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❶香嚴上樹
香嚴和尙云 如人上樹 口銜樹枝 手不攀枝 脚不踏樹 樹下有人問❷西來意 不對卽違他所問 若對又喪身失命 正恁麽時 作麽生對
無門曰 縱有❸懸河之辨 總用不著 說得❹一大藏敎 亦用不著 若向者裏對得著 活却從前死❺路頭 死却從前活路頭 其或未然 直待❻當來問❼彌勒
頌曰 香嚴眞❽杜撰 惡毒無盡限 啞却❾衲僧口 通身迸❿鬼眼
❶香嚴; 香嚴智閑 智閑(?~八九八) 唐代僧 靑州(山東益都)人 初從百丈懷海出家 後謁潙山靈祐禪師 不契 泣涕辭去 偶於山中芟草 瓦礫擊竹作聲 廓然有省 乃悟潙山祕旨 因嗣其法 住於鄧州香嚴山 化法大行 淨侶千餘人 後世稱之爲香嚴禪師 師生性嚴謹 語喜簡直 有偈頌二百餘首 諸方盛行 後敕諡襲燈大師 [傳燈錄十一 宋高僧傳十三]
❷西來意; 祖師西來意 初祖達磨自西天來此土傳禪法 究竟意思如何 究此意思者 卽究佛祖之心印也
❸懸河之辨; 卽說話像河水下瀉 滔滔不絶 形容能言善辯 辨 通辯 正字通 懸 掛也 廣韻 懸 說文云繫也 ▲晉書五十列傳 郭象 字子玄 少有才理 好老莊 能淸言 太尉王衍每云 聽象語 如懸河瀉水 注而不竭
❹一大藏敎; 謂釋迦佛所說之經律論三藏敎法
❺路頭; 此指悟入之門徑 路頭 ㊀卽路 路上 路邊 頭 後綴 ▲傳燈錄二十 大安省 問 如何是眞中眞 師曰 十字路頭泥佛子 ㊁禪家稱悟入之門徑爲路頭 ▲五燈會元二十 石頭自回 且如十二時中 行住坐臥 動轉施爲 是甚麽人使作 眼見耳聞 何處不是路頭 若識得路頭 便是大解脫路
❻當來; 將來
❼彌勒; 科註妙法蓮華經一 彌勒者 此云慈氏 思益云 若衆生見者 卽得慈心三昧 故名以慈氏 是菩薩現居知足內院 當來出興于堪忍 補釋迦之處 號彌勒世尊 於華林園內龍華樹下 而成正覺 智論三十四云 龍華初會度九十九億聲聞 第二會度九十六億聲聞 第三會度九十三億聲聞 ▲玄應音義二十二 波羅延 謂西域邑落名也 阿氏多 彌勒字也 或作阿嗜多 此云無勝 謂無人能勝也 舊言阿逸多訛也
❽杜撰; 原指在詩文或其他著作中 妄作論述而毫無根據之情形 其語由來下列諸說 一漢代之田何精通易學 遷居杜陵 世稱杜田生 然或謂其易學實無師承之處 故世人多以杜田 或杜園 譏之 後訛稱爲杜撰 二據傳 道家五千餘卷之書中 除道德經二卷外 其餘均爲唐末文人杜光庭所撰述 多屬虛誕之說 故後人多稱僅憑臆造而無所本之說爲杜撰 三宋代文人杜默作詩時 常不合律 時人遂以行事不合法式者 謂之杜撰
❾衲僧; 又云衲子 禪僧之別稱 禪僧多著一衲衣而遊方 故名 但衲衣爲頭陀比丘之法衣 不限於禪僧 亦作納僧
❿鬼眼; 又作鬼眼睛 鬼怪之眼睛 比喩不正見 或毫無價値之見解
⑤❶향엄상수(香嚴上樹)
향엄화상(香嚴和尙)이 이르되 예컨대(如) 사람이 나무에 올라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었고 손으로 나무를 잡지 않고 발로 나무을 밟지 않았는데 나무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❷서래의(西來意)를 묻는다. 대답하지 않으면 곧 그의 묻는 바에 위배되고 만약 대답한다면 또 상신실명(喪身失命)하리라. 바로 이러한 때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무문(無門)이 가로되 비록 현하의 변(❸懸河之辨)이 있더라도 모두 쓰지 못하고 ❹일대장교(一大藏敎)를 설해 얻더라도 또한 쓰지 못하나니 만약 이 속을 향해 대응해 얻는다면 종전(從前)의 죽은 ❺노두(路頭)를 살려낼 것이며 종전의 산 노두를 죽여버릴 것이다. 그 혹 그렇지 못하다면 바로 ❻당래(當來)를 기다렸다가 ❼미륵(彌勒)에게 물어봐야 하리라.
