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愈▶768-824. 唐나라의 문장가 정치가 사상가.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字退之 昌黎人 父仲卿 無名位 愈生三歲而孤 養於從父兄 幼刻苦學儒 不俟獎勵려 尋登進士第 辟벽藩鎭賓佐 發言眞率 無所畏避 操行堅正 拙於世務 累官至吏部侍郞 年五十七卒 憲宗元和十四年正月丁亥 迎鳳翔法門寺佛骨至京師 留禁中三日 乃送諸寺 王公士庶奔走舍施如不及 愈上佛骨論 極言其弊 憲宗怒甚 間一日 出疏示宰臣 將加極法 斐度等諫言 愈罪太重 乃貶폄潮州刺史 愈至潮陽 上表 其略云 臣經涉嶺海 水陸萬里 州南世界 漲창海連天 毒霧瘴장氛 日夕發作 臣少多病 年才五十 髮白齒落 理不久長 單立一身 朝無親黨 居蠻夷之地 與魑魅매爲群 上覧而憫之 授袁州刺史 而禪錄諸書載云 憲宗迎佛骨入禁中 而靈感發光 百辟拜賀 唯愈端立 上問 何以不拜 愈曰 臣頃曾看佛書 佛光非靑黃等相 此但神龍荷助之光 上問 如何是佛光 愈無以爲對 翌日遂撰佛骨論上進 憲宗頗怒 貶愈潮州刺史 愈嘗有詩示姪湘云 一封朝奏九重天 夕貶潮州路八千 欲爲聖明除弊事 豈將衰朽惜殘年 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知汝遠來深有意 好收吾骨漳江邊 旣至潮 聆大顚禪師之名 累邀之不至 一日 大顚特往謁之 愈曰 三請不來 不召何來 曰 三請不來爲侍郞 不召而來爲佛光 愈曰 如何是佛光 顚曰 看看 後又問曰 軍國鞅掌 佛法省생要處乞師一言 顚良久 時三平爲侍者 乃敲禪牀三下 顚問 作甚麽 平曰 先以定動 後以智拔 愈曰 和上機峻 愈却於侍者處得箇入路 遂拜三平而退 愈嘗有三帖召顚云 ○愈啓 孟夏漸熱 惟道體安和 愈弊劣 無謂生事 貶官到此 久聞道德 竊思見顔色 昨到來 未獲參謁 已帖縣令 具舟奉迎 日久佇詹첨 愈白 ○愈啓 海上窮處 無以話言 側承高道 思獲披接 輒有咨屈 北旬晴明不甚熱 儻能乘閑一訪 實謂幸也 愈白 ○愈啓 慧勻至辱答問 珍悚無已 所示廣大深迥형 非造次可量 傳云 書不盡言 言不盡意 然則聖人之意 其終不可見邪 如此讀來一百遍 不如親面而對之 愈聞道無凝滯 行止拘縛 苟非所戀著 則山林閑寂與城隍無異 大顚師論甚宏博 而必守山林不至州郡 自激修行 獨立空曠無累之地者 非通道也 勞於一來 安于所識 道故如是 不宣 愈頓首 ○予嘗讀韓子與孟簡書 謂來袁州 留衣與大顚爲別 乃人之情 非崇信其法以求福田利益也 今觀禪錄 大顚侍者三平 擊禪牀以接韓 凡曰 先以定動 後以智拔 韓謂大顚曰 愈雖問道於師 而在此上人處得入 遂拜之 若其實有所證入 必不自欺自揜엄也 書稱大顚實能外形骸 以理自勝 韓旣知大顚之理勝己 是崇信其法而爲此言也 詳所答孟簡書 乃欲泯其信佛之迹而護其儒名耳 不然 以三帖招大顚 願見之 何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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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退之며 昌黎려 사람이다. 父는 仲卿이며 名位가 없었다. 愈는 출생한 지 三歲에 고아라 從父兄(四寸兄)에게 양육되었다. 어릴 적 刻苦하며 儒學을 배웠는데 獎勵(獎은 勸勉할 장. 勵는 권면할 려)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윽고 進士第에 登科했고 藩鎭賓佐의 관리(辟은 관리 벽)가 되었다. 발언이 眞率하여 畏避하는 바 없었으며 操行(志操와 行實)이 堅正하며 世務에 무뎠다. 여러 번 任官하더니 吏部侍郞에 이르렀으며 나이 五十七에 卒했다. 憲宗 元和十四年819 正月丁亥에 봉상 법문사의 佛骨을 맞이해 京師에 이르렀으며 禁中에 三日을 留置했다가 이에 諸寺에 보냈다. 王公과 士庶가 奔走하며 舍施(布施)했는데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愈가 佛骨論을 올려 극도로 그 폐단을 말하자 헌종의 분노가 심했다. 