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❶德山托鉢
德山一日❷托鉢❸下堂 見❹雪峯問 者❺老漢 ❻鐘未鳴❼鼓未響 托鉢向甚處去 山便回❽方丈 峯❾擧似❿巖頭 頭云 ⓫大小德山未會⓬末後句 山聞 令侍者喚巖頭來 問曰 汝不肯老僧那 巖頭密啓其意 山乃休去 明日⓭陞座 果與⓮尋常不同 巖頭至⓯僧堂前 ⓰拊掌大笑云 且喜得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不奈伊何
無門曰 若是末後句 巖頭德山俱未夢見⓱在 撿點將來 好似⓲一棚⓳傀儡
頌曰 識得⓴最初句 便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
❶德山; 德山宣鑑 宣鑑(七八二~八六五) 唐代僧 劍南(四川)人 俗姓周 法名宣鑑 年少出家 二十歲受具足戒 於大小乘諸經貫通旨趣 因常講金剛般若經 時稱周金剛 後至澧陽參龍潭崇信 夜深龍潭吹滅紙燭之間 豁然頓悟 常以棒打爲敎 而有德山棒之稱 師住澧陽三十年 遭唐武宗(在位八四一~八四六)廢敎 避難於獨浮山之石室 大中(八四七~八五九)初 應武陵(湖南)太守薛廷望堅請 始居德山 大振宗風 咸通六年十二月三日 忽告諸門徒曰 捫空追響 勞汝心神 夢覺覺非 竟有何事 言訖安坐而化 壽八十四 僧臘六十五 敕諡見性大師 法嗣有巖頭全豁雪峰義存等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五 祖堂集五 五燈會元七]
❷托鉢; 托 用手掌或盤子承著 如手托鉢盂
❸下堂; 禪錄又作下法堂 過堂 至法堂等
❹雪峯; 雪峯義存 義存(八二二~九○八) 唐代僧 泉州(福建)南安人 俗姓曾 號雪峰 十二歲從父遊蒲田玉潤寺 拜慶玄律師爲師 留爲童侍 十七歲落髮 謁芙蓉山恆照大師 唐宣宗中興佛敎後 歷遊吳楚梁宋燕秦 於幽州寶刹寺受具足戒 後至武陵德山(湖南常德) 參宣鑒 承其法系 唐懿宗咸通六年(八六五)歸芙蓉山 十一年登福州象骨山 立庵興法 其山爲閩越之勝景 未冬先雪 盛夏尙寒 故有雪峰之稱 師亦以之爲號 寺初成 緇素雲集 衆每逾千五百人 僖宗賜號眞覺大師 竝紫袈裟一襲 大順(八九○~八九一)年中 遊丹丘 四明之地 竝宣法於軍旅之中 後還閩 備受閩王禮遇 開平二年五月入寂 壽八十七 其法嗣有雲門文偃玄沙師備等 文偃乃雲門宗之祖 師備下有桂琛 琛下有法眼文益 乃法眼宗之祖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六 五燈會元七]
❺老漢; 對禪師的稱呼 或禪師自稱
❻鐘; 寺院爲報時集衆 所敲打之法器 在印度則木製之揵椎 在中國則代以銅鐘 鐘有梵鐘與喚鐘兩種 一梵鐘 又稱大鐘 撞鐘 洪鐘 鯨鐘等 於禪林中 以其告知初夜坐禪之時間 故稱定鐘 復以其告衆入僧堂 故亦稱入堂鐘 又梵鐘之音或稱爲鯨音 二喚鐘 又稱半鐘 小鐘 以其用途爲通告法會等行事之開始等 故亦稱行事鐘 [行事鈔下 百丈淸規八法器章 象器箋唄器類]
❼鼓; 敲打樂器之一 由金玉木石等所製 有各種形狀及大小 爲寺院中常用之法器 其種類有羯鼓(羯戎所傳之鼓 故名羯鼓 形如漆桶 兩頭皆可擊打者) 魚鼓 雲鼓 搖鼓 金鼓 石鼓 懸鼓等 隨其用途 可分爲齋鼓 浴鼓 誦經 梵唄等 [百丈淸規下法器章 象器箋唄器類]
