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역해무문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제19칙 평상시도(平常是道)

태화당 2019. 8. 12. 08:36

平常是道

南泉因趙州問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州云 還可趣向否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擬之道 猶如太虛廓然洞豁 豈可强是非也 州於言下頓悟

無門曰 南泉被趙州發問 直得瓦解氷消分疎不下 趙州縱饒悟去 更參三十年始得

頌曰 春有百花秋有月 夏有涼風冬有雪 若無閑事挂心頭 便是人間好時節

平常心是道; 傳燈錄二十八 大寂道一 示衆云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造作趣向 皆是汚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經云 非凡夫行非賢聖行是菩薩行 只如今行住坐臥 應機接物 盡是道

無記; 一切法可分爲善不善無記等三性 無記卽非善非不善者 因其不能記爲善或惡 故稱無記 或謂無記者因不能招感異熟果(善惡之果報) 不能記異熟果 是故稱爲無記 [唯識論五 百法問答抄三]

太虛; 太虛空 指天

瓦解氷消; 瓦解爲泥 氷消爲水 形容解疑或失本形

分疎; 分辨 辨解 廣韻 疏 俗作疎

 

평상시도(平常是道)

남천(南泉), 조주(趙州)가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함으로 인해 남천이 이르되 평상심이 이 도니라(平常心是道). 조주가 이르되 도리어 가히 취향(趣向)합니까. 남천이 이르되 헤아려서 향하려 하면 곧 어그러진다. 조주가 이르되 헤아리지 않으면 어떻게 이 도인 줄 알겠습니까. 남천이 이르되 도는 지()에 속하지 않고 부지(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 ()는 이 망각(妄覺)이며 부지(不知)는 이 무기(無記)니라. 만약 참으로 헤아리지 않음의 도를 통달했다면 마치 태허(太虛)의 확연통활(廓然洞豁. 휑하게 비어서 뚫림)함과 같거늘 어찌 가히 억지로 시비하리오. 조주가 언하(言下)에 돈오(頓悟)했다.

무문(無門)이 가로되 남천(南泉)이 조주(趙州)의 발문(發問)을 입자 바로 와해빙소(瓦解氷消)하여 분소(分疎)를 내리지 못함을 얻었다. 조주가 종요(縱饒. 縱然. 설사) 깨쳤더라도 다시 삼십 년을 참구(參究)해야 비로소 옳다.

송왈(頌曰) 봄에는 온갖 꽃이 있고 가을에 달이 있으며/ 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 눈이 있도다/ 만약 쓸데없는 일을 심두(心頭)에 걺이 없다면/ 곧 이 인간이 좋은 시절이니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전등록이십팔(傳燈錄二十八) 대적도일(大寂道一). 시중(示衆)해 이르되 도는 수행을 쓰지 않나니 단지 오염(汚染)되지 않게 해야 한다. 무엇을 오염이라고 하는가, 단지 생사심(生死心)으로 조작(造作)하고 취향(趣向)함이 있으면 다 이는 오염이다. 만약 바로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이 도니라. 평상심을 이르자면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고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다. 경에 이르되 범부행(凡夫行)이 아니고 현성행(賢聖行)이 아니고 이 보살행(菩薩行)이라 했으니 단지 여금(如今)에 행주좌와(行住坐臥)하고 응기접물(應機接物. )함이 다 이 도다.

무기(無記); 일체법을 가히 나누자면 선()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 등 삼성(三性)이 됨. 무기(無記)는 곧 선()도 아니고 불선(不善)도 아닌 것이니 그것은 능히 선()이나 혹은 악()으로 기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로 명칭이 무기(無記). 혹은 이르기를 무기(無記)란 것은 능히 이숙과(異熟果. 善惡果報)를 초감(招感)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이숙과를 기록하지 못하는지라 이런 고로 명칭이 무기가 됨. [唯識論五 百法問答抄三].

태허(太虛); 태허공(太虛空)이니 하늘을 가리킴.

와해빙소(瓦解氷消); 기와가 풀려서 진흙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됨이니 의혹을 풀거나 혹은 본형(本形)을 잃음을 형용(形容).

분소(分疎); 분변(分辨). 변해(辨解). 광운(廣韻) () 속자(俗字)는 소()로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