하루를 사이(間)하여 疏를 내어 宰臣(재상과 신하)에게 보이며 장차 極法을 가하려 하자 斐度 등이 諫言했다. 愈의 죄가 너무 무거워 이에 潮州刺史로 貶遷(貶은 덜 폄. 낮출 폄. 곧 벼슬을 降等하고 左遷시킴)됐다. 유가 潮陽에 이르러 上表했는데 그것을 간략히 이르자면 臣이 嶺海를 經涉하니 水陸이 萬里입니다. 州의 남쪽 세계는 漲海(漲은 넘칠 창)가 하늘에 닿았고 毒霧와 瘴氛(瘴은 풍토병 장. 氛은 기운 분)이 日夕으로 發作합니다. 臣이 어릴 적에 多病하여 나이 겨우 五十에 머리카락은 희고 이빨은 빠졌습니다. 다스려도 久長치 못할 것입니다. 홑으로 선 一身에다가 조정에 親黨도 없습니다. 蠻夷의 땅에 거주하며 도깨비(魑魅)와 무리가 되었습니다. 上이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袁州刺史에 除授했다. 禪錄의 諸書에 게재해 이르되 憲宗이 佛骨을 맞이해 禁中에 들였는데 靈感으로 發光했다. 百辟(辟은 관리 벽. 곧 모든 王侯 公卿 大夫 士)이 拜賀했지만 오직 유만이 단정히 섰다. 上이 묻되 무슨 까닭으로 예배하지 않는가. 유가 가로되 臣이 頃者(지난번)에 일찍이 불서를 보았는데 佛光은 靑黃 등의 모양이 아니라 했습니다. 이는 단지 神龍의 荷助(荷는 더할 하)의 光입니다. 上이 묻되 무엇이 이 佛光인가. 유가 대답으로 삼을 게 없었다. 다음날 드디어 佛骨論을 지어 上進하자 헌종이 자못 노해 愈를 潮州刺史로 貶遷했다. 유가 일찍이 詩가 있어 조카인 湘에게 보여 가로되 한 封書로 朝見현해서 九重(九重宮闕)의 천자에게 奏上했다가/ 저녁엔 潮州로 貶遷되니 길이 八千里로다/ 聖明(임금을 부르는 존칭)을 위해 폐단의 일을 제거하려 하면서/ 어찌 衰朽(老衰하고 老朽한 몸)를 가지고 殘年을 아끼리오./ 구름은 秦嶺에 가로 비꼈으니 집이 어디에 있으며/ 눈은 藍關을 擁圍해 말이 進前하지 않는구나/ 아노라 네가 멀리서 옴은 깊이 뜻이 있으니/ 좋이 漳江 가에서 내 뼈를 거두어라. 이미 潮州에 이르자 大顚禪師(石頭希遷의 法嗣. 靑原下二世)의 이름을 들었다.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이르지 않았다. 어느 날 대전이 특별히 가서 그를 뵈었다. 유가 가로되 세 번 청해도 오지 않더니 부르지도 않았거늘 어찌해서 왔습니까. 가로되 세 번 불러도 오지 않은 건 侍郞을 위함이며 부르지도 않았는데 온 건 佛光 때문입니다. 유가 가로되 무엇이 이 불광입니까. 顚이 가로되 보아라 보아라. 뒤에 또 물어 가로되 軍國(현재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 또 軍事가 정치의 중심으로 된 나라)이 鞅掌(鞅은 가쁠 앙. 곧 바쁘게 일하여 여가가 없는 것. 일이 많은 모양)하니 불법의 省要處(省은 덜 생)를 스님의 一言을 빕니다. 전이 良久했다. 때에 三平(義忠이니 大顚의 法嗣)이 侍者가 되었는데 곧 禪牀을 세 번 두드렸다. 전이 묻되 무엇하느냐. 平이 가로되 먼저 定으로써 움직이고 뒤에 智로써 뽑습니다(以上 二句는 涅槃經卷第三十一에 나옴). 유가 가로되 화상의 機가 험준해 유가 도리어 侍者處에서 이 入路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삼평에게 예배하고 물러났다. 유가 일찍이 三帖(帖은 문서 첩)이 있어 대전을 불렀으니 이르되 ○愈가 여쭙니다(啓) 초여름에 점차 더워지니 오직 道體가 安和하십시오. 유가 疲弊하고 庸劣(庸은 어리석을 용)해 生의 일을 이를 게 없습니다. 貶官되어 여기에 이르러 오래 도덕을 들었으며 가만히 안색을 뵙기를 생각했습니다. 昨今(근래. 요즈음)에 도래하여 參謁함을 얻지 못했으나 이미 縣令에게 帖子(案內狀 같은 것임)를 보내어 배를 갖추어 奉迎케 했으나 날이 오래도록 佇詹(佇는 오래 설 저. 