송왈(頌曰) 향엄(香嚴)은 참다운 ❽두찬(杜撰)이며/ 악독(惡毒)의 한계(限界)가 다함 없도다/ ❾납승(衲僧)의 입을 벙어리가 되게 하고/ 온몸에 ❿귀안(鬼眼)이 병산(迸散)하도다.
❶향엄(香嚴); 향엄지한(香嚴智閑)임. 지한(智閑. ?~898) 당대(唐代)의 승려며 청주(靑州. 山東 益都) 사람임. 처음엔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좇아 출가했고 뒤에 위산영우(潙山靈祐)를 참알(參謁)했으나 계합(契合)치 못했음. 읍제(泣涕. 울며 눈물 흘림)하며 고별하고 떠나 우연히 산중에서 풀을 베다가 와력(瓦礫)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소리를 짓자 휑하게 깨침이 있었음. 이에 위산(潙山)의 비지(秘旨)를 깨쳤고 인하여 그의 법을 이었음. 등주(鄧州)의 향엄산(香嚴山)에 거주하면서 교화의 법을 크게 행했으며 정려(淨侶)가 천여 인이었으며 후세에 그를 일컬어 향엄선사(香嚴禪師)라 했음. 스님은 타고난 성품이 엄근(嚴謹)하고 말은 간직(簡直)을 좋아했음. 게송(偈頌) 이백여수(二百餘首)가 있어 제방(諸方)에 성행(盛行)함. 후에 칙시(敕諡)하여 습등대사(襲燈大師)라 했음. [傳燈錄十一 宋高僧傳十三].
❷서래의(西來意);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니 초조달마(初祖達磨)가 서천(西天. 印度)으로부터 차토(此土. 中國)로 와서 선법(禪法)을 전했거니와 구경(究竟. 畢竟) 의사(意思)가 어떠한가. 이 의사(意思)를 궁구(窮究)하는 것이 곧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을 궁구하는 것임.
❸현하지변(懸河之辨); 곧 설화(說話)하는 게 강물이 아래로 쏟아지면서 도도(滔滔)하게 끊어지지 않음을 형상(形像)함이니 능히 말하고 잘 변론(辯論)함을 형용(形容)함. 변(辨)은 변(辯)과 통함. 정자통(正字通) 현(懸) 걺(掛)이다. 광운(廣韻) 현(懸) 설문(說文)에 이르되 맴(繫)이다. ▲진서오십(晉書五十) 열전(列傳). 곽상(郭象. 252~312)은 자(字)가 자현(子玄)이다. 어릴 적에 재리(才理)가 있었고 노장(老莊)을 좋아했으며 청언(淸言)에 능했다. 태위(太尉) 왕연(王衍)이 매번 이르되 곽상의 말을 들으면 마치 현하사수(懸河瀉水)가 흘러 다하지 않는 듯하다.
❹일대장교(一大藏敎); 이르자면 석가불(釋迦佛)이 설한 바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의 교법(敎法)임.
❺노두(路頭); 여기에선 오입(悟入)의 문경(門徑)을 가리킴. 노두(路頭) ㊀곧 길(路)ㆍ노상(路上)ㆍ노변(路邊)이니 두(頭)는 후철(後綴. 접미사). ▲전등록이십(傳燈錄二十) 대안성(大安省). 묻되 무엇이 이 진중(眞中)의 진(眞)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십자로두(十字路頭)의 진흙 부처니라(泥佛子. 子는 後綴). ㊁선가(禪家)에서 오입(悟入)의 문경(門徑)을 일컬어 노두(路頭)라 함. ▲오등회원이십(五燈會元二十) 석두자회(石頭自回). 차여(且如) 십이시(十二時) 중에 행주좌와(行住坐臥)하고 동전시위(動轉施爲)하거니와 이 어떤 사람이 시켜서 짓는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매 어떤 곳이 이 노두가 아닌가. 만약 노두를 안다면 곧 이 대해탈로(大解脫路)니라.
