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평심사 정원(淨圓)의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祖庭事苑序

태화당 2019. 9. 3. 08:05

祖庭事苑序                                                                                                                                  底本 卍續藏經一一三冊

 

天下之尊尙佛氏者 以其言出乎耳目之表 理存於六合之外 信而思之 於一言之下 頓證不失而灼見本性 成佛無疑 是故學者 雖游心於語言文字而不泥文字 蓋所以爲道也 其道由迦葉 至達摩方傳于震旦 後達摩五百年而生雲門 隨機應問 逗接來學 凡有言句 競務私記 積以成編 雖不許傳錄 而密相受授 閟之巾衍 後世惜其流布之不廣 遂刊木以印行於時 吾少讀之 疑其書之脫誤 欲求他本較之而未暇 然吾宗印寫傳錄率多舛者 蓋禪家流淸心省事 而未嘗以文字爲意 大觀二年春 吾以輔道之緣 寓都寺之華嚴 會睦庵卿上人過予手書一編甚鉅 其目曰祖庭事苑 以盡讀之 見其筆削敍致 動有師法 皆可考據 因扣其述作之由 且曰 曩游叢林 竊見大宗師陞堂 入室之外 復許學者記誦 所謂雲門雪竇諸家禪錄 出衆擧之 而爲演說其緣 謂之請益 學者或得其土苴餘 輒相傳授 其間援引釋敎之因緣 儒書之事蹟 往往不知其源流 而妄爲臆說 豈特取笑識者 其誤累後學 爲不淺鮮 卿因獵涉衆經 徧詢知識 或聞一緣得一事 則錄之於心 編之於簡 而又求諸古錄 以較其是非 念茲在茲 僅二十載 總得二千四百餘目 此雖深違達摩西來傳心之意 庶幾通明之士推一而適萬 會事以歸眞 而事苑之作 豈曰小補 或得此書讀之 而能詆斥嫚罵 特立意於語言文字之外 以力扶吾道 豈斯人之可喜可愕也 是亦由吾事苑而啓焉 愚壯其言 而奇其志 謹書以爲序 上人生東越 姓陳氏 號善卿 字師節 幼去家 事開元慈惠師爲弟子 訪道諸方 元符中 以母老不忍遠游 而歸隱里 昔睦州有尊宿 姓陳氏 親老無所歸 織蒲屨以自給 上人竊慕之 因命所居曰睦庵 其志識固可尙矣 四明苾芻法英書은 마땅히 으로 지어야 함.