❽方丈; 一丈四方之室 又作方丈室 丈室 卽禪寺中住持之居室或客殿 亦稱函丈 正堂 堂頭 印度之僧房多以方一丈爲制 維摩禪室亦依此制 遂有方一丈之說 轉而指住持之居室 今轉義爲禪林住持 或對師家之尊稱 通稱方丈 或方丈和尙 [維摩經文疏二十二 法苑珠林二十九 大唐西域求高僧傳上慧輪傳] ▲祖庭事苑六 方丈 今以禪林正寢爲方丈 蓋取則毘耶離城維摩之室 以一丈之室 能容三萬二千師子之座 有不可思議之妙事故也 唐王玄策爲使西域 過其居 以手版縱橫量之 得十笏 因以爲名
❾擧似; 擧示 擧說言句告訴某人 似 相當于與 向
❿巖頭; 巖頭全豁 全豁(八二八~八八七) 又作全奯 唐代僧 泉州(今屬福建)人 俗姓柯 出家於靈泉寺 受具足戒於長安西明寺 與雪峰義存 欽山文邃同修互勉 竝參訪仰山慧寂 又參學於德山宣鑑 承其法嗣 出居鄂州(今湖北武昌)巖頭院 大振宗風 故又稱巖頭全豁 唐光啓三年四月 賊亂 臨刃仍泰然自若 大喝一聲而終 壽六十 諡號淸儼大師 [宋高僧傳二十三 祖堂集七 景德傳燈錄十六]
⓫大小; 此指偌大 這麽大 那麽大 大小 ㊀大與小 ▲古尊宿語錄三十四 龍門佛眼 問 虗空還有變異也無 代云 靑黃赤白 長短大小 ㊁同大小大 則偌大 這麽大 那麽大 ▲碧巖錄不二鈔二 楞伽(竺仙)云 北方人欲議人之長短 詞端先言大小二字 於下必有譏誇之語也 或言大小大底人 意謂汝是大大底人 卻作這般瑣細小小底無伎倆事也 ▲碧巖錄第一則種電鈔云 大小者 北方罵人起頭之語 抑示現成明了的而無勦絶機 ▲圓悟語錄十一 大小世尊龍頭蛇尾 ㊂置于句末 表疑問 相當于多 大 ▲五燈會元七 玄沙師備 問 如何是無縫塔 師曰 這一縫大小
⓬末後句; 謂到達徹底大悟之極處所言之至極語 更無其他語句能超越者
⓭陞座; 陞高座之意 指師家登高座說法 據古制 陞座與上堂同義 至後世乃有所別 又作昇座 升座 [象器箋垂說類]
⓮尋常; 平時 尋 常也 又俄也 相當于不久
⓯僧堂; 指禪林中僧衆日常修禪起臥之堂舍 又稱雲堂 坐堂 選佛堂 聖僧堂 枯木堂 禪宗七堂伽藍之一 卽凡於禪刹掛搭者 悉依戒臘而安排位次 凡坐禪 起臥 飮食 皆行於此堂 此兼有古代僧房及食堂之功用 按大智度論二 於原始佛敎僧團中 僧堂指僧房與精舍 故性質與現今之僧堂相異 支那自唐宋以降 於僧堂之中央安置聖僧像 衆僧圍之 周圍設置坐床 爲起臥及日夜坐禪辨道之道場
⓰拊掌; 拊 拍 輕擊 玉篇 拊 拍也
⓱在; 句尾助詞 無實義
⓲一棚; 棚 量詞 如念了幾棚經 養了幾棚鴨子
⓳傀儡; 祖庭事苑六 傀儡 上口猥切 下落猥切 又云窟此磊 作偶人以戲喜欲舞 本喪家樂也 漢末始用之於喜會 齊後主高緯尤所好 高麗國亦有之
⓴最初句; 當下契入徹底省悟的第一句話 按禪家多有末後句之語 最初句與末後句說法不同 實則一致 均爲達到省悟的關鍵一句 因爲這一句本非通常言說 而是超語言超分別的眞如實相 亦作最初一句 末上一句等
⑬❶덕산탁발(德山托鉢)
