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송구집

선림송구집(禪林頌句集) 七言四句以上 三畫(16-20) 三間茅屋 三箇難分 三更月落 三更月照 三更月下

태화당 2019. 8. 28. 10:23

三間茅屋從來住 一道神光萬境閑

莫作是非來辨我 浮生穿鑿不相關 傳燈錄八 龍山偈


삼간의 모옥에 종래로 거주하니/ 한 가닥 신광이라 萬境이 한적하도다/ 시비를 지어 와서 나에게 분변하지 말지니/ 부생의 천착엔 상관하지 않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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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箇難分劣與優 你心頭似我心頭

不堪說破祇堪笑 笑到驢年未肯休 雜毒海四 三笑圖 無準範


세 개는 열등과 우수를 분변하기 어렵나니/ 너의 心頭가 나의 심두와 같도다/ 설파를 감내치 못하고 단지 웃음을 감내하나니/ 웃어 驢年에 이르더라도 쉼을 긍정치 않더라.


는 다만 지. 驢年이란 十二支驢年이 없으므로 아주 오랜 세월을 말함. 는 너 니.

慧遠法師(334-416)所居東林인데 流泉이 절을 돌아 아래로 개울에 들어갔다. 스님이 매양 객을 전송하면서 이것을 지나면 범이 있어 울부짖었는데 하여 虎溪였다. 후에 객을 전송하면서 일찍이 지나치지 않았다. 유독 陶潛道土 陸修靜이 이르면 도를 말하면서 계합한지라 不覺에 호계를 지났다. 인하여 서로 더불어 大笑했는데 세상에서 하여 三笑圖로 삼았다 [佛祖統紀卷三十七].


三更月落兩山明 古道迢遙苔滿生

金鎖搖時無手犯 碧波心玉兎常行 雜毒海一 石霜 投子靑


삼경에 달이 지자 두 산이 밝은데/ 옛 길은 아득히 멀고 이끼가 가득 났도다/ 金鎖를 흔들 때 손으로 범함이 없고/ 푸른 파도 가운데 옥토가 늘 행하도다.


()은 밤 시각을 일컬을 때 쓰던 옛 용어임. 태양이 진 다음부터 다음날 태양이 뜨기 전까지를 등분하여 初更은 오후 十時. 二更은 오후 十二時(다음날 오전 ). 三更은 오전 0∼二時. 四更은 오전 四時. 五更은 오전 四時부터 밝을 때까지를 가리킴. 은 가운데 심. 玉兎는 달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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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更月照鐵門關 多少行人去未還

好是一聲歸去笛 夜深吹過汨羅灣 拈頌三 一一則 達磨汝得吾髓話 霅溪益頌


삼경에 달이 철문관을 비추는데/ 다소의 행인이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구나/ 좋구나 이 한 소리 歸去笛이여/ 야심에 불면서 멱라만을 지나도다.


은 물 이름 멱. 빠질 골. 鐵門關이란 西투르키스탄 중앙에 있는 소그디아나와 남쪽 박트리아의 경계 峽道. 사마르칸드에서 테르메스에 이르는 도로에 있으며 철문이 설치되어 있음.

汨羅 汨莫壁切()이니 水名이며 長沙羅縣에 있으므로 고로 가로되 멱라임. 史記(前漢司馬遷上古時代黃帝로부터 나라의 武帝 太初年間서기전 104-서기전 101中國과 그 周邊 민족의 歷史包括하여 著述通史. 卷八十四) 屈原이며 나라에서 벼슬해 三閭大夫가 되었다. 上官이 왕에게 譖毀(참소하여 헐뜯음)하여 江南流配되었는데 楚王이 마침내 省察을 보이지 않자 드디어 汨淵에 다다라 죽었다. 九勿切()이며 居覲切()[祖庭事苑卷第六].

祖師(달마)가 장차 서쪽(天竺)으로 돌아가려고 이에 門人에게 하여 이르되 때가 거의 이르렀으니 너희 등은 각자 얻은 바를 말하라. 道副가 이르되 제가 본 바와 같은 것은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으면서 도의 을 삼습니다. 조사가 이르되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摠持(祖庭事苑卷第八에 이르되 總持明練이니 梁武帝의 딸이다. 달마를 師事하여 제자가 되었고 도를 깨치고 示滅했다. 少林寺五里가량에 있다. 事實褚詢望書寫한 바의 塔碑에 갖췄다)가 이르되 저의 안 바로는 慶喜(阿難)阿閦佛國(아축불국. 不動佛國)을 보되 한 번 보고 다시 再見하지 않음과 같습니다(大般若經卷第四百五十八에 이르되 여래가 신통력을 나타내어 대중으로 하여금 不動佛國을 보게 하셨는데 불타가 神力을 거두시어 忽然之間에 대중으로 하여금 다시 거듭 보지 못하게 하고는 경희에게 물으시되 不動如來國土衆會를 네가 다시 보느냐. 경희가 대답하되 제가 彼事를 다시 보지 못합니다). 조사가 이르되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道育이 이르되 四大(地水火風)가 본래 했으며 五陰(色受想行識)이 있음이 아닌지라 저의 見處로는 실로 一法도 가히 한 게 없습니다. 조사가 이르되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慧可三拜하고 依位해 서자 조사가 이르되 너는 나의 를 얻었다 [聯燈會要卷第二 達磨章].