천하에서 佛氏(釋迦. 佛家. 僧侶)尊尙하는 것은 그 말씀이 耳目의 겉을 超出하며 이치가 六合(天地四方)의 밖에 존재해서이다. 믿고 그것을 생각하여 一言之下頓證해 잃지 않고 환히 본성을 본다면 성불이 의심 없으리니 이런 고로 학자가 비록 語言文字에 마음이 노닐더라도 문자에 막히지() 않음은 대개 도를 위하기 때문이다. 그 도가 가섭에서 유래하여 달마에 이르러 비로소 震旦(漢地. 中國)에 전해졌다. 달마 뒤 五百年雲門(864-949. 文偃이니 雪峯義存法嗣)을 출생했으며 에 따르고 물음에 응해 來學逗接(物相投合이니 곧 根機에 맞추어 接引)하니 무릇 언구가 있으면 다투어 힘써 사사로이 기록하여 쌓아 을 이루었다. 비록 傳錄을 허락치 않았으나(聯燈會要卷第二十九 佛印了元開先善暹法嗣 雲門下四世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운문의 설법이 구름 같고 비 같았지만 절대로 사람에게 그 말을 기록함을 허락치 않았다. 본 즉 꾸짖어 가로되 너의 입을 쓰지 않고 도리어 나의 말을 기록한다면 다른 날 다른 때에 나를 裨販하여 가 있으리라 했으니 여금에 室中에서 기록을 대함은 다 香林澄遠이니 운문의 法嗣이 종이로써 옷을 만들어 듣는 바를 따라 바로 그것을 쓴 것이니라. 후세에 語言漁獵코자 하면 바로 그물을 불어 채우고자 함과 같나니 어리석음이 아니면 곧 미친 것이니라) 비밀히 서로 受授하여 巾衍(巾箱이니 책을 담는 상자. 竹箱之類. 곧 상자)에 감추니 후세에 그 流布의 광대치 못함을 애석히 여겨 드디어 나무에 새겨 당시에 印行하였다. 내가 少時에 그것을 읽고서 그 책의 脫誤를 의심하여 他本을 구해 較正코자 하였으나 여가가 없었다. 그러하여 吾宗印寫하고 傳錄하면서 모두 많이 舛謬(은 어그러질 천. 는 그릇될 류)함은 대개 禪家流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일을 생략하므로 일찍이 문자로써 뜻을 삼지 않아서이리라. 大觀二年1108 내가 輔道의 인연으로 都寺華嚴에 살면서 睦庵卿上人을 만났으며 나에게 손수 쓴 一編을 건네 주었는데 매우 컸으니 그 제목을 가로되 祖庭事苑이었다. 그것을 다 읽고서 그 筆削敍致(敍述하는 理致)를 보니 움직였다 하면 다 師法이 있으며 다 가히 考據할 만했다. 述作因由를 물으니 이에 가로되 접때 총림에 노닐 적에 가만히 대종사의 陞堂을 보매 입실 외에 다시 학자의 記誦을 허락하니 이른 바 雲門 雪竇 諸家禪錄이며 대중에서 나와 그것을 들매 그 機緣(어떠한 기회로 맺어진 인연. 부처의 교화를 받을 만한 인연의 기틀)을 연설하였으며 이를 일러 請益이라 하고 학자가 혹은 그 土苴(는 신바닥 저. 꾸러미 저. 土苴糞草 糟粕이니 微賤한 물건에 比喩)緒餘(는 실마리 서)를 얻으면 곧 서로 傳授하니 그 사이에 釋敎의 인연이나 儒書事蹟을 당겨 인용하매 往往 源流를 알지 못해 망령되이 臆說을 이루니 어찌 특히 識者에게만 비웃음을 취하랴. 그 후학을 誤累함이 엷거나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인하여 衆經獵涉하고 知識徧詢하여 혹은 一緣을 듣거나 一事를 얻으면 곧 마음에 기록하고 簡策(옛날에 종이 대신에 글씨를 쓰던 대쪽. 書冊)에 편집하며 또 여러 古錄을 구하여 그 시비를 較定했으니 이를 생각하고 이에 있음이 거의 二十載였으며 總 二千四百餘目을 얻었다. 이것이 비록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마음을 전한 뜻에는 깊이 위배되나 거의 通明의 사내()推理하여 을 맞히고 를 모아 에 돌아간다면 事苑의 저작을 어찌 小補라고 이르겠는가. 혹은 이 서책을 얻어 이를 읽고서 능히 詆斥(는 꾸짖을 저)하고 嫚罵(은 업신여길 만)하면서 특별히 語言文字의 밖에 뜻을 세워 吾道를 힘껏 扶持한다면 어찌 이 사람의 가히 기뻐하고 가히 놀람이랴. 이 또한 나의 事苑을 말미암아 啓示함이로다. (謙詞法英)가 그 말을 하게 여기고 그 意志를 기특하게 여겨 謹書하여 를 삼는다. 上人東越에서 출생했고 陳氏善卿이며 師節이다. 어릴적 집을 떠나 開元慈惠스님을 師事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諸方訪道(은 물을 방. 찾을 방. 問道)하다가 元符中1098-1100에 모친이 老衰하므로 차마 멀리 游行치 못하고 鄕里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옛적에 睦州尊宿(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남의 본보기가 될 만한 스님)이 있었으니 陳氏母親이 노쇠하여 돌아갈 곳 없는지라 蒲屨(는 신 구)를 짜서 팔아 自給하였는데(睦州 陳尊宿道明이니 黃檗希運法嗣) 上人이 가만히 그를 思慕하여 인해 所居命名해 가로되 睦庵이라 했으니 그 志識이 진실로 可尙하다. 四明苾芻 法英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