덕산(德山)이 어느 날 발우(鉢盂)를 받들고(❷托鉢) 하당(❸下堂)하자 설봉(❹雪峯)이 묻되 이 ❺노한(老漢)이 ❻종(鐘)도 울리지 않았고 북(❼鼓)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받들고 어느 곳으로 향해 가십니까 함을 보았다(見). 덕산이 곧 ❽방장(方丈)으로 돌아갔다. 설봉이 ❿암두(巖頭)에게 들어 보였다(❾擧似). 암두가 이르되 ⓫대소(大小) 덕산이 ⓬말후구(末後句)를 알지 못하셨다. 덕산이 듣고서 시자(侍者)를 시켜 암두를 불러오게 했다. 물어 가로되 네가 노승(老僧)을 긍정하지 않느냐. 암두가 몰래 그 뜻을 알렸다. 덕산이 곧 쉬었다. 명일(明日) ⓭승좌(陞座)하였는데 과연 ⓮심상(尋常)과 같지 않았다. 암두가 ⓯승당(僧堂) 앞에 이르러 ⓰부장(拊掌)하며 크게 웃고 이르되 다만 노한(老漢)이 말후구를 아셨음을 기뻐하노라. 타후(他後)에 천하인이 그를 어찌하지 못함을 어찌하랴.
무문(無門)이 가로되 만약 이 말후구(末後句)라면 암두와 덕산이 모두 꿈에도 보지 못하였다(⓱在). 검점(撿點)하여 가져오매 좋이 ⓲일붕(一棚)의 ⓳괴뢰(傀儡)와 흡사하다 하노라.
송왈(頌曰) ⓴최초구(最初句)를 알면/ 곧 말후구를 아나니/ 말후와 최초여,/ 이는 이 일구(一句)가 아니로다.
❶덕산(德山); 덕산선감(德山宣鑑)임. 선감(宣鑑. 782~865) 당대(唐代)의 승려며 검남(劍南. 四川)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주(周)며 법명(法名)은 선감(宣鑑)임. 어린 나이에 출가했고 스무 살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대소승(大小乘)의 여러 경에 지취(旨趣)를 관통(貫通)했는데 늘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강설했으므로 인해 당시에 주금강(周金剛)이라 일컬었음. 후에 예양(澧陽)에 이르러 용담숭신(龍潭崇信)을 참알(參謁)했는데 야심(夜深)에 용담이 지촉(紙燭)을 불어 끄는 사이에 휑하게(豁然) 돈오(頓悟)했음. 늘 몽둥이로 때림으로써 가르침을 삼은지라 덕산방(德山棒)의 칭호가 있음. 스님이 예양(澧陽)에 머문 삼십 년에 당무종(唐武宗. 在位 841~846)의 폐교(廢敎)를 만나 독부산(獨浮山)의 석실(石室)로 피난하였다가 대중(大中. 847~859) 초에 무릉(武陵. 湖南) 태수(太守) 설정망(薛廷望)의 견고(堅固)한 청에 응해 비로소 덕산에 거주하며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음. 함통육년(咸通六年) 십이월 삼일에 홀연히 여러 문도(門徒)에게 고해 가로되 허공을 어루만지고 메아리를 쫓음은 너희의 심신(心神)을 노고롭게 하나니 꿈과 깸이 그른 줄 깨친다면 필경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말을 마치자 편안히 앉아 화거(化去)했으니 나이는 여든넷이며 승랍(僧臘)은 예순다섯임. 칙시(敕諡)가 견성대사(見性大師)며 법사(法嗣)로는 암두전활(巖頭全豁)ㆍ설봉의존(雪峰義存) 등이 있음.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五 祖堂集五 五燈會元七].
