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一 雲門錄上 1 사휘문언(師諱文偃)

태화당 2019. 9. 3. 08:06

祖庭事苑卷第一

                                                                              睦庵 善卿 編正

                                                                                     平心寺主 淨圓 譯註

 

雲門錄上

 

師諱文偃 生東吳之嘉興 姓張氏 受業於兜率院 訪道諸方 初至睦州 參陳尊宿 扣其門 陳問 阿誰 曰 文偃 陳開門把住曰 道道 師無語 陳曰 秦時?鑽 遂托開 以門揜折右足 師因發明大意 陳指游雪峯 師旣至 適雪峯陞堂 乃出衆曰 項上三百斤鐵枷 何不脫却 峰下座 把住云 因甚到與麽 師以手拭目 自後道振叢席 再歷禪林 至韶州靈樹 居第一座 靈樹旣沒 廣主劉氏 令州牧何希範 請師繼其法席 由是大唱雪峰之道於天下 遷雲門 而學者輻 至南漢乾和七年四月十日 坐而示化 卽大漢之乾祐二年也 本朝太祖乾德元年 感阮紹莊之夢 時進李托奏上之 發塔得全身 容止如生 迎赴闕供養 旣而得旨 歸葬于本山 諡號大慈雲匡眞弘明大師 嗚呼 師之亡後一十四年 復題于蓺祖之時 其道流通洋洋于今日 豈偶然乎

 

스님의 (는 휘 휘. 꺼릴 휘. 살아서는 가로되 이며 죽어서는 가로되 이나 生前에도 라고 일컬음)文偃(864-949)이며 東吳嘉興에서 출생했으며 성은 장씨며 도솔원에서 受業했다. 제방에 訪道(問道)하다가 처음 睦州에 이르러 陳尊宿(道明이니 黃檗希運法嗣)(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뵈올 참)했다. 그 문을 두드리자 이 묻되 누구냐. 가로되 문언입니다. 이 문을 열고 把住(꼼짝 못하게 움켜쥠)하며 가로되 말하라 말하라. 스님이 말이 없자 이 가로되 秦時?輅鑽(?은 돌 탁. 는 큰 수레 로. 은 뚫을 찬. 송곳 찬. ?輅鑽나라 때 長城 築造에 쓰던 기계였으나 그것이 너무 커서 나중에 쓸모가 없게 됨. 하여 쓸모없는 사람에 比喩)이로구나. 드디어 밀어젖혔는데 문으로써 右足揜折(은 가릴 엄. 困迫할 엄. 困迫해 부러짐)했고 스님이 인하여 大意를 발명했으며 雪峯(義存이니 德山宣鑑法嗣. 六祖慧能下六世)游行하기를 지시했다. 스님이 이미 이르매 마침 설봉이 陞堂한지라 곧 대중에서 나와 가로되 項上三百斤 鐵枷(는 칼項械 )를 왜 脫却하지 않습니까. 下座하여 把住하고 이르되 무엇으로 인해 이러함에 이르렀는가. 스님이 손으로써 눈을 닦았다. 이후로부터 도가 叢席에 떨쳤다. 다시 선림을 經歷하다가 韶州靈樹(如敏이니 福州大安法嗣. 南嶽下四世)에 이르러 第一座에 거처했으며 영수가 이미 죽자 廣主(廣州君主)劉氏(五代 十國의 하나인 南漢劉隱이니 下文에 나옴)州牧何希範에게 명령하여 스님을 초청해 그 法席을 잇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설봉의 도를 천하에 크게 提唱했다. 운문으로 옮기매 학자가 輻湊(은 바퀴살 복. 는 모일 주. 곧 수레바퀴살이 가운데 있는 바퀴통으로 모여 드는 것처럼 한꺼번에 모여 드는 것)했다. 南漢乾和七年949 四月 十日에 이르러 앉아서 示化(化去를 보임. 곧 죽음)하니 곧 大漢(後漢) 乾祐二年949이다. 本朝() 太祖乾德元年963 紹莊의 꿈에 감응해 時進李托이 이를 奏上하여 탑을 열어 全身을 얻었는데 容止(容貌擧止)가 생시와 같았으며 영입해 대궐에 다다라 공양하였고 마치고선 勅旨를 얻어 本山歸葬하였으니 시호가 大慈雲匡眞弘明大師. 嗚呼라 스님이 사망한 뒤 一十四年에 다시 蓺祖(와 같음)의 시절을 하니 그 도가 유통하여 금일에 洋洋함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