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역해무문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제21칙 운문시궐(雲門屎橛)

태화당 2019. 8. 12. 08:38

雲門屎橛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

無門曰 雲門可謂 家貧難辨素食 事忙不及草書 動便將屎橛來 撑門拄戶 佛法興衰可見

頌曰 閃電光 擊石火 眨得眼 已蹉過

屎橛; 拭人糞之橛 取至穢之意 又作廁籌 淨籌 淨木 廁簡子等

; 翻譯名義集七 肇曰 佛者何也 蓋窮理盡性大覺之稱也 其道虛玄 固已妙絶常境 心不可以智知 形不可以像測 同萬物之爲 而居不爲之域 處言數之內 而止無言之鄕 非有而不可爲無 非無而不可爲有 寂寞虛曠 物莫能測 不知所以名 故强謂之覺 四十二章經解 佛者 梵語 具云佛陀 此翻覺者 謂自覺覺他覺行圓滿 自覺不同凡夫 覺他不同二乘 覺滿不同菩薩 卽是釋迦牟尼如來萬德慈尊 娑婆世界之敎主也

乾屎橛; 屎橛之乾者 見上屎橛

難辨; 玉篇 辨 具也

素食; 素食乃以植物爲主要之食物 卽相對於以動物爲食物之肉食而言

撑門拄戶; 支撑門戶

蹉過; 同錯過 蹉 跌也

 

운문시궐(雲門屎橛)

운문(雲門), 중이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함으로 인해 운문이 이르되 마른 똥막대(乾屎橛)니라.

무문(無門)이 가로되 운문은 가위(可謂) 집이 가난하면 소식(素食)도 장만하기 어렵고(難辨) 일이 바쁘면 초서(草書)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노라. 움직였다 하면 곧 똥막대를 가져와서 탱문주호(撑門拄戶)하려 하니 불법의 흥쇠(興衰)를 가히 볼 것이다.

송왈(頌曰) 번쩍하는 번갯빛이며/ 돌을 부딪쳐 나는 불이니/ 눈을 깜박했다 하면/ 이미 차과(蹉過)했도다.

시궐(屎橛); 인분(人糞)을 닦는 막대니 지극히 더러움의 뜻을 취함. 또 측주(廁籌)ㆍ정주(淨籌)ㆍ정목(淨木)ㆍ측간자(廁簡子) 등으로 지음.

(); 번역명의집칠(翻譯名義集七). 승조(僧肇)가 가로되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대개(大蓋) 이치를 궁구하여 성품(性稟)을 다한 대각(大覺)의 호칭이다. 그 도가 허현(虛玄)하여 소이로(連詞因此所以) 이미 상경(常境)을 묘절(妙絶)하였다. 마음은 가히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형체는 가히 형상(形像)으로써 헤아리지 못한다. 만물의 위()와 한가지로되 불위(不爲)의 영역(領域)에 거처하며 언수(言數)의 안에 처하되 무언(無言)의 고향에 거지(居止)한다. ()가 아니면서 가히 무()가 되지도 않으며 무()가 아니면서 가히 유()가 되지도 않나니 적막(寂寞)하고 허광(虛曠)하여 사람이 능히 헤아리지 못한다. 이름의 소이를 알지 못해 고로 다만() 이를 일러 각()이라 한다. 사십이장경해(四十二章經解). 부처()란 것은 범어(梵語)니 갖추어 이르면 불타(佛陀). 여기에서 각자(覺者)로 번역하나니 이르자면 자각(自覺)하고 각타(覺他)하여 각행(覺行)이 원만(圓滿)함이다. 자각(自覺)은 범부(凡夫)와 같지 않음이며 각타(覺他)이승(二乘)과 같지 않음이며 각만(覺滿)은 보살(菩薩)과 같지 않음이다. 곧 이는 석가모니여래(釋迦牟尼如來)의 만덕자존(萬德慈尊)이며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이다.

건시궐(乾屎橛); 똥막대(屎橛)의 마른 것. 위의 시궐(屎橛)을 보라.

난변(難辨); 옥편(玉篇) () 갖춤()이다.

소식(素食); 소식(素食)은 곧 식물(植物)을 주요(主要)로 한 식물(食物). 곧 동물(動物)을 식물(食物)로 삼는 육식(肉食)에 상대해 말함임.

탱문주호(撑門拄戶); 문호(門戶)를 지탱(支撑).

차과(蹉過); 착과(錯過)와 같음. () 미끄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