❷탁발(托鉢); 탁(托)은 손바닥을 써서 혹은 반자(盤子)를 받듦이니 예컨대(如) 손으로 발우(鉢盂)를 받듦임.
❸하당(下堂); 선록(禪錄)에 또 하법당(下法堂)ㆍ과당(過堂)ㆍ지법당(至法堂) 등으로 지어졌음.
❹설봉(雪峯); 설봉의존(雪峯義存)임. 의존(義存. 822~908) 당대(唐代)의 승려며 천주(泉州. 福建) 남안(南安) 사람임. 속성(俗姓)은 증(曾)이며 호가 설봉임. 열두 살에 아버지를 따라 포전(蒲田) 옥윤사(玉潤寺)에 놀러갔다가 경현율사(慶玄律師)를 배알(拜謁)하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머물며 동시(童侍)가 되었는데 열일곱 살에 낙발(落髮)하였고 부용산(芙蓉山)의 항조대사(恆照大師)를 알현(謁見)했음. 당(唐) 선종(宣宗)이 불교를 중흥한 후 오(吳)ㆍ초(楚)ㆍ양(梁)ㆍ송(宋)ㆍ연(燕)ㆍ진(秦)을 지나며 노닐다가 유주(幽州) 보찰사(寶刹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후에 무릉(武陵) 덕산(德山. 湖南 常德)에 이르러 선감(宣鑒)을 참알(參謁)하고 그 법계(法系)를 이었음. 당(唐) 의종(懿宗) 함통육년(咸通六年. 865) 부용산(芙蓉山)에 돌아왔고 십일년(十一年)에 복주(福州) 상골산(象骨山)에 올라 암자(庵子)를 세우고 흥법(興法)했음. 그 산이 민월(閩越)의 승경(勝景)이 되며 겨울 전에 먼저 눈오고 성하(盛夏)에도 오히려 서늘한지라 고로 설봉(雪峰)의 명칭이 있으며 스님도 또한 이로써 호를 삼았음. 절이 처음 이루어지자 치소(緇素. 僧俗)가 운집하여 대중이 매양(每樣) 천오백 인을 넘었음. 희종(僖宗)이 진각대사(眞覺大師)란 호와 아울러 자가사(紫袈裟) 한 벌을 주었음. 대순(大順. 890~891)년 중에 단구(丹丘)ㆍ사명(四明)의 땅에 노닐었으며 아울러 군려(軍旅. 軍隊)의 가운데서 선법(宣法)했고 후에 민(閩)으로 돌아와 민왕(閩王)의 예우(禮遇)를 갖춰 받았음. 개평이년(開平二年) 오월에 입적(入寂)했으니 나이는 여든일곱임. 그의 법사(法嗣)에 운문문언(雲門文偃)ㆍ현사사비(玄沙師備) 등이 있음. 문언(文偃)은 곧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며 사비하(師備下)에 계침(桂琛)이 있으며 침하(琛下)에 법안문익(法眼文益)이 있으니 곧 법안종(法眼宗)의 개조(開祖)임.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六 五燈會元七].
❺노한(老漢); 선사(禪師)에 대한 칭호(稱呼)임. 혹은 선사(禪師)의 자칭(自稱)임.
