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巢
黃巢爲雪竇開山和上 蓋俗流妄傳 不足考信也 按唐書傳 巢 曹州寃何人 本以販鹽爲事 乾符中 仍歲凶荒 人飢爲盜 河南尤甚 巢與弟黃揆昆仲八人 率盜數千 依里人尙讓 月餘 衆至數萬 讓乃與群盜 推巢爲王 曰衝天大將軍 仍署宮屬 蕃鎭不能制 以至於竊據京師 燔掠宮廟 天子爲之奔走 國號稱齊 年稱金統 朝廷以李克用率官軍討之 中和四年五月 大敗之 賊散鄆운界 巢入泰山 官軍遺將捕之 至狼虎谷 巢將林言斬巢及二弟鄴업揆규等七人首幷妻子 函送徐州 今禪門應問機緣 亦一期指示學者 以意逆志爲得之矣 然祖塔非黃巢明矣▶宮은 官으로 의심되고 書에
字가 없으므로 兗으로 의심되고 遺는 遣으로 의심됨.
黃巢가 설두의 開山和上이라 함은 대개 俗流의 妄傳이므로 족히 考信치 못함. 唐書(唐高祖의 建國618에서부터 哀帝의 亡國907까지 二十一帝 二百九十年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임. 처음에는 단지 唐書로 지었지만 宋나라 때 내용을 고쳐 新唐書로 編纂했음. 그래서 舊唐書二百卷와 新唐書二百二十五卷로 나누어졌음)의 傳(經書의 說明 전. 舊唐書卷二百下 黃巢傳)을 안험컨대 巢는 曹州 寃何 사람이며 본래 소금 판매로 일을 삼았다. 乾符中874-879 여러 해 凶荒이라 사람들이 굶다가 도적이 되었는데 河南이 더욱 심했다. 巢가 동생 黃揆와 더불어 昆仲(昆은 맏이 곤) 八人이 도적 수천을 거느리고 里人 尙讓에게 의지했는데 月餘에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으며 讓이 이에 群盜와 더불어 巢를 추대해 왕으로 삼아 가로되 衝天大將軍이라 했고 인해 官屬을 두었다(署). 蕃鎭이 능히 제압치 못해 京師(師는 서울 사. 곧 서울)에 竊據하기에 이르렀으며 宮廟를 燔掠(燔은 사를 번. 掠은 노략질할 략)했고 천자가 奔走했다. 국호를 齊라 칭하고 연호를 金統이라 칭했다. 조정에서 李克用(856-906. 後唐의 太祖)을 써 관군을 거느리고 그를 토벌했다. 中和四年884 五月 크게 그를 패퇴시키자 도적은 兗연鄆운의 경계로 흩어지고 巢는 泰山에 들어갔다. 관군이 장병을 보내 그를 체포하려 했고 狼虎谷에 이르자 巢의 장군 林言이 巢 및 二弟인 鄴업 揆규 등 七人의 머리와 아울러 처자를 베어 徐州에 函送했다. 지금 선문에서 물음에 응한 기연은 또한 한 때의 학자에게 지시함이니 逆志의 뜻으로써 그것을 얻음이 됨. 그러하여 祖塔은 黃巢가 아님이 명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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