어찌하여 구구(區區)히 문수(文殊)의 설()을 구하여 무익한 논()에 맡기리오. 백장청규팔(百丈淸規八). () 재죽(齋粥)의 이시(二時)에 승당(僧堂) 안에서 개발(開鉢)ㆍ염불(念佛)창식(唱食)ㆍ편식(遍食)ㆍ시재(施財)ㆍ백중(白衆)에 다 이를 울리며 유나(維那)가 주관(主管)한다. 하당(下堂)할 땐 성승시자(聖僧侍者)가 이를 울리고 지사(知事)가 고퇴(告退)할 때 지사(知事)를 청할 때 또한 이를 울린다. 주지가 입원(入院)하여 개당(開堂)하고 장차(將次) 설법하려 할 때는 제산(諸山)의 상수(上首)가 이를 울린다. 이를 일러 백추(白椎)라 한다.

열반당(涅槃堂); 또 연수당(延壽堂)ㆍ성행당(省行堂)ㆍ무상원(無常院)ㆍ장식료(將息寮)로 지음. 늙고 병든 승인(僧人)을 안치함. 석씨요람하(釋氏要覽下). 서역전(西域傳)에 이르기를 기환정사(祇桓精舍)의 서북 모퉁이, 일광(日光)이 잠기는 곳이 무상원(無常院)이 되는데 만약 병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 속에 안치한다. 뜻은 범상(凡常)한 사람은 내심으로 방사(房舍)ㆍ의발(衣鉢)ㆍ도구(道具)에 탐착(貪著)해 연착(戀著)하는 마음을 내어 싫어하거나 저버림이 없는 고로 이 당()을 만들었다. 이름을 듣거나 제목만 보아도 일체법이 항상(恒常)함이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함인 연고이다. 여금에 연수당(延壽堂)ㆍ열반당(涅槃堂)으로 일컫는 것은 다 후인이 정애(情愛)를 따라 이름한 것임. 선림보훈음의(禪林寶訓音義). 연수당(延壽堂) 늙고 병든 이를 어루만지는 곳이다. 옛적에 총림에서 노승(老僧)은 안락당(安樂堂)으로 보내고 병자는 연수당(延壽堂)으로 보냈다. 또 지금의 열반당(涅槃堂)이 이것이다.

지견(只見); 지견(只見) 두 자는 연(. 문장 중에 잘못 끼어 든 글자)으로 의심됨. 여러 선록에 지견(只見)이란 두 자가 없음.

상당(上堂); 여기에선 연법(演法)하기 위해 법당(法堂)에 오름을 가리킴. 상당(上堂) 법당(法堂)에 오름이니 연법(演法)하기 위해 법당에 오름임. 이에 단망상당(旦望上堂)ㆍ오참상당(五參上堂)구참상당(九參上堂)ㆍ사병불상당(秉拂上堂)사도사상당(謝都寺上堂)출대상당(出隊上堂)출향상당(出鄕上堂) 등이 있음. 종용록(從容錄) 1칙 세존승좌(世尊陞座). 강사(講肆)에선 이를 일러 승좌(陞座)라 하고 선림(禪林)에선 호()해 가로되 상당(上堂)이라 한다. 승당(僧堂)에 오름이니 죽반(粥飯)을 먹기 위해 승당에 오름임. 오등회원사(五燈會元四) 석제(石梯). 어느 날 시자(侍者)가 발우를 받들고 승당(僧堂)에 이름을 보고 곧 시자를 불렀다. 시자가 응낙했다. 스님이 가로되 어느 곳으로 가느냐. 시자가 가로되 상당(上堂)하여 재(. 밥을 먹음)하러 갑니다. 상간(上間). 칙수청규오(敕修淸規五) 대괘탑귀당(掛搭歸堂). 참두(參頭)가 소향(燒香)하고 대중과 함께 대전삼배(大展三拜)하고 한 바퀴 순당(巡堂)하고 상당(上堂)으로부터 하당(下堂)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앞과 같이 배립(排立)하여 문신(問訊)한다.