❻종(鐘); 사원(寺院)에서 시각(時刻)을 알리거나 대중을 집합(集合)하기 위해 치고 때리는 바의 법기(法器)임. 인도(印度)에 있어선 곧 목제(木製)의 건추(揵椎)며 중국(中國)에 있어선 곧 동종(銅鐘)으로 대체(代替)함. 종에는 범종(梵鐘)과 환종(喚鐘)의 두 종류가 있음. 일(一) 범종(梵鐘) 또 명칭이 대종(大鐘)ㆍ당종(撞鐘)ㆍ홍종(洪鐘)ㆍ경종(鯨鐘) 등임. 선림(禪林) 중에서 그것으로 초야(初夜)의 좌선(坐禪)하는 시간(時間)을 고지(告知)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정종(定鐘)이며 다시 그것으로 대중에게 고해 승당(僧堂)에 들어가는지라 고로 또 명칭이 입당종(入堂鐘)임. 또 범종의 소리를 혹 일컬어 경음(鯨音)이라 함. 이(二) 환종(喚鐘) 또 명칭이 반종(半鐘)ㆍ소종(小鐘)임. 그 용도(用途)가 법회 등 행사(行事)의 개시(開始) 등을 통고(通告)하기 때문에 고로 또 명칭이 행사종(行事鐘)임. [行事鈔下 百丈淸規八法器章 象器箋唄器類].
❼고(鼓); 치고 때리는 악기(樂器)의 하나임. 금옥목석(金玉木石) 등으로 제작(製作)하는 바로 말미암아 각종 형상(形狀) 및 대소(大小)가 있음. 사원(寺院) 중에서 상용하는 법기(法器)가 되며 그 종류에 갈고(羯鼓)ㆍ어고(魚鼓)ㆍ운고(雲鼓)ㆍ요고(搖鼓)ㆍ금고(金鼓)ㆍ석고(石鼓)ㆍ현고(懸鼓) 등이 있음. 그 용도(用途)에 따라 가히 재고(齋鼓)ㆍ욕고(浴鼓)ㆍ송경(誦經)ㆍ범패(梵唄) 등으로 나눔. [百丈淸規下法器章 象器箋唄器類].
❽방장(方丈); 사방(四方)이 일장(一丈)인 실(室)이니 또 방장실(方丈室)ㆍ장실(丈室)로 지음. 곧 선사(禪寺) 중 주지(住持)의 거실(居室)이며 혹은 객전(客殿)임. 또 명칭이 함장(函丈)ㆍ정당(正堂)ㆍ당두(堂頭)임. 인도(印度)의 승방(僧房)은 다분히 방일장(方一丈. 四方一丈)으로써 제정(制定)되었으며 유마(維摩)의 선실(禪室)도 또한 이 제정에 의거하였으므로 드디어 방일장(方一丈)의 설이 있음. 전(轉)하여 주지(住持)의 거실(居室)을 가리키며 여금은 전의(轉義)하여 선림(禪林)의 주지(住持)나 혹은 사가(師家)에 대한 존칭이 되나니 통칭(通稱)이 방장(方丈)이며 혹은 방장화상(方丈和尙)임. [維摩經文疏二十二 法苑珠林二十九 大唐西域求高僧傳上慧輪傳]. ▲조정사원육(祖庭事苑六) 방장(方丈) 여금(如今)에 선림(禪林. 禪寺. 禪院)의 정침(正寢. 住持의 居室을 가리킴)을 방장(方丈)으로 삼음은 대개(大蓋) 비야리성(毗耶離城)의 유마(維摩)의 실(室)에서 궤칙(軌則)을 취했음. 일장(一丈. 四方一丈)의 실내(室內)에 능히 삼만이천(三萬二千)의 사자(師子)의 좌(座)를 수용(容受)했음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묘사(妙事)가 있는 연고임. 당(唐)의 왕현책(王玄策)이 서역(西域)에 사신(使臣)이 되어 그 거처(居處. 유마힐의 거실)를 지나다가 수판(手版)으로 종횡(縱橫)을 재었는데 십홀(十笏)을 얻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음.
❾거사(擧似); 들어 보임(擧示)이니 언구를 거설(擧說)하여 모인(某人)에게 알림임. 사(似)는 여(與)ㆍ향(向)에 상당(相當)함.