三更月下一聲蛙 撞破虛空共一家

正與麽時誰會得 嶺頭脚痛有玄沙 雜毒海三 投機 張九成


삼경의 달 아래 한 소리 개구리여/ 허공을 쳐서 깨뜨리니 공동으로 일가로다/ 바로 이러한 때 누가 알아 얻었는가/ 嶺頭에 발이 아픈 현사가 있도다.


은 발 각. 다리 각.

禪師師備(835-908) (中略) 일찍이 背囊을 가지고 出嶺遍參하려 했는데 홀연히 발가락이 찔려 깨어져 피가 흐르면서 매우 아팠다. 탄식하며 가로되 이 몸이 있는 게 아니거늘 통증은 어디를 좇아오는가. 이 몸이 이 라 필경 無生이로다. 쉬어라 쉬어라. 드디어 出嶺하지 않았다. 義存(雪峯)에게 의지해 心要咨決하는데 어느 날 의존이 불러 가로되 備頭陀는 왜 遍參하지 않느냐. 가로되 달마가 東土에 오지 않았고 二祖西天에 가지 않았습니다(達磨不來東土 二祖不往西天) [宗統編年卷之十六].

玄沙 현사는 이름이 師備(835-908)福州 閩縣謝氏 아들이며 어릴 적 고기잡이로써 을 삼았다. 唐 咸通初860 갑자기 出塵(紅塵世上을 벗어남)의 뜻이 있어 芙蓉山 靈訓을 좇아 受業했다. 三十落髮했고 道玄律師에게서 를 얻었다. 布衲芒屨(은 까끄라기 망. 구는 신 구. 곧 짚신)에다가 식사는 겨우 接氣(氣味)하고는 종일 했다. 늦게서야 雪峯禮謁했는데 이 그가 잘 諸業抖擻(떨쳐버림)함을 기뻐해 居常(평상시)頭陀로써 그를 일컬었다. 이미 설봉에게서 법을 얻고는 마침내 딴 곳에 가지 않았고 만년에 玄沙에 거처했다. 사방의 학자들이 輻湊했다. 그 도를 이은 자가 자못 하니 예컨대() 羅漢桂琛 安國慧球는 다 師席白眉. 그러하여 門下의 제자에 그 법을 얻고는 도를 안고 아름답게 숨은 자를 詳考함을 가히 얻지 못한다. 僧傳禪錄이 어찌 능히 다 셈하랴. (善卿)가 일찍이 外沙를 지나다가 還鄉和上眞身瞻禮했는데 그 石刻에 이르되 스님의 道勤이며 閩越 李氏의 아들이다. 스승을 좇아 落髮하고 二十受具(具足戒를 받음)했으며 玄沙師備에게서 正法眼藏을 얻었다. 建隆初960吳越에 들어가 錢塘普安에 다다랐다. 비록 開堂(宗門에서 새로 임명된 住持가 처음 설법함을 개당이라고 함)演唱하지 않았으나 參玄(玄妙한 도리를 參問)入室한 자가 늘 五百을 채웠다. 興國丙子976 夏六月에 스님이 홀연히 侍僧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還鄉하리라. 시승이 깨닫지 못하자 인해 붓을 찾아 게를 써서 이르되 還鄉寂寂하고 아득해 종적이 없나니/ 외로운 돛을 걸지 않아도 水陸하도다/ 옛 관문을 뛰어오르매 田地(境地)安穩(은 평온할 온)하나니/ 다시 남북과 동서가 없도다. 三日 후에 正坐하여 마쳤다. 六十이며 (僧臘)四十五이다. 全身儼然한지라 지금 의 북쪽 모퉁이에 留置한다. 비록 庭宇(는 집 우)頹圮(는 무너질 퇴. 는 무너질 비)했으나 瞻禮者踵武(은 이을 종. 발꿈치 종. 는 이을 무. 자취 무. 곧 뒤를 이음)하여 끊기지 않는다. 스님이 還鄉偈가 있어 당시에 왕성하게 전해졌으므로 고로 이름으로써 나타내지 않고 드디어 還鄉和上이라 했다 [祖庭事苑卷第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