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三 雪竇祖英上 55 연수망망(煙水茫茫)

태화당 2019. 9. 5. 09:50

煙水茫茫

洛京慧林寺 故光祿卿李憕居第 祿山陷東都 憕以居守死之 子源少時以貴游于豪侈 善歌聞於時 及憕死 悲憤自誓 不住不娶不食肉 居寺中五十餘年 寺有僧圓澤 富而知音 源與之遊甚密 促交語竟日 人莫能測 一日 相約蜀靑城峨嵋山 源欲自荊州泝 澤欲取長安斜谷路 源不可曰 吾以絶世事 豈可復道京師哉 澤默然 久之曰 行止固不由人 遂自荊州路 舟次南浦 見婦人錦襠負甖而汲者 澤望而泣曰 吾不欲由此者 爲是也 源驚問之 澤曰 婦人姓王氏 吾當爲之子 孕三歲矣 吾不來故不得乳 今旣見 無可逃者 公當以符呪助我速生 三日浴兒時 願公臨 我以一笑爲信 後十二年中秋月夜 杭州天竺外 當與公相見 源悲悔而爲具沐浴易服 至暮澤亡 而婦乳三日 往視之 兒見源果笑 具以語王氏 氏以家財葬澤山下 源遂不果行 返寺中 問其徒 則旣有命矣 後十二年 自洛適吳赴其約 至所約 聞葛洪川畔有牧童扣牛角而歌曰 三生石上舊精魂 賞月臨風莫要論 慚愧情人遠相訪 此身雖異性長存 呼問 澤公徤否 答曰 李公眞信士 然俗緣未盡 愼勿相近 唯勤修不墜 乃復相見 又歌曰 身前身後事茫茫 欲話因緣恐斷腸 吳越山川尋已徧 却回煙棹上瞿塘 遂去 不云所之 後二年 李德裕奏源忠臣子篤孝 拜諫議大夫 不就 死寺中 年八十矣 煙水茫茫 蓋頌家自有深意 且以文勢推之 但創其遠情爾 不必涉事 尤爲簡當 然吾敎論受生 經論備載 三緣啐啄 一不可差 安有此身未滅而先託質已三年矣 設以菩薩人隨意生身 一多自在者如此 澤又何必見錦襠而泣耶 詳此 乃好事者爲之 而理不可考書에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가 없음. 으로 의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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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京의 혜림사는 故光祿卿 李憕居第(는 집 제)였다. 安祿山(703 -757)東都(洛陽)를 함락하자 居處로써 지키다 죽었다. 아들 少時에 부귀로써 豪侈(는 사치할 치. 富豪)와 노닐었으며 노래를 잘해 당시에 소문났으나 및 증이 죽자 悲憤하며 스스로 맹서해 머물지 않고 장가들지 않고 食肉하지 않으면서 寺中에 거처하기 오십여 년이었다. 절에 僧 圓澤이 있었는데 부유하면서 知音이었다. 이 그와 더불어 交遊함이 매우 친밀했으며 재촉해 交語함이 竟日(終日)이었고 사람들이 능히 헤아리지 못했다. 어느 날 서로 약속한 곳이 靑城 峨嵋山이었다. 荊州泝峽을 좇고 싶어했으나 은 장안의 斜谷路를 취하려 했다. 不可하다 하며 가로되 나는 世事와 단절했거늘 어찌 가히 다시 京師로 길을 가리오. 이 묵연했다. 그것을 오래하다가 가로되 行止는 진실로 사람을 말미암지 않는다. 드디어 荊州路를 좇았다. 배로 南浦 近傍(. 傍邊)에서 婦人을 보았는데 錦襠(은 잠방이 당)에 항아리를 지고 물을 길었다. 이 바라보고 하며 가로되 내가 여기를 경유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놀라서 그것을 묻자 이 가로되 부인의 성은 왕씨며 내가 마땅히 아들이 되어야 한다. 잉태한 지 三歲며 내가 오지 않는 고로 젖을 얻지 못했다. 이제 이미 보았으므로 가히 도피할 자 없다. 은 마땅히 符呪로 나의 速生을 돕게나. 三日 만에 아이를 목욕시킬 때 원컨대 하면 내가 一笑로써 信標를 짓겠다. 十二年 후 중추의 달밤에 杭州天竺 밖에서 마땅히 과 상견하리라. 悲悔하면서 위해 沐浴을 갖추고 옷을 바꾸었다. 저녁에 이르러 이 죽었다. 부인이 젖먹인 지 三日에 가서 그를 보니 아이가 을 보고 과연 웃었다. 갖추어 王氏에게 말했고 왕씨가 家財를 써서 산 아래 葬事 지냈다. 이 드디어 遊行을 이루지 못하고 寺中으로 돌아와 그 門徒에게 물으니 곧 이미 遺命이 있었다. 十二年 후에 으로부터 로 가서 그 약속에 다다랐다. 약속한 곳에 이르니 葛洪川畔에 목동이 있어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함을 들었는데 가로되 三生石上의 옛 精魂/ 달을 감상하고 바람에 하니 의논을 요하지 말라/ 부끄럽게도 情人이 멀리서 相訪하니/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성품은 늘 존재하도다. 부르며 묻되 澤公健康(과 같음)한가. 답해 가로되 李公은 진실한 信士지만 그러나 俗緣이 다하지 않았으니 삼가 相近하지 말라. 오직 부지런히 수행하면 떨어지지() 않고 이에 다시 상견하리라. 또 노래해 가로되 身前身後의 일이 茫茫하나니/ 인연을 얘기하려 하면 斷腸할까 두렵네/ 吳越山川이 잠시 만에 이미 두루하니/ 도리어 煙棹上瞿塘으로 돌아가게나. 드디어 떠나면서 가는 곳을 이르지 않았다. 二年 후에 李德裕(787-849. 宰相으로 翰林學士 中書舍人 등을 지냈음)奏聞은 충신의 아들이며 篤實(은 도타울 독)한 효자라 하여 諫議大夫除拜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寺中에서 죽었는데 나이 八十이었다. 연수망망은 대개 頌家가 스스로 깊은 뜻이 있으나 또 文勢로써 그것을 추리하건대 단지 그 遠情創起할 뿐이므로 일에 干涉함이 필요치 않음이 더욱 簡當하다. 그러나 吾敎에서 受生을 논함은 경론에 備載하니 三緣(識壽暖)啐啄(은 빠는 소리 줄. 병아리가 막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안쪽에서 쪼는 것을 줄, 암탉이 밖에서 쪼는 일을 탁이라 함)하여 하나도 가히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이 몸이 멸하지 않았는데 먼저 託質한 지 이미 三年이리오. 설령 菩薩人隨意生身(華嚴經論卷第二十八에 이르되 혹은 을 써서 娑婆에 머물며 혹은 말하기를 자비로써 留惑하여 住世한다)을 써 一多를 자재하게 쓰는 자라서 이와 같다 하더라도 이 또 하필이면 錦襠을 보고 해야 하겠는가. 이를 詳考하건대 곧 好事者가 이를 지은지라 이치를 가히 考察하지 못한다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