❿암두(巖頭); 암두전활(巖頭全豁)임. 전활(全豁. 828~887) 또 전활(全奯)로 지음. 당대(唐代)의 승려며 천주(泉州. 지금 福建에 속함)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가(柯)임. 영천사(靈泉寺)에서 출가하였고 장안(長安)의 서명사(西明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설봉의존(雪峰義存. 德山宣鑑의 法嗣)ㆍ흠산문수(欽山文邃. 洞山良价의 法嗣)와 함께 수행하고 서로 권면(勸勉)했음. 함께 앙산혜적(仰山慧寂. 潙山靈祐의 法嗣)을 참방(參訪)했고 또 덕산선감(德山宣鑑)에게 참학(參學)해 그 법사(法嗣)를 이었음. 출세하여 악주(鄂州. 지금의 湖北 武昌)의 암두원(巖頭院)에 거주하면서 종풍(宗風)을 크게 떨친지라 고로 또 칭호가 암두전활(巖頭全豁)임. 당(唐) 광계삼년(光啓三年) 사월에 도적이 난입(亂入)하자 칼날에 임해 그대로 태연자약(泰然自若)했으며 대갈일성(大喝一聲)하고 마쳤으니 나이는 예순이며 시호(諡號)는 청엄대사(淸儼大師)임. [宋高僧傳二十三 祖堂集七 景德傳燈錄十六].
⓫대소(大小); 여기에선 이러히 크다(偌大)ㆍ이렇게 크다(這麽大)ㆍ저렇게 크다(那麽大)를 가리킴. 대소(大小) ㊀대(大)와 소(小)임. ▲고존숙어록삼십사(古尊宿語錄三十四) 용문불안(龍門佛眼). 묻되 허공이 도리어 변이(變異)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대운(代云) 청황적백(靑黃赤白)이며 장단대소(長短大小)다. ㊁대소대(大小大)와 같음. 곧 이러히 크다(偌大)ㆍ이렇게 크다(這麽大)ㆍ저렇게 크다(那麽大). ▲벽암록불이초이(碧巖錄不二鈔二). 릉가(楞伽. 竺仙)가 이르되 북방인(北方人)이 사람의 장단(長短)을 의논하려 하면 사단(詞端)에 먼저 대소(大小) 두 자를 말한다. 그 아래엔 반드시 기과(譏誇)의 말이 있다. 혹 말하되 대소대(大小大)의 사람이라 하면 뜻에 이르기를 너는 이 대대(大大)한 사람이거늘 도리어 이러한 쇄세소소(瑣細小小)하여 기량(伎倆)이 없는 일을 짓는가 함이다. ▲벽암록(碧巖錄) 제1칙 종전초(種電鈔)에 이르되 대소(大小)란 것은 북방(北方)에서 사람을 욕하는 기두(起頭)의 말이다. 또한 현성(現成)하여 명료(明了)하면서도 초절기(勦絶機)가 없음을 보임이다. ▲원오어록십일(圓悟語錄十一). 대소(大小) 세존(世尊)이 용두사미(龍頭蛇尾)로다. ㊂구말(句末)에 두면서 의문을 표시함. 다(多)ㆍ대(大)에 상당(相當)함. ▲오등회원칠(五燈會元七) 현사사비(玄沙師備). 묻되 무엇이 이 무봉탑(無縫塔)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이 일봉(一縫)은 얼마(大小)인가.
⓬말후구(末後句); 이르자면 철저(徹底)히 대오(大悟)한 극처(極處)라서 말할 바의 지극한 말에 달도(到達)하여 다시는 능히 초월할 기타의 어구(語句)가 없는 것.