인연(因緣); 여기에선 공안(公案)을 가리킴. 인연(因緣) 일물(一物)의 생()에 친()하여 강력히 주는 것은 인()이 되고 성기어() 약력(弱力)을 더하는 것은 연()이 됨. 예여(例如) 종자(種子)는 인()이 되고 우로(雨露)와 농부(農夫) 등은 연()이 되나니 이 인연이 화합하여 쌀이 생산됨. 대승입릉가경이(大乘入楞伽經二). 일체법은 인연으로 난다. 선가(禪家)에선 기어(機語)나 혹은 시기응기(示機應機)의 행위동작(行爲動作) 등을 잡아서 인연이라 호칭(呼稱). 뜻이 공안(公案)과 같음. 법연어록상(法演語錄上). 상당(上堂) 이르되 아까(適來) 사량(思量)하여 일칙(一則)의 인연을 얻었는데 이금(而今)에 벌써 망각했다. 도리어 이 주장자가 기득(記得)했다. 곧 주장자를 들어일으키고 이르되 주장자도 또한 망각했다. 드디어 한 번 세우고는 이르되 같은 구덩이에 다른 흙이 없구나. (). 범어 니다라(尼陀羅)는 화언(華言)으로 인연이니 십이분교(十二分敎. 十二部經)의 하나임. 조정사원일(祖庭事苑一). 십이분(十二分) …… () 니다라(尼陀羅) 인연(因緣)이다.

황벽(黃蘗); 황벽희운(黃蘗希運). 희운(希運. ?~850) 당대(唐代)의 승려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임. 성씨는 상세하지 못하고 어릴 적에 홍주(洪州)의 황벽산(黃檗山)에서 출가했음. 총명한 지혜가 날카롭고 통달해 학문이 내외(內外. 內典外典)를 통했음. 사람들이 황벽희운(黃檗希運)이라 일컬음. 상모(相貌)가 특수히 다르고 이마의 근육이 융기(隆起)하여 구슬과 같았으며 호()하여 육주(肉珠)라 했음. 후에 경사(京師)에 노닐다가 한 할미의 지시를 만나 드디어 홍주(洪州)로 돌아가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알현(謁見)했고 백장이 전한 바의 심인(心印)을 얻었음. 뒤에 황벽산(黃檗山)에서 직지단전(直指單傳)의 심요(心要)를 고취(鼓吹)하자 사방의 학자가 운집하여 왔음. 때에 하동(河東)의 절도사(節度使) 배휴(裴休)가 완릉(宛陵)을 진정(鎭定)하고 절을 세워 영접해 설법을 청했음. 스님이 옛 산을 혹애(酷愛)한지라 고로 무릇 머무는 바의 산을 모두 황벽(黃檗)으로 일컬었으며 대중사년(大中四年)에 시적(示寂)했음. 나이는 상세치 못하고 시호(諡號)는 단제선사(斷際禪師). 문하(門下)에 임제의현(臨濟義玄)ㆍ목주도종(睦州道縱) 등 열 몇 사람이 있음. 배휴가 스님의 어록 2권을 모았으니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며 널리 세상에 행해짐. [傳燈錄九 傳法正宗記七 佛祖歷代通載二十三 釋氏稽古略三十].

지대(祇對); 또 지대(秖對)ㆍ지대(秪對)로 지음. 회답(回答). 응대(應對). ()는 지()ㆍ지()와 용()이 같음.

전전(轉轉); () 점점(漸漸). 다시 더하다(更加).

장위호수적 갱유적수호(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뜻으로 이르자면 강수(强手)의 밖에 다시 강한 자가 도리어 있다.

일척안(一隻眼); 여기에선 불법상(佛法上)에 진실정견(眞實正見)의 혜안(慧眼)을 갖추어 있음을 가리킴. 일척안(一隻眼) 불법상(佛法上)에 진실정견(眞實正見)의 혜안(慧眼)을 갖추어 있음을 가리킴. 범부의 육안(肉眼)이 아니며 뜻이 정문안(頂門眼)ㆍ정안(正眼)ㆍ활안(活眼)ㆍ명안(明眼)과 같음. 벽암록(碧巖錄) 8칙에 가로되 일척안(一隻眼)을 갖추면 가이(可以) 시방을 좌단하여(坐斷十方) 벽립이 천인이다(壁立千仞). 양척안(兩隻眼)과 상대(相對). 단지 일변(一邊)만 보는 심각(深刻)한 안광(眼光). 전등록이십오(傳燈錄二十五) 선법대사지의(宣法大師智依). 오로지 자기만 밝히고 목전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단지 일척안(一隻眼)만 갖췄다.

전백장(前百丈); 야호노인(野狐老人)을 가리킴.

양채일새(兩采一賽); 양채일새(兩彩一賽)와 같음. () ()와 같음. ()는 곧 도박(賭博)하여 승리를 얻음이며 새()는 곧 경쟁(競爭)이며 비새(比賽). 양채일새는 원래 한마당의 경새(競賽)의 뒤에 마침내 두 사람이 득채(得彩)함이 있음을 가리킴. 뜻으로 이르자면 쌍방의 기사(棋士)가 대수(對手)를 만나매 승부를 가르기 어려움임. 선림 중에선 전()하여 선자(禪者)의 사이에 상호 감변(勘辨)하고 애찰(挨拶)하매 그 참선 수학(修學)의 경계가 둘 다 모두 우승하여 고하를 나누지 못함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