詹은 볼 첨. 살필 첨. 곧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서 봄)했습니다. 유가 아룁니다. ○愈가 여쭙니다. 海上의 窮僻(僻은 궁벽할 벽)한 곳이라 대화로 쓸 말이 없습니다. 높은 도덕을 절실하게(側은 절실하게 느끼는 모양 측) 承聞하고 열어 접수함을 얻기를 생각하면서 곧 咨屈(咨는 꾀할 자. 屈은 邀請. 곧 요청을 꾀함)이 있었습니다. 北旬은 晴明하여 심하게 덥지 않으니 바라건대(儻은 或許 당. 바랄 당) 능히 한가함에 편승해 한 번 방문하신다면 실로 다행이라 이를 것입니다. 유가 아룁니다. ○愈가 여쭙니다. 慧勻이 이르러 答問을 욕되게 해 진기하게 여기며 悚懼하여 말지 않습니다. 보이신 바는 광대하고 深迥(迥은 멀 형. 곧 深遠)하여 造次(造次間이니 얼마 안되는 짧은 시간)에도 가히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傳에 이르되 書는 言을 다하지 못하고 言은 意를 다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러한 즉 성인의 뜻은 그 마침내 가히 보지 못하는 걸까요. 이와 같이 읽음이 一百遍(遍은 量詞)이라도 얼굴을 가까이하여 상대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유가 듣기로 도는 凝滯가 없으나 行止에 拘縛된다 하니 진실로(苟) 戀著하는 바가 아니라면 곧 山林의 閑寂이 城隍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大顚 스님의 論은 매우 宏博하니 반드시 산림을 지키고 州郡에 이르지 않고 스스로 격려하며 수행하여 空曠의 無累의 땅에 독립하는 분이라고 한다면 도를 통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수고롭게 한 번 오시어 所識(한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을 편안히 해 주시더라도 도가 의구히 이와 같을 것입니다. 不宣(편지 끝에 쓰는 말. 다 말하지 못한다는 뜻)합니다. 유가 頓首(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함)합니다. ○내가(善卿) 일찍이 韓子(韓愈)가 孟簡에게 준 글을 읽었는데 이르기를 袁州에 와서 옷을 머물러 둬서 大顚과 헤어짐을 삼았다 하니 곧 사람의 情이지 그 법을 崇信하여 福田의 이익을 求함이 아니었다. 이제 선록을 보매 대전의 시자 삼평이 선상을 때려 한유을 접인하면서 무릇 가로되 먼저 定으로써 움직이고 뒤에 智로써 뽑는다 하매 한유가 대전에게 일러 가로되 유가 비록 스님에게 도를 물었으나 이 上人의 곳에서 得入해 있다 하고는 드디어 그에게 예배했다 하니 만약 그가 실로 證入한 바가 있다면 반드시 스스로 속이거나 스스로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書에서 일컫기를 대전은 실로 능히 形骸를 밖으로 하고 이치로써 승리한다 하였거늘 한유가 이미 대전의 이론이 자기에게 이긴 줄 알았다면 이는 그 법을 崇信하여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맹간에게 답한 바 書를 詳考하건대 곧 그 信佛한 흔적을 없애고 그 儒名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三帖으로써 대전을 초빙해 그를 보기를 원한 건 어찌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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