⓭승좌(陞座); 고좌(高座)에 오름의 뜻. 사가(師家)가 고좌에 올라 설법함을 가리킴. 고제(古制)에 의거하자면 승좌(陞座)와 상당(上堂)이 같은 뜻이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이에 구별하는 바가 있음. 또 승좌(昇座)ㆍ승좌(升座)로 지음. [象器箋垂說類].
⓮심상(尋常); 평시(平時)임. 심(尋)은 상(常)임. 또 아(俄. 잠깐)니 불구(不久)에 상당(相當)함.
⓯승당(僧堂); 선림(禪林) 중에 승중(僧衆)이 일상(日常)에 수선(修禪)하고 기와(起臥)하는 당사(堂舍)를 가리킴. 또 명칭이 운당(雲堂)ㆍ좌당(坐堂)ㆍ선불당(選佛堂)ㆍ성승당(聖僧堂)ㆍ고목당(枯木堂)이며 선종 칠당가람(七堂伽藍)의 하나임. 곧 무릇 선찰(禪刹)에서 괘탑(掛搭)하는 자는 모두 계랍(戒臘)에 의해 위차(位次)를 안배(安排)하며 무릇 좌선(坐禪)ㆍ기와(起臥)ㆍ음식(飮食)을 다 이 승당(僧堂)에서 행함. 이것은 고대의 승방(僧房)과 식당(食堂)의 공용(功用)을 겸해 있음. 대지도론이(大智度論二)를 안험(按驗)컨대 원시불교(原始佛敎)의 승단(僧團) 중에서 승당(僧堂)은 승방(僧房)과 정사(精舍)를 가리키는지라 고로 성질이 현금(現今)의 승당과 상이(相異)함. 지나(支那)는 당송(唐宋) 이강(以降. 以下)으로부터 승당의 중앙에 성승상(聖僧像)을 안치하고 중승(衆僧)이 이를 위요(圍繞)하며 주위(周圍)에 좌상(坐床)을 설치하여 기와(起臥) 및 일야(日夜)의 좌선변도(坐禪辨道)의 도량(道場)으로 삼았음.
⓰부장(拊掌); 부(拊) 두드림(拍)임. 가볍게 침(輕擊)임. 옥편(玉篇) 부(拊) 두드림(拍)이다.
⓱재(在); 구미조사(句尾助詞)임. 실의(實義)가 없음.
⓲일붕(一棚); 붕(棚) 양사(量詞)임. 예컨대(如) 몇 붕(棚)을 경과하며 생각했다. 몇 붕(棚)의 오리를 길렀다.
⓳괴뢰(傀儡); 조정사원육(祖庭事苑六). 괴뢰(傀儡) 상(上)은 구외절(口猥切. 괴)이며 하(下)는 락외절(落猥切. 뢰)임. 또 이르되 굴차뢰(窟此磊)임. 우인(偶人. 偶는 허수아비 우. 곧 허수아비)을 만들어 희희(戲喜)하며 춤을 추려하는 것이며 본래 상가(喪家)의 오락(娛樂)임. 한말(漢末)에 비로소 희회(喜會)에 이를 썼으며 제(齊. 北齊)의 후주(後主)인 고위(高緯. 在位 565~576)가 더욱 좋아했던 것이며 고려국(高麗國)에도 또한 이것이 있음.
⓴최초구(最初句); 당하(當下)에 계입(契入)해 철저히 성오(省悟)한 제일구화(第一句話)임. 안험(按驗)하니 선가(禪家)에 말후구(末後句)란 말이 많이 있음. 최초구(最初句)와 말후구(末後句)는 설법이 같지 않으나 실로는 곧 한 이치(理致)라서 고르게 성오(省悟)에 달도(達到)한 관건(關鍵)의 일구(一句)가 됨. 때문에 이 일구(一句)는 본래 통상(通常)의 언설이 아님이 되어 이것은 언어를 초월하고 분별을 초월한 진여실상(眞如實相)임. 또 최초일구(最初一句)ㆍ말상일구(末上一句) 등으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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