❻당래(當來); 장래(將來)임.
❼미륵(彌勒); 과주묘법연화경일(科註妙法蓮華經一) 미륵이란 것은 여기에선 이르되 자씨(慈氏)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되 만약 중생이 보는 자면 곧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지라 고로 이름하여 자씨(慈氏)다. 이 보살은 현재 지족천(知足天)의 내원(內院)에 거처하며 당래(當來)에 감인(堪忍)에 출흥(出興)하여 석가(釋迦)의 자리를 보좌(補佐)하며 호가 미륵세존(彌勒世尊)이다. 화림원(華林園) 속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다. 지론(智論. 智度論) 삼십사(三十四)에 이르되 용화(龍華)의 초회(初會)에 구십구억(九十九億) 성문(聲聞)을 제도하고 제이회(第二會)에 구십육억 성문을 제도하고 제삼회(第三會)에 구십삼억 성문을 제도한다. ▲현응음의이십이(玄應音義二十二). 바라연(波羅延) 이르자면 서역(西域)의 읍락(邑落)의 이름이다. 아지다(阿氏多) 미륵의 자(字)이다. 혹은 아기다(阿嗜多)로 짓는다. 여기에선 이르되 무승(無勝) 이니 이르자면 능히 이길 사람이 없음이다. 구역(舊譯)에 말한 아일다(阿逸多)는 잘못이다.
❽두찬(杜撰); 원래 시문(詩文)이나 혹은 기타의 저작(著作) 가운데 있어 망령(妄靈)되이 논술(論述)을 지어 터럭만큼도 근거(根據)가 없는 정형(情形)을 가리킴. 그 말의 유래(由來)는 아래에 여러 설을 나열(羅列)하겠음. 일(一) 한대(漢代)의 전하(田何)가 역학(易學)을 정통(精通)하였으며 두릉(杜陵)에 옮겨 거주했는데 세칭(世稱)이 두전생(杜田生)임.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그 역학이 실은 사승(師承)한 곳이 없는지라 고로 세인이 많이 두전(杜田) 혹은 두원(杜園)이라 하여 그를 비웃었음. 후에 잘못 호칭(呼稱)하여 두찬(杜撰)이라 했음. 이(二) 전(傳)에 의거하건대 도가(道家)의 5,000여 권의 책 중에 도덕경(道德經) 2권(道經ㆍ德經)을 제한 밖에 그 나머지는 모두 당말(唐末)의 문인(文人)인 두광정(杜光庭)이 찬술(撰述)한 것이며 많이 허탄(虛誕)의 설에 속한지라 고로 후인이 많이들 겨우 억설(臆說)에 의빙(依憑)하여 조작하고 근본할 바의 설이 없는 것을 일컬어 두찬(杜撰)이라 하였음. 삼(三) 송대(宋代)의 문인(文人) 두묵(杜默)이 시를 지을 때 늘 율(律)에 맞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사람이 드디어 행사(行事)가 법식(法式)에 맞지 않는 것을 두찬(杜撰)이라고 말했음.
❾납승(衲僧); 또 이르되 납자(衲子)니 선승(禪僧)의 별칭(別稱)임. 선승은 많이들 일납의(一衲衣)를 입고 유방(遊方)하는지라 고로 이름함. 다만 납의는 두타비구(頭陀比丘)의 법의(法衣)이므로 선승에 국한되지 않음. 또 납승(納僧)으로 지음.
❿귀안(鬼眼); 또 귀안정(鬼眼睛)으로 지음. 귀괴(鬼怪)의 눈동자니 정견(正見)이 아니거나 혹은 터럭만큼도 가치가 없는 견해에 비유(比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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